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밝히는 과학이 내리는 대재앙!!!

 

쓰라린 고통에 깨어나니 집도, 절도 없다. 아이도, 가족도 이웃도 이미 세상을 떠났다. 원전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방사능을 누출해대고 있다. 벌써 지구를 한바퀴돌아 낙진이 떨어진다. 소와 돼지 발굽이 달린 동물은 입과 발에 염증이 생기자마자 온동네에 있던 가축들에게 묻지마 살육을 자행한다. 비행기의 속도로 달리던 초고속철도는 주춤주춤 원인도 모른채 내달리고 있다. 오늘도 미국산 등골로 우려낸 음식을 든다. 지진, 쓰나미, 산불, 구제역, 조류독감, 광우병, 슈퍼박테리아, 원전사고, KTX. 유전자조작.. ...

안타깝게도 지금 이땅 저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디스토피아다. 재앙이 살짝 지금을 비껴서고 있을 뿐, 언제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닥쳐올지 모른다. 산업혁명이후 과학은 프로메테우스를 자청했다. 불을 훔쳐다준 과학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화석연료란 불로 이백년남짓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자본주의의 얼굴은 점점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을 닮는다. 돈을 남기는 과학에 브레이크를 달려고 해도 화려한 성찬에 취한 주객은 그저 욕망에 쫓겨 갈채만 보낸다. 내 발등이 섞어 들어가서야 겨우 주춤거린다. 내 온몸이 타들어가고 머리 한쪽만 남아서야 겨우겨우 중독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경쟁과 박멸

이 사회는 여전히 하나밖에 모르는 전문가들을 양산해내고 있다. 사회는 그들에게 묻지 않는다. 그저 개발만 하라고 한다. 대박만을 원한다. 윤리를 묻지 않는다. 그들은 금광을 캐내는 광부처럼, 나노소자를 개발하고, 반도체소자와 백신을 얻기위해 끊임없이 원하는 것만 발라내는 작업을 한다. 그 모습은 흡사 전쟁을 닮았다. 적의 요새를 공격하고 진지를 탈환하고, 포화속으로 돌진에 돌진을 거듭한다. 연구자료와 책장 속엔 온통 전쟁터다. 멸균과 박멸을 해야할 뿐 미생물과 공존을 생각하는 연구는 드물다. 적진으로 가는 길에 내버려두거나 방기해둔 사체에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다. 과학의 담론 속에는 얼마나 이땅에 아픈이들이 있는지에 대한 사회담론, 생태담론이 들어가 있지 않다. 그렇게 쟁취한 부가 그들로 피해받은 이들에게 돌아갈 몫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적어도 내이야기가 아니다. 불을 훔친 과학은 이렇게 사람과 자연과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내듯 끝없이 유린하고 군림해왔다.

편리의 이면

사람들은 편리함에 취해 위험함을 잊고 산다. 달콤한 편리함이 서서히 익을 무렵 위험함도 조금씩 자라나 저기 먼 곳으로 모인다. 하나 둘 셋! 돌연 멀어지던 위험함은 방향을 바꿔 돌진한다. 거대한 쓰나미로 편리함의 구석구석 모든 것을 원점으로 쓸어버린다. 사람들은 과학이 위험함까지 해결하는 해결사로 오해한다. 하지만 나노과학은 알아도 그것이 진폐,규폐를 유발하는 인체에 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은 잊거나 관심조차 없다. 생명에 대한 집착은 이종장기가 기계부속품처럼 우리 몸에 끼워넣을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 KTX로 인한 급행의 쾌감이 얼마나 많은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지 그 뒷면의 시스템에는 관심조차 없다. 그러다 어느 날 위험이 삶들을 송두리째 낚아챈 뒤에만 한탄한다. 그리고 남들의 일이므로 잊는다. 오늘도 위험함은 지구 반대편을 돌아 이곳 낯익은 거리를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집중과 분산

사람들은 세계화를 좋고 친한 것으로 여긴다. 세계화의 콩고물을 얻을 수 있으므로 간도 쓸개도 모두 내주었다. 불과 수백년만에 철도, 고속도로와 인터넷정보망으로 똘똘 무장을 하고 있다. 돈이 가는 길은 거의 광속으로 여기저기 쏜살처럼 날아간다. 하지만 돈이 가는 길이지 건강이 가는 길, 좋은 삶이 가는 길이 아니다. 돈과 과학이 근친해서 그렇게 위험의 고속도로를 뚫어놓았을 뿐이다. 생명에게는 신대륙의 발견이란 빌미아래 중남미 문명이 백인의 세균에 초토화되었듯이, 도시로 도시로 모인 균들은 종과 종의 경계를 넘어 생존하려고 한다. 인수공통전염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매일 식탁에 오르는 5대양 6대주의 먹을거리들은 건강한가? 

시간

자본주의는 길어야 수십년 수백년 동안의 데이터만을 근거로 위험을 계산한다. 홍수가 나고 강물이 범람해도 기상이변의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하지 않는다. 하루에 비가 700mm에 가까이 내려도 그것을 바탕으로 도로와 다리의 설계에 넣지 않는다. 끊임없이 똥을 누는 핵폐기물이 후대에 어떤 위험이 되는지에 대한 물음은 없고 그것을 가정하여 연구하지 않는다. 활성단층이라고 해도 과거의 흔적으로만 돌릴 뿐 위험지수로 품어서 활용하지 않는다. 화산이나 지진에 대한 기억도 만일이란 가정은 없다.

이땅위의 굶주리는 이웃과 사회적 약자는 지금까지의 과학에겐 뒷전이다. 이땅위에 굶주려 죽더라도 눈하나 까딱하지 않는 과학은 돈의 그늘에서 벗어난 자신의 시각을 갖지 못해 왔다. 과학만 발라내어 저기 성전위에 있는 놓인 성물로서 그것이 아니라, 굶주린 이웃과 생명을 밝히는 과학이 필요하다. 저기 도시로 도시로 향하기만 하는 과학이 아니라 지역과 헐벗는 이들을 구제하는 과학이 필요하다. 세밀하게 검수해내고 이력을 확인하고 오대양6대주의 식탁이 아니라 그 땅에서 나는 농산물을 먹을 자유와 권리에 과학이 기여하여야 한다. 고속도로가 아니라 지역을 살리는 자전거길, 올레길 같은 과학이 지금의 국면과 또 다른 갈래길을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그물망에서 과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돈의 시녀만이 아니다. 편리를 가장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위험을 연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굶주리는 이들이 더 이상 삶을 빼앗기지 않도록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는 과학이 필요하다. 돈으로 치장한 과학에 찬사를 보낼 것이 아니라 의심의 눈길을 보낼 줄 알아야 한다. 시간에 바래어 위험을 자초하는 과학이 아니라 당당한 과학으로 만들어야 한다. 찬사를 보내면 보낼수록 그것은 위험으로 변질되어 부메랑처럼 박수를 보낸 이에게 돌아온다. 당신도 부지불식간에 편승을 한 것은 아닐까? 우리의 삶에 대한 의심을 보태야한다. 순간의 방심들이 모여 여기까지 왔음을 느껴야 한다. 당대가 아니라 후손도 똑같은 생명이자 한표임을 명심해야 한다. 전문가들일수록 천성산의 도룡뇽이 터널공사로 물기가 빠져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아픔으로 느껴야 한다. 이땅의 아픔만이 아니라 저땅의 아픔도 똑같이 세계화되었다는 진실을 과학이 품도록 만들어야 한다. 과학은 우러러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같이 투명하게 내려다볼 수 있어야 한다. 그 길만이 과학의 고삐를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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