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도 결코 이러지 않았다
찰스 부코스키 지음, 황소연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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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난 토요일에 희망도서로 크리스티앙 보뱅의 <흰옷을 입은 여인>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달려가서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지난달에 신청했는데 이렇게 수급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다니. 보뱅의 책은 시인 에밀리 디킨슨을 다루고 있었다. 어라, 그렇다면 원작자의 시를 읽어야 하나 싶었다. 다음날에도 또 도서관에 갔는데, 파시클에서 나온 <나의 꽃은 가깝고 낯설다>을 빌렸다. 그리고 옆의 칸에 있던 찰스 부카우스키의 책도 빌렸다. 그리고 시집을 제껴 두고 후자부터 읽었다. 이유는 너무 재밌어서.

 

익히 그의 책들을 읽으면서 찰스 부카우스키가 아주 뻔뻔하고 수치심이 없는 작가라는 걸 익히 알고 있어서 그런지 보통 같았으면 바로 발생했을 거부감이 상당 부분 제거됐다. 그는 1920년 독일의 안더나흐라는 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리고 세 살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49세에 전업작가가 되기 전까지 다양한 일들을 했다고 한다. 이 책의 어딘가에서 58년을 살았다고 하는 걸 보면, 자신의 시집을 팔아먹기 위해 유럽 여행을 나선 시기가 1978년 정도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배우자 린다 리도 함께 동행해서 니스에 사는 린다의 삼촌 버나드를 만나러 갔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이유는 부카우스키가 프랑스 방송에 출연해서 막말을 해서였던가. 린다의 어머니는 자신이 반드시 가야 한다는 카페에 가기 위해 헛걸음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인 부카우스키는 계속해서 술을 마시고, 아침마다 숙취에 시달린다. 아니 이놈의 인간은 술이 빠지면 삶이 영위되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그 술이 그에게 뮤즈라도 되는 것이었나. 그렇다면 할 말이 없고.

 

아무래도 이 괴짜 작가는 본국에서보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더 인기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아무리 봐도 부카우스키는 자유로운 영혼이지 싶다. 시와 소설을 쓴다고 해서 고상한 인간인 척하지 않고,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은 그런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니 말이다. 자신에게 사인을 받겠다고 찾아온 팬과도 술에 취해 싸움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그의 팬들은 그런 그의 기행을 기대하고 팬 사인회를 찾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자신이 태어난 안더나흐에서는 90살 먹은 삼촌과 재회하기도 한다. 자신이 태어난 곳을 너무 떠난 지 오래되어 독일어를 잊어 버려서 친지들과 영어로 대화를 하는 상황이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독일의 성을 돌면서는 춥다고 린다와 함께 블랑켓을 뒤집어 쓰고 활보하기도 한다. 그렇지 이래야 우리의 부카우스키지.

 


가는 곳마다 술타령은 빠지지 않는다. 인터뷰하기 전에도 정중하게 와인 한 병을 요구하기도 하고, 물론 팬 사인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말을 빌리면, 돈 받고 술 먹는 공짜 여행 만큼 좋은 것도 없는가 보다. 기차 여행에서도 술은 빠지지 않는다. 식당칸과 주류 판매코너는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사항들이다. 독일 현지에서 자신의 작품 번역을 맡은 번역가와 영화감독과 만나서 교류를 쌓기도 한다. 물론 코가 삐뚤어지게 마시면서 말이다. 어딜 가든 술은 넉넉하게 준비하는 치밀함도 보인다. 다시 생각해 봐도 웃기지 않은가. 작가가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일에만 이렇게 집중을 하다니. , 그리고 보니 어디선가는 경마장에도 갔었던가. 널리 알려진 대로 부카우스키는 경마 마니아이기도 하다.

 

술 마시고 싸운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부카우스키가 불패의 주취전사라는 말은 아니다. 호기롭게 싸움판에 뛰어 들었지만 대개는 상대방에게 졌다고 한다. 그런데 져도 크게 불만은 없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실력이 되지 않음을 일찌감치 깨달았다고나 할까.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니 빠른 인정이 속 편할 일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신나게 프랑스와 독일을 주유한 주정뱅이 작가는 고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언어와 다른 문화 때문에 골치 앓을 필요가 없는 자기네 나라가 역시 최고였다는 말과 함께. 아니 그런데 내 나라를 떠나면 그런 사소한(?) 불편함 정도는 감수해야 하는 게 아닌가. 마치 영어가 만국 공통어라도 되는 듯, 타국에 가서 그 나라 말은 모르겠으니 영어만 쓰겠다는 건 횡포가 아닌가.

 

찰스 부카우스키의 유럽 여행에는 사진작가가 동행해서 좋은 사진들을 많이 남겨 주었다. 물론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도 있겠지. 부카우스키는 사진을 많이 찍어야 그나마 괜찮은 사진을 남길 수 있다는 아주 평범한 진실을 그 시절에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시절에는 디카가 없어서 무조건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말이지. 그러니 사진 찍는 데도 비용이 제법 들었으리라. 그 또한 이렇게 책을 만들기 위한 일환이라고 한다면, 제작비용으로 퉁칠 수 있겠지. 유럽에서 부카우스키가 퍼마신 술값과 마찬가지로.

 

찰스 부카우스키,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그런 뻔뻔한 작가다.

 

[뱀다리] 부카우스키의 시집도 있던데, 다음에는 그의 시집을 좀 빌려서 읽어봐야겠다.

내가 이 작가의 시를 이해할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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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3-03-21 12: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댓글을 쓰다가 너무 길어져서 삭제하고 말았습니다.
알코올 의존자들은 절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부코스키의 글 속에는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냥 휙휙 쓰는 거 같은 문맥 속에 절망이 가득해서 읽는 내내 힘이 들더라고요. 저도 부코스키 만큼은 아니지만 알코올 의존자입니다. 의존자들의 가장 큰 소망은 술을 끊는 일이라는 건 보통 분들이 모르시더군요.
알코올 의존자들은 정상인보다 적어도 80%는 더 불행합니다. 거꾸로 말해서, 술을 안 마시는 분들은 알코올 의존자들보다 적어도 80%는 행복하답니다. 자신들이 행복한지 몰라서 그렇지요. 알코올 의존은 또한 80% 유전입니다. 혹시 의존자께서 이 댓글을 보시면 적어도 후세 인류를 위해 아이를 낳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전 지독하게 알코올 알러지 있는 배우자를 만나 두 아이 다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는 행운을 얻어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coolcat329 2023-03-21 12:56   좋아요 2 | URL
아! 골드문트님 술을 마냥 즐기시는 줄 알았는데 끊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하시군요. ㅠㅠ

레삭매냐 2023-03-21 13:23   좋아요 1 | URL
부카우스키의 절망감이 느껴진다는
말씀에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운이 좋아서 작가가 되었을 뿐,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도 없이
글들을 생산해낸 게 아닌가 싶습
니다. 한달 월세와 마실 술을 살
수만 있다면...

저도 술을 좋아하는데 어쩌면
알콜의존자일 지도 모르겠네요.

coolcat329 2023-03-21 12: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의 의미가 궁금하네요. 부코스키로 알고 있었는데 부카우스키가 원래 발음에 가까운가 보네요.
이 작가의 못말리는 행동들을 보니 더 읽고 싶어집니다.

레삭매냐 2023-03-21 13:28   좋아요 1 | URL
국내 출판사들에서 작가의 이름
을 마음대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찰스 부코스키 => 찰스 부카우스키

https://www.youtube.com/watch?v=uWSg1z0hzjs

2:18 자신의 이름을 명확하게 발음하는 장면
이 나옵니다.

존 버거 => 존 버저

안드레 애치먼 => 안드레 애시먼

https://www.youtube.com/watch?v=L4Lkvey1qZA

아쉽게도 이 책이 절판되어 헌책방이나
도서관을 이용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stella.K 2023-03-21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좀 뻔뻔해야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양심 바르고 전지적 싯점만 강조하면
재미는 없을 것 같아요.
이 사람 작품은 한 번 읽어 본다고 해 놓고 못 읽고 있네요.ㅠ

레삭매냐 2023-03-21 18:56   좋아요 2 | URL
작가라 하면 왠지 점잖빼는
먹물 생각이 들어서일까요...

적어도 우리의 부카우스키
선생님은 그러지 않고 직설
적이고 솔직해서 좋은 것
같습니다.

전 사두고 읽지 못한 부카
우스키 책들이 제법 되네요.
읽은 책들도 다시 한 번 읽
고 싶고요.
 
그때 프랑스는 그랬다
파비앙 뉘리 지음, 실뱅 발레 그림,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에디시옹 장물랭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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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내내 미래로 향하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번에 만난 파비앙 뉘리의 <그때 프랑스는 그랬다>를 읽으면서 내내 든 생각이었다.

 

그래픽 노블은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시절, 나치부역자였던 조제프 조아노비치(1905-1965)라는 문제적 인간에 대한 보고서다. 1905년 당시 러시아령이었던 루마니아의 키시너우에서 출생한 조아노비치는 당시 러시아를 휩쓸던 있던 포그롬에 의해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 처지의 에바와 만나 결혼식을 올린다. 조아노비치 부부의 다음 무대는 프랑스였다.

 

1920년대 세계대전이 끝난 뒤의 프랑스는 유대인들의 피난지였던 모양이다. 에바의 삼촌네 고물상에서 일하게 되는 금속노동자 출신의 조제프 조아노비치는 특출난 사업수완과 횡령을 바탕으로 해서 결국 삼촌의 고물상을 인수하게 된다. 드디어 문맹자인 조아노비치가 사업가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조아노비치의 사업이 승승장구하면서 비서인 뤼시 슈미트와 사업 파트너를 넘어선 내연 관계를 맺게 된다. 이는 훗날 부인과 두 딸들과 파국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조아노비치에게 그야말로 떼돈을 벌게 해준 계기가 발생하게 되는데, 프랑스는 동방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헌신짝 걷어차듯 내팽개친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써 마지노선을 건설할 계획을 세운다. 이에 막대한 금속 물자가 필요하게 되면서 조아노비치는 그야말로 돈방석에 올라서게 된다.

 

철저한 사업가였던 조아노비치는 돈 앞에서는 조국도 없었다. 나치 출신의 정보요원이자 사업가였던 코드명 오토와 접촉하면서 훗날 독일 점령시기에 다시 한 번 막대한 재물을 끌어 모으게 될 계기도 마련하게 된다.

 

그래픽노블은 현재와 대과거 그리고 과거를 부지런히 넘나들면서 현재 레지스탕스 훈장까지 받은 조제프 조아노비치의 불안한 삶의 그림자를 들춰낸다. 그는 부인할 수 없는 나치 부역자였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을 당시, 그는 유대인임에도 국외로 탈출하는 대신 프랑스에 남아 독일군과 계속해서 거래를 유지했다. 한창 전쟁물자가 필요하던 독일군에게 국적을 가리지 않는 사업가 조아노비치야말로 가장 유용한 파트너였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아내 에바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사업을 핑계로 뤼시 슈미트와 아예 살림을 내고 가족을 찾는 횟수는 반대급부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말로는 가족을 위한다고 하지만, 자본가의 변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작자는 독일이 유럽을 모두 점령할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 이미 나치의 몰락을 예견하고 이번에는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지원에 나선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박쥐같은 캐릭터라고 해야 할까.

 

유대인을 검거하기 위한 신체검사도 통과하고, 심지어 게슈타포 증명서까지 발급받아 종횡무진 이중첩자로 활동한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사용해서, 유대인들을 구하기도 하고 가짜 증명서를 발급받아 레지스탕스 활동도 지원한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해 처형 위기에 처한 레지스탕스와 경찰들을 구하기도 한다. 이는 나중에 그가 레지스탕스로 인정 받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결국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곧 이어 파리가 해방되면서 나치부역자에 대한 응징과 처벌이 뒤따랐다. 그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정부에 의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인정받아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의 어두운 면이 모두 가려질 수는 없었다. 결국 그를 처벌해야 한다며 끈질긴 추격을 벌인 인사들 덕분(?)에 그는 체포되어 재산몰수형과 5년 징역형을 살게 된다. 노련한 기회주의자답게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 조아노비치는 글을 배웠던가.

 

자유의 몸이 된 뒤, 다시 한 번 사업의 재기를 노렸지만 그의 말년은 전성기와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했다. 유대인이었기에 이스라엘로 망명을 시도하지만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입국 당시 조아노비치는 가짜 여권을 사용했는데, 이를 알게 된 이스라엘 당국은 그의 체류 자격을 연장해 주지 않았고 결국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결국 레지스탕스 영웅과 민족반역자 사이를 오가던 조제프 조아노비치는 가난하게 살다가 1965년 클리시에서 사망했다.

 

내 관점을 볼 때, 문제적 인간 조제프 조아노비치는 철저한 기회주의자였다. 자신에게 돈벌이를 할 기회가 왔을 때, 상대를 가리지 않고 거래에 나섰다. 결국 전후 재판에서 그의 발목을 잡은 건 그의 영웅적레지스탕스 활동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에 경제적 협력을 했다는 지울 수 없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위험한 레지스탕스 활동에 투자한 건, 반은 성공했고 절반은 실패한 셈이다. 아니 그나마 정의를 추구하고자 했던 프랑스의 양심적인 인사들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나치부역자 가운데 이제 거의 생존한 사람이 없겠지만, 여전히 역사 바로 세우기에 진심인 프랑스에서 부역자들이 처벌받게 되었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생존자들이 강제징용을 당했다고 증언을 해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어느 나라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2007년 잘츠부르크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일본 사람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를 시작으로 해서 평화여행을 한다는 말을 듣고 기함했던 기억이 난다. 자신들이 가해자(심지어 전쟁도 먼저 시작했다)면서 전쟁 막판에 원폭 맞았다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모습에 할 말이 없었다. 평화 타령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 그리고 식민지배에 대해 통렬한 사과와 반성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의 부재 탓으로 돌려야 할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이 어찌나 와 닿았는지 모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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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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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이언 매큐언이 6번째로 발표한 소설이다. 그 다음에 나온 <암스테르담><속죄>로 매큐언은 정상급 작가로 발돋움하게 된다. 지금까지도 매큐언 작가는 계속해서 집필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전성기 때와는 다른 느낌이다. 예전에 <이런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다가 이번에 <견딜 수 없는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돌아왔다.

 

소설 <견딜 수 없는 사랑>에서 다루는 사건의 발단은 헬륨 기구 풍선을 타고 날아가던 소년을 구하기 위해 풍선에 5명의 매달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47세의 주인공 조 로즈는 과학 저술가이자 저널리스트로 키츠 전문가인 애인 클래리사 멜런과 피크닉을 즐기던 중이었다. 5명의 힘으로 헬륨 기구 풍선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고, 차례로 손을 놓고 지상으로 떨어졌다. 문제는 그 중의 한 명인 존 로건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있다가 추락사했다는 점이다.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주인공 조는 훗날 현장에서 만난 제드 패리라는 남자가 자신의 삶을 얼마큼 망가뜨리게 될지 몰랐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언 매큐언 작가가 구사하는 특기 중의 하나가 등장한다. 소설 초반부에 아주 강력한 사건으로 독자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리고 복잡하게 엉킨 실타래를 풀어 나가듯이 주인공들 삶의 이모저모를 하나씩 소개하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사회부적응자로서의 삶을 영위하던 청년 제드 패리는 역사 학도로 영어 교사로 살던 중, 막대한 유산 상속을 받으면서 소위 도끼병으로 알려진 드 클레랑보 신드롬의 발화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사건 현장에서 처음으로 만난 조 로즈와 단박에 사랑에 빠지게 된 패리의 조에 대한 본격적인 스토킹이 막을 올린다.

 

당연한 수순으로 클래리사와의 관계는 삐걱대기 시작한다. 도끼병 환자 제드 패리는 조의 주변에서 신경을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만 절대 공권력의 개입을 불러올 만한 도를 넘어선 행동은 하지 않는다. 이어지는 편지 및 전화 공세, 조가 친 아파트 커튼이 자신에게 보내는 어떤 메시지를 담은 신호라고 착각한 남자의 편집증에 조의 신경은 폭발하기 직전이다. 이언 매큐언 작가는 드 클레랑보 환자의 개입으로 파괴되어 가는 조와 클래리사의 관계에도 소설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패리가 조의 삶에 깊숙하게 개입하면 할수록, 조와 클래리사의 관계도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초반의 지루한 전개에 비해 패리가 본격적인 액션을 개시하면서 소설의 재미는 가속이 붙기 시작한다. 패리의 스토킹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클래리사의 반응을 조는 이해하지 못한다. 사건 당일 날, 조에게 걸려온 전화에 대해 클래리사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이해를 구하면서, 함께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봤더라면 둘의 파국을 막을 수 있었을까. 막무가내로 조의 삶에 개입하는 패리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아마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무신론자 조가 예전에 발표한 모든 글들을 섭렵하면서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추려내는 광적인 행동 그리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게 그를 인도하겠다는(나중에는 어처구니 없는 방식을 동원하게 되지만) 제드 패리의 맹목적 신념은 공포 그 자체였다.

 

문학적 대가의 경지에 오른 이언 매큐언 작가는 기본 삼각구도라는 갈등에, 한 가지 더 기가 막힌 요소를 첨가한다. 바로 기구 사건으로 추락사한 존 로건이 당시 현장에서 내연녀와 외도 중이었다는 미망인 진 로건의 추론이다. 사고 후, 자신에게 양도된 고인의 차량에는 여자 스카프와 피크닉에 먹을 샌드위치 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의사 존 로건이 위험에 처한 소년을 구하겠다는 단순한 박애주의의 발로가 아니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내연녀에게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려다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는 추정은 확실히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설정이었다. 그렇지 드라마가 되려면 이 정도는 써야겠지 싶었다. 물론 결론에서는 처음의 추정과는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지만 말이다.

 

패리의 보이지 않는 스토킹에 진절머리가 난 조는 경찰서를 찾아가 민원도 넣고 다양한 방식을 동원해 보지만 모욕이나 직접적인 협박에 대한 물증이 없는 이상 스토커를 처벌할 수 없다는 대답만이 돌아온다. 사랑의 주도권을 쥔 조가 자신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제드 패리는 살인청부업자를 동원해서 조를 정말 하나님에게 인도하려는 무리수를 둔다. , 이쯤이면 막 가자는 거지요. 클래리사의 생일을 맞아 대부 조슬린 교수님을 모신 자리는 괴한들의 총격으로 엉망이 되어 버린다. 생명에 위협을 느낀 조는 히피 박애주의자 마약거래상 조니 B. 웰에게 은밀하게 부탁해서 총기를 마련하는 계획을 세운다. 그들이 총기를 사러 간 곳에서 벌어지는 한바탕 소동(전혀 예상못했던 상황이라 너무 재밌었다)을 뒤로 하고, 드디어 직접 행동에 나선 패리의 인질이 된 클래리사를 구하기 위해 조는 차를 돌려 런던으로 돌아온다.

 

소설의 후반부로 갈수록 초반에 비해 훨씬 더 재밌어지고, 제드 패리의 광기가 빛을 발할수록 소설은 긴장감을 더해간다. 소설 <견딜 수 없는 사랑>은 주로 조 로즈의 시선에서 전개가 되지만, 제드 패리의 감정을 담뿍 담은 그의 편지, 클래리사의 결별 편지 등의 다채로운 방식으로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이 걸작 역시 당연히 영화로도 이미 제작되었다. 주인공 조 로즈 역은 007 대니얼 크레익이 맡았는데, 원래 소설 속 주인공의 나이 보다 열 살이나 어린 배우가 맡다니, 좀 그랬다. 멋지면서도 지적인 역할 그리고 나중에 자신과 사랑하는 연인을 지키기 위해 총까지 들어야 하는 역할 변신까지 그가 어떻게 해냈을지 궁금하다. 시간 여유가 되면 영화도 한 번 봐야겠다. 2004년에 발표됐고, 우리나라에서는 <사랑을 견뎌내기>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결말에 붙임 1,2로 학술 리포트 형식으로 망상적 사랑으로 확장된 제드 패리의 드 클레랑보 신드롬에 임상분석 그리고 패리의 마지막 편지로 대가는 소설 <견딜 수 없는 사랑>을 마무리짓는다. 그 전에 진 로건이 죽은 남편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읽고 나서 곰곰 생각해 보니 내가 읽은 이언 매큐언 작품 가운데 베스트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연세가 드셔서 필력이 예전 같지 않은 건 아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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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3-03-15 14: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고 싶어서 띄엄띄엄 읽었습니다. 베스트 중 하나라 하시니 기대되네요 ^^

레삭매냐 2023-03-15 17:50   좋아요 0 | URL
저는 영화가 보고 싶네요.

작가가 연세가 드시면서 필력
이 떨어지는 느낌이어서 아쉽
습니다.

stella.K 2023-03-15 16: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이의 글은 그게 특징인 것 같아요. 처음엔 지루하게 섦명이 이어지다 어느 순간부터 가독성이 붙는거. 예전에 두권짜리 중 1권 읽다 포기했는데 다시 도전하면 읽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요.ㅠ

레삭매냐 2023-03-15 17:57   좋아요 1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

매큐언 작가는 뭐랄까 처음부터
빵~터뜨리는 그런 스탈이 아니
라 슬로우 스타터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책이 문동에서 나오지
않고 복복서가라는 곳에서 나왔
더군요. 대신 가격은 사악하게
52% 정도 올리구요...


자목련 2023-03-16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사랑>의 개정판이군요. <첫사랑, 마지막 의식>은 한겨레에서 개정판이 나와서 문동에서는 빠지는 걸까요. 생뚱맞은 궁금증. 저는 단편집이 참 좋았던 기억이...

레삭매냐 2023-03-17 09:41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 개정판이 나왔네요.

번역은 미세하게 다른 느낌입
니다. 아주 초큼요.

매큐언 선생은 이제 소설집은
내시지 않는가 보더라구요.

표지는 미디어 2.0 시절이 더
좋지 않나 싶습니다.

물감 2023-03-17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책을 한 권도 안읽었는데, 음 슬로우 스타터라고요...
제가 예열이 긴 작품을 정말 못 참는데 매냐님 리뷰보고 도전은 해보렵니다 ㅋㅋ

레삭매냐 2023-03-17 09:42   좋아요 1 | URL
저도 처음에는 좀 적응이
되지 않았었는데 또 계속해서
읽다 보니 갠춘해졌습니다...

물감님의 도전을 응원하는
바입니다.

북노마드 2023-04-10 19: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복복서가.. 제가 알기론 소설가 김영하 님과 부인(?),아니면 부인이 차린 출판사로 알고 있습니다.아마 판권을 다시 해서 출간힌듯요.

레삭매냐 2023-04-10 19:16   좋아요 0 | URL
오오 그렇군요.

어쩐지 문O에서 나오던 작가
의 책들이 복복서가에서 나온
다 싶어서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네요.
 
북투어
앤디 왓슨 지음, 김모 옮김 / 이숲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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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도서관에 가서 빌려온 그래픽노블을 읽었다. 요즘 계속해서 집중력이 떨어진다. 책읽기도 아울러 잘 진행되지 않고 있다. 시작한 책들은 부지런히 마저 읽어야 하는데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럴 땐 역시 그래픽노블이다.

 

앤디 왓슨이라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북투어>. 왠지 유럽이 어느 작은 도시들을 연상케 하는 곳들을 G. H. 프렛웰은 북투어라며 돌아다닌다. 그의 그림에 나오는 도시에서는 16년 전에 방문했던 잘츠부르크의 아기자기한 돌길이 생각났다.

 

그는 최근에 <사라진 K>라는 책을 내고 북투어 중이다. 책 외판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팔려 있다. 그리고 첫 북투어에서 만난 레베카 하핀이라는 이름의 서점 직원이 실종되면서 미스터 프렛웻은 경찰에게 심문 비스무레한 것도 당하게 된다.

 

, 그전에 미스터 프렛웻은 자신의 책이 잔뜩 들어 있는 가방을 털렸던가. 뭐랄까 이 그래픽노블에서 나는 판타지를 했는데, 스릴러로 분위기가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미스터 프렛웰이 계속해서 북투어를 할수록 사건사고가 잇달아 발생한다. 연쇄 가방살인마가 등장해서 사람들을 죽인다는 거다. 레케바 하핀 양도 결국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당연히 하핀 양이 생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미스터 프렛웰이 용의선상에 오른다. 하지만 그는 완벽한 기억력으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 어쩌면 선량해 보이는 미스터 프렛웰이 북투어를 가장한 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살인을 저지르는 게 아닐까라는 그런 상상 속에 빠져본다. 왜 그런 가정이 들어맞을 때가 많으니 말이다.

 

아무리 봐도 미스터 프렛웻은 호구로 보인다. 아무도 찾지 않는 그런 요상한 서점을 방문해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책에 사인을 하겠다고 하질 않나, 심지어 자신의 책을 사겠다는 제안까지 한다. 그리고 출판사 직원에게 접대를 받아야 하는 마당에 자비로 그의 밥값까지 내준다. 출판사가 잡아준 숙소도 엉망진창이고. 왜 그의 삶을 그렇게 자꾸만 꼬여 가는 걸까?

 

그런데 또 막상 생각해 보면, 앤디 왓슨이라는 작가의 보통 작가들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이지 않다는 말을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전업 작가가 되어 책을 내면, 대박이 나고 잘 먹고 잘 살 거라는 희망을 품고 산다.

 

그런데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 지난 달궁 독서모임에서는 정통파를 자처하는 작가 양반이 웹소설 시장에 뛰어 들었다가(순전히 돈을 벌기 위해!) 처참하게 실패하고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니 자신의 신념을 꺾고 웹소설이라는 이세계(異世界)에 침투했는데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퇴출을 되었다고.

 

어쨌든 미스터 프렛웰이 본격적으로 가방 연쇄살인마로 지목당하고 추격당하다가 결국 경찰에게 잡혀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된다. 감옥 밖의 세상에서는 무명의 작가였지만, 가방 연쇄살인마로 교수형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의 인기가 급등한다. 책이라고느 전혀 읽을 것 같지 않은 간수조차 미스터 프렛웻의 책에 사인을 받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던가 말이다.

 

이 또한 왜곡한 출판 시장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하긴 나도 어떤 책이 절판되었다고 하면 평소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가 사들이겠다고 헌책사냥에 나서지 않았던가.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거라고 앤디 왓슨 작가는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결말까지 아주 화끈하게 스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그러면 너무 작가에게 예의가 어긋나는 것 같아 이 정도로 마무리해야지 싶다. 화려한 그림체는 아니지만, 단순하면서도 선량해 보이는 이미지의 미스터 프렛웰을 창조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달랑 점 하나로 주인공의 눈을 표현해 내다니, 놀랍지 않은가. 세상물정 모르는 선비 같은 미스터 프렛웰이 알고 보니 모든 것을 준비하고 짠 사악한 연쇄살인마가 될 수 있다는 가정은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런 종류의 일탈이나 엉뚱한 상상이 책 읽는 재미를 더해주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을 아주 잠깐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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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3-03-09 1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영국 작가인데 제목이 프랑스어 같네요. 프랑스어로 썼을까요?
별 세 개 주셨음에도 왠지 끌리는데요.

레삭매냐 2023-03-09 16:00   좋아요 0 | URL
재밌어서 금방 읽었답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부분들
도 많았구요...

별은 어쩌면 제가 작가가
구사하는 심오한 부분까지
커버하지 못해서 그랬을 수
도요.

그레이스 2023-03-09 14: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투어!
집중력 떨어질 때 그래픽노블!
그것도 못해요, ㅠ
집중력 떨어져도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있어서....^^
도서관에서 찾아봐야겠어요!
북투어

레삭매냐 2023-03-09 16:42   좋아요 1 | URL
대단하십니다 -

저는 만날 시작하고 못 다
읽고의 무한반복에 빠져
있답니다.

오늘도 아직 나오지도 않
은 버나드 맬러무드의 <점
원>에 빠져서 이런저런 정
보들을 끌어 모으고 있답
니다. 참 세상은 넓은 읽을
책들은 참고 넘치나 봅니다.

페넬로페 2023-03-10 16: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읽기가 잘 진행되지 않을 때,
그래픽 노블^^
저도 그 방법을 써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23-03-11 11:43   좋아요 1 | URL
무언가 꾸준히 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책읽기는 더더욱 그렇구요.

그래픽노블, 치트키로는 아주
그만이랍니다.
 
앵무새 죽이기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프레드 포드햄 지음, 이상원 옮김, 하퍼 리 원작 / 미메시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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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는 죽이면 안돼. 그런데 어치는 죽여도 돼.

 

공기총을 삼촌에서 선물 받은 아들에게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가 한 말이다. 어떤 행동은 허용되고, 또 어떤 행동은 하면 안되는 걸까. 프레드 포드햄이 그린 그래픽 노블로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었다는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를 다시 읽었다.

 

8세 소녀 스카웃은 어머니를 여의고 편부 애티커스 휘하에서 오빠 젬(제러미)과 함께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자신에게 청혼한 딜 해리스와 친구가 된다. 집 근처에는 도시괴담에 나올 법한 으스스한 소문의 주인공 부 래들리가 산다. 그의 집에 가는 건, 겁많은 꼬맹이들에게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아마 책으로는 많은 내용이 다루어졌겠지만, 그래픽노블에서는 많은 디테일들이 빠지고 대신 큰 줄거리로 넘어간다. 소설의 중심에는 백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톰 로빈슨의 재판이 위치한다. 1935년 딥 사우스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앨라배마 메이콤에서 그런 가공할 만한 범죄를 저지른 깜둥이에게는 오로지 신의 처벌만이 존재할 뿐이다. 아니 사법적 처단에 앞서, 소수의 극렬 인종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톰 로빈슨에게 복수하기를 원한다.

 

당시 미국은 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경제적 위기에서 벗어나는 중이었다. 모든 것이 부족한 결핍의 시대였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처럼 그런 경제 위기 덕분에 사람들의 마음 역시 피폐해져 있지 않았을까.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타인의 억울한 사연에 귀를 기울일 필요 없이 없었으리라. 게다가 흑인은 다수 백인들과 다른 인종이라는 사회적 편견으로 무장하고 있다면 더더욱 그랬으리라. 아마 얼마 전까지도 큐클랙스클랜(KKK)이 그곳에서 그리고 그후에도 준동하지 않았을까.

 

군내에서 최고의 명사수라는 타이틀을 지닌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는 무력에 호소하지 않는다. 마치 무림의 고수가 자신의 실력을 감추고, 강호의 조무래기들을 상대하듯 애티커스는 자신의 실력이 꼭 필요하지 않다면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공익을 위해 광견병에 걸린 개를 상대할 때, 한 방으로 개를 사살하는데 성공한다. 그제서야 자기 아버지의 실력을 인정하게 된 스카웃과 젬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아버지 애티커스와 달리 핀치 가문의 전통과 관습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알렉산드라 고모는 다수 메이콤 시민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세상을 뜬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부재를 채우는 인물로 아이들을 돌보고 음식을 만들어주는 흑인가정부 캘퍼니아의 존재에 대해서도 눈여겨 볼 만하다. 그리고 캘퍼니아는 스카웃과 젬을 흑인들이 다니는 교회로 인도하기도 한다. 백인들이 믿는 신과 흑인들이 믿는 신은 다른가? 하나의 존재에 대한 다른 가치는 왜 발생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쨌든 정의의 사도 애티커스 핀치는 자신이 판단했을 때, 무고하다고 생각한 톰 로빈슨 변호에 적극 나선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를 깜둥이 애인이라고 부르는 아이들에 맞서 스카웃-젬 남매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멸시에 가까운 조롱에 폭력으로 맞서지만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아버지 애티커스도 애들과 싸우지 말라고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아이들이 말을 듣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 그래픽노블에서 최고의 장면은 스카웃이 톰 로빈슨에게 린치를 가하기 위해 몰려온 백인 무리를 스카웃이 제압하는 컷이 아닐까 싶다. 무리가 흥분한 폭도로 변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꼬마 소녀는 그들을 설득해서 현장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이걸 감성에 대한 이성의 승리라고 생각해야 할까. 백인들이 지배하는 사회 질서에 균열을 낸 톰 로빈슨에 대한 사적 응징을 막아내는 힘이 결국 이성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에는 공판 과정이 전개된다. 톰 로빈슨의 국선 변호를 맡은 애티커스는 누구나 납득할 만한 논리와 실력으로 사실을 밝혀 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메이엘라 유얼은 백인들로만 구성된 배심원단에 실체적 진실보다 역시나 감정을 자극하고 호소한다. 꼬마 소녀가 봐도 명백한 진실은 결국 톰 로빈슨에게 유죄 평결이 내려지면서 뒤집혀진다. 가장 선진적이고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미국에서도 차별과 편견을 넘을 수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저자 하퍼 리는 고발한다.

 

결국 톰 로빈슨은 감옥에서 탈주를 시도하다가 자그마치 17발이나 되는 총탄을 맞고 죽는다. 그는 어쩌면 애티커스가 전력을 다해 항소심에 임해도 재판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마지막 도박에 나섰던 건 아니었을까. 백인들은 톰 로빈슨이 전형적인 흑인 범죄자의 길을 걸었다고 비아냥거렸다.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 좌절하게 되자 탈옥을 시도했고 그 결과 총에 맞아 죽었노라고 말이다.

 

어쩌면 소설은 이 지점에서 마무리되어야 했던 게 아닐까. 핼로윈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던 스카웃과 젬 남매에게 밥 유얼이 벌이 납치소동극이 소설의 전개상 꼭 필요했나 싶다.

 

미국 사람들이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책이라고 하지만, 인종문제는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풀 수 없는 난제 가운데 하나다. 이미 구조화된 사회 모순을 해결하지 않는 한, 차별과 편견이 사라지길 바라는 건 난망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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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3-09 14: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그 뒷부분이 더 의미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종문제를 넘어서 과연 정의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반전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레삭매냐 2023-03-09 15:59   좋아요 1 | URL
그렇죠. 결국 법을 집행하고
판단하는 것도 인간인데 그
인간들이 편견과 고정관념
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는 점이 참 그랬습니다.

모두가 동의하는 정의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 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