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기해년에도 부지런히 달렸다.

오늘까지 해서 모두 160권을 읽었다.

원래는 10권을 뽑고 싶었는데, 쉽지 않더라. 그리하여 올초부터 정리해둔 책 중에서 가장 인상에 남을 만한 책들 7권을 골라 봤다.




1. 바보의 알파벳 - 시베스천 폭스


가히 인생책이라 부를 만하다. 내년에 다시 한 번 읽어볼 생각이다.

A부터 시작해서 Z에 이르는 삶의 여정 그리고 내 삶의 근원을 찾아 가는 구도의 과정에서 구원 비스무레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무언가 거창하게 표현하고 싶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의 능력 밖이지 싶다. 이 책으로 단박에 시배스턴 폭스 작가의 팬이 되어 버렸다.

 

<파리 에코> 원서도 샀지만, 어디선가 먼지를 조용하게 뒤집어 쓰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읽지도 않을 책은 왜 샀냐고 묻지 마라.


2. 보라색 히비스커스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한 시절 인도가 세계 문학을 이끌어 나가리라는 전망이 있었다. 다음 주자는 검은 대륙의 나이지리가가 될 모양이다. 그런데 조국을 떠나 미국에 둥지를 튼 아디치에 작가를 나이지리아 작가로 칭해야 할지 아니면 미국 작가로 불러야 할지 고민이다.

 

먼저 소개된 <아메리카나>는 읽다 말았는데, 데뷔작 <보라색 히비스커스>는 놀라운 흡입력으로 단숨에 읽어 버렸다. 아마 폭스의 <바보의 알바벳>이 아니었다면 올해 내가 만난 최고의 책으로 꼽아도 무방하지 않았을까 싶다.

 

포스트콜로니얼 시대 전통과 현대의 충돌, 예의 갈등을 그대로 받아내야 하는 가정 문제가 어우러지면서 빚어내는 서사에 그만 반해 버렸다. 정녕 이게 데뷔작이란 말인가. 그저 놀랄 뿐이었다.


3. 빅 브러더 - 라이오넬 슈라이버


이제 연락이 안되는 내 동창 친구는 술자리에서 가족이 원쑤라며 한탄을 했다. 그녀의 가족사에 얽힌 이야기를 나중에 전해 듣고 이해가 됐다. 가족이 진짜 원쑤였다. 하지만 직접 체험해 보지 않은 상태에서 아직 원쑤까지는 된 것 같지 않다. 어쨌든.

 

나의 피붙이가 나에게 빌붙으려 한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반응할까.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고 살자가 나의 삶의 모토 중의 하나인데. 재즈 피아니스트 오빠가 엄청나게 살이 찐 상태로 나를 찾아온다. 오빠 때문에 나의 결혼 생활이 위기에 빠져든다.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일까.

 

모든 사회적 출발의 원점에 해당하는 가족 문제를 예리하게 해부한 라이오넬 슈라이버의 탁월한 분석에 그리고 매 고비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유형의 갈등이 새콤달콤 쌉싸름하기까지 하다. 오래 동안 묵혀 두었다가 읽은 보람이 있었다. 그전에 읽다만 슈라이버의 <내 아내에 대하여>도 읽어야 하는데.


4. 그리스도는 에볼리에 머물렀다 - 카를로 레비


말이 필요 없다. 우리에게는 정말 알려지지 않은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반파시스트 운동에 나섰다가 시골 마을로 유배된 청년 지식인의 값진 기록이다.

 

모든 민중을 사랑하는 그리스도 마저 에볼리에서 멈출 정도라는 표현이 심금을 울린다. 신마저 민중을 외면한다면 그들의 희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아야 한단 말인가.

 

중앙 정부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진짜배기 이탈리아 민중 사이에서 지내며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을 취합해서 펴낸 레비의 글이 국내에 소개된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가족어 사전>과 함께 읽어볼 것을 권한다.


5. 가재가 노래하는 곳 - 델리아 오언스


사람들이 애정하는 책이라면 다 이유가 있는가 보다.

인스타에 끝도 없이 올라는 피드에 떠밀리다시피 해서 읽게 된 책인데 놀라웠다.

천조국의 자연과학자는 소설도 잘쓰는가 싶었다.

 

바닷가에 아무도 없이 홀로 살게 된 카야의 고독하고 외로운 삶에 공감이 갈 수 있도록 델리아 오언스 작가는 정교하게 짜인 플롯으로 독자를 유혹한다. 삶은 그렇게 무지갯빛으로 오색찬란하게 비추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진실인 것을 말이다. 진실은 정말 아프고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그것이 인정하고 싶진 않은 진실의 이면이라는 걸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된다.

 

어떤 종류의 깨달음이든지 제공해 주는 책이라면 책쟁이가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6.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 리처드 플래니건


모든 것은 시절인연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책을 기를 쓰고 읽으려고 해도 안되고 또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 않은가.

 

리처드 플래니건의 <먼 북>은 세 번의 도전 끝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책의 어딘가에 나오는 인간 존재의 한없음이야말로 작가가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해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같이 사는 부대낌이 사랑의 감정을 휘발시켜 버릴 지도 모를 노릇이 아닌가. 그러기에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이 더 애절하고 뭐 그런 것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재료에 전쟁포로로 시암에서 버마로 가는 철도 부설공사에 내몰린 오스트레일리아 전쟁포로에 대한 고통의 연대기 한 자락을 깐다. 기아, 고문, 학대 같은 폭력에 시달리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포기하지 않은 불굴의 정신을 저자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하이쿠를 사랑하는 민족인 일본인들이 가해자인 전쟁에서 자신들도 피해자라며 악을 쓰며 대드는 장면을 대표적인 피해자 민중들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 들이란 말인가. 이것 역시 하나의 폭력이 아니던가. 역사학을 전공한 작가답게 플래니건의 서사는 강렬한 진실의 힘으로 때로는 논쟁적 주제를 피하지 않는 당당함으로 독자에게 어필한다. 대단한 책이다.



7.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 실레스트 잉


좋은 책은 어떻게든 만나게 된다. 지난봄에 만났다가 <타임>이 도와줘서 지난달에 결국 읽게 됐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기시감 아니 기독감은 레알이었더라. 그리고 반가웠다.

 

이제 더 이상 하나의 나라가 아닌 민주당을 지지하는 이들과 공화당을 지지하는 이들로 갈려 버린 미국 사회의 오늘에 대한 정밀보고서가 아닌가 싶다.

 

1997년에서 1998년으로 넘어가는 미국 사회는 그 유명한 클린턴 스캔들로 몸살을 앓았다.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 케네스 스타 리포트에 등장하는 포르노소설을 능가하는 슈퍼리얼리티는 진짜 끝장이었지. 당시 신문 지상에 나온 케네스 스타 리포트 전문이 실린 신문을 어디에 보관해 두었을 텐데.

 

또 한편에서는 생산수단 유무에 따라 초래된 부의 불평등은 양극화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미아 워런과 펄이 한 편이라면, 리처드슨 가족은 상위 그룹을 형성한다. 태생부터 다른 이방인인 펄과 미아가 차례로 리처드슨 가족의 삶에 개입하면서 빚어지는 인생 드라마는 정말 압권이었다.

 

21세기 미국사회가 가지고 있는 부의 분배문제, 인종주의, 입양문제, 십대의 섹스 이슈 등등 거의 전반을 소설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는 정면에 대고 선전포고를 날린다. 그 어떤 주제도 피해갈 의도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실레스트 잉 작가가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 게 아닐까. 작은 불씨치만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큰 불로 번질 수 있다는 게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의 알파와 오메가를 장식하는 그 무언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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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편] 까비 3


1.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 치누아 아체베


나이지리아 출신 대가의 작품이 내뿜는 아우라는 대단했다.

대선배의 뒤를 딸 신예 치고지에 오비오마도 아마 그의 작품에서 타령을 한다지.

미지의 대륙에서 연이어 터지는 젊은 선수들의 선전을 기대해 본다.


2. 광대 샬리마르 - 살만 루슈디


이 한 편으로 집에 있는 살만 루슈디의 책들을 찾아 나서게 됐다.

여러 권 있지만 제대로 읽은 책이 없다는 게 함정.

대표작 <한 밤의 아이들>은 읽다 말았다.

카슈미르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샬리마르의 슬픈 서사.


3. 올드 스쿨 - 토바이어스 울프


오랫동안 고대해 마지않던 토바이어스 울프 쌤의 책이 드디어 출간됐다.

말이 필요 없다. 부디 계속해서 울프 쌤의 작품들을 뽑아내 주시길.

파라오와 그의 특기라는 <단편집>을 속히 만날 수 있길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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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1-30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빨리 뽑으신 것 아닙니까?
아직 한 달이 남았는데...
그래도 책 많이 읽으시는 매냐님께서 이렇게
7권을 뽑으신 걸 보면 꽤 실하고 좋은 책인가 봅니다.
참고하겠습니다.^^

레삭매냐 2019-12-01 19:22   좋아요 0 | URL
이런 걸 선빵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요 ㅋㅋ

다른 분들의 베스트와 차별성을 강조하고나
좀 이른 시점에서 쓰게 되었네요.

참고, 감사합니다.

coolcat329 2019-11-30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7권 중 2권 읽었네요. 근데 160 권! 대단하세요. 저는 앞에 1을 빼야하는데... 다른 책들도 기억해두겠습니다. 남은 한 달 12월 책도 기대할게요.

레삭매냐 2019-12-01 19:23   좋아요 1 | URL
이달에는 그전에 벌려두고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그렇게 일년이 또 지나가 버렸네요.

byself120 2019-11-30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다 읽어보고싶습니다

레삭매냐 2019-12-01 19:24   좋아요 1 | URL
지극히 주관적인 독서라 다른
독자들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12-07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만 올리시면 책추가가 어렵습니다 ㅜㅜ상품추가가 안되서~레삭매냐님 스탈^^오홋!

레삭매냐 2019-12-07 22:39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사진만 떨렁 걸 게 아니라 링크가
필요했군요.
사진에 링크를 거는 법은 없을까요 :>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
실레스트 잉 지음, 이미영 옮김 / 나무의철학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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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타임>이 선정한 지난 십년의 소설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읽기 시작했는데, 왜 이렇게 익숙한 거지. 이거 내가 처음 읽는 게 아닌가봐. 알고 보니 지난 2월에 도서관에서 빌린 기록이 있더라. 아마 어느 정도 읽다가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한 모양이다. 결국 중고서점에서 사다가 다시 읽었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인근의 부자들이 사는 동네 셰이커하이츠가 공간적 배경이다. 그리고 시간적 배경은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재직 중이던 1997년과 1998년 즈음이다. 그게 벌써 20년 전의 일이구나. 워터게이트로 깨끗한 정치지도자라는 미국 대통령의 위상이 만천하에 공개됐다면, 클린턴 스캔들은 대통령 역시 보통의 인간들과 같은 욕망의 존재라는 걸 드러냈다고나 할까. 실레스트 잉은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추잡한 스캔들을 다이너마이트 오럴 섹스라는 도발적인 문구로 저격한다.

 

완벽해 보이는 리처드슨 네 집에 불이 나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누가 이 멋진 집에 불을 지른 걸까? 이 사소해 보이는 불씨는 모두가 가지고 있었을 뿐, 언제고 도화선이 당겨지면 불타오를 수 있다는 방증이다. 완벽한 보이는 중산층 가정인 리처드슨 네 집에 이질적인 이방인 미아 워런과 펄이 침투하면서 위선과 가식으로 포장한 그네들의 삶이 속속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미아와 펄 모녀는 자그마치 46곳이나 되는 미국의 곳곳을 누빈 그야말로 방랑자의 전형이다. 그들은 워낙 가난했기 때문에 비싼 물건을 소유할 수도 없었고, 이동을 위해 최소한의 것들만 폭스바겐 래빗에 실어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진 예술가 미아는 주거지와 먹을 것을 장만하기 위한 비용을 벌기 위해 비정규직 일자리를 전전했고, 딸 펄은 중고 상점에서 구제 옷을 구해 빈티지 마냥 입고 다닌다. 리처드슨 가정이 미국의 빛을 상징한다면, 워런 네는 그림자 정도라고 보면 될까.

 

자 그런데 빛과 그림자가 만나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 바로 이 지점을 실레스트 잉은 정확하게 타격한다. 리처드슨 가정의 아이들은 렉시, 트립, 무디 그리고 방화범이자 말썽꾸러기 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펄에게 관심을 갖은 무디의 초대로 펄은 완벽한 가정에 이방인으로 참여하게 된다. 지역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박애주의자 엘리나 리처드슨 여사는 미아에게 시세보다 저렴한 가격으로 세를 놓는다. 그들을 돕고 싶었던 엘리나는 미아에게 자신의 집에 와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면, 세를 면해 주겠다는 관대한 제안까지 하기에 이른다. 미아는 이 제안이 거부할 수 없다는 걸 직감한다.

 

이렇게 정교하게 설계된 리처드슨 가정과 워런 가정의 관계는 미아의 친구 베베 초우의 아기 미라벨 아니 메이링의 입양 문제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고등학교 3학년 렉시는 미아의 도움으로 예일대 합격증을 받게 되지만, 남자친구 브라이언과의 불장난으로 낙태 수술을 받게 된다. 펄은 친구 무디의 형 트립과 첫경험을 하게 되고,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는 무디는 펄과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다. 사진 예술가 미아가 가진 매력에 빠진 말썽꾼 이지는 미아의 조수를 자처해서 사진 기술을 배운다.

 

한편, 빌리 리처드슨은 너무 형편이 어려운 나머지 미라벨을 유기한 베베 초우에 맞서 소송대리에 나선다. 베베 초우 사건은 가정마저도 두 편으로 가를 정도의 파급력을 가진 지역공동체의 핫이슈였다. 어쩌면 대통령 탄핵의 버금갈 정도의. 미아가 베베의 조력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엘리나는 미아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왜 실레스트 잉이 엘리나의 직업을 기자로 설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미국의 양심을 대변하는 68세대였던 엘리나는 기득권층에 편입되어 자신이 보고 싶은 진실만을 추구한다. 젊은 날의 이상은 휘발되어 버리고, 부모 기성세대의 허위와 위선을 공격하던 베이비부머들은 그들의 부모세대가 보여준 것 이상의 위선을 삶 가운데서 시전하게 된 것이다. 그녀가 미아의 과거를 추적하던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진실들은 부메랑처럼 날아와 리처드슨 가정을 강타한다. 문학에서 작가가 곳곳에 설치한 오해라는 장치야말로 진실을 극대화하는 그런 요소가 아닐까. 결국 엘리나의 선택은 현실안주와 이지 같은 껄끄러운 존재의 배제였다. 엘리나에게 교정은 처음부터 선택지가 아니었으니까,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었다.

 

<작은 불씨는 어디에나>는 부의 불평등으로 점점 더 계급사회가 되고 있는 21세기 현실에 대한 정밀 보고서다. 20년 전, 케네스 스타 공식 리포트로 미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시대상을 바탕으로, 절묘하게 구성된 실레스트 잉의 서사는 이 소설이 왜 지난 십년을 대표하는 소설로 꼽히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다양한 캐릭터의 향연, 절묘한 서사 그리고 시대상까지 반영한 다음, 화끈한 한 방의 불꽃놀이로 대단원을 장식하는 결말까지 거의 완벽한 소설이 아닌가 싶다. 저물어 가는 기해년 말미에 <먼 북>에 이어 이런 수작을 만나게 되어 즐거웠다. 새벽까지 책을 읽느라 몸은 좀 피곤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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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11-30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주말 아침부터 우와~👍👍👍

레삭매냐 2019-11-30 14:49   좋아요 1 | URL
다 읽고 나서 기억이 생생할 때
리뷰를 날리는 게 나중에 쓰는
것보다 낫더라구요.

다 이자뿌기 전에 언능.
 
에볼루션 맨 - 시대를 초월한 원시인들의 진화 투쟁기
로이 루이스 지음, 호조 그림, 이승준 옮김 / 코쿤아우트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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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홍적세 시대에 에드워드란 이름의 원시인 과학자가 인류의 발원지로 알려진 아프리카 초원에 살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호모 사피엔스 부족은 맹수들의 위협을 받으면서 살았다. 아직까지 그들은 불을 사용할 줄도 몰랐고, 다른 맹수들에 비해 나을 것도 없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인류의 앞날이 아주 어두웠다.

 

이야기는 다양한 발명과 시도로 인류 발전에 이바지한 에드워드의 두 번째 아들 어니스트의 시선으로 전달된다. 알파벳도 없던 시절에 에드워드니 어니스트니 하는 이름들이 낯설지도 모르겠다. 단박에 눈치 빠른 독자들은 눈치 챘겠지만, 원시인들의 삶에 대한 현대적 접근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바로 그 지점이 이 소설을 흥미롭고 재밌게 만드는 킬포다.

 

인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바로 불을 얻는 것이었다. 불을 이용하게 되면서 날고기를 섭취하면서 만성소화불량에 시달리던 인류는 부드러운 고기를 먹을 수 있게 됐다. 이 말은 곧 많은 열량을 섭취할 수 있게 될 거라는 예언이었으며, 인류의 뇌는 획기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그리고 더 많은 사유를 하게 되면서 생존을 위한 사냥 외에 다양한 문화 예술 그리고 발명 활동이 가능해졌다.

 

수렵으로 살던 시절에 사냥꾼의 목소리가 가장 컸을 것이다. 부족원들에게 안정적인 먹이를 공급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을까. 하지만 불의 사용과 다양한 도구의 발명은 상대적으로 체력이 떨어지는 선수들도 공동체 생활에 다양한 방식으로 공헌할 수 있게 되면서 나름 민주적 시스템을 갖출 수 있게 된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오랜 진화의 결과물인 자본주의 시스템 아래서 놀라운 속도로 진행 중인 비인간화에 그저 놀랄 따름이다. 발명가 에드워드가 지속적으로 주창하는 대로, 과학문명(물질문명)과 사회과학의 발전은 동면의 양면 같은 게 아닌가 싶다. 물질문명의 발전이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분배를 의미하는 건 절대 아니니까 말이다.

 

또 한편으로 불의 사용 같은 기술의 진보가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교훈도 제시된다. 에드워드가 화산에서 건져온 불이 먹이를 찾아 초원을 홀랑 태우고, 에드워드 가족마저 삼킬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는 이 책이 발표될 당시 세계를 위협하던 핵전쟁에 대한 신랄한 경고라고 생각된다. 원시인의 부싯돌에서 발화된 초원을 태우는 불길과 지구별을 통째로 날려 버릴 수 있는 핵전쟁 버튼이 갖는 함의는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흥미로운 비교가 아닐 수 없다.

 

원시인이 사유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에드워드는 네 명의 아들들에게 더 이상 근친결혼을 하는 대신, 족외혼을 강권하는 장면은 또 하나의 문명의 진보에 대한 저격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출발해서 사하라와 지중해를 건너 자바를 거쳐 저우커우디엔의 북경원인들과 접촉에 성공한 이안 삼촌의 존재는 여전히 나무 위의 삶을 고집하는 보수주의자 바냐 삼촌의 그것과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인류는 호기심에서 나무에서 내려와, 저 초원 너머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촉발한 모험으로 세상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지속적인 혁신에 대한 추구가 결국 인류를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만들었다는 소설의 전개 방식에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어주었다.

 

한편 에드워드 집단의 갈등은 구세대와 신세대 간에 벌어진 발명의 인류 공헌에 대한 상이한 견해에서 촉발된다. 불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된 진취적 사고의 보유자이자 과학자 에드워드는 다른 인류들에게 불의 사용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자 하지만, 어니스트로 대변되는 자식 세대는 해당 발명에 대한 특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고집한다. 에드워드의 설득 작전에 다른 구성원들이 넘어가나 싶었으나, 어니스트의 교란 작전이 효과를 거두는 순간 봉합된 갈등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그리고 홍적세 시대에는 이른 활의 발명이라는 획기적인 시도가 비극으로 끝나게 되는 것으로 원시 서사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위대한 발명을 돈벌이나 상업화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 이바지해야 한다는 발명가 에드워드의 생각은 자본주의 3.0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그런 이상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로이 루이스 작가는 홍적세의 원시인보다도 못한 현대 발명가들의 생각을 저격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불치병에 대한 독점적 발명 권리를 바탕으로 해서 수익을 내는 다국적 의학기업의 횡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가. 오직 이익만을 추구하는 냉혹한 자본주의 논리가 원시인 에드워드의 그것만도 못하다는 점을 나는 이 책을 통해 읽어낼 수가 있었다.

 

흥미진진한 <에볼루션 맨>을 읽으면서 1992년에 발표된 브랜던 프레이저 주연의 <엔시노 맨>이 떠올랐다. 어쩌면 과거에서 현대 캘리포니아에 온 원시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엔시노 맨>의 제작자들은 32년 전에 발표된 이 코믹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게 아니었을까. 참고로 이 소설의 부제는 <나는 어떻게 아빠를 먹었는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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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굽는건축가 2019-11-29 1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감사해요. 읽어보고 싶은데요.

레삭매냐 2019-11-29 14:04   좋아요 0 | URL
아주 재밌더라구요.

어제 저녁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단박에 몽땅 읽게 되었네요.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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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책장정리를 했다. 덕분에 찾아 헤매던 책도 찾을 수가 있었고, 읽다만 리처드 플래니건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도 마저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작년 초에 출간되자마자 샀는데 20개월을 묵혀서 읽는 건 참. 그리고 결론은? 올해 최고의 책 중에 하나로 꼽을 만하다고 생각한다.

 

모두 5개의 챕터로 이루어진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세 번의 도전만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전작 <굴드의 물고기 책>이 모호하고 어둠을 걷는 것 같은 독서였다면, <먼 북>의 독서 체험은 반대였다. 서사는 명징했고, 플래니건 작가가 구사하는 문장들은 그야말로 독자의 폐부를 파고들었다.

 

주인공 도리고 에번스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 전쟁영웅이다. 아름다운 엘라와 아이들 그리고 외과 의사로서 승승장구하는 그에게 부족한 것은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의 내면세계는 자신이 항상 말하는 위선 혹은 거짓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완벽해 보이는 결혼생활 이면에는 비열한 바람둥이가 자리 잡고 있다. 2차 세계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도리고는 일본군의 전쟁포로가 되어 시암에서 버마를 잇는 정글 속에서 철도를 건설했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 그의 진짜 비극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도리고의 진짜 사랑은 키스 멀베이니 고모부의 부인 에이미였다. 아니 그럼 에이미가 그의 고모란 말인가. 물론 아니다. 고모는 예전에 돌아 가셨고, 키스가 새장가든 여인이 바로 에이미였다. 이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로맨스 자락을 깔고 플래니건은 독자를 비극의 무대가 된 시암 정글로 데려간다.

 

정글에서 우리는 포로수용소장 나카무라 덴지 소령을 만나게 된다. 일왕의 명령 수행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은 나카무라는 천여 명 남짓 되는 포로들을 버마 침공에 필요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기 위한 철도건설에 동원한다. 문제는 이미 전쟁의 패색이 짙은 일본군에게는 철도 건설을 위한 물자도, 동원된 포로들에게 공급할 식량과 의약품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병참이나 탄약 같은 전쟁물자 대신 정신력으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정신승리를 강조하는 일본 군대의 특성상,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의 건강 상태를 고려할 리가 없었겠지. 시암-버마 철도건설은 그야말로 포로들의 시신으로 건설된 비극의 전주곡이었다.

 

일본군들에 의해 행해지는 구타와 고문 그리고 학대 같은 폭력은 포로수용소의 일상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질이나 콜레라 같은 전염병까지 창궐하면서, 포로들의 건강으로 최악으로 치닫는다. 점심으로 주어지는 흙투성이 주먹밥을 반합에 담아 소중하게 야금야금 먹는 포로들의 모습은 정말 상상이 가지 않았다. 대령이었던 도리고는 오스트레일리아 포로들의 대표이자 군의관으로서 한 명의 생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최선을 다한다. 그에게 주어진 가장 잔인한 임무는 건강한 이들을 선발해서 철도 건설현장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건강한 이들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이들을 대신해서 죽음의 길로 묵묵하게 행군해 가는 장면은 너무 참혹해서 진도가 나가지 않을 정도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서구열강에 침탈당하던 동양의 대표선수가 되어, 마침내 미국과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이기 시작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태평양전쟁 초기 전쟁준비를 미처 하지 못한 연합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이끄는 말레이 진공군의 싱가포르 함락은 서구 제국의 몰락을 상징한다고 믿었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일본의 성공은 거기까지였다.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가 태평양전쟁의 변곡점으로 전환되면서, 수세에 몰린 일본남방군이 버마작전을 위해 둔 최악의 무리수 때문에 도리고와 그의 동료들이 이런 고통의 현장에 내몰린 것이다.

 

그 와중에 역사학을 전공한 플래니건 작가의 분석이 돋보이는 장면은 바로 고아나, 조선 출신 부사관 최상민의 역할이다. 전쟁이 끝나고 고타 대령이나 나카무라 같은 진짜 전범들은 그물망을 벗어나 천수를 누리지만, 최상민 같은 식민지 출신 부역자 조무래기 전범들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됐다. 전쟁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일왕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은 반면, 일선 포로수용소에서 일본군 상관들의 지시에 충실하게 따른 감시원은 월급으로 받아야 하는 50엔 타령을 하면서 교수대에 올라야 했다.

 

더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신분을 세탁하고 미군정의 전범 추적을 피하던 나카무라나 다른 전범들이 자신들도 역사의 피해자였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이거야말로 지나친 자기합리화가 아닌가. 정치적 이유 때문에 제대로 된 과거사 청산을 하지 않은 점령군 미군정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까. 미군 공군조종사들을 산채로 난도질한 의사의 고백을 듣고 나서도 그들의 생각은 요지부동이다. 전쟁 승리를 위해 희생과 헌신이 필요하다는 정말 공허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 왜 그런 희생과 헌신을 자국민에게 요구할 것이지, 약자인 타국의 전쟁포로에게 요구하는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바쇼의 하이쿠 같은 미를 추구하는 일본 민족이 다른 한 쪽에서는 그런 폭력과 야만을 무시로 행했다는 점을 플래니건은 탁월한 방식으로 적시한다.

 

플래니건 작가가 구사하는 그런 엄중한 역사의 무게감 때문인지 후반에 등장하는 도리고의 평생의 사랑이었던 에이미와의 우연한 재회나 불타는 태즈메이니아에서 엘라와 딸들을 구하기 위해 지인에게 빌린 자동차로 불타는 도로를 뚫고 달리던 가장으로서 도리고의 모습은 극적이긴 했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독서에 있어서 큰 비중으로 다가오지 못한 느낌이다. 훗날 도리고의 형 톰이 들려준 출생의 비밀은 자신에 데리고 있던 포로 중의 한 명이 조카였다는 점도 잘 만든 장치이긴 하지만 역부족이지 싶다.

 

책 후반의 어딘가에서 만난 인간 존재의 한없음”, 이 문장이야말로 <먼 북>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을 축약한 게 아니었을까. 이런 책을 어찌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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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해목 2019-11-27 1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이 소설 반정도 읽다가 사정상 못 읽고는 시간이 지나 어디 두었는지 모르겠어요. 저도 책정리 한번 해야겠어요! ㅋㅋ
그나저나 찾으면 첨부터 다시 읽어야겠죠? 리뷰를 읽어도 기억이 일도 안나요. ㅎㅎㅎ;;;;;

레삭매냐 2019-11-27 11:24   좋아요 1 | URL
저는 두 번인가 시도 끝에 성공했답니다.

그런데 진짜 이야기는 3번째 챕터부터
시작되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반다시 읽어야 하는 그런 책이라고 생각
합니다. 너무 슬프고 감동적이고 어쩌구 저쩌구...

카알벨루치 2019-11-27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먼지나는 구석에 쳐박혀 있는데 어쩔~ㅋㅋ

레삭매냐 2019-11-28 08:56   좋아요 1 | URL
저도 20개월을 묵혀서 읽었는데...
다 읽고 나서 왜 진작에 마저 읽지 않았나
후회하게 되더라구요.

정말 대단한 책이었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11-28 13:35   좋아요 1 | URL
아 그럼 저도 얼릉 ㅎㅎ
 
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
리안 모리아티 지음, 김소정 옮김 / 마시멜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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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많이 들어본 작가인 리안 모리아티의 <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을 읽었다. 난 처음에 리안 모리아티가 남자인 줄 알았다. 책의 표지를 펼치고 나서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다.

 

소설은 잘나가는 회사 중역 마샤가 임사 체험을 하게 되는 극적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등장한 구급대원 야오. 마샤의 심장이 멎었다.

 

그리고 십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오스트레일리아 자리봉이라는 곳에 자리 잡은 건강휴양지 평온의 집에 아홉 명의 완벽한타인들이 모이면서 이야기의 수레바퀴는 다시 돌아간다. 한물간 로맨스 소설가 프랜시스 웰티는 아직 발표하지도 않은 자신의 새로운 소설에 대한 혹평을 보고 그만 충격을 먹는다. 아직도 로맨스 소설이 소비되는구나 하는 순간도 잠깐, 각각의 사연을 가진 나머지 8명의 사람들이 평온의 집에 모여들기 시작한다.

 

다음 주자들은 제시카와 벤 부부다. 이 젊은 부부들은 남자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무려 람보르기니를 타고 나타났다. 남걱정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프랜시스는 그들이 마약거래상이라는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런데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챈들러 부부의 집에 도둑이 들었고 그것을 위로하기 위해 제시카의 어머니가 보낸 복권에 당첨되면서 그들은 그야말로 벼락부자가 되었다. 문제는 그 어마어마한 행운이 평범한 삶을 살던 제시카와 벤에게 그들이 원하지 않는 그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이다. 그들이 평온의 집을 찾은 이유는 부부상담이다.

 

어떤 이들은 살을 빼기 위해(중년의 다이어트는 왠지 필수라는 압박감을 소설은 전달한다), 삶의 위기에 처한 이들은 치유를 위해, 인터넷 연애사기를 당한 소설가는 그저 안식이 필요해서, 한 때 오지 리그 풋볼선수로 뛰던 왕년의 스포츠 스타는 무언가 삶의 전환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다양한 이유로 건강휴양지를 찾는다.

 

문제는 평온의 집이 일반적인 유형의 건강휴양지가 아니라는 점이다. 게다가 놀라지 마시라. 소설 초반 심장이 멎어 죽은 것으로 보인 마샤가 무려 원장이다. 컨트롤 프릭(control freak)으로 볼 수 있는 마샤는 자신을 우상처럼 숭배하는 젊은이 야오와 한때 자신의 비서였던 딜라일라를 고용해서 새로운 방식 치유를 시도한다.

 

물론 초반에 비싼 비용을 들여 건강휴양지를 찾은 이들은 지나친 통제에 불만을 표한다. 휴대전화 같은 전자기기는 물론이고 일체의 건강에 해로운 알코올과 간식들은 사전에 차단된다. 그리고 명상과 요가, 마사지 같이 딱 들어도 건강에 좋겠구나 싶은 그런 프로그램들이 제시된다. 압권은 4일 간의 침묵과 매일 이루어지는 혈액검사였다. 아니 낯선 이들과 대화하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일체의 대화를 중단하라니, 이게 무슨 해괴한 상황인가. 하지만 9명의 타인들은 강력한 리더십을 자랑하는 마샤의 강권과 하루가 다르게 효과를 보이기 시작하는 프로그램 때문에 어느 정도 효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본격적인 프로그램을 수행하면서부터 발생하기 시작한다. , 독재자 같은 마샤의 수중에 놓인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모든 이들은 제각각 다른 문제들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시도한다. 누구는 친구들과 수다라는 방식의 상담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결하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구는 알코올에 의존하기도 한다. 특히 흥미로운 가족 문제를 제시하는 마르코니 부부를 살펴 보자.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들의 내면에는 3년 전 죽은 아들 잭에 대한 슬픔과 고통 그리고 연민이 자리 잡고 있다. 마샤가 고안해낸 해괴하기 짝인 없는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은 그동안 꽁꽁 숨겨온 내면의 고통을 상대방에게 드러내고, 스스럼없이 완벽한 타인들과 그것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마샤의 준비한 프로그램이 일방적으로 나쁘다는 비판이 옳은 것일까.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도 작가는 강조한다. 영원한 것은 없더라. 고통도 행복도 즐거움도, 그 어떤 감정도 영원한 건 없겠지.

 

소설 <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은 서로 모르는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를 알아 가고 또 부지불식간에 닥친 위험을 돌파해 가면서, 자신들의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극복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에 방점을 찍는다. 각각의 등장인물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빠른 구성은 도대체 이 이야기가 어떻게 결말이 나는가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그러니 초반에 지지부진했던 나의 독서도 어젯밤에 새벽까지 그야말로 내쳐 달렸다. 로맨스 한 스푼, 비극적인 스토리 한 큰 술, 싸이코패스급의 스릴러 한 컵 그리고 밀실트릭 한 움큼으로 적당히 버무린 <아홉 명의 완벽한 타인들>은 나에게 참 재미진 독서의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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