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사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2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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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은 나에게 발자크의 달로 기억될 것이다. 이달에만 모두 6권의 발자크 책들을 읽었다. ,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도 계속해서 읽고 있으며 어제 <어둠 속의 사건>을 다 읽고 나서 바로 <골짜기의 백합>을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쟁여둔 발자크의 책이 있어 다행이다. 그렇지 역시 책은 사서 읽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책들을 찾아서 읽는 거지. 우리 책쟁이들의 즐거움이 아닌가.

 

나는 개인적으로 발자크가 시대의 관찰자였다고 생각한다. 대혁명기와 공포정치, 나폴레옹의 제정, 왕정복고와 다시 혁명이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절과 프랑스 사회에 대해 그 누구보다 예리한 필치로 그려낸 이가 바로 발자크다. 물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리얼리즘을 빙자한 장황함에 다수 독자들을 나가떨어지기 일쑤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런 고비(?)를 넘기면 바로 발자크가 전수하는 무궁무진한 소설적 즐거움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장황함의 스택이 쌓여, 재미까지 더해지니 극락이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소설은 누군가를 노리는 공드르빌 영지의 관리인 미쉬가 소총으로 무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시대는 제국의 여명기였다고 발자크는 기술한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이제 막 공화정 정부를 무너뜨리고 독재정치를 시작할 판이었다.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미쉬가 누구인가? 공포정치 시절 사나운 자코뱅당원이자 이른바 유다로 불린 사람이 아니었던가. 미쉬는 공화정 시절, 처형된 자신들의 주인들의 영지를 사들이려고 한다. 그의 대척점에는 대리인 마리옹과 공증인 그레뱅을 조종하는 상원 의원 말랭이 있다.

 

사실 미쉬는 레알자코뱅당원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이었던 드 시뫼즈 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위장한 왕정주의자였다. 모든 이들이 귀족들이 망명한 뒤, 무주공산이 된 국유 재산을 집어 삼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시절에 남은 강호의 의인 같은 존재였다. 물론 혁명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보수반동의 전형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발자크가 뼛속까지 왕정주의자였다는 점과 자신의 성 앞에 귀족을 상징하는 “de”를 달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드 시뫼즈 집안의 쌍둥이 형제 마리폴과 폴마리 그리고 드 도트세르 집안의 로베르와 아드리앵 4총사는 자신들의 철천지원수라고 규정한 당시 최고 권력자 나폴레옹 암살에 나섰다. 물론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음모는 실패했고, 이 사실을 안 악명 높은 경찰총수 조제프 푸셰가 파견한 전직 올빼미당원 코랑탱과 페라드였다.

 

이렇게 노련하고 무시무시한 스파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바로 23세의 여걸 로랑스 드 생시뉴와 미쉬 그리고 그들에 비해 모자라는 판단력을 지닌 귀족 청년 4총사였다. 노련한 미쉬와 로랑스의 활약으로 음모가들이 공드르빌 영지의 은신처에 숨는데 성공한다. <어둠 속의 사건>은 추리소설과 정치소설 두 마리 토끼라는 주제를 매섭게 사냥한다.

 

트루아 부근의 공드르빌 영지에서 펼쳐지는 숨 막히는 추격전이 1부에서 다루어졌다면, 2부에서는 1부에서 로랑스에게 치욕을 당한 코랑탱의 역습이 이루어진다. 트루아의 귀족 청년들은 애써 파리에서 그들을 찾아온 친척인 노신사 드 샤르주뵈프 후작의 충고를 무시한다. 나폴레옹의 사면과 망명자 귀국 허용은 그저 일시적이라는 점을 샤르주뵈프 후작은 청년 귀족들에게 주지시킨다. 노신사는 그들의 정치적 적들이 호시탐탐 그들에 대한 복수의 타이밍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재산을 정리하고 다른 나라로 망명할 것을 주문했다.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엄중하게 경고한다. 하지만, 젊음과 자신감 혹은 오만함으로 무장한 그들은 세상사에 정통한 노신사의 신중한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 장면이 후에 이루어질 비극의 전조가 아니었을까.

 

그들과 심리적으로 정치적 동지였던 발자크는 로랑스-마리폴-폴마리-로베르 그리고 아드리앵들이 지닌 정신 승리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미 대혁명을 통해 재산과 지위를 한 번 모두 잃었던 청년 귀족들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문제였다고 발자크는 말한다. 그들이 원하는 부르봉 왕가의 복귀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마당에 국내에서 그런 무력 지원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세상이 오기 위해서는 나폴레옹이 외국과의 전쟁에서 패해야만 했다. 역설적인 상황이 아닌가.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나폴레옹은 그랑 아르메(프랑스 대육군)를 이끌고, 비록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참패를 당하긴 했지만, 아우스터리츠와 예나 등지에서 연전연승하면서 그야말로 제국의 수장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귀족 청년들 가운데 특히 로랑스는 나폴레옹을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그런 철천지원수로 생각했다. 소설의 전개와 더불어 이런 정치적 상황에 대한 변주가 개인적으로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다음은 마술사 발자크가 구사하는 추리소설 분위기를 품은 서사가 등장할 차례다. 귀족 청년들이 혁명기에 숨겨둔 백만 프랑의 자금을 공드르빌 영지 부근에서 찾는 동안, 상원 의원 말랭이 복면을 뒤집어 쓴 5인조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연히 당국에서는 공드르빌 귀족청년 사총사가 범인일 거라고 단정 짓고, 그들을 체포해서 기소한다.

 

그전에 잠시 평화가 온 사이에는 발자크식 로맨스물이 상연되기도 한다. 막대한 재산과 백작 지위까지 지닌 로랑스 드 생시뉴의 갈팡질팡 배우자 선택의 여로가 전개된다. 시뫼즈 집안 쌍둥이들은 저들끼리 서로 로랑스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갈등한다. 로베르는 중세남자의 전형으로 일단 경쟁에서 배제됐다. 그리고 곁다리에서 그저 자신도 그 경쟁에 끼고 싶어 하는 남자 아드리앵의 서글픈 시선까지. 그렇다면 발자크는 정치, 추리 그리고 로맨스 물까지 <어둠 속의 사건>에 모두 때려 넣고 싶었단 말인가.

 

말랭 납치사건으로 피의자들이 재판을 받게 되는 장면에서는 법정드라마가 소설의 분위기가 바뀐다. 아 정녕 발자크는 천재란 말인가. 젊은 친척들이 무고하게 납치와 감금죄로 사형을 당하거나 수십 년에 달하는 징역형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샤르주뵈프 후작이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유능한 보르댕과 드 그랑빌(데르빌?)이라는 변호사로 법정에서 냉정한 사건 담당 검사를 상대로 치열한 논리 싸움을 전개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법정드라마)이 소설의 압권이 아니었나 싶다. 비록 독재자이긴 했지만 나폴레옹은 근대법의 효시가 되는 법을 제정해서 법치의 근간을 마련했다. 나폴레옹 제정 하의 프랑스 신민들은 모두 이 법에 따라 법정에서 유무죄를 다투었다. 특히 미쉬 변호에 전력한 드 그랑빌 변호사가 모든 증거를 바탕으로 해서 무고한 사냥터지기를 위해 방어논리를 구사하는 장면은, 마치 당시 법정에서 보고 들은 발자크가 바로 현장 중계를 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귀족청년들과 미쉬에 대해 적대적인 배심원단의 마음을 돌려놓고, 드디어 유리한 판결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에 소설의 거장은 다시 한 번 상황을 역전시킨다. 공드르빌 은신처에 갇혀 있던 말랭 상원 의원이 풀려난 것이다. 그리고 음모가들에 의해 조작된 가짜 편지에 속은 미쉬의 아내 마르트가 말랭에게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공급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귀족 청년들과 미쉬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재판을 급반전하게 된다.

 

되돌릴 수 없는 판결이 나자, 마지막 남은 방법인 황제에게 사면 요청을 하러 샤르주뵈프 후작과 로랑스는 전쟁이 한창이던 프로이센의 예나까지 원정에 나선다. 과연 이런 스케일 큰 소설의 전개를 구상할 수 있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작은 시골 마을 트루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파리에서의 법정드라마를 거쳐 프로이센에서 제국의 운명을 끝장낼 수도 있었던 전역에까지 도달하게 이끌어간 발자크 서사의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전에 나폴레옹은 이미 한 번 사면 받은 자들이 다시 한 번, 정부를 상대로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 자신의 선의가 우롱당했다고 생각하고 신속한 재판을 주문했다.

 

왕정이 복원된 결말에서, 그동안 진행되었던 방대한 이야기들이 조용하게 마무리된다.

 

지금까지 만난 9권의 발자크 작품 중에서 <어둠 속의 사건>이 가장 스케일이 크고 방대한 서사였다. 그만큼 생각할 거리도 많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던 격동의 시절, 살아남기 위해 팔색조 같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야 했던 인간 군상들에 대한 스케치는 과연 발자크를 필적한 만한 작가가 없지 않을까 싶다. 왕정주의자들의 망명과 복귀 그리고 재산 싸움, 젊은 청춘 사이에 벌어지는 연애, 치밀한 논리 싸움이 펼쳐지는 법정드라마 그리고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까지 과연 하나의 소설이 이 모든 걸 다 품을 수 있을까 싶은 걸 발자크는 해냈다. 이러니 발자크를 읽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다. 다시 한 번, 페르 라셰즈에서 만난 미국 아줌마의 발자크 예찬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다음 타자로, 발자크 최고의 연애소설이라는 <골짜기의 백합>을 바로 읽는다. 발자크와 함께 해서 너무 즐거웠던 11월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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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11-30 1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안 읽어봤는데 꼭 읽어봐야겠네요. 아직 <골짜기의 백합>을 안 읽으셨다니 부럽습니다. 발자크 정말 천재죠. 시간이 갈수록 발자크 소설들 장면들이 정말 리얼리티가 대단하구나 싶어요.

레삭매냐 2022-11-30 13:10   좋아요 1 | URL
지금 열심히 골짜기 읽고
있는데, 발자크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
라는 생각이 팍팍 들었습니다.

언급해 주신 대로 과연 리얼
리티의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coolcat329 2022-11-30 12: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 년에 여섯 권도 힘든데 한 달 동안 여섯 권!
저도 이 책 있는데 올 해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별다섯이라니 설레입니다.

레삭매냐 2022-11-30 13:13   좋아요 1 | URL
저도 지난 여름에 사서
한 겨울에 읽었네요 ^^

6권 중에 <곱세트> <미지의
걸작> <샤베르 대령>은 얇
아서 금방 읽었답니다.

쿨캇트님의 발자크 연내 읽기
를 응원하는 바입니다.

새파랑 2022-11-30 12: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발자크하면 레삭매냐님~!! 요 책 표지가 마음에 안들었는데 리뷰 보니 완전 극찬이군요 ~!!

역시 책은 있는 책 중에서 골라 읽는거라 생각합니다 ^^

레삭매냐 2022-11-30 13:16   좋아요 2 | URL
표지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너무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바람에 집중
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다 읽고 나니 역시 발
자쿠 생각이 절로 드네요.

책은 가지고 있는 책 중에
서 찾고, 골라서 읽는거다!
공감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11-30 15: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번 한달은 발자크로 꽉 채우셨군요! 덕분에 저도 발자크에 관심이 생겼답니다. 저 같은 분들이 많을 듯~ㅎㅎㅎ 저는 무엇보다 발자크 평전은 언제고 읽어볼 생각이에요^^

레삭매냐 2022-11-30 15:38   좋아요 1 | URL
저도 발자크 평전 읽으면서
동시에 책에 나온 다른 책
들을 읽었거든요.

정말 발자쿠 작가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평전 자체도 대단한 작품이
지 싶습니다.

발자쿠 완쉐이 완완쉐이!!!

mini74 2022-11-30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와 함께 하는 11월이셨군요. 매냐님 글만 읽어도 대하소설 느낌 납니다. 츠바이크 발자크평전도 이 책도 읽고 싶어집니다. *^^*

레삭매냐 2022-11-30 15:39   좋아요 1 | URL
12년 전에 꼴랑 <나귀 가죽>
이라 <고리오 영감> 읽고 나서
한참 있다가 몰아치기로 읽고
있네요.

못 다 읽은 책들 읽고 나면
다시 옛날에 읽어본 책들을
만나 보고자 합니다. 그게 고
전을 대하는 책쟁이의 태도
라고 생각합니다.

라로 2022-11-30 1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발자크 책을 읽으시는 매냐님!!!@@
발자크의 책은 매냐님의 리뷰들을 읽고 선택할 수 있으니
좋다는 얍삽한 생각을 하고 있는.. ^^;;

레삭매냐 2022-11-30 17:41   좋아요 1 | URL
라로님은 발자쿠 체리 피커 ~~~

한국에 나온 모든 발자쿠
책들을 읽어 보겠다는 야심
을 불태워 볼랍니다.
 
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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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위화 작가의 소설을 만났다. 제목은 <원청>이다. 장소는 남녘의 어딘가로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린샹푸의 도망간 아내 샤오메이가 사는 곳으로 추정된다.

 

출발은 시진이라는 곳에 새롭게 둥지를 튼 목수 린샹푸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들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려서 조실부모한 린샹푸는 어려서부터 목수일을 좋아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신 뒤에, 실력 있는 목수 스승들에게 기술을 배웠다. 대대로 수조기와 참조기 금괴를 모아온 지주 집안 출신의 린샹푸가 결혼할 시기가 되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아 어느새 24살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 아창과 샤오메이 남매(?)가 나타났다.

 

아창은 대처로 떠나고 남은 샤오메이와 린샹푸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그들이 과연 잘 살았을까? 아니다. 샤오메이는 린샹푸 집안 대대로 모아온 수조기, 참조기 금괴를 들고튀었다. 어디로?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왜 린샹푸를 떠났는지에 대해서도. 그러다 어느 날 아이를 배고 린샹푸에게로 돌아온다. 자신의 혈육을 품은 샤오메이를 내칠 수 없었던 린샹푸는 그녀를 다시 받아들인다. 그리고 딸 린바이자가 태어나고, 그들의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았다. 샤오메이는 다시 집을 나갔다. 이번에는 수조기, 참조기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남쪽 원청출신이라는 말만 듣고, 젖먹이 린바이자를 데리고 재산을 정리하고 나머지는 집안의 오랜 집사 톈다에게 부탁하고 린샹푸는 정처 없이 도망간 와이프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원청 부근이라고 생각한 시진에 새롭게 정착하는 린샹푸. 시진에서 사람 좋은 천융량을 만나, 거의 한 가족같이 살게 된다. 특유의 목공 기술을 발휘해서 천융량을 조수로 삼아 동업을 시작한다. 그렇게 12년이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청나라는 망하고 민국이 들어섰다. 세상은 어수선했다. 북양군벌과 국민혁명군이 전투가 벌어지고, 패잔병들이 백성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약탈하기 일쑤였다. 시대가 어수선하니 비적과 토비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분열의 시기, 중국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혼란상에 대한 위화의 남다른 스케치가 빛을 발하는 장면이었다. 시진의 상인회장 구이민네 아들과 린바이자의 약혼식날 시진에 잠입한 비적들이 바이자를 인질로 잡아갔다. 이에 천융량의 부인인 리메이롄은 자신의 장남 천야오우에게 토비들에게 가서 자신이 바이자를 대신하겠다고 말하라고 시킨다. 오직 돈에 눈이 먼 토비들은 바이자를 풀어주고, 천야오우를 인질로 잡아갔다.

 

야만의 시대에 대한 위화 작가의 묘사는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국민혁명군에게 패배해서 시진으로 다가오는 북양군벌 일당을 걱정한 2만 명에 달하는 시진 사람들은 피난길에 나선다. 대나무 뗏목을 만들어서 도망가려다 숱한 사람들이 엄동설한의 차가운 물속에 수장된다. 결국 구이민은 정든 고향과 재산 그리고 집을 버리고 도망갈 게 아니라 패주 중인 북양군벌의 여단장과 거래에 나서서 시진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로 결정한다. 그 대가는 천벌에 달하는 패잔병들의 겨울 동복과 은화 6만 냥의 군자금이었다.

 

한편, 비적 떼에게 인질로 잡혀간 천야오우에게 벌어진 일들은 야만의 시대에 대한 위화식 증언이 아닐까 싶다. 사로잡은 인질에게서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뜯어내기 위해 비적들은 악랄한 고문과 매질도 서슴지 않았다. 비인간적 대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돈이 없는 인질들은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쏴 죽여 버렸다. 이런 천신만고 끝에 천야오우는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다.

 

천야오우와 다른 인질들은 1차 인질 석방 작전이 실패하는 바람에 모두 토비들에게 귀를 잘렸다. 귀가 없자 그들은 삶에서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건 마치 청나라가 망한 뒤, 국가의 나갈 방향을 잡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던 민국 초기 시절에 대한 위화 작가 스타일의 비유가 아닐까 싶다.

 

그 뒤에도 천야오우와 린바이자의 스캔들 그리고 장도끼가 이끄는 토비들이 시진을 공략하는 그야말로 파란만장 스토리들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피 끓는 청춘남녀들의 로맨스야 그렇다 치고, 이미 토비들에게 한 번 호되게 당한 시진에서는 기존의 인질 22명 가운데 19명의 외귀군을 주축으로 한 민병단이 조직되어 100여명에 달하는 토비군을 상대하게 된다. 단장 주보충을 비롯한 민병단원들의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악랄한 토비군들에게 민병단원들이 거의 전멸할 위기에 각성한 시진 사람들의 가세로 간신히 낙성의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민중혁명에 대한 예고편인지도 모르겠다.

 

야만의 시대를 대변하는 토비들의 만행에 대한 묘사와 무자비한 토비들의 총탄에 민병단원들이 차례로 죽어 가는 비장한 장면이 대비되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인질극이라는 만행을 경험한 시진 사람들이 앞 다투어 총기를 사들여 무장에 나서는 장면에서는 폭력의 악순환이 도래할 것이라는 점을 주지시키기도 했다.

 

<원청>에서 다루는 청조말기 그리고 민국 초기에 이르는 난세에 대한 서사의 근본은 비극이다. 농민으로 평범하게 살 수가 없어 토비가 되었다는 빌런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피로 피를 씻는 복수의 끝에 기다리는 운명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최고 악당 장도끼가 심판을 받지만, 통쾌한 기분이 들진 않았다. 엔딩에서 위화 작가는 다루는 서사의 저글링에 감정의 진동이 걷잡을 수 없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 다음에 따라붙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궁금했던 샤오메이의 과거에 대한 그리고 그후의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애프터서비스다.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워낙 린샹푸의 일대기에 집중하다 보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사실 작가의 부언이 없다고 해도 아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냥 미스터리로 남겨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중요한 인물인 린바이자 역시 상하이로 떠나보내고 전체 플롯에서 삭제해 버린 작가의 스타일도 확실히 과감했다.

 

사회주의도 그렇다고 자본주의도 아닌 그런 어정쩡한 현재의 모습보다 강호의 의리와 기개가 살아 있던 백여 년 전 그네들의 삶이 더 살갑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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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1-29 13: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위화작가는 <허삼관 매혈기>와 <인생>을 읽고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도 읽고 싶네요.
<형제>,<제 7일>도 읽구요^^;;

레삭매냐 2022-11-29 13:58   좋아요 2 | URL
저도 위화 작가의 팬인가 봅니다.

언급해 주신 책들 모두 읽었네요 ^^

그렇게혜윰 2022-11-28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에세이밖에 못 읽었는데 에세이가 좋아서 소설은 늘 위시입니다...ㅋㅋㅋ

레삭매냐 2022-11-29 13:59   좋아요 2 | URL
오오 위화 선생의 에세이
들도 있었군요. 전 주로
소설로 위화 선생을 만나
서요 ^^
 
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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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서점에서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을 사놓았다. 물론 당장 읽지는 않고 좀 묵혀 두었다. 그러다 이번 달에 발자크 발동이 걸려서 내리 5권을 읽었다. 물론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도 계속해서 읽는 중이다. 문제는 막상 <미지의 걸작>을 읽어 보려고 하니, 찾을 수가 없더라는 거였다. 결국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미지의 걸작>에는 두 편의 단편이 들어 있는데 단가가 무려 17,000원이다. 이거 너무 비싼 거 아냐? 그리고 뒤에는 <미지의 걸작>1994년에 자크 리베트가 영화로 만든 <누드 모델>의 씬들이 몇 컷 실려 있더라.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비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가격을 이 정도 받으려면 단편 하나 정도는 더 넣어 주어야 하지 않았나.

 

타이틀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실린 <영생의 묘약>부터 잠깐 짚고 넘어 가자. 이 짤막하고 기묘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유명한 돈 후안 벨비데로다. 공간은 이탈리아의 페라라. 아버지 덕분에 잘 먹고 잘 살고, 또 유흥과 환락에 아낌 없이 돈을 써대는 탕자 같은 아들이 바로 돈 후안이었다.

 

그의 아버지 바르톨로메오는 인생의 대부분을 상인으로 살아온 구십대의 노인이다. 이제 곧 죽음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태로, 병상에서 죽어가는 중이다. 죽음의 시간이 이르자, 아버지는 탕자 아들을 불러 마지막 부탁을 남긴다. 기묘해 보이는 병에 든 약물을 자신이 죽고 난 다음에 자신의 시신 곳곳에 발라 달라는 거였다. 아무리 탕자였지만, 죽어가는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겠다고 약속하는 돈 후안. 그리고 아버지의 유언 대로, 하얗게 변한 아버지의 눈에 묘약을 넣자 아주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다.

 

그렇게 영생의 비밀을 깨닫게 된 돈 후안은 자신의 아들 펠리페에게도 비슷한 부탁을 한다. 고딕 스타일의 언데드를 연상시키는 결말이 사뭇 충격적이다. 19세기 프랑스/파리 사회를 그린 발자크가 이런 스타일의 소설도 썼구나 하며 넘어간다.

 

지금까지는 워밍업이었다. 이제 본론인 <미지의 걸작>에 대해 이야기할 시간이다. 나는 <미지의 걸작>을 읽으면서 지난주에 우연히 만나게 된 너튜브 르네상스 동영상에 대해 고마움을 느꼈다. 그건 마치 내가 이 책을 읽기 위해 준비라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원근법의 도래를 알린 조르조네의 <폭풍우>를 필두로 해서, 그의 제자로 16세기를 대표하는 화가였던 티치아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바로 <미지의 걸작>을 읽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심지어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포르뷔스-니콜라 푸생 그리고 프렌호퍼와의 대화에 등장하는 앙리 4(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시조), 마리 드 메디시스와 칼 5세 등이 전혀 낯설게 다가오지 않았다. 이래서 역사 공부가 중요하다는 걸까. 마침 공부처럼 열심히 메모까지 해가면서 시청한 르네상스 동영상이 소설의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바이다.

 

포르뷔스와 니콜라 푸생은 실존 인물이고 프렌호퍼는 발자크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다. 이제 막 화가로 출발한 니콜라에게 거의 모든 화가들과 그들의 작법에 대해 비평을 삼가지 않는 프렌호퍼는 과연 대단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가난한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그는 부자기도 했다.

 

회화는 기본적으로 고래로 자연을 모사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중세 회화는 신학을 보조하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르네상스가 도래하고, 신 중심의 사고에서 인문주의로 사유의 거대한 흐름이 전환하게 된 점을 발자크는 프렌호퍼의 유창한 언변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역시 천재였던 미켈란젤로가 형태의 마법사였다면, 티치아노는 색채의 조련사였다. 그는 특히 붉은색을 그 누구보다 잘 사용하기로 유명했는데, 주걱턱 유전자를 가진 자신의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칼 5세의 전속 초상화 화가가 되면서 그야말로 인생역전에 성공하게 된다. 물론 이 부분은 소설에 나오는 것은 아니고 내가 동영상을 통해 알게 된 부분들이다.

 

훗날 빛에 집착하게 된 인상파들에 앞서, 빛이야말로 천재적 창조자라는 표현으로 발자크는 자신의 미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끝없이 늘어놓는다. 정말 강력한 미술 비평가로서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이 글로 시대의 관찰자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면, 화가들은 화폭에 데생과 색채 그리고 선으로 자신이 관찰한 것을 실천해냈다고 한다.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선들이 그림 세계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는 점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포르뷔스와 니콜라는 프렌호퍼가 자신의 아틀리에에 지난 10년 동안의 작업을 꽁꽁 감춰 두고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구상해온 작품에 미지의 걸작이라는 이름을 붙여 준다. 나는 순간, 그 걸작이 과연 존재는 하는가라고 직감적으로 묻게 된다. 그리고 니콜라는 자신의 애인이자 순결한 질레트를 프렌호퍼의 애타게 그리고자 하는 걸작의 모델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그 다음에는 광기에 물든 작가의 기이한 행동들이 이어진다.

 


그 다음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을 좀 더 시각적으로 그리고 서사적으로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자크 리베트의 영화 <누드 모델 La Belle Noiseuse (1991)>이다. 너무나 친절한 너튜브 리뷰의 도움으로 237분 짜리 원작 영화를 7분만에 퉁칠 수 있었다. 니콜라의 여친 마리앤 역할을 맡은 이십대의 엠마뉘엘 베아르의 고혹적인 연기는 이게 정말 연기인가 화가 앞에 선 모델인가 싶을 정도였다. 넘실대는 애증의 관계 속에서 베아르가 보여주는 자기파멸적 감정에 대한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그걸 카메라에 담은 누벨바그/카이에 뒤 시네마 출신 감독의 연출에 박수를 보낸다.

 

그렇게 정성 들여 그린 걸작을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며, 벽에 넣고 회칠하는 노화가 에두아르의 모습에서는 <미지의 걸작> 엔딩의 프렌호퍼가 연상됐다. 소설에도 나오듯이 아름다움의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아름다움을 탐색하고 압축해야 한다. 그리고 아름다움이 스스로 발화할 수 있게 긴밀하게 얽어매야 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이런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고자 했다면, 종이에 서사를 그리는 글쟁이들에게도 비슷하게 적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역시 발자크다. 말이 필요 없다.



[뱀다리] 영화 <누드 모델>에서 노화가 에두아르 프렌호퍼의 부인으로 등장하는 리즈 역은 제인 버킨이 맡았다. 그렇다, 버킨백으로 유명한 그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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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2-11-22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에 리베트의 저 영화 극장에서 봤습니다. 베아르 정말 아름답고 열연 대단한데 한편 그 긴 시간 내내 너무 고생스럽게 보여 -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촬영시간은 훨씬 더 길었겠죠 - 절래절래 했던 기억이 납니다.

레삭매냐 2022-11-22 14:09   좋아요 1 | URL
저도 영화 한 번 보고 싶었으나
어마무시한 러닝타임으로 인하야 -
짧은 리뷰로 대신했답니다.

자크 리베트는 처음 들어 보는데
누벨바그 출신 감독이라고 하네요.

네 시간 짜리 영화를 보셨다니 대
단하십니다 !!!

독서괭 2022-11-22 1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내리 5권이라니!! 한 작가 내리 읽어도 지겹지 않으신가봐요. 저도 예전엔 그렇게 읽었던 때가 있긴 한 것 같은데 요즘은 끈기가 부족해서인지;;
우연히 봤던 뭔가가 탁 독서에 도움이 되는 순간 짜릿하죠~^^

레삭매냐 2022-11-22 19:20   좋아요 1 | URL
발자쿠가 구사하는 너무나 다양
한 당대 이바구가 넘나 재밌습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중독 증상이 심해
지는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훅~ 다 읽어 버릴까봐 조
바심이 날 정도입니다 ㅠㅠ

바람돌이 2022-11-22 2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찾을수가 없어 도서관 대여라니.... 이런 웃픈 일이 종종 우리에게 일어나죠. ㅎㅎ

미지의 걸작 내용을 보니 앗 이건 사야돼가 바로 떠오르네요. ^^

레삭매냐 2022-11-25 10:58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다 뒤집어 쌌는데
도대체 찾지를 못해서 결국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더라
는... 별 일이 다 있습니다.

짧은 단편인데 참 매력적이
었습니다. 소장각 공감합니다.

서니데이 2022-11-25 2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91년이면 엠마누엘 베아르가 젊은 시절에 찍은 영화겠네요.
제인버킨이 나온다고 하니 오래전 영화 같기도 해요.
잘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2-11-27 17:30   좋아요 1 | URL
그렇죠 :>

제인 버킨은 노화가 에두아르
의 부인으로 나온답니다. 아마
이 때도 나이가 있었던 것 같
습니다.

베아르는 그야말로 팜므 파탈
의 전형을 보여주는 그런 느낌
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12-08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한니발 -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
필립 프리먼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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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에 군사전문가 리델 하트가 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 대한 평전을 읽었다. 그의 호적수는, 로마 역사상 로마를 그야말로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 카르타고 출신의 천재 전략가 한니발 바르카였다. 무려 하버드 출신 필립 프리드먼이 저술한 <한니발> 평전은 그야말로 옛날 이야기 읽듯이 그렇게 술술 읽을 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가독성이 뛰어난 책을 애정한다.

 

페니키아인들의 후손이 북아프리카에 건설한 도시 상업국가 카르타고는 북쪽에서 지중해 패권을 두고 경쟁한 로마가 추구한 제국주의와는 다른 결을 지닌 국가였다. 고대 페니키아/티레에서 유래한 바알 함몬 신을 숭배한 카르타고 인들은 몰크라는 이름의 유아 희생제의로 악명을 떨쳤다. 로마 사람들은 그런 카르타고인들을 야만인이라 부르며 경시하기도 했다.

 

카르타고가 지중해를 배경으로 성장할수록 로마와의 패권 대결은 불가피했고, 결정적 이권이 달린 시칠리아에서 결국 로마와 카르타고는 충돌하게 된다. 로마의 성장기에 시칠리아는 도시국가 로마에 식량을 공급하는 중요한 배후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제정기에 들어서는 이집트가 밀 공급기지 역할을 맡게 된다.

 

시민군을 주력으로 하는 로마 중장보병대의 결속을 파괴할 수 없었던 카라타고의 용병대를 결국 패배하고, 해상전투가 장기였던 카르타고 해군 역시 로마군의 코르부스 전술로 해전에서 패하고 제해권마저 로마에게 내주게 된다. 이런 조국의 처절한 패배를 보고 자란 새끼 사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카르타고 바르카 가문의 장남 한니발이었다.

 

첫 번째 포에니 전쟁의 참패로 카르타고는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다. 그들의 앞바다였던 지중해는 로마 해군의 독무대로 바뀌고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한니발의 아버지였던 하밀카르 바르카는 눈길을 이베리아 반도로 돌렸다. 위기는 기회인 법이다. 이베리아 반도에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겠다는 하밀카르의 의견에 카르타고 원로원의 보수파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하밀카르는 자신의 아들과 거의 사병에 가까운 병사들을 이끌고 이베리아로 떠났다.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불태우던 아들 삼형제는 하밀카르의 든든한 우군들이었다.

 

결국 하밀카르의 이 선택은 신의 한수였다는 것으로 판명됐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금과 은으로 로마가 설정했단 가혹한 전쟁배상금을 단숨에 갚아 버리고 다시 한 번 국가 부흥의 기회를 잡게 됐다. 물론 로마라고 해서 이베리아에서 부흥하는 카르타고에 대한 견제를 잊지 않았지만. 당장 일리리야와 지중해 동부를 제압하는데 정신이 팔려 이베리아의 호랑이 새끼가 대호(大虎)로 성장하는 걸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한편, 한니발은 아버지 하밀카르 밑에서 전무후무한 그런 전쟁의 천재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병사들을 인솔하는 리더십은 기본이었다. 사령관으로 천상의 지휘자로 군림하지 않고, 일개 병사들과 숙식을 함께하는 진짜 전우로서의 모범을 보였다. 공격에 있어서는 가장 먼저 앞장을 섰고, 후퇴할 적에는 가장 어려운 후위를 자처했다. 이런 전장에서의 리더십이야말로 훗날 로마 전역을 휩쓸면서 고국의 지원을 하나도 받지 못하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십 수 년간 로마와 동맹시들을 공포에 몰아넣은 원동력이 되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로마와의 결전을 대비해서 힘을 키우고 병력을 모집하고, 보급물자에 40마리의 코끼리 부대까지 마련한 한니발은 이베리아로 자신을 요격하러 온 로마 군단들을 따돌리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초겨울 알프스 산맥을 넘는 기발한 전술로 로마 본토 공격에 나선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숱한 병사들과 물자를 잃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5만 명의 병사들로 알프스 돌파에 나섰지만, 포 강 유역에 도달했을 때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누미디아 그리고 켈트 연합군의 군세는 25천명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한니발의 숙적 로마는 본토에서 계속해서 병력 자원을 충당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저력을 가지고 있었다. 2차 포에니 전쟁 초기, 한니발은 속전속결로 자신의 뛰어난 기병대가 활약할 수 있는 야전에서 로마군을 섬멸해야만 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무참하게 격파했던 승리의 추억과 카르타고 군을 야만족 부대라고 생각한 로마군 지휘관은 한니발의 능력을 무시했고 곧 시작된 티키누스강, 트레비아강, 트레시메노 호수 등지에서 연전연패하기에 이른다.

 

우리의 뛰어난 이순신 장군처럼, 한니발 역시 고도의 심리전을 펼쳐 적장에 대한 상세한 정보 파악을 바탕으로 해서 자신이 원하는 장소와 시간에서 적을 유인해서 효과적으로 섬멸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한니발을 무찔러서 로마로 개선하겠다는 호승감에 사로 잡힌 로마군 지휘관들은 무턱대고 자신들의 군세만 믿고 카르타고군에게 달려들었다가 한니발이 치밀하게 구상한 포위망에 걸려 거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개별 전투 못지않게 한니발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로마와 동맹시들의 분열 작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에게 항복한 세력들에 대해서는 관대하게 대응했지만, 저항하는 곳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로 유린했다. 그리고 계속되는 전투에서의 승리로 시간이 갈수록 한니발에게 투항하는 지역들이 늘어났다. 로마 원로원에서는 한니발이 그동안 로마를 위협했던 적들과 다르다는 점을 깨닫고 지연 전술의 대가로 알려진 파비우스를 독재관으로 삼아 한니발을 상대하게 했다. “쿤크라토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진 파비우스는 한니발과의 야전에서의 정면대결을 기피하는 소모전으로 한니발의 원정군을 지치게 만들어갔다.

 

기원전 21682, 로마가 있는 병력, 없는 병력을 끌어 모아 만든 8만 명의 대군이 칸나이 평원에서 자신들보다 열세인 카르타고군을 마주했다. 로마에서는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를 사령관으로 삼아 한니발을 상대하게 했다. ‘노부스 호모출신으로 공명심에 불타는 집정관 바로는 파울루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니발을 무찌르는 공훈을 세우겠다고 한니발이 치밀하고 조심스럽게 만들어 놓은 덫에 스스로 기어 들어가 버렸다. 칸나이 회전에서 로마군은 자그마치 6만 명에 달하는 전사자가 발생하고 수천 명이 포로로 카르타고군에게 잡혔다.

 

바로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한니발은 곧장 적의 심장부였던 로마를 공략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결정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신중한 한니발은 일격필살의 승부 대신 지구전을 선택했고 이것이 2차 포에니 전쟁의 승부를 가름했다. 결국 포기를 모르는 로마가 젊은 사령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집정관으로 삼아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성공했다.

 

우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 원정대를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고립시켜 두고, 카르타고의 멀티격인 이베리아 반도 공략에 나섰다. 스키피오는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한 자신의 스승격인 한니발의 전략에 따라 이베리아의 수도격인 카르타고 노바(오늘날의 카르타헤나)를 공략해서 함락시켰다. 그리고 이베리아 주둔 사령관 격인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을 패퇴시키고,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수중에 넣는데 성공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본국이었다. 역으로 뛰어난 명장 스키피오의 역습을 받은 카르타고는 로마가 제시하는 가혹한 평화조약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본국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은, 한 때 로마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었던 시대의 명장은 빈손으로 귀국해야만 했다.

 

그후 한니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다시 전쟁을 도발한 로마 때문에, 은퇴한 명장 한니발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상대로 기원전 202년 가을 자마 전투에 나섰다. 그리고 로마군에게 패배했다. 로마 원로원의 강경파들은 계속해서 한니발의 조국 카르타고 타도를 외쳤다. 비록 적장이었지만, 한니발을 존경하던 스키피오가 비호해 주었지만 한니발은 조국을 떠나 해외로 망명해야만 했다. 결국 비티니아에서 자신을 추적해온 로마파견대에 사로 잡히기 전 그는 가지고 다니던 독약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역설적이게도 한니발 원정군과의 치열한 전쟁을 통해, 비로소 로마는 세계제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되었다. 고대 전쟁의 규칙에 따른 패배를 거부한 도시국가 로마는 한때 자신들의 성문 코앞까지 쳐들어왔던 한니발의 위협을 결국 이겨내는데 성공했다. 한니발에게 패전해서 병사들이 부족할 때마다, 로마인들은 나이 어린 소년병들까지 징집하고 노예병사들까지 편성하는 단결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조국 카르타고에서 해외 원정군의 눈부신 활약을 시기 질투한 한노 일파의 견제로 그 어떤 병력과 물자 지원도 받지 못했다. 어쩌면 로마인들에게 한니발 전쟁은 자신들의 조국을 지키기 위한 애국투쟁이었지만, 카르타고에게는 그렇지 않았던 게 아닐까. 저자 필립 프리먼은 에필로그에서 한니발 전쟁에서 카르타고가 승리했다면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을 거라는 예상으로 마무리한다. 이런 대체역사의 가능성이야말로 역사를 더 재밌게 만드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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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4 1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5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생의 첫출발 대산세계문학총서 74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선영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발자크 도전 7번째가 무사히 완료되었다. 발자크의 책들을 읽으면서 <백합의 골짜기>와 함께 수배해둔 책이다. 문지에서 나왔는데 이제는 절판되어 중고나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어야 한다. 나는 운이 좋게 중고로 구할 수가 있었다, 쌩유 알라딘 중고. 놀랍게도 중고책값이 6년 전보다 천원 오르는 신비로움을 이 책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중고가 시간이 가면 값이 오를 수도 있구나 싶었다. 게다가 볼펜 줄도 죽죽 가 있어서, 왜 내가 팔아먹으려는 책은 낙서가 되어 있으면 바로 매입불가 판정이 떨어지는지 알 수가 없더라. 다 그런 거지.

 

발자크의 소설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왜 또 서설이 길었나 모르겠다. 이놈의 삼천포병은 도무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때는 바야흐로 1822, 전 유럽을 주름 잡던 나폴레옹이 몰락한 지 대략 7년 정도 흐른 시점이다. 우리 장황설의 대가 발자크 선생은 또 이제 곧 이루어질 산업화로 사라져 버릴 당대 가장 인기 만점이었던 합승마차 산업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21세기 독자에게 날린다.

 

그렇다, 이제 곧 철마가 달릴 철도가 부설되면 도시와 도시 그리고 마을을 잇던 합승마차의 호시절은 지나갈 거라고 시대의 예언자는 확신에 찬 목소리를 외친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수익성 증대를 위해 과적과 인원 초과는 기본이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돈을 벌려면 승객의 안전 따위는 멍멍이에게나 던져 주라지. 아무튼 전직 기병대원 피에로탱은 합승마차에 승객을 꽉꽉 채워 달린다.

 

왜 느닷없이 합승마차 타령이냐고? 발자크가 바로 이 합승마차에 탄 어느 청년의 일대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려고 워밍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 주인공은 바로 19, 가난과 궁핍에 찌든 청년 오스카르 위송이다. 그의 어머니 클라파르 부인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신파니, 한 번 책으로 만나 보시길. 등장인물들의 썰을 다 풀자면 한이 없을 터이니 말이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이 허영 덩어리 청년은 자존심만 살아서 자신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게 된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서너번 정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삶이 얼마나 만만치 않다는 걸 절실하게 배우게 된다는 게 발자크가 <인생의 첫 출발>에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메시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나만 그렇게 생각할 지도.

 

합승마차에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많이 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은 바로 드 세리제 백작이다. 왕정복고 시절에 정무장관을 지내기도 하고, 돈도 많고 귀족 출신에 아리따운 부인도 있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다. 그런 드 세리제 백작이 왜 합승마차를 타고 자신의 영지인 프렐르 성관으로 가느냐고? 그건 바로 자신의 집사 모로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주 행세를 하며 숱한 삥땅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밀고했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모로 일당이 협잡해서 자신에게 돌아올 수익을 해먹으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밀행에 나선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아는 피에로탱에게 그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요청이 잘 수행되면 그가 새마차 구입에 절실하게 필요한 천 프랑을 주겠다고 언약한다. 예나 지금이나 돈의 위력은 가늠할 수가 없다.

 

그 와중에 한량 조르주와 가짜 화가 쉰네르를 자처하는 일행은 세상 물정 모르는 오스카르가 지루한 여행 기간 동안 자신들의 좋은 놀림감이 되리라는 걸 직감한다. 아니 그런 청년을 도와 주지는 못할망정 골려 먹을 궁리를 하다니. 그 또한 당대의 정경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오스카르보다 훨씬 더 세상을 산 이들이 청년보다 아는 게 많으니, 여러 가지 테스트로 그의 수준 파악하기란 누워서 떡먹기였으리라. 그의 사방이 기운 옷을 입은 오스카르의 입성은 그가 얼마나 궁핍한 지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않았던가.

 

합승마차에서 펼쳐지는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버렸다. 그리고 별 것도 아닌 일이 발끈한 오스카르가 바로 눈 앞에 있는 이가 드 세리제 백작인 지도 모르고, 백작의 집사 모로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둘은 예전의 연인 사이였고, 모로 씨는 오스카르의 후견인이었다)를 통해 알게 된 드 세리제 백작의 수치스러운 질병과 스캔들을 그대로 폭로해 버린다. 그 자리에 있었던 백작이 대로한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 철부지 오스카르가 합승마차에 오르기 전에 그의 어머니 클라파르 부인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입조심하라고. 하지만 이런 소설 서사에서 그런 금기는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고, 더 나아가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후견인 모로 씨가 지배하는 프렐르 성관에 가서 세상사를 좀 배울 예정이었던 오스카르의 꿈은 초장부터 야무지게 박살나 버렸다. 분노한 백작이 부른 마차에 실려 다시 초라한 집구석으로 돌아온 오스카르 위송. 의붓아버지는 무슈 클라파르가 얼마나 고소해 하던지. 그런 걸 보면, 비록 자신을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는 의붓아버지지만 오스카르의 실체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았나 싶다.

 

클라파르 부인은 그간 소원했던 연줄인 카르도 외삼촌을 동원해서 오스카르를 미래의 소송대리인으로 만들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그렇지 세상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지. 그렇게 간신히 정신 차리고 데르슈 사무소에서 정신을 차리나 싶었던 허영덩어리 오스카르는 다시 한 번 합승마차의 악연 조르주를 만난 신세를 망칠 만한 두 번째 재앙에 손을 대게 된다. 그야말로 말마따나 이 정도면 구제불능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래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결국 인생의 막장 코너에 몰리게 된 오스카르는 군에 징집되어 기병대원으로 알제리에서 마지막 기회를 잡게 된다. 합승마차 부분과 달리 후반에서는 좀 급하게 진행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현란한 전개가 펼쳐진다. 완행열차에서 KTX로 갈아탄 그런 느낌이랄까. 막타 전투에서 드 세리제 백작의 유일한 아들을 구해내지만, 그 때 입은 부상으로 오스카르는 한쪽 팔을 잃게 된다. 그리고 백작의 아들 역시 부상으로 죽는다. 어쩌면 이 영웅적 행동으로 오스카르는 철부지 시절 백작에게 입힌 치욕을 어느 정도 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퇴역한 대령이자, 드 세리제 백작의 지원으로 보몽의 징세관이 된 오스카르 위송은 어머니 클라파르 부인과 함께 여전히 운송업을 종사 중인 피에로탱의 합승마차에 오른다.

 

소설 <인생의 첫 출발>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822년은 물질주의가 만연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혁명과 전쟁 그리고 제정을 거치면서 좋았던 시절의 선한 가치들은 모두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노후를 보장할 그놈의 연금에 목을 매달기 시작했고, 잇달아 바뀌는 정권 교체기에 어디에 줄을 서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천당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역전을 반복했다. 이렇게 모든 게 불안정한 시기에 사람들은 에퀴(5프랑 짜리 주화)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노회한 물질주의자로 대변되는 무슈 모로는 드 세리제 백작의 집사로 출발해서 축재에 열심이었다. 비록 백작에게 발각되어 파면되기는 했지만 그간 모아 놓은 돈으로 이번에는 부동산업자로 변신했다. 마지막에 그렇게 모은 돈으로 그는 정치판에 뛰어 들어 의원 나리가 되기도 했다.

 

미남자에 멋쟁이로 통하던 조르주 마레는 그렇게 허랑방탕하고 통음난무의 시절을 보내고 나서 인생역전에 성공한 34세의 오스카르 위송과 마주하게 된다. 철부지 소년은 15년이 흘러 세상의 단맛쓴맛을 모두 보고 나서 비로소 성인이 되었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완벽해야 한다는 말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모습이다. 인생의 첫 출발은 치욕스러웠지만, 두 번의 큰 재앙을 통해 삶의 교훈을 배운 남자는 가슴팍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단 명예로운 퇴역 군인으로 금의환향했다.

 

발자크의 소설들은 중독이고 수렁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소설의 세계에 빠져 드니 말이다. 바로 <어둠 속의 사건>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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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1-18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 레삭매냐님의 발지크 읽기는 완전 특급행 열차 같아요~!!

레삭매냐님 글 보고 우주점가서 발자크를 검색했는데 <고리오 영감> 밖에 없더라구요 😅

레삭매냐 2022-11-18 16:09   좋아요 1 | URL
제가 선수를 친 모양입니다 :>

순식간에 발자크 네 권을 읽었
네요. 이러다 번아웃이 올 것 같
아 잠시 쉬고 나서 다시 읽어야
지 싶습니다.

전 <외제니 그랑데>의 새로운
버전 출간을 기대해 봅니다.

바람돌이 2022-11-18 2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진게 없는 사람은 완벽해야 한다? 저 말입니까??? ㅎㅎ
레삭매냐님 덕분에 발자크에 점점 관심이 커지고 있는 1인입니다. ^^

레삭매냐 2022-11-25 11:00   좋아요 1 | URL
저는 가진 것도 없고...
완벽해질 가능성도 -
뭐 그랬다고 합니다.

발자쿠는 고저 사랑입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