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를 읽고나서 이 다채로운 모험담을 금세 읽을 줄 알았는데 오뒷세우스 만큼이나 직진을 못하는 나도 다른 책들을 만나느라 시간이 걸렸다.


일리아스의 주된 이야기 진행은 오십여일이지만 그 속의 대화나 이야기로 폭을 넓혔다면 이번 오뒷세이아는 삼십여일 안에 귀향길 십여 년이 녹아있다. 1권부터 이미 페넬로페의 베짜기 (시아버지 수의) 비밀은 밝혀진 후여서 그녀는 비난에 독촉에 시달리고 있다. 재혼의 결정권은 친정 아버지와 오빠들이 갖고 있는데다가 아들도 말을 안들음. 집이 자기 집이라고, 자기가 주인이고 남자의 일을 한다고 뻗댄다. 얘도 바다노인 협박하는 장면에선 아빠 닮은 게 드러나더군. 그리고 전장터에 나가서 소식 없는 당신 오뒷세우스...그는 계속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꾸미며 대화의 주도를 잡는 게 버릇인지라 아테네 앞에서 까지 허세를 부리다가 꾸중을 듣기도한다. 


아들이 메넬라오스의 궁전에 가서 듣는 아가멤논의 사망 이야기, 트로이 전쟁 이야기, 오뒷세우스가 나우시카의 궁전에서 이야기하는 모험담 등등은 시간과 장소를 거슬러 올라가고 내려오며 진행된다. (바람의 나우시카!) 그러다 이야기가 겹치는 순간 화자/오뒷세우스는 '아 잠깐, 내가 두 번 이야기는 안하는데?'라며 능청을 떨기도. 여러 디테일과 인물/신 들 사이의 관계가 흥미로웠다. 그들에겐 인맥과 재산이 지금 21세기 만큼이나 중요했고 전쟁터에 나가는 건 사업을 벌이거나 식민지 개척을 하는 셈이었으며 인신매매와 살인은 일상다반사로 (적어도 이 모험담에서는) 벌어진다. 칼과 창으로 적의 머리를 베고 찌르는 장면은 비린내가 나도록 생생하다. 그러다가도 그리스인들은 꼬챙이에 고기를 꿰어 구어 먹고 포도주는 희석 시켜서 마셨으며 손잡이 달린 술잔이나 항아리가 귀한 물건이었다. 장례식에서도 축제에서도 그들은 운동 시합을 한다. 우리가 노래를 부르고 고도리를 하는 식인가. 채식을 하는 섬사람들도 나오지만 주된 식생활은 고기와 보리.


7년 동안 오뒷세우스를 잡아두었던 칼립소는 그저 그런 요물이 아니라 여신이었고 오뒷세우스에게 영생을 주려 했다. 그는 조강지처를 그리며 거절했다지만 (아닌 것 같던데?) 힘의 관계에선 칼립소의 노예인 셈. 하지만 번역서에서는 '하오' 체로 반말을 하드라?! 감히. 칼립소는 공손하게 "-세요" 체를 하고.그래도 참고 곱게 보내주면서 여러 조언을 했으니 신은 인간 보다 도량이 넓으시지(제우스 빼고). 여러 면에서 키르케와 겹치지만 칼립소가 더 센 느낌이다. 인간을 돼지로 바꾸는 (센과 히치로의 행방불명) 키르케는 1년 남짓만 오뒷세우스와 함께 했으니.  


겹치는 인상은 폴리페모스(동굴의 외눈거인)과 안티파테스(식인왕)에서도 받았다. 소녀를 따라가서 왕을 만나는 (덫에 걸리는) 설정은 나우시카에서도 언뜻 긴장감을 더한다. 아무리 오뒷세우스의 전우들이 잡혀 먹히지만 그들이 욕심으로 쳐들어가고 훔치고 나쁜 '손님'의 모습이었기에 동정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말라는 짓만 하고 식욕과 물욕을 제어 못한다. 잡지 말라는 신의 소를 잡아 파티까지 하는 그들, 마침 기도하러 산에 올랐던 오뒷세우스 (어? 이거 모세 이야기 아니구요...)는 복장이 터질만도 하다. 쨌든 우여곡절 끝에 이타카로 왔고 (보물도 있음) 거지 분장으로 집에 간다. 그의 거지꼴에도 알아보는 건 20년 지나서도 주인을 기억하고 꼬리를 흔드는 개 아르고스. 어릴적 키워준 유모 할머니 뿐이다. 장수만세 의리만세 그리스 개. 아들도 부인도 그를 몰라본다. 몰라보라고 오뒷세우스가 거짓말을 한다. 일을 다 정리한 후에도 늙은 아버지에게 또 거짓말해서 울리는 천하의 사기꾼. 이 사람은 한계를 모른다. 자기가 정말 누군지, '아무도 아닌' 그 자신은 알까. 


청혼 깡패들은 108명이나 되는데 (그 혼령들은 죽은 후 헤르메스의 인도로 찍찍 거리며 저승으로 간다. 하지만 그들과 놀아났던 시녀 열둘은 죽은 자리에 그대로인지 잊힌채다.) 오뒷세우스 팀은 단 넷이 아테네의 도움으로 해치운다. 피바다. 그 중에 잔치에서 노래'만' 불렀던 가인은 살려두는데 8권의 데모도코스 가인이 떠오른다. 가인/시인은 소중하다. 호메로스처럼. 그래야 후세가, 21세기 코로나 시대에 집에 갇힌 한국의 아줌마가 그들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거든. 흐드러지는 꽃나무를 부엌 창밖으로 바라보면서 시지푸스의 밥상을 거듭 차리고 치우고 설겆이를 하고 그들 영웅, 혹은 사기꾼에 살인자들을 생각하거든.


그리고.... 그 모든 난리의 중심에 있는 헬레네를 생각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환향ㄴ이지만) 왕비로 잘 살고 있는 헬레네. 고통스러운 전쟁이야기로 남편과 텔레마코스가 염려되어서 그들의 포도주에 약을 타는 (응????) 사람. 그 약은 눈 앞에서 가족이 살해 당해도 눈물 나지 않게 만드는 거라고 (마약!!) 합니다만. 게다가 텔레마코스에게 나중에 결혼하면 신부에게 입히라면서 귀한 옷 선물을 한다. 텔레마코스가 기쁜 마음으로 그걸 받아서 신부에게 입히겠나. 정말 속 편하게 아름답고 복 받은 헬레네. 아빠가 제우스.  


그리고 또 하나의 밉상 아가멤논. 이미 그는 부인 (헬레네의 (이부) 언니. 그러니까 이들은 겹사돈)과 그의 정부에게 살해당해서 저승에 있다. (서운해 말아요, 내가 그대의 비극을 꼭 챙겨 읽을라니까.) 그는 성대한 장례를 치룬 아킬레우스 (역시 혼령)을 부러워하고 정숙한 부인 페넬로페 이야기에 다시 속이 쓰리다. 샘이 많은 사나이, 아가멤논.  


누가 뭐래도 주인공 오뒷세우스를 또 또 생각한다. 그는 거짓말에 능하고 살아남기에도 능하다. 그가 이끌었던 지역 부대가 전몰해서 혼자만 돌아오지만 그 지도자에게 그 패배의 값을 묻는 사람이 없다. 대신 패악질로 죽은 108명의 가족이 칼과 창을 들고 복수하러 와서 '또' 전쟁이 나지만 아테네가 '끝'을 확실하게 외친다. 끝이라고! 시리즈 두 권 끝났다고! 완독했다고! 이제 그만하라고! 하지만 그럴리가. 이어지는 이야기들, 디테일들을 붙잡은 이야기들이 계속 나오고 또 나오는데. 가인/시인들을 살려뒀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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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4-07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글을 읽으니 그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에요^^ 가인들을 살려둔데는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시지푸스의 밥상에서 죄송하게도 크게 웃었습니다.ㅎㅎ;;;; 같은 책을 읽어도 쌓인 지식이 있어야 깊고 넓은 사고가 가능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 깨닫고 숙연해집니다. (너무 재미있어요. 꺅-_- 이런 말 밖에 못 하는 일인 올림ㅜㅜ;)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유부만두님^^

유부만두 2020-04-07 16:15   좋아요 0 | URL
문나잇님, 마가렛 앳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 읽으세요!!!! 정말 짱이에요. 꺅꺆.
오늘 읽었는데 그 열둘 시녀들을 대동하고 페넬로페가 자신의 인생을 훑으면서 오뒷세이아가 실제론 어땠는지, 지금, 21세기의 저승에서! 티비도 박물관도 다 알아요. ㅋㅋㅋㅋ 쿨하게 말을 건네는 설정이라고요! 너무 좋아요!!!!! 엉엉엉

moonnight 2020-04-07 16:17   좋아요 0 | URL
앗! 그래요? @_@;;; 꼭 읽어야지. 불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