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두들 등반기
W. E. 보우먼 지음, 김훈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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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도서관 방문은 이제 일상의 패턴이 되었다. 빌린 책을 반납하고 또 빌릴 책들을 둘러 본다. 참 지난 주말에는 아예 도서관 행사 때문에 주차가 안된다고 해서 멀리 차를 대고 도서관으로 가야 했다. 뭐 그 정도 쯤이야.

 

W.E. 보우먼의 <럼두들 등반기>를 우연히 서가에서 만났다. 내가 예전에 이 책을 재밌게 읽었더랬지. 이번에도 재밌는 책이 읽고 싶었다. 골치가 아파서 말이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읽을 만한 책을 나는 원한 모양이다. 그러기에 <럼두들 등반기>는 제격이었다. 1956년에 나온 책이라고 하니 67년의 시간여행을 한 셈이다.

 

6명의 영국 사내들이 12,000미터 그러니까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가상의 산 럼두들에 등반하는 과정을 그린 산악 코믹소설이다. 등반대장은 바인더라는 별명을 가진 이로 나레이터 역할에 충실하다.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각 분야의 전문가라고 하는데, 전혀 전문가적인 소양을 지니지 않고 있다는 점부터 이 소설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신나는 예고탄을 쏘아 올린다. 전문 길라잡이라는 정글은 출발지인 영국에서부터 문제를 일으킨다. 럼두들 등반대와 홀로 떨어져서 이동한다. 아니 국내에서 이 모양인데, 아무도 오르지 않은 전인미답의 럼두들에서 그의 실력을 믿어도 되는 걸까?

 

절벽타기의 명수라는 벌리는 캠프에서부터 나가 자빠진다. 의사 선생인 프로운도 비실대기는 마찬가지다. 과학자 위시도 다른 멤버와 다를 바가 없으며, 영상전문가 셧은 기껏 찍은 필름들을 햇빛에 노출시켜 영상들을 못쓰게 만드는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엉터리 등반대를 데리고 럼두들 등반에 나선 바인더야말로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사실 이런 엉터리 선수들이 구성되어야 산악 코믹소설이 이루어지는 게 아닌가. 자못 진지하면서도 근엄한 말투로 등반대원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바인더야말로 개인적으로 존경을 표하고 싶은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참 럼두들이 위치한 요기스탄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발탁된 통역사 콘스턴트를 빼놓을 뻔 했다. 의사소통은커녕 현지인들을 빡치게 만드는데 탁월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이 자리를 빌어 언급하고 싶다.

 

럼두들로 출발하기 전부터 럼두들 일행은 난관에 부딪힌다. 막대한 장비와 보급품들을 현지로 나르기 위해 포터들이 필요한데, 실수로 그만 3천명(이 숫자도 어마어마하지 않은가!)이 아닌 자그마치 삼만명이나 되는 이들이 집결한 것이다. 이 정도는 애교에 불과하다. 럼두들에 오르는 동안, 그들이 겪게 되는 수난은 상상을 초월한다.

 

등반대원들이 차례로 크레바스에 빠지게 되고, 한 명씩 차례로 동료들을 구하러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느닷없이 샴페인 파티가 벌어진다. 그들은 결국 포터의 등에 얹혀 캠프로 이동하게 된다. 리더인 바인더는 이 모든 탓을 고소 피로증으로 돌리고 싶어한다. 동시에 대원들과의 일대일 면담을 통해 그들의 사생활의 영역에 침투해서 무언가 팀원으로서의 단결력을 다지려는 무의미한 시도를 거듭한다.

 

대원들을 자극해서 한시라도 빨리 정상으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은 무시무시한 요리 실력을 지닌 요기스탄 사람 요리사 퐁이었다. 아무도 그가 만드는 요리를 먹고 싶어하지 않았다. 복통과 더불어 소화불량을 유발하는 그 때문에 모든 대원들을 정상을 향해 질주한다. 퐁을 상대하는 것도 결국 리더 바인더의 몫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수화로 대화를 시도하는 장면은 정말 요절복통의 끝판왕이었다.

 

럼두들에 오르겠다는 투지에 불타는 서구인들에 비해 열악한 신체 조건을 가진 요기스탄 출신 포터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아마 럼두들 등반대는 럼두들 등정에 실패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산이 아닌개벼는 애교에 가깝다. 사실 왜 이야기가 나오지 않나 싶었다. 참 서문을 맡은 빌 브라이슨과 김훈 역자의 도움으로 수시로 등장하는 숫자 153이 특별한 의미를 가진 게 아니라는 점도 언급하고 싶다.

 

저자 보우먼은 요기스탄 출신 포터들의 활약을 다루면서,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는 이들이 왜 자신들의 짐을 타인에게 맡기냐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타인의 도움을 받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에 오르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던 시절에 이런 비판적인 시선을 당당하게 표현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어쩌면 그들의 치부를 정확하게 타격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별 반향을 보이지 않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 유명세를 타게 된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도 든다.

 

15년 전에 읽을 적에는 마냥 재밌게만 읽었었는데, 지금 다시 읽게 되니 저자의 다른 의도에도 관심이 갔다. 원래 해학과 풍자라는 게 이런 비꼼에서 출발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2023년의 <럼두들 등반기>는 재미와 동시에 다른 생각할 거리들을 나에게 제공해 주었다. 물론 재미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했고.

 

[뱀다리] 국내에는 마운틴북스와 은행나무에서 두 번 출간되었다가 모두 절판됐다. 역자가 같은 분이라는 점이 재밌다. 번역이 좀 바뀌었을까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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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3-05-29 0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밌는 책을 읽고 싶어요. 요즘 책이 왜 이리 안 읽히는지-_- 이 책은 예전에 분명 산 것 같은데(분명 읽진 않았지만-_-) 보이지 않네요. 품절..ㅠㅠ;;

레삭매냐 2023-05-29 09:47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 독서 슬럼프인지
도통 책을 완독하기가 쉽지
가 않네요. 시작한 책들은
많은데 -

일단 책부터 고만 사야지
싶습니다.

15년 전에는 사서 읽고 이
번에는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답니다.

새파랑 2023-05-29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5 년전에도 읽은 책이라니 대단하십니다. 그때도 좋고 지금도 좋군요~!!
15년전에 구매하신 책은 과연 어디있을까요? ㅋ

레삭매냐 2023-05-29 16:50   좋아요 1 | URL
아마 그 책은 실종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그 때와는 다른 결이라고나
할까요.

서니데이 2023-06-01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저도 이 책 전에 소개 읽은 것 같아요.
샀는데 읽지 않고 책장에 있는건 아닌지 찾아봐야겠어요.
레삭매냐님, 오늘부터 6월입니다.
즐거움 가득한 한 달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3-06-13 21:09   좋아요 1 | URL
답글이 아주~ 많이 늦었네요.

6월이 절반 정도 지나가 버렸
네요. 올해도 반절 정도 지나
간 셈인지요.

감사합니다.
 
황사를 벗어나서 대산세계문학총서 173
캐런 헤스 지음, 서영승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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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이번에 새로 문을 열었다는 알라딘 범계점을 방문했다. 이건 뭐 도장깨기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참고로 괜찮은 책들을 사냥했던 안산과 북수원점은 문을 닫았다. 이젠 추억이 되었다.

 

딱 일주일 전에 데려온 녀석이 바로 캐런 헤스의 <황야를 벗어나서>였다. 원래 이 책을 사러 출동했지만, 실물을 보고 나서는 한참을 고민했다. 어라, 운문체 소설이야? 내 스타일이 아닌데. 하지만 우리 책쟁이들이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지. 고민 끝에 결국 데려왔고, 오늘 아침에 다 읽었을 때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칭찬했다.

 

이러저러한 일들로 심경이 복잡했는데, 나보다 훨씬 더 고민이 많았던 꼬맹이 빌리 조 켈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힐링이 되었달까. 1952년에 태어난 작가 캐런 헤스는 마치 대공황과 황사로 뒤덮인 1930년대 미국 팬핸들 지역을 살아보기라도 한 듯한 묘사로 독자의 염통을 사로잡는다.

 

이제부터 어쩔 수 없는 스포가 다수 출현하니, 원하지 않는 분들께서는...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빌리 조의 아버지 베이어드는 농부다. 켈비 가족이 사는 땅인 팬핸들은 황사와 가뭄 그리고 대공황의 여파로 가난으로 찌든 그런 동네다. 마치 한국에서 벼농사를 포기하지 못하듯 베이어드 역시 밀농사를 포기하지 않는다. 정부에서는 작물의 다양화 타령을 해대지만, 현지의 농부들에게는 씨도 먹히지 않는 소리일 뿐이다. 그리고 팬핸들 주민을 위협하는 황사는 그들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 심지어 목숨까지도. 갑자기 들이닥친 황사에 질식사하는 장면은 정말 공포스러웠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나고 자란 땅을 포기하지 못한다. 땅과 얽힌 애증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 어머니에게 피아노 연주를 배운 빌리 조는 피아노 연주의 꿈을 꾼다. 노래 잘하는 또래친구 매드 도그에게는 호감을 갖기도 한다. 선생님의 응원에 힘입어 빌리 조의 피아노 실력은 나날이 향상된다.

 

그러다 불의의 사고로 임신한 어머니와 남동생이 프랭클린이 죽는다. 밀농사마저 제대로 되지 않는 마당에 도대체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들이 이어진다. 빌리 조는 손에 입은 화상으로 그 좋아하는 피아노 연주마저 할 수가 없게 된다. 어린 소녀에게 어머니의 부재가 주는 고통과 시련은 상상 이상이다. 그런 점에서 캐런 헤스가 설정한 이야기틀은 어쩌면 성장소설이라는 방식일 지도 모르겠다.

 

빌리 조의 아버지 베이어드는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연못을 파겠다고 나선다. 그가 파는 연못은 사랑하는 아내와 빛도 보지 못하고 져버린 자식을 따라가겠다는 그런 상징처럼도 읽힌다. 매도 도그가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를 응원할 수 없는 빌리 조의 모습에 얼마나 공감이 갔는지 모른다. 이것도 물론 저자의 설정이겠지만, 그렇다면 캐런 헤스는 정말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졸업식에 초청받아 피아노 연주에 나서지만, 빌리 조는 연주를 하지 못하고 졸업식장을 떠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가슴 저미게 받아들인 장면이었다. 너무 슬펐다. 꼬맹이 빌리 조가 받아들이기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지 않았을까.

 

결국 빌리 조는 지긋지긋한 팬핸들과 아버지 곁을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전에 등장한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서부로 간 이들처럼 빌리 조 역시 서부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조금은 진부하지만, 그 기차에서 만난 어느 아저씨와의 오랜 대화를 마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팬핸들에 내린 비가 힐링의 상징이 되는 것처럼, 새엄마 예비후보 루이즈가 등장하면서 우리 꼬맹이 빌리 조에게도 희망이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캐런 헤스의 <황사를 벗어나서>는 단순한 성장소설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낯선 땅인 오클라호마 팬핸들 지역에 사는 이들이 한 세기 전에 겪은 가난과 시련 그리고 희망에 대한 메시지다. 그들에게 황사는 고난과 시련을 그리고 한줄기 비는 희망과 꿈을 상징한다. 아무도 고난과 시련을 원하지 않지만, 우리 삶에서 그것들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그것들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다.

 

전세계를 강타한 대공황을 참사로 규정한 프릴랜드 선생님의 간단한 설명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세계대전 후, 잠시 동안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경제 번영과 호황의 추억은 과잉공급과 생산을 초래했고 그렇게 부풀려진 풍선은 어느 순간 펑하고 터져 버렸다. 대형 참사는 어느 순간 갑자기 터지는 게 아니라 그전부터 숱한 징조/시그널을 보낸다는 저자의 말이 예언처럼 다가왔다.

 

어떤 작가의 좋은 작품을 만나면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캐런 헤스의 다른 작품들이 만나고 싶어졌다. 이제부터 기다림의 시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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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5-30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또 처음 드는 작가, 궁금한 작가와 소설은 자꾸 늘어납니다. ㅎ

레삭매냐 2023-05-30 11:20   좋아요 0 | URL
그게 바로 이곳
북플의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 자극하는 선순환
의 모델이라고 생각하
고 싶습니다.
 

비오는 날에는 고저 카페에서 책읽기가
그만이다.

오늘 책을 무려 세 권이나 들고 나왔다.
캐런 헤스의 <황사를 벗어나서>는 다 읽었다.
이 책은 왜 이리 슬픈지.
지난 주일에 사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뻔.

다음은 찰스 부카우스키의 못 다 읽은 시집.
리뷰를 위해 부지런히 노트하며 읽는 중.
아마 니콜 크라우스의 책은 결국 펴 보지
못하고 가져 가지 않을까.


4 200원.
에디야커피 아이스라떼는 나에게 두 시간의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 주었다.
아울러 백퍼 핸드폰 충전도.
마음이 편안했다, 잠시 동안.

찰스 부카우스키의 시에서는
글쓰기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작가에게 글쓰기란 하나의 형벌일 지도
모르겠다. 도무지 끝나지 않는.
누칼협이지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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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05-27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비가 오는 날에는 카페에서 책 읽기가 최고.. 오늘 그게 생각나더라고요.
비 오는 풍경이 보이는 창 넓은 카페에서 책 보며 풍경 보며 시간 보내고 싶은 날인데 못 했어요.ㅋ

레삭매냐 2023-05-28 21:45   좋아요 0 | URL
어제는 책을 두 권이나 읽어네요 :>
오늘도 한 권 읽었구요.

중쇄를 찍어라 만화도 재밌게 읽고
있답니다.

비오는 날에는 책읽기가 그만이지
싶습니다.

얄라알라 2023-05-29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Thanks to가 이디야님께 향하고 있어요^^

레삭매냐 2023-05-29 16:49   좋아요 0 | URL
얄라알라님은 역시나 센수쟁이~~~

그레이스 2023-05-31 1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가끔 책들고 동네 카페로 갑니다^^

레삭매냐 2023-06-01 08:27   좋아요 1 | URL
비오는 날, 카페에서
책읽기 - 너무 좋았습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사계절 만화가 열전 13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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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우리 독서 중독자들의 본능을 자극했던 이창현 유희 팀의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속편이 돌아온다는 뉘우스를 램프의 요정 서재를 통해 알게 됐다. 이웃 동네에서 연재한다는 소식에 물넘고 산넘어 가봤지만, 진입장벽이 있었다. 당근 패스했다. 내가 그런 걸 할소냐하는 의기양양함과 더불어. 이래봬도 나도 당당한 독서 중독자의 일원이란 말이지. 그런 거에 넘어가면 무리의 자격이 없으니까.

 

사실 연재 소식에 앞서 지난달에 읽다가 못 다 읽고 도서관에 반납한 기억이 있다. 그래도 기록을 해놓아서 어제 퇴근하고 나서 정처 없이 운동한답시고 동네를 배회하다가 결국 도서관으로 향했고, 서가에서 뽑아서 그 자리에서 후딱 다 읽어 버렸다. 그리고 빌린 다음 집에 와서 처음부터 다시 읽었다.

 

사실 우리 책쟁이들의 일들은 매일 같이 이곳 북플과 서재에서 일어나는 일상이니 뭐 새로울 것도 없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 하지 않으니 말이다. 이미 산 책을 세 번이나 다시 사는 건 새롭지도 않거니와(램프의 요정에서 어, 이 책은 그전에 사신 기록이 있는데요라는 점원의 말을 가뿐하게 무시하고 사는 게 우리 독서 중독자들의 근본 없는 오기가 아니겠는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이 책을 읽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지갑으로 손이 가는 걸 막을 수 없다. 그리고 보니 얼마 전 <다락방의 미친 여자> 중고를 접하고 잠시 고민한 기억이 난다. 사고 싶은 마음은 굴뚝이었지만, 난 이 책을 내가 결단코 완독하지 못하리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뿌리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집에는 그런 책들이 한가득이니 말이다.

 

저자들이 예리하게 짚어내는 대로 사자나 슈, 예티 혹은 선생이나 경찰처럼 우리 독서 중독자들은 아무도 책을 읽지 않는 사회에 출몰하는 부적응자들이 아닐까? 그들이 주장대로 어쩌면 아니라는 말은 차마 못하겠다. 책 읽지 않는 정상인들 사이에서 남들처럼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하고, 가끔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퍼마시고 또 뭐가 있더라. 당근 거래도 하고 화초재배도 하는 척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회 부적응자 다른 말로는 독서 중독자들이라고 불리는 걸 마다하지 않는 책쟁이들이 아닐까.

 

갑자기 싸한 냉소주의가 몰려 온다. 아니 언제부터 사람들은 책을 멀리 하게 되었고, 이런 책쟁이 혹은 독서 중독자들에 대한 냉소주의가 만연해 버렸단 말인가. 보통의 평범한 닝겡들은 책을 읽지 않는 건 물론이고 책을 사는 데 단돈 1원도 쓰지 않지만, 우리 책쟁이들은 수입의 대부분을 책 사는데 때려 박지 않는가. 아닌가? 지난 십년 간, 램프의 요정을 통해 사들인 책값이 무려... 고만 해야 될 것 같다. 도대체 독서 모임에 출몰하는 예티와 내가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 그리고 보니 이창현 유희 이 작자들은 독서 중독자의 진실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지 싶다. 대다나다.

 

어제 이 책을 다시만나면서 혜성처럼 명멸하는 책들을 도서관에서 직접 찾아 대면하는 그런 영광의 순간들을 갖기도 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아 이런 책도 있구나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아니 그게 서점이었다면 당장에 전리품처럼 사들고 집으로 귀환했을 지도 모르겠다.

 

지난 일요일 밤에 중고서점에서 2만원이상 사면 2천원 깎아 준다는 유혹에 넘어가 버스 타고 전철을 갈아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램프의 요정 범계점을 방문했다. 우선 이 자리를 빌려 안양이 아닌 산본에 먼저 램프의 요정이 들어선 것에 감사한다. 그곳에 많은 책도 팔아먹고 또 그 이상의 책들을 사들이면서 충분히 보답했다. 그리고 오픈 즈음해서 아침저녁으로 언제나 문을 여나 하고 고대하던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날 세 권의 책을 사들였는데, 주일 저녁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없고 한적해서 좋았다. 캐런 헤스의 <황사를 벗어나서>, 항타고드 오손보독의 <에리옌> 그리고 니콜 크라우스의 <위대한 집>을 샀다.

 

캐런 헤스의 책은 오늘 은행에 가서 업무를 보는 동안, 버벅대는 직원에게 시위하는 차원에서 가방에 꺼내 몇 장을 읽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이십분 대기 플러스 삼십분이라니. 업무상 은행에 자주 가는 나는 전과가 있는데, 그전에 하도 일처리를 못해서 비슷한 짓거리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직원분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말한 기억이 나서 그렇게 했다. 시그널을 보냈는데 상대방이 못 알아 차렸을 수도.

 


그렇게 책사냥에 성공한 나는 집으로 복귀하기 위해 인근 롯데백화점을 지나 전철을 타러 가고 있었다. 저녁 술자리 약속이 있는지 전철역 부근에서 쭈구리고 앉아 있던 어떤 분이 내 뒤에 오는 지인을 보고 반색하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던지. 그 순간을 카메라로 담고 있을 정도였다. 하긴 오늘 회사에서 집에 오는 길엔 소문난 고깃집 입장을 위해 웨이팅하는 사람들, 그리고 주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냅다 거리에서 키갈하는 커플들 볼거리가 많았다.

 


이것저것 쓰다 보니 이게 리뷰인지 아니면 일기인지 헷갈린다. 오락가락 저자들의 이야기처럼 이런 게 다 우리네 삶의 일부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내일은 월급날이다. 내일 월급 받으면 앞으로 줄창 입을 반팔셔츠 두 벌하고, 노스페이스에서 반값 세일하는 조리나 한 켤레 사야겠다. 신난다. 책은 이제 고만 사고. 다 필요 없고,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처럼 조용한 골방과 책이 내게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우리는 독서 중독자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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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5-25 0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니까요.
책이 도대체 뭔지 이렇게 독서중독자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북플이 폭파되면 모두 다 흩어질런지요!
이런 책은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들만 공감할 것 같습니다^^

같이 책을 읽던 지인이 어느 날 재테크에 눈을 떠 과감하게 책세계를 떠난 적이 있는데 여전한 저를 아직까지도 한심하게 보고 있더라고요.

그냥 타고 났다고 생각하고
이 생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살다 갈 것 같은, 다행인지 불행인지의 힘든 삶을 계속 살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3-05-25 08:10   좋아요 1 | URL
예전에 소설리스트라는 사이트
가 있었는데, 폭파되었을 때
참 아쉽더라구요.

독서 중독자들에게 램프의
요정 서재/북플만한 놀이터
가 또 있을 지요.

독서 중독자에서 재테크의
달인으로의 변신이라...
경천동지할 만한 트랜스포
메이션이 아닌가 싶습니다 허-

사고 읽고 쓰고의 무한반복이
우리 독서 중독자들의 숙명이
지 싶습니다.

빨강앙마 2023-05-25 1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니까..저도 책을 고만 사야합니다..ㅠㅠㅠㅠㅠ 그래서 구판절판, 절판, 품절책인 제 책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요즘 오프은행직원들 일이 왜이리 더딘지..ㅠㅠㅠ 저도 차라리 그냥 제가 할테니 공인인증서 등록이나 제대로 해주세요..무슨 서류를 그리 못떼시냐며..ㅠ.ㅠ;;;;;; 그런적이 있지요.. 저도 책을 읽는 시위를 해야했나... 그러고있습니다..,.ㅡ.,ㅡ

레삭매냐 2023-05-25 15:4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깐요. 책은 고만 쟁여야
하는데, 만날 대는 핑계지만
읽는 속도가 사는 속도를 따라
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슈슈슉~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업무를 처리하
셨었는데 요즘에는 영 -
신종 업무가 더 많이 생겨서
일까요?

그레이스 2023-05-31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이런 제목에 끌리네요 ^^

레삭매냐 2023-06-01 08:27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제목이 열일한
것 같습니다 :>
 
건륭제 - 하늘의 아들, 현세의 인간
마크 C. 엘리엇 지음, 양휘웅 옮김 / 천지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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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은 지 열흘이 넘어가는 마크 C 엘리엇이 저술한 <건륭제>를 회상하며 리뷰를 써본다. 원래 포부는 장대한 리뷰를 작성하는 것이었지만, 기억의 한계로 생각나는 대로 써볼 생각이다.

 

1711년 출생한 청나라 5대 황제 옹정제의 4남 홍력은, 부황이 1735년 사망하면서 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대로 강건성세(강희-옹정-건륭)의 무대를 활짝 열었다. 사실상 만주에서 발흥한 여진족의 나라 청은 18세기 세계 최강국이었다. 아마 지금의 중국이었다면, 아시아 대륙에 만족하지 않고 더 넓은 영역에 도전하지 않았을까.

 

할아버지였던 강희제 시설 이미 중국 대륙을 장악한 청나라는 느슨했던 강희제 통치 시절을 지나 문자옥을 시행하며 독재자로 군림했던 옹정 시절을 지나 이십대 청년 천자를 맞이했다. 어려서부터 황제 교육을 받은 건륭제는 자신감에 넘치는 청년 황제였다.

 

소수의 만주족으로 압도적인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청나라는 철저하게 무력에 의존했다. 만주에서 대륙으로 진출하던 시절 청군의 주력이었던 팔기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청나라의 대륙 지배가 공고해 지면서 과거를 통해 발탁된 관료들도 망국 명나라에 대한 기억조차 잃어 버리고 새로운 질서에 편입되었다.

 

저자는 건륭 치세의 특징으로 군기처와 주접제도를 우선적으로 꼽았다. 무력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다 보니, 특권화된 군인들의 연합체가 중요했다. 옹정제 시절에 만들어진 군기처는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만주 출신 황족들 중심이었으나 한족들이 등용되면서 건륭제 치세 동안 핵심 기관으로 발전해 나갔다. 다음의 주접제도는 전국의 관료들을 감시하고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제도였다. 정력 넘치는 청년 천자는 붉은 글씨로 전국에서 조정으로 올라오는 문서에 비답을 달았다. 결국 정보가 권력 그 자체라는 점을 청년 천자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훗날 십전노인이라 불릴 정도로, 건륭제는 전쟁에도 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선 즉위 초반 남부에서 터진 묘족의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고, 한나라 이래 중원의 골칫거리였던 중가르와 동투르키스탄을 마침내 복속시키는데 성공했다. 현대 중국의 국경은 건륭제가 사실상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청년 천자는 채찍과 당근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변경의 식민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아버지 옹정제가 남긴 막대한 재정은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대원정 작전을 수행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아마 돈이 없었다면 중가르 원정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건륭제의 원정에서 인상적이었던 점은 단순하게 전투단을 조직하는 것 뿐, 아니라 대규모 원정군을 위한 보급에도 많은 신경을 썼다는 점이다. 모름지기 전쟁이란 보급으로 한다는 사실을 청년 천자는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점점 한족화되어 가는 만주 귀족들의 야성을 키우기 위해 건륭제는 실전에 버금갈 정도의 사냥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말로 제국을 세울 수는 있어도, 마상에서 천하를 통치할 수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다. 이미 한족을 능가하는 학식과 골동품에 대해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던 건륭제는 청나라의 천하를 위해 지나치게 한족화되어가는 황실 귀족들이 조부 시절처럼 말을 달리고 사냥을 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 자신들의 조상격인 여진족의 금나라가 그런 식으로 망한 경우를 천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외에는 마크 C 엘리엇의 <건륭제>에는 많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모후를 위해 자주 남순 혹은 순행에 나서 장강 주변 유역을 유람했다. 물론 천자의 순행은 비용이 많은 드는 사업이었지만, 특별한 내우외환이 없는 가운데 충분히 황실의 재정으로 가능한 일이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서양 출신 저자는 건륭제의 뛰어난 업적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만, 제위 기간 후반에 인구가 폭증하면서 후대에 미치게 될 부정적 영향에 대해서도 신중한 태도로 저술한다. 하늘의 아들 그러니까 천자는 모든 인민의 아버지로 그들의 행복과 번영을 책임져야만 했다. 어쩌면 황제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의 무게에는 인민의 행복을 책임져야 한다는 그만큼의 막중한 책임감이 뒤따르지 않았을까.

 

18세기 중국 인구 폭발은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전 세대보다 더 많아진 인구를 먹이기 위해 그만큼 많은 토지가 필요해졌다.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였던 중국에서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규모 개간이 이루어졌지만, 세금 징수를 피하기 위해 개간된 토지들이 나라의 장부에서 대규모로 누락되는 일이 발생하면서 미래 국가 재정에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영국을 필두로 한 서방 국가들이 중국 대륙에서 새로운 사업과 무역의 기회를 찾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건륭제가 아무리 성군이라도 하더라도, 치세 말기에 가서는 화신 같은 탐관을 잘못 기용하는 실책이 이어지면서 성쇠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달이 차면 기울기 시작한다는 만고불변의 법칙이 국가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 게 아닐까 싶다.

 

조너선 스펜스 교수의 <강희제>, <반역의 책> 등으로 강희 옹정 연간을 읽었다면 또다른 서양 학자인 마크 C 엘리엇의 <건륭제>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전성기를 맞이했던 시절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렇게 흥미로운 책이 절판된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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