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니오스의 바위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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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기다린 아민 말루프의 대표작 <타니오스의 바위>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이 걸출한 소설에서 저자는 자신의 조상으로 추정되는 아부 키크 말루프라는 사람의 실제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어쩌면 소설 <타니오스의 바위>는 그를 위한 추모의 글일 지도 모르겠다.

 

오래전 레바논의 산악 마을 크파리야브다라는 마을에 타니오스의 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었다. 이제는 거의 전설이 되다시피 한 타니오스 키크라는 인물이 어떻게 태어나서 무슨 일을 했는가가 바로 이 소설의 고갱이다. 크파리야브다 출신으로 보이는 화자는 세 가지 정도의 전거를 통해 근 200년 전의 일들을 추적한다. 하나는 마을의 게브라이엘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전승, 두 번째는 엘리아스라는 수도사가 남긴 <산악지대 연대기> 그리고 방랑장수 나데르의 <노새 몰이꾼의 잠언> 정도가 되겠다. 영국 출신 목사이자 교사 스톨튼이 남긴 서한들과 기록도 참고한 모양이다.

 

크파리야브다 마을의 지도자는 족장 프란시스다. 족장이라는 명칭부터 이미 전근대적이지 않은가. 3세기 가량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아온 크파리야브다 마론파 정교도 영주인 프란시스는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영주의 기본 임무인 세금 징수와 병력 동원에 있어서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게 처신한 결과가 아닐까. 다만 한 가지 큰 흠은 그의 바람기이다. 나이 사십이 될 때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마을 여자들을 희롱하는 낙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그는 인근의 유력 집안인 그랑 조르드 가문의 아내를 들이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의 바람기가 죽은 건 아니다. 그렇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 법이다.

 

이 때 등장하는 여인이 하나 있었으니 절세미녀 라미아다. 그리고 그녀는 우리의 주인공 타니오스의 엄마이기도 하다. 이미 그 때 유부녀였는데 다른 사람이 아닌 프란시스 족장의 집사이자 심복 게리오스의 아내였다. 도무지 절제를 모르는 남자였던 족장은 아내가 잠시 집을 비운 틈을 타서 라미아와 사통했고, 그 결과 사생아인 타니오스가 태어났다. 아기의 이름을 족장이 아바스라고 지어주는 바람에 난 사단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소년 타니오스가 무럭무럭 자라나던 시절, 마을의 어느 미치광이 소년이 그를 키크라는 별명으로 부르는 바람에 타니오스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자신의 출생의 비밀이 문제가 된 것이다. 게다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영주의 아들 라드에게 자신의 아버지처럼 자신도 종복 노릇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뿔이 나버렸다. 그런데 어쩌면 족장 프란시스의 무분별한 방탕함이 서구 열강의 레반트 침략과 동일선상에 서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불쑥 들었다. 영국과 프랑스로 대변되는 서구 열강들은 근동 지방에 침투해서 유럽대륙에서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의 연장전을 치르고 있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나라들이 도대체 무슨 근거로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감내라 대추 내라고 주장한단 말인가.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터키의 이집트 총독 메흐메트 알리가 종주국에 반기를 들고 도전장을 내서 이집트-오스만 전쟁이 두 번이나 레반트 지역을 휩쓸기 시작했다. 영국 출신의 제레미 스톨튼 목사는 침략의 선봉에 서서 정교도 사회인 레바논의 산악지대에 학교를 열었다. 같은 신을 모시면서도 서로를 이교도 취급하는 장면이 참 낯설었다. 중동을 맡은 영국의 폰손비 경은 밀사 리처드 우드를 파견해서 족장의 아들 라드와 타니오스를 영국 학교에 의탁하게 하는 치밀한 전략을 개시한다. 제국주의자들은 확실히 자신들이 침략할 지방을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그에 따른 세부지침의 실행까지도 거의 완벽했다. 그들이 파견한 밀사 리처드 우드는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로 족장과 나란히 미사에 참여했다. 리처드 우드는 훗날 불행의 씨앗이 되는 장총을 족장의 아들 라드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 그전에 바람난 사위 족장 프란시스를 징벌하기 그랑 조르드의 장인은 대부대를 이끌고 크파리야브다 마을을 방문해서 그야말로 메뚜기 떼처럼 마을의 양식과 가축들을 거덜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이 족장 아내의 친정에 대한 반감이 깊어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한편, 대주교의 사주를 받은 소년 라드는 스톨튼 목사의 아내에게 두 번이나 모욕을 주면서 결국 학교에서 퇴교 당하게 된다. 불똥이 튀어 타니오스도 같이 학교에서 잘리게 되었는데, 단식투쟁으로 영국 학교에 계속해서 다니겠다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타니오스. 그의 반골 기질이 이때부터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레반트 산악지역은 중세 십자군 전쟁 때도 그랬지만, 1830년대에도 그 전략적 중요성은 대단했다. 이집트의 파샤 메흐메트 알리가 오스만 터키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을 수중에 넣을 필요가 있었다. 그 지역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대주교가 이집트 편에 서면서, 족장 프란시스의 호시절은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족장은 교묘하게 당국의 세금 징수와 병력 징발을 피해갔지만, 실제적인 병력을 동원한 압박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집사였다가 횡령으로 재산을 챙긴 루코즈가 족장의 자리를 차지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세월이 변했다는 반증이었다.

 

루코즈는 교활하게 타니오스에게 접근해서 자신의 딸인 아스마의 사위로 삼아,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감언이설로 소년을 미혹한다. 하지만 아스마에게 눈독을 들인 족장의 아들 라드가 청혼을 해오자 냉큼 그의 청혼을 허락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타니오스는 그야말로 눈이 뒤집혀서 사생결단에 나선다. 그동안 아버지로서 거의 존재가 희미했던 게리오스가 나서서 사태를 중재해 보려고 했는데 소용이 없었다. 대주교는 루코즈의 딸 아스마를 라드도 타니오스도 아닌 자신의 조카와 결혼시키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게리오스는 족장에게 받은 영국 밀사가 준 장총을 가지고 대주교 저격에 나선다. 일격필살의 탄환 한 발로 대주교의 양미간을 꿰뚫은 게리오스는 아들 타니오스를 데리고 망명길에 나선다.

 

스포일러고 뭐고 모르겠다. 독자제현의 호기심 해소를 위해 나머지도 다 까발려야겠다. 망명지 사이프러스의 파마구스타에서 도주할 때 챙겨온 넉넉한 자금으로 유유자적한 세월을 보내는 게리오스 부자. 타니오스는 거리에서 만난 여인 타마르(과일이라는 의미라고 한다)에게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 녀석, 남자가 된 건가? 하지만 아버지 게리오스는 수장(에미르)이 파견한 비밀정보원의 유혹에 빠져 고향으로 가는 배에 오른다. 천우신조로 아버지와 같이 배에 오르지 못한 타니오스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교수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그렇게 사라져갔다.

 

예전에 그리스 기행문 <마니>에서 패트릭 리 퍼머 작가가 밝혔다시피, 지중해 연안의 여러 지역에서 흔하게 발생하는 피로 피를 씻는 복수극은 그 동네의 일상이었다. 이집트 점령군 아델 에펜디의 앞장이가 된 루코즈는 그의 명령으로 병력을 동원해서 이웃 사흘라인의 사이드 베이크를 공격해서 그를 죽였다. 사흘라인 사람들이 복수의 칼날을 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사이프러스에서 여전히 망명 생활을 하던 타니오스에게도 복수의 기회가 찾아왔다. 영국은 함대를 동원해서 레바논 산악지대를 장악하고 있던 수장들을 정벌하러 나섰다. 그리고 그들에게 영국식 교육을 받은 타니오스는 유용한 길잡이였다. 아마 이런 때를 대비해서 그들은 현지의 유력한 자제들에게 영국식 교육을 시켜 제국주의 첨병으로 삼았던 게 아닐까. 수장에게 치욕적인 명령을 전달하고, 자신의 고향 마을로 돌아온 타니오스는 영웅 대접을 받는다. 대주교를 저격한 아버지와 함께 도망칠 적에는 그렇게 꼴사나웠는데, 증세와 병력 징발 그리고 무기 압수 정책 때문에 현지인들에게 신망을 잃은 이집트와 협력자들을 몰아낸 해방군으로 금의환향한 것이다.

 

타니오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솔로몬의 그것과도 같은 현자의 재판이었다. 족장을 내쫓은 배신자 루코즈를 어떤 식으로 처벌 하냐가 문제였다. 사이드 베이크의 아들인 카흐탄은 당장 루코즈를 처형하라고 성화고, 그래도 그놈의 정 때문에 한 때나마 사랑했던 아스마를 생각해서라도 추방 정도로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들이 타니오스의 내부에서 격렬하게 충돌한다. 잠시 억류해둔 감옥에서 결국 비극이 발생하면서 영웅 타니오스는 종적을 감춘다.

 

아민 말루프는 소설 <타니오스의 바위>를 통해 놀라운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족장의 사생아라는 출생의 비밀을 가진 소년 타니오스가 치열한 삶의 투쟁과 고민 끝에 한 명의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도 녹록하지 않다. 하긴 우리네 삶이 언제 그렇게 만만했던 적이 있었던가. 저자의 고향인 레바논 산악지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전제적 통치 아래 살던 이들의 비합리적이지만, 현재 자신들의 삶만 영위해 준다면 작은 불편 따위는 감내할 수 있다는 지역공동체가 품은 고루한 인식에 대한 분석도 예리했다.

 

전 세계를 집어삼킬 듯한 제국주의 서세동점의 시대에 레반트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제국의 가장 중요한 식민지였던 인도의 안전확보를 위해 19세기 내내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고 있던 영국은 레반트 거점 확보가 중요했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레반트 지역에서 정치권력에 우선해서, 민중들의 마음을 좌지우지하는 종교의 중요성을 일찍이 파악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협력할 이들의 양성을 위해 서구식 교육과 사고를 이식할 현지 인재 발굴에 열심이었다. 당근과 채찍으로 현지 기득권층을 포섭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탁월했다. 산악지대 사람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고, 이집트와 오스만 터키가 전쟁을 벌이면 궁극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가 도출된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이집트는 영국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영국은 프랑스 기술로 건설된 수에즈 운하로 지중해에서 인도로 가는 안전한 통행권을 확보하면서 제국의 영광을 한 세기 더 연장할 수 있었다.

 

이런 당대 레반트의 복잡한 상황을 중년의 노련한 아민 말루프는 신화와 전승을 이용한 연대기로 훌륭하게 풀어냈다. 다시 한 번 이 작가의 작품에 반했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타니오스의 바위>는 지금까지 만난 아민 말루프의 작품 중의 최고다. 세상에 허명은 없다고 공쿠르 수상작의 위용일까. 이런 우수한 작품이 심지어 재밌기까지 하니 더 바랄 게 없었다. <타니오스의 바위> 재출간에 이어, 더 기쁜 소식은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온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조만간 나올 거라는 소식이다.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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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4-02-15 0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신간으로 떠서 호기심을 가지고 봤는데 재출간이군요. 재출간되자마자 바로 읽으셨네요. 작가 이름이 낯익었는데 매냐님한테 들었나보네요. 강추하시니 저도 찜합니다.

레삭매냐 2024-02-15 10:18   좋아요 1 | URL
아주우~ 오래 전에 나온 책인데
출판사에서 작가의 판권을 새로
계약한 모양입니다.

작년 가을에 <사마르칸트>에
이어 계속해서 작가의 책들이
나오고 있네요.

말미에도 언급했던 것처럼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가장
기대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