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잘 살아온 삶-민주화와 노동운동
<경향신문> 2007년 05월 23일

 

<후기>어제, 일터동료와 저녁을 하고 돌아가는길, 전 지역민주노총사무처장에게 전화가 왔다. 1차을 하였지만, 동료를 바라다주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겉으로는 알고있었지만, 속이야기나 관통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어제였던 셈이다.

 
 

 울화가 치밀고, 완장-자리만 대체한 위계에서 부터, 도대체 라는...자괴감을 되새김질하게 된다.

절망은 하루이틀 전의 일이 아니지만, 성찰이 아니라, 반성조차 되지 않는 퇴행을 늘 목격하는 심정이 전이된다.

예민해지지 않으면, 가는 길이 그럴 것이다 방관하게되면, 만들지 않으면, 더 심한 퇴행이 마음이 아니라 몸까지 파고들지도 모른다.
- 옆: 김진숙님 글은 몇번 본 적이 있다. 가슴이 미어지고,아픈 이야기들에 뭉클하였다.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원점에서 다시 멀리 보아야한다는 사실. 아니 하나도 다른 현실에서 상흔을 똑똑히 보고 느끼면서 다시 갈 길들...나만있고, 나-너, 우리도 없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서는 한발자욱의 의미는?

 

- 지난 20년을 상흔으로 느낄 줄 아는 읽기가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위 광고는 꺼지지 않고, 왠 부르스냐~>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

요즘은 마치 회고와 전망의 계절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다. 대통령 임기가 끝나가니, 그간의 정부 업적에 대한 평가가 행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5·18 기념일이 있었고, 이제 얼마 안 있어 6월 혁명이 스무 돌을 기념하게 된다. 그 민주화의 열기로 움직였던 세월이 무엇을 이루었는가에 대하여 생각을 다듬어 볼 만하다.

최근의 남북 철도를 연결하여 시운전한 것도 과거와 미래를 새삼스럽게 생각해보게 하는 행사였다. 경향신문에 실린 경의선 철도 운행 동승기에서 고은 선생은 “통일은 당장 닥쳐오는 사건이 아니라 기나긴 과정을 의미한다”라고 썼다. 역사를 너무 성급하게 생각하는 데에서 일어나는 결과 중 하나는 작은 것 같아도 중요한 많은 일에 소루(疏漏)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20년, 또는 그 이전부터 진행되었던 민주화 과정이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가진 성취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큰 역사의 의미도 결국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차원에서의 인간의 삶을 튼튼하게 해주는 틀이 된다는 데에 있다. 최근 출간된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김진숙 지도위원의 글 모음 ‘소금꽃 나무’는 지난 20여 년간 우리 사회의 변화와 상황을 공적인 큰 역사와는 다른 각도에서, 사람들의-특히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삶에 끼친 효과 측면에서 회고하고 진단한다고 할 수 있다. 민주화는 그 소득이 보통사람들의 건실한 삶에서 거두어질 때에 비로소 내용 있는 역사가 된다는 것을, 이 책의 기록은 다시 생각하게 한다.

- 나아진 것이 없는 노동현실 -

김진숙 선생의 관점에서는 높았던 희망이 깨지는 것이 민주화 이후의 경험이다. 2006년 3월 부산 지하철 해고 노동자들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요약한다. “저는 우리가 참 멀리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되돌아보니 우리가 떠나 온 자리에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즉 “우리가 벗어던졌다고 믿었던 사실이 이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돼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이들”이란 비정규직 노동자를 말한다. “비정규직은 정규직의 미래”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한 글에 제시된 2005년 통계로는 1300만 노동자 가운데 800만이 비정규직 노동자다. 그리고 비정규직은 구조조정의 이름 아래 불어나고 있다. 외주회사, 파견 근무, 용역 등이 모두 이러한 조정 과정의 여러 표현이다. 이 과정은 노조의 투쟁으로 얻어졌던 노동자의 권리를 축소하고 그 이전의 불합리한 노동조건을 다시 강요한다.

그런대로 안정성이 더 보장되어 있는 것이 정규 노동자라고 하겠지만, 그들에게도 적정한 삶의 조건이 확보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2003년의 글에 인용된 21년 근속 조선소 노동자의 월급은 105만원, 세금 후 80만원이다. 중요한 사실은 숫자보다도 가족을 부양하고 아이들을 양육하고 집 한 칸을 마련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적어도 이 저자의 생각으로는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것은 조직 투쟁뿐인데, 노동 운동의 조건은 민주화 후에 나아진 것이 없다. 당국의 탄압은 계속되고, 비정규직 확대가 노조의 협상력을 빼앗고 기업체들의 회유작전이 노동조합의 단결을 금가게 한다. 2000년대에 일어난 여러 건의 노동자들의 자살-가령 한진 중공업 노동조합 위원장의 투신자살, 화물운송 노동자의 자살-은 노동 운동의 어려움과 생활고를 증언한다.

저자가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민주화 이후 향상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소금꽃나무’에서 가장 비참한 부분은 저자의 젊은 시절 이야기들이다. 점심시간도 제대로 가질 수 없는, 그것도 감시와 모욕 속에서의 노동, 변소도 갖추지 못한 작업장, 팔다리 펴고 잘 수 없는 잠자리, 커튼 하나로 남녀를 갈라놓은 방에서의 성 폭력, 기름밥, 꽁보리밥 식사, 갈등, 도적질, 산재 사고, 그러한 환경 속에서 터져 나온 투쟁,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구속, 취조, 투옥-이러한 일로 점철된 저자의 젊은 시절은 가히 지옥의 삶으로 부를 만하다. 이러한 것들은 그래도 나아지지 않았을까?

노동자가 헤쳐 나가야 했던 지옥의 환경에서 두드러지는 것의 하나는 인간성이 파괴된 인간관계이다. 이것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가령 저자의 큰 언니는 재혼한 어머니의 남편, 즉 의붓아버지의 학대 속에서 자라나, 일곱 살에 식모살이를 나간다. 그리고 결혼 후 35년을 남편은 술 속에 살며, 그녀는 생활에 무책임한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살아간다. 억압과 폭력은 도처에서 인간관계를 규정한다. 감방에서도 조폭들의 폭력이 난무한다. 또 이것은, 저자의 해석으로는, 한국의 정치 조직의 원형이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검사원, 반장, 조장이라든지 완장 찬 직책은 위압적 관계의 구실이 된다.

민주화 노동운동의 목표, 그리고 업적은 단순히 노동 조건의 향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사회 상황을 보다 인간적으로 바꾸어 놓는 일이다. 김진숙 선생이 그리는 이상적 노동자상은 이 새로운 인간성의 사회를 예시해준다. 전교조 운동의 이상적인 교사상은 온정의 인간이다. 이상적 교사는 “육성회비를 제 날짜에 못 내더라도,” 또는 “애국가를 4절까지 못 부르더라도, 송아지가 아파 학교를 못가더라도,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선생님”이다. ‘소금꽃 나무’에는 노동운동 속에서 스스로를 희생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추모사들과 함께 노조 지도자들과의 회견기가 실려 있다. 그들은 이상적 교사와 같은 온정의 인간이기보다는 강인한 투쟁의 인간이다. 그러나 인간적 깊이의 생각과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 노조 지도자를 농성 투쟁으로 나아가게 한 것은 비폭력을 주장하던 노조원이 칼에 맞은 일이었다. 그는 투쟁의 화신이 되었지만, 여전히 적과 이탈자와의 대화와 설득을 생각한다.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아들에게 일기 쓰는 습관을 길러 주려 노력한다.

- 인간적 삶 실현위한 정치를 -

또 다른 노조 지도자는 노사 문제가 좋은 말로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노조와 자신에 대해서도 엄격하다. 그는 노조의 관행이었던 돈 쓰고 술 먹는 선거를 혐오한다. 그는 아들이 목사가 될 것을 희망한다. 그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말한다. “사장들이 아무리 돈이 많다해도 내두룩 욕이나 먹고 사는 거 보면 내가 더 잘 살아 온 것 같기도 하다”고. 물질적 사회적 허영의 시대에 보기 어려운 자신의 삶에 대한 신념이다.

노동자를 위한 인간적인 삶의 실현은 오로지 노동자 자신에 의하여 쟁취된다. 여기에 정치는 별로 기여하는 것이 없다. 그의 비판은 특히 노무현 정부에 대하여 가혹하다. 노무현 정부는 노동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고, 대통령이 “러시아로 행담도로 삽질하러 다니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김진숙 선생은 이렇게 생각한다. 역사를 더 포괄적으로 보는 사람은 아마 노동 운동의 성취도, 그 좌절과 함께, 보다 큰 역사와의 착잡한 관계에서 일어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관점에서도 정부가 추상적인 계획들보다 더 꼼꼼하게 국민의 삶에 관계되는 틀들을 만드는 데에 노력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역사의 큰 움직임이 반드시 들고남이 없는 조화로운 발전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안정된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비인간화된 사회 여러 부분을 인간화하는 것은 정치의 책임이다. 이것 없이는 큰 역사는 영웅들의 놀이터일 뿐 인간에의 길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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