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플러 - 가장 진실한 허구, 퍼렇게 빛나는 문장들
존 밴빌 지음, 이수경 옮김 / 이터널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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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을 기다렸다, <닥터 코페르니쿠스>를 만나고 나서. 존 밴빌의 혁명 3부작중에 두 번째 작품에 해당하는 <케플러>가 드디어 출간됐다. 그리고 존 밴빌의 책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펀딩을 해서 지난 토요일에 받아서 어제 다 읽을 수 있었지만 일부러 완독을 하루 끌었다. 그만큼 재밌다는 말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받아 들여, 수천년 동안 점성술 혹은 미신에 가까웠던 천문학을 새로운 학문의 경지로 끌어 올린 문제적 인물이 바로 슈바벤 바일데어슈타트 출신의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였다.

 

존 밴빌은 새로운 세계관을 창시자였던 코페르니쿠스에서 출발해서 아이작 뉴턴에 이르는 근대 자연철학자 열전 가운데 중간다리 역할로 케플러를 골랐다. 전작에서도 보여준 것처럼 이것이 전기소설인지, 아니면 바로 옆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은 관찰예능인지 모를 정도의 몰입감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케플러의 아버지는 허풍장이 용병이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타고난 독설가였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는 박쥐 날개 같이 요즘으로 치면 마약에 가까운, 당시 기독교 사회에서는 대단히 위험한 물품을 취급하던 자연치료사, 당시 말로 하자면 마녀에 가까운 그런 인물이었다. 이런 연대기적 흐름 대신, 소설은 1600년 그러니까 새로운 세기에 프라하 근처의 베나테크성으로 가족들과 함께 덴마크 출신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학자 튀코 브라헤를 만나러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당대 유수의 지식인이었던 케플러의 성공은 역설적이게도 점성술에 힘입었다. 그 어느 때보다 혹독했던 겨울의 추위와 튀르크 군단의 침공을 예언하면서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쓴 <우주의 신비>보다 더 큰 관심을 모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케플러가 발견했다는 전체의 세 법칙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관심이 없는 분야다 보니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발견이었는지 가슴에 와 닿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그보다 루터 교도로서 자신이 믿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가톨릭 신앙이 대세였던 그라츠와 린츠 그리고 합스부르크 군주 밑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며 봉사해야 했던 인간 케플러의 고뇌에 더 관심이 갔다.

 

아내 바르바라 뮐러에게 케플러는 놀랍게도 세 번째 남편이었다.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수전노 같은 이미지의 장인과 바르바라에게 협공당하는 장면은 네이트판에 등장할 법한 스토리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우주의 신비를 밝히기 위해 전력투구하던 위대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 역시 우리네 같은 그런 일상과 싸워야 했단 말이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는 그런 풍경이 문득 살갑게 다가왔다.

 

생존과 알량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한 장인과 달리 케플러는 평생 종교적 신념을 지킨 인물이었다. 케플러가 루터 교도로서 정체성을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했다면 그의 신산한 삶에 한줄기 빛이 비추게 되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제국의 황제였던 루돌프 2세 앞에서도 눈치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떠들던 자가 바로 케플러가 아니었던가. 동행한 브라헤가 그렇게 눈치를 주는데도 외골수였던 케플러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다. 끝까지 십진법 체계이기 때문에 모든 수가 9로 나뉜다는 황제의 화두를 설명하는 장면은 케플러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존 밴빌식 해석이 아닐 수 없다.

 

훗날 화성 전쟁으로 알려진, 화성의 공전 궤도를 알아 내기 위해 무려 70번이나 되는 엄청난 계산을 마다하지 않고 7년이란 세월을 투자한 사나이가 바로 케플러였다. 어쩌면 그에게 밤하늘에 보이는 별들의 운행과 천체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만한 어떤 하나의 놀이가 아니었을까. 자신이 하고 싶은 그런 놀이를 하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지 않았을까 싶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요하네스 케플러라는 문제적 인물이 가진 다양성의 본질과 인간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저자의 서사에 놀랄 수밖에 없다. 물론 상당 부분을 후대에 쓰인 글들을 참조했겠지만, 그것을 뼈대로 해서 지근거리에서 자신이 직접 본 것을 글로 옮긴 것 같은 전언적 서술에 다시 한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의붓딸 레기나와의 관계에서 특히 그런 점이 느껴졌다.

 

자신을 발탁한 튀코 브라헤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장년의 변덕스러운 브라헤 특의 오만함과 허영심에 질린 케플러는 그의 존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 역시 천문학계에서 코페르니쿠스를 계승해서 나름 빼어난 커리어를 쌓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자신이 크리스티안 롱베르나 텡나겔 같은 브라헤의 조수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과음 때문에 발생한 방광염으로 사망한 브라헤가 남긴 천문관측 자료들은 결국 그의 유언에 따라 케플러가 상속받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던 케플러에게 브라헤가 남긴 자료들은 그야말로 노다지가 아니었을까. 그 자료들을 바탕으로 해서 루돌프력을 만드는 수고 역시 케플러의 몫이 되었다.

 

브라헤 사후, 케플러는 제국의 공식 수학자가 되었지만 군주들이 원하던 점성술사로서의 역할에는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자신을 지지해주던 루돌프 2세가 강제로 퇴위되고 경쟁자 마티아스 그리고 자신과 악연으로 얽힌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케플러의 운명 역시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30년전쟁>이라는 대전란 가운데, 가톨릭 신앙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페르디난트 2세의 치하에서 곡예에 가까운 줄타기를 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케플러의 모습은 경이로울 지경이다. 자신에게 한푼의 유산도 상속하지 않은 아내 바르바라는 끝내 케플러의 을 이해하지 못하고 죽었다. 의붓딸 레기나 역시 27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바르바라와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도 유년기를 못 넘기고 사망했다. 우주의 신비와 질서를 밝히기 위해 평생을 바친 케플러에게 삶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고통의 원천이기도 했다.

 

소설 후반에 아주 짧게 페르디난트 2세의 총사령관으로 전장에서 맹활약한 발렌슈타인과의 인연도 등장한다. 구두쇠 황제는 자신이 케플러에게 지급하기로 약속한 돈을 발렌슈타인에게 떠넘긴다. 케플러를 천문학자라기보다 자신의 개인 연금술사나 점성술사 정도로 받아들인 발렌슈타인은 케플러가 바라던 후원을 해주지 않았다. 전장에서 승승장구하던 발렌슈타인이 황제의 총애를 잃고 몰락해 버리면서, 케플러는 연구와 책의 인쇄를 위한 자금줄이 막혀 버렸다. 다시 한 번 황제에게 자금 출연을 호소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가 케플러는 16301115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사망했다.

 

르네상스 부흥으로 촉발된 인문주의와 자연철학의 세례, 새로운 세계관을 상징하는 종교개혁 그리고 인쇄술의 진보에 힘입어 요하네스 케플러는 새로운 천문학의 길을 닦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식들과 부인을 차례로 잃었고, 어머니 카타리나는 마녀 재판에 회부되어 송사로 수년간 시달려야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케플러는 신이 창조한 우주의 질서와 신비를 밝히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케플러의 인생 후반기는 역병과 기근이 끊이지 않던 30년 전쟁이라는 대전란의 시기였다는 점이다. 다사다난한 개인사, 종교적 핍박과 역경의 시절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케플러의 3법칙과 훗날 뉴턴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행성 간의 중력에 대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는 사실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단순하게 근대 천문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던 케플러가 품고 있던 다채로운 삶의 스펙트럼을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무대에 올려 독자에게 소개한 저자 존 밴빌의 의도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혁명 3부작의 마지막 주자인 아이작 뉴턴이 등장하는 <뉴턴 레터>의 출간도 기대해 본다.

 

[뱀다리] 인별그램에서 케플러에 대한 피드가 있나 해서 검색해 보니, 죄다 걸그룹 케플러에 대한 피드만 보여서 좀 실망했다. 21세기에는 천체와 행성 전문가 케플러보다 아티스트 케플러의 유명세가 더 강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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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3-12-19 0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앗 언제 다 읽으시고 이렇게 정성들여 쓰셨나요^^ 대단하세요! 저도 받아서 표지만 구경한 상태입니다^^ 혁명 3부작의 마지막 작품도 기다려지네요!

레삭매냐 2023-12-19 08:24   좋아요 1 | URL
너무 재밌어서 손에 잡는 순간,
놓을 수가 없더라구요.
고고씽!~입니다.

언능 <뉴턴 레터>가 나왔으면
합니다.

존 밴빌은 책도 많이 썼는데 다른
작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
소개된 책이 많이 없더라구요.

독서괭 2023-12-19 0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재밌어 보이네요! 1부 코페르니쿠스도 몰랐는데 혁명3부작, 찜해갑니다~~

레삭매냐 2023-12-19 08:25   좋아요 1 | URL
아숩게도 <닥터 코페르니쿠스>는
절판돼서 이제는 구할 수가 없더라
구요. 중고서점에도 없구...
도서관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케플러> 너무 재밌었습니다.

blanca 2024-01-09 15: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나온지도 몰랐네요. 존 밴빌 <바다>는 지금도 그 강렬한 감동을 잊을 수가 없는데 케플러도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별들의 흑역사 - 부지런하고 멍청한 장군들이 저지른 실패의 전쟁사
권성욱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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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가면 미처 출간된 지도 몰랐던 책들과 만나는 그런 즐거움이 있다. 이번 주말에도 <별들의 흑역사>라는 책을 만났다. 그리고 보니 얼마 전에 만났던 패전사와 비슷한 궤적의 책이 아닌가 싶더라. 실패한 전쟁에서 배우는 교훈이라고나 할까.

 

똥별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이 하나 있지 않은가? 그렇다 비밀 독립군이라는 말로 온갖 조롱을 받으며 기세 좋게 출발한 임팔 작전을 망친 영웅무다구치 렌야다. 태평양 전쟁 당시 남양군도과 여러 곳에서 프로 삽질러의 전형을 보여 준 숱한 일본군 똥별 장군들이 수두룩하지만 그 중에서도 무다구치의 활약상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3개 사단 자그마치 10만 여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인도의 임팔을 공략하고, 중국을 지원하는 연합군의 숨통을 끊어 놓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로 시작된 작전은 처음부터 성공할 수가 없는 그런 작전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보급이었고, 그 다음은 아라칸 산맥과 이라와디-살윈 강 같은 엄청난 규머의 강 같은 지형이었다. 연합군에 비해 치중 부대에서 차량이 아닌 우마가 차지하는 비중이 압도적이었던 일본군에, 무다구치는 물소의 등에 짐을 지워서 보급품을 실어 나르고 여차하면 그 물소를 잡아먹겠다는 얼토당토않은 구상을 했다. 하지만 물소가 기존의 소나 말처럼 부리는 사람들의 말을 들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게다가 험준한 지형에서 통제를 따르지 않다가 절벽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다고 한다.

 

무다구치는 1944년 전인 2년 전에 이미 비슷한 작전을 구상했다가 보급이 여의치 않을 거라는 점을 들어 작전 계획을 취소한 전력이 있었다. 하지만, 2년 뒤에는 무슨 심정의 변화가 생겼는지 임팔 작전 강행에 나서게 된다. 2년 전에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보급이 쉽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던 무다구치는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현지의 풀을 먹을 것을 주문했다고 하던가. 그들이 그렇게 환호작약하던 황군정신만으로는 영국군의 중화기와 강력한 전차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초전에 31사단이 코히마 점령하면서 기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영국군의 매서운 반격과 결국 18군의 발목을 잡게 된 보급 부족으로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현지 사단장들의 판단으로 후퇴에 나서게 된다. 특히 31사단장 사토 고토쿠는 독단으로 철수명령을 내려 병사들을 후방으로 소개시켰다. 일본군 창설 이래, 첫 번째 항명 사건 1호로 기록된다. 극우작가 야마오카 소하치의 전선 기록에서는 무다구치와 사토와의 악연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 책에서는 둘이 구원으로 티격태격했다고 한다.

 

어쨌든 제대로 된 전략과 현지 지형에 대한 이해 그리고 충분한 보급 없이 무턱대고 전선에 뛰어 들었다가 대패한 일본 육군 최악의 무모한 시도가 바로 임팔 작전이었다. 그리고 그 연출에 있어 무다구치는 조금도 손색이 없는 물건이었다. 물론 그 위의 상관들인 버마 방면군 사령관 가와베 마사카즈와 남방총군 대장 데라우치 히사이치도 조연으로 이른바 백골가도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임팔 작전에 앞서 시행된 하호 작전에서 하나야 다다시라는 똥별이 보여준 시대착오적 전투도 주목할 만하다. 세상에 전투를 적의 보급품을 뺏어서 하는 거라는 구시대적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만주사변에서 이시하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지로의 대활약에 가려져서 그렇지, 엘리트 육군 출신으로 특무기관 소속이었던 하나야 다다시도 한몫 단단히 했었다고.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육군대학 출신 엘리트였던 하나야 다다시는 오만에 쩔어, 자신보다 못한 경력의 인사들이라면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무시했다. 상관도 안중에 없던 모양이다. 이런 일본군의 하극상이야말로 고질적 병폐였다. 심지어 군부에 비판적인 언론사에 쳐들어가 기자와 사원들을 폭행하는 패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사단장이라는 고위직 지휘관이었던 하나야 다다시는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하급자들을 폭행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싸이코패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온갖 구타와 폭언 그리고 무분별한 공격 강요로 애꿎은 병사들을 희생시켰다. 심지어 작전이나 전투에 실패한 휘하 지휘관들에게 할복을 강요해서 할복 사단장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일본군 3대 오물에 비교해 볼 때, 하나야 다다시는 역량과 액션에서 조금도 떨어지는 선수가 아니었다.

 

이번에는 눈길을 북아프리카로 돌려 보자. 어라, 그리고 보니 <패전사>에도 나오는 인물과도 겹치네. 마셜 원수에게 픽업되어 북아프리카에서 전차전의 귀신 롬멜과 상대하게 된 로이드 프레덴들의 이야기다.

 

히틀러가 유럽 대륙에서 전쟁을 일으켰을 당시만 하더라도, 전쟁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던 미국은 서둘러서 전시 징병제를 실시해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많은 병사들이 모집되어 훈련이 필요했다. 로이드 프레렌들은 바로 이런 역할에 적합한 인사였다. 하지만 총알과 포탄이 날아드는 전장은 조건이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상대는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폰 아르님과 사막의 여우 롬멜이 아니었던가.

 

적정 시찰에 적극적이었던 롬멜과 달리 프레덴들은 안락한 후방에서 모호한 지시들을 내리기 일쑤였다. 그러니 이제 막 전선에 투입된 경험이 일천한 미군 병사들이 역전의 롬멜 아프리카 군단병들을 상대할 수가 있었을까. 2차 세계대전 당시, 마셜 장군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연합군 간의 조정과 인사권 행사라는 점에서 훌륭하게 임무를 해냈지만, 적어도 북아프리카 전선에 프레덴들을 투입한 것은 그의 치명적 실수 중의 하나였다. 시디부지드와 카세린 협곡에서 뼈아픈 일격을 당한 미군은 패전을 연구하고 분석하여, 곧바로 엘 궤타르 전투에서 독일군을 패퇴시킨다. 물론 조지 패튼이라는 맹장을 투입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이 책에서 내가 얻은 최고의 수확은 장제스와 스틸웰 간의 심각한 갈등을 다룬 부분이었다. 정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시기의 만남은 중국 전선에서 대원수 장제스와 미국인 군사고문 조 비니거스틸웰의 그것이었다. 일본의 거센 공격에 밀린 중국은 미국의 군사물자 원조와 장비 그리고 미군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하지만 인종주의자이자 장제스를 경멸했던 스틸웰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스틸웰은 장제스가 신편해서 애지중지 기른 정예 병력들을 전략 예비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의 목표였던 버마 탈환에 집중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해전에서 미군에게 잇달아 패배하고, 제해권을 상실하면서 동남아의 전쟁 물자를 본국으로 후송하지 못하게 되자 이번에는 육로로 수송하겠다는 고육책을 내기에 이른다. 광대한 중국 대륙에 발이 묶인 일본군은 각처에서 저항을 이어가는 중국군을 격파하고, 인도차이나에서 중원을 가로 지르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육로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해 50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해서 대륙타통작전 이른바 이치고 작전을 시행했다.

 

중일전쟁을 통털어 최대의 병력을 동원한 이치고 작전으로 일본군은 기세를 잡고 끈질긴 저항을 계속하던 정저우, 쉬창 그리고 창더를 함락시켰다. 다만, 헝양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면서 간신히 한 숨 돌릴 수가 있었다. 화베이에서 팔로군을 상대하던 일본군들이 중국 중앙군을 상대하기 위해 이동해 버리는 바람에, 팔로군이 급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종전 후, 곧바로 벌어지게 되는 국공내전에서 결국 장제스군이 패하게 되는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바로 이런 위기를 대비해서 장제스가 길러둔 소중한 전략 예비대를 아무런 의미도 없는 버마 전선에 갈아 넣어 버린 것이 바로 스틸웰이었다. 오래 전, 타임라이프에서 나온 월드워2에 실린 버마 철수작전을 찍은 사진들도 결국 스틸웰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한 여론전이었단 말이지. 비록 일본군에게 난타당하긴 했지만, 미국의 동맹국의 수장이었던 장제스에 대한 예우를 갖춰야 하는 참모 격의 스틸웰이 중국의 최고 지도자를 무시하고 제 멋대로 중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려고 한 점은 분명 잘못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버마 전선에서 스틸웰이 선전한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장제스가 자신의 전략이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한 스틸웰은 장제스를 암살할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국부천도로 비록 대륙을 잃긴 했지만, 중일전쟁 당시 정예 관동군을 비롯한 일본의 대군을 중국 대륙을 묶어두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장제스의 신원을 위해서도 저자는 상당한 부분을 할애했다. 중국전선을 망쳐 먹은 희대의 빌런 스틸웰이 서구 언론에 선전한 대로 과연 장제스는 대륙을 상실할 정도로 무능력한 인사였을까? 아마 장제스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없었다면, 중국의 항일전은 실패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1차 국공합작을 결렬시킨 19274월의 상하이 쿠데타와 국부천도로 이어지는 국공내전 패전의 최고 책임자 역시 장제스였다. 공산군이 그랬던 것처럼, 장제스 역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본격적인 항일전에 나서기 전에 마오쩌둥의 홍군을 격멸해야 했다. 역사에서 이런 했다면이 무슨 소용이겠냐만.

 

한 수 잘 배우고 간다.

 

[뱀다리] 오탈자 감수에 좀 신경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콜트 권총을 콜드로, 일본군을 본군 같은 건 좀 아니지 않은가. 아주 간단한 건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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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2-13 0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보고 무다구치 렌야? 를 떠올렸습니다 ㅋ 영원히 조롱받는 사람... 중일전쟁에 저런 배경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ㅋ

레삭매냐 2023-12-13 10:03   좋아요 1 | URL
제목을 아예 똥별들의 흑역사라
고 지었으면 대박이 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나야 다다시 장례식장에는
부하들이 아예 나타나지 않았지만...

무다구치 장례식장에는 부하들이
등장했다고 하더라구요. 빈소를
때려 부수러요.

오랫동안 서구 중심의 역사서술
을 들어 왔는데, 전쟁의 이면을
볼 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즐라탄이즐라탄탄 2023-12-13 0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잘 몰랐던 역사에 대해 조금이나마 배우고 갑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레삭매냐 2023-12-13 10:03   좋아요 1 | URL
나름 그쪽 분야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책은 재밌었습니다.

얄라알라 2023-12-23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똥별^^ 영화 보고 난지 두주 지났지만 아직도 귀에 생생 똥별

요책 연결해 읽으면 딱이겠어요

레삭매냐 2023-12-23 23:00   좋아요 0 | URL
2023년 연말을 관통하는 영화가 바로
<서울의 봄>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런 똥별들을 치우자고
쿠데타를 도모한 인간들이야말로 똥
별이 아니었을까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요즘은 인스타에서 짤을 보면, 대개가 너튜브 컨텐츠다. 인스타로 유입되어 본 프로를 찾아 나서는 거지. 오늘 본 영상은 미스터 비스트(그렇다 전 세계 최고의 너튜버라고 한다, 구독자수가 무려 2억명)의 마트에서 살아남기 컨텐츠를 시청했다.

 

꼴랑 하나의 영상을 봤지만, 대충 그의 컨텐츠들이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그동안의 행적이 궁금해서 검색해 보니 너튜브는 14살 때부터 시작했고,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고 아프리카 오지에 우물도 파주는 그야말로 대단한 사업을 하고 있더라. 그의 나이가 올해 25세라는 건 안 비밀이다.

 

마트에서 살아남기는 매일 매일 마트에서 버티면 하루에 10,000달러 씩 현금으로 주는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알렉스라는 남성이 선발됐다. 그의 백그라운드로는 아내와 아이 둘이 있다는 것 정도다. 무슨 일을 하는지 그런 개인 인포는 아예 배제되어 있는 상태로 프로젝트 고고씽.

 

첫날을 무사하게 버티고 나자, 미스터 비스트에 쇼핑 카트에 1달러짜리 만 장을 싣고 등장한다. 비스트는 알렉스에게 만 달러가 맞는지 세어 보라는 플렉스를 했던가. 마트에는 생활에 필요한 오만 물건들이 가득하고, 알렉스가 생활하기에는 아무런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그리고 보니 전화나 인터넷 같은 필요가 구비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비스트는 조건을 하나 제시한다. 마트에 진열된 제품 중에서 매일 만달러씩 체킹을 해서 마트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거다. 그러면 비스트는 그렇게 선별된 제품들을 모두 기부한다고 한다. 처음에 제낀 건 바로 전자제품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멍멍이 사료 같이 현재의 알렉스에게는 전혀 필요 없는 물건들이다.

 

프런티어 정신이 빛나는 미쿡인 답게 우리의 알렉스는 직접 비닐 등을 이용해서 샤워장을 만드는 기지도 보여준다. 그렇지, 바로 씻는게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였지. , 그전에 알렉스가 자신과 아이들에게 필요한 금액으로 대충 책정한 게 50만 달러 정도였던가. 패기 넘치는 알렉스는 챌린지 초반에 100일도 너끈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마트 뒤편에 있던 지게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알렉스는 챌린지를 좀 더 용이하게 해내기 시작한다. 마트에서 탈 수 있는 카트 차 같은 것도 찾아내서 마트를 질주하기도 한다. , 우리의 비스트 씨는 계속해서 컨텐츠를 제작해야 하기 때문에 매일 같이 알렉스를 찾아 오지는 못하고 무인도에도 가고 또 아프리카에 우물을 파러 가기도 한다.

 

데이 30일 정도에 가족과 함께 만나는 상봉도 추진한다. 그런데, 이게 과연 알렉스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알렉스의 챌린지를 방해하기 위한 음모(?)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더라. 암튼 결의를 다시 다진 알렉스는 계속해서 하루 만달러씩 벌어 나간다.

 

비스트는 사실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컨텐츠 내 캉가쿨러 같은 PPL도 하고, 또 세이프웨이 슈퍼마켓(?)의 후원도 받았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아마 이 프로젝트를 통해 벌어 들이는 돈이 우리의 알렉스에게 주는 돈보다 더 많지 않을까. 게다가 현대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소비의 공간 마트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관찰 예능이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의 비스트가 마냥 그렇게 알렉스에게 호의를 베풀 수는 없었다. 순조롭게 이어지던 마트 생존 챌린지에 위기가 닥친다. 그건 바로 비스트의 셋업이라고 해야 할까. 마트 부지만 샀지, 전기세 내는 일을 까먹어 버렸다는 것이다. 마트에 전기가 나가자 바로 알렉스는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전까지만 해도 6만 달러 어치 팔 물건들을 정해 두었지만, 마트 내 단전으로 냉장고들이 작동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냉동식품들부터 팔아야 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비스트의 스탭들이 도움을 줘서 그것도 해결했다.

 

햇볕이 들지 않는 마트에서 생존 챌린지는 오래 가지 못할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마트 뒤편을 공간에서 문을 열고 광합성을 하는 알렉스. 참 수영장을 만들었다가 사단이 나는 건 그전의 일이었던가. 그냥 눈요기로 컨텐츠를 시청하다 보니, 발생 사건들의 순서가 어땠는지 모르겠다. 암튼 마트에 만들었던 간이 수영장을 알렉스가 지게차로 터뜨려 버리는 대형사고 덕분에 한 차례 위기가 닥쳤다.

 

마트에 둘러쳐진 레드 라인을 넘어서면 바로 프로젝트는 종료되기 때문에 후문에서 광합성을 하면서 많은 생각에 빠지기도 한 알렉스. 결국 다수의 강력한 랜턴 세트를 발견하면서 다시 위기탈출에 성공한다. 마트 생존 챌린지의 기본은 역시 위기와 그에 대응하는 인간의 도전이라는 기본적인 컨셉에서 벗어나지 않는구나 싶었다.

 

챌린지 막판에 비스트 씨는 다시 알렉스의 아내를 투입하는데, 그건 결국 알렉스의 챌린지 의지를 꺾기 위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아이의 생일이 다가온다고 하는데, 이미 목표했던 금액 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돈을 벌었고 더 이상 홀로 지내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알렉스는 45일차에 포기 선언을 하고 돈을 챙겨 사랑하는 아내와 마트를 떠난다.

 

개인적으로 알렉스가 마트에서 지내는 동안 외부인과 대면하지 못하고 단전 때문에 폭력성이 살짝 비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점들이 극단적으로 부각되었다면 이런 유쾌한(?) 챌린지의 지속이 어렵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그저 보통의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런 간단한 진리를 보여 주는 프로젝트인가 싶기도 하고.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구상할 수 있는 기획력과 인원, 자금 그리고 후원 마지막으로 어마어마한 구독자수를 가진 메가 너튜버의 파워에 그저 놀랄 뿐이었다. 다음에는 아프리카 우물 파기 프로젝트를 볼까나.


[뱀다리]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한국어 더빙까지 서비스한다는 점이다. 역시 자금력이 대단하다 싶었다. 그런데 몇 가지 언어로 더빙을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참 그리고 알렉스는 비스트 씨에게 받은 상금에 대한 세금을 내야 하나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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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2-08 23: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내용 인터넷 블로그에서 봤어요. 45일이나 있었다니 놀라웠어요.
전에도 특이한 기획을 많이 하는 것 같았는데, 유튜브에서 가장 구독자 많은 사람이라서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레삭매냐님, 주말 잘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3-12-10 16:13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너튜브보다 보니 너무 극단으로
몰고 가지는 않고 선을 지키는
게 보이더라구요.

특이한 기획이 또 뭐가 있을지
궁금하네요. 네,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3-12-10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징어게임 컨텐츠 만들었다는 그 유투버인가봐요.
저는 아직 본 적은 없는데 25살에 몸이 열개인 양 바삐 창의적으로 활동하네요

아이디어가 참신하네요.
마트가 얼마나 크면 그 안에서 생활이 다 가능한지^^

레삭매냐 2023-12-10 16:14   좋아요 1 | URL
역시 글로벌 원탑 너튜버답게
한 개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그 와중에 두 서너개는 기본이지
싶습니다.

기획과 자본의 힘, 무시무시하더군요.

미국의 마트는 우리의 그것과는 스케
일이 다르지요. 땅덩이가 넓으니 2층
3층 올리지 않고 단층으로 쇼부칩니다.
 


 

고대하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나폴레옹>을 무려 개봉일에 관람했다. 오래전, 시사회족 생활하던 시절이 생각났다. 그 시절에는 개봉날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아예 개봉도 하기 전에 시사회로 만나곤 했었더랬지.

 

이미 <나폴레옹>은 본 사람들의 평가에 따르면 호오가 갈린다고 했으나 역사덕후라고 할 수 있는 나로서는 호였다. 물론, 몇몇 아쉬운 점들이 있긴 하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대변하는 그리고 알렉산더와 시저에 버금가는 영웅을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그 정도는 봐줄 수 있지 않을까.

 

1789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프랑스에서 대혁명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왕권신수설에 의해 국왕이 전권을 행사하던 국가 프랑스의 사회 시스템을 통째로 뒤엎어 버린 그런 인류사적 사건이었다. 국왕 루이 16세는 이미 9개월 전에 처형이 되었고, 17931016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가재산 탕진과 반역죄 등 세 가지 죄목으로 기소되어 기요틴으로 처형되었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기요틴은 프랑스혁명의 폭력성을 상징하는 하나의 장치가 아니었을까.

 

그 다음에는 공화국이 들어서고,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실시되었다. 왕당파 일당은 국가의 적으로 규정되어 숱한 처형이 기요틴에서 이루어졌다. 훗날 나폴레옹의 유일한 사랑이 되는 조세핀 드 보아르네의 전 남편 역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예나 지금이나 난세는 영웅을 위한 무대였다. 프랑스혁명에 질겁한 유럽 각국의 왕가들은 대불동맹을 결성해서 프랑스 혁명정부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프랑스 해군기지가 있던 툴롱항을 왕당파와 결탁한 영국군과 스페인이군이 점령했다. 이때 24세의 나이로 포병 대위였던 나폴레옹에게 국민의회 실력자였던 폴 바라스는 툴롱항 탈환을 명령한다. 나폴레옹과 그의 뤼시앵은 간신히 규합한 오합지졸의 프랑스 부대를 이끌고 강력한 요새에 주둔한 영국군을 기습해서 툴롱항 주변에 집결해 있던 영국 함대까지 격멸하는데 성공한다. 당시 나폴레옹과 뤼시앵을 파리의 인사들은 코르시카 깡패(thugs)”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툴롱 전투를 승리로 이끈 나폴레옹은 단박에 공화국을 수호하는 군사 영웅이 되었다. 이 때 맺어진 조세핀과의 사랑과 우정은 나폴레옹의 평생 동안 지속된 애증의 관계의 시작이었다. 전쟁물을 기대한 관객들에게 어쩌면 영화 <나폴레옹>은 로맨스물로 비쳐질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영화에서 조세핀 역을 맡은 바네사 커비의 연기는 대단했다.

 

1795105, 파리에서 2만에 달하는 왕당파들의 반란이 일어나자 폴 바라스로부터 전권을 부여 받은 나폴레옹이 무자비한 진압에 나서 간단하게 그들을 진압해 버렸다. 그 다음은 청년기 나폴레옹의 일대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탈리아 원정이었는데 영화에서는 아쉽게 아예 빠져 버렸다.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생각한 한겨울에 알프스를 넘는 기동으로 결국 부르봉 왕가 이래 유럽에서 숙적이었던 오스트리아를 제압하는데 성공했다.

 

영화에서는 비교적 짧게 다루어졌지만, 나폴레옹은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 나선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이집트 호족부대원들 앞에서 자신의 장기인 대포로 피라미드 꼭대기를 포격해서 무너뜨리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영화에 필요했던 볼거리는 거의 완벽했다. 하지만, 자신의 부관이 파리에 남아 있던 조세핀이 정부 이폴리트 샤를과 애정행각을 벌인다는 뉴스에 전선을 이탈해서 파리로 돌아와 한바탕 18세기판 사랑과 전쟁을 찍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역사에 근거한 서사를 추구하다 보면 리뷰가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질 판이다. 권력욕에 불타는 남자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의 통령의 자리에 오르고 그 다음에는 결국 황제가 되었다. 공화국의 구세주로 칭송받던 영웅이 독재자로 변신해서 왕의 권위를 능가하는 황제가 돼 버린 역사적 아이러니라니.

 

격변하던 시대를 장식하던 특징적 인물이었던 조제프 푸셰의 활약(?)을 볼 수가 없어 역시 아쉬웠다. 잠시 등장하고 사라져 버렸던가. 탈레랑을 내세워, 숙적 영국을 포위하겠다는 대전략은 러시아의 애송이 짜르 알렉산드르와의 악연으로 결국 실패해 버렸다. 훗날 러시아 원정으로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 그런 인물이 바로 이 청년 짜르였다.

 

역시 영화의 압권은 누가 뭐래도 나폴레옹의 빛나는 승리였던 아우스터리츠 전투였다. 당시 유럽 대륙 최강의 대국이었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체코 모라바 근처의 아우스터리츠 근처에서 나폴레옹의 빛나는 전략전술로 대파해 버렸다. 영화에서는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로 유인된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나폴레옹이 숨겨 두었던 대포 포격으로 수장되는 시퀀스에서는 대가 리들리 스콧의 연출이 빛났다. 후방을 향해 빙판에서 전력질주하던 오스트리아군 기수가 프랑스군의 대포에 맞아 깃발, 기수 그리고 군마가 그대로 수장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런 나폴레옹의 영광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의 애정전선 역시 조세핀이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하면서 제국의 위기로까지 비화됐다. 아이를 갖기 위한 각종 비방이 동원되고, 이럴 바에는 차라리 빨리 이혼해 달라는 조세핀의 요구가 이어졌다. 영화는 화려하고 장엄한 전투씬만큼이나 인간 나폴레옹과 그의 연인 조세핀이 이런 갈등에도 상당한 러닝타임을 할애한다. 아마 그런 점이 호만큼이나 오가 득세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결국 자신의 생산 능력을 확인한 나폴레옹이 법원 서기(?) 앞에서 황후 조세핀과 공식 이혼을 선언한다. 이 장면도 역시나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런 장면이었다. 조세핀과 15년에 걸친 결혼생활을 청산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의 장녀 마리 루이즈와 결혼해서 마침내 그토록 바라던 후계자를 얻었다. 소중한 아들을 안고 옛 부인이자 애인인 조세핀을 찾아가는 나폴레옹.

 

자신을 배신한 애송이 짜르 알렉산드르의 볼기짝을 쳐주기 위해 무려 60만 대군을 동원해서 모스크바 원정에 나선 보로디노 회전에서 많은 사상자(28,000)를 내긴 했지만 승리하고 마침내 모스크바까지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애송이 짜르의 수도 모스크바까지 홀랑 태워 버리는 비이성적 청야전술로 대군의 보급이 끊기고 러시아의 무시무시한 동장군의 공격까지 겹치면서 결국 4만 명만 귀환하는 참혹한 패배를 맞이한다. 기아와 추위에 허덕이는 프랑스 병사들 사이에서 아우스터리츠의 용사들을 외치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개인적으로 러시아 침공 초기, 러시아 게릴라부대원들이 프랑스 정예병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프랑스 침공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위해 잔악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장면에서는 충격을 받기도 했다. 황제 퇴위, 엘바섬 유배, 탈출, 조세핀의 죽음, 95일간의 천하 그리고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워털루 전투가 이어진다.

 

자신의 운명을 가른 마지막 전투였던 워털루 회전에서 영국의 웰링턴 공작과는 초반에 비교적 대등한 전투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프랑스 기병대가 영국군의 방진대형을 뚫지 못하고 병력이 계속해서 소모되고, 12만 프로이센을 이끈 블뤼허 원수가 등장하면서 전세가 기울자 꼴사납게 나폴레옹은 자신의 상징처럼 되버린 바이콘(이각모자)에 총구멍이 난 채 도주해 버렸다.

 

나폴레옹 역을 맡은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역시나 출중했다. 사십대 배우가 이십대 청년 연기를 한 게 좀 걸리긴 하지만 그 정도야 뭐. 호아킨과 극중에서 합을 맞춘 바네사 커비의 연기도 좋았다. 영화에서는 나폴레옹 평생의 연인이라는 점에 치중했지만, 역사에서 조세핀은 나폴레옹이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는데 있어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다고 한다. 황후의 자리에 오른 뒤에는 마리 앙투아네트 버금가는 사치의 극한을 보여 주기도 했다. 나폴레옹을 몰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애송이 짜르가 나폴레옹의 옛 애인을 찾아가 마리오네트와 춤을 추듯 댄스홀을 누비는 장면도 씁쓸하게 다가왔다.

 

유럽대륙을 제패하고 호령한 영웅 나폴레옹의 이면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엄마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보니 그 다음에는 조세핀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외적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내면적으로는 마마보이 같은 인물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허풍일지는 몰라도 알렉산드르와 대면하면서 평화 타령을 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협상이 진행되지 않으면 결국 무력을 동원하는 전쟁광이기도 했다. 아무래도 영화가 스케일 큰 전쟁 시퀀스와 조세핀과의 로맨스에 집중하다 보니 나폴레옹 법전이나 내치 같은 역사적 부분들을 거의 다루지 않은 면도 있다.

 

영화의 엔딩 시퀀스에서 나폴레옹 전쟁으로 자그마치 3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한 사람의 야망을 위해 이렇게 많은 인원의 희생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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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12-07 0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폴레옹 영화, 개봉했군요.
전혀 몰랐던 사실입니다.
가족들과 보러 가야겠어요.
호아킨 피닉스라~~
나폴레옹과 매치가 잘 되지 않는데 영화 보고 나서 판단해야 할 듯요^^
300만명의 죽음!
뭐라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ㅠㅠ

레삭매냐 2023-12-07 14:31   좋아요 1 | URL
넵, 어제 막 개봉한 따끈따끈한
영화랍니다.

호아킨 피닉스, 연기는 쵝오였습니다.
바이콘 쓰고, 전장에서 돌격하는 장면
이 멋지더군요.

나폴레옹 전쟁으로 너무 많은 인원
이 사망했는데, 정작 자신은 평화타령
을 하고 있다는 점이 역설적이었습니
다.

얄라알라 2023-12-10 15: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샥매냐님께서는 평소 역사공부 역사소설을 깊게 하시니 같은 영화를 보셔도 찾아내시는 것도 다르시네요
저는 만약 보러 간다면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가 궁금한 딱 그 수준의 물음표를 가지고 극장 갈텐데^^;;

나폴레옹의 평화타령이라!
어제 밤에 보고 온 [서울의 봄]에서 ˝추워추워˝를 연발하며 귀막이를 챙기는 국방장관 캐릭터가 생각나네요.

레삭매냐 2023-12-10 16:12   좋아요 1 | URL
12-12 사건의 가장 큰 책임자 중의
하나가 바로 그 추워추워 국방장관
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런 명분도
없는 반란군들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지만, 자신의 안위
타령만 하다가 결국 비극이 시작되
었지요.

<나폴레옹>에 제가 아쉬운 점은
너무 방대한 이야기라, 여러 포인트
들을 생략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습
니다. 알프스 원정이 제일로 아쉽습
니다. 영화에 담았다면 정말 스케일
이 대단했을 텐데 말이죠.

얄라알라 2023-12-10 16:27   좋아요 1 | URL
영화보고 새벽에 관련 영상 뒤져보니 참으로 그 ˝쫌˝스러운 귀막이
실제 청문회 모습에서도 영화와 다를 바 없이 비열하고 입만 살았더군요....분노수치 급상승해서 숨돌리느라 밤중에 야식이 필요했습니다
 


 

스트레이트에서 다룬 까까오 제국에 대한 콘텐츠를 봤다. 국민 메신저라 불리는 깨톡으로 천하통일을 이룬 까까오가 문어발식 확장을 해온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사실 주식의 세계로 입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까까오가 얼마나 대단한 기업인 지 미처 몰랐다.

 

2020년 까까오게임즈를 필두로 해서 까뱅 그리고 까페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숨가쁘게 공모 흥행과 상장을 해오면서 한 때 시총 기준으로 국내 3위의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고 한다. 동시에 골목 상권 침해 논란이 불거지면서, 상장 일정이 주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나치게 높게 잡힌 공모가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까페이의 스톡 옵션(44만주)8명의 까까오 임원들이 주식 시장에서 실행하면서 자그마치 877억원을 챙겼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연속 상장의 어두운 그림자가 끼기 시작했다.

 

까페이에 이어 상장 계획 중이었던 까까오 모빌리티의 상장에 당장 제동이 걸렸다. 2021년과 2022년 잇달아 상장을 추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누구나 사용하는 깨톡 메신저를 기반으로 해서 성장한 까까오 택시 호출과 까까오 대리는 그야말로 천하통일을 이루어냈다. 해외투자로 8,000억원의 투자를 받았기 때문에 빠른 상장으로 투자금 회수를 원했던 사모펀드 혹은 해외투자자들의 상황이 지금은 어떤지 궁금하다.

 

더 큰 문제는 의장까지 연루된 에셈(SM) 엔터테인먼트 인수전에서 주가 조작 정황이 밝혀지면서 검찰 수사를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면서 기세등등하던 까까오의 성장 전략이 멈추게 되었다. 아마 에셈 인수전은 10조원 규모라던 까까오 엔터테인먼트 상장을 위한 초석이 아니었을까. 아직은 검찰 수사 중이라 잘 모르겠지만, 만약 유죄로 판정이 난다면 까까오 그룹의 핵심인 까뱅의 지분을 모두 매각해야 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비슷한 소프트파워 테크기업인 네이버와 비교해 볼 때, 각각 해외매출에서 상당한 차이가 난다. 네이버는 매출의 40% 정도를 해외에서 올리고 있다. 일본에서는 메신저 라인으로 그리고 북미에서는 웹툰이 호성적을 거두고 있는 모양이다. 반면, 까까오는 해외 매출이 20% 정도라고 한다. 네이버가 실적을 바탕으로 신사업을 추구하는 반면, 까까오는 대규모 해외투자를 받아 진행하는 공격적 영업전략을 구사한다. 에셈 인수전에서도 실탄 마련을 위해 싱가폴 투자청과 사우디 국부펀드(?)의 대규모 투자를 받았다는 뉴스를 들었다.

 

까페이까지는 쪼개기 상장 전략이 승승장구했지만, 20211210일 까페이 스톡옵션 먹튀 사태를 기점으로 해서 브레이크가 걸려 버렸다. 모기업이 까까오도 한 때 17층까지 달리면서 엄청난 기세를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5층에 턱걸이한 상태다. 까까오 모빌리티와 까까오 엔터테인먼트도 과연 언제 상장에 나서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요원해 보이기만 하다.

 

떨어진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까까오는 <준법과 신뢰위원회>를 출범시켰지만, 내부인사의 폭로로 사측의 도덕적 해이 그리고 방만한 경영 같은 이슈들이 외부로 드러나게 되었다. 까까오가 망한다면 그건 골프 탓이라고 말할 정도라고도 하고, 안산 데이터센터와 서울아레나 같이 메가 프로젝트를 수의계약으로 진행하면서 현재 내부감사에 들어갔다고 한다.

 

한때 혁신의 아이콘으로 불리며 까까오가 구축한 강력한 플랫폼을 기반으로 엄청난 성장세를 과시해온 까까오가 과연 작금에 당면한 위기들을 어떻게 해결하고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를 마련하게 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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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3-12-05 1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카카오가 아닌 까까오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네이버도 naver나 nhn과는 다른 것 같고요. 레삭매냐님 잘 읽었습니다. 좋은하루되세요.^^

레삭매냐 2023-12-06 10:59   좋아요 1 | URL
네이버에서 책 리뷰를 통해 세습하는
교회 실명으로 깠다가 블라인드 처리
되는 트라우마 덕분에, 혹시 하는 마
음에 까까오루다가.

이래서 스크리닝이 무서운가 봅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3-12-05 2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올해의 서재의 달인 축하드립니다.
따뜻한 연말 좋은 시간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3-12-06 10:59   좋아요 1 | URL
아이구 감사합니다 써니데이님.

그레이스 2023-12-06 08: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직원들과 가족들을 생각하면 쇄신하고 도약하는 기회가 되길 바래봅니다.

레삭매냐 2023-12-06 11:00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입니다.

한국 최고의 소프트파워 테크기업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데, 최근 하
는 걸 보면 기존의 재벌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