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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첫출발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74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선영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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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크 도전 7번째가 무사히 완료되었다. 발자크의 책들을 읽으면서 <백합의 골짜기>와 함께 수배해둔 책이다. 문지에서 나왔는데 이제는 절판되어 중고나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어야 한다. 나는 운이 좋게 중고로 구할 수가 있었다, 쌩유 알라딘 중고. 놀랍게도 중고책값이 6년 전보다 천원 오르는 신비로움을 이 책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중고가 시간이 가면 값이 오를 수도 있구나 싶었다. 게다가 볼펜 줄도 죽죽 가 있어서, 왜 내가 팔아먹으려는 책은 낙서가 되어 있으면 바로 매입불가 판정이 떨어지는지 알 수가 없더라. 다 그런 거지.
발자크의 소설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왜 또 서설이 길었나 모르겠다. 이놈의 삼천포병은 도무지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때는 바야흐로 1822년, 전 유럽을 주름 잡던 나폴레옹이 몰락한 지 대략 7년 정도 흐른 시점이다. 우리 장황설의 대가 발자크 선생은 또 이제 곧 이루어질 산업화로 사라져 버릴 당대 가장 인기 만점이었던 합승마차 산업에 대한 자신의 지식과 노하우를 아낌없이 21세기 독자에게 날린다.
그렇다, 이제 곧 철마가 달릴 철도가 부설되면 도시와 도시 그리고 마을을 잇던 합승마차의 호시절은 지나갈 거라고 시대의 예언자는 확신에 찬 목소리를 외친다.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수익성 증대를 위해 과적과 인원 초과는 기본이었던 모양이다. 그렇지 돈을 벌려면 승객의 안전 따위는 멍멍이에게나 던져 주라지. 아무튼 전직 기병대원 피에로탱은 합승마차에 승객을 꽉꽉 채워 달린다.
왜 느닷없이 합승마차 타령이냐고? 발자크가 바로 이 합승마차에 탄 어느 청년의 일대기를 독자들에게 소개하려고 워밍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 주인공은 바로 19세, 가난과 궁핍에 찌든 청년 오스카르 위송이다. 그의 어머니 클라파르 부인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신파니, 한 번 책으로 만나 보시길. 등장인물들의 썰을 다 풀자면 한이 없을 터이니 말이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이 허영 덩어리 청년은 자존심만 살아서 자신의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게 된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서너번 정도.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삶이 얼마나 만만치 않다는 걸 절실하게 배우게 된다는 게 발자크가 <인생의 첫 출발>에서 독자들에게 알리고 싶었던 메시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니 나만 그렇게 생각할 지도.
합승마차에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많이 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은 바로 드 세리제 백작이다. 왕정복고 시절에 정무장관을 지내기도 하고, 돈도 많고 귀족 출신에 아리따운 부인도 있는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다. 그런 드 세리제 백작이 왜 합승마차를 타고 자신의 영지인 프렐르 성관으로 가느냐고? 그건 바로 자신의 집사 모로가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영주 행세를 하며 숱한 삥땅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밀고했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모로 일당이 협잡해서 자신에게 돌아올 수익을 해먹으려는 것을 저지하려고 밀행에 나선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아는 피에로탱에게 그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고 하면서, 자신의 요청이 잘 수행되면 그가 새마차 구입에 절실하게 필요한 천 프랑을 주겠다고 언약한다. 예나 지금이나 돈의 위력은 가늠할 수가 없다.
그 와중에 한량 조르주와 가짜 화가 쉰네르를 자처하는 일행은 세상 물정 모르는 오스카르가 지루한 여행 기간 동안 자신들의 좋은 놀림감이 되리라는 걸 직감한다. 아니 그런 청년을 도와 주지는 못할망정 골려 먹을 궁리를 하다니. 그 또한 당대의 정경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오스카르보다 훨씬 더 세상을 산 이들이 청년보다 아는 게 많으니, 여러 가지 테스트로 그의 수준 파악하기란 누워서 떡먹기였으리라. 그의 사방이 기운 옷을 입은 오스카르의 입성은 그가 얼마나 궁핍한 지 있는 그대로 보여 주지 않았던가.
합승마차에서 펼쳐지는 천일야화 같은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버렸다. 그리고 별 것도 아닌 일이 발끈한 오스카르가 바로 눈 앞에 있는 이가 드 세리제 백작인 지도 모르고, 백작의 집사 모로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둘은 예전의 연인 사이였고, 모로 씨는 오스카르의 후견인이었다)를 통해 알게 된 드 세리제 백작의 수치스러운 질병과 스캔들을 그대로 폭로해 버린다. 그 자리에 있었던 백작이 대로한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참, 철부지 오스카르가 합승마차에 오르기 전에 그의 어머니 클라파르 부인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입조심하라고. 하지만 이런 소설 서사에서 그런 금기는 반드시 깨어지게 되어 있고, 더 나아가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후견인 모로 씨가 지배하는 프렐르 성관에 가서 세상사를 좀 배울 예정이었던 오스카르의 꿈은 초장부터 야무지게 박살나 버렸다. 분노한 백작이 부른 마차에 실려 다시 초라한 집구석으로 돌아온 오스카르 위송. 의붓아버지는 무슈 클라파르가 얼마나 고소해 하던지. 그런 걸 보면, 비록 자신을 마땅하게 생각하지 않는 의붓아버지지만 오스카르의 실체에 대해 잘 알고 있지 않았나 싶다.
클라파르 부인은 그간 소원했던 연줄인 카르도 외삼촌을 동원해서 오스카르를 미래의 소송대리인으로 만들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그렇지 세상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지. 그렇게 간신히 정신 차리고 데르슈 사무소에서 정신을 차리나 싶었던 허영덩어리 오스카르는 다시 한 번 합승마차의 악연 조르주를 만난 신세를 망칠 만한 두 번째 재앙에 손을 대게 된다. 그야말로 말마따나 이 정도면 구제불능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래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결국 인생의 막장 코너에 몰리게 된 오스카르는 군에 징집되어 기병대원으로 알제리에서 마지막 기회를 잡게 된다. 합승마차 부분과 달리 후반에서는 좀 급하게 진행된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현란한 전개가 펼쳐진다. 완행열차에서 KTX로 갈아탄 그런 느낌이랄까. 막타 전투에서 드 세리제 백작의 유일한 아들을 구해내지만, 그 때 입은 부상으로 오스카르는 한쪽 팔을 잃게 된다. 그리고 백작의 아들 역시 부상으로 죽는다. 어쩌면 이 영웅적 행동으로 오스카르는 철부지 시절 백작에게 입힌 치욕을 어느 정도 씻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퇴역한 대령이자, 드 세리제 백작의 지원으로 보몽의 징세관이 된 오스카르 위송은 어머니 클라파르 부인과 함께 여전히 운송업을 종사 중인 피에로탱의 합승마차에 오른다.
소설 <인생의 첫 출발>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822년은 물질주의가 만연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혁명과 전쟁 그리고 제정을 거치면서 좋았던 시절의 선한 가치들은 모두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모든 이들이 자신의 노후를 보장할 그놈의 연금에 목을 매달기 시작했고, 잇달아 바뀌는 정권 교체기에 어디에 줄을 서냐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천당에서 나락으로 떨어지고 역전을 반복했다. 이렇게 모든 게 불안정한 시기에 사람들은 에퀴(5프랑 짜리 주화)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노회한 물질주의자로 대변되는 무슈 모로는 드 세리제 백작의 집사로 출발해서 축재에 열심이었다. 비록 백작에게 발각되어 파면되기는 했지만 그간 모아 놓은 돈으로 이번에는 부동산업자로 변신했다. 마지막에 그렇게 모은 돈으로 그는 정치판에 뛰어 들어 의원 나리가 되기도 했다.
미남자에 멋쟁이로 통하던 조르주 마레는 그렇게 허랑방탕하고 통음난무의 시절을 보내고 나서 인생역전에 성공한 34세의 오스카르 위송과 마주하게 된다. 철부지 소년은 15년이 흘러 세상의 단맛쓴맛을 모두 보고 나서 비로소 성인이 되었다. 소설의 말미에 등장하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완벽해야 한다는 말을 그대로 실천에 옮긴 모습이다. 인생의 첫 출발은 치욕스러웠지만, 두 번의 큰 재앙을 통해 삶의 교훈을 배운 남자는 가슴팍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단 명예로운 퇴역 군인으로 금의환향했다.
발자크의 소설들은 중독이고 수렁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소설의 세계에 빠져 드니 말이다. 바로 <어둠 속의 사건>에 도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