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저것 책을 읽는 편이지만 지금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습니다.다음의 질문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1,노예에게 자비롭게 대하지만 정작 노예해방은 반대하는 노예주와, 노예해방의 열렬한 투사이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흑인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나이...누가 더 나쁜가요? 

2.열렬한 페미니스트이지만 정작 자기 올케에겐 철저하게 못된 시누이 노릇하면서 가부장제적인 횡포를 부리는 여인과, 올케에게 따뜻하게 대하면서도  가족법 개정 등에는 반대하면서 보수적인 운동을 하는 여인...누가 더 나쁜가요? 

3.정당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부당한 수단을 쓰는 자와 부당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당한 수단을 쓰는 자...누가 더 나쁜가요? 

4.구조적 폭력의 희생자와 혁명적 폭력의 희생자...어느 쪽의 희생자 수가 더 많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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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2-25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너무 어렵군요. -_- 2번과 같은 현실을 목격하거나 경험할 때가 종종 있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일 수 있는데, 갑자기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한 분이 인터뷰에서였는지, 책에서였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말을 한 게 생각나요. (정확한 문장은 아닌데) "저는 평화를 사랑하지만, K1이나 격투기를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데서 어떤 '모순감'을 느낀다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모두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개개인마다 조금씩 그 선언의 이유는 다를 수 있죠. 그래서 저는 이게 모순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데, 그 섬세한 이유들을 비켜나가 덩어리로 볼 때는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6 00:17   좋아요 0 | URL
2번은 일상생활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제 친구는 명절날 처가집에 갔는데 늘 남녀 평등을 강조하던 아내가 얼마나 못되게 시누이 노릇을 하던지 한마디 했다가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운동경기는 싸움이나 폭력은 아니라고 하면 될까요? 예를 들어 복싱이나 격투기에서 두 선수가 감정이 격해져서 시합이 아니라 거의 싸움까지 하게 되면 심판은 경기를 중지시키고 두 선수에게 주의를 주지요.분명히 일정한 규칙을 지키고 싸우는 게 운동이니까요.

비로그인 2009-02-2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어려운 질문이네요. 당장에 답을 못하더라도 자신이 이 질문이 묻는 곳에 서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전 그게 긴장이라고 생각해요. 학교 교육 현장에서도 이런 질문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이런 질문을 통해 미리 그 입장이 돼보면 훗날 질문의 의미를 현실로써 절감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질문들이 없으니까 공무원들이 사회적 약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돈을 횡령하는 것 같아요. 롯데월드 관련 공군의 태도도 그렇고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6 01:06   좋아요 0 | URL
대답하기가 어렵기도 하고 상당히 불편하기도 하지요? 저 먼 구름 속에 살 것 같은 사람들 욕하는 건 쉽지만 정작 자신의 잘못은 합리화하면서 사는 게 인간이니까요.

turnleft 2009-02-26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질문의 의도를 벗어나는 답이겠지만(^^;), 저한테는 누가 더 나쁜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도덕적 판단의 목적은 남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데 있다고 보거든요. 질문과 같은 양자택일로 제 도덕적 선택의 가능성을 제한할 필요는 없겠죠..

노이에자이트 2009-02-26 23:30   좋아요 0 | URL
자기자신에 대한 성찰이 중요하지요.

비로그인 2009-02-26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군요. 일견 저로서는 쉬운 선택입니다.

1. 후자
2. 전자
3. 후자
4. 전자

전 일단 이렇게 설정하고 출발하겠습니다. ^^

노이에자이트 2009-02-26 23:30   좋아요 0 | URL
하하하...아주 명쾌합니다.

[해이] 2009-02-26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Gene님과 뜻을 같이 하네요ㅋㅋ 다 후자입니다ㅎㅎㅎ 물론 문제는 많지만 ㅠ

노이에자이트 2009-02-26 23:31   좋아요 0 | URL
오호라...

Mephistopheles 2009-02-26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Gene님과 뜻이 같습니다. 1,2번은 위선으로 보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26 23:31   좋아요 0 | URL
좀 더 자세한 말씀을...궁금궁금...

2009-02-27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7 23: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8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28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땡땡 2009-02-26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학을 공부하게 되면 제도 안에서든 밖에서든 여성학 방법론(인식론)을 배우거나 공부하게 됩니다. 거기서 남겨야 할 단 한 가지 단어가 있다면 "맥락(Context)"이라고 생각합니다(최소한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많은 분들이 제게 동의할 것이라 믿습니다).

'맥락'을 강조하는 것은, 단순히 그 사건이 놓인 상황을 잘 살펴보자는 얘기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A냐 B냐만 가능하게 할 뿐, 그 모든 것일 수도 그 모든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그 모든 것들을 배제하는 이분법, 그리고 그에 기반한 차별에 대한 반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맥락 없이 이분법적으로 던져진, 2번과 같은 질문에는 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열렬한 페미니스트'인지, '철저하게 못된 시누이' 노릇이란 어떤 것인지, 저는 잘 모르겠거든요. 예를 들어 저는, 평소 제 어머니께 전화 한 통 없는 오빠의 배우자가 좀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화통화 자체를 싫어하는 제 오빠의 배우자는 이런 간섭을 '잔소리'나 '시누이 노릇'이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여성주의자(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자신의 일상부터 인생까지, 자신의 모든 언행을 성찰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전화 한 통 없는 오빠의 배우자를 욕하기 이전에 제가 해야 할 것은, 왜 우리는 이런 것들을 '오빠'가 아닌 '새언니'에게 요구하나? 오빠는 자기 부모에게 안부전화 한 통 안 하고 뭐 하나? 그는 배우자의 부모님께 얼마나 자주 연락하나? 전화통화 자체를 싫어하는 오빠의 배우자를 이해하고 넘어갈 여지는 없나? 아니 결혼했다고 왜 새삼스럽게 안부전화 같은 걸 해야 하는데? 이런 것들일 것입니다.

말이 점점 길어지고 있는데 아무튼, 그 특별한 태생 때문이라도 성찰하지 않는 여성주의는 모순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건 모든 실천적 주의에 해당하는 말이겠지만요(따라서 이 댓글은 1번 질문에 대한 답이기도 합니다). 그럼, 초면에 실례 많았습니다 (__)

- 어떤 사람의 무심한 동생이자 또 어떤 사람의 속을 알 수 없는 시누이이자 또 어떤 사람의 한심한 딸이자 또또 어떤 사람의 둘도 없는 애인이자 또 어떤 사람에게는 나이 들어 결혼도 안 하는 대책 없는 사돈처녀일, 한 여성주의자 올림

노이에자이트 2009-02-26 23:34   좋아요 0 | URL
네번째 문단에 전적으로 찬성합니다.꼼꼼하게 긴 댓글을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Kir 2009-02-28 0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라온 페이퍼를 처음 읽은 때부터, 계속 생각하고 있는데요... 정말 어렵습니다. 일부러 머리가 가장 맑은 시간에 다시 읽으면서 고심하는데, 그래도 여전히 모르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8 14:58   좋아요 0 | URL
사실은 제가 잘 모르니까 올려놓고 도움을 구하는 거예요.원래는 훨씬 더 무거운 질문을 올릴까 하다가 많이 수위를 낮춘 거예요.
 

성균관 대학교 동아시아 학술원이 9일 공개한 정조-심환지 간에 오고간 비밀서신을 둘러싼 논쟁이 격렬할 것 같습니다.이 서신을 발굴한 학자들은 정조와 벽파가 대립관계만은 아니었으며 항간에 있던 정조 독살설이 사그라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이에 대해 이덕일 씨는 상당히 격한 언사로 이들을 비난했습니다.독살설을 주장하고 있는 이씨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만 다소 그 표현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서신을 발굴한 학자들이 "심환지가 그동안의 통념과는 달리 정조의 측근이었으며 이로써 정조가 벽파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은 잦아들 것이다"는 주장을 한 데 대해 "그렇다면 시저와 박정희는 측근에게 살해당하지 않았다는 말이냐."고 말했습니다.그렇지만 이덕일 씨는 그동안 벽파와 정조가 대립관계였으며 그래서 정조독살에 벽파 및  정순왕후가 배후라는 주장을 해왔습니다.그런데 벽파의 좌장 격인 심화지가 정조의 측근이라는 설이 대두되자 이제는 측근이라고 살해하지 말라는 법이 있느냐고 하는데...글쎄요. 

 이덕일 씨는 정조 독살설을 거의 확신하고 있습니다.물론 그런 주장을 할 자유가 있습니다.그에 대한 증거문헌을 제시하고 그에 대한 비판엔 대응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이 씨는 그동안 했던 주장-우리나라 역사학계는 노론 벽파에 대해 불리한 말을 못하게 압력을 넣는다.노론은 일제시대 친일 파가 많다-을 이번에도 하면서, 정조 비밀서신을 공개한 이들을 마치 친일파라는 듯이 비난했습니다.그러면서 독살설을 담은 이인화의 소설<영원한 제국>에 대하여 친근감을 표시했습니다.이덕일 씨는 신동아 1998년 7월호에 "이인좌의 난 이후 소외된 영남 남인들을 정조는 그 권력기반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이인화 씨 역시 자신이 영남 남인의 후예임을 늘 자랑스레 여기고 있습니다.하지만 이인화 씨가 친일파 청산에 대해 찬성한다는 얘기는 못들어 봤습니다.정조 독살설을 지지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는 친일이냐 반일이냐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여기서 나타납니다. 

 정조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독살설은 주장하지 않는 학자도 있습니다.정옥자 씨가 그렇지요.그녀는 영정조를 조선사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높이 평가하고 정조 때 이루어진 학술편찬 사업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습니다.그런데 정조를 이렇게 높이 평가하는 것은 남북한 학계의 공통점입니다.저는 북한에서 나온 역사서도 몇 권 가지고 있는데 특히 조선후기 영정조 시기는 우리나라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상품경제가 발전하고 실학이 융성한 시기라고 호의적인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경제사적 시각을 우리보다 더 많이 반영하고, 특정 군주에 대한 호의를 삼가는 사회주의권의 특징은  있습니다만 거의 비슷한 서술이지요.우리나라 학계는 노론이 주류이고 그들이 자기들 입맛에 안맞는 논문이나 저술이 못나오게 압력을 넣는다는 이덕일 씨의 주장은 과장이 좀 심한 것 같습니다. 

  물론 정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보수파 중에서는 조선일보 기자인 이한우 씨가 그 대표입니다.그는 조선 군주 평전을 계속 내고 있는데 정조 평전에는 즉위 직후 사도세자 죽음에 관련한 이들에 가한 숙청에 대해 "사적인 원한을 너무 드러냈다"고 평했고 정조가 학문편찬 사업을 한 데 대해서도 "자신의 학문적 능력을 과시한 나머지 권력을 이용해 이념을 퍼뜨리려 했다"면서 노무현  정권의 과거사 청산 등과 비슷하다고 했습니다.조선일보사 기자가 노무현 정권을 거론할 때 좋은 이야기가 나오기 힘들지요.또 한명의 정조 비판자는 한겨레 신문에 글을 연재했던 강명관 씨입니다.그는 정조가 보수적이고 교조주의적인 이념주의자이며 특히 문체반정 같은 것은 사상탄압에 가깝다고 평가합니다.여기서 보면 알겠지만 조선일보 기자인 이한우 씨와 한겨레에 기고하는 강명관 씨가 정치적인 입장에서 전혀 다르다는 겁니다. 정조를 비판하든 차양하든 그것 가지고 친일이다 아니다 나눌 근거가 없다는 게 여기서 드러나지 않습니까.더군다나 독살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노론 옹호자라거나  친일이라거나 하고 주장할 근거는 더더욱 없지요. 

학술논쟁이 격해져서 인신공격이 난무하는 예는 외국에도 있었습니다.독일에서도 나치 청산 문제를 놓고 좌우 파가 논쟁한 1980년대 중반 대논쟁에는 온갖 욕설이 난무했지요.하지만 이번 정조 비밀서신 문제는 해방정국의 지도자에 대한 문제도 아닌데 왜 친일파다 아니다 하는 말이 나오고 그러는지 안타깝습니다.물론 구경하는 입장에서는 싸움구경이 재밌긴 합니다만 좀 더 이성적이고 생산적인 논쟁이 오고 갔으면 좋겠습니다.참고로 말씀 드리면 이인화 <영원한 제국>을 둘러싼 논쟁은 상당히 신사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영원한 제국 뒤편에 논쟁의 시말과 논쟁에 참여한 이들이 소개되어 있습니다).하지만 이번 비밀서신을 둘러싼 논쟁은 벌써 그렇게 될 가능성은 없어진 것 같습니다.안타까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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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22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 <영원한 제국>을 입이 마르도록 추천했던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도 독살설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죠. 이번에 서신왕래 기사를 보고는 달리 생각하는 것 같던데 그 친구는 그것보다 정조가 욕설을 했던 것에 더 관심을 두더라구요. 왕의 체통같은 걸 중시하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2 14:43   좋아요 0 | URL
영원한 제국은 소설로서는 잘 된 작품이라는 평가가 많아요.이인화 씨가 이 책 쓰기 전 수많은 유명 추리소설을 독파했다고 합니다.그런데 이 작품의 후속이 박정희를 모델로 한 <인간의 길>이죠.
누군가를 숭배하면 그도 한 인간임을 망각하는 경우가 생깁니다.당장 자기가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나요.

비로그인 2009-02-23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시사매거진 2580에서 정조독살설을 다루었는데 본페이퍼에서 다뤄진 부분이 많이 나오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23 21:53   좋아요 0 | URL
그 문제 가지고 나오는 쟁점이 거의 뻔하니까요.그 프로그램에선 독살설에 큰 타격을 입힐 자료가 나왔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으니 이인화,이덕일 씨가 좀 기분이 안 좋을 것 같아요.
 

   역사에서 비교사 분야는 학문적으로 파고 들면 온갖 복잡한 문제가 많이 등장하는 분야입니다.보편적인 역사 법칙이라는 게 과연 있느냐 하는 문제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고, 과거사에 나타나는 현상이 겉모습만 비슷하다고 해서 현대사와 바로 비교할 수 있느냐는 쟁점도 말이 많지요.그래도 과거사를 예로 들어서 현대의 귀감으로 삼으려는 저자 거리의 보통사람들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데에는 역사만한 대상이 없습니다.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 비슷한 인물이나 사건을 옛날 역사에서 찾아보려는 시도는 그래서 언제나 흥미진진하고 대중들의 관심을 끌어들입니다. 

  한때 노무현 정부를 광해군 시절과 비교하려던 때가 있었습니다.노무현=광해군,친노세력=대북세력, 인조반정=탄핵시도 라는 도식으로 풀이하려던 호사가들의 설명이 꽤 많은 지지를  받았습니다.어느 나라나 그렇듯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인상은 깊이 있는 학문적 저작보다는 드라마,영화 등에서 얻거나 대중적인 역사물에서 취하기가 쉽습니다.그렇게 본다면 광해군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폭군 광해군이라 하여 인목대비를 박해하고 영창대군을 죽인 죄를 지었다...는 인상이 강했습니다.당연히 대북파는 폭군을 방패로 호가호위하던 세력이었다는 해석이 뒤를 잇습니다.그러다가  민족자주적인 해석이 일어나면서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일종의 줄타기 외교를 한 것을 높이 평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조선 시대에서 가장 자주적인 외교를 한 군주로까지 평가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었습니다.이때 자주노선을 주장하여 광해군을 보좌한 정인홍을 부각시키기도 했지요.북인의 시조인 남명 조식의 철학도 주자학에 얽매이지 않고 양명학까지 취한 유연성이 있으니 역시 햇볕으로 나왔구요.어찌 보면 대북세력은 광해군 때만 유일하게 집권했고 인조반정 이후로는 한번도 우리 역사 전면에 나서지 못했기 때문에 일종의 동정심까지 겹쳐서 이런 움직임이 있는 것 같습니다.특히 노무현 정부 초기 이라크 파병 논쟁이 일어났을 때 노무현=광해군 으로 해석한 이들은 광해군이 명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인 자세를 지혜 있는 중용외교라고 평가한 것까지 끌어들여 정당화하려는 시도까지 했지요.그 뒤 동북아 균형자론 역시 광해군의 자주 외교와 비슷하다는 통속적인 해석도 있었습니다. 

  노론의 영수 송시열을 보수수구의 왕초라고 낙인 찍는 것도 상당히 유행입니다.인조반정을 보수파의 쿠데타라고 보는 이들은 당연히 그 뒤의 서인-노론 세력들 역시 수구파로 보고 남인이나 소론을 진보파로 보는 시각도 꽤 널리 퍼져 있는데 현대사 해석에 이를 끌어들여 역시 마치 노론을 우리나라 역대 보수정권과 비슷한 세력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하지만 이와는 달리 또다른 시각이 있는데 송시열 및 그 이후의 노론세력과 대립했던 남인 특히 영남 남인들을 실학사상과 연결하여 결국 이 세력을 박정희까지 연결하려는 움직임도 있습니다.대표적인 작품이 이인화<영원의 제국>인데 이문열 씨가 이 작품의 기본골격에 찬성하고 있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이런 해석은 정조=박정희 의 도식을 내세우며 정조가 못한 일을 박정희가 마무리했다는 결론으로 나아갑니다.노론을 비판하면서 현대사의 역대보수정권을 비판하는 논리를 내세우려는 이들도, 박정희를 내세우는 세력도 모두 노론에게 악역을 덮어씌우는 모습은 공통점이니 이 역시 역사의 심술궂은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요. 

  노론에 비판적인 이들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가져온 영조와 노론을 단죄하고, 사도세자를 동정하면서, 혜경궁 홍씨도 노회한 노론 정객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이런 해석을 대중들에게 널리 퍼뜨린 저술가가 이덕일 씨입니다.정조와 정약용을 띄우면서 동시에 사도세자 동정론도 내세우는 셈이지요.이씨는 <한중록>역시 노론인 친정을 옹호하고 사도세자에 대해선 은근히 죽을 짓을 했다고 암시하는 책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당연히 이덕일 씨와 반대 되는 해석을 하는 이는 혜경궁 홍씨를 당쟁에 희생된 불쌍한 여인이라고 동정하지요.하지만 사도세자를 옹호하는 이들이나 혜경궁 홍씨를 옹호하는 이들 모두 관심을 두지 않은 대상이 있었습니다.그것은 사도세자가 죽여버린 궁녀나 내시들입니다.요즘 어떤 블로그에는 아무런 죄책감이 없이 이런 살인들 저지른 사도세자가 일종의 잔인한 연쇄살인범 같은 성격파탄자가 아닌가 하는 글이 있더군요.사실 살인당한 사람들 숫자를 든다면야 사도세자는 흉악범 소리를 듣기 알맞습니다.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를 동정하고 이 사건을 꾸민 노론을 규탄할 수도 있겠지만 사도세자에게 비명횡사 당한  이들이야말로 가장 억울한 이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인목대비,인현왕후,혜경궁 홍씨는 모두 서인 및 노론 계열입니다.이 중 인목대비와 혜경궁 홍씨는 일방적인 희생자는 아니었다는 해석이 상당히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인목대비도 인조반정 후에는 원한에 사무친 마음을 풀려고 광해군 파 숙청에 적극 지지했고 혜경궁 홍씨에 대해선 앞서 이야기했습니다.그런데 인현왕후에 대해서만은 그렇듯 서인격하 남인동정론이 대세인 가운데에서도 아직도 누가 나서서 비난하는 사람이 아직 없습니다.그녀의 라이벌인 장희빈은 남인이 지지했다는 사실이 있는데도...장희빈이 왕비자리에서 물러나고 인현왕후가 다시 왕비로 복귀했지만 숙종은 이때 이미 마음이 최무수리(나중의 최숙빈)에게 가 있었고 영조의 어머니가 바로 최무수리 아닙니까.이덕일 씨는 최무수리와 영조가 노론과 한통속이라면서 그다지 호의적인 평가를 해주지 않으면서도 그 비난을 인현왕후에게까지 돌리지는 않습니다.이래서야 장희빈이 너무 불쌍하지요.그녀는 정말 악독한 여인이기만 했을까요.그녀를 악녀로 보는 대중들의 인상은 신봉승 씨의 시나리오인 <조선왕조 500년>의 영향을 받았지요.그보다 훨씬 오래전에 나온 박종화<아름다운 이 조국을>은 장희빈을 상당히 동정적으로 그린 대하장편입니다.

  노론에 대한 비판이 인조반정을 감행한 서인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다가 요즘은 아예 서인의 시조인 율곡 이이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이이의 십만 양병설에 대해선 그 전부터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이젠 교과서를 통해서 거의 정설이 되었습니다.하지만 유성룡 살리기와 함께 나온 것이 이이의 십만양병설은  날조되었다는 주장이죠.작년엔가 이덕일,이수광 양씨가 쓴 책 등 한참 유성룡에 관한 책이 나왔는데 강경한 보수적인 논객인 전 연세대 사회학 교수 송복 씨도 책을 내 이 대열에 합류했습니다.그는 유성룡을 칭찬하고 이이의 십만 양병설은 노론 가문의 후손인 이병도가 퍼뜨린 근거없는 주장으로 격하했습니다.노론을 비판하면 진보적인 인사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이들의 믿음이 아무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 이로써 명백해졌지요.송복 씨는 뉴라이트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으니까요.각자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전혀 반대파인 이들이 똑같은 인물을 높이 받들기도 하고 격하하기도 하니까 이런 점도 재미있습니다만 전문적인 역사지식이 없는 이들은 주의를 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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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2-16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지는 기억나질 않지만 중국도 이런 경향이 있다고 들었어요. 어떤 역사적 인물의 동상이 있는데 그 동상에 중국인들이 침을 뱉는 것이 관습이었는데 동북공정 같은 작업들이 진행되면서 전혀 다른 인물로 조명되면서 더이상 침을 뱉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16   좋아요 0 | URL
현대사 해석의 경우 한때 대륙에서 비난의 대상이던 장개석이 대만 독립을 반대한다는 목표로 뭉친 대만 국민당 세력과 대륙의 공산당 세력의 화해 덕에 요즘 다시 복권되는 것도 비슷하지요.

마노아 2009-02-16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덕일씨가 쓴 소설이 있는데 '운부'라는 제목이었어요. 지금은 다른 제목으로 개정판이 나왔는데, 이 책에서 인현왕후가 장희빈 못지 않게 표독스러웠다는 표현을 씁니다. 실록의 예를 들어가면서요.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사극은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이랑 전인화 주연의 장희빈이에요. 그때 박순애씨가 너무나 온화한 인현왕후 역을 맡으셨었죠.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07   좋아요 0 | URL
인현왕후는 숙종의 계비이고 첫 부인이 일찍 죽었는데 성질이 좀 희스테릭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그 여성도 서인가문 출신인데 그 뒤에 인현왕후도 서인가문 출신이라 서인에 질렸겠지요.그래 놓고 역시 또 서인이 지지하는 최무수리와 눈이 맞아 연잉군(영조)를 낳는 걸 보면 참...

후애(厚愛) 2009-02-16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범서님의 소설 조선당쟁을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노론과 서론의 당파싸움을 주제로 한 소설인데 읽을수록 조선시대의 역사를 알 것 같았지요. 한데 당파싸움 때문에 무고한 선비들이 누명을 쓰고 목숨을 많이 잃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당파싸움으로 인해 왕들도 편한 날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숨이 나오더군요. 정말이지 권력이 무섭긴 무섭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2:09   좋아요 0 | URL
최범서의 그 소설이 재밌지요? 작가가 어느 당파에 호의적인가에 따라서 이야기 전개가 결정됩니다.특히 정여립 사건 같은 경우 서인에 호의적인 사림은 정여립을 아주 못된 인간으로 그리지요.반대인 경우는 정철을 아주 못된 인간으로 그리구요.

드팀전 2009-02-16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크로체가 말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 라는 말의 역설적 버전을 보는 듯 합니다. 어떤 종류의 개혁인가에 앞서모든 변화에 '개혁'의 외피를 씌우고자 하는 세력들이 늘 존재하니까요. 결국 역사적 대상들에서 자기에게만 필요한 부분을 절체하고 궁극적으로 그 집단이 원하는 어떤 이미지의 보정을 받으려는 셈이지요. 이런 작업들이야말로 이데올로기 작업의 전통이 아닐까 싶습니다. 박정희가 이순신을 영웅에서 성웅으로 만들었듯이 정조라는 캐릭터 역시 그런 굴절들을 겪고 있는 듯 합니다. 거기에는 그 역도 존재하니까 송시열의 나라도 그런 설명이 가능하겠지요.(제가 제대로 읽었나요?) 역사를 현재에 투사하는 방식은 대중적인 호소력과 별도로 신중하게 접근해야하는 것이 기본일텐데, 의외로 어떤 흥겨운 해석 하나에 호들갑을 떠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어떨 때는 TV드라마를 보고도 그러니 말입니다. 신윤복이 여자가 아니라는 것가지고 한참 이야기하기도 해야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6 23:36   좋아요 0 | URL
크로체나 카의 현대사론이 특정 이념을 선전하기 위해 역사해석을 자의적으로 해도 좋다는 면죄부로 악용되는 사례가 많지요.사료를 통해서 사실에 파고 드는 작업도 중요하지만 어떤 사건이나 인물을 해석하는 흐름의 변화를 추적하는 것도 재미있다고 생각합니다.최근의 노론 격하운동에도 전혀 다른 의도를 품는 이들이 함께 참여하는 경우도 있구요.정조 독살설도 근대화 이념으로 정조를 포장하려다 보니 엉성한 추리소설이 되어 버렸지요.
신윤복 하면 김민선이나 문근영 두 누나가 생각나지요...

ㅇㅇ 2009-02-17 0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잠깐 끼어들자면 대비전을 자전慈殿이라고 지칭하는 표현은 전혀 오만 불손한 것이 아닌데요; 정식으로 "대왕대비 전하"라고 하지 않아서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문정왕후'는 시호이니 생전에 그런 칭호가 있었을리 없음은 물론이고요.
/장희빈을 악녀로 묘사한 '픽션'이라면 '인현왕후전'이 최초이죠. 이 책이 정조때 쓰여졌다고 하는데, 행간을 살펴보면 경종을 다소 폄하하고 영조를 내세우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장희빈이 민씨를 저주하려고 해골가루 섞인 옷을 바쳤을 때 옆에서 세자가 권유해서 그 옷이 중궁전에 들어갔고 그 때문에 저주가 발동했다는 일화가 삽입돼 있죠. 이걸 세자가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결국 중궁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투로 서술하고 있는 것. 장희빈이 죽고 세자가 숙종임금에게 세자위를 내놓겠다고 먼저 말했다가 반려당했는데 부왕의 처사를 따르기는 했으나 "평생 자신과 무관한 자리로 알았다"라고 쓴 부분이 있는 것. 인현왕후가 어린 영조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졌었으며, 영조도 추후 은혜에 보답하는 행동을 취하는 일화를 삽입한 것, 기타 등등. 분량은 많지 않지만 인현왕후전의 저자가 어떤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죠.(혹은 이 자체가 소설의 저술 목적일 수도 있고요)
/근데 인현왕후전하니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이 있네요. 인현왕후전에서 보면 민씨가 환궁했을 때 자꾸만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자칭하는데요, 이걸 두고 현대 사극에서는 그녀가 매우 겸손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해석을 많이 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그녀의 이미지는 여기서 온 것일 수도 있죠. 그런데 실록과 대조해 보니 인현왕후는 '폐위된 왕비'의 자격으로 환궁했더군요. 사실 동양에서 한때 왕비의 자리에 있던 사람을 폐위하더라도 그녀의 경우처럼 맨몸으로 내쫓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개 강등해서 궁호 정도 주고 '궁 안에' 감금하는 게 상식적인 조치거든요.(소설 보면 숙종이 박태보를 고문할 때 민씨를 일컫어 "사악하고 악독한 '계집'"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죠; 이게 사실이라면 이 사람은 일국의 국왕으로서 품위가...) 하여튼 그래서 이런 처사는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나왔고 그게 반영되어서 일단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인 거죠. 그녀는 아마도 서궁 정도로 불리게 될 예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죄인을 자칭할 수밖에요.. 이때 세자가 인사하러 오자 민씨가 일어나고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숙종이 일어나지 말라고 막고 그녀를 왕비처럼 대우해 주더니 금세 장씨더러 중궁전인 대조전을 비우라고 명령하고, 이튿날인가 복위 교지가 나오고..뭐, 그런 식이더군요; 이 맥락이 빠지니까 그녀가 마냥 겸손하게만 보이는 것이겠죠. 소설에서 보면 장씨가 '발악을 하면서' 민씨의 인사를 받겠다고 뻗대는 걸 매우 혐오스럽게 묘사해 놨는데요, 발악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일 자체는 실제 일어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9-02-17 16:10   좋아요 0 | URL
0님,그래서 비교연구에서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가 늘 발목을 잡는다고 봅니다.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느냐가 문제인데 결국 역사학도 특정이론의 적용이 필요하고 그럴 땐 불가피하게 비교의 문제와 부딪힌다고 봅니다.
결국 역사서술도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문제가 최종적으로는 고려대상이 되지요.베네딕트 앤더슨이 페리 앤더슨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최근에 알고 아하...하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학자의 피가 흐르는 집안인 모양입니다.과거는 낯선나라다 는 분량 때문에 망설이고 있습니다.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00님.인현왕후전에 대한 이야기가 매우 흥미롭습니다.역시 인터넷은 이런 식으로 좋은 정보를 주고 받으니 유용하군요.요 몇 년전 김혜수 주연의 장희빈은 장희빈을 조금 긍정적으로 그린 것 같았습니다.최무수리 역의 박예진도 기억나는군요.사실 숙종은 워낙 장희빈의 유명세에 눌려서인지 그의 정책은 요즘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도 않고 여하튼 억울하기도 할 겁니다.사실 당쟁은 그 뒤 영조때도 상당히 피비린내가 날 정도였는데 유독 숙종 때만 당쟁이 심한 걸로 아는 대중들이 많으니까요.종종 오셔서 좋은 정보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Mephistopheles 2009-02-17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명..그때 그 당시 일어났던 사건과 이야기들의 진실은 존재할 터인데...시간이 흘러 그 역사를 판단하고 기술하는 입장에선 관찰자의 입김을 무시 못하나 봅니다. 그리고 역사는 이긴자들의 기록물이라는 말이 여전히 적용되고 있다고나 할까요. 한가지 사건에 판이하게 다른 견해...재미있고 우습죠. 역사의 기술과 기록 이전에 어떤 저의인가를 먼저 판단하고 읽어나가야 하는 것이 중요할꺼라 보여집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7 15:09   좋아요 0 | URL
역사 이전에 역사가의 성향을 파악해야 한다는 말도 있지요.동감입니다.
 

  식민지가 아닌 유럽 강대국은 토착 자본이 곧 민족자본인 경우입니다.하지만 식민지나 반 식민지인 경우는 토착 자본을 민족자본과 예속자본으로 나누어야 합니다.이런 분류는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실천국면에서 필요했습니다.특히 1920년대 중국에서는 토작자본 모두를 민족자본이라고 생각하고 민족해방운동의 동맹세력으로 규정하다가 큰  타격을 받은 바 있습니다.믿었던 토착자본 일부가 외세와 연합하여 민족해방세력을 대학살한 1927년 상해 쿠데타가 일어난 것입니다.결국 기존의 등식(모든 토착자본은 민족자본이다)는 수정이 불가피해졌고 오랜동안의 논쟁을 거쳐 1930년대에는 토착자본을 민족자본과 관료매판자본으로 분류하여 부르조아 민족운동의 가능성과 한계가 이론적으로 명확해졌습니다.중국은 완전한 식민지가 아니라 반 식민지라서 제국주의와 매판자본이 활동하는 영역과 민족자본이 활동하는 영역이 분리될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완전 식민지였던 조선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반식민지였던 중국에 비해 조선은 민족자본이 그 정도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거의 없었습니다.예를 들어서 평양 메리야스 정도 되는 중소자본이라도 금융기관과 거래할 때는 반드시 식민지 지배구조와 접촉하게 됩니다.단순 자영업이 아니고 어느 정도 사업확장을 목표로 하는 경우는 어떤 의미에서건 예속성을 벗어날 수가 없었지요.그렇다고 완전 식민지에서는 민족자본을 찾을 수 없다고 단언해서도 안 되었습니다.민족해방투쟁의 동맹세력으로서 민족자본이 필요한 실천적 목표로서는 더욱 절실한 문제지요. 

  한상룡 같은 이들은 분명히  예속자본이었습니다.일본 제국주의의 독점경영의 일각으로 편입되어 그것을 발판으로 그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발전했습니다.그런 식으로 식민지 하에서 일정한 지위를 얻을 수 있었으니 일제에 맞설 생각은  나지 않았겠지요. 

  그런데 김성수 일가 같은 경우가 복잡합니다.김 성수 형제는 1910년대에는 광산자본 겸 지주였다가 1차대전 후 경성방직을 세워 산업자본으로 전환하여 관련산업에도 진출합니다.산업자본으로 자립했으므로 민족적이었지만 식민지 체제 내에 있었기 때문에 예속적이기도 한 이중적 존재였지요.김성수 일가를 호남재벌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두드러진 특성은 동아일보를 통한 민족운동에 관여한 점입니다.1920년대엔 민족개량주의 운동으로,그러다가 1930년대에는 거의 예속적인 자세로 변해버립니다.여기서 종속적 발전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제국주의가 토착자본의 종속적 발전을 허용하는 것은 단순히 통치유지를 위한 정치적 양보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제국주의 본국의 자본주의가 고도화함에 따라 그것과 수직적 분업관계를 가지면서 활동할 수 있는 토착자본의 종속적 발전이 필요하고 따라서 통제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것을 장려하기도 합니다.전면적 종속발전의 길이 안전하게 열려있는 여건이라면 굳이 민족독립-일국자본주의의 길을 걸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김성수 형제가 그 예를 보여줍니다.1930년대의 대륙병참 기지화 정책 등으로 종래의 토착자본 중 어느 정도 민족자본의 성격을 띤 자본들도 일국적 자본주의 노선을 단념하고 전쟁체제에 협력하면서 새로운 예속자본이 된 것입니다. 

 김성수 형제의 주요경력을 보면 1940년대 초 전시통제경제하에선 각급 전쟁협력단체의 간부로서 포섭되어 있었지요.이를 두고 그들의 태도가 일제의 강권에 의한 비자발적 행동이라는 식의 해명이 상당히 널리 퍼져 있습니다.그러나 이들이 경제적 기반에서 일본인 자본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가를 알아보면 이같은 해명이 그다지 설득력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김성수 형제 역시 다른 예속자본가들처럼 일본인 자본과 밀착한 은행,회사에 중역진으로 다수 참여하고 있었고 나아가 일본인 자본과 밀착된 은행,회사에 거액의 주식투자도 하고 있었습니다.이렇게 보면 이들은 역시 일본인 자본과 매우 밀착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이렇게 파헤칠 수 있으니 역시 경제학의  위력이 실감나는 대목입니다.이러한 종속적 발전의 혜택을 받은 이들이 해방 이후 어떤 노선을 걸었던가요.민중지향 노선을 걸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김성수 일가로 대표되는 호남재벌 및 한민당이 미군정 의존체제로 방향을 틀었던 것은 필연적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변혁주체를 세운다는 실천적 목표가 아닌 경우는 민족자본이냐 예속자본이냐 하는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순경제적인 의미에서만 보면 중심부(본국) 총자본에 대하여 주변주(식민지)에서 파트너가 되는 자본이 중심부에서 이식된 것이든,토착사회로부터 새롭게 형성된 것이든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당연히 민족자본이냐 예속자본이냐도 문제가 되지 않지요.경제성장론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안병직 씨가 민족자본이라는 범주를 인정하지 않게 된 결과로 이런 식의 경제성장론자가 된 것입니다.조금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김성수 일가를 연구한 카터 에커트 역시 민족자본이냐 예속자본이냐의 문제를 거론하지 않습니다.당연히 이들에게는 민족해방 투쟁의 변혁주체 문제는 빠져 있습니다. 

  식민지 경제구조 분석은 민족해방 투쟁의 변혁주체라는 실천적인 목표에서 나왔기 때문에 계급분석 등, 보수파에겐 껄끄러운 구석이 많습니다.1980년대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과 주변부 자본주의론 이론가였던 안병직 씨가 전향 이후 변혁주체보다는 순경제적 의미의 경제성장론으로 방향을 틀고 난 뒤 보수파의 환영을 받은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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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2-12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계발적인 페이퍼네요^^ 저도 이쪽 부분에 대해서 아는건 전혀(!) 없지만 관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때는 근현대사 시간이 가장 재밌었거든요ㅋ 쓰신 페이퍼 관련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 한권만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2 23:52   좋아요 0 | URL
헌책 중에선 <한국자본주의론>(1985까치) 중 장시원 논문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과 정운영 논문 '주변부 자본주의론'
역사비평 2002년 여름호의 안병직 정재정 대담은 안병직 씨의 전향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비로그인 2009-02-13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조금 어렵네요 ㅅㅅ

노이에자이트 2009-02-13 00:12   좋아요 0 | URL
어려우면 김성수 일가에 대한 것을 먼저 읽으시는 것도 한 방법이죠.

[해이] 2009-02-13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자본주의론은 작년에 헌책방에서 사놓고 안읽은 책이었는데... 방금 댓글 보고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봤습니다ㅋ

노이에자이트 2009-02-13 00:52   좋아요 0 | URL
오호...열심이시군요.장시원 씨가 안병직 씨와 함께 식민지 반봉건 사회론자의 대표라고 할 수 있지요.

바람돌이 2009-02-13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20년전에 머리터지게 공부하던 것들이 새록 새록.... ^^

노이에자이트 2009-02-13 23:27   좋아요 0 | URL
저는 요즘 머리 터지게 공부하고 있는데...
오호...새록새록 정도면 기억이 많이 남아 있군요.

Mephistopheles 2009-02-13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성수일가와 동아일보의 관계 그리고 독립군과의 관계는 띨래야 띨수 없는 관계 중에 하나이긴 합니다. 그런데 김성수씨가 지금의 동아일보를 보고 뭐라 그럴까요.그건 좀 궁금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13 23:23   좋아요 0 | URL
김성수를 비롯한 한민당 그룸의 성격을 어떻게 보느냐가 해방 정국 뿐 아니라 그 후 한국 정당사 연구에도 방향을 규정하겠지요.
사실상 동아일보가 조선일보나 중앙일보와 함께 조중동을 형성하면서 예전 동아일보의 시대는 끝났다고 봐야죠.
 

  과거사 논쟁에 관심이 많습니다.외국의 사례를 보면 우리나라의 논쟁을 보는 데 더 풍부하고 다양한 시각을 제공해주기도 하지요.어떤 때는 하도 우리의 상황과 비슷해서 웃음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과거사 논쟁은 역사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기억의 투쟁이기도 합니다.작년의 건국60년 파동때문에 건국이란 단어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오기도 했습니다.사실은 그동안 건국이든 정부수립이든 별로 구별 않고 써왔거든요.그런데 현 정부 들어서 건국 60년이란 용어를 안 쓰면 왠지 국가관이 투철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의심 받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해서 예전에 보았던 책을 오랜만에 꺼내 들었습니다.이도야 히사오,이나오카 스스무가 함께 쓴 <일본 민중운동사>윤대원 역 (학민사1984). 이 책은 일본의 보수파들이 명치유신 100주년이라며 대대적인 사상공세를 펴는 것을 규탄하며 나온,목적의식이 뚜렷한 책입니다.이 두 저자의 글을 통해서 우리보다 먼저 기억에 관한 대대적인 투쟁이 일어난 일본의 사례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오늘도 한층 더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968년 연두기자 회견을 맞은 당시 사토 에이사쿠 수상은 올해 가장 성대하게 치를  행사는 명치 100년제라면서 건전한 민족정신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습니다.1967년 11월 사토-존슨 회담 후의 미일 공동성명 이래 구체적으로 나온 국방의식 및 애국심의 강제와 명치유신 100년제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지요.이 운동의 정점이 1968년 10월 23일 도쿄 무도관에서 열린 명치 100년제였습니다.이도야,이나오카 두 사람은 이 행사가 드러낸 성격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첫째.저들은 근대 일본 100년의 역사를 기적적인 부흥,번영 등으로 표현했다.문자 그대로 장미빛으로 그렸다.둘째로 천황제와 제국주의를 내세워 아시아 민족들을 억압하고 약탈했던 침략전쟁의 모든 것을 은폐했다.세째로 일본이 아시아의 선진국임을 내세워서 근로자 들의 저임금의 희생위에 일본의 자본주의가 부흥되어 온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네쩨 이와 같은 근대 일본사의 모든 것은 선인들의 용기와 총명과 노력 덕택이라면서 전쟁 책임,전쟁이 가져온 참화,전쟁으로 몰락한 일반 국민의 생활 등의 문제는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오로지 특정한 역사관만을 국민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했다.이는 민중의 입장에 서서 역사의 진실을 추구하는 역사관을 부정하는 것이다.즉 일본의 민중이 권력의 지배와 착취에 저항하여,민족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 싸웠던 역사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두 저자는 일본에게 근대화란 "명치 이후 일본 민중의 실천적 과제이며.특히 전제적 정치체제에서의 탈피,민주주의의 여러 원칙의 실현이라는 구체적인 문제"라고 했습니다.그들은 자신들이 책을 쓴 목적을 "명치 백년의 사회운동의 역사를 민중사관의 시각에서 명백히 제시함으로써,역사를 미화하고 날조하려는 명치백년 캠페인의 반동적 의도를  분쇄하고, 일본 지배층의 역사가 백년사이에 어떻게 민중의 고혈을 착취하였고,아시아 여러 민족들에 대한 거듭된 침략전쟁으로 비대해진 역사였던가를 백일 하에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고 명시하였습니다. 

  두 저자는 또 이렇게 강조합니다."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기본적 인권은 우리들의 선조의 오랜 세월에 걸친 자유획득을 위한 투쟁의 역사이며,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오늘에 이르렀다.우리들은 이 민중의 귀중한 역사를 끊임없는 노력에 의하여 간직해야만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설사 법률에 의해 보장된 권리라 하더라고 하여 헛되이 안주해서는 안된다,우리가 오늘 민중의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돌이켜 보려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비록 남의 나라의 사례지만 우리가 깊이 생각할 문제를 많이 던져주는 글이라서 소개했습니다.저의 사족은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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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9-02-07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이에자이트님의 사족이 매우 궁금한 1人 여기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7 21:13   좋아요 0 | URL
그동안 제 페이퍼를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제 문체는 좀 얌전한? 편인데 위의 두 저자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어요.그것도 아주 강한 표현까지 써가면서.하하하...

비로그인 2009-02-08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의기 넘치는 글이네요. 아울러 제국을 그리워 하던 이들에겐 아주 불편한 글이겠구요. 잘 읽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8 15:07   좋아요 0 | URL
제가 쓰는 글보다 수위가 강하지요? 일본의 혁신계 쪽 학자들이에요.이도야는 고도쿠 슈스이 전기를 썼지요.

[해이] 2009-02-08 18: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건국60주년 얘기를 듣고 기가 차 했던 기억이 있는데 역시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군요. 지배세력의 역사인식이 옳지 않다는 것을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인식하고 있고 또 그래서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많긴 하지만, 지금 식으로 교과서가 개정되고 세월이 흐르게 되면 지배세력의 역사인식이 하나의 진리로 굳어져 버릴텐데 참 걱정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9-02-08 21:34   좋아요 0 | URL
과거사 문제를 가지고 벌어지는 투쟁을 기억의 역사라고 해서 외국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학문과제로 다루고 있더라구요.저는 일본,독일,이스라엘 등의 사례를 관심있게 지켜 보고 있습니다.곧 독일 쪽 사정도 알려드릴까 생각 중입니다.

쟈니 2009-02-09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독일의 사가 논쟁 관련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나치 치하의 독일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오래전에 읽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아무튼, 나치치하의 일을 히틀러에게만 뒤집어씌울 것인가? 독일인의 책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결국, 히틀러에게만 뒤집어씌운다면, 독일인은 면책 되는거죠.. 나중에 이 정권이 끝나면, 또, 동일한 이야기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MB탓만이다. 아니다. 국민의 탓이다.. 라고..

노이에자이트 2009-02-09 22:26   좋아요 0 | URL
독일의 사가논쟁은 과거사 회피하는 방법의 백화점을 보여준 사건이었죠.워낙 여러 사람이 엉겨싸웠기 때문에 몇 년에 한 번씩 반복해서 읽었습니다.그때마다 새로운 것이 보이더군요.가장 간략한 요약은 서경식<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뒤편에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