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친구를 사귈 때 다음 사항을 따지지 말라고 했습니다.제일 먼저 나이를 따지지 말라고 했습니다.나보다 어린 사람도 내가 본받을 만한 지혜와 인품을 갖춘 이가 얼마든지 있는데 단지 나이를 내세워 그들을 동생이나 어린애  취급하면 결국 나만 손해라는 거죠.걸핏하면 한살 차이로도 선배니 후배니 따지는 관행이 있는 우리나라에선 이런 권고는 따를 사람이 적을 것입니다.하지만 저는 실제로 나이 어린 사람과 대등하게 사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줄거움을 알기 때문에 적극 권하고픈 삶의 지혜이기도 합니다.동갑만 친구로 사귄다는 것은 그만큼 우정의 범위가 좁아진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둘째로 맹자는 직위와 신분을 따지지 말라고 했습니다.맹자가 요즘 태어났다면 학력도 따지지 말라고 했을 것입니다.예전에 어떤 나이 든 남성이 신문에 이런 글을 썼습니다.자신이 젊었을 땐 회사에 국민학교나 중학교만 졸업하고 들어온 이도 있고 고졸,대졸도 있어서 어려서 사회생활한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자기들이 겪었던 일도 들으면서 다양한 삶을 간접경헙할 기회가 있었는데 요즘은 거의 학력들이 비슷한 사람끼리 대동소이한 경험만 주고받으니 다양성이 없어서 재미가 없다구요.남자들 같은 경우도 한 내무반이 몽땅 대학재학 중인 이들로만 구성된 곳이  드물지 않다고 하니 군대에서도 다양한 학력을 지닌 이들이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죠. 

  세째로 맹자는 가문을 따지지 말라고 했습니다.여기서 가풍을 따지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문을 따지지 말라는 데 유의해야 합니다.쟁쟁한 세도가를 선호하는 풍조에 경종을 울리고자 한 이야기니까요.요즘 같으면 분양아파트냐,임대 아파트냐 따지면서 애들을 편가르기 하는 풍조를 지적했을 것입니다.허름한 집에 살아도 얼마든지 내가 사귈만한 사람은 많다는 뜻이지요. 

  소학엔 상대가 나보다 네살 다섯살이 넘으면 형님처럼 대하라는 구절이 있습니다.그 이하는 친구처럼 지내라는 것이지요.일제시대 때 중등교육(당시로선 엘리트지요)받은 사람들의 회고록을 보면 당시엔 선배가 후배들을 얼차려 주는 그런 짓을 안했다고 합니다.엘리트들은 그런 야만스런 짓은 안한다는 것이지요.입시 점수 높은 의대생들간에 선배가 후배를 군기잡을 때 구타까지 한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그 누구보다도 엘리트 의식이 높다는 그들이 왜 이런 못된 관행을 계속 이어갈까요.유교윤리는 수직윤리가 강합니다만 친구 사귀는 데에는 나이를 너무 따지지 말라는 정도의 융통성은 있기 때문에 그나마 숨쉴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엔 상급학교를 진학하지 못하고 일찍 사회생활을 한 이들이 꽤 있습니다.그런 이들을 접촉하기 때문에 저는 초면에 학번이 뭐냐는 식으로 질문하는 사람들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그런데 우리나라엔 어느덧 그게 관행이 된 것 같습니다.대학물 먹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학번을 물어본 사람때문에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어버린 일도 있었습니다.대학 나온 티를 꼭 그렇게 내야만 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신문에서도 학번이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기자들까지 그런 풍조를 조장하고 있습니다.기사를 보면 운동선수도 고졸신인이니 뭐니 하면서 꼭 학력을 강조합니다.386이란 단어도 못마땅한데 국회의원들을 소개하면서 475라는 단어도 쓰더군요.그때가 90년대니까 70년대에 대학물 먹은 40대라는 뜻이라는 걸 알고 꼭 이렇게 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세상에...80년대만 해도 고교에서 대학교 간 사람이 삼분의 일이 되지 않았는데,70년대면...우리나라 대학사에서 70년대면 정부가 의도적으로 대입정원을 삭감하여 70년대 말에 고교생당 대학진학률은 60년대보다 더 적었습니다.그런데 꼭 그렇게 학번을 내세워서 강조를 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말인지... 

  나이 따지고 지위나 학력 따지고 재산 따지고 그래서 친구를 고른다면 결국 친구범위가 좁아진다는 결과 밖에 안되겠지요.유교 문화권인 일본과 중국에서도 학생들 사이에서 선배가 후배들의 군기를 잡는 일은 없습니다.한국유학생들은 외국에 가서도 이런 짓을 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별종인간 취급을 받더군요.평등을 두려워하고 모든 인간관계를 위아래로만 따지는 버릇은 정말 언제쯤이나 없어질까요.오히려 조선시대나 일제시대엔 요즘 같지는 않았다는데 말입니다.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8-12-24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를 따져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많으면 가르치려 드는 경우가 참 흔해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더 그렇고요. 자신이 살아보니 이렇더라 라고 말해주는것 까진 좋은데 자신의 경험이 곧 진리고 여기에 반대하면 버릇없는 사람이 되버리죠. 군대 전우가 제대 후에 친구로 이어져 지금까지 계속 만나는데요 그 친구는 집안 사정상 대학을 못갔지만 영화나 음악을 많이 추천해주고 얘기도 많이 해주는데 아르바이트 경험도 많아서인지 속이 깊어요.다른나라는 어느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는 사람사이에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너무 커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4 1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처럼 나이는 물론 직장 직위 등도 이렇게 위아래 따지는 경우는 없죠.일본만 해도 영화 자세히 보시면 알겠지만 직장상사에게도 그냥 누구누구 상 이렇게 하고 직장상사도 부하에게 누구누구 상이라고 불러요.우리나라처럼 직책 뒤에 님을 붙이는 식이 아니지요.여하튼 우리나라엔 만민평등이라는 사상이 뿌리를 내리기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같은 동아시아 나라들 여론 조사해봐도 우리나라가 세대간 갈등이 더 심한 것도 이런 언어상의 특징때문입니다.저는 나이가 많다고 내게 반말하는 놈들은 무조건 두들겨 패줬습니다.음...패는 방법을 동영상으로 찍어 올릴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1:11   좋아요 0 | URL
스승과 제자간에 위아래 따지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학생들간에는 평등하게 지내는 게 제 소원입니다.소학에서처럼 네살 이하는 당연히 친구로 지내야 한다고 봅니다.우리 조상들도 그랬다니까요.
지나친 위계질서는 부패의 온상이라고 봅니다.윗사람이 너무 많은 권한을 가지면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마노아 2008-12-24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를 옮겨 다니다 보면 몇 학번이냐고 묻는 선생님들이 그렇게 많아요. 결국 궁금한 것은 나이라는 건데, 그걸 꼭 몇 학번이냐고 묻더군요. 난 그게 참 짜증났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얼마 뒤 바로 시집간 친구가 있는데, 선생님들과 얘기하다가 친구는 학부형이라고 하니까 학생 때 사고를 쳤다는 식으로 인식을 하더라구요. 내 참 어이 없었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1:12   좋아요 0 | URL
학번 묻지 않는 운동을 했으면 좋겠습니다.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대학 나오는 것도 아니구요.저는 우리 형제 중에도 대학 안 나온 이가 있어서 대학 이야기 안하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만.

Mephistopheles 2008-12-25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파트단지가 인접한 초등학생들(요즘 아파트 단지 주변이 아닌 초등학교가 있었던가)은 아예 대놓고 아파트 면적별로 끼리끼리 논다고 하잖습니까. 이걸 뭐라고 봐야 하나 자본주의의 또다른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요..사실 애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다 어른들이 뿌려놓은 저주의 씨앗에 의한 행동일뿐이겠죠..성장과정에서 친구를 사귀면서부터 패거리문화와 계급문화가 적용된다는 것은 참 거시기하게 보여집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1:15   좋아요 0 | URL
인간관계에 뭔가를 보태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포용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와 비슷한 것이 아니면 끝없이 뺄셈을 하려고 하니 다양한 인간관계 형성이 힘들지요.끼리끼리가 아닌 문화를 경험하지도 못하구요.

후애(厚愛) 2008-12-25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한인들을 보게 되면 나이와 고향, 가족, 직업 등을 묻습니다. 한마디로 호구조사 당하는 기분이지요. 어쩔 때는 제 나이와 비슷한 한인들을 보게 되는데 우연히 말을 하다보면 제 나이를 묻습니다. 그럼 제가 나이를 말해주면 "그럼 내가 위네. 앞으로 언니라고 불러" 이렇게 말하면서 바로 반말입니다. 그것도 초면에 말입니다. 그럼 제가 묻지요.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요? 하고 물으면 나보다 한 두살 많다고만 합니다. 저는 그저 웃고 만답니다. 제 스승님이 저보고 선생님이라 부르지 말고 앞으로 언니라고 부르라고 하는데 사실 어색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아무리 스승님이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지만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아직까지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25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지도 않은데 음...내가 언니네...하고 바로 반말을 한다...그러면 두들겨 패십시오.

가시장미 2008-12-27 0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노이에자이트님과도 친구 할 수 있는건가요? ^^ 크크

노이에자이트 2008-12-27 16:49   좋아요 0 | URL
물론입니다.

가시장미 2008-12-29 13:40   좋아요 0 | URL
정말요? 그럼- 앞으로 형이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ㅋㅋ 나름 제 친근감의 표현이랍니다. 이 곳에서 형이라고 부르는 분이 꽤 되거든요. 그리고 노이에자이트님은 닉네임이 너무 어려워요. 앞으로 노형이라고 부르면 안 될까요? ^^;;; 아니면 이트형? 노이형? 노이에형? 노이에자형? ㅋㅋ 맘에 드는 호칭으로 선택해 주세요. 으흐

노이에자이트 2009-01-04 00:56   좋아요 0 | URL
노이에 형이 괜찮은데요.아예 노이에...하고 불러도 무관합니다.

쟈니 2008-12-27 1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생활에서 전공과 학번에 대한 질문이 너무 당연시되고 있죠. 이런 질문 하지 말자고 예전에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찬성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불쾌해 하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왜 그리 피해의식을 가지냐.. 라고..
그때, 차별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게 이렇게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레카폴님께서 옮기신 내용 마음에 확 와닿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27 16:50   좋아요 0 | URL
위아래 따지는 거 피곤하죠.우선 인간은 평등하다는 사실자체를 인정 못하는 풍토가 역겹습니다.전세계 모든 사람들이 다 누리는 권리를 왜 우리는 못누리는지...
 

  박정희 체제는 정치가 불가피하게 내포할 수 밖에 없는 갈등과 이의 조정을 위한 타협 등을 무조건 당파분열이나 정쟁이라고 몰아붙이면서 정치자체를 불신, 혐오하게 하고 오로지 경제성장주의를 부추겼습니다.수출만이 살 길이다 등의 표어는 그런 시기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지요. 정치적 무관심이 구질서를 돕는 기능을 한다는 것은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하지만 어찌 박정희 뿐인가요?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 이야기만 나오면 거부감을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한마디로 말해서 경제에 민주주의가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이들이지요.이런 이들이 금과옥조처럼 입에 달고 다니는 말이 있습니다.경제문제는 경제로 풀자는 거지요.그러면서 경제를 사업장 수준으로 한정지으려는 꼼수를 씁니다.하지만 민주화의 핵심은 그동안 민주적 통제 밖에 놓여 있는 부문을 민주적 통제로 끌어들이는 겁니다.경제문제 자체는 기본적으로 정치적이며,단순히 계량적 전문지식을 갖춘 경제관료만의 독점물이 아닙니다.3자 개입 금지를 걸핏하면 들고 나오는 이들을  보십시오.사실상 자율적인 노동조합의 존립과 활동 자체를 부정하자는 거지요.하급노조에 대한 상급노조의 지도와 협력 그 자체를 부정하고 산별노조를 해체하자 이겁니다.하지만 전경련을 비롯한 자본가 단체들은 수많은 제3자인 학자,관료,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고 접촉을 유지하고 있지요.이는 노사관계의 형평성을 무시한 주장입니다.

  오로지 경제만을 강조하는 이들이 정치혐오를 조장하는 통로 중의 하나가 대중매체입니다.현재 언론에 비친 정치는 무능,부패,패싸움 등  부정적인 것 일색입니다.하지만 이런 식의 정치혐오는 민주주의의 건전한 발전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칩니다.이런 식의 정치관을 인민이 지니게 되었을 때, 올바른 정치참여를 통한 민주발전은 백년하청입니다.냉소적인 인간이 탐욕으로 무장하면 건전한 시민의식은 전혀 없는 인간이 되지요.내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느냐 나가느냐에 대한 즉물적인  반응 외에는 그 어떤 일에도 무관심합니다.바로 이때문에 민주주의가 껍질만 남기를 바라는 지도자는 인민이 탈 정치화되기를 바라고 오로지 경제문제에만 관심사를 좁히기를 바랍니다.아예 정치혐오나 경멸을 조장하거나 방치하지요.이런 매커니즘은 지적하지 않고 애매한 고담준론을 일삼으며,정치 냉소를 부추기면서 자신은 마치 고상한 선비인 체하는 컬럼을 쓰는 먹물들은 독재자보다 더 극악한 자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정치에 무관심하고 투표하지 않는 행위를 마치 자랑인 듯이 떠버리는 인간들이 얼마나 민주주의 발전에 해충 같은 존재인지 알 수 있는 논문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강정인<소크라테스,악법도 법인가>(문학과 지성사1994)에 수록된 '정치불참의 의미와 성격'이 바로 그것입니다.미국에서 벌어진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논쟁을 정리한 논문인데 재미있는 것은 정치적 무관심을 하나의 권리로 인정해서 이를 정치적 초연함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주로 보수적인 이들이라는 사실입니다.반면 정치적 무관심을 민주주의의 실패로 간주하는 이들은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삶의 영역이나 정치적 삶의 영역을 개척할 것을 주장합니다.이 논문 외에도 이 책에는 우리나라에 만연된 법실증주의적 사고방식을 비판하는 논문,존 롤스의 시민 불복종에 관한 논문 등 알맹이 있는 글들이 많으니 정독해 보시기 바랍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시장독재와 절차적 민주주의가 아슬아슬하게 공존하고 있었습니다.현정부에서는 오로지 시장의 독재만 남고 절차적 민주주의도 점점 사그라져들고 있는 듯합니다.참여민주주의를 핵심으로 하는 민주주의 윤리는 능률과 효율성의 원리만을 떠받드는 이들이 장기를 발휘하는 경제성장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존엄성이 자유와 평등에 의해 꽃이 피는 도덕적 범주의 영역이기도 합니다.하지만 정치혐오와 냉소로 무장한? 장삼이사들만 늘어난다면 만사휴의지요.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노이에자이트 2008-12-20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소도 전염이 되는 모양입니다.되도록 그런 건 자기 혼자만 간직하면 될텐데요.아리에스는 주경철<역사의 기억>인가요...문지사의 문고판에 소개된 것만 읽고 원저는 읽지 못했습니다.격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21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그럼 아리에스 책을 함께 읽도록 할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2 16:48   좋아요 0 | URL
하하하...아리에스 책을 더욱 읽고 싶군요.

쟈니 2008-12-21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국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언론의 시각도 비슷해요(조중동은 제외하고라도). 언론의 태도가 마치 "쟤들 죽어라 싸운다. 온몸으로. 왜 저러냐.." 하는 식이에요. 왜 싸우는지에 대해, 그리고 어떤 입장이 중요한지에 대해 좀 냉철하게 설명하는 모습이 필요하고. 한나라당이나 극우에 대해서도, 그저 '꼴통들' 이라고 말 한번 뱉고 끝낼 게 아니라, 그들이 왜 그러는지에 대한 차분한 생각이 필요한데 말이죠.
우리나라는 너무 법이 당연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이면 다 되는 세상. 그 법을 제멋대로 바꿔놓으면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구요. 어찌보면, 권위에 대한 반성없는 복종일수도 있고.. 에고.. 어렵네요 ^^

노이에자이트 2008-12-22 16:50   좋아요 0 | URL
법에 대한 그런 인식은...그게 다 속류 법실증주의 때문에 그래요.저는 정치권을 싸잡아 비난하는 그런 논평을 삼가고 어느 쪽이 어디가 잘하고 못했는지를 분명히 실명으로 밝히면서 논평을 했으면 좋겠어요.

비로그인 2008-12-22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주변에도 이런 냉소를 보이는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 앞에 정치인이 있다면 아마 죽이겠다고 덤빌지도 몰라요. 그런데 정작 투표는 안한다는거죠. 그 정치인들을 누가 국회로 보내줬느냐는 생각안하는건지 못하는건지 그렇더라구요.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선택해야지 아예 포기해버리고 욕만하는데 정말 들어주기 싫죠.
그렇게 비판의 강도를 높여야 자신의 정치혐오,냉소 그리고 주권포기가 정당화 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죠. 분명한건 그렇게 욕해야 자신이 편하다는 것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08-12-22 16:51   좋아요 0 | URL
설득력 있는 유리 님의 평가에 동의합니다.위에 소개한 책을 읽으시면 정치적무관심을 조장하는 이들의 속셈을 더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쟈니 2008-12-22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리님께서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씀에 정말 동의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최선이 아니면 최악을 고르거나, 최악이 되도록 하는 행동을 하더라구요. 세상에 흠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 중에 흠이 적은 사람들을 국회로 보내야 하는데. 지나치게 도덕적 순결주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가 지저분 한것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22 21:11   좋아요 0 | URL
문학에서도 유독 순수를 강조하는 이들이 그다지 순수하지 못한 이들이 많죠.국회에서 싸움하는 모습은 미성년자들이 못보게 해야한다지만 저는 오히려 그런 싸움하는 모습을 정치허무주의 식으로 논평하는 것이 더 해악들 끼친다고 봅니다.

네꼬 2008-12-23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냉소를 자랑하는 사람들만큼 편리하게 자기 약점을 포장하는 사람들도 없다고 봐요. 난 상관 없어, 난 기대를 버린지 오래야, 난 쿨해, 난 세련됐어, 이런 태도 참 무책임해요. (그리고 바보같아요.) 뭐, 저도 딱히 남 흉 볼 처지는 못 됩니다만, 뭐, 저는 그래도 반성은 한다 이거죠, 뭐. (이게 무슨 이상한 변명?) 차라리 나랑 견해가 다른 사람이 반가운 요즘이에요. 콧방귀 풍풍 뀌는 사람들, 아우 맥 빠져.

노이에자이트 2008-12-24 15:25   좋아요 0 | URL
하하하...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냉정히 본다면 웃기고 있는 존재들이죠.반성하는 네꼬 님이 더 멋있습니다.
 

  만주를 배경으로 한 작품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한국인이라면 안수길의 <북간도>일 것입니다.하지만 이 방대한 작품에 만주사변(1931년) 이후 이야기는 불과 10여 쪽이며 바로 소설은 끝납니다.주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벽두가 이야기의 대부분이죠.만주국 자체를 다룬 소설은 역시 조흔파 <만주국>외엔 본격장편이 없습니다.요즘엔 만주에 대한 학술 서적이 꽤 나오고 있고 특히 한석정 씨 같은 경우는 만주국을 전공했으니 한 번들 보시기 바랍니다.단편은  만주를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꽤 있지요.여기선 중국인들과 조선인의 갈등을 다룬 두 편과 평화롭게 협력하는 작품 한 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최서해<홍염>(1926년 작)-최서해는 계급갈등을 그린 초창기 경향파라고 해야겠지요.이 작품은 중국인 지주와 조선인 소작농 이야기입니다.중국인은 되놈이라고 해서 여기선 아주 몹쓸 영감 지주가 한 명 등장합니다.소작농인 문서방은 이 중국지주에게 빚이 있는데 결국 빚을 못갚아 17살 먹은 딸을 뺏기고 맙니다.부자집 횡포에 많이 보이는 이야기 구조이지요.딸이 되놈에게 잡혀 갔다고 문서방 마누라는 실성하더니 결국 죽고 맙니다.그 되놈 영감은 딸을 뺏고 난 다음 친정부모도 못 만나게 합니다.눈이 뒤집힌 문서방은 그 놈 집에 불을 지르고 기다리다가 그 영감을 도끼로 죽이고 딸을 되찾는다는 이야기.이 소설 집필하던 시기는 이른바 미쓰야 협약(1925년)이라고 해서 일본과 장작림 군벌이 조선독립운동가들을 단속하는 밀약을 맺었던 시기라서 이래저래 어지러웠던 때.중국에서는 중국인들이 조선인을 배척하고 조선에서는 화교를 배척하던 시기입니다.1927년 조선에서도 크고 작은 화교배척 사건이 있게 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만주지역이 개를 많이 키우는 풍습이 소개되어 있는데 만주에선 개가죽을 방한용으로 많이 쓰지요.문서방은 빼앗긴 딸을 내놓으라고 항의하다가 지주의 개에게 물리는 장면도 나옵니다.이런 풍습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도 어느 지역을 알아가는 데 얻는 재미입니다.

  이태준<농군>(1939년 작)-이 작품은 만보산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단편인데 희한한 것은 소설 초입부에 "이 사건은 장작림 정권 때의 일이다"고 쓰여 있는 것입니다.이런 갈등은 다 그 전 일이고 이제 만주국이 생겼으니 안정되어 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한 일제 검열당국의 의도가 있었던 것일까요.여하튼 이 소설은 만보산 사건과는 전혀 다른 대목이 삽입되어 있으니 주의를 요합니다.배경이 만보산 사건이 일어난 이통하.분명히 만보산 사건을 소재로 했습니다.고향에서 논밭 팔아 만주로 온 조선인들이 논농사를 지으려고 물을 대려고 하는데 중국인들은 우리는 밭농사를 짓는다며 맞섭니다.두 나라 농민은 결국 주먹다짐까지 하면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습니다.그런데 여기서 이태준이 조선인을 두둔하면서 내놓는 장면묘사는 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중국인:물들어 오면 우린 밭농사 못 짓는다  조선인:너희도 벼농사 지어라  중국인:우린 지을 줄도 모르고 이밥(쌀밥)먹으면 배탈난다  조선인:먹지는 못하더라도 장춘에 가서 내다 팔면 잡곡보다 더 수지맞는 장사다 ,벼농사 못지으면 우리가 가르켜 주겠다....그렇게 설득해도 중국인은 막무가내였다는데....어쩐지 서부개척 시대를 미화하는 미국인이 인디언을 보는 시각 같습니다.무지하고 답답하고...교화대상인 인디언...이 당시 만주문학에서 현지 만주의 여진인이나 중국인들을 보는 조선 작가들의 이런 시각은 평론가들도 많이 지적하지요.

  당시 만보산 사건 때는 일본경찰이 출동해 중국농민들에게 총격을 가했고 사상자도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런데 이 소설의 끝무렵엔 역사적 사실과 정반대로 중국인 병력이 출동하고 게다가 조선인 농민들을 쏘아 죽이는 대목이 나옵니다.수난 당하는 조선인 상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결국 마지막은 조선 농민들은 강물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해서 중국인들의 밭으로 물이 콸콸 흐르는데 그 총맞아 죽은 조선인 남자가 떠내려 옵니다.

  안수길<목축기>(1940년작)-이 작품은 만주에서 중국인과 조선인이 사이좋게 지내는 이야기입니다.위의  두 소설과는 달리 만주국이라는 국명이 나옵니다.교사노릇하던 조선인 주인공이 돼지를 기르는 사업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그는 기차로 며칠을 걸려 충청도까지 가서 아기돼지들을 사가지고 열차에 실어 만주에 돌아옵니다.그 산골외진 곳에서 평생 돼지를 기르면서 살아온 66세의 중국인 사내 송노인은  이 돼지를 함께 키우면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입니다.만주에선 예로부터 돼지를 많이 길렀지요.이는 여진인들도 마찬가지.그래서 돼지를 키우지 않는 몽고족 계통의 종족은  여진족을 야만인이라고 했다네요.여하튼 조선인과 이 중국인은 돼지를 키우면서 협력하는데 워낙 산골이다 보니 늑대가 돼지를 물어가기도 하고 해서 큼직한 셰퍼드 세마리를 키웁니다.그런데 어느 날 호랑이가 와서 개 한마리를 죽이고 송씨는 귀 한쪽을 물어뜯기는 사고가 납니다.낙담한 송 씨...기어코 호랑이를 잡아야겠다고 총기허가까지 받으려고 하지만 엽총허가증이 안 나옵니다.하지만 이런 시련을 극복하고 돼지들은 무러무럭 자란다는 결말...어쩐지 우리나라 새마을 드라마 같은 구석이 있지만 깔끔하고 재밌습니다.당시 일본은 만주국은 5족-조선인,일본인,여진인,중국인,몽고인-이 협동해서 산다며 5족협화를 강조해서 심지어 협화복이라는 옷종류까지 새로 만들 정도였습니다.검열이 심한 관동군(만주의 실권자)도 안수길의 이런 소설 내용엔 별 유감이 없었겠지요.동물에 관심있는 이들은 동물소설로 읽어도 좋을 듯한 내용입니다.산골에서 평생을 돼지치기만 하면서 산 중국인 송씨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데루스 우잘라의 주인공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순박하고 강건한 사나이...뭐 그런 남성상 있지요? 또 오래된 소설이니만치 좀 생소한 단어들도 나오지요.예를 들어 중돝은 중간 정도 자란 돼지를 말합니다.또 돈호열자라는 단어도 나오는데 돈은 돼지,호열자는 콜레라의 옛말이니 돼지 콜레라를 이릅니다.

  만주에 사는 조선인 주인공이 충청도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사온 돼지종류가 버크셔입니다.제가 가축사육에도 관심이 있는데 버크셔가 일제 때 들어왔군요.입시 때 농업과목을 선택해서인지 익숙한 종류입니다.요즘은 흰 랜드레이스 돼지가 많은데 예전 저 어렸을 땐 시커먼 버크셔 돼지도 많았지요.이 소설에선 새로운 품종으로 성격도 순한 돼지로 나옵니다.만주국의 농업 및 목축 정책에도 관심이 가는 내용이지요.

  안수길은 <북간도> 외에도 만주에 관한 소설을 몇편 남겼는데 그가 쓴 최초의 장편 <북향보>역시 만주에 사는 조선인을 그렸지요. 망나니 건달패 조선인들이 못된 짓하는 장면도 많이 나온다고 하니 한번 구해서 읽어야겠습니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노아 2008-12-15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서해의 홍염은 너무 익숙한 내용인지라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익숙한 탓에 착각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노이에자이트님의 관심사에서 벗어난 부분은 뭐가 있을까요? ^^

노이에자이트 2008-12-16 12:33   좋아요 0 | URL
영국의 로빈 훗 이야기에도 부자집 영감이 가난한 집 이쁜 딸을 데려가니 로빈 훗이 다시 데려온다는 이야기가 있지요.그런 구도의 이야기는 상당히 흔합니다.홍염이 어린이 용으로도 나왔더라구요.다소 놀랐습니다.하기야 올해 나온 어린이용 세계사에 촛불시위까지 담은 게 있다고 우리 동네 서점주인이 소개하더라구요.

가시장미 2008-12-15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사건을 다룬 소설이라고 그 시각에 따라 내용이나 소재가 참 다양하군요. 특히 <농민>은 우리나라의 시각에서 현실을 재구성한 소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모든 책이 다 그렇겠지만 소설은 픽션이라 더더욱 작가의 개인적이고 상대적인 시각의 투사가 가능한 것 같아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읽는 건 혼란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

우선 역사에 대해 바로 알고 소설을 접해야지 저처럼 역사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소설부터 접하게 되면 왜곡된 시각을 갖기 쉽겠는걸요? 이래저래 역사공부는 참 힘드네요. 소설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해놓고 또 딴소리를 하는 ㅋㅋㅋ

노이에자이트 2008-12-16 22:36   좋아요 0 | URL
<농군>이 많은 논란이 된 작품입니다.당시 실제로는 중국경찰도 출동하고 일본경찰도 출동했는데 이 작품에선 일본경찰이 충돌한 건 언급 안했으니까요.일본에서도 만보산 사건 다룬 소설이 있는데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번역은 안 된 것 같아요.
역사적 배경을 알고 보는 방법도 있지만 보고 나서 궁금해서 역사공부하는 방법도 있지요.

비로그인 2008-12-16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 가치롭군요.
저는 특히 목축기가 가장 관심이 갑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군요.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도 기억해둬야겠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12-16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주하면 벌판만 있는 줄 아는데 대삼림 지대도 웅장하므로 숲과 맹수를 소개하는 소설도 몇 편 있지요.데르수 우잘라는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었으니 한 번 읽어보세요.그런데 안수길 단편선이 지금도 있나 모르겠네요.

쉽싸리 2008-12-16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 인사, 꾸벅.
강경애 작가의 경우는 언급이 없으신것 보니까 그 분 작품의 배경이 만주는 아닌가보네요.
인간문제는 읽은것도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제가 전에 본게 바크셔가 맞다면 참 멋지데요.
유기축산방식으로 키우는 곳 이었는데 참 예쁘더군요. 강렬한 검정색. 흑도야지.
일말의 다른색도 껴있지 않던 그 자태. 한 참을 들여다 봤던 기억이 납니다.
얼마후 한 마리 샀는데 고기가 지방이 너무 많아서 한 참을 덜어냈던 기억이 납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16 13:34   좋아요 0 | URL
어서 오십시오.강경애는 만주 간도에서 산 적이 있지요.인간문제는 우리나라 배경 같은데요.전반이 용연이라는 가상공간의 시골이고 후반은 인천 공장지대입니다.또박이 님 덕에 인간문제를 다시 읽어볼까 생각해봅니다.
아하...요즘은 흰 랜드레이스가 많지요.바크셔는 색깔이나 생김새는 우리나라 돼지와 비슷하지만 덩치는 엄청나게 크지요.우리나라가 외국가축이나 농작물을 도입한 과정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요즘 도시에서 공부한 이들은 가축품종에 대해 모르지요.바크셔에 관심이 있다니 반갑습니다.
 

   만보산 사건(1931년 7월 2일)이 난 또다른 직접적인 원인은 만주 본토의 중국인들은 밭농사를 짓고 조선인 이주민은 논농사도 지을 줄 안다는 것이었죠.장춘(만주국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수도라고 해서 신경으로 개칭, 또다른 대도시 심양은 봉천과 동일한 곳)의 만보산 밑에서 일어난 그 사건도 중국인들이 경작하던 밭에다가 조선인들이 물을 대니까 문제가 생긴 겁니다.그렇게 되면 중국인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지요.그런데도 현지 일본병력은 조선인들을 노골적으로 편듭니다.하지만 정작 이때는 큰 충돌이 없었습니다.그런데 이 당시 조선일보는 이 곳에서 무슨 사상자라도 난듯 오보를 내고 이후 7월 10일까지 조선에서는 온갖 참혹한 일이 벌어집니다.강준만<한국 근대사>제8권에서는  조선일보의 이 오보를 크게 다룹니다.소제목이 아예 '일제음모에 놀아난 조선일보"입니다.이 오보사건은 화교학살을 다루는 책이 거의 다 다루고 있는데 책마다 그 강조논점은 다릅니다.강준만은 한홍구의 한겨레 21의 글<호떡집에 불지른 수치의 역사>를 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만 이 호떡집 수난 이야기는 그전에도 나왔지요.이상옥<한국의 역사>1969 제8권이 그것인데 이 씨는 일제시대를 직접 경험한 세대이니 더 생생했겠지요.그러나 그다지  한국인이 가해자라고는 분명히 적시하지 않았습니다.그냥 한국인의 습격을 받아 불이 안난 호떡집이 없었다는 정도였지요.그 무렵 나온 윤상근<태평양 전쟁>전 5권 중 1권 초반부에서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사를 주로 인용하여 보고서 쓰듯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었습니다.물론 윤씨는 강준만 씨 정도로 조선일보의 오보사건을 규탄하진 않았고 폭동이 심각해지자 조선 동아 양측은 물론 사회각계에서 우려의 성명을 보내고 중국의 국민당 정부도 조선과 중국의 우호가 중요하다면서 사태 수습에 나섰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임산부의 배를 가른 이야기가 나온 조흔파<만주국>(육문사)은 이 사건을 다룬 역사물 중 가장 강도높게 당시의 한국인 폭도들을 비난한 책입니다.이 사건은 분명히 중국 거류민 대량 학살 사건이라고 썼지요.아예 강자인 일본인에게 허가 맡은 객기의 소산이라고까지 했습니다.1970년에 나온 이 책을 대학 도서관에서 읽고 만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저는 지금도 만주사변과 만주국에 관한 신간은 반드시 확인하여 도서관에서 대출해 보고 있습니다.조흔파 씨는 얄개전의 작가로만 알려져 있는 것 같은데 역사물 방송극을 많이 집필한 방송극 작가입니다.철종시대부터 경술국치까지의 격동의 역사를 다룬 <대한 백년>전4권을 <만주국> 이전에 집필하고 만주국 이후에는 아예 우리나라 고조선부터 현대까지 다룬 방대한 <소설 한국사>를 집필했습니다.그런데 그의 다른 책은 헌책방에 지금도 가끔 나옵니다만 <만주국>은 통 찾아볼 수가 없군요.

  이 사건을 다룬 책에서 많이 나오는 당시 화교들의 사상자 통계인 사망 127명 부상 393명은 리튼 보고서에 나오는  수치입니다.국제연맹은 당시 관동군이 만보산 사건 직후에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세우는 등 일본의 폭주가 계속되자 리튼을 단장으로 조사단을 꾸려 현지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내게 합니다.이 보고서는 <만보산 사건 연구>로 유명한 박영석 씨가 번역했는데 보고서 영어 원문도 함께 수록했으니 영어공부하는 이들도 참고할 만합니다.탐구당에서 나왔지요.강준만의 한국근대사 8권에는 이 당시 화교들의 재산피해를 250만원이라 적었지만 리튼 보고서에는 250만엔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경쟁은 굉장히 심했습니다.1920년대 말,신간회 옹호에 나선 조선일보는 진보적이었고 동아는 브나로드 운동 자치운동 지향이라 보수적이었죠.조선일보에는 이 당시 좌파들이 많았습니다.그런데 조선일보가 만보산 사건 과장오보 기사로 욕을 많이 먹게 되지요.동아일보는 비교적 차분한 태도를 보여 대조를 보입니다.이 당시 만보산 사건을 대하는 양 신문의 태도를 집중 분석한 논문이 민두기<시간과의 경쟁>에 실려있습니다.중국근현대사의 권위자인 민두기 씨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낸 비장한 책입니다.

 이 시기 중국 국민당과 일본의 외교전을 다룬 본격적인 연구서는 유신순<만주사변기의 중일 외교사>신승하,박강.김지환 역 (고려원)입니다.저자는 중국 남개대학 교수인 조선족입니다.이 분야를 다룬 연구서 중에서 가장 두툼하지만 일본인이름이 모두 한자 그대로 표기되어 일본발음을 알 수 없으니 초보자들이나 일본어 못하는 이들은 좀 애를 먹게 생겼습니다.이 좋은 책을 왜 이렇게 번역했는지 옥에 티네요.

  강준만.윤상근,한홍구 모두 화교학살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위해 부추킨 음모라는 시각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만 글쎄요....제국주의 시절의 일본의 모략을 비교적 강하게 내세운 방대한 책 데이비드 바가미니<천황의 음모>문일영 역 (노벨출판사)에선 만보산 사건은 만주사변이나 만주국 건국을 자세히 다룬 데 비해 언급도 하지 않습니다.한 계기는 되지만 인과관계의 면에서 일본이 굳이 일부러 화교학살을 일으키게 음모를 꾸몄다는 것도 좀 그렇고 또 그렇게 부추겼다고 해도 순식간에 그런 대참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났다는 것도 좀 이상하지요. 그냥 조흔파가 해석하는 게 더 낫지 않나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의외로 중국에서 나온 책은 위의 유순신 책도 그렇고 국민당 입장에 서있는 친 장개석 시각인 <장개석 비록>(서문당에서 <중국현대사>로 번역)에도 한국인 폭도들에 대해서는 적대감이 없이 차분한 편입니다.단 <장개석 비록>에선 폭동 자체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 사건을 다룬 소설작품은 나중에 언급하겠습니다.최근 꽤 연구가 활발한 분야입니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8-12-11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흔파에 대해서 놀랄 사실을 노자님 글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위 책들을 한 권도 읽지 않아서 뭐라고 단정짓기 어렵지만 1920년대의 조선과 동아는 양대 언론사이다보니 비교라이벌 의식이 작동되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묻습니다. 너희는 방방 뜨니까 우리는 차분모드로 나간다 뭐 그런식의.

노이에자이트 2008-12-11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흔파의 대한 백년은 제가 구한말 역사 공부할 때 아주 재밌게 보던 책입니다.제가 방송극작가 출신들의 역사실록물을 많이 사놓고 보는 편입니다.문장이 간결하고 박력있지요.
신간회 활동기간엔 조선 동아의 대립 구도가 활발합니다만 신간회가 해산되고(1931년) 만보산 사건 및 만주사변 뒤엔 조선일보도 동아일보와 거의 비슷하게 신중(나쁘게 말하면 몸사리기)하게 나가지요.재밌는 것은 현재 대단히 강경한 반공이념을 내세운 조선일보가 신간회를 지지했던 진보좌파 시절을 자랑스레 여긴다는 점입니다.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조선일보...이상하지 않습니까...한가지 알아둘 것은 신간회 지지하던 당시만 해도 조선일보는 방씨 일가 것이 아니었다는 것.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여 제2의 창간을 한 것은 1933년입니다.

비로그인 2008-12-12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근대사> 8권과 나중에 소개해주실 소설 작품을 읽어봐야겠네요.
서점에 구경갔다가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이란 책을 잠깐 읽어봤는데요.
아사히신문 취재반이 쓴 책인데 베트남에서의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 나오는데 과거청산에 대한 한국측 노력이 부족하다고 하더군요. 맞는 말이지요. 그런데 아시아 각 국에 일본이 뿌린 전쟁의 씨앗과 그 역사의 책임에서 빠져버린 일본의 이야기는 없는 것 같았어요.

노이에자이트 2008-12-1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아시아사...는 저도 조금 훓어봤는데,남경학살에 관한 일본교과서 내용의 문제점을 지적했던데요.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그리고 거기 국공내전 후 장개석 진영에 남은 일본군 장성 이야기에 주목해 보세요.이미 20여년 전 까치출판사에서 프랑스 학자들이 쓴 중국현대사에 그 내용이 나와서 인상깊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그리고 용산 전쟁 기념관에는 베트남 전쟁을 아직도 "자유를 지키기 위해 파병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비로그인 2008-12-12 18:02   좋아요 0 | URL
확실히 부분만 보고 와서 놓친점이 있네요. 그래도 이런 책이나 공동역사교과서 같은 책들의 출판은 긍정적으로 봐요. 용산 전쟁 기념관이 가까운 편인데 한 번 가봐야겠네요. 당시 자국의 자유도 통제당한 상태에서 누구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건지 명분이 참 재밌네요. 돈 때문에 갔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가봐요.

가시장미 2008-12-13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작품을 언급해 주시면 그 소설을 통해 이해해봐야 겠네요. 너무 어려워요 -_ㅠ

노이에자이트 2008-12-13 15:03   좋아요 0 | URL
조금만 기다리세요...

mahlerian 2008-12-15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강준만 교수의 <현대사 산책>도 나름 중도적이려고 애는 썼지만, 국내에서 생산된 기존 문헌들이 워낙 민족주의 편향적이라 한계가 컸다더군요. 강교수가 역사 전문가도 아니고...

노이에자이트 2008-12-15 13:11   좋아요 0 | URL
그가 인용한 방대한 문헌들을 보면 역사학 교수보다 낫다는 생각입니다.원래 언론사를 쓰려고 했고 또 실제 쓰기도 했으니 본격적인 근현대사를 썼다고 해서 역사학자들이 폄하하기도 힘들겠지요.저는 그 각주에 나온 책이나 정기간행물 덕을 많이 봅니다.

mahlerian 2008-12-15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보산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이 문제는 한양대 임지현 교수도 자주 거론하는 문제 중 하나지요. 예전에 서울대학신문인가 어디서 인터뷰를 했던 대목이 있는데 참고하셨으면 합니다. 근데 노이에자이트님은 이미 알고 계셨을 것 같기도 하고... ^^;


http://blog.paran.com/mukka/4515405

Q : 그런데 지금 쟁점이 되는 부분은 주로 근현대사 관련 부분이 아닌가요?

A : 현대사 부분이지요. 뭐 거기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 이웃을 억압했던 과거에 대해서 철저하게 생각해야 하겠죠. 그런데 여기서 우리 한국의 근현대사 서술은 어떤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저질렀던 잘못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말입니다. 가령 베트남 파병 같은 걸 교과서에서는 어떻게 서술하고 있냐는 거죠. 또는 일제 때 만보산 사건 당시 중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학살도 그렇고요.

Q : 만보산 사건 당시의 중국인 학살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A : 소설가 채만식이 동아일보인가 어디에 르포를 쓰기도 했는데, 만주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싸움이 난 겁니다. 식민지기에 조선 사람들이 만주로 많이 갔는데, 조선 사람들은 중국에 가서도 벼농사 짓고 중국 사람들은 밭농사 짓잖아요. 거기서 조선 사람들이 논에 물을 대니까 그 물이 밭으로 들어오고, 밭농사가 망했습니다. 그래서 조선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싸움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조선인은 그 때만 해도 2등 국민이긴 하지만 여하간 일본제국의 시민이니까 일본 영사관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던 거지요. 그래서 일본군이 개입해서 조선 사람들의 편을 들었고, 조선 거주민들과 일본인들은 한편이 돼서 싸웠거든요. 분노한 중국농민들은 조선농민을 습격하고. 그러니까 평양 같은 데서 성난 군중들이 '짱꼴라'를 학살해 버렸습니다. 이거 교과서에서는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나오지 않나요?

-- 인터뷰가 끝난 뒤 확인한 결과, 국사교과서(6-7차 교육과정)에는 중국인 학살뿐만 아니라 만보산 사건 자체에 대한 서술이 없었다. 베트남 파병 역시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이 두 사건은 심지어 연대기에조차 등장하지 않았다. --

그 외에도 '만주 특수'라던가, '남양 특수'라고 해서 일본군이 태평양전쟁을 확대했을 때 조선 사람들이 누렸던 혜택들에 대해서 교과서는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제국주의의 무소불위의 가공할 만한 파워를 가진 억압과, 거기서 2등 시민으로서 누렸던 그 지위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당시의 조선 사람들이 1등 시민이 되려고 했던 욕망들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우리 스스로 반성적으로 짚어보는 작업은 필요한 것 아닌가요? 그렇게 반성적으로 짚어본다고 해서 그게 후쇼사판 교과서와 같은 것들을 인정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우리 민족은 비껴가면서 타민족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비판이란 건 설득력을 갖기가 굉장히 어렵지요.

후쇼사판 교과서가 '자학 사관'을 비판하고 일본의 자라나는 세대에게 일본민족으로서의 긍지와 자부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에 입각해 쓰였다는 측면에서, 한국인들은 이것이 일본의 우경화와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며 비판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한국의 국사교과서가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긍지와 민족적 정체성을 심어주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면 거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떤가요?

당장 후쇼사판 교과서에 대한 반응만 봐도, 공무원 시험에 국사시험을 부활시켜야 한다, 국사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이구동성 아닌가요? 이는 후쇼사판 교과서에 대한 대항논리가 기본적으로 후쇼사판 교과서의 저자들과 같은 인식론적 선상에 서 있다는 걸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저 놈들도 강화시키니 우리도 강화시키자는 논리인 거죠.

이런 식의 발상이 현재의 역사논쟁이나 과거에 대한 기억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뒤집어 엎을 수 있는 것인지는 참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니까 산케이신문이 처음에 교과서 파동 났을 때 자주 언급하던 게 한국의 국정교과서를 본받으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왜냐면 자라나는 일본 세대들에게 자기 민족적 정체성을 일깨워주고 자부심을 부여하는 데 있어 한국의 국정교과서가 참 탁월하다는 거죠. (웃음) 일본인들 입장에선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는 거죠. "너희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민족적 정체성과 긍지를 강하게 심어주려 하면서 왜 우리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냐?" 이럴 때 제 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보면, 한국의 비판이란 건 별로 설득력이 없는 거죠.

-- 그 '설득력이 없는' 대응은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지난 6일, 김진표 교육 부총리는 "중국의 고조선, 고구려사 왜곡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응하기 위한 역사 교육 강화 방안으로 우선 올해 안에 근현대사 중심의 '보조학습자료'를 만들어 일선 고교에 보급할 계획"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

노이에자이트 2008-12-15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임지현 씨가 적대적 공존 등의 책을 통해서 이런 사례를 많이 언급하지요.역사학을 애국심의 시녀 정도로 여기는 사고방식은 어렸을 때 워낙 그런 식의 교육을 받았기에 그런 거라고 봅니다.단,임지현 식 논리가 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데 대한 우려도 있지요.비슷한 식으로 만주 문학을 보는 김철 씨 같은 경우는 결국 과거사 반성 같은 것의 무용성을 주장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문제의식은 좋지만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논란이 많은 것 같습니다.인터뷰 내용의 일부를 여기에 소개해 주시니 매우 도움이 되겠습니다.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집이라고 하면 중국요리를 하는 집을 뜻합니다.그런데 이 단어가 이상하다는 것은 일본집이나 미국집이라고 해서 우리가 일본식당이나 미국식당을 연상하지는 않는 데서 드러납니다.중국집하면 무조건 중국음식점이 떠오르는 것은 세계에서  화교들이 가장 살기 힘든 나라로 꼽히는 한국화교들의 슬픈 역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그들에겐 음식점을 하는 것 외엔 다른 분야 진출이 차단되어 있던 기나긴 시절이 있었으니까요.요즘이라고 해서 특별히 나아진 것도 아니지만요.

  1931년 만보산 사건이 일어난 직후 그 소식을 들은 한국인들이 화교들에게 저지른 행패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사건 중의 하나일 겁니다.교과서 식 설명을 하자면 한국인은 그때 일본의 계략에 속았고 나쁜 것은 일본제국주의다....이런 식이죠.그리고 간단히 말하면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부추켰다는 겁니다.하지만 이때 화교들이 당한 수난의 가해자는 분명히 한국인이었습니다.당시 일어난 폭력과 살인으로 죽어간 중국인들의 이야기는 차마 끔찍해서 듣기가 싫을 정도입니다.심지어 화교 임신부를 죽여 배를 가르기도 했다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고바야시 히데오<만주철도>에 나온 사진 중엔 평양의 중국인 포목점을 습격한 한국인들이 옷감을 끌어내서 길거리에 내팽개친 모습도 있습니다.그리고 몇달 안 가서 9월 18일 세칭 만주사변...

  만보산 사건에서 한국인이 일본에게 이용당한 면은 분명하지만 당시 만주나 중국의 조선인들이 일본의 신민으로 중국인들에게 군림했던 면도 분명히 있었고 그러면서 못된 짓을 한 이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중국인들에겐 일본의 힘을 빌려서 위세를 부리는 앞잡이로 보였겠지요.특히 아편밀매에 뛰어든 한국인들이 꽤 있었습니다.이런 소재를 파고 든 학자가 박강입니다.그는 마약과 아편을 일본이 어떻게 이용해 식민지 경영자금으로 썼는지를 몇년 째 꾸준히 연구하고 있지요.일본이 제국주의 시절 어떻게 만주 및 중국 본토를 잠식해갔는가도 함꼐 연구했습니다.참고로 말씀 드리면 일본은 만주를 먼저 중국에서 분리하여 만주국을 세우고 그다음 화북지방을 분리하야 역시 괴뢰정권을 세웁니다.그다음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남경정권을 세웁니다.이때 남경정권 수반은 왕정위(왕조명).그의 치하의 남경정부가 운영했던 정보기관이 그 무시무시한 체스필드 76호.이 정보기관 시절 이야기를 다룬 것이 얼마전 개봉하여 늙수구레한 아저씨들을 극장에 끌어들였다는 영화 <색,계>입니다.아나키스트 혁명가로 젊은이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은 것으로 정치역정을 시작한 왕정위의 인생 파노라마는 전기작가나 영화제작자들의 구미를 끌어들일 만합니다.

  박강에 의하면 만주이주 한국인들이 아편,마약 밀수입에 종사하여 1932년 만주국 성립 직후 아편밀매에 종사하는 만주거주 한국인 숫자는 20000명을 넘겼다고 합니다.당연히 일본은 이들을 일본의 신민으로 여겨 묵인해주었죠.하지만 중일 전쟁(1937년)이후 아편전매제가 들어서면서 한국인들은 밀매를 못하게 되자 화북지방으로 근거지를 옮깁니다.역시 일본국적으로 치외법권을 누리면서 일본군과 함께 이동해서 보호를 받았죠.만보산 사건 때 논에 물대는 일로 만주 토박이 중국인들과 한국인 농민들이 싸울 때도 일본군은 한국인 편을 들었음을 상기하면 이런 모습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마약을 퍼뜨리는 것은 물론 떄론 중국군과 거래하면서 알게 된 정보를 일본군에게 알리는 못된 거간꾼 노릇도 했다고 합니다.1943년 청도,제남 등 화북 지역 6대 도시 헤로인 밀소매 상점 2700호 중 한국인 소유가 2500호로 추정되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만합니다.이런 한인들 때문에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해 힘을 합쳐야 할 중국인들과 한국인들 사이에 매우 좋지 않은 감정이 쌓였고 이런 감정의 결과, 일본이 패전하면서 중국인들이 한국인들을 테러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게 됩니다.중국인들에게 만주나 중국 땅에 있던 한국인들은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보였던 것이죠.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고한 한국인들의 피해가 정당화되어선 안됩니다만...

  이와 비슷한 일은 영국과 인도와의 관계에도 있었습니다.영국에도 힘든 일은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합니다.이들이 집중적으로 영국에 오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습니다.먼저 인도가 독립하고 파키스탄으로 분리되는 과정에서 잔인한 종교분쟁이 벌어져 수많은 힌두교도,모슬렘,시크교도 들이 죽고 난민도 많이 생겼습니다.이들 중 특히 박해를 피해서 모슬렘이나 시크교도들 일부가 영국에 오게 되어 힘든 일을 맡는 인력공급원이 됩니다.또다른 대규모 유입은 1960년대 초 아프리카 여러나라가 독립을 하게 될 때입니다.우간다나 케냐 같은 곳은 독립을 이루면서 식민지 시절 상권을 잡고 있던 인도인들을 몰아내기 시작했습니다.이 인도인들은 여왕폐하의 신민 자격과 여권을 갖고 인도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갔지요.현지인들이 볼 때는 영국인들의 후원으로 자신들의 부를 빼앗아간 존재들입니다.영국인들이 물러가니까 끈떨어진 갓신세가 되었지요.그곳에 눌러살자니 독립한 나라의 인민들이 무섭고 인도로 돌아간댔자 딱히 먹고 살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영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이 차지한 위치는 중국과 만주에서 한국인들이 차지한 위치와 비슷합니다.

  요즘은 만주에 대한 연구서가 우리나라에도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특히 당시 한국인들이 만주국이 생긴 이후 번영하는 모습을 보고 중국인들은 못한 일을 일본인들은 해냈다는 생각과 함께 중국인들보다는 우리 조선인이 더 낫다는 식의 비뚫어진 우월감은 지식인들에게도 상당히 많았습니다.만주기행을 한 한국인 문학가들의 일기 등을 연구한  책들을 보면 그런 것을 알 수 있지요.인도인들이 아프리카에서 차지한 위치를 연구해 보면 제국주의 시절 한일 관계사를 또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8-12-09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호떡집에 불났다 라는 말이 왜 생겼느냐에 대해 한홍구 씨의 글을 읽은적이 있는데 그 글은 한국인들의 폭력에 대한 묘사가 수위가 낮았는데 이 글을 읽고 나니 충격적이네요. 이런 이야기가 우리 역사교과서에 실린다면, 오늘 경향신문의 칼럼 처럼 과거와 성실히 대면한다면 민족간 응어리를 푸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물론 자학사관이라고 난리칠 사람들이 있겠죠.

노이에자이트 2008-12-10 12:43   좋아요 0 | URL
이 화교학살 사건은 국제연맹에서 일본이 탈퇴하는 등 강경노선을 연발하자 국제연맹이 리튼을 위원장으로 하여 파견한 뒤 작성한 리튼보고서에도 나와 있습니다.

쟈니 2008-12-09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이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진행했던 전술이 진나라의 연횡이군요. 전통적으로 강한 나라는 연횡을 적절히 구사해서 각개격파시키는 스타일이군요.
한국인의 중국인 학살 사실은 놀랍습니다. 해방 후, 일본으로 패주한 일본인들에 대한 폭력도 크게 부각되지 않나 봅니다. "요코 이야기"에서 한국인이 일본인에 대한 강간자/폭력자로 나왔고. 그래서 이 책에 대한 한국인/한국 사회의 분노가 있었죠. 하지만. 분명. 그 시절에 일본인에 대한 폭력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입니다. 개인과 집단. 저는 집단 속에 매몰되는 개인들의 행위가 궁금했습니다. 파시즘이나, 전체주의는 결국 개인을 집단에 매몰시켜 동작하는 구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노이에자이트 2008-12-10 12:48   좋아요 0 | URL
만주사변을 좀 자세히 다룬 역사서는 그 화교학살 사건을 다 다루고 있습니다.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만주 북한(당시 분단 상황은 아니었지만 지리적 개념의 북한) 등지에서 쫓겨가면서 중국인들과 북한인들에게 당한 폭행,강간 등은 상당히 오래전에는 알려져 있었습니다.제가 가진 40년 가까이 된 자료에도 나와있고요.중국인도 이 이야기를 다룬 실록을 내서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습니다.요코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언급해야 한 정도로 여러가지 이야기할 게 많죠.

Heilin 2008-12-09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학교에서는 배운 적도 없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었네요. 저는 한국인들이 어떤 우월의식을 가지고 중국인들에게 끔찍한 일을 했었다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더군다나 인도인들이 아프리카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는 점을 보면서, 역사란 역시 되풀이 되는건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러한 사실들을 중국인들은 분명히 알고 있었을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와 좋은 친구가 되준 많은 중국인친구들, 그들은 한국인을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아. 언젠가는 이런 문제도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풀수 있는 날이 오겠죠.

노이에자이트 2008-12-10 12:54   좋아요 0 | URL
학교에서 모든 걸 다 배울 수는 없겠죠.화교에 대한 학살은 유럽은 물론 미국에서도 있었어요.역시 산 채로 목을 자르거나 하는 잔혹한 짓을 했지요.종족증오가 일으키는 잔인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중국인들과 굳이 민감한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사이좋게 지낼 수 있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마노아 2008-12-10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놈놈놈에서 독립군 행세를 하던 아편 장수 매음굴이 생각나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2-11 13:10   좋아요 0 | URL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활극영화엔 그런 장면이 꽤 나왔지요.

드팀전 2008-12-11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제는 식민지의 신민을 다시 한번 분류하잖아요.조선인은 2등 신민 대우쯤 받았으니 또 다른 폭력-가해자의 폭력-에 언제나 열려 있었던거겠지요. 억압자로 부터 받은 폭력을 피억압자가 그대로 모방하여 강한자의 권력과 동화하며 이를 재생산하는 것이 전체주의 심리학의 기본 골격 아니겠습니까. 군대 용어로 흔히 말하는 '본전 생각'이란 것이 그런 순환론적 폭력의 작은 반복인 듯 합니다. 그리고 반공이데올로기와 군부독재의 상처는 '생정치'기제로 여전히 한국민들에게 상흔을 남기고 있는 듯 합니다. 홀거 하이데는 '진보적이거나 미국의 이념에 반대하거나 하는 이들은 테러와 협박등의 위협을 통해 한국민에게 상처를 남기고 이것은 점차'공격자와의 동일시'라는 과정을 만들었다'라고 말한적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내부에는 선과 악이 동시에 존재하듯이 '가학성'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은 쾌락과 공포를 동시에 주지요.일단 나는 그 고통의 바깥에 있다는 안전에 대한 쾌락을 주며 또한 그것이 나에게도 닥칠 수 있다는 일종의 본원적 공포를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을 바라보는 것 보다 고통을 가하는 것에 더 큰 쾌락이 느낀다는 주장들도 많지요. 니체같은 이들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가학성'의 쾌락은 '공격자와의 동일시'를 만들게 되겠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12-11 14:40   좋아요 0 | URL
허허...불편하긴 하지만 정곡을 찌른 진실이군요.약자가 자기보다 더 약한 자를 찾아 괴롭히는 모습을 보면 착잡해지죠.

가시장미 2008-12-13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영화 색계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 하고 있었는데- 이 글을 통해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게 되는군요. ^^

노이에자이트 2008-12-13 15:04   좋아요 0 | URL
제가 첩보기관에 대해 관심이 좀 있어서요.그 소설 원작자의 남편이 왕정위 정권에 협력한 친일파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