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400. 치숙 (채만식)

전에도 그렇지만, 이번에 새로 읽을 때 역시 이 조카라는 인물은 전혀 낯설게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이 소설이 나온 1930년대가 아니라 바로 지금 21세기를 살고 있는 인물 같다. 그리고 그의 치숙은 지금도 여전히 우울증과 체념에 찌들어 허름한 방에 누워 (어쩌면 인터넷에 현실 한탄의 글을 끄적이고) 있다. '내지'라는 어휘 대신 '미국'을 넣어보면 이런저런 뉴스에 보였던 사람들의 행동, 원정출산, 위장입학, 등이 연상된다. 이미 그런 치졸한 행태가 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쌓여왔다. 그럼, 치숙이라는 소설은 뼈아픈 시대 풍자소설이 아니라 영험한 예언 소설이 되는 건가. 대를 이어 지속되는 가치를 칭송하고 힘없는 지식(인이라 자칭하는)을 비난했으니까. 갑갑하다.

 

81/400. 헤밍웨이 위조사건 (조 홀드먼)

유명작가의 사라진 원고를 위조한다는 설정은 김연수 작가의 <꾿빠이 이상>에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은 SF라 시공을 초월하고, 인물의 능력이 한없이 확대되기도 하고, 죽음이 더 비중있게 나온다. 헤밍웨이의 충실한(?) 독자였던 존 베어드가 헤밍웨이의 '존재'와 합일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소설의 첫 문장이 '머지않은 미래'를 향한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하지만 존 베어드가 사기꾼 캐슬과 결탁하는 과정이 너무 쉽게(혹은 허술하게) 그려지고 존의 아내의 성격도 작위적으로 오락가락한다. 소설이 이 거대한 플롯을 담기에는 너무 짧아서일까. 그래도 우주가 교차되어 새로 만나는 인물들이 달라져 있는 것은 흥미로웠다. (여기서 1Q84를 떠올린 건 흐뭇한 경험) 그덕에 이 짧은 소설의 중반부가 가장 재미있다. 하지만 클라이막스인 '그가 나고, 내가 그'인 순간과 영혼의 되감기 장면은 투박하기 이를 데 없다. SF 설정을 다 믿고 따라갈 준비가 되있던 독자를 이렇게 못 끌어당기다니,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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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0 11: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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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10 16: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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