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한국인이라면 안수길의 <북간도>일 것입니다.하지만 이 방대한 작품에 만주사변(1931년) 이후 이야기는 불과 10여 쪽이며 바로 소설은 끝납니다.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벽두가 이야기의 대부분이죠.만주국 자체를 다룬 소설은 역시 조흔파 <만주국>외엔 본격장편이 없습니다.요즘엔 만주에 대한 학술 서적이 꽤 나오고 있고 특히 한석정 씨 같은 경우는 만주국을 전공했으니 한 번들 보시기 바랍니다.단편은 만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꽤 있지요.여기선 중국인들과 조선인의 갈등을 다룬 두 편과 평화롭게 협력하는 작품 한 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최서해<홍염>(1926년 작)-최서해는 계급갈등을 그린 초창기 경향파라고 해야겠지요.이 작품은 중국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 이야기입니다.중국인은 되놈이라고 해서 여기선 아주 몹쓸 영감 지주가 한 명 등장합니다.소작농인 문서방은 이 중국지주에게 빚이 있는데 결국 빚을 못갚아 17살 먹은 딸을 뺏기고 맙니다.부자집 횡포에 많이 보이는 이야기 구조이지요.딸이 되놈에게 잡혀 갔다고 문서방 마누라는 실성하더니 결국 죽고 맙니다.그 되놈 영감은 딸을 뺏고 난 다음 친정부모도 못 만나게 합니다.눈이 뒤집힌 문서방은 그 놈 집에 불을 지르고 기다리다가 그 영감을 도끼로 죽이고 딸을 되찾는다는 이야기.이 소설 집필하던 시기는 이른바 미쓰야 협약(1925년)이라고 해서 일본과 장작림 군벌이 조선독립운동가들을 단속하는 밀약을 맺었던 시기라서 이래저래 어지러웠던 때.중국에서는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배척하고 조선에서는 화교를 배척하던 시기입니다.1927년 조선에서도 크고 작은 화교배척 사건이 있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만주지역이 개를 많이 키우는 풍습이 소개되어 있는데 만주에선 개가죽을 방한용으로 많이 쓰지요.문서방은 빼앗긴 딸을 내놓으라고 항의하다가 지주의 개에게 물리는 장면도 나옵니다.이런 풍습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도 어느 지역을 알아가는 데 얻는 재미입니다.
이태준<농군>(1939년 작)-이 작품은 만보산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단편인데 희한한 것은 소설 초입부에 "이 사건은 장작림 정권 때의 일이다"고 쓰여 있는 것입니다.이런 갈등은 다 그 전 일이고 이제 만주국이 생겼으니 안정되어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일제 검열당국의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요.여하튼 이 소설은 만보산 사건과는 전혀 다른 대목이 삽입되어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배경이 만보산 사건이 일어난 이통하.분명히 만보산 사건을 소재로 했습니다.고향에서 논밭 팔아 만주로 온 조선인들이 논농사를 지으려고 물을 대려고 하는데 중국인들은 우리는 밭농사를 짓는다며 맞섭니다.두 나라 농민은 결국 주먹다짐까지 하면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습니다.그런데 여기서 이태준이 조선인을 두둔하면서 내놓는 장면묘사는 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중국인:물들어 오면 우린 밭농사 못 짓는다 조선인:너희도 벼농사 지어라 중국인:우린 지을 줄도 모르고 이밥(쌀밥)먹으면 배탈난다 조선인:먹지는 못하더라도 장춘에 가서 내다 팔면 잡곡보다 더 수지맞는 장사다 ,벼농사 못지으면 우리가 가르켜 주겠다....그렇게 설득해도 중국인은 막무가내였다는데....어쩐지 서부개척 시대를 미화하는 미국인이 인디언을 보는 시각 같습니다.무지하고 답답하고...교화대상인 인디언...이 당시 만주문학에서 현지 만주의 여진인이나 중국인들을 보는 조선 작가들의 이런 시각은 평론가들도 많이 지적하지요.
당시 만보산 사건 때는 일본경찰이 출동해 중국농민들에게 총격을 가했고 사상자도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런데 이 소설의 끝무렵엔 역사적 사실과 정반대로 중국인 병력이 출동하고 게다가 조선인 농민들을 쏘아 죽이는 대목이 나옵니다.수난 당하는 조선인 상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결국 마지막은 조선 농민들은 강물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해서 중국인들의 밭으로 물이 콸콸 흐르는데 그 총맞아 죽은 조선인 남자가 떠내려 옵니다.
안수길<목축기>(1940년작)-이 작품은 만주에서 중국인과 조선인이 사이좋게 지내는 이야기입니다.위의 두 소설과는 달리 만주국이라는 국명이 나옵니다.교사노릇하던 조선인 주인공이 돼지를 기르는 사업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그는 기차로 며칠을 걸려 충청도까지 가서 아기돼지들을 사가지고 열차에 실어 만주에 돌아옵니다.그 산골외진 곳에서 평생 돼지를 기르면서 살아온 66세의 중국인 사내 송노인은 이 돼지를 함께 키우면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입니다.만주에선 예로부터 돼지를 많이 길렀지요.이는 여진인들도 마찬가지.그래서 돼지를 키우지 않는 몽고족 계통의 종족은 여진족을 야만인이라고 했다네요.여하튼 조선인과 이 중국인은 돼지를 키우면서 협력하는데 워낙 산골이다 보니 늑대가 돼지를 물어가기도 하고 해서 큼직한 셰퍼드 세마리를 키웁니다.그런데 어느 날 호랑이가 와서 개 한마리를 죽이고 송씨는 귀 한쪽을 물어뜯기는 사고가 납니다.낙담한 송 씨...기어코 호랑이를 잡아야겠다고 총기허가까지 받으려고 하지만 엽총허가증이 안 나옵니다.하지만 이런 시련을 극복하고 돼지들은 무러무럭 자란다는 결말...어쩐지 우리나라 새마을 드라마 같은 구석이 있지만 깔끔하고 재밌습니다.당시 일본은 만주국은 5족-조선인,일본인,여진인,중국인,몽고인-이 협동해서 산다며 5족협화를 강조해서 심지어 협화복이라는 옷종류까지 새로 만들 정도였습니다.검열이 심한 관동군(만주의 실권자)도 안수길의 이런 소설 내용엔 별 유감이 없었겠지요.동물에 관심있는 이들은 동물소설로 읽어도 좋을 듯한 내용입니다.산골에서 평생을 돼지치기만 하면서 산 중국인 송씨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데루스 우잘라의 주인공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순박하고 강건한 사나이...뭐 그런 남성상 있지요? 또 오래된 소설이니만치 좀 생소한 단어들도 나오지요.예를 들어 중돝은 중간 정도 자란 돼지를 말합니다.또 돈호열자라는 단어도 나오는데 돈은 돼지,호열자는 콜레라의 옛말이니 돼지 콜레라를 이릅니다.
만주에 사는 조선인 주인공이 충청도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사온 돼지종류가 버크셔입니다.제가 가축사육에도 관심이 있는데 버크셔가 일제 때 들어왔군요.입시 때 농업과목을 선택해서인지 익숙한 종류입니다.요즘은 흰 랜드레이스 돼지가 많은데 예전 저 어렸을 땐 시커먼 버크셔 돼지도 많았지요.이 소설에선 새로운 품종으로 성격도 순한 돼지로 나옵니다.만주국의 농업 및 목축 정책에도 관심이 가는 내용이지요.
안수길은 <북간도> 외에도 만주에 관한 소설을 몇편 남겼는데 그가 쓴 최초의 장편 <북향보>역시 만주에 사는 조선인을 그렸지요. 망나니 건달패 조선인들이 못된 짓하는 장면도 많이 나온다고 하니 한번 구해서 읽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