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여기에서
실키 지음 / 현암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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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문자가 왔다. 2주 전에 빌린 책들을 내일까지 반납하라고. 거의 어지간해서는 연체하는 법이 없다. 읽지 못한 책이라면 당연히 반납을 해야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연장해둔다. 2주 전에 만난 실키 작가의 <그럼에도 여기에서>라는 그래픽노블이다. 읽던 책인데, 리뷰를 쓰기 위해서라도 그전에 읽은 걸 싹 무시하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기시감에 더 빨리 읽을 수가 있었다. 이제 리뷰까지 쓰고 나면 반납하는데 마음이 가벼울 것 같다.

 

어려서 인도유학을 떠난 작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림체부터가 뭐랄까 무언가 완성되지 않은 미완성의 습작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냉정하게 말하자면, 작가의 개인 기록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완성품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좀, 그렇다. 소외와 괴리라는 단어들이 떠올랐고, 반바지와 고기가 금지된 인도 현지기숙사의 억압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일천한 나의 경험에 의하면, 나와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만나 보지 못한 작은 도시 그리고 더 작은 마을 출신들이 혐오와 차별을 하지 않나 싶다. 그리고 그 근간에는 나와 다른 것에 대한 원천적인 두려움이 혐오와 차별을 생성한다고 추론해 본다. 나와 같은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하지는 않으니까 말이지. 프랑스 현지에서 일상화된 그런 차별을 경험한 작가는 바로 맞받아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처음에는 언어적 장벽 때문에 그 다음에는 나의 안전이 최고라는 생각에 그들과 말다툼을 벌이지 않는다. 사실 피곤하기도 하고.

 

<그럼에도 여기에서>에 나오는 가족 관계 개선 프로그램도 흥미롭다. 사실 작가가 제한적으로 보여준 무언가 삐걱거리는 가족 관계의 전모를 그리기란 쉽지 않다. 그런 장애물들을 뛰어 넘어, 가족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그런 감정의 소모와 갈등들을 유추해 볼 따름이다. 나는 가족에게 어떤 사람일까? 나는 나의 가족이 원하는 바를 다 수행하는 유형일까? 나와 그닥 원만하지 않은 관계 유형인 아버지에 대해 생각해 보면, 나의 아버지는 역시나 아버지로서는 처음이었기 때문에 그러셨던 게 아니었을까? 물론 누구나 인생에서 아버지는 처음이겠지만 말이지. 전부는 다 알 수 없겠지만, 이렇게 어렴풋이나마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2020316일은 프랑스에서 그 유명한 록다운, 그러니까 봉쇄령이 실시된 날인가 보다. 우리보다 훨씬 뛰어난 의료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서구 선진국들이 그렇게 우악스러운 록다운을 실시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 되돌아보면, 그 시절에도 우리는 전국적인 봉쇄령 없이 모두 일터에 악착까지 나가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정부의 통제에 따라 모두 마스크를 쓰고 생업전선에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지 않았던가.

 

마스크 품절과 손소독제 사재기 그리고 두루마리 휴지로 내 소중한 엉덩이를 보호하겠다는 발상이 참으로 눈물겨웠던 시절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메르스와 코로나 같은 역병의 시기도 이겨냈으니 그 무엇인들 이겨내지 못할 게 없겠다라는 자신감이 차오르기도 한다. 물론 실키 씨는 멀리 타향에서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고독 내지는 소외와 싸워야 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중국에서 발생한 코로나 때문에 억울하게 중국 사람들로 몰려 다시 차별과 혐오를 당해야 했던 사실은 좀 안타까웠다. 그게 내 탓이냐? 역병의 시기에 그런 합리적 사고와 행동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미션 임파서블이었는지도.

 

실키 씨의 요리 특강도 재밌다. 한국식 식재료를 구할 수 없었던 프랑스 앙굴렘(?) 같은 곳에서 직접 연어장이나 김밥 그리고 만두를 해먹는 패기에 박수를 보낸다. 오래 전에 자취하던 시절, 나의 끼니는 유통기한이 지난 신라면과 버거킹 와퍼가 책임졌었는데 말이지. 김밥을 한사코 스시로, 그리고 만두를 라비올리라고 부르는 프랑스 친구들의 언행이 결국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보고 들어 습득하게 된 익숙한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런 유한한 존재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한국이라면 어디에서나 파는 냉동만두를 구할 수가 없어, 모든 재료를 구해서 직접 만드는 장면이 짠했다. 밀가루 반죽을 하고, 밀대로 만두피를 직접 만들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만두소가 터지는 슬픔과 좌절을 알랑가 몰라 그래. 얇게 편 밀가루 반죽 위에 스텐 공기로 찍어 둥그렇게 만두피를 만들곤 했었지. 나중에 공장에서 만든 기성품 만두피의 등장에 사실 좀 놀랐긴 했었다.

 

어쨌든 책 반납하기 전에 책도 다 읽고 이렇게 리뷰까지 다 써서 만족한다. 실키 씨는 요리를 창작의 고통에 비유하기도 하던데, 맞는 말이다. 기존에 존재하던 재료들을 가지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드는 즐거움이야말로 작가들에게 주어진 사명일지도.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물들을 아주 열심히 소비하면 된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있어야 할 곳으로 가는 거지. 하나 더, 내일을 위해 오늘을 잘 살자라는 문구도 좋더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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