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로 (지)向하는 ~먹물과 (몸)물~
1. 잠의 종류는 얼마나 될까? 얼마나 알고 있을까? 새우잠, 노루잠...
2. 제비꽃은? 흰제비꽃, 각시제비꽃...
3. 김치가지수? 총각,열무,
4. 바람은? 높새, 하늬, 산바람, 골바람... ... 답은 주) 참고
<먹물>이란 표현은 예외적으로 겸손을 나타내는 것 말고, 자조적이거나 자기 비하적으로 쓰이지는 않을까? 제가 먹물이라 이것 저것 모르는 것도 많지만이라거나, <먹물>들이라 한계가 있네요. <먹물>들은 다 그래, 먹물들때문에 라든가? 엘리트라는 것은 좀 거시기한데, 이것 역시 소통이 전제되지 않은 모둠이라는 생각이 든다. 먹물들이 망쳐먹은 것들이 오죽할까? 학자연하거나, 머리에 든 것은 많지만, 실제와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겠지요. (머리)에 너무 익숙해 (몸)말의 다양성을 이해하지도 이해하지도 않으려하거나, 결정적인 판단은 편의상 머리에 든 것으로 해버리는 경향도 될 것 같다.
대응하는 표현이 마땅하지 않은데, 먹 대신 <몸>을 적셔낸, 표현이 저어스럽지만 편의상 (몸)물이라고 하자. <몸물>, 아니 (몸)물 들은 사람 역시 먹물이 가질 수 있는 장점들을 사전 차단하는 것은 아닐지? 암묵지로 구조화된 장점들, 인간관계맺는 방법 쉰가지, 설득되지 않을 때 취할 수 있는 방법, 오해를 푸는 비결 백가지. 방법이나 경로의 차이들이 먹물 그물, 지식이란 덫에 감싸일 때 문제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까?
그렇기도 하지만 늘 시간이란 변수는 그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구. 몸물든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 것일까? 몸으로 배운 것의 수준은 얼마일까? 시간과 경륜의 힘은 어디까지 일까? 몸물든 사람은 과연 먹물이 들지 않았을까? 조리나 논리가 부족하다고 모르는 것일까? 한 분야에 앎이란 더욱 풍부한 것은 아닐까? 먹물의 세계는 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일까? 유행처럼 논리와 이론에 모든 일상을 사사오입하는 것은 아닐까? 몸물든 세계는 다 쓸모없다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김치의 가지수와 맛수 만큼, 좋아하는 옷과 화장품의 수만큼, 민주주의 방식이나, 선택할 수 있는 시스템, 선택을 할 수 있는 제도의 종류가 많다는 것, 커피를 마시기까지 곡절의 수가 많다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표현되는 방식이 많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잠의 가지수만큼, 제비꽃의 종류만큼, 김치의 종류만큼, 바람의 표현방식만큼 서로를 향한 풍요로움은 쓸모없는 것일까? 암묵지를 보도록 취미삼아 노력할 일들은 없는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이분법에 충실해, 먹물로 자기 한계를 드러내고, 몸물들어 자기 한계를 들고 갇혀버리는 것은 억울한 일은 아닌가? 88학번이 02학번과 교감할 수 없는 것일까? 얇고 넓은 몸말이 먹물든 이론의 난잡함보다 더욱 더 끈끈한 교감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몸물에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수나 음악만큼이나 민주주의도 가지수가 많으며 다양하고, 선택할 수 있는 정치시스템이나 제도도 많다는 것이 전혀 별개의 일일까? 무관한 일일까?
무의식적 이분의 결과는 냉혹하다. 서로에게 손가락질하며, 갈라서는 참혹함이란~ 얇지만 넓어지는 일이, 얇지만 넓어지는 취미도 한번 맛들일 필요는 없을까? 유형의 무엇만이 아니라 무형의 무엇도, 무형의 무엇만이 아니라 유형의 무엇도~ . 서로를 열어두고 씨줄과 날줄로 뿌리내리는거나 다양해지는 일이 불가능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