그녀가 66년생이니까 올해로 불혹의 나이가 되었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건 94년 가을이었다. 둥글고 까만 뿔테 안경을 쓴 짧은 커트 머리를 한 채 얼굴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오는 불빛의 따뜻함을'(산속에서)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따뜻하고 순수하며 생에 대한 안타까움보다 연민과 사랑을 품고 있었다. 젊고 생동감 넘치는 20대였기 때문일까? 진명여고 국어교사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그녀를 두번째로 만난것은 2001년 봄이었다. 7년이 흐르는 동안 나도 그녀처럼 국어교사 되어 있었다. 네번째 시집으로 만난 그녀는 이제 나이가 들었다. 시가 탄력을 잃었다는 말이 아니다. 관점에 깊이가 더해졌다. 물론 시대도 변했다. '어두워진다는 것'에서 유성호는 '내가 아는 희덕은 그만큼 감성적일 때보다는 논리적일 때, 그리고 자기 표현적일 때보다는 자기 반성적일 때 더 투명하고 깊은 사람이다'라고 서평에 적고 있다. 논리적이고 반성적인 감각이 그녀의 진정한 미덕일까? 그리고 그녀의 다섯번째 시집으로 그녀를 세번째 만나다. '나희덕 시 세계의 진정한 장점은 구체적인 감각적 이미지의 현실성에 기초한 간명하고도 절제된 언어적 형식에 있는 듯 싶다'(김진수)라고 시집 서평에 적고 있다. 그리고 창비에서 문지로 출판사가 바뀌었고 약력에 보니 조선대 문창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녀의 외형적 조건들이 인식의 틀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다. 사소한 조건들, 예컨데 시인의 나이와 직장, 가정 생활의 변화 등이 시에 미치는 영향은 적지 않다. 소설보다 훨씬 더 사적이고 감각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물론 객관화된 인식과 논리적 힘이 결여된 시를 읽을 사람도 없겠지만 관념 속에 허우적대거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는 이성의 영역으로 함몰될 위험을 배제할 수도 없다. 순수시의 죽음을 선포할만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오랫만에 만난 그녀의 모습을 나는 씁쓸하게 바라본다. 시의 역할과 소명을 논하자는 것은 아니다. 이미지가 감각적일 지는 모르나 현실성에 기초했다고 보기엔 그 의미와 영역이 너무나 협소하다. 어쩌면 사적 경험의 객관화가 시의 본질이 아닐지도 모르겠으나 논리의 모순보다도 더 위험한 감동의 위축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땅 속의 꽃 땅 속에서만 꽃을 피우는 난초가 있다 땅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없기 때문에 본 사람이 드물다 한다 가을비에 흙이 갈라진 틈으로 향기를 맡고 찾아온 흰개미들만이 그 꽃에 들 수 있다 빛에 드러나는 순간 말라버리는 난초와 빛을 피해 흙을 파고드는 흰개미, 어두운 결사에도 불구하고 두 몸은 희디희다 현상되지 않은 필름처럼 끝내 지상으로 떠오르지 않는 온몸이 뿌리로만 이루어진 꽃조차 숨은 뿌리인 이 시집의 마지막 시를 보며 그래도 그녀와의 다음 만남을 기약한다. '사라진 손바닥'이 '꽃조차 숨은 뿌리'가 되었기 때문이며, 땅 속에 숨은 꽃조차 꽃은 아름답다는 당연한 명제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