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소로스의 책들은 서점에선 돈불리는 기술서(저는 재태크란 단어를 안 씁니다)나 자기 계발서 쪽에 꽂혀 있습니다.하지만 그는 돈만 밝히는 투기자본가는 아니지요.제가 그를 다시 본 것은 그가 김대중 정부 초기 방한했을 때 칼 폴라니의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을 읽고 있다는 인터뷰 기사를 본 뒤였습니다.제가 폴라니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한 때였지만 폴라니가 자유방임 시장주의자들을 굉장히 싫어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거든요.꽤 호기심이 났습니다.그 후 2004년에 탄핵안이 가결될 무렵 정치와 법치 문제에 대해 이런 저런 책을 보고 있는데 소로스가 정치적 무관심에 관해 몇마디 한 것이 신문에 났습니다.그에 의하면 요즘의 정치적 무관심은 유권자들이 자기들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느냐 하는 문제와 무관하면 정치건 뭐건 공공선의 문제엔 전혀 무관심한 사고방식에서 비롯되었다는 겁니다.그리고 그런 정치적 무관심을 호도하기 위해 정치가들이 부패했다는 등의 핑계를 댄다는 거죠.정치가 부패했기 때문에 정치적 무관심이 생긴 게 아니라 유권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무관심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치인들의 부패를 들먹인다는 주장이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 같구요.소로스가 거액의 기부금을 내는 사람 중 한 사람이며 해외원조 등에도 관심이 많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의 글을 한 번 읽어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 한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경제논객들의 글을 신동아를 통해 죽 읽어보았습니다.공병호,강수돌,박태견,정운영,복거일,유시민,김민웅의 글들이죠.김민웅 씨에 대해선 왜 그가 경제논객인가 하고 반론할 분도 계시겠지만 세계 정치와 경제,특히 국제금융의 흐름 등에 관해선 상당히 깊은 식견을 가진 논객이라는 정도만 밝혀둡니다.원로인사 중엔 최근 뉴라이트 경제학을 비판한 주종환 씨의 젊은 시절 글도 읽었습니다.그런데 읽다 보면 자유방임 주의자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 좍 갈라져서 분류하기엔 좋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공병호,복거일이 전자요,나머지는 후자이죠.유시민씨는 재벌은 비판하지만 무역이론은 비교우위론에도 살짝 한 발을 담그고 있구나 하는 정도로 이해해도 될 듯했습니다.그런데 소로스는 참으로 독특했습니다.며칠 전 신동아 목록을 이리저리 보다가 1997년 3월호에 소로스 글이 있어서 책꽂이에서 찾아보니 이 글이 걸물입디다.제목은 <열린 사회로의 진보를 방해하는 자본가들의 위협>.원문은 The Atlanric Monthly1997년 2월호입니다.
소로스 재단의 명칭이 열린사회 재단입니다.그가 칼 포퍼 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지요.당연히 사상의 자유를 허용하고 무슨 이론이든지 자신이 절대적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고방식이 중요하다고 합니다.또 늘 열린자세로 자신의 오류를 고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바람직한 열린사회의 구성원이라는 믿음를 갖고 있다고 소로스는 고백합니다.닫힌 사회는 독단적이고 절대진리를 주장하는 이론이 지배하는 사회라면서 공산국가나 파시즘 국가를그 예로 듭니다.그래서 그는 그의 재단이 공산권 붕괴에도 관여했다고 고백합니다.그런데 이제 소련 및 동구 공산주의가 무너진 지금 여전히 열린사회는 그 곳에 정착하진 못한 데다가 오히려 열린 사회를 위협하는 또다른 상대가 나타났으니 그들이 극단적인 자유방임 주의자라는 겁니다.이들은 자기 자신의 이론이 절대적 진리라고 버티는 자세가 예전 전체주의 국가의 논리와 비슷하다는 거죠.소로스는 이들의 이데올로기의 근거 자체가 잘 못되어 있다고 비판하는데 마치 맑스 경제학자나 급진 경제학자들처럼 이야기합니다.다음은 그의 비판의 주요 내용입니다.
1.수요와 공급이 자연적으로 균형을 이룰 것이라는 완전 경쟁이론이 잘못되었다.특히 금융시장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가격이 균형상태를 이룬다기보다는 구매자와 판매자의 기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동하기 때문이다.이래서 금융시장은 불안정해지기 마련인데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이를 부인할뿐만 아니라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정부의 어떤 개입도 반대한다.
2.역사적으로 금융시장의 붕괴는 경제불황과 사회불안을 일으켰다.이래서 중앙은행이 생겼고 다양한 규제가 생겼다.그런데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이런 붕괴가 불안정한 시장 때문이 아니라 정부의 규제 때문에 생겼다고 주장한다.
3.자유 방임주의자들은 수요와 공급의 조건들이 이미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정부개입을 절대악으로 선언함으로써 소득 재분배 문제를 배제했다.부익부 빈익빈이 심해지면 불평불만을 참을 수 없는 이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이를 어찌 감당하겠는가.
4.소득재분배를 반대하는 논거로 자유방임주의자들은 적자 생존설을 들고 나온다.그러나 부는 상속을 통해 이전되면 2세대가 1세대만큼 적응하기 힘들다는 사실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적자 생존설이나 사회진화론은 마치 경제학의 균형이론이 뉴턴의 물리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처럼 낡은 진화론에 기초하고 있다.세상은 적자생존이 아니라 건전한 협력이 중요하다.
5.자유방임주의와 사회진화론에 기반한 국제사회는 개별국가간에 무한경쟁을 유도한다.자국이익의 무제한적 추구가 국제사회의 균형을 가져오겠는가.
6.성공이 곧 정의는 아니다. 성공숭배는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떨어뜨린다.열린 사회에선 이런 숭배는 불안의 원인이 된다.돈으로 대표되는 성공에 우리 자신을 함몰함으로써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시키게 되는 것이다.
칼 폴라니는 파시즘이나 공산주의를 반대헀지만 그에 못지 않게 경제제일주의의 자유방임주의에 반대했습니다.그리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기 월급의 대부분을 쏟아부은 적도 있지요.하지만 결국 그는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습니다.폴라니도 소로스도 헝가리 출신입니다.소로스는 폴라니가 못다 이룬 꿈을 자기가 이루겠다고 결심한 걸까요.열린 사회의 적이라면서 공산권을 무너뜨리는 데는 소로스가 성공했습니다.또다른 적인 시장만능주의에 맞서서는 어떤 대책을 세울까요.
1997년 말 아시아의 외환위기가 닥칠 때 더 큰 위기가 닥치기 전에 국제금융체제를 개혁하고 IMF_IBRD체제를 재편성하자고 하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하지만 이런 주장은 무시당하고 이제 아시아 경제위기가 아니라 전세계에 금융위기가 닥쳤습니다.그리고 그 진원지는 미국이고...며칠 전 미국 하원 청문회에는 경제 대통령이라는 앨런 그린스펀이 나와서 신자유주의가 금융위기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음을 마지 못해 인정을 했습니다.(심지어 이명박 대통령도 새로운 브레튼 우즈 체제가 필요하다고 언급했지요).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 형국이지만 소는 잃었어도 외양간만은 고쳐놓는 지혜가 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