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에 관한 책 몇 권을 읽고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 말엽,동남아의 영,불,화란 제국주의를 밀어내고 미국이 세력을 잡으려는 의도로 루즈벨트는 신탁통치안을 꺼내드는데  드 골은 반대하죠.그는 나치로부터 조국을 해방하려는 열의에 불 탄 애국자였지만 그 해방의 혜택을 식민지에까지 주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었습니다.루즈벨트가 죽고 등장한 트루먼은 냉전을 시작하면서 베트남과 악연을 맺습니다.단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 푸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베트남에서 발을 빼 버리죠.드 골이 1960년대 초반 미국에게 베트남에서 발을 빼라,내가 중재하겠다고 나선 것은 한 번 혼이 나보았기 때문일까요.그런데 미국은 그 뒤로도 혼이 나면서도 계속 베트남에다 돈과 군인들의 생명을 바칩니다.

   바오다이를 데려 와 황제라고 앉혀 놨는데 영 미덥지가 못하니 미국은 좀 더 민족주의적인 고 딘 디엠을 앉히지요.이 때가 1955년.이때부터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물러나고 미국의 단독개입 시대가 됩니다.아이젠하워 임기 때지요.민간인인데다가 우익이요,게다가 반 프랑스 노선을 걷고 있는 디엠은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선전됩니다.그는 강력한 반공을 내세우고 민주주의적인 모든 요소는 공산주의의 사주를 받은 국가 변란의 징조라고 여겨 억압정책을 밀고 나갑니다.하지만 지나친 종교편향정책은 엄청난 반발을 부릅니다.그는 가톨릭 교도였고 불교도를 억압합니다.북베트남에서 내려 온 가톨릭 교인들과 동아리를 이루어 그들에게 고위직을 배분합니다.끼리끼리 정치지요.대다수가 불교도인 인민들의 분노가 폭발합니다.1963년 3월. 한 불교 성직자가 분신 자살로 항의하고 전국이 소요로 들끓자 디엠은 주요 사찰의 스님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합니다.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좀 온건책을 쓰라고 종용하지만 디엠은 반공국가를 만들자는데 왜  말리느냐면서 떼쓰기 외교로 나옵니다.케네디는 남베트남 현지에 정보원을 보내고 로지 미국대사와 연계해서 디엠을 몰아내고 군부에서 후임자를 고르는 공작을 명합니다.그리고 1963년 10월, 쿠데타가 일어나 디엠과 그의 동생 누 부부를 죽여버립니다.두 달 후 텍사스에서 케네디도 암살당하죠.이후 남베트남은 군부 쿠데타가 일어났다 엎어졌다 혼란을 거듭합니다.

  고엽제를 제일 처음 쓰는 것을 허가한 이는 케네디입니다.그런데 우리나라의 고엽제 전우회는 왜 미국정부나 고엽제 제조사를 규탄하지 않고 한미동맹을 금과옥조처럼 숭상할까요? 상식적으로 봐선 자신들을 전쟁터에 내몰았던 박정희나 미국을 더 미워할 것 같은데.몇 년 전에 고엽제 전우회가 한겨레 신문을 습격해 난동을 부렸을 때 굉장히 놀랐습니나.신문사가 대낮에 그런 테러를 당하는 것도 그랬고 한겨레 신문사는 고엽제 피해자 문제를 앞장서서 제기한 신문이었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올해 6월 달엔 젊지도 않은 전우회 회원들이 그 무거운 가스통을 들고 방송국에까지 가서 촛불시위를 옹호해 주는 편파방송을 중단하라고 위협하고...

  케네디의 후임인 존슨은 베트남에서 손을 떼겠다고 공약하지만 오히려 지상군까지 투입되고 베트남으로 병력은 점점 증파됩니다.미국에선 반전 시위대가 많아지기 시작하죠.이때 시위대들이 든 플래카드엔 이런 글이 쓰여있었습니다." 존슨을 대통령으로 뽑은 이들이여.지금 이 혼란을 보고 있느냐" 하지만 당시 존슨은 골드워터를 물리치고 대통령이 되었는데 골드워터는 베트남에 핵무기를 써야한다고 극언했던 인물이 아니었던가요? 양당제가 정착된 미국정치의 고민입니다.골드워터보단 평화로울 것 같아 민주당의 존슨을 뽑아놨더니 또 그 모양...결국 존슨은 인기가 한 없이 떨어져 차기 선거에 당내 지명도 못 받을 걸 알자 불출마 선언을 해버립니다.

  닉슨도 자신이 전쟁을 끝내겠다고 선언하여 대통령이 됩니다만 전선을 캄보디아 라오스까지 넓히고 맙니다.1969년 지상군을 철수하기 시작하지만 오히려 북베트남에 대한 공습은 더 늘어나죠.미국내에선 반전시위가 그칠 새가 없고 베트남전선에서 귀환한 청년들은 훈장을 반납하는 운동까지 합니다.그런 닉슨이 재선에 성공합니다.상대당인 민주당에서 베트남에 가서 무릎이라도 꿇겠다고 발언한 것이 굴욕적이라고 생각한 유권자가 많아서였다고 하니까 뭐라고 해석해야 할까요.1973년 1월 파리협상으로 전쟁은 일단락 되지만 그 직전인 1972년 말 미군은 엄청난 공습으로 북베트남을 맹타합니다.

  파리협정 이후 1974년 말까지 북베트남은 국내경제재건에  힘씁니다.남베트남 정부는 기회는 이때다면서 민족해방전선(속칭 베트콩.이 단어를 베트남인들은 굉장히 싫어합니다)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죠.1973년 한때는 남베트남 지역 거의 대부분에서 민족해방전선을 몰아내는 듯 합니다.하지만 내부정비를 마친 북베트남이 1975년 1월 대공세로 나서 남베트남으로 쇄도하자 몇 달을 못 버티고 4월 남베트남은 항복하고 맙니다.북베트남의 문서에선 이 전쟁이 2년은 갈 걸로 예상했답니다.왜 그렇게 급속도로 무너졌는지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의문점입니다.하기야 중국내전에서도 국민당은 1947년까지 절대적인 우위를 보이다가 1948년 경부터 급속도로 붕괴하기 시작했지요.

  베트남 통일 이전인 1970-1971년 경 캄보디아는 남베트남의 침략도 받고 또 그 전에는 북베트남이 군사기지로 쓰다가 역시 현지인들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합니다.베트남과 캄보디아는 역사적으로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결국 베트남은 통일 이후 캄보디아를 침략합니다.놀라운 것은 이 당시 캄보디아는 분명히 같은 사회주의 이념을 신봉하는 국가였다는 사실입니다.그 때 캄보디아는 크메르 루즈의 폴 포트가 집권하고 있었죠.베트남은 킬링필드를 저지른  정권을 응징한다는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침략을 정당화하고 서방의 언론인들을 데려다가 킬링필드를 보도하게 합니다.그리고 훈센을 내세워서 괴뢰정권을 만들죠.프랑스와 미국이 베트남에 바오다이 정권이나 고 딘 디엠 정권을 세웠던 수법을 답습한 것입니다.

  전쟁이나 외교를 공부할 때마다 굉장히 냉정해짐을 느낍니다.하지만 허무해져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타이릅니다.다들 말리는데 30년 간을 베트남이라는 수렁 속에 자진해서 들어간 미국의 대통령들을 생각하거나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관계를 공부할 땐 더더욱 그렇지요.어떤 때는 냉정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 때가 있습니다.

 외교란 무엇인가...국익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를 냉정하게 생각해보고자 할 땐 베트남 전쟁을 공부 해보심이 어떨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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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10-11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추상적인 듯싶은데요.^^ 전쟁이란 무엇인가, 미국이란 무엇인가, 국익이란 무엇인가, 등등에 비하면...

노이에자이트 2008-10-12 15:28   좋아요 0 | URL
국제정치에서 정의와 명분은 과연 무엇인가? 정도로 좁혀볼까요?

로쟈 2008-10-12 22:10   좋아요 0 | URL
네, 인간이란 무엇인가 혹은 본성론으로의 귀결은 대개 회의주의나 냉소주의로 빠지는 듯싶어서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3 16:26   좋아요 0 | URL
냉정해지긴 해야 하지만 냉소주의나 허무주의가 되면 안되죠.동감.

마노아 2008-10-11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고 도는 역사의 유사성에 인간이 참 미련스럽게 보이면서, 그러니까 또 인간스럽단 생각마저 듭니다. 베트남 공부에 좋은 책 좀 추천해 주세요. 11월에는 베트남 공부를 할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

노이에자이트 2008-10-12 15:41   좋아요 0 | URL
바바라 터크먼<독선과 아집의 역사>제 2권자작나무,리영희<베트남 전쟁>두레
에스프레이<세계게릴라 전사>제 4권일월서각,쟝 라쿠튀르<호지민>소나무
베트남 전쟁 공부할 땐 제네바 협약(1954년)과 파리협약(1973년)을 비교해서 공부하세요.그리고 미국의 반전운동은 하워드 진<미국민중사>제2권 일월서각 을 참조.트루먼,아이젠하워,케네디,존슨,닉슨의 베트남정책도 주의해서 공부하세요.그리고 남베트남 정부에 대해서도.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갈등에 대해선 유재현<메콩강의 슬픈 그림자 인도차이나>창비 를 참조.캄보디아의 70년대에 론놀 정권,시아누크,크메르 루주의 삼각관계에 대해 중점을 놓고 공부하세요.

마노아 2008-10-12 22:37   좋아요 0 | URL
역시 절판된 책이 많군요. 유재현씨 책만 갖고 있네요^^
그래도 꼼꼼이 옮겨갑니다. 일러주신 부분들 유의할게요. 고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13 15:59   좋아요 0 | URL
터크먼 책은 제목이 바뀌어서 나왔을 겁니다.

비로그인 2008-10-12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베트남 영화 (정확히는 베트남 태생의 프랑스인이 만든 영화)
씨클로를 봤는데요 베트남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어서인지 상당히 지루
하더라구요. 90년대 중후반을 배경으로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고된 삶과 비극들을 그리고 있는데 당시 베트남 정부는 베트남을 부정적
으로 묘사했다고 상영금지 처분을 내렸다는군요. 그래서 오늘 서점에서
베트남 현대사만을 다룬 책이 있나 찾아봤는데 없더라구요.
대신 신간인 <베트남의 세계사>와 저자인 후루타 모토오의 또 다른
저서인 <역사 속의 베트남 전쟁>을 발견했는데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엔
한국과 베트남이 갖는 역사적 동질성을 잠시 언급하더군요.
그런데 말씀하신대로 고엽제 피해자들은 역사적 동질성이나 가해의
주체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3 15:55   좋아요 0 | URL
씨클로가 베트남에선 금지영화로군요.도이모이 정책의 어두운 면을 그려서 그랬나보죠?
고엽제 피해자들도 그렇고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던 때 베트남에 가서 한국의 베트남 참전에 대해 사과했을 때 한나라당과 베트남 참전 전우회에서 굉장히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죠.

쟈니 2008-10-13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킬링필드도 폴포트가 저지른 부분도 있으나 미국인들에 의해 학살된 캄보디아 인들도 굉장히 많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은 전쟁의 이면에 정말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많다는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읽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13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트남 전이 막바지일 때 남베트남과 미국 공군이 함께 캄보디아를 침략했습니다.당시 캄보디아는 중립국이었는데...여하튼 캄보디아는 남베트남의 침략도 받고 베트남 통일 이후엔 또 침략받고...요즘은 태국과도 국경분쟁이 있더군요.
 

   이승만 되살리기나 박정희 향수는 모두 군사정권 때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습니다.그런 움직임이 직접 나타났을 때는 김영삼 정부 때였죠.혹자는 김영삼 씨 최대 과오는 외환위기 보다는 박정희 향수를 일으킨 죄라고도 합니다.물론 김영삼 씨 개인이 그런 흐름을 주도하거나 하진 않았죠.그는 그때나 지금이나 박정희에 대해 상당히 격렬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으니까요.박정희에 대한 향수와 이승만 되살리기가 거의 동시에 시작된 것은 주목할 만합니다.특히 조선일보가 직접 이승만 바로 보기라는 명분을 걸고 이승만 특집을 연재하기 시작한 때가 1995년이죠.이 연재를 시작한 이가 당시 30대의 젊은 기자 이한우 씨였습니다.최근에 이 씨는 자신이 이승만 되살리기를 시작한 데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죠.

  조중동이라는 용어는 21세기 들어와서 생겼습니다. 동아일보는 80-90년대만 해도 지금같지 않았죠.특히 신동아는 시사월간지로서 상당히 수준높은 논문이나 기획기사로 지식인들의 사랑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저 역시 이 당시 신동아는 지금도 가끔 읽습니다.1995년 5월 신동아에 실린 안동일 변호사의 시론 <이승만 되살리기 안된다>는 지금 읽어도 명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특히 이 글의 마무리는 저만 읽기엔 아쉬워서 여기에 소개합니다.

....혹자는 4월 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고도 한다.4.19 바로 1년 후 군사쿠데타에 의해 꺾여 그후 30여년을 다시 민주화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빗댄 표현일 수도 있다.....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라고 시작한다.따라서 이 나라를 지키는 근간이 되는 헌법정신은 3.1정신과 4.19 정신이다.한마디로 3.1정신은 대외적으로 자주 독립의 정신을 나타내고 4.19 정신은 대내적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을 가리킨다.한때 반공이냐 통일이냐의 국시논쟁이 있었지만 우리의 국시가 이처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임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 시대의 화두가 이승만 되살리기여서는 안된다.이 시대의 화두는 자유민주주의의 확립이다.우리는 이승만의 환생을 바라지 않는다.다만 이승만이 수호하지 못하고 파괴한 자유민주주의가 환생하여 이 땅에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역시 박정희의 환생도 바라지 않는다.다만 박정희가 총칼로 중단한 민주주의가 다시 뿌리를 내려 자유와 민주와 평등의 꽃을 피우고 번영의 열매를 맺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승만을 되살리는 것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를 올바로 지켜 나가는 것이 나라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길이다.이승만 되살리기 보다 자유민주주의 되살리기가 더욱 긴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저는 시사월간지를 상당히 정독하는 편이며 서재에도 20년 분량의 시사월간지를 두고 수시로 읽습니다.시사월간지에 실린 글 중에도 이 글은 가장 힘찬 문장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특히 제가 인용한 이 끝부분은 박력이 넘치지 않습니까? 단순히 글 뿐이 아니고 연설문으로도 손색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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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0-10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단호한 의지가 전해지는 글이네요.
국가정체성 운운하는 인간들이 이글을 꼭 봤으면 좋겠어요.
왜 항상 의열단의 총과 폭탄은 불발이 많았는지...

노이에자이트 2008-10-10 15:10   좋아요 0 | URL
똑같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질서라는 단어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이 되고 말죠.

동탄남자 2008-10-10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냥 생각없이 아무 책이나 막읽는 타입이거든요. 사전 정보없이 막읽는 타입 하시죠?
그러다 보니 이한우의 시선으로 태종, 세종, 성종까지 신나게 읽혀지더군요. 현장 답사까지 하면서 시선을 달리했는데, 선조,숙종,정조를 접하면서 슬슬 뒤집어지더군요. 문화적 쇄뇌하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었습니다. 그런 이한우의 대표작품이 바로 이승만과 관련된 것들이니 알만하겠지요. 저야 워낙 무식하게 이것저것 읽다보니 쓰레기같은 책을 읽어도 금방 다른 책에 의해서 정화가 되지만 딱 그 책들만 본 사람들의 왜곡이 상상이상 일 것 같습니다.ㅋ~

노이에자이트 2008-10-10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한우 씨가 해박한 데다가 책도 많이 쓰죠.하지만 어느 정도 훈련된 눈으로 걸러내는 힘만 기른다면 그의 책을 읽어도 됩니다.아무래도 이한우 씨 특유의 조선일보 냄새는 군주 시리즈에도 나타나죠? 정조를 노무현과 빗댄다거나 하는...

누굴까 2008-10-15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년치의 월간지를 서재에 두고 수시로 읽고 계신다고 하니 노이에자이트님의 서재가 갑자기 궁금해 지는군요... 다른 책들도 엄청 많을 것 같은데...ㅋ

노이에자이트 2008-10-15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을 많이 사지는 않습니다.가끔 가다가 알라딘 동무들이 공개하는 사진을 보면 서재에 엄청난 책들이 많더군요.다른 이들에 비해서는 시사월간지를 많이 보지요.몇년 전부터는 그것도 구독을 끊었고 있는 것만 열심히 봅니다.
 

   서울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장기 농성하고 있는 곳.텐트들이 늘어서 있는 광경이 이상했는지 젊은 엄마와 함께 가던 어린 남자아이가 엄마에게 묻습니다.엄마! 이게 뭐야? 그 젊은 엄마 왈.너도 공부 안 하면 이렇게 돼!

  다카하시 데쓰야 상이 한겨레 신문에 글을 싣고 있더군요. 서경식 씨가 높이 평가한다는 일본의 지식인이죠.그가 이번 한겨레 신문 10월 4일 토요일에 쓴 글은 일본의 교육현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습니다.일본에서 일어나 충격을 준 묻지마 칼부림의 용의자는 평소 공부도 열심히 한 모범적인  남학생이었답니다.그런데 범행을 저지를 무렵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거기에 부모는 잔소리를 한 모양입니다.다카하시 상은 이 학생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가토(살인을 저지른 남학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성적 우수라는 조건부였다.성적이 우수한 동안에는 부모는 가토를 '사랑'한 것처럼 보이지만,그것은 가토의 '성적'에 대한 '사랑'에 지나지 않고,가토라는 사람에 대한,자식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무조건의 사랑은 아니었다.부모가 생각하는 기준에 맞는 아들만을 긍정하고 적합하지 않게 되면 부정한다.아마 가토는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장래의 우등생이 될 것이라는 부모의 기대를 받고,그 한도에서만 애정을 받았던 것은 아닐까.여기에는 태어난 아이에 대한,생명에 대한,무조건의 긍정이 없다."

  가토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부모의 이기심이 내 꿈을 갉아먹고 있다."  성적지상주의가 낳은 폐해라며 일본의 현실을 걱정하기엔 우리도 만만치 않게 심각하죠.자식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우리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 것인가도 중요하지요.하지만 비정규직 농성 현장에서 자기의 어린 아들에게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고 말하는 부모 이야기를 보면 가토의 부모와 같은 사람이 우리나라에도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사실 어찌 보면 어린이나 청소년 교육보다 부모 교육이 더 시급한 과제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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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가 2008-10-07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한게레'라고 쓰셨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7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실수...

동탄남자 2008-10-07 17:53   좋아요 0 | URL
실수를 늘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생각이 듭니다. ㅡㅡV

노이에자이트 2008-10-08 16:08   좋아요 0 | URL
다음부턴 조심해야죠...

순오기 2008-10-07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조금은 찔리는데요~~ 우리 아들넘, 공부 안해도 열심히 사랑하고 믿어줄랍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8 16:09   좋아요 0 | URL
하하하...그러셔야죠...

비로그인 2008-10-07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도 어려서 공부안하면 나중에 깡통찬다는 소리 정말 많이 들었어요.
비정규직 문제보고도 '억울하면 출세해라'라는 식이죠. 수구언론에서 가끔 돼지우리
에서 진주 발견한 겪으로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대학에 합격한 학생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는데 그 의도는 사회모순을 가리기 위함이란 생각이 들어요.
'봐라, 이렇게 할 수 있는데 너희들은 뭐냐' 이런식이죠.

노이에자이트 2008-10-08 16:10   좋아요 0 | URL
비정규직 기사가 나오면 인터넷 댓글에 꼭 나오는 게 그럼 시험봐서 정규직해라...뭐..그런 식이죠.

바람돌이 2008-10-08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엄마의 말에 기가 차다가도 얼마나 많은 부모가 저런식으로 자식들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암담해집니다. 갈수록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가는 사회의 당연한 귀결입니다. 지금도 충분히 끔찍하지만 저렇게 배우고 자란 아이들이 어른이 된 사회는 얼마나 더 끔찍해질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8 16:32   좋아요 0 | URL
글쎄요.어떻게 해야 할까요...당장 답이 안 나옵니다.바람돌이 님의 대안을 듣고 싶어요.

쟈니 2008-10-08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부 못하면. 돈 못벌면.. 이라는 말 속에는 사실 두려움이 많은 거죠.. 한국은 스트레스, 두려움이 참 많은 사회입니다. 일본도 마찬가지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8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습니다.늘 사람을 불안하게 하죠.

가시장미 2008-10-0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예비엄마로써 저도 걱정이 앞서내요. 어떻게 아이를 대해야 할지.. 앞으로 더 많이 생각해보아야 겠지만, 부모의 태도변화를 유발할 수 있는 사회의 변화도 동반되어야 하지 않을까해요. 갈수록 경쟁을 치열해지고, 교육열은 높아지고, 부모도 학생들도 불안감과 두려움이 높아질 수밖에 없는 사회인 것 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0-09 16:25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의 비율이 대단히 높다고 합니다.비슷한 소득수준의 나라에 비해서도 높다고 하는데 불안과 두려움을 권하는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르지요.

비로그인 2008-10-09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른바 대전사람들(강남 대치동에서 전세사는 사람들)이 국제중학교에 열을 올린다고
하더라구요. 정작 진짜 돈 있는 강남 학부모들은 자식이 공부 못하면 유학 보내면 그만
이고 나중에 건물 한 두개 주면 된다고 하더군요. 결국 대전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은
자식을 통해 자신들의 신분까지 동반 상승시키려는 것이죠. 사랑으로 포장된 부모의
욕심과 이기심이 자녀들을 망치고 사회를 망치죠. 고학력 여성들이 사회로의 진출이
아직도 어렵기 때문에 더욱 자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대리만족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여성들의 사회진출에 대해 많은 고민이 필요한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9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제는 사회에 진출한 고학력 여성들도 역시 자식에 대한 비뚫어진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대전 사람이라는 신조어를 알게 되었네요.

질문 2008-10-10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장기 농성하고 있는 곳.텐트들이 늘어서 있는 광경이 이상했는지 젊은 엄마와 함께 가던 어린 남자아이가 엄마에게 묻습니다.엄마! 이게 뭐야? 그 젊은 엄마 왈.너도 공부 안 하면 이렇게 돼! ---> 다카하시 상이 한겨레에 쓴 원고 가운데 일부라는 이야기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10-10 15:28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가토 이야기 인용부분이 다카하시 상의 글입니다.그래서 인용부호를 넣었습니다.
 

   한국 현대사에는 학자들이 집중하는 시기가 있다.해방공간이라는 1945~48년.그리고 그 이후부터 한국전 발발까지는 소외지대.한국전은 정치외교학 쪽에서 연구성과가 꽤 나왔지만 1950년대도 연구가 뜸하다.굳이 들자면 조봉암과 진보당이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분야다. 서중석의 두툼한 <조봉암과 1950년대>상,하 그리고 그 이전, 서른을 갓 넘긴 박태균이 냈던 <조봉암 연구>하지만 그 이후부터 4,19까지 또 공백지대.특히 제2공화국에 관해선 한승주<제 2공화국과 한국의 민주주의>가 1982년에 나온 뒤 단행본은 깜깜 무소식이다.실패한 자에 대한 무관심인가.아마 장면이나 윤보선이란 이름조차도 생소한 세대가 학부모가 된 것 같다.

  우리 역사에 미국인이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말들은 많이 하지만 정작 그런 미국인을 꼽아보라면 한 명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으리라.우선 주한 미국대사가 떠오를까?  그 다음은 미 8군 사령관 정도? 그 외에 음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휘두른 인물들은? 최근에 이승만 살리기 풍조에 힘입어 그의 미국인 고문인 로버트 올리버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그가 쓴 이승만에 관한 책이 묵은 때를 벗고 새단장으로 서점에 깔렸다.그런데 올리버가 쓴 책은 생각나지만 정작 올리버에 대해선 나 역시 그다지 아는 것이 없다.시라큐스 대학 교수였다는 것 말고...지금도 100살 정도의 나이로 살아있다는 말을 들었다.이제 이승만 뿐 아니라 그를 도왔던 미국인들에 대해서도 독서할 때 좀 신경써서 눈여겨 봐야겠다.

  우리 역사상 가장 애매하게 처리되는 정권이 장면 정권이리라.일반인들에게 2공화국에 대한 인상은 흐릿하다.이승만과 박정희라는 장기집권한 지도자 틈에서 그리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 정권이라는 인식이 강하다.게다가 이 정권은 주요 지도자 대부분이 장면을 포함해서 일제 때 관리를 지낸 이들이 많았고 또 역대정권 중 가장 미국과 조용히 지낸 정권이었다.그래서일까 장면에 대해서도 그리고 그의 미국인 관리에 대해서도 요즘엔 관심 밖이다.무능한 정권이라며 역사책에서도 간단히 몇줄 나오고 끝이다.

  장면 총리의 최측근이 도날드 웨터카라는 미국인이다.하지 장군을 따라 오키나와에서 한국으로 온 그는 원래 미군정 시절 정보계통에서 일했다.부인이 한국인 임수영인데 그녀의 동창인 경향신문 기자 윤금자를 통해 장면을 알게 되었다. 경향은 가톨릭 계열 신문이었고 자유당 시절 대표적인 야당지였다 (동아일보는 민주당 구파 쪽이었고 경향은 신파를 지지했다).신파인 장면과 경향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은 당연한 일.제 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당선되지만 부통령은 자유당의 이기붕이 낙선하고 민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는데.이승만과 장면은 견원지간이었다.장면은 당연히 찬밥신세.이렇게 푸대접받던 시절부터 웨터카는 장면을 여러모로 도왔다.유태인이었지만 가톨릭 신자였던 그는 역시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던 장면과 이렇게 저렇게 통하는 데가 있었다.4,19가 일어나고 허정의 과도내각이 3개월 있다가 장면이 내각제의 실권자인 총리자리에 오르자 웨타카에게도 햇볕이 비쳤다.그는 총리 사무실 바로 옆에 사무실을 마련해 장면과 수시로 만났고 보수도 두둑히 받았다.고생하던 시절의 보답인지 장면은 웨터카를 유독 챙겼다고 한다.

 5,16이 일어나자 장면은 갈멜 수도원으로 피신해버리는 상상외의 소심한 모습을 보여준다.그리고 이때 웨터카가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는 아직도 알려져 있지 않다.1962년 6월 웨터카는 '이주당 사건'이라는 반 박정희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한국에서 추방당했다.이때도 5,16직전 웨터카가 주도한 '장면 정권 전복과 장도영 추대'라는 미 정보기관의 공작기도가 뒤늦게 발각된 데 따른 조치라는 설도 있었다.그렇다면 그가 장면을 배신하는 공작을 이면에서 세웠단 말인가? 여하튼 이 시기의 장면,박정희,장도영,그리고 미국과의 관계는 아직도 수수께끼에 싸인 부분이 많다.

  이 시기를 다룬 책으로 알음알음 알려진 책은 강인섭<4,19 그 이후 군,정계,미국의 장막>동아일보사 1984이다.지금은 절판.이 책이 없는 나는 신동아 1983~85년에 나오는 기획기사나 인터뷰기사를 참조한다.묘하게 이 시기에 4,19~5,16당시의  정계주역들이 인터뷰나 글을 많이 썼다.장도영,현석호 등...몇년 전에는 장도영 씨(박정희에게 밀려 투옥되기도 한 그는 도미하여 정치학교수가 되었다)의 회고록이 호화장정판으로 서점에 나오기도 했다.이젠 80이 넘었으리라..,

 4,19에서 5,16 그리고 민정이양까지의 시기는 중요한 역사의 고비였다.하지만 나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1953년 폐쇄된 미국 CIA한국지부는 1959년 재건되고 지부장에 피어 드 실바가 온다.그는 5,16 때 박정희의 손을 들어준 인물.조갑제는 드 실바가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글을 자주 인용한다.그리고 5,16당시의 일에 대해 마치 자신의 작품인양 떠들었던 하우스만...

 웨터카,드 실바,하우스만 모두 정보기관 출신들.이들이 이 시기 무슨 일을 했느냐를 추적하는 것만으로도 한미관계의 이면이 상당히 드러날 것 같다.그리고 그들이 지지했던 한국의 정치지도자들의 또다른 모습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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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0-02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미에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된 민주정부를 쿠데타를 통해 전복하도록 지원한 미국을
보면 우리 국민들은 미국에 대해 다른관점에서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10-02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면 정권 때까지만 해도 한국군 장성인사에까지 미군이 막강한 권한을 휘둘렀어요.이런 관행이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 모르겠지만요.그땐 기름,탄약 량까지 미군의 통제에 있었죠.주한미군의 역사,주한 미국대사들의 역할 등도 연구해야겠죠.
 

   의회민주주의가 꽃핀 나라이며 신사의 나라로 알았던 영국.하지만 의회민주주의가 정착했다는 19세기 영국은 또한 제국주의 팽창에 여념이 없었다.당시 위대한 수상으로 꼽힌 디즈레일리는 노골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했다.또 20세기 위대한 정치가라는 처칠 역시 제국주의 정신에 투철한 자로써 인도의 독립은 물론 자치를 허용할 수도 없다고 당당히 외쳤고,2차대전이 끝나갈 무렵의 전시회담에서도 영국식민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다고 끝까지 고집을 피워서, 신탁통치를 통해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루스벨트와 여러번 부딪힌 바 있다.의회주의와 인권의 보루라는 나라가 대외정책에서는 제국주의에 충실하다는 이중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런 모습은 미국에서도 예외는 아니다.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면서 흑인의 권익이 점차 향상되었고,80년대가 되면 흑인앵커를 보는 것도 신기하지 않게 되었다.레이건이 대통령 재직 중인 1983년 가을엔 드디어 흑인 인권 운동가인 마르틴 루터 킹의 생일을 국경일(1월 세째 월요일)로 지정하게 되었다.(이는 링컨도 받지 못한 영예였다.역대 미국 대통령 중 생일이 국경일이 된 이는 워싱턴 밖에 없다). 그런데 그 무렵 미국은 카리브 해의 사회주의 소국 그레나다를 침략했다.10월 25일 공격을 시작하여 일주일 만에 이 나라를 완전히 점령하고 눈엣가시같은 정권을 무너뜨려 버렸다.명백히 침략인 이 작전을 레이건은 " 미국인들 생명을 보호하고 그레나다 내부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했다.제 2의 쿠바와 니카라과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하면서! 게다가 미국인들 중에서 이 침략에 문제제기하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미국인의 8할 이상이 지지했으며, 당시 오닐 하원의장은 그레나다 작전 반대성명을 발표했다가 여론의 거센 공세 앞에 철회한 일까지 있었다.킹목사의 생일을 국경일로 정한 정신과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오로지 노골적인 제국주의만이 있었을 뿐이다.미국의 비위에 거슬리면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정권을 갈아치운다는 협박외교의 정신만이 서슬 퍼렇게 날뛰었다.

 미국의 심기를 건드린 나라는 어떻게 된다는 걸 보여준 레이건은 또 미국의 맘에 들게 따라오면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이어서 보여준다.11월 7일 그레나다 참전 미해병대원들을 환영하는 행사를 마친 레이건은 2박 3일 예정으로 12일 방한했다.그 전해에 나카소네가 방한한 데 이어 레이건이 방한함으로서 이른바 한미일 삼각동맹의 구체적인 윤곽이 드러났고 전두환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받았다며, 더욱더 의기양양해졌다.

 1983년 가을,마르틴 루터 킹을 기리는 날의 제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 연이어 일어난 해이다.베트남 전쟁을 제국주의 전쟁이라며 맹렬히 반대했던 킹은 저승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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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9-26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순과 아이러니 투성이의 역사예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5:16   좋아요 0 | URL
레이건과 전두환의 유착엔 이것 외에도 벼라별 이야기가 다 있지요.

비로그인 2008-09-27 0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제가 더 걸 이란 영화를 보고도 아직 감상문을 못적었는데요
그 영화에서도 그래요 주인공 소냐가 자꾸 과거를 캐고 다니니까 협박과
테러로 막아보려다 도저히 못말려서 나중엔 흉상을 제작하고 표창도 해주거든요
그러자 소냐가 이런 수작에 넘어가지 않는다며 뛰쳐나가버려요.
킹 목사의 기념일 제정은 이와같은 맥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 드러내놓고 반미하는 볼리비아나 베네수엘라를 바라보는 미국의 심경이
어떨지 궁금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09-27 15:15   좋아요 0 | URL
아...그 영화 보셨군요.저는 요 몇년 새 독일의 나치청산이 불충분하다고 주장하는 책들을 보다가 그 영화를 알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엔 올해 들어왔다고 하더라구요.외국에선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는데 저 아는 사람의 이야기로는 흥행이 안 되었다고 하던데요.여기는 상영도 안 한 것 같아요.감상문을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