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 박정희.저는 박정희 장군이라고 해요.그러면 저승에 있는 그가 더 좋아할까요? 우리나라는 군인보다 관료를 더 높이 받드는 풍토가 있어서 예전 군인출신들도 관료가 되면 누구누구 차관님,장관님 하고 불러주는 걸 더 좋아했다고 하던데...벌써 그가 부하의 총에 맞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지 햇수로 30년이군요.우리나이 서른이 된 우리의 이효리 누나가 1979년 생이라는데 말이죠.
아버지가 군복무하던 곳이 부산 군수기지 사령부. 박정희 장군에 관해 꽤 알고 있었기에 저는 "어...박정희 씨(집에서 대화할 땐 전직 대통령은 이승만만 이박사라고 하고 나머지는 전부 누구누구 씨로 불러요)가 있던 곳이네요 "했죠.아버지 왈,그래...먼발치서 몇번 봤어.내가 복무 중 5.16이 났어.그가 주모자라는 걸 알고 놀랐지...아버지는 제가 성인이 되도록 그런 말은 한 번도 안했어요.박정희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거든요.장기집권하고 전라도를 차별했으며,정적들을 관제 빨갱이로 몰아댄 독재자로 여겼지요.박정희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내가 있었던 부대의 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이었다"고 자랑할텐데요.
꼬맹이 때 국민학교 도덕 시간이었어요.박정희 장군이 아직 대통령을 하고 있었던 70년대 말인데 그땐 도덕시간을 반공도덕이라고 했지요.선생님이 북한의 우상화 정책을 설명하면서 북한의 명절인 김일성 생일과 9,9절엔 특별히 김일성의 배려라며 주민들에게 무료로 고기를 나눠준다고 하시더라구요.그래서 저는 질문했어요.선생님.그런데 왜 박정희 대통령은 명절이 돼도 고기를 안 나눠주나요? 그때 선생님이 조금 당황해하던 기억이 나네요.그러고선 "북한에 대해 문제가 나오면 나쁜 게 정답이야!" 하고 생활의 지혜를 가르쳐 주면서 대충 넘어갔죠.
스페인 내전을 공부할 때마다 신기한 게 있어요.그때 프랑코가 제 2공화국에 반대해서 반란을 일으키잖아요.반란 일으켰을 때 내세운 명분이 우리나라 5,16때하고 똑같아요."정치인들이 부패하고 파벌 싸움이나 하고 나라는 혼란해서 공산당들이 준동하고 있다."고 했죠.게다가 두 나라 모두 군인들이 무너뜨린 것은 2공화국 .또 희한한 것은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킨 해(1936년 )에는 2년 동안 카나리아 군도에 좌천되어 있었고 박정희도 역시 한직으로 돌아다녀 불만이 쌓인 상태였구요.또 스페인 내란이 일어나던 해엔 일본에서도 그 유명한 군사쿠데타인 2,26이 일어나서 재벌과 정치가 관료 몇이 젊은 장교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나죠.그런데 그 장교들 역시 내세운 명분이 "정치가들이 파벌싸움하고 나라가 부패하여...."였어요.군인들이 거사하면서 내세우는 명분은 어디서나 다 똑같죠.실제로 박정희는 프랑코와 2,26을 일으킨 장교들에 심취되어 관련서적도 읽고 했답니다.게다가 2.26을 일으킨 주동자 중의 한사람과는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 때 이후 계속 친분을 유지하기도 했죠.일본에서는 이런 우익들을 가리켜 흑막 속의 괴물이라도 하는 중개인들입니다.
언젠가 아버지와 함께 한국전 때의 전사자 유골 발굴하는 특집 방송을 봤는데 진행자가 전후 이런 작업은 김대중 대통령 임기 때 비로소 시작했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제가 기가 막혀서 "군인출신 대통령들이 걸핏하면 국가안보가 중요하다,군대가 중요하다고 하더니 저런 유해발굴 사업은 안했군요."했습니다.아버지는 단 한마디 했죠."정말 나쁜 사람들이다..." 정말 나쁜 사람...무슨 육두문자는 안 썼지만 군인 출신 대통령들에 대한 아버지의 최종 평가겠지요.
박정희 장군을 싫어했지만 아버지가 딱 한 번 그에 대해 동정적인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그때 아마 육영수 여사 암살 사건 다큐멘타리 방송이었죠.제가 한마디 했습니다."박정희 씨가 독재하면서 온갖 권력은 다 누려봤겠지만 한 남자로서는 저렇게 불행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부인도 총맞아 죽고 자기도 총맞아 죽고...아들은 마약중독이고...딸들은 서로 불화해서 잘 만나지도 않고...". 아버지는 간단하게 단 한마디했습니다."불행한 사람이지...".
며칠 전 그의 연설집을 이리 저리 뒤적였습니다.이 연설집은 국가 재건최고회의의장 때부터 1975년 말까지의 그의 모든 연설이 다 수록되어 있지요.일곱권 모두 두툼합니다.그가 최고회의시절 했던 4,19기념사를 봤습니다.이승만 독재정권과 그 뒤를 이은 제 2공화국을 엄청나게 비난하면서 5,16이 4,19정신을 이어받았음을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그 당시 사진도 붙어 있는데 정말 젊더군요.하긴 그때 40대 중반이었으니까요.지금 살아있다면 90세가 넘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