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줄에 한자가 빽빽한 헌 책을 읽는 맛도 각별합니다만, 헌 책 읽는 또 하나의 매력은 지금은 고인이 된 이들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또 잡지 같은 경우는 이젠 노인이 된 이들의 젊었을 때 모습을 화보를 통해 볼 수 있다는 재미도 있지요.헌 책 속에서 옛날 배우들의 모습이 담긴 엽서사진이 툭 떨어지기도 합니다.김자옥 씨의 20대 모습도 있고 최재성 씨의 청춘 시절 모습도 있지요.
1985년 신동아 4월호부터 화보나 기사에 나오기 시작한 이민우 씨는 당시 대단히 각광 받던 정치인이었죠.이 해 2월 총선에선 신민당이 제 1야당이 되고 그 당수인 이민우 씨가 의원직을 얻으면서 사람들의 화제를 모읍니다.그는 대한민국 정치 1번지라는 종로에서 당선되었는데 당시는 중선거구라서 민정당의 이종찬 씨와 동반당선되었죠.이때 민한당으로 나온 정대철 씨는 3위로 낙선.흑백사진을 보니 당시 유세중인 정대철 씨가 정말 젊군요.1944년 생이니 40대 초반 아닙니까? 요즘 뉴스화면에 가끔 나오는 정대철 씨는 많이 늙었더군요.그와 거의 같은 또래인 가수 남진(1945년 생) 씨는 요즘도 50대 초반 같던데...
1987년 초엔 우리나라 정당사상 또 한번의 돌풍이 일어나죠.신민당이 분당해서 양 김 씨가 주도한 통일민주당으로 거의 흡수됩니다.이 일이 있기 직전 이민우 파동이 있었죠.이 당시 이민우 구상이라는 게 한국정계에 엄청난 폭풍을 몰고 옵니다.당시 미국정부가 이민우를 지지한다는 소문도 있었고 해서 이민우 씨의 위세가 대단했죠.이민우 구상을 만든 정치인이 그의 최측근인 홍사덕 씨입니다.물론 이 구상은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리고 이민우 씨는 사실상 정계에서 몰락해 버리죠.지금부터 20여년 전 화보를 보니 홍사덕 씨가 참 미남입니다.홍 씨는 이후 김대중 후보 선거 대변인도 하고 한나라당으로 옮기기도 하는 등 변신을 거듭하지요.
고인이 된 이들의 모습도 보입니다.신동아엔 말년의 함석헌 선생의 인터뷰와 대담이 있습니다.1983년 10월호엔 소설가 최일남 씨가 인터뷰한 글이 있죠.그 제목이 <백성들의 기개를 길러 줘야 해>입니다.1985년 8월호엔 광복절 특집으로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 일본사 교수 존 하우스와의 대담이 있습니다.이 대담에서 함선생이 좋아하는 우치무라 간조에 대한 회상이 눈에 띄네요.우치무라가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에 점점 반기를 드는 사연에 대한 이야기가 구수하고 재미있습니다.1989년 함선생이 타계했을 땐 <바보새 가다>는 특집이 실렸죠.함선생은 생전에 바보새와 자신을 비교하기를 즐겼습니다.이 바보새는 신천옹,꼬부랑 말로 알바트로스라고 하는 엄청나게 큰 바다새입니다.우치무라 간조의 신구약 주석서는 올해 헌책방에 나왔는데 제가 정말 사고 싶었어요.하지만 우물우물하는 사이 지난 달 누가 사가고 말았네요.
신동아는 80년대에 서독의 슈피겔 지와 특약을 맺고 좋은 글을 번역해서 실었죠.당시 슈피겔 주간인 아욱슈타인은 좌익에 가까왔죠.제가 읽은 연재물 중 제일 도움이 되었던 것은 1986년 9월 10월호 연속으로 실린 <스페인 내전>이었습니다.독일인이 쓴 스페인 내전에 관한 글은 처음이었죠.나중에 빌리 브란트 회고록에도 스페인 내전 참가한 기록이 있다는 것을 알고 헌책방에서 구입한 기억이 납니다.슈피겔 지의 스페인 내전은 특히 국제여단의 영웅담이 재미있었고 소련에서 온 정치위원들이 트로츠키파와 아나키스트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한 이야기도 자세했습니다(이때 조지오웰이 투옥되지요. 동지라고 믿었던 스탈린주의자들에게).또 하나 재밌는 것은 저자가 프랑코 군을 도우러 온 히틀러 군과 무솔리니 군 을 비교하면서 독일군을 은근히 칭찬하는 투로 썼다는 겁니다.물론 저자는 공화파를 편드는 논조입니다마는 독일인이라서 독일군이 용감했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었을까요?
기행문도 재미있는 것이 많습니다.맛집이나 찾고 호텔 종업원이 어디가 이쁘니 어쩌니 하는 기행문이 아니라 수준 높은 역사기행이죠.80년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언론계와 학계에서 해직된 이들 중 이런 기행문으로 원고료를 번 이들이 있었습니다.지금은 강경한 우익발언을 서슴치 않는 김동길 씨도 이 당시 해직교수로써 글을 썼죠.83-84년 연재된 글을 보니 민주주의에 투철한 신념이 살아있는 글이라서 묘한 느낌이 듭니다.박권상 씨도 해직언론인으로 서구 민주주의 기행을 그 무렵에 연재했죠.김동길 씨보다 더 오래 연재했습니다.스페인 내전 공부할 때 앞에 소개한 슈피겔 지의 연재물과 박권상 씨의 스페인 기행에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요즘 방송통신위원장으로 세간에 많이 오르내리는 최시중 씨가 동아일보 기자 시절에 쓴 김성수 전기가 1985년 경 신동아 속 광고지에 소개되어 있군요.인촌 김성수는 민족운동을 했느냐 친일파냐 하는 논란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만 동아일보 사장 출신이라서 송진우와 함께 동아일보에서 전기가 몇 권 나왔죠.최시중 씨가 유명해지기 전엔 잘 몰랐는데 올해 들어서 80년대 중반 신동아 광고란에서 최시중 씨의 책을 만나니 새삼스럽습니다.독도 문제가 화제가 되면 반드시 등장하는 신용하 씨가 김성수의 교육운동이 항일운동이라고 주장한 논문은 80년대 후반 신동아에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지금은 민주당 의원인 이낙연 씨가 동아일보 기자 시절, 정치에 관해 쓴 기사도 보이네요.
가끔 옛 시사월간지나 시사 주간지를 읽다 보면 지금은 노인이 된 이들의 젊은 시절 모습,고인이 된 이들의 전성기 때 모습을 볼 때마다 음...이런 시절이 있었지...하는 생각이 듭니다.정치인이나 지식인들,특히 지금은 한나라당이나 뉴라이트 쪽에 가 있는 이들의 재야시절 글을 읽을 때마다 그 필자이름을 다시 확인할 때가 있습니다.그땐 정말 급진주의자 같았는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