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를 기르다
윤대녕 지음 / 창비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꼭 20년만에 사랑니를 또 하나 뺐다. 고등학교 다닐 때 였으니 그 고통과 통증이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또 뽑을 용기를 냈다. 인간의 기억은 그만큼 간사하다. 지나간 시간들을 지워버리는 화학물질을 분비하지 못하는 순간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은 현재이다가 과거였다가 미래일 것이다. 그 오래된 미래 속을 헤매는 것이 우리들의 비루한 삶이다. 날카롭게 자른 생의 단면들을 보여주면서 어쩌자는 것일까? 소설은 보여주기만 할 뿐 답은 없다. 미처 바라보지 못한 부분들과 구석구석을 헤집어 보여주는 소설은 흥미롭다. 늘 바라보는 대상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혹은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소설은 새롭다. 그렇다면 윤대녕의 소설은 무엇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까? 

  아주 오랫동안 그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물에 대한 기억 같은 것들이다. 보이지도 않고 투명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어떤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만져지지 않으니 느낄 수 없고 보이지 않으니 인식될 수도 없다. 그런데 뭔가 있다.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내가 윤대녕의 소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바로 이런 느낌이다. 정지화면에 작은 돌멩이를 던질 때 생기는 파문.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에는 여덟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긴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지켜온 그의 무늬와 빛깔들이 느껴지기도 하고 새로움에 대한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이 소설집에서도 작가는 여전히 특별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많은 것들을 길어올린다. 소설이 되지 않을 것들을 소설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단편 ‘못구멍’은 서사 구조가 뻔하다. 아내의 침대 머리맡에 적어 놓은 몇 줄의 글귀가 산다는 것의 의미를, 사랑의 의미를 환기 시키는 역할을 하지만 반전의 효과는 미미하다. 이런 구절들을 살펴보자. 

타인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 P. 227 ‘못구멍’중에서 

남녀가 웬만큼 나이를 먹게 되면 관계에 속도가 생기게 마련이다. 사소한 절차는 서로 비껴가는 일종의 지혜를 터득한다고나 할까. 아니면 좀 더 담백해진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 P. 237 ‘못구멍’중에서

 설혹 사과를 하더라도 두고두고 잊어버려지지 않는 일이라는 게 있다. - P. 246 ‘못구멍’중에서

  책, 특히 소설을 읽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도 주관을 개입시킨다. 내가 살아온 경험과 내 정서를 대변해 줄 수 있는 부분들에 밑줄을 그어본다. 아직도 소설에 줄을 그어가며 읽느냐고? 그래, 그렇다. 윤대녕의 소설은 이렇게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많다는 데 특징이 있다. 전달하는 방식의 새로움이든 문체의 특징이든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큰 울림과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느냐가 문제가 아닐까? 결국 소설은 인생에 대해 그저 한 번쯤 고개를 주억거리게 하면 된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아직도 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가장 많이 부딪히는 문제는 사랑과 죽음이다. 너무 진부해서 다루기 곤란할 것 같지만 이 문제를 빼고 나면 문학은 개점 휴업 선언을 해야한다. ‘연’과 ‘못구멍’, ‘마루 밑 이야기’는 사랑에, ‘낙타주머니’와 ‘편백나무숲 쪽으로’, ‘고래등’은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제비를 기르다’와 ‘탱자’는 두 가지가 섞여있다. 거칠게 나누었지만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내용이 아니라 소리와 빛깔에 주목해야하는 것이 소설이기 때문에 행간에 숨은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무슨 수학책이나 이론서적도 아닌데 숨은 그림 찾기를 할 필요는 없다. 느껴지지 않는다면 안 느끼면 된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볼 만하다.  

작년 봄 강화도에 갔을 때 가능포들에 몰려와 있던 제비떼를 본 순간 영혼을 잃어버렸다고 문희는 눈시울을 글썽이며 말했다. 그날부터 하늘에서 길을 잃은 철새처럼 방황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 P. 70 ‘제비를 기르다’ 중에서

 따지고 보면 사랑한다는 말처럼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말도 없잖아요. 그 말은 상대의 모든 걸 원한다는 뜻이니까요. 사실 모든 건 안되죠. - P.81 ‘제비를 기르다’ 중에서

  문희에게 다가왔던 생의 한 순간.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설명하는 작가의 목소리와 문희가 직접 사랑에 대해 말하는 부분이다. 숱한 사랑을 전달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온 한 사람이 있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며 돌아보는 인생은 어떨까? 작가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갖는 기대와 희망의 대부분은 알고 보면 타인에게 애써 요구하고 있는 것들이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상대를 객관적인 타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냉정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 P. 186 ‘고래등’중에서

 삶은 뜻하지 않은 각도로 사람을 바꿔놓는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계기로 작용해 생의 전모를 바꿔놓는 수가 종종 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삶의 원리이자 저마다 이면에 감춰진 속박이자 굴레이기도 하다. - P. 187 ‘고래등’중에서

  결국 사람은 태어나서 사랑하고 돈에 목숨 걸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가장 단순하게 인생을 정리하면 그러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삶에는 여자의 내부처럼 함부로 열어보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하지만 결국은 누구나 열어보게 돼 있다. 이유야 어떻든. 한데 열지 말 것을 열게 되면 대개 뜻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그 안에서 튀어나온다. - P. 212 ‘낙타 주머니’중에서

마음에 어떤 일이 생기면 그것이 곧 몸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몸과 마음은 자웅동체로 결국 하나이기 때문이다. - P. 216 ‘낙타 주머니’중에서

마음이 가난했으므로 피워야만 했다. - P. 217 ‘낙타 주머니’중에서

 열어보지 말아햐 할 판도라의 상자가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아니 공감한다. 작가는 ‘낙타주머니’를 통해 생의 비애 혹은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그것은 우리들 생의 굴레일 뿐이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부분들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것이든 아니든 생의 다양한 부분들을 헤집고 들여다 보고 때로는 우울과 희망을 버무려 놓아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생이라면.

 뚜렷한 기억 속에 정확한 연도와 날짜와 시간을 적는 방법은 독자들에게 과거를 확인시키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생을 증거하는 다른 방식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기억속에서 끄집어 내는 이야기 방식과 캐릭터와 맞지 않는 대화들은 비현실적일 때가 있다. 상황에 맞는 인물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을 대신 뱉어내는 앵무새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허공에 발딛고 서 있는 듯한 인물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특별한 직업과 생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말하기 방식 때문이다. 작가의 많은 소설 속에서 보여 주었듯이 불친절하게 던져주는 희망과 삶에 대한 인식은 찰나적이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사회적인 관심이나 거시적인 담론들을 다루고 싶지 않을 리 없겠지만 나이가 들어간다고 해서 역사와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주제로 내세워 작가의 대표작이나 특별한 작업에 매달리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아직도 써야할 시간이 더 많이 남아 있는 작가의 미래를 짐작하기 보다는 기다리며 즐기는 것이 독자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070131-0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