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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 - 다치바나 다카시의 암과 생명에 관한 지적 탐구
다치바나 다카시.NHK스페셜 취재팀 지음, 이규원 옮김, 명승권 감수 / 청어람미디어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살고 싶은 생각이 있는지 시험을 당하고 있다.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병이 내 앞을 가로막고 들이밀며 묻는다. 살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강하냐고.
-p.131 <방송인 치쿠시 데츠야 폐암 투병 중 메모>
병원 생활 이 주 동안의 풍경은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갈라 놓는 차광막을 쳤다. 가족이 아파서 치료를 받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들 앞에서 참으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생각들이 밀려왔다. 입원하며 관리를 받아야 하는 만성질환으로 고통받는 그들은 환자복을 입고 닝겔 거치대를 밀며 병실 복도를 산책하는 것이 운동이자 유일한 외출이자 소통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어딘가를 응시하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모호한 그 모습들 속에 미래의 가족, 나를 훔쳐보고 움찔했다. 산다는 것이 이다지도 간절하고 흉포한 것일까. 살고 싶다. 살리고 싶다. 다 같이 살아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됐다. 가장 단순해지는 것은 결국 생존 앞이다.
"암에 걸렸다, 암으로 투병 중이다, 암으로 죽었다, 암환자를 간호 중이다"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현대인에게 암은 익숙하다. 나이들어 가는 것과 암과의 거리는 너무나 가깝다. 언론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암 정복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제시하건만 과연 우리는 암의 완치를 향해 내딛고 있는 것인지 모호하고 의심스럽기만 하다. 분명 그 분은 암을 치료하기 위하여 힘든 수술을 하고 항암요법, 방사선치료를 받았건만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져 가다 힘들게 가셨다. 대체 암은 무엇이고 왜 이다지도 인간을 괴롭히고 인간의 자유 의지를 무력화시키는 것일까.
이 책은 그러한 질문들을, 그러한 의심들을 명료하게 걸러내어 준다. 답을 주는 대신 질문하고 의심하고 회의한다. 저자 다치바나 다카시는 NHK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다치바나 다카시의 암, 생과 사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 프로그램에 관련된 제작 의도, 제작 과정 등에 대한 서술과 더불어 실제 자신의 방광암 투병기를 통하여 암의 본질에 대한 탐사를 시도한다. 실제 다큐를 보지 못한 아쉬움을 충분히 달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고 친절한 책이다.
암이란 무엇인가
암은 세포의 병입니다. 정상 세포가 미쳐 버려 무한 증식 능력을 가진 암세포가 되는 병입니다. 정상 세포는 태어났다가 죽어가는 과정을 거듭하는 유한한 수명을 가진 세포인데, 암세포는 죽지 않습니다. 불사의 세포입니다.
-P.33
암은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이 아니다. 인간 몸을 이루는 60조 개의 세포가 복제를 거듭하며 생명을 이어가는 동안 생긴 오류에 의한 변이의 축적으로 내 몸 안에서 일어나는 불온한 일이다. 내 몸 안에서 일어난 이 일을 깨끗하게 지워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환상이다. 저자도 전문가들도 암정복이 우리 세대에서 가능한 일인지에 회의한다.
의학은 아직 암 극복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암에 관하여 제일 먼저 알아야 할 사실입니다.
P.99
그렇다면 정상 세포의 손상까지 각오하며 받는 항암치료에 대한 의구심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애초 항암제는 독가스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항암제가 효과를 발휘하는 암은 소수이며, 환자가 바랄 수 있는 것은 약간의 연명 효과와 증상 완화에 불과하다는 절망적인 얘기는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암 정복을 위해 경로 전체를 파악하려는 암게놈프로젝트가 진행중이긴 하지만 아직 장님 코끼리 더듬기 정도라고 한다. "암유전자를 최초로 발견한 와인버거 교수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암을 낳는다. 암은 다세포 생물의 숙명'이라고 말한다."(인용) 이 책은 인간의 숙명에 가 닿는다. 우리는 그 간단 명료하지만 직시하고 싶지 않은 진실, "인간은 아파 죽는다"는 명제와 또 만나고 만다. 머리로는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당사자가 되기도 싫고 가족도 되고 싶지 않기에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한계를 정작 이 책에서는 아프도록 절감해야 한다. 생의 본질은 때로 무력함에 닿아 있다.
그렇다. 이제는 이러한 다큐를 만들었던 저자까지 중기 이후의 암에 걸려 투병하는 모습을 봐야 한다. 첩첩산중이다. 마음은 한없이 무겁지만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도 하나하나 관찰하고 기록하고 전달하며 자신이 천착했던 문제의 핵심에 가 닿으려는 그 간절한 노력에 우리는 저릿한 마음을 누르고 다가가야 한다. 절망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고 담담하게 자신의 수술 과정까지 증언하는 모습은 건조한데 깊은 곳에서 공명한다. 수술대 위에 누워서까지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리고 그 정상적이지 않은 세포의 발작을 제어하려는 인간의 시도와 노력을 명징하게 인식하고 얘기하는 대목. 그리고 그는 가차없이 인정하고 말한다. 암의 재발확률에 대하여.
그렇다면 이 책은 절망과 체념에 관한 것일까. 살면서 우리는 몸 속에서 저도 모르게 일어나는 오류들마저 그러안고 잠식당하며 견뎌야 하는 걸까. 외부와 내부에 모두 속수무책으로 좌지우지당하면서도 남고야 마는 것이 있기는 하는 걸까.
암의 최대 무기는 오랜 진화의 역사상 가장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 자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에 맞서는 우리의 무기는 진화의 오랜 역사가 낳은 두뇌이며, 그 두뇌가 주는 우리의 불굴의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암이 제 아무리 강인하다 해도 그것을 기필코 극복해 내고야 마는 우리의 강한 의지, 이것이 암에 맞서는 인간의 최대 무기라고 봅니다. 그리하여, 시간은 걸리겠지만 암은 반드시 극복될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
-p.167
반드시 극복될 거라 믿는 그 의지가 왜 이리 서글프게 들리는 걸까. 영생을 갈구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지만 인간의 존엄을 무너뜨리며 종착점에 가 닿게 하는 암이라는 질병 앞에서 그 의지가 제발 무력하게 패배하지 않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