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밝히는 과학이 내리는 대재앙!!!

 

쓰라린 고통에 깨어나니 집도, 절도 없다. 아이도, 가족도 이웃도 이미 세상을 떠났다. 원전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방사능을 누출해대고 있다. 벌써 지구를 한바퀴돌아 낙진이 떨어진다. 소와 돼지 발굽이 달린 동물은 입과 발에 염증이 생기자마자 온동네에 있던 가축들에게 묻지마 살육을 자행한다. 비행기의 속도로 달리던 초고속철도는 주춤주춤 원인도 모른채 내달리고 있다. 오늘도 미국산 등골로 우려낸 음식을 든다. 지진, 쓰나미, 산불, 구제역, 조류독감, 광우병, 슈퍼박테리아, 원전사고, KTX. 유전자조작.. ...

안타깝게도 지금 이땅 저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디스토피아다. 재앙이 살짝 지금을 비껴서고 있을 뿐,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쳐올지 모른다. 산업혁명이후 과학은 프로메테우스를 자청했다. 불을 훔쳐다준 과학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화석연료란 불로 이백년남짓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자본주의의 얼굴은 점점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을 닮는다. 돈을 남기는 과학에 브레이크를 달려고 해도 화려한 성찬에 취한 주객은 그저 욕망에 쫓겨 갈채만 보낸다. 내 발등이 섞어 들어가서야 겨우 주춤거린다. 내 온몸이 타들어가고 머리 한쪽만 남아서야 겨우겨우 중독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경쟁과 박멸

이 사회는 여전히 하나밖에 모르는 전문가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사회는 그들에게 묻지 않는다. 그저 개발만 하라고 한다. 대박만을 원한다. 윤리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금광을 캐내는 광부처럼, 나노소자를 개발하고, 반도체소자와 백신을 얻기위해 끊임없이 원하는 것만 발라내는 작업을 한다. 그 모습은 흡사 전쟁을 닮았다. 적의 요새를 공격하고 진지를 탈환하고, 포화속으로 돌진에 돌진을 거듭한다. 연구자료와 책장 속엔 온통 전쟁터다. 멸균과 박멸을 해야할 뿐 미생물과 공존을 생각하는 연구는 드물다. 적진으로 가는 길에 내버려두거나 방기해둔 사체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과학의 담론 속에는 얼마나 이땅에 아픈이들이 있는지에 대한 사회담론, 생태담론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렇게 쟁취한 부가 그들로 피해받은 이들에게 돌아갈 몫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적어도 내이야기가 아니다. 불을 훔친 과학은 이렇게 사람과 자연과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내듯 끝없이 유린하고 군림해왔다.

편리의 이면

사람들은 편리함에 취해 위험함을 잊고 산다. 달콤한 편리함이 서서히 익을 무렵 위험함도 조금씩 자라나 저기 먼 곳으로 모인다. 하나 둘 셋! 돌연 멀어지던 위험함은 방향을 바꿔 돌진한다. 거대한 쓰나미로 편리함의 구석구석 모든 것을 원점으로 쓸어버린다. 사람들은 과학이 위험함까지 해결하는 해결사로 오해한다. 하지만 나노과학은 알아도 그것이 진폐,규폐를 유발하는 인체에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은 잊거나 관심조차 없다. 생명에 대한 집착은 이종장기가 기계부속품처럼 우리 몸에 끼워넣을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KTX로 인한 급행의 쾌감이 얼마나 많은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지 그 뒷면의 시스템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러다 어느 날 위험이 삶들을 송두리째 낚아챈 뒤에만 한탄한다. 그리고 남들의 일이므로 잊는다. 오늘도 위험함은 지구 반대편을 돌아 이곳 낯익은 거리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집중과 분산

사람들은 세계화를 좋고 친한 것으로 여긴다. 세계화의 콩고물을 얻을 수 있으므로 간도 쓸개도 모두 내주었다. 불과 수백년만에 철도, 고속도로와 인터넷정보망으로 똘똘 무장을 하고 있다. 돈이 가는 길은 거의 광속으로 여기저기 쏜살처럼 날아간다. 하지만 돈이 가는 길이지 건강이 가는 길, 좋은 삶이 가는 길이 아니다. 돈과 과학이 근친해서 그렇게 위험의 고속도로를 뚫어놓았을 뿐이다. 생명에게는 신대륙의 발견이란 빌미아래 중남미 문명이 백인의 세균에 초토화되었듯이, 도시로 도시로 모인 균들은 종과 종의 경계를 넘어 생존하려고 한다. 인수공통전염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매일 식탁에 오르는 5대양 6대주의 먹을거리들은 건강한가? 

시간

자본주의는 길어야 수십년 수백년 동안의 데이터만을 근거로 위험을 계산한다. 홍수가 나고 강물이 범람해도 기상이변의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지 않는다. 하루에 비가 700mm에 가까이 내려도 그것을 바탕으로 도로와 다리의 설계에 넣지 않는다. 끊임없이 똥을 누는 핵폐기물이 후대에 어떤 위험이 되는지에 대한 물음은 없고 그것을 가정하여 연구하지 않는다. 활성단층이라고 해도 과거의 흔적으로만 돌릴 뿐 위험지수로 품어서 활용하지 않는다. 화산이나 지진에 대한 기억도 만일이란 가정은 없다.

이땅위의 굶주리는 이웃과 사회적 약자는 지금까지의 과학에겐 뒷전이다. 이땅위에 굶주려 죽더라도 눈하나 까딱하지 않는 과학은 돈의 그늘에서 벗어난 자신의 시각을 갖지 못해 왔다. 과학만 발라내어 저기 성전위에 있는 놓인 성물로서 그것이 아니라, 굶주린 이웃과 생명을 밝히는 과학이 필요하다. 저기 도시로 도시로 향하기만 하는 과학이 아니라 지역과 헐벗는 이들을 구제하는 과학이 필요하다. 세밀하게 검수해내고 이력을 확인하고 오대양6대주의 식탁이 아니라 그 땅에서 나는 농산물을 먹을 자유와 권리에 과학이 기여하여야 한다. 고속도로가 아니라 지역을 살리는 자전거길, 올레길 같은 과학이 지금의 국면과 또 다른 갈래길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그물망에서 과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돈의 시녀만이 아니다. 편리를 가장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위험을 연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굶주리는 이들이 더 이상 삶을 빼앗기지 않도록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과학이 필요하다. 돈으로 치장한 과학에 찬사를 보낼 것이 아니라 의심의 눈길을 보낼 줄 알아야 한다. 시간에 바래어 위험을 자초하는 과학이 아니라 당당한 과학으로 만들어야 한다. 찬사를 보내면 보낼수록 그것은 위험으로 변질되어 부메랑처럼 박수를 보낸 이에게 돌아온다. 당신도 부지불식간에 편승을 한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에 대한 의심을 보태야한다. 순간의 방심들이 모여 여기까지 왔음을 느껴야 한다. 당대가 아니라 후손도 똑같은 생명이자 한표임을 명심해야 한다. 전문가들일수록 천성산의 도룡뇽이 터널공사로 물기가 빠져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아픔으로 느껴야 한다. 이땅의 아픔만이 아니라 저땅의 아픔도 똑같이 세계화되었다는 진실을 과학이 품도록 만들어야 한다. 과학은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같이 투명하게 내려다볼 수 있어야 한다. 그 길만이 과학의 고삐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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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 霧津 기행 o 이상한 나라의 렙츠 lefts

 

 

무진으로 가는 길목

 

그가 하는 일은 시간 지도地圖사이다. 마음 속에 있는 서로의 바램들을 모아 시간이라는 화폭에 조각조각 붙여 그리로 가는 지도(指圖)를 만드는 일이다.

그리움이 봄볕에 바래기 시작한다. 그리움이 한올 한올 벗겨지더니 아질아질 눈앞에서 서성이다 사라지길 되풀이 한다. 문득 그리움을 모아 보았다. 아질거리는 그 녀석은 손을 가까이 대면 촉촉한 습기를 내밀면서 앉는다. 그렇게 바래는 그리움을 모아모아 파릇파릇한 새순들 위에 놓자 그리움은 푸릇푸릇해지더니 곧 끓기 시작한다.

그리움이 끓을 무렵, 서편엔 달이 쫑긋거리면서 달려오는 것이다. 별도 반짝거리며 그리움을 스카프처럼 두르는 것이었다. 

그리운 마을로 떠난 것은 그쯤이다. 그리움이 물밀듯 밀려오다 끓어넘칠 즈음되어서야 그 마을로 향하는 시간의 길이 조금조금 실루엣처럼 비치는 것이다. 이제 이 마을의 시간 지도가 마무리 되어간다. 그리움이 앞으로 열 번 정도 끓어넘치게 되면 안개처럼 묘연했던 시간의 길과 지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리움이 결빙된 듯 바짝바짝 얼기만 할 뿐 도대체 따듯해지지 않는 것이다. 서글픔이 잦게 내리더니 그리움이 조금 조금 지쳐가는 것이다.

시간으로 난 문을 열고, 예전에도 그랬듯이 느낌을 예금하거나 느낌을 사고 팔 수 없는 그 마을을 다녀올 것이다.

 

시간을 접어만난 사람들

 

시간의 틈이 빡빡하다. 꾸깃꾸깃 틈을 몇 번 접을 무렵 매쾌한 냄새가 스며든다. 그렇게 황급히 빠져나오자 투명한 타워가 저 멀리 비친다. 거리가 스산하다. 버스가 날카롭게 다가서자 사람들이 몰려든다. 차창가 불빛들이 춤춘다. 춤추는 불빛들이 차창에 자꾸 튕겨 나간다.

이 도시는 지층에 고이접어둔 석유, 석탄을 이백년만에 모조리 쓴 연유로 해수면의 상승과 지각판에 가하는 압력이 커져 지진이 끊이질 않았고, 중세의 페스트처럼 해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후로 사람들은 모두 몇시간 빨리 지진에 대처할 수 있도록 림프절에 지진감응패치를 붙였다. 

패치를 붙인 이들은 지적감응도 빨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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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는 모든 것들은 흘러가기만 한다. 하수구로 끊임없이 꾸르륵 소리를 내면 느낌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느끼는 것에 대해 언급을 피했다. 꼬르륵 빨려들어가며 꼴깍 꼴각 생기는 진공의 틈새처럼 모두 그 느낌을 뱉어낸 덜그럭거리는 아는 것만 이야기해댔다. 아는 것을 날칼로운 칼날처럼 부딪치고 불꽃을 뱉어도 무감하다. 생각들을 필터로 걸러내고 쥐어짜고 조금이라도 느낌의 물기가 빠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봄이 와도 봄을 맞는 이 하나없고, 꽃이 피어도 꽃이 핀 것을 느끼는 이는 여름이 다 다가와서였다. 뜨거운 가슴의 노래를 토해내도 그들의 머릿 속에 들어가자마자 그 느낌과 아픔은 분쇄기처럼 갈기갈기 사그라들었다. 머리만이 표준어였다. 방언으로 이야기하려고 하거나 방언으로 정보를 전달하려는 시도는 무참히 밟혔다. 사투리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느낌이 먼저 불쑥 빗겨나왔다고 해서 내내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그렇게 머리주의자들에겐 불문율처럼 상황이 서로 끼워지면서 느낌들을 물과 기름처럼 밀어내며 마치 공모한 듯 연기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

 약기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홀로 서성거리다가 마음의 외로움이 지쳐 점점 하루의 끝점이 다다라서야 그것이 열쇠가 되어 상자의 자물쇠가 열리는 것이다. 그렇게 느낌은 외진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복용되었다. 다른 상자엔 어떤 느낌들이 스스로 달래는지 도통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실낯같은 느낌의 가닥만이 상자에 따로따로 보관되어 은밀하게 유통되었다. 물처럼 마신다. ....

마음의 말, 떨림, 말이 전하는 음악엔 관심이 없다. 얼마동안 울림을 전하려 애타고 간절했는지도 도통 눈치채지를 못한다. 세상은 마음이 많은 말, 가슴이 전하는 말, 손과 발의 지문이 다 닳도록 만든 삶의 말들로 넘치건만, 세상은 무색무취한 공기처럼 당연하다고만 여긴다. 꿀꺽꿀꺽 마실 수 있는.........................

 

바다로 뻗은 긴 방죽

 

나와 너가 조금씩 회자될 무렵이었다. 우리철학을 하는 모둠에서는 잠깐 잠깐 나오다가 사라지길 빈번했다. 서양철학의 밑둥이 잘리우고, 환원의 사상들이 초라해지길 반복해도 볕이 드리우지 않는 그늘에서 여전히 두터운 빙벽처럼 견고하다. 나를 돋구기만 한 이천년의 역사는 그렇게 독립된 나를 만들고, 독립된 나에게 자유를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평등 또한 저 지평선까지 밀어붙이고, 있지도 않는 미래를 담보를 잡아 신기루처럼 비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철옹성같은 나 옆에 너가 희미하게 있다는 사실이 이가 흔들거리듯 흔들흔들, 뿌옇게 보이는 것이다. 나 옆에있는 너는 관념속에서 서로주체로 보듬었지만, 또 나-너만 무리지어 나로 보이는 것이다. ....

그 사이를 스며든 복잡계 과학은 서양철학과 학문의 맹점을 여실히 드러내게 되었다. 경제의 합리적인 소비주체로서 개인은 여전히 구석기시대의 야생에서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집단 속에 나로서 파악을 해내지 않으면 무질서는 분석을 해낼 수 없었다. 질서와 무질서의 경계에서 서서히 과학의 성과는 드러나고 사람들의 관계와 복잡의 이면이 조금씩 안개처럼 걷히게 된다. 김하봉 교수와 김명민 교수, 박송규 교수 등 재야의 인문학적 성과는 우연한 기회에 갈래잇는 과학의 성과를 받아들이게 된다. 나와너, 너-나-너 속의 너에 대한 접근은 좀더 개별자 나와 개별자 너로 잇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이웃이란 집단성에 착목하게 된다...............

추구하는 공동체와 나에 대한 인식의 변환은 사회단체의 소비자 개인으로 환원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모임 속의 나에 대한 전환으로 이어져 좀더 다른 접근들이 시도되게 된다. 일회성의 강연은 지양되고 몇 번의 모임의 구성원들로 이어지는 겹침과 노력은 조금씩 공동체와 삶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온다. .......

 

4.

슬픔(이은봉)

살구나무와 통하다(이안)

마음(윤재철)

모르는척, 아프다(길상호)

동그라미(이대흠)

목련(김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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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느낀다는 건 언제나 '둘'에서 시작합니다.
    from 木筆 2014-07-04 09:28 
    목마른 사람은 물에 세상의 모든 맛이 담겨 있음을 압니다. 배고픈 사람은 흰 쌀밥에 최고의 맛이 담겨 있음을 알 거고요...이유를 따지고 논리를 만들기 전에, 마음이 먼저, 발이 먼저 그들에게 도달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세상을 구경하려는 자들에게는 어떤 느낌도 오지 않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는 무시한 채 먼 곳에서 뭔가를 찾으려는 자들에게도요. 잘 느끼는 사람들은 열심히 구하고, 열심히 움직입니다. 그러다 보면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그럴
 
 
 

 

생명 그리고 생태적 삶 (3)

 

과학적 시선과 생명

이종장기 개발 - 종간 장벽의 파괴와 적응 사례. 슈퍼박테리아(flesh eating super bacteria) 항생제 내성 정보 상호 전달 - 내성과 생태적 관계 고려, 수의학 반려동물, 축산, 수생양식... 에이즈, 광우병(양의 스크래피)

생명과학자가 생명을 안다면 이종이식 받은 환자는 강력한 면역억제제도 투여받는다. (치명적인 동물병원체는 인체에 적응하여 새로운 인체 병원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종이식이 일상화되면 될수록 위험해진다. 

이종 동물장기 누구를 위한 연구인가? 이런 연구에 투자되는 수백억의 연구비는 어째서 지금 지구상에서 기아로 죽어가는 수많은 이들에게는 사용되지 못하는가? 현재에 우리나라에서만 연구비를 들이고 있다. 호주는 개인 연구도 금지시키고 있다.
 

신종전염병 종간접촉증대/교역과 이동증가/고령화/공중보건/지구온난화/병원 및 의료활동 증대/인간 위주의 과학기술/신자유주의적 소비문화, 육식에 의한 집단동물사육/유전다양성 소실 인수공통전염병도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나노입자의 생체 독성 - 화장품, 진폐증

********* 

구 제 역 초동방역 실패/FDA 유전자 분석 자료 무시(책임 회피)/살처분 방식 고수

강화도에서 4월에 있었던 것이 겨울에 안동에서 유행한 것이다. 따라서 4월의 방역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자료를 공개하지 않고 베트남 여행객을 지목한다. 원래는 김씨내가 먼저 갔다왔고 권씨를 지목한다.(감기처럼) 이주노동자와 사회적 타살로 이어지게 되었다. 
 

 

뱀발.   

1. 위 내용은 (1)과 (2) 사이 발표한 것이다. 따로 한꼭지를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따로둔다. 인터넷 정보대를 가동해보니 강연분량이 학생대상 4강정도의 분량이다. 그리고 발표자료와 정본은 아니지만, 공개된 것을 구할 수 있어 다행이다.(물론 다시 연락해서 받으면 되겠지만 내친 김에 마무리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 수고로움을 던다.)  생명의 개체고유성, 다양성은 기본적으로 종간 장벽을 만들어 놓은 셈인데, 지금의 과학지식은 우매할 정도로 담론의 수준이 전쟁과 정복이다. 다른 동물의 장기를 꺼내어 이식하면 되고, 박멸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데도 하나밖에 모르는 현대과학은 브레이크없는 기관차처럼 돌진한다. 

2. 복잡계의 접목, 그리고 철학적 사고(나-너) 관계속의 나가 아니라 빚진 나, 지금여기, 삶을 연관하여 설명한 점이 돋보였다. 다소 무리하게 복잡계 과학의 특성과 이야기하고자 한 바를 결합시킨 것이 쉽지는 않았고 무리한 느낌이 있었지만 말이다. 서구의 과학, 철학적 시선은 무척 부족하다. 진배샘,연두부,삼국장과 몇가지를 덧보태었다.  

3. 일상에서 인문 人紋 속엔 과학도 철학도 삶도 너도 나도 따로 놀 곳이 없다. 서로 어우러지고 함께 느끼지 못하는 순간 또 다른 위험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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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그리고 생태적 삶 (2) 

 

진실과 사실의 구별  (지혜와 지식)

진리-진실은 시대가 변화해도 공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사실은 그 시대 집단의 합의된 믿음으로 볼 수 있다. 편리해졌다는 것은 욕망이 충족되었다는 점이다. 편리와 같은 속도로 욕망은 키워진다. 현대과학 역시 시대의 한계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본주의적 시각으로 점철되어 있다. 침대는 과학이다처럼 막연한 신뢰를 주는 종교로 된 것이다.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이란 관계의 단절과 왜곡으로 볼 수 있으며 기본적으로 상대가 타자화시킨 대상으로 존재한다. 이렇게 왜곡된 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 비폭력이라고 본다. 폭력은 강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약자도 체념이란 형태로 폭력을 행사한다. 이런 측면으로보면 억압적 상황에서 침묵은 동참이다. 이에 비해 참여하는 존재는 억압적 상황에서 관계 회복을 위한 적극적 삶의 자세라고 볼 수 있다. 폭력은 우리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노출되어 있다. 생태적 관계-사회적 관계-심리적-생물학적-물리 화학적인 측면까지 폭력의 중층구조 속에 드러나 있다.

진실과 사실의 틈새 - 세상은 사실로 이루어져 있다. 언젠가 진실은 밝혀지지만 항상 이기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 사실과 사법적 사실. 세상은 원래 억울한 것이다. 사실이란 힘이자권력에 기반하고 있다.

복잡계과학의 특징 

복잡계 과학의 출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환원론에 의한 유물적 기계론이 한계에 맞닥뜨렸다. 다윈의 진화론과 생태학의 접목이 필요하며 자기조직화 현상과 초기조건과 예측 불가능성, 선형적 질서와 무질서 사이를 다룬다.

1. 상전이 현상(임계상태, 극심한 변화의 가장자리. 상전이를 통한 창발.) 2. 척도 독립성(대소현상의 동질성-초기조건의 중요성, 멱함수-지진, 산불) 불조심을 너무 철저히 해서 산불이 난다. 초기조건이 커지기 때문이다. 3. 부익부빈익빈 - 맛집이 덩치를 키우면 똑 같은 조건이어도 확장을 하면 잘 되지 않는다.

개체성과 나

개체성(개인 역사의 시간적 중층구조)은 세가지로 구분하여 보면 각기 다른 특징을 갖는다.

몸 - 시간의 누적, 이기적 유전자, 생사(개체의 반복) 정신 - 새로운 학습, 자의식(몸의 종속성), 마음 - 구체적인 실체나 직선적 시간없음. 개체화된 마음과 근원으로서 마음. 말의 감옥에 갇혀 있다. 중세사람이 미생물을 몰랐으므로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정신은 물질화되지 않는 신체라고 생각하지만 마음은 육체와 별도로 논다.

 

생명현상, 복잡계, 철학 그리고 나-너의 삶 

상전이 -깨달음 悟 (임계성, 은산철벽) 

척도독립- 대소의 차이없음(세수하며 코 만지기). 초기조건의 민감도, 나비효과, 작은 일상의 소중함-지금 이 자리
부익부빈익빈 - 각자 삶의 몫, 삶의 역사성(업)
깨달음(오悟) 깨어있음(각覺)-에머전시 깨어있을 때 차별이 아닌 차이로 보인다.
간절함이 있어야 인식의 전환은 저절로 생긴다.   

세수하며 코 만지기 - 문제의식을 느끼게 하고 상황을 만들어 준다. 



 

복잡계적 반복에 의한 삶의 의미 -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지금 삶이 얼마나 따분할 것이다. 오직 길들여지지 않을 때, 내 삶은 어린 시절과 같이 항상 새롭고 경이로운 나만의 경험으로 가득하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지혜의 세계에서는 아는 만큼 보이지 않는다. 너무 알려고 하지 말고 느끼며 살아가기!

프랙탈적 삶의 반복과 차이 - 삶의 반복성이야말고 개체 고유성의 근거이며, 삶의 풍요로움. 변화와 반복 속의 창발되는 지금 이 자리에서의 일상의 소중함. - 각 개체적 삶의 경험이 지니는 고유성과 온전함, 그리고 엄숙함.(개체고유성이라는 의미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생명의 역사성과 진화의압력: 지금 이 자리에서의 진화.

생명체는 아름다운 욕망

- 삶 나의 욕망이 만들어 가는 관계 덩어리
- 사람, 동물, 식물, 그리고 미생물, 모두는 이 생태계를 이루는 대등한 구성원이자 동생
- 너와나, 상호의존적 관계성, 경계인의 삶과 나눔의 자세

나 자신 일상에서 반복되는 삶에서 스스로 열려 있다면, 매 순간 새로운 다양과 자유로운 해방을 체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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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그리고 생태적 삶 (1)

 

진정한 생명 존중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으면 한다. 생명이란? 물질이 150여 원소밖에 되지 않지만 이 원소로부터 아름다운 생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았으면 한다. 형태와 대사작용(항상성), 자기복제, 진화를 생명의 요소라고 볼 수 있는데 다소 생소한 느낌이 들겠지만 마지막 진화 넣을 수 있다. 이렇게 쪼짠하게 파고 들기만 하는 이공계 박사의 시각도 있지만 미대의 한교수는 생명은 살아있다! 보고 느끼고 표현하는 것!!!라고 말씀해서 더 가슴으로 새길 수 있는 것 같다.

대상이란 우리가 바라보는대로 존재한다. 세상은 나의 시선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자연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짚어보자. 우주는 스티브호킹 등의 과학자에 따르면 150억년의 시간을 담고 있다.(생명의 역사성), 그 시간의 기다림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모기 한 마리도 그 시간을 가지고 있다. 잘 생각해보면 수많은 생과 사를 담고 서있다. 죽음에 대해 근대가 사는 것만이 최고라는 인식을 불어넣게 되어 당연한 것으로 생각지 않는데, 죽음을 평범하게 봐야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태계의 중층 연계구조] 생태계는 극미세한 원자, 분자구조로 시작하는 물리화학적관계로부터 생물학적관계/심리적관계/사회적관계/생태적관계로 연결지어 살펴볼 수 있다. 그런데 그 관계마다 어느 시점에 비약적인 도약이 생긴다? 예측할 수 없지만 관계의 덩어리에서 뭔가 말랑말랑한 것이 생기는 것 같다. 몇가지 용어를 정리해두고 가자.
생명체(생명현상을 나타내는 물체, 개체고유성), 생태계(각 생명체의 어우러짐), 생명(진리, 길, 영성, 모든 존재의 근원) 

생명 현상의 특징은 개체고유성과 다양성이다. 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해부 생리적인 측면에서 개체고유성을 살펴보면 정신적 나와 신체적 나로 이뤄져있다. 신경(정신적 자기), 면역(신체적 자기)으로 구분해보자. 해부-생리적인 측면에서는 영양만 있으면 수정란을 거쳐 발생이 완료되지만, 기관이 제 기능을 하고 생명이 개체의 고유성을 가지려면 형성되기 위한 외부 자극의 필요성(자극,반응, 기억, 망각-관계의 총체적 누적)이 필요하다. 예전엔 농아가 많았는데 이는 가벼운 중이염이 커져서 외부의 자극에 둔감해져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지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지금은 거의 없다.

철학의 근본 질문이 될수도 있겠지만 정신적인 나가 어쩌면 그렇게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신체의 자기의 경우 신장을 이식하면 면역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으로 봐도 스스로 나를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 개체고유성은 주위의 관계에 의존한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서양식으로 분석한다. 전체에서 부분으로만 보려고 해서 정작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한다.

생명의 특징으로 또 하나 척도 독립성을 살펴볼 수 있다. 생명은 관계의 덩어리다. 된장찌개의 요소와 성분으로 구성되는 그 이상의 된장찌개처럼 기계적인 결합 이상의 무엇이다. 관계들도 어머니의 손맛처럼 바람직한 관계가 있다. 생명의 창발현상을 착안한다. 구성성분으로 예상할 수 없는 현상이 복잡계다. emergence 관계하다가 임계상황에 이르면 변화한다. 프랙탈로서 생명현상 - 자기반복을 통해 전체이면서 부분이고 부분이면서 전체인 관계이다. 생명체는 몸을 매체로 하여 개체고유성이라는 생명현상을 나타낸다. 프랙탈과 카오스라는 열린 관계 속에 생겨나는 창발현상이다. 개체고유성은 구체적 실체가 없는 관계로부터 나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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