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여일, 이번주말은 조금 단촐하거나 한가할 줄 알았는데 일터 일이 꼬이더니, 결국 우려스럽게 일요일까지 온전히 뺏어간다. 금요일 생각 좀 추려볼 생각이었는데, 비소식과 겹친 일터일, 일터손님과 동료들과 금요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말 일터일이 비껴가질 못하고 꼬인다. 그래도 물리적인 시간은 많이 걸리지 않기에 서천까지 장항선으로 춘장대까지 허겁지겁 달려간다. 좀더 편하게 속마음이나 일들을 나누고 싶기도 한데, 비도 바깥의 모기군단도 쉽게 허하지 않는다. 잠깐 눈을 붙이고 늦게 시작하는 기차편을 피해 버스편으로 서천-군산-광주까지 역으로 돌아온다. 어제 빗속의 군산, 잠시 들른 이곳의 모습이 아름답다. 조급히 가기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준비한 옷가지도 책도 챙기지 못해, 기차역에서 고른 책이 돌아오는 길, 책장 한장 넘기지 못하고 굳어있다. 잠깐 익산에서 기차를 갈아타는 낭만?이 있어 우동 한그릇, 후루룩 했다. 

편안하고 부드럽고, 마음밭은 풍성한데, 밤을 지피며 나누는 이야기들. 가족과 만남도 없이 지나쳐버린 한주.(유니의 호된 꾸지람?!) 미안한 마음 가득이다. 일터일을 만들어 주중에 한번 녀석들 자는 얼굴이라도 봐야겠다. 

[똥파리]도 봐야하고, 영화이야기도 더하고 싶고, 시이야기도 더해야하고, 블로그얘기도 더해야하고, 동네이야기도 좀더 다르게 나누고, 뜨거운 가슴도 밤 깊은 시간 더 나누고, 친구들 이야기 삭히고 보듬고, 푸념도 나누고, 돈이야기도 해야하고, 아무생각없이 밤새도록 편하게 편하게 파도소리와 수평선 그윽한 솔밭을 거닐기도 해야하는데, 얕은 이슬 내리는 그곳을 터벅거리며 오기도 그렇다.  아무튼 해가 길어지는 정점. 이렇게 마무리해야겠다.   

 

뱀발. 더운 아열대에 건강도, 운전도 조심하길...이제부터 스콜시즌이 되는가? 독감도 만만치 않다. 유념하시고 몸 잘 만드시길. 가을 겨울 감기 걸리지 않게 서로 관리 잘하시길... ...   

마음이 여기저기 걸려있다. 부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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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밭 2009-06-22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울마당님을 제일 마음에 걸려하는 분들을 제가 알고 있죠.
아쉬움은 꽤 긴 그림자를 남기고 틈 사이로 숨었나 봅니다

2009-06-23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2 2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6-22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090618  일본미술, 국립현대미술관 - 도예도 그림도 선도 보다 더 날카롭다. 색도 보다 더 원색에 가깝고..산수화도 그렇다. 한눈에 보기 좋은데 관련 책은 없다. 

090617  

 

 

 

 

 

090617

 

 

 

 

 

 발췌하여 보다. 강수돌님의 글을 보다나니 눈에 띄는 제목을 쫓아 세세히 본다.-좀더 구체적이길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수긍은 하지만 막연한 느낌, 당위의 색깔들이 묻어난다. 각론에 대한 고민, 우리들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도 예민하게 의식하면 어떨까 싶다. 그리스도의 살해는 예수전과 함께 읽고 싶은데, 서문과 목차만으로도 수긍이 가면서도 각론이 궁금해진다. 그리고 -경제학은 에세이정도의 책이다. 장려하고 싶은 책은 아니지만 환경운동과 경제에선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당위만이 아니라 세론을 쫓다보니 이미 갖고 있던 관점이 흔들린다. 어쩌면 당연한 생각들이 현실에서 진도를 나가보지 않았기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090616  

  

빨려들어가면서 보게된다. 초기 맑스, 모스의 선물경제, 푸코,들뢰즈 등등 관점을 두루두루 내치거나 쫓거나 하는 모습이 인상깊다. 조금 모스의 관점에 할애를 많이 하는 것 같다. 다른 사례들도 더 궁금하긴 한데, 생각줄기와 겹치는 것들이 많아 세부메모는 따로 밑줄을 긋다. 이것으로 너저분한 벡터생각이 맴돌게 된다. 

  

 

 

 

090615  기차로 이동중에 보다. 김규항에 대한 문체와 생각에 대한 반론이 재밌다. 김훈의 문체, 고종석문체에 대한 튀는 것도 그러하다. 관심사들을 쭉 훑어본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부분도 사적인 이야기들도 보여서 좋긴하지만 느낌들을 적을 시간을 따로 내어봐야겠다. 지젝을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런가?!  

 

 뱀발. 짬이 나서 도서관과 책과 함께할 시간이 많았다. 오고가는 길. 도서관과 숙소에서 시간을 연장하여 여기저기 책들 사이를 오가며 보다. 화집도 그런대로 짬짬이 보고, 빌린 책들을 마무리하지 못해 아쉽긴 하지만 조금 진도를 나간 느낌이다. 다음 주 궁금증이 나는 부분을 마무리해야겠다. 즐거운 한주가 되겠다. 궁금덩어리가 많아졌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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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터 vs 스칼라

1. 벡터와 스칼라. 난데없이 노트북이 말썽을 부려 중동난 흔적과 생각을 다시 쫓는다. 그냥 달아나면 편할 듯하지만, 생각의 덧칠은 자꾸 그리로 배회하게 만든다. 벡터와 스칼라. 아마 쉽지 않은 용어일 수 있겠다.  인문계와 자연계를 갈라놓은 현실은 그래도 이곳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 많은 연유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 네이버 지식의 답을 옮겨본다.

     
 

스칼라 량 : 질량,길이와 같이 크기만 갖는 물리량
벡  터 량 :힘, 가속도, 속도와 같이 크기와 방향을 갖는 물리량

먼저 스칼라량이란 것은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숫자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끓는 물의 온도는 100도, 키가 177m, 질량이 68kg 등등 크기만을 비교할 수 있는 량이다. 하지만 벡터라는 양은 이러한 스칼라에 방향을 덧붙인 것이다. 운동을 할 때 419m를 뛰었다는 것과 남쪽으로 419m를 튀었다는 것과 분명히 다르다. 런닝머신으로 뛸 수도 있고, 제자리에서, 원형트랙에서도 돌 수도 있지만 남쪽으로 튀었다는 것은 지금에서 그곳으로 419m 떨어진 곳에 있다는 상황이다. 스칼라량으로 표현할 때 부족한 것을 방향까지 표현된 것을 벡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네이버 지식in)

 
     

 

2. 419m란 것과 참터로부터 419m는 다른가? 그냥 99도와 100로 가는 99도와 다른가? 방향이 하나 더 있을 뿐인데 이것이 정녕 다른가? 스칼라가 현실을 대부분 많은 설명을 해주지만, 그렇게 풍부하게 설명을 해줄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역학이라고 배우는 것도 대부분 정지한 상태의 정역학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의 대부분은 방향을 갖는 동역학은 아닐까? 방향을 갖는다는 것은 현실에서 지금에 어떤 의미를 보탤 수 있을까?


3. 슬그머니 인문 人紋 으로 겹쳐 옮겨본다. 셀로판지처럼 햇살에 다른 색들은 겹칠까 아니면 인문계과 자연계를 나누는 현실같은 물과 기름처럼 선명한 밀침이 작용할까? 어쩌면 수학의 정리처럼, 수학의 공리처럼 A는 무엇이다라는 것과 그것을 증명해내는 것은 스칼라의 표현은 아닐까? 백가지방향을 담고 있는 것을 사물은 무엇무엇이다라고 환유하거나 환원하여 사고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가? 그러한 무수한 스칼라의 표현으로 일상을 그려내고 있던 것은 정녕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사물에 대한 스칼라식 서술은 생동하는 것을 제대로 잡아낼 수 있을까? 기껏해야 분석을 하거나 사후약방문은 아닐까?  


 


평론(해석) vs 참여(행위)

4. 어쩌면 그러다가 우리는 방향없는 서술이나 크기, 설명에 익숙해져 세상은 마치 그런 것처럼 세뇌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방향없는 결과만이 논의되어 방향을 가지고 있는 과정은 아예 유통조차 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5. 조금 더 진도를 나가본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다고 생각한다. A라는 활동(운동)은 무엇이다라고 규정짓고 그것에서 출발한 앎은 안온한가? 그 스칼라는 현실을 풍부하게 설명할 수 있는가? 설명할 수 있다면 늘 결과를 미리 말해줬는가? 결과가 있기 전을 풍부히 말해주는가? A라는 공간에서 사례는 이러했으므로 여기라는 공간도 이렇게 하면된다라는 이식만 하는 것은 아닐까? 어떻게와 왜는 생략된 채 무엇만 유통된 결과는 어떠했는가? A라는 공간에서 성공하려고 했던 연유는 어떠어떠한 방향과 어떠어떠한 고민의 겹쳐지므로 가능했는데, 여기라는 공간은 이러저러한 벡터가 부족하다, 벡터라는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므로 이런 것은 힘들지만 다른 C,D,E를 시험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는 방식은 소통이 아니라 최소한 유통되어본 적이 있는가?

6. 사람 人 을 한쪽을 떼어내어 이러저러하다는 정의와 기술로 출발한 학문들이 온전할 수 있을까? 사람 人 을 다루는 학문을 무엇은 어떻다란 해부를 통한 정의가 헛점없이 온전히 가동할 수 있을까? 행위를 설명해줄 뿐 과연 행위를 하게해줄 수 있을까? 여기저기 스칼라로 널려있는 것을 주섬주섬 모아 끼워넣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을 가진 벡터, 고민을 가진 행위, 고민의 결을 갖는 시도로 온전히 보면 어떨까? 행동하고 반영하고, 행동하고 반영하는 진자운동을 갖는 것이라고 여기면 어떨까? 그 변화가 되먹임되는 것이라면 구구절절한 해석이 필요했던 것일까? 그것이 결론적으로 기차가 떠난 뒤, 늘 평론의 고원에서 노니는 사후 추억담과 같이, 뒷말만 많은 해석의 울타리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도록 할 수는 없을까? 

과정 VS 결과

7. 어떤 A가 유통되는 것이 아니라, --을 하려고 하는 A가, --에 고민이 충만한, --라는 분야의 활동만이 아니라 -라는 분야에 관심이 많은 분들의 방향을 갖는 사람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떨까? A라는 사람이 기계적으로 이렇게 저렇게 분해될 수 없으므로 이러저러한 방향을 품은 사람들의 방향이 숙성되도록 하는 분위기는 어떨까? '--려고하는'에 방점이 찍히지 않고, 끈질기게 '--하였고...--했으므로...--와 가까우므로...' 끌어내리거나 분석과 설명하느라 지쳐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둔을 벗어날 수 없을까?

-이다 VS -려는

8. 그냥 분석하고 해석해보는 것도 좋지만, 방향을 갖는 것, 하고자 하는 것, 하게한 것이 보이지 않아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린 것은 아닌지? 그러다보니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되어 물어보지도 궁금하지도 않고 그냥 저자거리에 방치된 것은 아닐까? 삶에 연관되거나 사람의 동선에 관계된 것인데 서로 다른 부문으로 방향이나 실마리를 지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외로운 고원에서 어려워하고 푸념하고 한숨만 짓는 것은 아닌가?

9. 방향을 갖는 일상에 관심이 있다면, 방향을 품은 더욱더 풍부한 현실에 눈을 뜰 수 있다면, 방향을 품은 고민의 결에 눈길이 간다면, 스칼라의 늪에 빠져 한치도 달라지지 않는 경계에 있다면, 그렇게 담을 월담하는 담쟁이가 되어 볼 수는 없는 것일까? 끊임없이 향하는 촉수는 담너머를 가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10. 분석이 더 이상 의미를 소진해버린 현실에서, 오히려 통째로 보는 눈이 생긴다면 해보고 되지 않으면 다시하는 벡터를 만들어내는 행위들이 또 다른 벡터를 낳은 것은 아닐까? 벡터를 보는 감성마져 말라 건조증이 걸리기 일보직전인 현실에서 벡터와 벡터가 겹치는 시도 한번 어떨까? 콩깍지씌인 것처럼 방향이 유사하다면, 고민의 진폭이 유사하다면 한번 시험삼아 해보면 어떨까? 그래야 방향이 역방향인지 순방향인지 알 수 있으므로, 다음에 합쳐진 방향이 지시하는 곳을 알 수 있으므로,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공유될 수 있으므로,  그저 밋밋하기만한 평론보다 현실을 밀어나가기엔 낫다는 산술이 나오기에 말이다.

저기 VS 여기

10.1 안타깝게도 평론의 그늘이나 스칼라의 그늘은 저기를 설명할 수 있다. 여기도 저기를 가져와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늘 저기를 빌려왔으므로 방향을 갖는 여기를 설명해내는데 한계가 있다. 끊임없이 저기를 차용해와 여기를 누덕누덕 기워야 한다. 스칼라를 구별해내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그 분이 얼마나 여기를 설명해내기 위해, 그 스칼라가 앞을 현실의 방향을 보지 못하는 안목만 가려내면 된다. 학문이라는 것도 앎이란 것도 얼마나 저기에 집착하는지는 시간의 함수에 빛이 바래기 마련이다. 여기에 궁색하다면, 여기를 늘 변명의 쪼가리로 일관한다면 말이다. 신념의 문제도 지식의 많고 적음의 문제도 아니다. 중독으로 인한 불감증과 끊임없는 편식의 폐해일 뿐이다.

11.' -은 -이다'라는 환상은 현실을 단순화시켜주기는 하지만 강박증처럼 수많은 벡터들의 '-하려는'은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늘 '-은 -이다'여서 그곳으로 모이게 하여야 하고, -이게 하여야만 한다. 수많은 '-하려는'의 방향을 돌릴 수도 없다. 화자는 스칼라인데, 기껏 있어야 방향없는 앎만 있으므로 끊임없이 현실을 유동하는 벡터의 방향을 모을 수도 없다. 앎의 주입으로 벡터의 방향을 없앤다면 모를까? '-은 -이다'라는 마술에서 벗어나는 일. '-은 -이다' 사이에 간극을 두는 일이 필요하다. '-은 -이 아닐 수도 있다.' 그 사이에 또 다른 수식어와 그 명사을 통채로 흔들어버리는 과감이 필요하다. 흔들고 채우면 흔들린 다음 제자리를 하면 그래도 당신의 머리에서 저기 가슴까지는 갈 수 있으므로 말이다. 손과 발까진 가진 못하겠지만, 또 다른 방법은 그 '--이다'라는 스칼라에 덜 연연하면 어떨까?

벡터의 숙성

12. 방향을 갖는 의견, 방향을 갖는 고민, 방향을 갖는 생각들이 - 앎을 나열하는 의견, 가슴의 언저리에 가보지 못한 고민, 손과 발을 필요하지 않는 전달에 대해 - 방향을 담는 그릇에 모이게 된다면, 아직 이것들은 대부분 날것인 경우가 많다. 그러한 연유로 방향이란 가시를 갖기에, 낯선 것에 익숙하지 않으므로 대부분 시간이란 함수에 처리되거나 처분되는 것이 많다. 거의 시간과 실무라는 그물에 걸려 방향이란 가시가 일정한 방향성을 갖기도 힘들게 될지 모른다. 문제는 숙성이다. 좀더 넓은 그물의 지식으로 이 싱싱한 날 것들이 순치될 수 있는 확율이 높다. 작은 고민들을 연결시키는 좀더 큰 그물로 처리될 확율이 높은 위험성을 갖게 된다. 만약 처리된다면 내것, 소수의 것은 될 수 있지만 나-너, 너-나로 스며드는 깊이가 얕다. 그러니 과정이 서로에게 배여드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결과가 처리되거나 처분되거나 할 뿐이다. 기껏해야 너의 머리를 지나 가슴까지...너-나의 머리속이나 가슴속으로 가져갈 확율이 적다. (처리의 유혹)

처리 VS 예행연습

13. 방향을 갖는 고민, 의견, 생각들이란 날것은 의도적인 관점의 다름이 필요하다. 의도적인 관점. 머리의 관점이라면 다른 앎을 바탕으로 한 생각의 연장, 아니면 가슴의 관점, 몸의 관점, 손과 발의 관점의 다름이 논의될 수 없을까? 방향을 담은 그릇은 의외로 연약하고 한가지 관점으로 순치될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그 방향을 최대한, 방향의 꼭지점을 달리 돌릴 수 있는 연습과 엇갈림이 필요하다. 미리 그 방향의 화살표과 지시하는 곳을 가보는 것이다. 여건이 되지 않는다면 관점이 생기도록 생길때까지 궁금증을 여럿이 놓치지 않는 것이다.(다름의 장려)  

13.1 일리의 장려, 혹 툭 던진 돌멩이 하나도 유효할까?

지금 여기 VS 저기

14. 여기를 다르게 보는 힘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고민에 힘이란 것이 생길 수 있는 것일까? 지금 문제가 뭔지 생각해보았는가? 당신이 하는 고민이란 것이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의 그물을 통과해본 것인까? 아니면 앎을 빌미로 일방통행해버린 것인가? 당신의 고민의 색이 다른 사람의 같은 물음 다른 색의 고민과 겹쳐진 것일까? 당신의 생각의 맛이 그것에 대한 다른 너의 다른 맛과 버무려진 것인가? 그저 쑥쑥 물만주면 자란 콩나물 같은 것인가? 아니면 현실의 다른 경로를 갖는 이들의 말과 언어, 생각으로 걸러진 것들인가? 몸의 경험이 없는 유식자의 앎만 강조된 것인가? 믿을만한 사람의 이야기라 믿어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가? 당신의 다름은 격려받고 있는가?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라고 말 벙긋하지도 못할 형편인가? 
 


 

 

 

15. 많이 알고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아무런 방향이나 고민을 담고 있지 못하다면, 방향의 가시는 하나도 없는 채 그저 인터넷 공간의 앎으로만 기능한다면 막연한 크기만을 말해준다면, 다른 삶과 변화를 보이는 방향과 차이가 있을 것이다. 앎에 차이는 미미하지만 행위나 삶의 변화, 과정의 차이는 확연할 것이다. 크기만 보는 눈에는 아무런 차이도 발견하지 못하겠지만 어쩌면 방향을 보는 눈에선 그 경계가 날카롭게 갈릴지도 모른다.


뱀발. 원고청탁이 생각나 적던 것이 날라가버렸다. 호흡이 끊긴 뒤, 저녁 말미 그쩍거리기 시작한 것이 쓸데없이 분량이 는다. 아마 더 가지치기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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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면 닮는가 닮으려하면 좋아하게 되는가 나무를 보듬는 손길의 감촉은 바위를 닮다 좋아하면 섬도 바다가 되는가 해당화 꽃술에 안겨 정신없는 그 녀석들처럼. 아마 녀석들은 나비가 될지도 몰라. 꽃술을 닮은 나비 아니면 해당화색을 닮은 나비.아니면 바다를 닮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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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9-06-16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해당화에 앉은 한 쌍의 풍뎅이의 짝짓기! 엄훠나, 부끄!

절 이름이 어떻게 됩니까? 문창살이 눈에 익어요

여울 2009-06-17 08:40   좋아요 0 | URL
내소사랍니다. 대웅전 문창살요.

녀석들이 해당화 꽃잎을 반틈 배어먹었군요. ㅎㅎ

밀밭 2009-06-17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끄덕끄덕...나무와 바위가 정말 닮았네요.

여울 2009-06-17 08:46   좋아요 0 | URL
여기 나무와 바위는 월출산이구요. 내친 김에 시한편 ..이윤학 [봄]

흰나비가 바위에 앉는다/천천히 날개를 얹는다/ 누가 바위 속에 있는가/다시 만날 수 없는 누군가/바위 속에 있는가/바위에 붙어 바위의 무늬가 되려 하는가/그의 몸에 붙어 문신이 되려 하는가/그의 감옥에 날개를 바치려 하는가/흰나비가 움직이지 않는다/바위 얼굴에 검버섯 이끼가 번졌다/갈라진 바위틈에 냉이꽃이 피었다

그러다보니 제목이 [나비와 바위]가 잘 어울리겠군요. 관심이 번집니다. 요즈음.
 

 오랫만에 찾은 곰소길, 해안선을 따라 보던 기억은. 잔뜩 흐린 날씨로 [전망좋은 방]이 있는 곳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바닷가가 이쯤이면 보여야 되는데, 흐린한 하늘은 바다와 하늘을 구분조차하지 못하게 만든다. 잠시 뒤, 산과 바다, 바다와 섬, 산가까이있는 바위와 선명한 경계.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찾아서(클릭)

 뱀 발.  사진 몇장 올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한다. 활동가도 그렇지만 초급, 중급, 급을 나눈다는 것도 어색하다. 수료라는 것도 말이다.  

   새로 난 시집의 여운이 깊다. 이렇게 시작하고 끝을 맺는다. 

 어느 덧 저수지 한가운데까지 도달했다. 뒷걸음질 치자니 얼음에 간 금들이 보이고 앞으로는 버드나무 줄기에 연초록 새순이 돋아나는 게 보이는 것이다. 지름길이었던 저수지 바닥까지의 수심이 떠오르는 것이다. 모든 길이 바닥이었다는 믿음이 깨지는 순간 그동안 비우지 못한 무게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짐을 벗고 헤엄쳐 가야 하는 길이 보이는 것이다.(이윤학 너는 어디에도 없고 언제나 있다 시집) 

어쩌면 선배도 없고 후배도 없다. 선배들의 경험은, 우리들의 급수에 대한 기억은 바닥에 대한 믿음처럼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 같아져야 한다는 순간, 벌써 이것은 활동도 아니고 운동도 아닐지도 모른다. 어떻게 달라지고 어떻게 깊어질 것인가? 닮은 꼴은 어느새 무게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감당할 수 없는, 감당할 수 있는 무게. 연초록 새순이 돋아나는 게 보이지만, 어쩌면 우리는 짐을 벗고 헤엄쳐가야할지 모른다. 늘 너가 궁금하고, 너의 시선에 대한 갈증으로, 너가 없으면 나도 없을 지도 모른다. 너의 다른 하루가 있으므로 나는 보다 더 다른 하루의 양식을 얻는지도 모른다. 

삶과 활동에 대한 나누는 한마디 한마디가 마음을 콕콕 찌른다. 안녕한 생각인가? 안녕한 언어이고 말들인가? 개인적인 고민인가? 다른 이의 고민의 결을 쫓아간 말들일까? 삶의 아픔이 걸린 언어들, 몸의 언어가 밀어내는 힘들. 어쩌면 이렇게 마음을 아리게 하는 것이 온당하기나 할까? 그래도 이렇게 나누는 것이 조금이라도 생각을 더 아픈 쪽으로 밀고 나가게 할 수 있을까? 위악의 자격을 누가부여한 것일까? 더 위악을 거들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걸어왔던 길의 초입이라고 여겼던 저기 저수지. 어쩌면 흠뻑 젖은 몸으로 액체 현실을 다시 견뎌내야 할지 모른다. 늘 끝은 다른 시작을 의미하므로, 더구나 버드나무 새순도 보이므로.. 그 삶이라는 것도, 사람은 천번을 만번을 살 수도 있는 것이므로. 한 번은 열 번 백 번 천 번으로 통하는 지름길이라고...현재는 벗어날 방법은 없다. 과거와 미래와 타협하지 마라. 나와 세상을 타협하지 마라. 네 코스를 뛰면 된다.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 인용한 시집은 이렇게 시작한다. 한번은 천번 만번으로 통하는 지름길이라고. 

선배와 후배의 만남이 아니라, 우리는 너-나는 이제 한 번을 통과했을 뿐...천번으로 통하는 지름길의 하룻밤을 연애했을 뿐이라는 것을... ...     

                                                                        자세한 흔적을 보고 싶으시면 주홍글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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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90829
    from 木筆 2009-08-29 12:13 
    1.  ㅇ 이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생각의 틈을 비집고 들어갈 기회가 있다면, 그(녀)가 쓰는 표현이나 방점 가운데 많은 것이 들어있다. 아마 그때 첫만남이었고, 그래서 이름은 기억나지 않더라고 했던 이야기들이 어슴프레 기억의 수면위로 올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란 것이 정해진 동선을 돌고 익숙해지다보면 그 틀에서 그 알 안에서 끊임없이 회전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관계도 그 관계를 벗어나 알을 깨뜨리거나 틀을 흔들어주지 않으면 의
  2. 현대사 답사_전쟁과 평화
    from 木筆 2010-05-30 10:38 
      답사. 지난 보문산을 우회한 반나절답사. 전쟁의 이면을 몸으로 체감한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그렇게 될까 두려워 발 담그길 저어하는 일. 소나기내린 그날의 기억 말미 형무소와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일그러진 전쟁의 기억이 옷을 적신다. 그리고 문턱에서 머뭇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오늘도 그러하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웹알림지도 일정이 다가오는 것이 편치 않았다.   어제의 기억이 온전히 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