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統)으로 사유하다

전체성에 대한 사유 - 우리가 보지 못하는 생각과 행동의 흔적들을 긁다

 

 

사람들은 여러 현상에 대해 알고싶어 한다. 그리고 이런 저런 앞뒤가 확인되고 맥락이 짚어지면 그래그래 '이래서 이렇게 된 것이군' 하고 결론을 내린다. 여러 싸움들이나 여러 문제들, 가까운 것부터 먼 것까지 이렇게 판단의 근거를 갖게 되면 마음도 홀가분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러 경황들은 한가지의 원인만 갖고 있지 않다. 때로 중요한 원인이 판명되었어도 또 다른 부분이나 미쳐 보지 못했던 부분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흔히 이런 사유습관은 이성적인 판단에 뿌리가 있다. 하지만 감정의 결들이 어떻게 흐르는지 잘 살피지 못한다.  비타민이나 지방, 단백질, 탄수화물의 기능적인 섭취만 강조한다거나 비료를 주면 그 농토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는지 관심없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어쩌면 이런 사유습관은 정답이 있는 문제나 단순화시키는 사고, 환원시키는 이론의 영향때문이기도 하다.


두번째, 기술에 대한 경도된 감정이다.  기술의 효용성으로 생기는 문제들을 기술이 또 해결해주겠지 하는 판단이다.  이런 선입견은 기술이 미치는 다양한 영향을 보지 못하게 한다. '어 이건 아닌데' 라는 의문이 종합적이면서도 문제를 다시보는 통찰감각이기도 한데 더 발전시키지 않는다. '아 뭔가 깔끔한 맛이 없는데' 라는 것도 입체적으로 보는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그런 종합감각에서 지속적으로 들여다보면 섣불린 한가지 결과로만 결론짓지 않을 수 있다.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서 용도 측면이 아니라 공간의 점유를 통해 사람들이 얼마나 드나들고 공간과 접촉하는 사람들이 변할 수 있다는 것도 살펴야 한다. 사람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감성과 감정을 바꾸거나 우연치 않게 바꿔버렸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세번째, 대부분의 운영단위는 이런 해결에 익숙하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음 일들을 처리할 수 없다는 염려가 있기도 하기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분절적인 사유나 의사결정습관이 오히려 문제를 키우기도 하고, 잘게잘게 쌓인 사소한 감정이나 습관, 문제로 인해 정작 뿌리마저 썩게 만들기도 하는 것은 대부분 경험하고 있다. 본말이 전도되는 일들이나 사건들은 이런 매개물들을 다 가지고 있다.

 

마음이 같이 움직이는 단위는 일만, 감정만 일방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그렇게 흐를 수도 없다. 전체를 조망하거나 담으려는 노력은 단락된 사유의 한계를 풀어줄 것이다. 시간에 좀더 강한 사유의 뿌리를 만들어줄 것이다. 일과 이성이 집중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를 흐르는 감정의 물꼬를 유연하게 돌릴 수 있도록 하는 방법도 줄지 모른다. 그리고 관심의 깊이가 한곳이 아니라 여러곳에 분산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예기치 못하거나 뒤늦게 발생하는 문제를 좀더 이성적으로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볕뉘.

 

1. 학문이나 전공의 위계는 이런 통찰을 주는 사유습관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일상에서부터 사건에 접근하는 문제, 해결해야하는 과제들. 이렇게 보면 융합이나 또 학제가 연결이라는 것도 좁은 사유나 노력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나'라는 것도 이성적인 판단만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날씨나 기분에 따라 끊임없이 변덕을 부린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쌓인 울화나 분노도 꿈의 가장자리로 들어와 감정의 날선부분을 비춰준다. 팀단위의 일로 뭉쳐진 그룹도 일과 감정들을 통째로 다루지 않아 심한 기복이 불편을 겪기도 하고, 팀자체가 와해되기도 한다. 시대의 감정이라는 것도, 시대의 분노라는 것도 사람을 여러 측면에서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조급한 해석과 조급한 판단에 맡기는 것보다 좀더 다양한 입장과 삶에 처해있는 사람들의 실감을 경청할 때 좀더 나은 대안이 아니라 삶에 근접할 수 있을 것이다.

 

2. 우리는 늘 시간이라는 재산이나 구장을 갖고 있는데, 프로축구가 아니라 동네축구처럼 공을 뺏는 것에만 혈안되어 있다.  조금 더 넓은 시야, 조금 넓은 안목, 조금 더 종합적인 호흡.  그것이 일도, 감정도, 아름다움도, 일상의 갑갑함을 풀어줄 근력을 만들어 줄 것이다. 오히려 사회와 세상에 통찰이라는 선물을 불쑥 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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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은 도망가지 않는다. 어떻게 남기고 헤아릴 것인가

 

 

음, 솔직한 바램이 있다.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긴 하다.  '왜?'를 알고 싶다. 모임을 통해 만들어지는 점, 그리고 점이 모여 만들어지는 선.  왜 이어지고 연결되는지.  모임의 전후, 책이든 사람이든, 편하게 너라고 부르자. '너'를 만나기 전후 느낌이나 선입견은 어떤 맥락으로 흘러버린 것인지. 모임을 갖게 된 설명은 하지 못하지만 그 어떤 것. 이렇게 말하니 점점 어려워지고 곤란하기도 할 것이다. 도대체 뭐를 하라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기도 할 것이다.


대개 만남은 일회성으로 끝난다. 바쁜 세상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인기있는 강사를 더 찾는다. 만나고 대면하게 되는 순간 질문을 해두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으로 끝나기 대부분이다. 좋은 인상이었는지, 고민의 지점이 어디었는지 잊힌다.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다. 분위기의 온도차이를 놓친다. 질문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강연을 듣고 나누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너무도 단선적이며 소비에 그칠 수밖에 없다. 참여자도 고민을 섞거나 궁금증을 이어나갈 길이 없다. 유명한 강사, 이름있는 이만 부를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구조를 갖게 된다. 텍스트 강독 모임을 통해 여러 시선으로 읽어 텍스트라도 남게 하는 방법. 책을 사전에 읽고 질문을 먼저 받고 이후의 과정을 진행하는 방법. 이것이 무리가 되면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하고 사후 질문, 그리고 연구자, 이후 발제-토론으로 이어가는 방법. 여러 소모임이나 강좌, 강독 전후의 질문들을 추려내고 모으고, 질문들이 소통될 수 있도록 하는 기획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대중강연을 바탕으로 그 궁금증과 속내를 질문으로 외화하여 그 질문을 연결할 수 있도록 하는 일들이 필요하겠다.


자본이 사회에서 생명력을 발휘한 것은 일상의 거래를 복식부기를 통한 기록이었다. 그것을 일상을 묶은 과학이자 발명이었다.  질문만이라도 남기고 기록하고 유통시키는 일은 마음에만 머물러서는 안될 것이다.

 

 

뱀발


0. 모임에 건네는 말.

 

1.  윤여일샘 문예아카데미 강연에 뒤늦게 참석한다.  일전 아카데미 책방에서 강독모임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채, 또 다른 제안을 건네 듣는다. 능력있는 연구자들은 대중과 대면할 수 있는 기회조차 갖지 못한다고 한다. 그리고 강연의 중심과 접점이 없어 밋밋한 소통이 아쉽다고 한다. 질문들을 먼저 받고, 또 다르게 나눌 수 있다면 어떨까. 그렇게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때 모든 강연이 없는 것보다는 낫기는 하겠지만, 이후를 보증하지 못하고 삶과 일상에 접목되는 부분이 극히 드물게 될 것이다.


 

2.  장하성교수님과 관계자라 강연전 식사를 같이했다. 편안하고 부드럽다. 책 속의 이야기와 역대 대통령의 스타일에 대한 코멘트도 듣게 된다. 강연을 들으면서 수많은 질문을 던졌다. 익숙한 질문들이기도 하고, 더 점화시켜야 할 질문들이기도 하다.  녹취와 일거수 일투족을 남기는 회의록은 무용하다. 없는 것보다 낫긴 하지만 앎의 나열은 의미가 적기도 하다. 간절함이나 깨달음에 근사하거나, 지속적으로 회자되어야 할 꼭지를 물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연습과 근력이 생기지 않는다면 더 좋은 잡지, 더 좋은 물음, 더 나은 일상, 더 좋은 기획이 나올 수 없다.

 

장하성 Capitalism in Korea 대전 강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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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북플을 감당할 수 없을 듯하여 프로그램을 삭제하였다.  생각도, 시선도, 글쓰기도 다 틀어질 것 같아 당분간 유보하기로 하였다. 저항의 깊이가 여문 뒤에나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뒤틀어져 기존의 호흡도 마음을 나누는 패턴도 아무 것도 되지 않을 것 같다.  끌려다니지 않는게 더 바람직한 것 같아서 그렇게 마음 먹었다. 끌고 다니는 것이 맞다. 칼끝이 아무생각없이 휘둘러지게 내버려두지 말고 칼자루를 잡고 의도대로 쓰는 것이 낫다.  앞 강연의 끝말이었기도 하지만 기술은 더 더군다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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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논쟁하지 못하는가

- (교화敎化장애) 앎은 나에게 고이기만 하고 너로 번질 수 없는가?

 

미술, 체육 교육이 없는 것도 큰 문제지만 정작 사회가 암기과목이라는 것은 치명적이다. 안다는 것은 체험과 연습을 통한 깨우침과 같은 것이다. 암기를 해버리듯이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가슴으로 통하지도 가지도 않는다.  머리에서 멈추어 버렸다. 정의도 권력도 권위도 논하지 않는다. 유행처럼 삼키고 말았다. 나누지 못한다. 정치에 대한 감과 생활 습속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대부분 한 집안의 분위기는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그 분위기를 세대를 거쳐 같이 가져간다.


발제를 하면서 다시 느끼게 된다. 독일의 시민교육, 아니 정치교육이 나치의 교훈 삼아 만든 3원칙 말이다.  하나. 강제성금지(교화나 주입)-자립적인 판단  둘. 논쟁중인 것은 논쟁으로 삼는다. 논쟁은 교육의 소금이다. 셋. 자신 관심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가 이 협약의 3요소이다. 이들이 교육내용의 결정이나 감독은 엄정하고 중립적인데 이 보이텔스바흐협약이다. 각 정당마다 예산을 지원해서 교육을 하게 한다. 하지만 철저하게 관리하고 지키는 것이 이것이다.


 

조금 세세히 살펴보자. 어떤 것이 강제성 금지해당되는지 보자. 동물보호를 목적으로 아기돼지 베이브를 단체관람시켰다.  지금 보다 '더 나은 목적'을 위해 자립적인 판단을 얻을 기회를 빼앗겼다고 교사들은 판단한다.  자율인가 교화인가 주입인가?  이것이 강제성 금지 원칙이다.  자칭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앎을 추구하는 인문수요자, 동아리까지 원하는 가치나 생각들을 더 좋은 것이라는 명목으로 교화시킨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지 이해하려하지 않는다. 남의 생각을 따지듯이 훌킨다. 나의 이념은 선이며 신자유주의는 악이라고 한다. 나의 가치는 당신보다 나은 것이며 당신은 아는 것이 없다고 정신적 하대를 한다.


시민교육이란 것은 철저히 몸으로 체득되는 것이 맞다. 앎을 삶켜 일상에서 소화시키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논쟁과 논쟁이라는 근력을 통해, 자신의 가치 생각의 이념이나 이해에 맞춰 확장하려는 것이다. 더 많이 알고, 더 해박하고, 더 알려하고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이런 과정을 겪어야만 진보가 잘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수도 분화할 수 있다. 자신의 입장이 어디에 처해있는지 느낄 수 있다. 청소년기에 시민교육을 체화하지 못한 사람들은 성인기에도 똑같은 오류를 겪을 수밖에 없다. 여전히 '나'에 머무른다. 모든 것이 '나'를 위주로 돌아가야만 한다. '너'를 겪어본 적도, 겪어낸 적도 없다.

 

유럽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정당에 대해서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사회문제, 자신의 문제에 대해 당당한 것은 철저히 몸으로 훈련한 과정때문이다.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한 훈련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 입장을 파악하고 실현시키는 것인가 사전 모의실천을 했기 때문이다. 권위와 사생활, 정의, 가정, 노동 등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늘 삶에서 재현되는 문제다. 그래서 암기하거나 많이 알거나 공부만 잘하거나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영국은 노동당이 2002년 집권하면서 '시민교육' 교과목을 개설하여 토론과 체험을 통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시켰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보수당 집권 뒤 폐지될 과목"이라고 여겼지만 10년동안 실시한 종횡단 연구를 통해 보수당 정권하에 시민교육은 강화됐다고 한다.


학교안밖에서 모두 자신의 문제를 담아 자신의 판단을 기반으로 여러 사실과 논쟁을 통해 자신의 관심을 타인과 사회에 재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이것은 인문학을 소비하고, 자신의 관점을 갖는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입장과 견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일이기도 하고, 다른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입장이 달라도 늘 여러 사안과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좀더 나은 합의를 가져갈 희망이기도 하다.

 

 

볕뉘.

 

1. 발제와 토론을 하다가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우리는 만나서 우리의 가장 큰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임금과 임금의 왜곡, 그렇게 삐뚤어지고 왜곡되는 일상을 교과나 논의의 중심으로 가져오지 않는다. 책 속의 고상한 가치나, 멋지고 인기있는 강사의 말씀과 은혜로 일상의 고통을 말려버린다. 설령 가져가더라도 또 일상에 치여 또 잊는다. '을'과 병, 정의 치떨리는 경험을 드러내놓지 못한다. 이야기하더라도 입장이 다른 이와 토론을 끌고 나가지 못한다. 토론을 끌고 가더라도 다시 만나지 않는다. 우리는 어쩌면 '비접촉의 세대'를 관통해왔는지도 모른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으므로 늘 교화시킬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로. 현실은 늘 언쟁으로 번져서 끝나버린 것처럼... ...

 

2. 65세이상 어르신들이 수십년 배운 결과를 전시한 민화전이 떠오른다. 민화는 선생님이 시킨대로 한결같이 똑 같았다. 가르치는대로 가르쳐준대로 예쁘게 그려놓았다. 그 많은 분들의 삶과 살아온 이력은 어디로 갔을까? 정말 그 그림에 담을 수 없었을까? 삶을 담을 수 있도록 함께하는 분들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평생교육에는 평생 취미와 취향, 그들의 삶은 왜 그곳을 부끄러운 듯이 피해다녀야 하는 것일까? 그들이 살아온 이력이 왜 담기고 숙성될 수 없는 것일까?

 

3. 많이 사람들을 만나는 편이다. 일터가 있으니 한정된 사람만으로 좁혀진 것은 아니다. 진보든 보수든 정치좌판은 싸움 일보 직전이다. 어떻게든 말빨로도 지면 지는 것이라는 강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근거와 사실, 더 확인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근거와 사실이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한 도구이다. 상대가 강하게 보이거나 더 안다고 조아리면 입장이 달라도 얘기조차 하려하지 않는다. 토론을 할 수도 없다. 토론이라고 해야 찬반, 정해진 패널만으로 토론을 했다고 착각한다.

 

4. 말을 만드는 것이 미련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너, 나 할 것없이 입시의 암흑을 통과하면서 삶의 자양분이 되는 과정을 생략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압축되지 말아야 할 것이 압축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교화시켜야 한다는 강박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5. 이땅에는 민주주의가 숨쉬지 않는다. 어디에도

 

141126 시민교육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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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4-11-28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던가... 상사가 회의 도중 어거지를 쓰고 화를 내면 그 자리에서는 ˝예, 확인 후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 자리를 피한 뒤 상사의 감정이 가라않으면 ˝최선을다했지만˝이라며 기름칠을 한 뒤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라는 대목이 있어요. 참 어이없는 얘기지요. 회의인데, 상사의 일방적인 명령을 듣는 자리가 아닌데, 이게 뭔가 싶어요.
사실 전 얼마전에 회의 도중 상사에게 또박또박 말대답을 해 아주 미운 털이 박힌 상태입니다. 반면 회의 도중 침묵을 지켰던 동료는 그 다음날 담배 피며 조근조근 달래서 상사를 설득했지요. 그 동료가 더 현명하게 처세를 한 건 맞지만, 찍혀서 요새 제 생활이 참 피곤하지만,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회의는 말빨 싸움도 아니어야 하지만, 위력 시위는 더더구나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울 2014-11-28 10:46   좋아요 1 | URL

아 어떡해요. ㅜㅜ. 힘의 위계는 약자에게 피해와 감정의 잔유물까지 떠넘기죠. 쿨하다는 얘기는 다 힘있는 편의 얘기죠. 게의치도 않는거죠.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 저도 여기저기 불통에 많이 시달립니다. 우리의 바닥은 어디까지인가도 생각해보고요. 민주주의는 참 어렵네요. 더 불편해야 하구요. `회의는 위력시위는 더더구나 아니어야 합니다.` 힘내세요.^^
 

 

'같아요' - '사물존대' - '좋아요'의 사이


판단, 숙고, 결박, 나르시즘 - 강연 중 책을 좋아하는 중년인 분이 이런 말을 한다. 당신 책 글의 서문을 읽느라고 혼났다. 어려워서 도대체 무슨 말인줄 몰랐는데 여러번 읽고읽고 나서야 읽어나갈 수 있었다. 중년 문자해독이 쉽지 않은 것 같다. 책을 보지 않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간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곤혹스러움을 마주치지 않는가 싶은 느낌이 순간 들었다. 책을 보는 일은 끊임없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자신을 돌아볼 기회조차 없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일과 삶이 치여 정작 삶과 자신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걸린다.


'~인 것 같아요', '커피 나오셨습니다' 말투는 생각이나 사람들의 습속, 관계를 말해주기도 한다. 술어가 다로 끝내지를 못하는 것.  청소년들에게서 '-인 것 같아요'라는 말투는 이들이 무엇에 대해 숙고하는 과정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행동을 하거나 판단 역시 쉽게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더 더욱 문제인 것은 '좋아요'이다. 사람들은 인정을 받았다라고 착각할 수 있는데, 이는 쉽게 강박을 낳는 것 같다. 대화도중, 한분은 "왜 나한테 좋아요를 누르지 않았어"라는 전화를 받고 그 즉시 페북을 삭제하고 들여다보지 않는다고 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우물에서 들여다보는, 내내 응시할 수밖에 없는 반의식과 무의식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사물존대'를 만든 발상과 현실화의 맥락이 궁금하다. 이것은 사실 개판(반려견의 시대)보다 더 심하다라고 여긴다. 


'좋아요'가 왜 '나쁜가', 사실 소통이 아니라 인정, 인정이 아니라 자신을 묶어두는 일인 것 같다.  도움받고 도움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좋아요'에 일상이 끌려다니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관계도 결핍되면서 얕아진다. 아마 알람소리는 모두 끄고, 필요한 정보를 끄집어내는 편으로 선택하는 습관을 들여야 아마 당신의 뇌도, 기억력도 조금은 좋아질 것이다. 그런면에서 폴더폰을 쓰는 사람들이 들어오는 정보를 막고 가려서 선택하는 것이 훨씬 관계의 농도를 짙게 가져가는 방편일 것이다. 정보는 밀려오고가는 사이 그 정보에 좋아요라는 스티커를 발부하다가는 끊임없이 그 빨간스티커에 끌려다니고 있는 당신을 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시대에 뒤떨어지게 말한다면 아무 생각없이 손이 가는 팝콘이나 감자칩 같은 것일 수 있겠다. 허우적거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스스로에게도 다짐하는 말이다. 입맛이 당기고 손이 갈때 구구단, 아니 21단이나 외우자. 훨씬 현명해진다. 더 시대에 뒤떨어지게 이야기하지만 멍때리면서 왜 텔레비전을 보았지밖에 없다.

 

 

볕뉘.

 

1. 중년의 말씀과 뒤풀이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는 숙고나 숙성이 없어진 것은 아닌가 싶다. 그것은 어려운 일로 다가오고, 끊임없이 얕은 관계들이 그나마 부담없고 견뎌나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그리고 그렇게 벌어진 틈으로 '상품이 나오셨습니다'가 더 고마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문화박약 현상은 안타깝게도 SNS가 불난집에 기름을 붙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숙고나 숙성이 오고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알아달라거나 알아줘야 한다거나 판단이 필요없는 얕은 말만 오고가고 필요한 감정만 고른다. 어쩌면 피폐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 언어학자도, 신경과학자도, IT업자도 아니지만 빠른 속도로 휩쓸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알라딘서재가 바뀌었다. 페북꼴 나지 않으려면, 책 읽는 이들에게 필요한 장치들은 무얼까? 글쎄, 아니올시다. 책은 더 팔지 모르겠지만 시장통이 될 것 같아 우려스럽다. 왜요? 왜그러세요?나 붙이고 싶다. 유행에 끌려다니다가 큰 코 다칠 수 있다. 브레이크가 많이 필요한 것 같다. 정신 줄 잡지 않고 다들 그냥 가게하는게 더 큰 문제이다.

 

2. 일장 일단이 있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단점을 알게되면 그땐 이미 늦어 되돌릴 수 없기도 하다. 이미 늦었는지도 모른다. 중독되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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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11-28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K 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알라딘 회사의 SNS 시스템의 채택보다 책을 중심으로 뭉치는 알리디너의 성향이 더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읽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에 저는 알라딘 마을로 돌아가리라 예측합니다. (저는 데이터 계정이 없는 통신단말기를 사용합니다.)

여울 2014-11-28 10:07   좋아요 0 | URL
아 그러시군요. 전 약간 중독증이 있긴 합니다만 줄이고 있습니다. 책을 접하고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은 늘어날 듯 싶군요. 알라딘서재는 여기만의 호흡이 있었죠. 페북이 시간단위라면 그래도 하루의 호흡과 생각을 추스릴 수 있는 곳이었는데, 이렇게 사유의 접속 시간이 충돌하니 감당하기 힘들 듯 싶군요. 당장 북플에 빠지면 십중팔구 알라디너는 책읽는 시간이 줄겁니다. 책읽는 깊이도 줄겁니다. 일단 제일 큰 피해자죠. 당장은 소통하는 분들은 많아지겠지만요. 회사 입장에서는 거꾸로 돌아가기 힘들 것이라 여겨요. 즐겨찾는 분들을 직접 모른다는 사실은 그래도 깊은 맛을 주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도 더 공을 들여 소통하는 것 같구요. 많이 정신없어질 듯합니다. 떠나는 분들도 생길 것 같고, 소통하는 법에 대해 논란이 더 생겨야 그나마 적응하는 법이나 개선점들이 조금은 생기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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