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논쟁하지 못하는가

- (교화敎化장애) 앎은 나에게 고이기만 하고 너로 번질 수 없는가?

 

미술, 체육 교육이 없는 것도 큰 문제지만 정작 사회가 암기과목이라는 것은 치명적이다. 안다는 것은 체험과 연습을 통한 깨우침과 같은 것이다. 암기를 해버리듯이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가슴으로 통하지도 가지도 않는다.  머리에서 멈추어 버렸다. 정의도 권력도 권위도 논하지 않는다. 유행처럼 삼키고 말았다. 나누지 못한다. 정치에 대한 감과 생활 습속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대부분 한 집안의 분위기는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그 분위기를 세대를 거쳐 같이 가져간다.


발제를 하면서 다시 느끼게 된다. 독일의 시민교육, 아니 정치교육이 나치의 교훈 삼아 만든 3원칙 말이다.  하나. 강제성금지(교화나 주입)-자립적인 판단  둘. 논쟁중인 것은 논쟁으로 삼는다. 논쟁은 교육의 소금이다. 셋. 자신 관심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가 이 협약의 3요소이다. 이들이 교육내용의 결정이나 감독은 엄정하고 중립적인데 이 보이텔스바흐협약이다. 각 정당마다 예산을 지원해서 교육을 하게 한다. 하지만 철저하게 관리하고 지키는 것이 이것이다.


 

조금 세세히 살펴보자. 어떤 것이 강제성 금지해당되는지 보자. 동물보호를 목적으로 아기돼지 베이브를 단체관람시켰다.  지금 보다 '더 나은 목적'을 위해 자립적인 판단을 얻을 기회를 빼앗겼다고 교사들은 판단한다.  자율인가 교화인가 주입인가?  이것이 강제성 금지 원칙이다.  자칭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앎을 추구하는 인문수요자, 동아리까지 원하는 가치나 생각들을 더 좋은 것이라는 명목으로 교화시킨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있는지 이해하려하지 않는다. 남의 생각을 따지듯이 훌킨다. 나의 이념은 선이며 신자유주의는 악이라고 한다. 나의 가치는 당신보다 나은 것이며 당신은 아는 것이 없다고 정신적 하대를 한다.


시민교육이란 것은 철저히 몸으로 체득되는 것이 맞다. 앎을 삶켜 일상에서 소화시키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논쟁과 논쟁이라는 근력을 통해, 자신의 가치 생각의 이념이나 이해에 맞춰 확장하려는 것이다. 더 많이 알고, 더 해박하고, 더 알려하고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이런 과정을 겪어야만 진보가 잘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수도 분화할 수 있다. 자신의 입장이 어디에 처해있는지 느낄 수 있다. 청소년기에 시민교육을 체화하지 못한 사람들은 성인기에도 똑같은 오류를 겪을 수밖에 없다. 여전히 '나'에 머무른다. 모든 것이 '나'를 위주로 돌아가야만 한다. '너'를 겪어본 적도, 겪어낸 적도 없다.

 

유럽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나 정당에 대해서 자신있게 이야기하고, 사회문제, 자신의 문제에 대해 당당한 것은 철저히 몸으로 훈련한 과정때문이다.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기 위한 훈련이 아니라, 어떻게 다른 입장을 파악하고 실현시키는 것인가 사전 모의실천을 했기 때문이다. 권위와 사생활, 정의, 가정, 노동 등등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늘 삶에서 재현되는 문제다. 그래서 암기하거나 많이 알거나 공부만 잘하거나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영국은 노동당이 2002년 집권하면서 '시민교육' 교과목을 개설하여 토론과 체험을 통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시켰다. 하지만 보수주의자들은 "보수당 집권 뒤 폐지될 과목"이라고 여겼지만 10년동안 실시한 종횡단 연구를 통해 보수당 정권하에 시민교육은 강화됐다고 한다.


학교안밖에서 모두 자신의 문제를 담아 자신의 판단을 기반으로 여러 사실과 논쟁을 통해 자신의 관심을 타인과 사회에 재영향을 끼칠 수 있도록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이것은 인문학을 소비하고, 자신의 관점을 갖는다고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입장과 견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나가는 일이기도 하고, 다른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정치적인 입장이 달라도 늘 여러 사안과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좀더 나은 합의를 가져갈 희망이기도 하다.

 

 

볕뉘.

 

1. 발제와 토론을 하다가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우리는 만나서 우리의 가장 큰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임금과 임금의 왜곡, 그렇게 삐뚤어지고 왜곡되는 일상을 교과나 논의의 중심으로 가져오지 않는다. 책 속의 고상한 가치나, 멋지고 인기있는 강사의 말씀과 은혜로 일상의 고통을 말려버린다. 설령 가져가더라도 또 일상에 치여 또 잊는다. '을'과 병, 정의 치떨리는 경험을 드러내놓지 못한다. 이야기하더라도 입장이 다른 이와 토론을 끌고 나가지 못한다. 토론을 끌고 가더라도 다시 만나지 않는다. 우리는 어쩌면 '비접촉의 세대'를 관통해왔는지도 모른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으므로 늘 교화시킬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서로. 현실은 늘 언쟁으로 번져서 끝나버린 것처럼... ...

 

2. 65세이상 어르신들이 수십년 배운 결과를 전시한 민화전이 떠오른다. 민화는 선생님이 시킨대로 한결같이 똑 같았다. 가르치는대로 가르쳐준대로 예쁘게 그려놓았다. 그 많은 분들의 삶과 살아온 이력은 어디로 갔을까? 정말 그 그림에 담을 수 없었을까? 삶을 담을 수 있도록 함께하는 분들은 있을 수 없는 것인가? 평생교육에는 평생 취미와 취향, 그들의 삶은 왜 그곳을 부끄러운 듯이 피해다녀야 하는 것일까? 그들이 살아온 이력이 왜 담기고 숙성될 수 없는 것일까?

 

3. 많이 사람들을 만나는 편이다. 일터가 있으니 한정된 사람만으로 좁혀진 것은 아니다. 진보든 보수든 정치좌판은 싸움 일보 직전이다. 어떻게든 말빨로도 지면 지는 것이라는 강박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근거와 사실, 더 확인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근거와 사실이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한 도구이다. 상대가 강하게 보이거나 더 안다고 조아리면 입장이 달라도 얘기조차 하려하지 않는다. 토론을 할 수도 없다. 토론이라고 해야 찬반, 정해진 패널만으로 토론을 했다고 착각한다.

 

4. 말을 만드는 것이 미련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너, 나 할 것없이 입시의 암흑을 통과하면서 삶의 자양분이 되는 과정을 생략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압축되지 말아야 할 것이 압축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교화시켜야 한다는 강박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5. 이땅에는 민주주의가 숨쉬지 않는다. 어디에도

 

141126 시민교육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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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14-11-28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 커뮤니케이션 기술이던가... 상사가 회의 도중 어거지를 쓰고 화를 내면 그 자리에서는 ˝예, 확인 후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 자리를 피한 뒤 상사의 감정이 가라않으면 ˝최선을다했지만˝이라며 기름칠을 한 뒤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라는 대목이 있어요. 참 어이없는 얘기지요. 회의인데, 상사의 일방적인 명령을 듣는 자리가 아닌데, 이게 뭔가 싶어요.
사실 전 얼마전에 회의 도중 상사에게 또박또박 말대답을 해 아주 미운 털이 박힌 상태입니다. 반면 회의 도중 침묵을 지켰던 동료는 그 다음날 담배 피며 조근조근 달래서 상사를 설득했지요. 그 동료가 더 현명하게 처세를 한 건 맞지만, 찍혀서 요새 제 생활이 참 피곤하지만,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회의는 말빨 싸움도 아니어야 하지만, 위력 시위는 더더구나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울 2014-11-28 10:46   좋아요 1 | URL

아 어떡해요. ㅜㅜ. 힘의 위계는 약자에게 피해와 감정의 잔유물까지 떠넘기죠. 쿨하다는 얘기는 다 힘있는 편의 얘기죠. 게의치도 않는거죠.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 저도 여기저기 불통에 많이 시달립니다. 우리의 바닥은 어디까지인가도 생각해보고요. 민주주의는 참 어렵네요. 더 불편해야 하구요. `회의는 위력시위는 더더구나 아니어야 합니다.` 힘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