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좋아하는 창비시선 26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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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평생을 같은 일에 몰두해도 행복한 일이 있다면 좋겠다. 한 번도 고개 돌리지 않고 푹 파묻혀 뒤돌아보지 않고 한 우물만 파보아도 좋겠다. 하지만 프루스트의 ‘가지 않은 길’처럼 두 갈래 길에서 항상 선택의 고민과 갈등에 망설이게 된다. 시간이 흐른 후에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이 남게 마련이다. 19년 만에 시집을 펴내는 시인의 마음을 짐작해 본다. 시의 길을 걸으며 내쳐 달려오지 않았어도, 먼 길을 돌아 왔어도 시집 한 권 펴내는 일이 어려울 수 있지만 김사인의 <가만히 좋아하는>을 읽는 동안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시 외적인 이야기가 호기심보다 시에 담긴 마음들이 눅눅하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비맞지 않고도 장마철에 습기를 머금은 장판처럼 쭈글쭈글한 마음의 켜들이 보인다. 어떤 형태로든 시간은 흘러가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고 바라볼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이다. 바람처럼 흘러가는 마음 한 구석 어디로 보낼 것인지, 무엇 때문에 그리로 흘러가는지 굳이 묻지 않고 따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시인의 마음은 아닐는지.

 사소한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는 시들은 아름답게 독자의 마음을 적신다. 슬픔과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시의 본령에 충실하다. 빠른 것 보다 느린 것에, 큰 것 보다 작은 것에 마음이 쓰이는 김사인의 시들은 읽는 동안 현실 속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죽음과 사랑, 일상과 기억으로 점철된 시의 편린들은 독자를 우울하게 한다. 이수익의 ‘우울한 샹송’과는 또 다른 의미의 애잔함이다.

깊이 묻다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 속에 숨 쉬고 있는 텅 빈 바다 하나씩에 대해 말한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는 정현종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단편이다. 시집의 대표작과는 거리가 멀지만 <가만히 좋아하는> 마음이 전해진다.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아니라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구체적 표현들이 잔잔하게 끓어오른다. 애매하고 공허한 구절들보다 스치고 지나기 쉬운 것들에 대한 반 박자 느린 템포. 이 시집은 그렇게 사람들을 가만히 있게 만든다. 가만히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지나간 시간들에 대해 천천히 고개를 돌리게 한다.


070205-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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