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프랑스는 그랬다
파비앙 뉘리 지음, 실뱅 발레 그림,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에디시옹 장물랭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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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내내 미래로 향하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번에 만난 파비앙 뉘리의 <그때 프랑스는 그랬다>를 읽으면서 내내 든 생각이었다.

 

그래픽 노블은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한 시절, 나치부역자였던 조제프 조아노비치(1905-1965)라는 문제적 인간에 대한 보고서다. 1905년 당시 러시아령이었던 루마니아의 키시너우에서 출생한 조아노비치는 당시 러시아를 휩쓸던 있던 포그롬에 의해 양친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 처지의 에바와 만나 결혼식을 올린다. 조아노비치 부부의 다음 무대는 프랑스였다.

 

1920년대 세계대전이 끝난 뒤의 프랑스는 유대인들의 피난지였던 모양이다. 에바의 삼촌네 고물상에서 일하게 되는 금속노동자 출신의 조제프 조아노비치는 특출난 사업수완과 횡령을 바탕으로 해서 결국 삼촌의 고물상을 인수하게 된다. 드디어 문맹자인 조아노비치가 사업가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조아노비치의 사업이 승승장구하면서 비서인 뤼시 슈미트와 사업 파트너를 넘어선 내연 관계를 맺게 된다. 이는 훗날 부인과 두 딸들과 파국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조아노비치에게 그야말로 떼돈을 벌게 해준 계기가 발생하게 되는데, 프랑스는 동방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헌신짝 걷어차듯 내팽개친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써 마지노선을 건설할 계획을 세운다. 이에 막대한 금속 물자가 필요하게 되면서 조아노비치는 그야말로 돈방석에 올라서게 된다.

 

철저한 사업가였던 조아노비치는 돈 앞에서는 조국도 없었다. 나치 출신의 정보요원이자 사업가였던 코드명 오토와 접촉하면서 훗날 독일 점령시기에 다시 한 번 막대한 재물을 끌어 모으게 될 계기도 마련하게 된다.

 

그래픽노블은 현재와 대과거 그리고 과거를 부지런히 넘나들면서 현재 레지스탕스 훈장까지 받은 조제프 조아노비치의 불안한 삶의 그림자를 들춰낸다. 그는 부인할 수 없는 나치 부역자였다.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을 당시, 그는 유대인임에도 국외로 탈출하는 대신 프랑스에 남아 독일군과 계속해서 거래를 유지했다. 한창 전쟁물자가 필요하던 독일군에게 국적을 가리지 않는 사업가 조아노비치야말로 가장 유용한 파트너였다. 그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아내 에바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사업을 핑계로 뤼시 슈미트와 아예 살림을 내고 가족을 찾는 횟수는 반대급부로 줄어들기 시작한다. 말로는 가족을 위한다고 하지만, 자본가의 변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 작자는 독일이 유럽을 모두 점령할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 이미 나치의 몰락을 예견하고 이번에는 나치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지원에 나선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박쥐같은 캐릭터라고 해야 할까.

 

유대인을 검거하기 위한 신체검사도 통과하고, 심지어 게슈타포 증명서까지 발급받아 종횡무진 이중첩자로 활동한다. 자신이 가진 권력을 사용해서, 유대인들을 구하기도 하고 가짜 증명서를 발급받아 레지스탕스 활동도 지원한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해 처형 위기에 처한 레지스탕스와 경찰들을 구하기도 한다. 이는 나중에 그가 레지스탕스로 인정 받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결국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고 곧 이어 파리가 해방되면서 나치부역자에 대한 응징과 처벌이 뒤따랐다. 그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정부에 의해 레지스탕스 활동을 인정받아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의 어두운 면이 모두 가려질 수는 없었다. 결국 그를 처벌해야 한다며 끈질긴 추격을 벌인 인사들 덕분(?)에 그는 체포되어 재산몰수형과 5년 징역형을 살게 된다. 노련한 기회주의자답게 수형생활을 하는 동안 조아노비치는 글을 배웠던가.

 

자유의 몸이 된 뒤, 다시 한 번 사업의 재기를 노렸지만 그의 말년은 전성기와 비교하면 너무나 초라했다. 유대인이었기에 이스라엘로 망명을 시도하지만 그조차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입국 당시 조아노비치는 가짜 여권을 사용했는데, 이를 알게 된 이스라엘 당국은 그의 체류 자격을 연장해 주지 않았고 결국 프랑스로 추방되었다. 결국 레지스탕스 영웅과 민족반역자 사이를 오가던 조제프 조아노비치는 가난하게 살다가 1965년 클리시에서 사망했다.

 

내 관점을 볼 때, 문제적 인간 조제프 조아노비치는 철저한 기회주의자였다. 자신에게 돈벌이를 할 기회가 왔을 때, 상대를 가리지 않고 거래에 나섰다. 결국 전후 재판에서 그의 발목을 잡은 건 그의 영웅적레지스탕스 활동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에 경제적 협력을 했다는 지울 수 없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위험한 레지스탕스 활동에 투자한 건, 반은 성공했고 절반은 실패한 셈이다. 아니 그나마 정의를 추구하고자 했던 프랑스의 양심적인 인사들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나치부역자 가운데 이제 거의 생존한 사람이 없겠지만, 여전히 역사 바로 세우기에 진심인 프랑스에서 부역자들이 처벌받게 되었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생존자들이 강제징용을 당했다고 증언을 해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는 어느 나라하고는 차원이 다르다. 2007년 잘츠부르크의 어느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일본 사람이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를 시작으로 해서 평화여행을 한다는 말을 듣고 기함했던 기억이 난다. 자신들이 가해자(심지어 전쟁도 먼저 시작했다)면서 전쟁 막판에 원폭 맞았다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모습에 할 말이 없었다. 평화 타령하기에 앞서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 그리고 식민지배에 대해 통렬한 사과와 반성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제대로 된 역사 교육의 부재 탓으로 돌려야 할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이 어찌나 와 닿았는지 모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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