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반진리  

 진리의 도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진리 counter-truth를 능숙하게 알아야 한다. 문제는 왜 사태에 대한 진리가 있느냐가 아니라 왜 진리가 우세할 수 없느냐이다. 모든 진리 및 평화설교에도 불구하고 거짓말쟁이와 사기꾼과 수다꾼이 그렇게 넘쳐난다면, 진리를 가로막는 매우 강력한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다. 거짓은 오래 지속되지 않으므로 그것은 거짓 자체일 수 없다. 적절한 진리를 가로막는 다른 종류의 몇몇 결정적 진리가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는 그것을 반진리라고 부른다.

자신의 법적인 남편 외에 애인을 가지고 있는 여성은 중요한 진리를 살아간다. 결혼은 낡아버렸거나, 남편은 그녀에게 못되게 굴거나, 남편은 불능이거나, 다른 측면에서는 중요할지라도 그녀에게는 단지 맞지 않는다. 삶은 풍부하고 너무 풍부해서 중세의 구속복에 갇힐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여성은 거짓 없이는 진리를 살아가지 못한다. 이 경우에 거짓은 진지한 반진리를 즉 남편이 안다면 그녀나 그녀의 애인 또는 둘 다를 죽일 것이라는 것을 감춘다. 아무도 돕지 못할 것이다. 이 경우에 진리를 말하는 것과 관련하여 반진리는 진리보다 더 강력하다.

진리의 무기는 사람들이 좋아할지 안 할지, 그 결과가 무엇이든 생각하지 말고 질문할 것을 요구한다. 당신의 가장 모진 적이 거짓을 말한다면, 당신은 그 거짓을 찾아야 한다. 그가 진리를 말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적의 진리가 아무리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가 진리를 말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의 적의 진리는 당신 자신의 진리에 반진리이다. 당신의 진리의 적이 진리를 말한다면, 그러면 당신 자신의 진리 안에 잘못된 또는 미숙한 또는 불완전한 어떤 것이 있다.

제도적 거짓말을 지지하고 정당화하는 반진리를 아는 것은, 앞으로 발전할 소지가 있는 진리가 이 세계로부터 벗어난 거짓말보다도 더 나쁜 거짓말로 바뀌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해야 할, 사회적 궁핍을 극복하는 일에 속한다. 진리는 공허한 장식을 위해 거울 속으로 넣어지지 않도록 보호되어야 한다. 310

진리의 사용[적용]은 본질적으로 하나의 예술이며, 전염병에 맞선 싸움에서 중요한 진리를 무기로서 사용하는데 필요한 요령을 얻기 위해서 모든 다른 예술처럼 경험에 의해서 끈기 있게 발전되어야 하는 예술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유행상인"에 "진리행상인'을 덧붙일 뿐이며, 우리의 노동의 단 하나의 대상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원칙상의 진리와 특수한 진리의 관계를 잘 고려해야 한다. 진리를 말하고 진실한 삶을 사는 것은 항상 우정과 인간적 속박을 위태롭게 하는 것과 함께 간다. 진리와 인간적 속박은 둘 다 살아있는 필요 속에 뿌리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적 속박이 진리를 방해한다면, 제도적 거짓말을 유지하는 다른 진리, 즉 반진리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한 어느 쪽을 따르지를 결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의 진리는 또 다른 진리에 비추어 측정되어야 한다. 306

진리를 무기로 사용한다는 것은 진리임이 발견되어 온 것을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우선 이러한 특수한 진리가 왜 전에 발견되지 않거나 언급되지 않았는지를 아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은 기술적인 또는 과학적인 지식의 부족 때문이었을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그러한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한 제도적 또는 구조적 구성체를 위험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의 진리를 선언하기 전에 이러한 진리에 대한 방해물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진리회피, 자유행상의 방식에 의해서, 즉 진리를 구원이라고 주장함으로써만 중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제도적인 거짓말보다도 진실함 삶을 정립하는데 훨씬 더 나쁜 것이다. 306

인간에 대한 지식의 발전과 더불어, 기독교 교회에 의해 유지되는 그리스도에 관한 반진리가 천천히 녹아 없어지며, 그리스도의 의미에 관한 충분한 진리는 성숙하여 세상에 나온다. 인간 속에있는 우주에너지가 삶에너지로서 기능하는 것과 인간의 우주적 뿌리내림이라는 측면에서 신의 의미를 실현하는 것은 종교와 지식 사이의 틈을 상당히 연결해 왔다. 우리는 아주 오랜동안 인간의 정신적 실존을 인간의 생물학적 실존으로부터 구분해온 공통분모에 막 이르고 있다. 311

당신에게 타당한 특수한 진리를 발견하는 데는 하나의 공통적인 타당한 규칙만이 있다. 그것은 당신 자신에게 신중하게 듣는 것을 배우는 것이며, 당신에게 당신의 것이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당신 자신의 방식을 발견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모든 진리는 살아있는 삶의 기능이며 살아있는 삶은 진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모든 것 속에 있는 기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모든 가르침 속에 있는 기본적인 진리는 같고 오직 하나의 공통적인 것에 이른다. 즉, 당신이 진실로 사랑할 때 또는 당신이 창조할 때 또는 당신이 당신의 집을 지을 때 또는 당신이 당신의 아이를 낳을 때 또는 당신이 밤에 별을 볼 때, 당신이 느끼는 것에 대한 당신의 방식을 찾는 것. 304

들에 있는 씨앗이 잠재적으로 거기에 있는 것처럼 진리는 아직 기꺼이 행동하지는 않는다. 가움과 얼음 얼게하는 추위는 씨앗이 있는 곳에서 발아를 중단시킬 수 있으며 과일을 맺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 전염병은 진리의 씨앗이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는 얼음얼게 하는 추위이자 가뭄이다. 전염병은 진리가 살 수 없는 곳에서 지배한다. 그러므로 눈은 묘목이 무엇을 할지 또는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보다 가뭄과 추위의 예방에 진리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염병에 일차적으로 집중해야 한다. 묘목은 삶을-주는-태양을 향해 가는 자신의 길을 알 것이다. 305

진리는 환경뿐만 아니라 자신과 충분한 접촉을 의미한다. 진리는 다른 사람의 방식과 구별되는 자기 자신의 방식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 동료에게 그가 살아갈 수 없는 진리를 강요하는 것은, 그가 지니고 다닐 수 없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의 실존을 위태롭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비참할지라도 잘 정돈된 생활방식의 균형을 깨는 것을 의미한다.292

진리는 지각하는 '살아있는 것'과 지각되는 '삶'사이에 충분하고 직접적인 접촉이다. 그 접촉이 좋을수록 진리의 경험은 더 충만하다. 살아있는 지각의 기능들이 잘 조정될수록 진리는 더욱 포괄적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지각은 살아있는 원형질의 움직임의 조정 정도에 따라 정확하게 조정된다. 그러므로 진리는 '살아있는 것[사는것]'과 살아지는 것 사이에 상호작용하는 자연스런 기능이다. 진리는 당신 속에 있고 당신 속에서 작용한다. 진리를 살아간다. 291

철학,종교,정치적 규정의 미로에 인간적 삶에 대한 새로운 교리를 추가하는 것은 바벨탑의 건물에 또 다른 혼동조각을 덧붙이는 것을 의미한다. 과제는 새로운 생활철학의 구축이 아니라 관심을 헛된 교리에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모든 교리는 왜 지금까지 실패해 왔는가? 하는 하나의 기본적인 질문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자리잡고 있는 인류의 질무에 대한 대답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 어린이들이 올바른 방향에서 찾을 길을 열어줄지도 모른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이가 관심의 초점이 된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인류의 공통적인 작동원리다. 335



삶은 자신의 길을 살 뿐이지, 누구에게도 그의 길을 어디로 가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삶은 자신의 일이 아닌 것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이것은 삶의 위대함이다. 일단 발견되고 이해되면, 삶은 자신으로부터 생기는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어야 한다. 그것은 결코 신이나 기독교의 애초의 의미와도, 사회주의의 진정한 애초의 의미와도, 인간의 삶, 자유, 행복을 향한 어떤 다른 진정한 노력과도 불일치하지 않는다. 삶-자유-행복을 향한 열망과 노력은 오늘날 서로 망하고 있는 인간의 정치조직들의 모든 분파의 공통분모이다. 삶은 그 자신의 성격상 모든 경계, 모든 작은 접경, 모든 관습장애물, 모든 민족[국가]적 제한, 모든 인종적 편견을 넘어선다. 330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삶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배워라. 결국 지금까지 당신이 황제와 공작과 지도자와 이념과 명예와 부와 단명한 조국과 모국을 위해서 싸워온 대로 삶을 위해서 싸워 봐라. 결국 삶을 위해서 싸우기 시작하라. 그리고 정직하고 열린 얼굴의 표현과 뱀같고 성격학적으로 거짓말쟁이의 표현을 구분하는 것을 배워라.321

진리는 삶의 손에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무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적을 알아야 한다. 행복과 건강과 삶의 방식을 아는 것이 행복과 건강과 삶을 증진시킬 수 있을 뿐이지 결코 파괴하지 않을 것이듯이, 삶의 진리에 관하여 더 많은 진리를 아는 것도 삶을 진전시킬 뿐이지 결코 파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병든 삶의 손에서는 삶을 죽일 수 있는 폭발물이다. 병든 삶은 자신에 관하여 진리를 사용할 수 없으며 자신의 병을 죽일 수 없다. 그러나 병든 삶은 다른, 행복한 삶을 죽이는데 삶에 관한 진리를 사용할 수 있다....건강한 삶은 썩은 삶, 유해한 삶에서 좋은 삶을 결코 만들어 내지 않을 것이다. 유해한 썩은 삶은 그러하며 그래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좋은 살아감을 더 심하게 미워한다. 316-7


희망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틈은 어쨌든 인민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을 짐으로, 그들의 비이동성과 죽음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서 느끼도록 강요한다. 욕구 뒤에서 지체하고 절룩거린다는 이러한 느낌은 새로운 것, 움직이는 것, 자극하는 것에 대한 미움으로 틀림없이 발전한다. 이와 관련하여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미움은 파멸된 인간 쪽에서는 합리적이다. 새롭고 움직이는 생각은 인민으로 하여금 그들의 정서적 안정과 안전에서 곧바로 벗어나 움직이게 한다. 여기서 보수주의는 합리적으로 된다. 이러한 안전은 그것이 비록 인간을 둔화시킬지라도 인간의 실존에 본질적이다.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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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삶의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다
    from 木筆 2009-06-28 23:46 
     로쟈의 철학페이퍼 01, 02 꼭지 참조 -  철학계의 아인슈타인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했다. 여기서 신이 뜻하는 것은 어떤 인격체가 아니라 초월적 의미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 즉 이삶을 넘어서는 , 혹은 이삶의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그 선언에 함축돼 있다. 먼댓글의 글을 읽다보면 신이라는 것을 삶의 흐름이라고, 삶을 대위한다.   없는 것을 있다라고 하는 이데아의 철학에 대비하여 가족이 세상의 전부라고
  2. 진보도 단순한 진영논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from 木筆 2009-08-30 16:14 
    [황해문화 가을호]의 권두언과 소설과 만화, 시, 한윤형의 글을 보다. (상품이 없다.)             >> 접힌 부분 펼치기 >>  진리의 도구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진리 counter-truth를 능숙하게 알아야 한다.(1) 문제는 왜
  3. 삶을 결여한 논리 DNA
    from 木筆 2010-07-17 17:23 
    말의 DNA, 논리의 DNA - 방사선조사식품에 관련하여 작은 강연을 이어듣는다. 피곤의 누적이다.들으면서 기술-경제논리가 결합하여 말을 만든다는 느낌이 든다. 안도현의 연탄재가 아니라 연탄이론이, 탄음식이론 등으로 기존 관념을 전도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싶다. 그런데 그 말의 DNA는 경제의 매듭만 있고, 모든 다른 논리를 숨겨버려, 다른 논리를 복속시키고 있다. 기술을 먹어치우고, 과학을 자양분으로 해서 만든 논리는 다른 담론의 DNA를 괴멸시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