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년의 삶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토바이어스 울프에 대해 알게 된 게 벌써 3년 전이었나 보다. 그 당시에만 하더라도 아직 번역본이 나오지 않아서 일단 원서로 그의 책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올드 스쿨>, <이 소년의 삶> 그리고 <질문의 밤> 등을 사 모았다. 일부는 읽기도 했고, 오늘 막 읽은 <이 소년의 삶>은 읽다 말아서 그런지 기시감에 아주 반가웠다. 달궁 모임으로 알게 된 브랜던 친구가 추천해서 알게 된 작가가 바로 토바이어스 울프였다.

 

토바이어스 울프는 정말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걸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올드 스쿨>에 앞선 자전적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올드 스쿨>이 동부의 소위 말하는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뤘다면, 소년 토비가 환골탈태하기 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게 바로 <이 소년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 아서와 이혼한 토비의 엄마 로즈메리는 둘째 아들 토비를 데리고 플로리다의 새러토가에서 출발해서 유타의 솔트레이크시티 그리고 워싱턴의 웨스트시애틀과 치누크에 이르는 방대한 여정을 감행한다. 로즈메리는 지지리도 남자 복이 없다고 해야 할까. 토비의 아빠 아서부터 시작해서 만나는 남자들이 하나 같이 자신에게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이들이 아니라 고통의 근원이었다. 그 중에서도 최고는 치누크에 사는 드와이트였다.

 

드와이트는 애 딸린 이혼녀 로즈메리와의 새 출발을 원하며 그녀에게 청혼한다. 토비라는 이름 대신 잭으로 불리기 원하는 영특한 소년 토비는 불길한 조짐을 알면서도, 자신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드와이트와 로즈메리의 결합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소년의 고난이 시작된다.

 

드와이트는 철저하게 위선자였다. 본색을 드러낸 계부의 학대는 끝이 없었다. 11살 먹은 소년에게 수많은 마로니에 열매를 까게 하고, 토비가 어렵사리 신문 배달을 해서 번 돈을 갈취하고, 엄마의 이전 남자친구이자 전직 군인인 로이에게 받은 윈체스터 소총을 쓸모없는 개와 바꾼다. 유사가정을 원했던 소년 토비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런 화목한 가정에 대한 희망과 계부의 인정을 바랐던 모양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비극이 시작된 게 아니었던가.

 

그런데 훗날 토바이어스 울프 작가는 성인이 되어 그 시절이 그렇게 나쁘지 만은 않았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어쩌면 울프 같은 글쟁이에게 남들이 경험할 수 없었던 일들이야말로 귀한 글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에는 트라우마겠지만 나중에는 또 밑천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어쨌든 소년 토비의 고난은 멈출 줄 몰랐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렵사리 들어간 힐 고등학교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입대해서 베트남의 전쟁터로 향한다. 아마 이 부분은 그의 회고록 3부작 가운데 <파라오의 군대>에서 다뤄지지 않을까 예상해 본다. 곳곳에서 베트남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해서 언제 나올 지도 모를 <파라오의 군대>가 너무 궁금하다.

 

비행 청소년이 될 수밖에 없었던 토비의 돌파구는 다른 곳에서 찾아오게 된다. 바로 프린스턴에 진학한 형 제프리와 연락이 닿으면서 아버지와 형이 그랬던 것처럼 동부의 명문 사립학교 진학을 꿈꾼다. 철저하게 속물이었던 자신을 누구보다 잘 알던 토비는 자신이 회고록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뛰어난 거짓말쟁이에 도둑이었다. 어쩌면 이제는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하나가 된 토바이어스 울프의 스토리텔링에는 바로 이런 바탕이 절실했던 게 아닐까 뭐 그런 추론도 해본다.

 

하버드나 프린스턴 같은 명문대는 들어가기도 쉽지 않지만 진짜 승부는 그전 단계인 명문 사립 고등학교에서 이미 결판이 난다는 걸 소년은 깨달았다. 그런데 싸움질에 온갖 비행으로 무장한 토비가 무슨 수로 그런 사립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단 말인가. 토비는 추천서와 성적표를 조작하고, 시애틀에 사는 하워드 씨마저 철저하게 속여서 마침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데 성공한다. 놀랍다 놀라워. 아무리 전후 세대라고 하지만 이 정도의 스토리텔링은 지금처럼 사회가 견고한 시대에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아이젠하워와 맞붙은 아들라이 스티븐슨이나, 토비의 엄마가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섰던 케네디 같은 이름들이 등장하는 50년대 후반의 풍경은 아무래도 낯설다. 게다가 미국 사람들이라면 익숙할 당대 차량이나 텔레비전 커머셜 같은 부분도 소화하기가 쉽지 않았다. 얼마 전에 읽기 시작한 <늑대의 역사>에 등장하는 냉전 시대 보수주의에 경도된 교사들의 모습도 등장해서 흥미로웠다. 베를린이 아니라 모스크바로 진격해야 했다는 신박해 보이는 주장들 말이다. 꼬마 소년이 아무렇지도 않게 총기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헌법 수정 조항이 언론의 자유 대신 무기를 소지할 권리라고 부추기는 선생님의 발언은 또 무언가. 얼핏 총기 사고로 얼룩진 미국 사회의 단면을 엿보는 느낌도 들었다.

 


소설을 읽다가 우리 브랜던 친구가 최고의 단편으로 꼽은 토바이어스 울프의 <Bullet in the Brain>15분 짜리 단편영화를 유투브로 봤다. 예전에 단편집으로 읽었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 부분에 they is, they is 가 도대체 뭔 말인지 브랜던 친구에게 물었는데 한창 술 마시면서 듣는 바람에 또 이해를 하지 못했다. 집에 가서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어쨌든 <이 소년의 삶>은 대단한 작품이었다.

 

[뱀다리] 오래 전에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영화도 한 번 보고 싶다. 그나저나 도대체 킹스턴 트리오의 <늪지>는 원제가 뭘까. 역시나 원서의 도움이 필요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19-07-17 1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아, 저도 이 책 기다리고 있었는데 레삭매냐 리뷰 읽으니 설레이네요. 사실 토바이어스 울프는 유튜브에서 카메라 앞에서 장시간 자기에 대한 이야기를 고백한 인터뷰가 인상적이어서 기억한 작가였어요. <올드스쿨> 참 좋더라고요.

레삭매냐 2019-07-17 21:09   좋아요 0 | URL
유튜브 토선생의 인터뷰도 한 번 찾아 봐야
겠네요 :>

책은 기대이상이었습니다.

속히 <파라오의 군대> 그리고 단편집들도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회고록 3부작의 완간
을 고대해 봅니다.

서니데이 2019-07-18 2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휴가 잘 다녀오셨나요.
시원하고 좋은 밤 되세요.^^

레삭매냐 2019-07-19 07:08   좋아요 0 | URL
휴가 전반부에 비가 오긴 했지만
잘 다녀왔답니다.

감사합니다.
 

<이 소년의 삶> 토바이어스 울프

 

예전에 토바이어스 울프의 존재를 알게 되고 나서 언제나 그의 책이 번역나올까 싶었는데 올해 들어 <올드 스쿨>을 필두로 해서 작가의 책이 줄줄이 나오고 있는 중이다. 반갑다.

 

아마 다음 순서는 단편집이 아닐까 싶다. 우리 브랜던 친구가 강력하게 추천한 단편의 결말을 과연 어떻게 번역했을지 무지 궁금하다 나는.

 

<이 소년의 삶>이 지난 주에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주문하려다가 주말에는 당일배송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머뭇거리다가 타이밍을 놓쳤다. 인근 교보문고 바로드림 서비스로 사야 하나 하는 나의 고민은 귀차니즘으로 성사되지 못했다. 램프의 요정 적립금이 있으니 그걸...

 

오늘 오후에 받았고, 집에 오자마자 바로 읽기 시작했다. 예전에 원서를 사서 읽다 말았지 아마. 그래서인지 기시감이 팍팍 드는 기라. , 만사 때려치우고 이 책이나 읽고 싶구나. 타부키의 <인도 야상곡>도 마저 읽어야 하는데.

 

미리보기 서비스로 <늑대의 역사><보라색 히비스커스>도 읽기 시작했는데 이 두 책 다 마음에 든다. 사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당장 읽어야 할 책들이 생겼으니 어쩌면 다음 달로 미뤄야 할 지도 모르겠다.

 

이달 달궁 모임은 아쉽게도 패스해야할 팔자다. 아 억울타. 책도 다 읽었는데. 우리 동지들을 못 보니 그것도 아숩고. 뭐 사는 게 다 그렇지 아니한가.

 

오늘 밤 <이 소년의 삶>을 읽을 기대에 벌써부터 설레는구나. 어쩌면 <블러디 프로젝트> 때처럼 새벽까지 읽게 되는 거 아냐 그래.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설해목 2019-07-17 0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신간 나온 기념으로 <올드 스쿨>을 샀습니다. ㅎㅎㅎ
작가의 다음 단편집이 나올 때쯤 이 책을 구입할까봐요. ~

레삭매냐 2019-07-17 09:36   좋아요 1 | URL
전 어제 받아서 읽기 시작했는데 오늘 아침
까지 절반 가량 읽었네요. 너무 너무 재밌네요.

브랜던 친구가 왜 그렇게 토바이어스 울프
타령을 했는지 알겠더라구요. 근데 진짜 걸작
은 단편이라고 하는군요 :>

원서 읽던 책이라 그런지 기시감도 들고...
비교해 보고 싶은 부분도 있는데 읽던 원서를
어디에 두었는지 못 찾겠네요. <올드 스쿨> 때
도 그랬었는데 흠 -
 
집시와 르네상스 - 피렌체에서 집시로 살아가기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집시와 르네상스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라는 호기심에 타부키의 책을 두 번째로 만나게 됐다. 이탈리아 출신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의 <집시와 르네상스>의 시공간적 배경은 지난 세기말의 피렌체다. 구유고슬라비아가 내전으로 초토화되면서 발칸반도 그 중에서도 세르비아와 코소보 그리고 마케도니아에 살던 집시들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지금 시리아 내전과 리비아 내전이 수많은 난민들을 만들어냈다면 20년 전에는 유고내전이 그랬다.

 

집시에게 덧입혀진 도둑, 불결함 그리고 구걸 같은 부정적 이미지는 어디에서 왔을까? 인도 북부에서 유래했다는 유랑민족에 대한 정주민들의 네거티브 프로파간다가 아닐까 싶다. 집시들은 피렌체 외곽에 설치된 올마텔로, 포데라초 같은 낯선 이름의 수용소에 갇혔다. 이탈리아 시민들도 아닌 이방인들에게 위생시설이나 제대로 된 거주시설 같은 것들이 주어질 리가 없었다. 코무네와 소수의 양심적인 인사들이 제공하는 물자는 집시들에게 턱없이 부족했다. 이것이 인간인가, 나는 왜 또다른 이탈리아의 양심이 외친 말이 떠오르는가.

 

그런데 저자가 명백하게 통속적인 도시라고 밝히는 위대한 인문학의 도시 피렌체가 지닌 제노포비아의 역사는 유구했다. 이미 메디치 일 마니피코가 다스리던 공국 시절부터(무려 500년 전부터!) 집시들은 추방과 배제의 대상이었다고 타부키는 역사적 고찰을 통해 밝힌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자리와 마실 물 그리고 음식도 없는 비참한 집시들의 스케치가 연간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이 찾는 꽃의 도시 피렌체의 단면이라면 또 한편에서는 피렌체 비엔날레라는 이름의 흥청망청한 파티가 진행되고 있다. 타부키가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도시의 한 편에서는 인간들이 인간 이하의 삶을 영속해 가는데 또 한 편에서는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얼치기 행사에 수십억 리라를 쓴다는 역설적 상황 말이다.

 

수십개의 분절로 이루어진 글을 읽으면서 가장 슬펐던 장면 중의 하나는 누군가 집시 소녀에게 소녀가 한 번도 가지지 못한 인형을 선물했는데 그 선물이 집시 소녀의 품에서 폭발했다는 지점이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인 인간인가. 집시 청년과 이탈리아 아가씨와의 사랑은 온갖 역경을 이겨낼 것 같았지만 결국 오래된 프로파간다의 위력으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는 전언도 비극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자본과 패션의 르네상스를 원하는 이들에게 안토니오 타부키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사제 폭발물을 투척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시들을 환대한다는 이미지를 보여 주기 위해 집시 노인들에게 아파트 열쇠를 건네주는 코무네가 기획한 쑈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누군가는 꽃의 도시 피렌체에서 압도적인 예술품들을 보면서 스탕달 신드롬을 경험할 것이다. 하지만 또 누군가는 올마텔로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초현실적인 모습을 보고 비슷한 수준의 분열증을 겪을 지도 모르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9-07-15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려한 축제 분위기와 그 분위기에 가려져 배제된 집시들의 삶이 공존하는 피렌체. 88 올림픽이 열리기 전의 서울의 분위기와 비슷하네요. 정부가 서울역 주변에 있는 노숙자들을 쫓아냈고,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낡고 오래된 건물들을 철거한다는 이유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쫓아냈잖아요.

레삭매냐 2019-07-15 17:04   좋아요 0 | URL
싸이러스 브로의 지적이 정확하게 맞습니다 !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유구한 인문학의 역사
를 자랑하는 도시에서 그런 야만적인 행위
들이 수백년 동안 자행되어 왔다는 게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다시 한 번 이것이 인간인가를 말해 봅니다.
 
블러디 프로젝트 - 로더릭 맥레이 사건 문서
그레임 맥레이 버넷 지음, 조영학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는 원래 휴가 다녀와서 일찍 자는 계획이었는데 그레임 맥레이 버넷의 <블러디 프로젝트> 읽다가 그만 망했다. 자기 전에 좀 읽는다는 게 그만 다 읽고 나서 새벽 2시에 잠들었다. 물론 다 읽고 나서도 <문타이거>도 좀 읽었지. 아 끝없는 나의 책사랑.

 

<블러드 프로젝트>1869810일 스코틀랜드 하일랜드의 컬두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장르소설로 맨부커 최종심에 올랐다는 점이 아무래도 셀링포인트가 아니었을까. 소설은 사건 발생, 주인공 로더릭 맥레이의 진술, J 브루스 톰슨의 편견에 가득한 보고서 그리고 재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좀 맥이 빠질 진 모르지만 스포일부터 해야할 것 같다. <블러디 프로젝트>에는 기가 막힌 반전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로디의 불쌍한 사연을 잘 파악한 유능한 삼류 변호사 앤드루 싱클레어의 법정에서의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정신이상에 의한 범죄라는 정상참작은 거부된다. 그렇다고 자그마치 세 명이나 되는 브로드 패밀리를 잔혹하게 살해한 로디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게 아닌가.

 

화끈한 법정 드라마나 반전 대신 저자는 어떻게 해서 17세 소년 로디가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우선 사건발생 1년 전 쯤, 맥레이 집안의 균형추라고 할 수 있었던 우나 맥레이가 산후합병증으로 사망한다. 로디의 아버지 존 블랙맥레이의 로디에 대한 학대는 일상이 되었다. 그전에 사건을 바라보는 컬두이 주민들의 진술이 등장하는데, 로디에 대한 의견이 판이하게 나뉜다는 점이 눈에 띈다. 결정적인 것은 라클런 브로드가 치안관이 되면서 가뜩이나 사이가 좋지 않던 맥레이 가족과 불화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건 발생 후, 로디는 도주도 하지 않고 순순하게 자신의 죄를 자백하지 않았던가. 아버지의 짐을 덜어 드리겠다는 의도에서 사건을 저질렀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작가는 사건의 이면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우선 맥레이 집안의 우환이 겹치면서 어쩌면 교육을 받고 탁월한 사회 구성원이 되었을 수도 있는 로디가 살인자가 되는 과정을 보면서 사회적 책임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하일랜드 지역의 마름과 치안관을 앞세운 착취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블랙 맥레이는 대대로 소작을 부쳐 먹고 살았다. 그들에게 컬두이 외의 삶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잠시 로디는 아치볼드 로스의 말을 듣고 캐나다나 혹은 글래스고로 떠나 상인이 되어 성공하는 꿈을 꾸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집안을 건사하는 제타와 쌍둥이들은 어쩌란 말인가. 잠시 동안의 가출은 로디로 하여금 원인제공을 한 라클런 브로드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희망이 없다는 점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라클런의 횡포에 견디다 못한 블랙 맥레이와 로디는 마름을 찾아가 항의해 보지만, 라클런이 치안관 행세를 하면서 모든 문제를 막아 주는 마당에 지주를 대신하는 마름이 무엇하러 일개 소작인을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바닷가의 해초마저 지주의 것이니 자신의 허락을 받고 채취해야 한다는 라클런의 완장질은 로디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누이 제타에 대한 성적 착취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변수가 하나 등장하니 바로 그것은 라클런의 딸 플로라 매켄지와의 로맨스다. 이런 장치는 참으로 정교하다. 초반에 라클런 가족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세 명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누굴까하는 호기심이 들었다. 그 집에 모두 다섯 명의 식구가 있다고 들었는데 라클런은 확실하고 나머지 두 명은 누굴까라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그 중의 하나가 로디가 한 때 사랑한다고 믿었던 플로라였다니! 아 스포일은 이제 고만 해야겠다.

 

사건의 배경에는 라클런에 대한 로디의 개인적 원한도 있었겠지만, 라클런의 완장질을 방치한 사회경제적 시스템의 문제도 심각했다고 생각한다. 라클런은 규칙을 운운하며 계속해서 말도 안되는 벌금을 컬두이 주민들에게 매겼지만, 사실 그런 규칙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맥레이 부자가 찾아간 마름은 아예 규칙에 대해 알려 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유는 규칙을 알려 주면, 나머지는 위반하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해괴한 논리였다. 그래서 규칙에 대해 알려줄 수가 없다고 강변한다. 그런 식이라면 라클런의 완장질은 거의 무소불위한 권력을 갖게 되는 게 아닌가. 치안관과 마름 그리고 지주의 이런 견고한 연합체가 지배하는 하일랜드의 실상이 드러나자 입맛이 바로 씁쓸해졌다. 뭐 지금의 상황과 다르지 않으니 말이다.

 

법의학자로 등장하는 J 브루스 톰슨의 존재는 악역을 맡은 라클런 브로드의 그것에 견주어 조금도 떨어지지 않는다. 교도소에 갇힌 재소자들의 사정 따위는 알아 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로지 사실과 실례만을 주장하는 모습에서, 최근 재판에 넘겨진 일단의 인사들의 모습이 엿보이기도 했다. 소위 말하는 법기술자들이 사법농단을 통해 어떤 식으로 시민들 위에 군림하려고 했는지 말이다. 알량한 지식과 편견으로 무장한 톰슨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짜증이 났다. 어쩌면 그런 지식인들의 위선적인 태도야말로 빅토리아 시대를 규정하는 시대정신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자신이 창조해낸 역사 서류를 바탕으로 이런 멋진 소설을 쓴 그레임 맥레이 버넷의 역량에 감탄했다. 재밌기도 하고, 장르소설 답게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블러디 프로젝트>가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라고 하는데 다른 책들도 만나보고 싶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붕붕툐툐 2019-07-15 1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을 잊은 책사랑에 존경을!!

레삭매냐 2019-07-15 14:10   좋아요 1 | URL
너무 재밌어서, 고만 읽고 자야지를
반복하다가 다 읽고 자게 되었던
것입니다 ㅋㅋㅋ

stella.K 2019-07-15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끝없는 나의 책사랑!!!ㅋㅋㅋ
글치 않아도 휴가는 잘 다녀오셨는지 궁금했는데.
뭐 잠을 못 주무셨어도 피곤한 줄 모르겠는데요?^^
그런 책 읽어 본지가 언젠지...ㅠ

레삭매냐 2019-07-15 16:41   좋아요 1 | URL
휴가지에 책을 싸들고는 갔는데
정작 읽을 시간이 없었더라는...

휴가지 바닷가에서 책 읽는 로망
은 아무래도 팔자와 맞지 않는가
봅니다 핫하 -

설해목 2019-07-15 16: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내용을 보니 한번 잡으면 손에서 쉽게 놓을 수가 없을 것 같네요. ㅋㅋ
그나저나 벌써 휴가를 다녀오셨군요.
아까 다른 글에서 보니 강릉쪽으로 다녀오신 것 같은데.. 즐거운 휴가였기를요. ^^

레삭매냐 2019-07-15 16:43   좋아요 1 | URL
넵 강릉 일대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강릉 - 옥계 - 사천 - 대관령목장

사람들 버글대는 게 싫어서 좀 이른
휴가를 다녀왔습니다.

반은 비가 와서 망치고 반은 절절
끓더군요. 비교체험 극과 극 !!!

강릉 바다, 좋더군요. 마침 비치비어
페스티벌인지 뭔지도 해서 맥쥬도
신나게 마셨네요...
 
산 자들 - 장강명 연작소설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연 기자질을 하던 시절의 기백이 엿보이는 소설인지 르포르타주인지 모를 그런 책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2020년 최저임금이 발표되었는데, 경기 침체의 주범으로 최저임금을 지목하고 총공세를 편 보수 언론과 도무지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어느 당의 리더가 시대를 역행하는 기괴한 발언을 해서 얼떨떨하기도 했다. 지금이 19세기 산업혁명 시절인가 싶었다.

 

이제 곧 인구절벽의 시절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노동이 정당한 대가를 받게 될 시절이 올 거라고 믿는다. 그동안 노동력 과잉으로 기업들은 노동력을 최대한 착취하는 방식으로 이윤의 극대화를 도모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경영방식은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최저임금을 무기로 다른 사람이 하고 싶어하지 않는 일들을 강제하고 있지만 말이다. 서구 사회의 인건비가 우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 비싸다고 생각하는가? 모든 일에은 이유가 있는 법이다. 시절이 바뀌면 사고도 바뀌어야 하는데, 여전히 무료배달의 추억이 우리의 윤리적 소비라는 발목을 잡는 게 아닌가 싶다.

 

장강명 작가는 모두 열 꼭지의 이야기들로 2019년 대한민국 노동시장에 대한 적나라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것은 레알인가 아니면 픽션인가? 난 아무래도 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알바생 자르기>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유휴 인력을 줄이고,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꼼수를 부리는 꼰대들을 저격한다. 나도 모르게 관행이라는 적폐에 젖어, 당연히 받아야 하는 상대방의 권리를 무시하지는 않았나 반성해 보게 된다. 나도 마찬가지로 노동자 처지에 왜 사용자 입장에 서 있던 걸까. 그만큼 관행이 무섭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지난번에 읽다만 <제인스빌 이야기>에서 이미 나는 양질의 일자리를 잃게 된 이들이 겪게 된 자존감의 상실과 수입 감소 그리고 가정의 붕괴라는 삼박자의 정교한 회로도를 체험한 바 있기에 <공장 밖에서>가 절절하게 다가왔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처럼 더 무서운 말이 있을까. 한국사회에서 일자리를 생존과 직결된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처럼 일하면서 고작 1/3 밖에 안되는 급여를 받는다는 문제 제기는 또다른 빙산의 일각일 따름이다. 왜 빈번하게 억대의 연봉을 받는 무능한 경영진의 경영실패로 일한 뒷책임을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로 몸빵을 해야 하는지 나는 여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한 때는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동료들이 산 자들죽은 자들로 나뉘어 노노갈등을 벌이는 장면은 그야말로 한 편의 코미디 같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산 자들은 자기들이라도 살기 위해 죽은 자들을 공격한다. 어제까지 한솥밥을 먹는 동료들이었지만 이제는 자기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일 뿐이다. 죽은 자들이 끝까지 버텨서 공장이 폐쇄된다면, 산 자들 역시 죽은 자들이 되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래에 폐쇄될 공장의 운명이 바뀌는 것도 아니라는 걸 나는 <제인스빌 이야기>를 통해 깨달았다. 다시 한 번 각자도생의 시대에 벌어지는 비극의 원형을 읽을 수가 있었다. 모두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만, 한국은 이미 그들의 세계전략에서 아웃되었다. 아무리 정부가 공장과 직원들을 볼모로 잡은 그들에게 지원을 해봐야 깨진 독에 물붓기일 따름이다. 다만 타이밍의 문제일 뿐.

 

내가 예전에 살던 곳에 이만희 빵집이라는 동네 빵집을 비롯한 서너곳의 빵집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시내 곳곳에 프랜차이즈 빵집이 들어서면서 동네빵집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이만희 빵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현수동 빵집 삼국지>는 지난 20년 동안 진행된 동네 빵집 몰락기의 원형을 그대로 재현한다. , 왜 작가는 치킨공화국을 다루지 않았을까? 직장에서 내몰린 퇴직자들이 너나 없이 차린다는 치킨집이야말로 자극적이면서도 그야말로 MSG 같은 이야기들을 토해냈을 텐데 말이다. 너무 자극적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하고 조심스럽게 추정해 본다.

 

대기업화된 프랜차이즈 빵집이 들어선 이후, 빵값이 모두 올랐다. 이제 이천원대 식빵은 아예 팔지도 않는다. 이럴 줄 몰랐나? 시장의 자유로운 경쟁이 사라지게 되면, 독야청청 시장을 주무르게 된 독과점기업의 횡포가 시작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시장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자유로운 경쟁의 비밀은 바로 독과점이었다. 힐스테이크 베이커리 주인장은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경쟁에 나섰지만, 온갖 현란한 마케팅으로 무장한 프랜차이즈 빵집을 상대하기란 역부족이었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너무 싸도, 사람들은 소비욕구를 거둔다. 시장에서 정상적인 가격에 대한 가늠자가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천명이 넘는 경쟁자를 제치고 아나운서가 되었다는 전설을 쫓은 <카메라 테스트>도 인상적이었다. 모두가 경쟁자였다. 이번 여름휴가 때, 강릉MBC를 지나치면서 얼마 전에 읽은 아나운서 도전기가 연상됐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보는 방송의 아나운서 자리가 그렇게 선망의 자리인 줄 누가 알았을까. 단 한 번의 실수로 다른 기회를 얻기 위해 수개월간의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내가 그런 위치에 있지 않아 다행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정도 튀어 나오더라.

 

<대외 활동의 신>에서는 열정 페이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미래의 취업자들을 착취하는 과정에 대한 생생한 리포트를 만나볼 수 있었다. 견고한 학벌과 인맥 그리고 스펙이라는 삼위일체가 빚어내는 치열한 취업경쟁을 뚫고 입사한 이들의 30%1년을 넘기지 못하고 전직한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그만큼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크다는 것일까. 구하는 자들은 괜찮은 일자리가 없다고 아우성이고, 또 기업에서는 일할 만하면 이직하니 가르치면 뭘 하냐는 넋두리가 허공에서 충돌한다.

 

나도 그 좋아하는 책의 당일배송이 되지 않는다고 허구헌 날 불평을 토로하곤 했었는데 반성한다. 사실 그렇게 당일배송이 되도, 바로 읽지 않고 중고서점에서 읽지 않은 책을 만났을 때 얼마나 속이 아렸던가. 그냥 여기저기서 쌓인 스트레스를 풀 대상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요즘에는 감정노동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개선되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업체에 전화를 걸 때마다, 전화 상담하는 상대방을 존중하라는 메시지가 수시로 등장한다. 내 안의 분노를 자제하고, 다스리는 것도 기술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지만.

 

<음악의 가격>에서도 역시나 창작이라는 각고의 시간을 거쳐 탄생한 음악이 제대로 값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적확하게 타격한다. 은글슬쩍 자신의 밥그릇인 책에 대한 이야기도 끼워 넣으면서 말이다. 역시나 업자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책은 낫다고 했던가. 내가 처음에 음악을 듣기 시작했을 때만도 카세트테이프나 레코드 판이 대세였다. 그 뒤에 CD가 등장했고 그 다음에는 MP3 파일이 나왔다. 고정적인 형태의 미디엄만 생각하도 세대에게 냅스터로 다운 받은 파일로 음악을 듣는다는 건 혁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스트리밍의 시대가 됐다. 메탈리카가 자신의 수입이 줄어든다는 이유로 냅스터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지만, 이제 스트리밍이 대세가 된 시대에 아무런 의미 없는 싸움이 되었다. 그래서 메탈리카는 음원 수입 대신 돈이 되는 콘서트에 열을 내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쪽에서도 티켓매스터라는 괴물이 수익을 독심하고 있다고 들었다.

 

<산 자들>을 읽는 동안, 현실이 정말로 고통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생존을 위해 꾸준하게 소비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고정적인 수입이 필요하다. 그 수입을 올리기 위해서는 어떤 방식의 노동이라도 팔아야 한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책을 사기 위해서라도 돈이 필요하지 않은가 말이다. 토바이어스 울프의 자전적 소설이 나왔다던데, 그렇다면 정답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소비하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선 하기 싫은 일/노동도 해야 한다. 에라, 그지 같은 결론이네. 산 자들이여, 나를 따르라가 아니라 어떻게든 돈을 벌어라. 참으로 슬픈 현실이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d 2019-07-15 07: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우, 레삭메냐 님, 정말 박진감 있게 읽히네요. 윗글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행간에 묻어나는 배려하는 마음도요. 한데 오늘 아침 08시 05분부터 류현진 선수가 보스턴 상대로 던지는군요. 레삭메냐 님은 보스턴 레드삭스 광팬이신 것 같은데 마음이 좀 미묘하시겠네요. 아무튼 즐겜하시고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레삭매냐 2019-07-15 11: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전 레드삭스 팬인지라 레드삭스가 이기길
응원했지만 다저스가 타력으로 압도하네요 :>

마인드님도 즐거운 하루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