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대중 연예인들에 얽힌 비화 등등을 좋아합니다.비틀즈나 롤링 스톤즈의 이야기를 하면 지적이고 카라의 구하라나 원더걸스의 유빈이 광주출신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면 저속하고 속없다는 소리를 하는 인간들의 사고방식 속에 든 이중구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꼬부랑 글씨 쓰는 나라들의 연예인들보다는 아무래도 우리나라 연예인들이 더 친근하고 무엇보다도 이름들이 익숙해서 좋지요.그중에서 요즘 인기있는 소녀시대는 동아리들의 이름을 다 아는데 저는 수영이라는 누나가 겁나게 이쁩디다.올해 수능을 본 모양인데 여고생이건 여대생이건 이쁘면 무조건 누나라고 부르는 제 특유의 호칭 덕에 누나가 된 처자이지요.허리가 가늘고 다리도 늘씬하여 옷거리가 좋기도 합니다.올해 6월에 광주에 왔는데 사회를 보더라구요.거리가 너무 멀어서 잘 안보이니까 안타까웠습니다.그런데 수영에 대해 인터넷에 뜨는 댓글을 보면 필리핀 사람 같이 생겼다느니 동남아 스타일이라느니 하는 글이 있던데 이게 칭찬은 아닙니다.아마 우리 수영 누나가 좀 까무잡잡해서 그런 모양인데 언제부터 동남아 사람처럼 생겼다는 말이 비하하는 표현이 되었을까요...상당히 오래된 관행이나 전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제로 알고 보면 그다지 길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우리나라 회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삼겹살도 대중화된 것은 3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마찬가지로 동남아 사람들이 한때 우리나라에서 선망의 대상조차 된 때가 불과 얼마 안 된 과거입니다.

  1977년 무렵 동경 가요제가 한창 인기를 얻은 때입니다.데비 분이 "You Light up My Life"라는 노래로 상을 타서 우리나라에도 한창 애창되던 거의 동시에 필리핀 남자 가수 프레디 아길라가 "아낙"이라는 노래로 역시 큰 인기를 모읍니다.이 노래는 가출해 버린 아들을 그리는 아버지의 심정을 그린 노래입니다.필리핀은 영어가 거의 공용어가 된 나라이지만 그 가수는 타갈로그 말로 이 노래를 불렀지요.애절한 멜로디를 좋아하는 이들의 사랑을  받은 이 노래는 미국이나 유럽의 백인가수들의 노래 못지 않은 인기를 얻어 우리나라 가수들이 번안해서 부르기도 했습니다.그때 가출한 청소년들이 이 노래를 듣고 귀가하기도 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지요.그때 청소년들 역시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으며...문제아들이  많고...선생 알기를 우습게 안다...등등의 말을 듣고 있었지만 이제 그들도 40대가 넘어 자기들이 듣던 똑같은 말은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이때 필리핀은 그 유명한 마르코스 대통령 시대.

  1990년대엔 프로축구와 프로농구가  생겼습니다.80년대의 프로야구,프로씨름의 인기를 보고 생긴 것이지요.90년대 초반 경, 외국에서 온 축구 선수 중에 태국 출신의 피아퐁이 대단한 인기를  모았습니다.실력도 있는데다가 용모가 준수했지요.요즘 같으면 꽃미남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실력도 좋고 미모도 되니 어딜 가나 인기와 환호성을 몰고 다녔습니다.2000년대에 그와 비길 수 있는 축구선수는 샤샤 정도가 있었지요.피아퐁이 인기를 얻던 시대만 해도 그가 태국인이라  해서 비하나 무시를 하던 사람은 없던 시절입니다.

  연예인이나 운동선수의 인기 외에 동남아시아의 한 나라의 피플파워를  부러워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때는 1986년 2월,필리핀에서  민중들이 대규모 시위로 마르코스를 몰아낸 대사건이 일어났습니다.이미 1983년 가을, 정적인 아키노를 암살하여 정권의 말기적인 모습을 보인 마르코스는 결국 후원자인 미국으로서도 어떻게 도움을 줄 형편이 안 될 정도로 무리를 거듭하다가 물러나게 되었지요.당시 필리핀의 정신적 지도자라는 하이메 신 추기경은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위대 편에 서서 엄청난 지지와 인기를 모았고 이 소식을 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를 필리핀의 정의 구현사제단 정도를 이끄는 지도자로 보기도 했습니다.당연히 당시 5공화국의 전두환은 뭐냐....하는 내외의 시선이 따가웠는지 정부는 필리핀과 우리는 다르다면서 괜히 도둑이 제발 저린 듯한 논평을 내는 등 수선을 피웠지요.게다가 우리도 그 이듬해인 1987년 6월 항쟁으로 필리핀처럼 독재자를 몰아낼 수도 있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6,29선언으로 어정쩡하게 끝나버렸고 전두환과 똑같은 정당에서 나온 노태우 후보가 대선에서 이겨 대통령이 되고 말았습니다.그러자 죽은 아들 불알 만지기  식으로 이한열 장례식 때 청와대로 밀고 갔어야 했다는 둥,온갖 가정법이 난무했지만 이런 자조 섞인 이야기를  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우리는 필리핀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심지어 어떤 이는 한국사람들은 필리핀 사람들 똥구멍이나 핥아줘야 한다는 극단적인 말까지 하는 이도 있었습니다.아키노의 부인인 코라손 아키노가 대통령이 된 뒤 미군기지가 있던 수빅에서 미군들을 내보내자 민족자주를 강조하던 이들은 더 부러워서 한마디씩 했습니다.필리핀은 미군도 보내버렸네....주한미군은 언제나 나가나....설마 21세기에도  저들이 머물러 있는 건 아니겠지...에이...아무리 그래도 21세기엔 물러가겠지...등등...필리핀이 부럽다...등등...

  그러면 언제부터 동남아에 대한 비하와 멸시가 나타나기 시작했을까요.그것은 1990년대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나라 공단에 등장하던 무렵이었습니다.힘들고 어려운 일에 종사하던 그들을 보면서 뭔지 모를 우월감을 가지고 무시하기 시작하지요.예전에 호남선 타고 서울역 내리면 역전에서 지게 지고 다니면서 무거운 짐 들어주고 돈 받는 늙수구레한 남자들은 거의 전부가 전라도 출신이었습니다.그외에도 밑바닥 직업군에도 숱한 전라도 사람들이 있었지요.지금은 뉴라이트 지도자였던 김진홍 목사가 젊은 시절 빈민운동을 할 때 서울의 빈민가는 거의 대부분 전라도에서 올라온 이들이 살고 있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었습니다.그러면서 받았던 온갖 멸시와 소외,무시를 이젠 동남아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받게 된 것이지요.이와 동시에 연변에서 온 조선계 중국인들에 대한 시선 역시 거의 동남아 이주 노동자를 보는 시선과 비슷하게 되어갑니다.1995년 무렵 한 월간지에는  사장님 때리지 마세요 라는 이주 노동자들의 실태를 담은 르포가 나오기도 합니다.

  동남아 스럽다는 말이 촌스럽다는 뜻을 담게 된 것은 2000년대를 들어서 거의 뿌리를 내렸습니다.특히 소개팅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이 말을 하면 그날 소개팅은 종치게 되지요.그에 비례해서 최상의 찬사는 뉴요커나 밀라노 스타일이 되었습니다.저는 뉴욕하면 액션영화에서 본 빈민가가 생각나던데 언제부터 뉴요커가 멋지고 세련된 사람의 상징이 되었는지 거시기하더군요.아침 겸 점심으로 먹는 것을 아점이라고 했는데 언제부턴지 꼬부랑 말을 써서 브런치가  되더라구요.여하튼 그에 반비례해서 동남아 스타일은 점점 촌스러움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고 맙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그렇게 큰 취급을 안했지만 올해 여름엔 예전 60년대 말 서독에 파견된 우리나라 광부와 간호원(그때는 간호사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지요)들이 고국을 방문해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외국에서 온 노동자들을 학대한다는 말을 듣고 정말 가슴이 아팠다.우리나라도 어려운 시절 외국에 가서 돈벌던 시절이 있었다.그런데 이제 좀 먹고 산다고 예전 우리와 똑같은 심정으로 우리나라에 온 사람들을 이렇게 대해서야 되겠는가.동포 여러분의 자성을 호소한다..."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을 알아야 하지 않느냐는 소박한 이야기였습니다.무슨 어려운 용어가 필요없지요.서독광부...간호원...아마 누구보다도 그들의 호소였기에 더 절실했겠지요.

  사족삼아 얘길 하자면 제가 미인에 관해서 꽤 깊이 연구했기 때문에 미스월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압니다.아시아 권에서 네명이 나왔는데 그중 두명은 필리핀인이고 두 명은 일본인입니다.객관적으로 봐도 동남아인들의 눈이 크고 둥글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에 비해서 더 점수가 후한 모양입니다.우리가 동남아 미모에 대해 가진 편견이 우리가 좀 잘살게 된 뒤에 나온 허위의식이 섞인 우월감에서 나온 것임을 이런 데이타를 통해 알게 됩니다.소녀시대의 수영이 필리핀 사람을 닮았다는 말이 비하하는 뜻을 담지 않는 시대가 오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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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8-12-07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남아스럽다'라는 말을 비하적인 의미에서 쓰는 이들을 볼 때마다 저는 참 '한국인스럽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2-07 17:16   좋아요 0 | URL
하하하...정곡을 찌르는군요.한국인스럽다...

비로그인 2008-12-08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80년대의 이야기가 참 재밌네요. 이런 이야기를 지금 젊은사람들이 많이 알면 좋겠어요.
회사 다닐 때 인천,안산 등지의 공단에 많이 다녀봤는데요 이주노동자를 마주치는 일이 아주 흔하고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죠. 대부분 편견을 갖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서 편한곳에 앉아서 손가락질 하는 거죠. 단 한 번도 직접 대면해 본 적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하는거죠. 그 이주노동자들이 자국에선 고학력자도 있고 이런저런 경력자들인데 그런점들은 모두 가려지고 알게되더라도 '지금 공장에서 일하니까 나보다 못하다' 라는 생각을 하는거죠.
마치 인도는 IT강국이고 핵을 보유한 군사강국이고 고급인력도 많은데 꼭 겐지스 강에서 화장하는 모습이나 지저분하고 혼잡한 거리만 골라다니면서 사진찍고 진짜 인도를 보고 왔네, 깨달음을 얻었네 라고 말하는 거랑 마찬가지죠.

노이에자이트 2008-12-08 13:00   좋아요 0 | URL
전통적인 공돌이 공순이 비하의식에 인종차별까지 더해져서 그런 시각이 생겼다고 봅니다.그리고 우리나라 특유의 반말문화를 이주민들이 다 알아챘죠.반말하지 마세요 하는 말은 거의 다 할줄알더라구요.
인도네시아 출신 남자 노동자 세명과 버스 제일 뒷자리에 앉아서 말할 기회가 생겼는데 한국 아줌마가 수마트라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고 해서 으하하하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파란여우 2008-12-0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남아 순회공연을 방금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 이라는 가수들이 생각나네요. '마음 약해서'를 부른 들고양이들, 와일드 캣츠라고 부르다가 국어순화운동에 걸려 한글로 그룹명을 바꾼. 또 '손에 손잡고'를 불렀던 88올림픽의 스타 코리아나도 원래는 동남아 순회공연으로 실력을 쌓았고 '빙글빙글'의 가수 나미도 동남아 순회공연단 출신이죠. 그 때 동남아는 우리가 반드시 통과해야할 선진문화지였습니다. 실제로 국민소득도 우리보다 높았어요. 말하자면 선진국이었던 셈인데. 올림픽을 기점으로 대외적으로 이름좀 알렸다고 공명심이라는 치명적인 병에 걸려 그 이후부턴 동남아를 열등한 족속들로 밀어내고 말았습니다.

일례로 제가 직딩이었던 시절, 같은 직장 쫄따구 노총각이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신부가 동남아 출신이라는 소문이 났었죠. 이에 그 노총각 발끈해서 "어디 동남아에 내 신부를 비교하는거냐!"고 화를 냈죠. 나중에서야 알게 된 신부가 키르키즈스탄 출신이더군요. 사니, 못사니 사기다 아니다 이혼한다 어쩐다 하더니만 이혼하고 작년에 태국 아가씨와 재혼했습니다. 무려 16년 나이 차이! 돈주고 사오는 물건취급하는게 창피한 줄 모르고 어리다고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들이 대개 시골출신이라 더 무시하는 것 같은데 전라도나 경상도 충청도 촌구석에서 상경한 노동자들을 우습게 여겼던 과거 시절과 어찌 이리 닮은건지요. 다들 선남선녀 출신만 있는 나라라 그런걸까요.

노이에자이트 2008-12-08 13:06   좋아요 0 | URL
와일드 캐츠,코리아나의 추억...마음 약해서와 마음이 약해서 노래를 구별할 줄 알면 한국 가요사 전문가 대접을 받을 수 있죠.제2의 임진모 정도...파란 여우 님은 아시는지요?
돈주고 사오는 식이라도 좋으니 오손도손 살았으면 좋겠습니다.특히 필리핀은 가부장제가 우리에 비해 약해서 거기서 온 여성들은 우리나라 시댁문화에 깜짝놀란다고 하더군요.비교적 유교문화가 강한 베트남 여성들도 우리 농촌의 아들 우대에 놀란다고 하더라구요.시어머니가 아들 밥상을 정성들여 차리고 며느리더러 나중에 먹으라고 하자 앞으로 살 일이 갑갑하구나....했다는 일화도 있죠.

BRINY 2008-12-08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흑백영화보면, 등장하는 젊은 남자가 말레이시아인가 어디로 해외부임하게 되는 걸 큰 출세로 여기면서, 대단한 선진국에라도 가는 것처럼 온 가족이 기뻐하는 장면이 나오던데 말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08 13:09   좋아요 0 | URL
그 영화제목을 알고 싶군요.개구리의 특권은 올챙이 시절을 모르는 척하는 거라는 말도 있지요.

BRINY 2008-12-08 13:53   좋아요 0 | URL
'박서방'일겁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08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김승호 씨 작품이군요.교육방송에서 김승호 씨 나온 영화를 가끔 하지요.

네꼬 2008-12-08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이에자이트님의 글은 간결하고 쉬운 단어를 쓰시면서도 조목조목 문제를 짚어주셔서 참 좋아요. 마치 독일에서 노동한 광부와 간호원들의 연설이 그렇듯이 말이지요. 대체 왜 누군가를 무시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건지, 혹시 내 안에도 저열함이 있는 건 아닌지 괜히 뜨끔해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어요. :)

노이에자이트 2008-12-09 12:11   좋아요 0 | URL
제 글에 대해 그렇듯 칭찬을 해주시니 힘이 납니다.남에게 가해를 저지르면서 자신을 합리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과거에 당한 피해만 계속 강조하는 것이죠.

바람돌이 2008-12-08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0년대에 필리핀은 확실히 부러움의 대상이었죠. 그리고 미주둔군에 대한 대응방식의 차이도 그랬고.... 오늘 노이에 자이트님의 글은 찜해놓고 다음에 수업자료 짤때 써먹을 수 있겠어요. 감사합니다. ^^

노이에자이트 2008-12-09 12:13   좋아요 0 | URL
요번 주말에 보니까 필리핀의 파쿠아오라는 걸출한 복서가 자기보다 두 체급이나 위인 전설의 복서 오스카 델라 호야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기권승했네요.이젠 이런 점에서도 부럽군요.수업자료로 이런 걸 활용하시다니 다양하게 학생들을 지도하는군요.저는 학창 시절 그냥 교과서,참고서 암기한 생각 밖에 안납니다.

후애(厚愛) 2008-12-09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곳에서 한인들을 보면서 많이 느끼는데요. 무엇보다 못 배웠다고 무시하고, 가난하다고 무시하는데 무시하는 종류도 참 다양하더군요. 이런 사람들을 볼 때면 정말 가슴이 답답하답니다. 누구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잘못 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이상은 평생 고쳐지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네요.
노이에자이트님 덕분에 공부도 많이 하고 느끼는 점도 많습니다. 항상 고맙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2-09 12:14   좋아요 0 | URL
그런 인간말종들은 쿠거나 그리즐리 곰이 물어가야 하는데...우리나라에도 호랑이는 저런 놈 안 물어가고 뭐하나....하는 우스개 소리가 있지요.
 

  중원문화사가 없어진 줄 알았더니 있더군요.요즘 철학사 책을 내는데 예전에 소련에서 나온 세계철학사 10권과 동일한 책 같아요.세월이 지나서 그런지 값이 엄청나게 올랐더군요.헤겔 철학 해설서로 영어권 독자들에게도 알려진 마르쿠제<이성과 혁명>도 이번에 새판이 나오면서 값이 엄청나게 올랐습니다.중원문화에서 철학.특히 독일 관념론이나 마르크스 철학 관련서적을 많이 냈지요.이 출판사 운영하는 황세연 씨나 그 동생인 황태연 씨 모두 헤겔 관련 책들을 번역을 많이 했습니다.한때 꽤 많이 팔렸지요.난해한 학술서적을 많이 냈지만 소설류나 역사 개설서도 꽤 냈지요.

  황세연 씨는 황인이라는 가명으로 번역을 한 책이 몇 권 있습니다.진순신의 방대한 <중국사>도 그 중 하나지요.진순신은 대만 출신이지만 일본어로 작품활동을 했습니다.하지만 이 책 번역은 좀 그렇습니다.지명이나 인명 오기도 그렇고  특히 사진복사가 잘못된 것 같아요.워낙 내용이 풍부하고 자세해서 도움은 됩니다만...그래서 한길사에서 다른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황인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또다른 번역본이 <제 5공화국>인데 이 책의 원본은 그 유명한 일본 이와나미의 시사월간지 <세카이>의 연재물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입니다.저자가 TK생이라 하여 한때 우리나라 정보당국에서 그 정체를 밝히느라고 용을 썼다지만 결국 헛다리만 짚었다는 전설이 있죠.이와나미 편집장인 야스에 료스케가 썼다...<찢겨진 산하>를 쓴 정경모가 썼다...말도 많았지만 결국 지명관 씨가 스스로 내가 했노라고 밝혔죠.야스에와 지명관은 철저히 비밀에 부쳤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저자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지명관 씨는 한일 양국의 기독교인들이 보내주는 자료를 토대로 이 글을 썼지요.엄혹한 군사정권 시절,한국 언론을 통해선 얻기 힘든 정보를 이 연재물을 통해서 얻는 이들이 많았습니다.리영희 씨도 즐겨 읽었는데 당시 공안당국에선 세카이를 읽은 이들은 요주의 대상으로 찍었지요.물론 금서목록입니다.이적 표현물이라는 거죠.광주 광역시 같은 경우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도 세카이는 안 들어오더군요.여기엔 일본어 전문서적이 한 군데 밖에 없는데도 그렇습니다.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유신 때부터 시작하여 노태우 당선 무렵 연재가 끝납니다.현해탄 건너 거의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지명관 씨가 지인들이 몰래 날라주는 문헌들을 토대로 엄청난 작업을 해낸 것이지요.황인이 번역한 <제 5공화국>은 그 중 12,12사태부터 시작하여 구로구청 농성까지 다루고 있습니다.그 연재물의 5공시작부터 연재물의 마지막인 87년 선거 직후까지 다루는 셈이지요.이 책은 두 종류가 있어요.양장본이 따로 나왔지요.광주엔 한 때 헌책방에 이 양장본 10권 짜리 <5공화국>이 꽤 나와 돌아다녔죠.저도 한 권에 1000원으로 만원에 샀습니다.종이도 괜찮고 글자도 읽기 좋고 무엇보다 사진이 풍부하고 선명했지요.외국인 기자나 학자들이 쓴 한반도 정세 관련 글도 번역된 것이 있기도 하고 아주 내용이 풍부합니다.보급판으로 나온 책은 종이도 그다지 좋지 않고 사진이 선명치 못하더군요.올해엔 박정희 시대 때 연재분 일부도 번역하여 당시 시대상황을 해설한 책이 창작과 비평에서 한권으로 나왔습니다.이와나미는 우리 한국의 지식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주던 책들을 많이 냈지요.리영희 씨는 임헌영과의 대담집인 <대화>(한길사)에서 한국의 진보지식인들이 이와나미를 많이 읽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80년대 우리나라 매체에선 박정희 시대 비화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전두환은 군사정권이라서 박정희의 아류라는 평가를 들을까봐 의식적으로 박정희와 거리두기를 시작하지요.그래서 박정희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글이 꽤 나왔습니다.김영삼 정부 들어 시작된 박정희 찬양열풍이 아직 없던 시절인 이때가 어찌 보면 박정희 독재를 비판하는 좋은 글들이 많이 나온 것은 역사의 장난이라고나 할까요.그 시절 가장 두각을 나타낸 이가 이상우 씨였습니다.정치부 기자였던 이 씨는 직접 박정희를 취재하기도 한 경험을 살려 시사월간지를 통해 박정희 시대의 실상을 자세하고 풍부하게 그렸지요.저 역시 그 당시 월간지들을 보면 역시 이상우 것이 제일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특히 이 씨는 아사히에서도 일했기 때문에 박정희와 자주 접촉했던 일본 극우인맥들을 상세히 다루어서 이른바 한일유착의 이면사를 알리는 데 기여했지요.이런 연재물을 모은 것이 중원문화사에서 나온 <박정희 시대> 전 3권입니다.그 시대의 사건의 맥을 추리는 데 아주 좋은 책이지요.저널리스트 특유의 매끄러운 문장도 술술 읽힙니다.제가 본 것 중에는 조갑제<유고!>와 함께 박정희의 개인이력을 가장 자세히 다룬 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특히 박정희 비판으로는 교과서적인 책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상우 씨가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정말 궁금합니다.한때 박정희 비판서로 젊은 시절의 조갑제와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르던 저널리스트인데요.이젠 나이가 많이 들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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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12-04 1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도 조갑제씨와 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지요.;;;

노이에자이트 2008-12-04 23:52   좋아요 0 | URL
이상우 씨의 글은 뭐랄까...박력과 속도감이 있는데다가 군데군데 날카로운 경구가 매력적이죠.

쟈니 2008-12-04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정희 아류인 전두환이 박정희를 견제하는 행위라. 아이러니 같기도 하지만, 박정희의 시작과 끝을 본 전두환으로선, 체육관 선거일 망정, 선출되었다고 말하고 싶겠죠. 그래서 거리를 두려 했던거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2-04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26직후 여론은 박정희 체제에 대해 굉장히 싸늘했어요.그래서 나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려고 노력했지요.전두환은 박정희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차원에서 장기집권의 폐해를 강조했습니다.박정희도 이승만을 끝까지 정치규제자로 묶어 결국 외국에서 숨을 거두게 하지요.

드팀전 2008-12-05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 페이퍼의 댓글을 봤습니다.

한가지 오해하시는 지점은 '조중동'이란 말 자체가 하나의'보편적 현상'을 뜻한다는 겁니다.이 말의 이미는 '조중동'의 개별 기자들이 모두 하나 같이 '조중동'의 가치의 선봉장을
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지요.즉 미묘한 개별성을 모른다거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 역시 과거에 칼럼 공부 삼아 단행본으로 나온 최일남씨나 김중배씨의 글을 밑줄치며 읽었습니다. 그들이 명칼럼리스트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2000년이라는 시점을 동아일보의 변질 시점으로 본다는 것은 사실 한국 언론이 굳건하게 유지해온 권언 유착의 시스템에서 동아일보는 너무 긍정적으로 평가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동아일보의 과거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한 기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자유민주주의적 가치들은 80년대 폭력적인 정권들에 의해 축출되고 또 유화되어 집니다. 여기에는 언론이 가진 태생적인 한계가 존재합니다. 정치권력의 그물코에서 벗어나는 지점에 대해서 ,즉 그들의 허용 한계 내에서 움질일 수 밖에 없다는 한계지요. 물론 이것이 자유민주주의의 상대적 가치를 옹호하고 그런 공간 자체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사적 언론인'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의 공간은 상당히 좁습니다.
예를 들어 김중배같은 분들이 금방 <동아일보>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 동아일보의 건강성만을 뜻하지 않는다고 보면 어떨까요? 정권과 편집국의 긴장 속에서 어떤 인물이 중요한 나사라면, 권력의 속성은 그것을 뽑는 방식보다는 그것을 유지하면서 무화시키는 방식을 택합니다. 긴장을 순치하는 방식을 통해 지배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특히 편집국 내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인물을 뽑애 낼 경우 반골 기자들뿐만이 아니라 온건주의자들과의 갈등마저 빚어낼 수 있다면 어떨까요? 권력이 갈등을 수습하고 통제하는 방식으로 읽는다면 김중배같은 분들의 존치가 그다지 이해하기 힘들지 않습니다.

2000년이라는 시점이 중요하다면 그것은 동아일보가 정치변동상 더 적극적인 방향으로 기회주의 노선에 의탁한 시점일 듯 합니다. 그것은 '원인'이라기 보다는 잠재된 언론의 피곤한'증후'에 가깝습니다.그것은 정권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지만 2000년대를 들어서면서 공론화된 신문시장의 위기론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제가 앞서 말했듯이 동아일보는 빼앗긴 정상의 위치에 대한 강박과 신문시장의 전체적 위축 사이에서 어떤 기회적 선택에 나설 수 밖에 없었겠지요.

말씀하신 것을 역으로 돌려 동아일보가 2001년 이전의 상대적 진보성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언론사 세무조사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했을까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 동아일보에 상대적 진보성을 부여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건'적 계기로 '동아일보의 변절'을 읽어내는 것은 한국 언론의 역사적 편린과 보수언론의 과거 행적들에 대한 시각을 흐릴 수가 있지는 않을까요? 만약 애써 그 특정 시점의 변절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면 동아일보 편집국 내부의 인적 배치문제를 찾아서 정치변동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의미를 찾아야 될 듯 합니다.

세무조사 관련되서 재미있는 기억이 하나 있군요.당시 '조선일보' 기자 였던 제 지인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세무조사 그거 더 하라구 그래.얼마든지.그래봐야 우리 구독률은 더 높아져."


와우...부산에 눈이 오네요.와...미력한 생각을 길게 쓰니.. 딸리는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2-05 21:48   좋아요 0 | URL
그런 사실도 수업시간에 배우는군요.저는 그냥 책에서 읽었습니다만...

노이에자이트 2008-12-05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2000년 가을의 동아일보 기사를 낸 시점을 중시하는 이유는 이제 그 시점으로 동아일보가 한민당 정통론의 한계가 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그 앞시기까지는 동아일보 특유의 양다리와 기회주의적 처신이 보이기도 했지만 한민당 식 시각으로도 어느 정도 절차적 민주주의 정도는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요.한동안 독재 대 반독재로 대립구도가 형성되었을 때 제도권 야당도 어느 정도 저항적 존재노릇을 하던 시기.하지만 동아일보의 그러한 시각이 매카시즘의 헤게모니에 대한 문제제기는 없었기 때문에 김대중 정부 들어서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2000년 남북정상 회담(남북화해가 순조롭게 진행되면 반공이데올로기가 완전 균열되어버리니까요) 이후 완전히 돌아가 버리고 이젠 절차적 민주주의조차도 찬성하지 않게 되어버렸다고 봅니다.당연히 그동안 자신들의 지지기반으로 보았던 호남 포기라고도 보아야지요.전라도는 빨갱이라는 조선일보 식 선전과 정운경의 만화 왈순아지매가 보여주는 노골적인 중앙일보 식 전라도 경멸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봅니다.어찌보면 동아일보의 그러한 태도는 예전 해방공간에서 동아일보가 보여줬던 철저한 반공주의로 복귀한 거라고도 봐야죠.신탁통치 정국당시 동아일보가 소련이 먼저 신탁통치를 제안했다는 둥 좌익계는 소련의 식민지가 되기를 바란다는 둥 그런 악선전을 했던 시기를 말합니다.거기다가 군사정권 이후의 호남따돌림까지 곁들인 조중과 반공헤게모니 구축.

드팀전 2008-12-06 04:39   좋아요 0 | URL
음 ..어떤 의미인지 알겠군요.반공주의(안그런적이 없긴한데)와 호남포기의 잣대로 본다면...
한국언론사 시간에 제일 먼저 배우는 것이 민족신문'동아일보의 최초 오보'사건 입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국내 보도와 관련된 것이지요. 노이에님의 마지막 글이 갑자기 대학 첫 학기 첫 수업을 생각나게 하네요.

비로그인 2008-12-05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세카이, 이름은 참 많이 들어 봤는데 책을 구할 수 있다고 해도 읽을 수가 없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2-05 18:54   좋아요 0 | URL
위에 소개한 창비에서 나온 책에 세카이 한국으로부터의 통신 일부 번역이 있으니 한 번 보십시오.그 책을 보면 지명관을 야스에에게 소개한 깜짝 놀랄 인물이 나옵니다.
 

  정변으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은 혁명공약이라고 해서 2년 후엔 민간인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들은 군에 복귀하겠다고 했지요.김종필이 그 공약을 작성했습니다.하지만 정작 1963년이 되어 민정이양할 때가 되자 한다 안한다 한다 안한다 번복에 번복을 거듭하여 결국은 박정희가 군복을 벗고 민간인이 되어 대선출마한다는 모양새를 갖추었습니다.윤보선과의 치열한 선거전...아슬아슬한 표차로 대통령이 된 박정희.하지만 권력의 논리인지 1967년 물러날 때가 되자 또 근대화 이념을 구현하려면 요번 임기 가지곤 안되겠다면서 또 출마....이번엔 물러나겠지 했는데 이번엔 역시 좀 더 집권하여 우리나라 경제를 안정권에 올려야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 유명한 삼선개헌을 단행합니다.처음엔 당시 집권여당이던 공화당 의원 거의 대부분이 무리라며 말렸지만 결국은 거의 다 굴복해서 삼선개헌을 받아들이죠.김종필도 처음엔 반대하더니 꺾였습니다.초대 공화당 창당위원이던 원로 정구영은 자신의 반대입장이 거부되자 정계은퇴를 선언해 버립니다.그러다가 1972년 유신...그때 명분이 국내외 위기 상황이니 위기 관리체제라면서 유신을 선포하죠.그리고 1974년 긴급조치 시작...박정희 암살 때까지 긴급조치 시대...그리고 10,26...

  박정희는 민주정치를 제대로 하기 위해선 경제개발이 필요하다고 했지만 정작 어느 정도 경제가 안정된 70년대의 고도성장기에 오히려 정치는 더 폭압을 달렸습니다.당시 여당의 상징은 황소.국민을 위해 소처럼 일하자고 해서 소가 상징이었는데 당시 시사만평엔 소가 미쳐서 국민을 들이 받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습니다.미친 소의 옛추억은 70년대에도...

  친일파를 청산하자 할 때 이를 반대하는 이들이 내세운 논리는 지금은 때가 아니다.나라의 기틀을 먼저 다지자...이런 식이었습니다.그런데 나라의 기틀을 다지자면서 친일 경찰들을 기용해서 정적들을 떄려잡는 겁니다.지금은 친일파보다 공산당이 더 나쁜 놈들이므로 그 놈들을 먼저 잡으려면 과거 친일파들을 활용하자고 하면서요.친일파가 반공투사가 되어 높은 자리 한자리 씩 차지하고....저래가지고 언제 친일파를 청산하지? 하는 의구심이 점점 커지는데...뭐라고 한마디 이의 제기하면 반공투사에게 시비거는 너희들은 뭐냐고 눈을 부릅뜨니 무서워서 말도 못하고...

  그래서 세월이 지났습니다.이젠 우리도 먹고 살만 해졌으니 지금이라고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 과거사를 올바로....하고 말하니 그 예의 시기상조론자들이 무서운 표정으로,"아니! 이것들이! 그때가 언제인데 이제 와서 친일파를 들먹이고 난리야! 도대체 언제까지 과거에만 매달려 있을 거야? 미래가 중요하잖아! " 하면서 달려드는 겁니다.그래서"아니 여보쇼? 옛날에는 이제 나라의 기틀을 세울 때라서 못한다고 하더니 인제 오래된 일을 왜 들먹이냐고 하오?" 그랬더니 "이거 말이 많아! 이거 혹시 빨갱이 아니야? 하여튼 친일파 청산 운운하는 놈들은 빨갱이들이 많아! 너 어디 맛좀 봐라! 어이! 가스통 가져와!"

 어이구...무서워서 말을 못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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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2-01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스통을 들어올린 순간 앞으로 한 발 나가며 왼손 잽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 한 후
0.5초 후 작렬하는 오른손 스트레이트! 이른바 친일파 바로 눕히기. 미친소의 추억이 예전에도 있었다는 사실이 재밌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2-02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만평에선 미친 황소가 야당을 들이받아 뿔에 꿰어 허공에서 흔들고 있는 모습을 그렸어요.75년 4월 동아일보로 기억합니다.

파란여우 2008-12-02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민을 위해 소처럼 일하자고 했지만 국민이 정권유지를 위해 소처럼 일했죠. 그것도 모진 매를 맞고. 친일청산은 1948년 이승만이 친일청산의 첫단추를 잘못꿰었죠. 당장 친일청산의 폭풍을 휘두를것처럼 호언해놓고 막상 정권장악을 위해서 반공으로 방향을 돌렸죠. 덕분에 반공, 참 오래도록 장수하십니다. 노자님의 이 시리즈 꾸준히 애독합니다. 거르지 마세요^^

노이에자이트 2008-12-03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민이 소처럼 일했다는 표현은 정곡을 찔렀습니다. 요즘 그레고리 헨더슨의 국회 프락치 사건에 관한 방대한 문헌을 발굴한 연구서가 나와서 관심이 갑니다.<한국논단>에는 국회프락치 조작설은 근거없다는 주장의 시리즈가 실렸군요.매파 반공단체가 내는 간행물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전후 한국사에서 가장 큰 분기점 중의 하나는 한국전쟁과 1963년의 박정희 민정참여라고 한 이들이 있습니다.그만큼 1963년이 중요하다는 말이겠지요.그 해 2월에서 4월까지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 의장은 민정에 참여 안한다 한다 말을 여러번 뒤집고 또 뒤집고 합니다.국내정치인은 물론 외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민정엔 불참하고 군인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다가 한달도 안되어서 다시 민정에 참여하겠다고 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계속하다가 결국 민간정치인과 미국을 모두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그 해 대선에 출마하게 되지요.이 과정을 보면 박정희가 고도의 책략을 썼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아니면, 실제로 그가 물러가야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낫다고 해야하는지 참 어지럽습니다.그리고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처음에 박정희가 군정을 연장하겠다고 했을 때 그렇게 펄펄 뛰면서 "당신이 물러나고 민간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강하게 나오더니 결국은 박정희 뜻대로 하라고 양해를 해버리지요.알 수 없는 일입니다.박정희와 케네디 시대는 정말 생각해 볼 거리가 많습니다.특히 미국의 제3세계 정책에 비추어서도.

   윤보선과 박정희의 대결은 표차이가 별로 안났습니다.아슬아슬했지요.이때 유권자들의 투표성향은 아마 우리나라 선거역사상 가장 독특했을 겁니다.혁신계 인사들 상당수가 박정희를 찍었으니까요.제 어머니는 윤보선을 찍었다고 했습니다.하지만 이 곳 호남지역에선 당시 윤보선의 매카시즘에 전전긍긍하던 박정희가 불쌍하다고 박정희 찍은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고 합니다.특히 여수순천 쪽 사람들은 박정희가 당선되면 우리더러 빨갱이라고 하는 손가락질을 하거나 하는 일은 없어질 거라고 여기고 박정희 찍은 사람들이 많았지요.물론 그 후의 역사는 이런 기대가 얼마나 순진했나 하는 걸 보여줍니다만.

  이 당시 박정희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수많은 결단을 해야했던 순간인데....전기작가라면 가장 고심할 대목인데요.요즘 조선일보 하단에 강경한 반공단체들이 자신들의 견해를 주장하는 의견광고를 많이 내고 있는데 조갑제<박정희>전 13권을 판매하니 전화로 주문하라는 광고도 함께 싣고 있습니다.<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시작된 전기가 <박정희>라는 제목으로 완간된 모양입니다.하기야 올초인가 <박정희 최후의 그날>이란 책이 나왔으니 이제 거의 10년에 걸친 집필이 완료된 모양입니다.올해 보수진영에선 이현희가 또다른 박정희 전기를 냈지만 그 분량에선 조갑제의 <박정희>를 따라갈 수는 없지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나온 책을 몇 권 봤는데 굉장히 자세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그리고 조갑제의 글솜씨가 매우 좋습니다.어떤 때는 비장하게 어떤 때는 눈물을 자아내게도 합니다.특히 서독의 광부.간호사를 만나는 장면은 드라마 작가들도 이렇게 쓰기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감동적으로 썼습니다.이국땅에서 대통령 내외를 만나는 그들이 환영성명을 읽다가 우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하지만 서독 대통령이 박정희의 애국심에 감동하여 같이 울었다는 대목은 픽션으로 밝혀졌지요.그러나 글의 힘은 셉니다.그 대목은 나중에 박정희를 호의적으로 보는 이들에 의해 계속 인용되더군요.이미 하나의 신화가 되어버리니 진실은 고개를 숙이지요.

  조갑제의 책이 한때 한길사에서 여러권 나왔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많습니다.사실은 조갑제는 월간 마당의 편집장 출신입니다.이후 월간조선사로 갔지요.한길사에서 책이 나오던 때는 월간조선사 차장이던 시절(1983년 입사)입니다.이때가 1987년 전후인데 사형폐지운동에 관심이 있어서 억울한 사형수이야기를 다룬<사형수 오휘웅 이야기>, 고문의 희생자가 다시는 생겨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담긴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등을 냅니다.한길사에선 현대사 추적 시리즈로 이 책들을 내지요.이때만 해도 조갑제 씨는 인권에 관심이 많은 인도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그리고 박정희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책도 이때 냅니다.부마항쟁 르포<유고>입니다.광주항쟁에 대한 책은 많습니다만 부마항쟁에 대한 책은 거의 없지요.이 책이 유일한 것 같습니다.한길사에선 이 책을 우리시대 실록문학의 충격적 성과라고 띄웠지요.조씨는 이 책을 쓰려고 7년간 500명을 인터뷰했다고 합니다.1979년 부마항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집필을 생각한 것 같습니다.이 책은 저도 헌책방에서 구했는데 그의 다른 책들은 지금도 구입하려고 합니다.특히 고문을 통해 빨갱이 만드는 수법을 폭로한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은 제가 관심을 갖고 있지요.그가 지금과 같은 강경한 반공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 경부터입니다.

  이승만 전기는 이승만에 호의적인 이한우 씨도 썼고 이승만에 비판적인 정병준씨도 썼습니다.특히 후자의 책은 그 분량에서 압도하지요.이현희도 이승만 전기를 썼습니다.그런데 박정희 전기는 조갑제나 이현희 같은 보수파들의 것은 있는데 박정희에 비판적인 이가 쓴 전기는 없습니다.그 이유가 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전인권이나 정운현의 책은 본격적인 박정희 전기라고 말하긴 힘들지요.정병준 씨의 이승만 전기처럼 두툼한 박정희 전기를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쓸만도 한데요.박정희 전기는 보수파나 쓰는 거야 하고 손도 안대는 동안 조갑제류의 박정희 관만 더 널리 퍼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저는 박정희를 비판하는 전기를 읽고 싶은 사람에겐 꿩대신 닭이라고 이병주<그해 5월>을 권합니다.방대한 소설이지요.하지만 이병주 특유의 역사허무주의 때문에 거슬리는 대목이 있습니다.진중권<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는 진중권 특유의 재기가 넘치긴 하지만 본격적인 전기는 아니지요.글 잘쓰는 강준만,한홍구 같은 이들이면 두툼한 박정희 전기가 나올까요?

  예전에 귄터 그라스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2차대전에서 독일이 지고 독일 땅이 폴란드 령이 되면서 그 지역의 독일인들이 강제로 쫓겨날 떄 상당히 비참한 일이 많이 일어났는데 이 문제를 진보주의자들이 다루지 않으니 보수파들에게 담론의 주도권을 뺏겨버렸다고.아마 박정희 문제도 이런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박정희는 수구꼴통이나 다루는 것이라는 사고방식때문에 그 결과 사람들은 박정희에 대한 지식을 조갑제 같은 인물의 책을 통해서만 얻을 지도 모릅니다.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고 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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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1-26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중요한 문제 제기네요. 박정희를 보는 창이 여러가지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식으로 가다가는 조갑제류의 수구적 창에만 의존하게 된다면 문제가 되겠네요.

한일회담반대운동 관련 책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윤보선은 왜 쿠데타를 진압하려하지 않았는지 답답하더라구요.

노이에자이트 2008-11-27 12:54   좋아요 0 | URL
김종필의 전기도 써야 할 때가 왔습니다.
가장 많이 하는 말로는 윤보선이 장면과 불화했기 때문에 차라리 쿠데타라도 일어나서 장면이 무너져라...뭐 그런 식? 그리고 참으로 모든 여건이 쿠데타 군에게 좋았어요.이한림도 처음엔 진압하러 가겠다고 했다가 취소해 버리고...당시 주한미군사령관 매그루더는 장면 지지자라서 쿠데타를 용납 못하겠다고 노발대발했는데 당시 케네디 정부는 무력진압에 반대하고...어물어물하다가 결국 박정희는 성공! 케네디가 왜 우유부단한 대처를 했는지에 대해선 전에 제가 언급한 그레고리 헨더슨의 설명이 있지요.

후애(厚愛) 2008-11-27 0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박정희에 관해서 잘 몰라서 뭐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궁금한 점은 어쩔 수가 없네요. 먼저 박정희가 대통령을 5년동안 한 셈인데 우리나라 경제개발은 어땠나요? 그리고 박정희가 창씨개명 했다는 말이 있던데 그럼 박정희가 친일파인가요? 물론 이 말이 사실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어떤 이들은 박정희가 독재자였다고 하고요. 박정희가 있던 시대 때 아직 어린 저로서는 박정희에 관해 잘 몰라요. 박정희를 좋은 쪽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나쁜 쪽으로 보는 이들이 있더군요. 근데 이런 사람들도 박정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확실히 모르는 사람들 뿐이고 오직 자기네들 생각이고 느낌을 말하는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잘 모르는 것도 있겠지만요. 그래서 저는 과연 박정희가 진정으로 어떤 인물인지 무척 궁금하지만 그건 오직 본인인 박정희만이 알 뿐이지요. 제가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댓글을 쓴 점도 있으니 양해 바랍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1-27 22:28   좋아요 0 | URL
박정희는 1961~79년까지 최고 지도자였는데 63년 선거로 대통령 직함을 갖기 전에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이란 직책에 있었습니다.박정희의 창씨개명 이름은 오카모도 미노루와 다카키 마사오 두 개입니다.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간도특설대에서 1944년경부터 활약하는 데 이게 항일세력 토벌이 임무라서 친일파라는 혐의를 받고 있지요.실제 그가 토벌에 어느 정도 가담했는지는 좀 더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합니다.
박정희의 경제정책에 대해선 제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분야인데 70년대 들어서서 시작한 중화학 공업 추진에 대해선 저는 실패작이라고 봅니다.이건 좀 더 제가 자세히 공부해야겠습니다.당시 경제관료들의 회고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지요.
박정희의 행적을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통사람들 즉 실제로 박정희에 대해 잘 모르면서 그냥 막연히 몇개의 일화라든가 귀동냥으로 들은 정보만을 바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호도도 연구해볼 만합니다.좋아하는 이들은 무슨 근거인지 싫어하는 이들은 무슨 근거로 그러는지.

쟈니 2008-11-27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갑제는 청년기 시절에는 꽤 괜찮은 기자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람 후반부를 보라는 말은 조갑제를 보면 알수 있겠죠.. 상대주의 이야기를 보니 얼마전 읽은 책인 박홍규씨의 '에드워드 사이드 읽기'가 생각납니다. 이 책에서 상대주의와 다원주의가 간략히 설명되었구요.
박홍규씨의 책에서 (그리고 사이드 역시) 마르크스가 동양을 바라보는 그 관점을 비판했고, 아직 다른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한나 아렌트와 같은 서구의 진보 지식인들에 대해서도 일정부분 비판을 한 듯 합니다(읽지 않았기에 오로지 저의 추측입니다). 노이에자이트님의 글 뿐만 아니라 다른 분의 댓글을 통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볼수 있군요!!

노이에자이트 2008-11-27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논단을 내고 있는 이도형이 80년대에 쓴 <흑막>란 책은 한일유착의 뒷거래를 파헤친 책인데 박정희 및 군사정권의 뿌리를 매우 비판적으로 봤지요.그러던 이 씨가 90년대 이후엔 강경한 반공주의자가 되어 있습니다.
미지의 인물이 알찬 댓글로 도움을 주지요? 이런 댓글을 통해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되지요.상대주의나 다원주의는 역사철학이나 세계관에 관한 책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신간인 <아렌트와 토크빌>은 아렌트와 토크빌에 대한 소개내용보단 이 사상가를 받아들이는 한국 지식인들의 태도에 대한 박홍규 씨의 비판이 더 재밌습니다.그다지 어렵지 않으니 읽어보십시오.

노이에자이트 2008-11-28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학이 단순한 실증적인 연구는 아니고 배후에 역사철학 즉,역사란 무엇이며 역사서술은 어떻게 해야하느냐를 깔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논쟁도 생기는 것이지요.하지만 시대에 따라서 역사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는 다소 안이한 사고방식만 아니라면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명제는 부분적인 유효성이 있다고 봅니다.
민족주의의 해악이란 사회주의 국가들간에도 민족분쟁을 해결하지 못했으며 일부 국가들간에는 사회주의 이전 정권들의 배타적 민족주의를 정권유지 차원에서 동원하기도 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베트남은 통일되자 마자 캄보디아를 침략했고 중국과 전쟁을 했지 않습니까.동구나라들은 사회주의 시절에도 반 유대주의를 암암리에 이용했구요(그 대표가 폴란드).
자본주의와 시장의 문제로 근대화 논쟁을 접근해보려는 것은 제가 경제사에 관심이 많아서입니다.이 문제를 다루면서 자본주의 이행 논쟁을 다시 검토해 보려구요.그리고 이 논쟁에 참여한 브렌너에 대해서 요즘 유럽중심주의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으니 브렌너의 논문도 정독해보려고 합니다.
비서구 지역이 근대화를 할 때 동도서기니 화혼양재니 해서 하드웨어는 서구식을 받아들이지만 근대적 소프트웨어인 인권이나 민주주의는 받아들이지 않았지요.그런 수용태도를 합리화하기 위해 아시아적 가치라든가 유교자본주의라든가 하는 해명성이론이 나왔다고 봅니다.그리고 독립이후 제3세계권 독재자들이 식민지 시절 도입된 행정기구등을 이용해 억압기구로 온존시킨 것도 지적하고자 합니다.하나의 이상형으로 근대를 상정하여 여기에 맞추자 하는 경향이 근대화담론에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귀하의 질문자체가 저에겐 현재 공부하고자 하는 과제입니다.생업 틈틈이 좋은 문헌을 찾아 공부하겠습니다.

순오기 2008-11-30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뿌리 깊은 나무'를 보다가~
마당은 1981년 창간호부터 12월까지 구입해 봤지요. 지금도 보관하고 있고요.^^

노이에자이트 2008-11-30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뿌리 깊은 나무에서 나오던 이 땅 민중들의 자서전은 구술자료로 큰 가치가 있었죠.얼마전에 한창기 씨 전기가 나온 것 같던데요.브리태니커 사전을 수입하기도 했지요.한창기 씨는 우리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구요.

0000 2008-12-01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인지 제목은 명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맞을 겁니다.
정말 깜짝 놀랐죠. 그 조갑제 맞는가해서. 어찌나 절절하게 사형반대의 목소리를 호소력있게 말하는지.
조금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납니다.
누가 정말 내가 아는 조갑제인지.
아...그 제목이 아니군요...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도 아니고...살인으로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쓴 글인데, 고문 조작으로 살인자를 만들고 사형을 선고한....뭐더라...

노이에자이트 2008-12-01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 책 말고 사형수 관련 책은 잘 모르겠네요.한길사에서 조갑제의 현대사 추적 시리즈로 나온 건데요.1987년 무렵이죠.

유도명인황장엽 2013-02-07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글에서 우연히 검색하다 잘 읽고 갑니다. 더 궁금한게 많아서 박정희 키워드로 검색해서 다른 이전 글들도 읽고 가는데, 정말 많이 배우고 가게 되네요. 앞으로 평전이 많이 쓰여진다면 좀 객관적이려고 노력하는 책이 써졌으면 좋겠어요. 인정할 건 인정하고.. "그분 덕분에 이렇게 먹고 산다" "그분 아니었으면 경제발전 못 시켰다"고 하는 것도 짜증이 나지만, "누가 했어도 그정도는 했다"는 아니라고 보거든요. 공부를 할 수록 박정희의 경제 업적이 "그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고 신격화 될 정도로 퍽이나 대단한가 싶기는 한데(우호적이었던 환경,조건도 비중이 엄청나기에) 야당이나 다른 세력에 대안이 될 수 있는 유능하고 리더십 있는 적임자가 있었나 하는 문제로 들어가보면 좀 아리송 하기도 하구요..
 

  한국 현대사에서도 학자들의 손길을 기다리는 시대가 있습니다.대체로 해방 3년사나 한국전쟁에대해선 상당히 묵직한 연구서들이 있는 반면 50년대 60년대는 사각지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주변에서 이야기들은 많이 합니다만 실제로 진상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참 드뭅니다.그 시절 성인기를 보낸 이들도 가물가물한 기억 빼고는 잘 모르지요.특히 공안사건이라고 통칭하는 사건들은 워낙 미묘한 구석이 많아서 쉬쉬하기도 합니다.제가 호기심이 많아서 시국사건에 대한 여러가지 수기나 기사들을 읽는 중에 흥미로운 사실을 몇 개 알아냈는데 인혁당 사건과 통혁당 사건에 대한 현재의 기억에 관한 차이입니다.일반인들도 그렇고 과거사 진상규명위에서도 인혁당 사건에 대한 조명은 꽤 한 듯한데 통혁당 사건은 그러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기껏해야 통혁당 하면 우선 생각나는인물이 성공회 대학교수 신영복 씨 정도? 문근영 씨가 유명해진 2005년 이후엔 그녀의 외조부인 류낙진 씨가 검색어로 오르고 있더군요.사실은 그 무렵 류 씨는 고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통혁당 사건을 공부하게 된다면 김종태라는 인물을 만나게 될 겁니다.당시 대공수사기관에선 통혁당의 수괴라고 선전한 인물입니다.지금의 제 나이 또래들도 영남 지방 하면 군사정권의 아성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인혁당이나 통혁당 사건의 주동 인물들은 영남의 혁신세력들이었다는 점을 우선 밝혀둡니다.항간에선 박정희가 이들을 유례없이 탄압한 이유가 영남의 혁신세력들을 없애버리겠다고 작심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최근 신영복 씨가 '청맥'이란 잡지에 대한 추억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이 교양잡지는 지식층을 대상으로 해서 당시로선 상당히 파격적인 진보성을 보여주었는데 이 잡지의 주간이 김질락.그는 김종태의 조카였습니다.숙부인 김종태는 그에게 우상이었다고 합니다.둘 다 경북 영천 출신.김종태가 통일혁명당을 공식결성한 시기는 1964년 무렵이며 청맥은 당 기관지같은 성격도 있었습니다.물론 중정이 이를 그대로 놔둘 리가 없지요.1967년 청맥은 강제로 정간당하다가 그 뒤 복간과 폐간을 거듭합니다.

  1968년이 통혁당이란 조직이 신문방송에 등장하게 된 계기입니다. 7~8월 무렵.김종태,김질락,이문규 등 서울 조직의 지도급들이 체포되고 호남에선 최영도,정태묵 등이 체포됩니다.(호남에서 일어난 사건이 세칭 임자도 사건인데 야당 의원을 지원하려고 했다 하여 나중에 1980년 5월에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공판 당시 김대중 씨가 정태묵과 접선을 했다는 계엄사령부의 주장이 등장하게 되니 그 여파가 얼마나 길게 계속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이때 육사에서 부교관이었던 신영복 중위는 군대내에 통혁당 조직을 결성하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지요.이른바 ps혁명론입니다.FROM PAPER TO STEEL의 약자이지요.무투(무장투쟁)혐의입니다.김종태,최영도,이문규는 모두 1969년 사형됩니다.정태묵,김질락은 1972년 사형.신영복 씨는 20년 징역형.

  인혁당도 제 1차 사건이 1964년이고 1974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통칭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나듯 통혁당 사건도 통혁당 재건위 사건이 있습니다.1979년의 일이죠.그 전인 1971년. 조직이 파괴되던 호남쪽에선 류낙진 씨가 체포됩니다.류낙진 씨는 통혁당 관계 문헌에 반드시 등장하며 류낙진 외 11명 체포라고 나옵니다.1980년대 이후의 통혁당과 한민전은 그전과는 성격이 많이 변하는데 이에 대해선 그저께 올린 저의 페이퍼를 참조하십시오.

  김질락은 체포되어 사형을 기다리던 중에 수기를 씁니다.일종의 반성문 겸해서 쓴 글인데 자신의 우상이던 숙부 김종태를 여기선 애증이 교차하는 비판도 합니다.감옥 속에서 쓴 글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 글은 통혁당에 대해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는 책입니다.나중에 책으로도 나왔지요.<어느 지식인의 죽음.김질락 옥중수기,원제:주암산>행림출판사1991 .주암산이란 1967년 그가 북한을 방문하여 20일 동안 있었던 평양의  숙소 뒤의 작은 산.임진왜란 당시 계월향과 김응서 장군의 사랑 이야기가 된 무대.김질락의 사형이 집행되던 때는 7,4공동성명으로 온 한반도가 통일의 열기가 뜨겁던 1972년 7월 15일이었습니다.

  김종태를 비롯한 통혁당 지도부를 체포한 이가 중정부장 김형욱.그와 김종태의 일문일답이 흥미롭습니다.

김형욱: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알고 있는가?

김종태:우리는 그것을 인정한 일이 없다.

김형욱:그러나 우리는 그 법으로 당신을 재판한다고 생각한다.당신의 죄목만도 181가지나 된다.

김종태:어떻게 내 죄명이 181가지인가? 정치탄압을 가한다면 나에게 1810가지 죄명을 덮어씌워도 좋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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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11-23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통혁당이나 아니면 공산당 같은 정당이 양지에서 활동할 수 없는 것은 분단이라는 상황 때문일까요? 아니면 국가보안법 때문일까요? 아니면 사람들의 의식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 까요? 얼마전 사노련에 무혐의가 인정되었을 때 오세철 교수가 웃으면서 홈페이지를 전부 공개해놔서 수사하기 편했을 거라고 했는데 아직 우리사회는 그런 여유가 없나봐요.

노이에자이트 2008-11-23 23:39   좋아요 0 | URL
어려운 문제입니다.사실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부르조아 민주주의도 아직 못해봤는데요.저는 현재 뉴라이트 쪽에서 많이 내세우는 학자들을 있는 그대로 공부하고 있습니다.뉴라이트 이념에서 그 사상가들을 분리해서 실제 그대로의 그 모습을 보려구요.통혁당이나 인혁당처럼 60~70년대 혁명론은 그런 대로 이해가 갑니다만 80년대의 이념가들은 글쎄요...일종의 관념좌익이라고 해야 하나요? 어쩐지 한나라당 쪽보다는 김대중 노무현 때리기에 더 열중하는 듯.

비로그인 2008-11-24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문 중에 계월향과 김응서 장군 부분을 보고 생각난게 제가 갖고 있는 책 중에 <식민지 조선의 풍경>이란 단편집이 있어요. 네 편의 수록작 중에 김장군 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이에요. 작품 속에 김응서 장군이 계월향의 도움으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목을 친다는 내용이죠. 어렸을 때 봤던 만화들 중에 이와 유사한 것들이 있었어요. 잘린 목에 소금이나 재를 뿌린다거나 적장의 아이를 가졌으니 죽여달라는 조선여인 같은 경우는 아마도 아쿠타가와의 작품을 읽고 차용했거나 표절했던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노이에자이트 2008-11-2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쿠다가와에게 그런 작품이 있었군요.계월향 이야기는 소설가들이 즐겨 작품화할 만한 소재지요.정비석이나 박종화 씨도 썼으니까요.그런데 아쿠다가와는 고니시의 목을 친다는 픽션을 집어 넣었군요.고니시는 임란 이후 일본이 다시 내전에 휩싸일 때 이시다 미스나리와 함께 손잡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반대하는 진영에 서서 싸우다가 패전하여 결국 참수형을 당합니다.일명 세키가하라 전쟁.그때가 1600년 11월이죠.그는 가톨릭 교도라서 할복자살하지 않고 참수형을 해달라고 부탁했답니다.통혁당 이야기보다 이런 이야기가 더 재밌네요.하하하...

가시장미 2008-11-24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역사적인 사실들은 어떻게 다 알고 계신지..매번 참 대단한 식견을 지니셨다는 생각을 하게됩니다 ^^ 가끔 그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어요. 자신의 소신이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은 죽는 순간 어떤 생각을 할까.. 하고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인성적인 면에서 보통 사람들과 다른 특별함이 있는 걸까.. 아니면 보통사람들이 특별하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너무 쉽게 잃어버리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사실 자신의 신념을 옳다고 확신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렵잖아요. 더군다나 자신의 삶 자체가 송두리째 사라질 수도 있다면.. 누구나 두려울 것 같아요. 그런 두려움과 직면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역사를 통해 그런 것을 알아갈때면 역사공부는 참 열심히 해야 하는 거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기억해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런 사람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도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는 것도 우리들에게는 어떤 일보다 중요한 일이 아닌가해요. ^^ 그런데 지나간 일들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그래서 타이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때가 종종있지요. ㅋㅋ
참 쌩뚱맞은 댓글이네요. -_-;

노이에자이트 2008-11-25 12:12   좋아요 0 | URL
가시장미 님의 글은 날씬하고 흰 자작나무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저는 호기심이 많아서 기자들이나 교수들이 신문에 몇 줄 적은 글을 보고 더 깊이 알아보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책을 구하고 그 책을 읽다가 더 알아보고 싶어서 또 책을 구하고...그렇게 되지요.물론 거의 대부분 헌책입니다.인터넷에도 어떤 검색어는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만 역시 책을 따를 수는 없지요.특히 저는 우리 현대사에 관한 쟁점은 대립되는 견해를 지닌 사람들 것을 골고루 읽는 편입니다.처음엔 헷갈리지만 읽다 보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지요.이런 정보는 시사월간지에서도 구하지요.
역사는 해석을 둘러싼 투쟁이지요.또 기억을 둘러싼 투쟁이라는 말도 합니다.역시 중요한 것은 책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책이 나온 시기도 중요합니다.예를 들어 지금까지는 건국이나 정부수립은 다 혼용했지만 요즘은 두 용어의 의미가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지요.
타임머신 타고 실상을 보고 와도 역시 그것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해석이 끼어들고 역시 그것 가지고 또 이러니 저러니 다투게 되지요.이런 문제를 다룬 책이 에드워드 카<역사란 무엇인가>입니다.저는 잊을 만하면 반복해서 읽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08-11-26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는 근대적 개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풍토라고 봅니다.다소 애매하지만 산업화보다는 더 나아간 민주주의와 자유,평등을 인지하고 있는 개인이 존재하는 사회지요.그런 면에서는 이상적인 인간상,사회상을 상정하고 있다고 봅니다.문제는 이런 식의 근대가 온전히 정착된 곳이 과연 있느냐 하는 문제인데요.예전 독일에서도 독일과 비교하는 더 근대적 개념으로서의 서구라는 게 과연 실체가 있느냐는 문제가 대두되었죠.최근에 자본주의 이행논쟁을 비판하는 이들 역시 영국이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사의 정상적 단계의 모델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 대세인 듯합니다.하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할 것이냐,이렇게 해체해버리기만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또 나오지 않을까요? 그래서 제가 최근의 서구중심주의 비판서에 선뜻 찬성을 표하기가 좀 그렇습니다.당연히 포스트 식민주의도 그렇구요.
지금의 뉴라이트 중 특히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반 뉴라이트 진영의 문제제기는 소박한 수탈론 이상의 수준은 아니라고 보긴 합니다.
그리고 제가 최근 전통적 근대화론자들의 논문을 보고 있는데 그들 역시 식민지를 합리화하거나 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를 경영했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기도 하니까요.
그리고 최근에 마르크스주의도 서구중심주의의 일종이라는 주장이 꽤 강한데 제가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지만 아직은 거기까지 나아가는 것은 찬성하기가 망설여집니다.물론 아직까지는 그 정도까지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포스트 식민주의 원전들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습니다.신문의 학술면이나 학술계간지 등을 통해서 접한 정도입니다.여하튼 저는 현재의 '국사'의 지나친 자만족 중심주의는 안 좋다고 봅니다.
질문이 어렵네요.좋은 정보가 있으면 알려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