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선생은 학생과 직접적이고 신속하게 소통할 수 있는 방식을 찾고자 하며, 종종 최선의 방식은 더 빨리라든가 저런!” “나쁘지 않군같은 단순한 말을 건네는 것임을 깨닫는다. 문제는 학생과 선생이 공유할 수 있는 지시적인 언어를 찾아 조금이라도 진저할 수 있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음악적 재능을 개발하는 것은 비서가 속기를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비서는 어린 친구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를 보여준 반면, 젊은 의사는 그들이 어떤 인물이 되어야 하는지를 늘어놓았던 것이다. 57

 

애덤 스미스는 유명한 구절에서 동정심이란 종종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나는 자신과 타인 사이의 혼동이야말로 무엇이 상호 존중의 톱니바퀴에 윤활유가 되는지를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실마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오해로 시작된다. 다시 말해, 상호 동일시와 동정심에 관한 애덤 스미스의 오류를 통해 우리는 협력을 가로막는 차이들을 극복하는 것이다. 68

 

존중의 제로섬 게임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기 위해 흑인들에 대한 존중을 부정하는 게임 70

 

두 사람에게 인성은 한 개인이 만인이 공유하는 사회적 악기’-음악 텍스트들에 해당하는 사회적 동류어는 법률, 의식, 언론, 종교적 신념의 규범, 정치적 교의 등이다-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것을 뜻한다. 76 예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삶에서 상호성은 표현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상호성은 연기되고 연주되어야만 85

 

적어도 능력에 대한 시험이 그들의 미래를 예측하는 준엄한 예언자는 아닌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재능의 불평등은 존중의 실천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단 하나의 제한된 요인에 불과할 수 있다. 능력과 존중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친절한 견해가 현실적이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려면, 인성에 대한 지각을 형성하는 능력이라는 현상 자체를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112

 

시기심의 유혹에 대항하여 루소는 자기애와 숙련, 어떤 일을 그 자체를 위해 잘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자기 존중의 미덕을 주장했다. 그렇지만 루소는 유혹의 역학이 자기 존중의 그것보다 더욱 강력하다는 이유로 이해 비관주의의 어조로 글을 끝맺고 있다. 타인들은 너무 진지하게 다뤄진 반면 자기 자신은 충분히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은 것이다. 126

 

모든 일상 생활의 관행 속에서 능력주의는 유대에 대한 위협을 상징하며 잠재적인 승자와 패자 모두 이를 느낀다. 사회적 유동성은 사회적 대가를 수반하는 것이다. 132

 

역사학자 요한 호이징가가 상기시켜주듯이, 노동에 두어지는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 여가에 대한 노동의 우월성,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대한, 비생산적인 존재가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 모두는 19세기에 사회 전체를, 빈자뿐만 아니라 부자들까지도 사로잡았던 가치이다. 자유주의에서는 노동하는 성인을 존중했던 것이다. 145

 

이해의 평등, 투명한 평등과는 달리, 자율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타인에게 인정함을 뜻하는 것으로서 불투명한 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타인의 자율성이라는 사실을 자기 자신의 자율성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거장의 지배를 피하기 위해 자율성의 부여는 상호적인 것이어야 한다. 161

 

자유주의적 주장이 갖는 활기의 어떤 측면은 인간의 특성에 관한 종종 순진하고 일차원적인 가정으로 인해 약화되었다. 자유주의의 전통은 사적 영역에서 배운 인성의 교훈을 어떻게 공적 영역으로 이어갈 수 있는지, 그 과정에서 진정한 심리학적 무게를 갖도록 정치학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165

 

우리가 보아온 자율은 단지 하나의 행동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쪽이 상대방에 관해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관계 역시 필요하다. 상대방에 관해 이해하지 못하는 점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은 관계에 지속성과 평등을 제공한다. 자율성은 연결과 낯설음, 친밀감과 비개인성을 동시에 가정하는 것이다. 225

 

경직된 관료제에 관한 빅 브라더식의 설명은 이러한 맹목성을 설명하는 데 필요하지 않다. 경제의 경우에 그러하듯이 복지에서도 관료적 피라미드는 자본주의 사회 내부의 질서를 향한 모색으로서 생겨났다. 이 카르텔을 추진한 것은 권력이지만, 음식과 주거, 의료 보호의 부족은 복지 국가의 질서를 향한 모색을 추진했다. 226

 

평평하고 짧은 관료제 역시 중앙 처리 장치를 갖고 있다. 소수의 관리자들이 결정을 내리고 직무를 설정하고 결과를 판정하는 등 지배할 수 있는 것이다. 디스크 위의 여러 요소들은 신속하게 다시 정리되고 프로그램될 수 있다. 정보 혁명은 전체 조직을 즉각 판독할 수 있는 힘을 중앙 처리 장치에 부여했다. 234

 

유연한 조직은 미세하게 등급이 매겨지는 불평등 대신에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 더 날카로운 구별을 가능케 한다. 유연한 조직은 효율적인 지휘권이 상층부에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관료적 피라미드보다 더욱 전체주의적인 기관으로 기능할 수 있다. 235

 

경쟁에 대한 두려움, 파산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패배에 대한 두려움 등이 모두 강력한 동인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직원들에게 패배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줄 것인가? 우리 스스로 그러한 두려움을 느낄 때만이 직원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 240

 

평평하고 짧은 노동 형태는 노동자들 사이 우애의 결속력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가령 사회 분석가 로버트 퍼트넘은 미국인들의 우정 관계에서 동료 노동자는 10퍼센트 이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바 있다. 중요한 문제를 논의하고 싶을 때 누구와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는 질문을 받은 사람 가운데 동료 노동자라고 답한 응답자는 절반 이하였다. 동료애의 약화는 6개월 내지 8개월 마다 순환되는 팀 체제의 경우처럼 특히 노동자들이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 일자리가 낳은 필연적인 사회적 결과이다. 이제 사람들은 서로를 알 필요가 업슨것이다. 241

 

파리와 마찬가지로 시카고에서도 훌륭한 거리 선도 활동을 통해 마약 중독은 아니더라도 범죄로부터 손을 떼도록 하는 데는 계획된 서사가 필요하다. 외부인의 눈에 시카고 지역 프로젝트는 아주 관료적인 것으로 비치는데, 그 이유는 이 오랜 교정 과정에 의사들의 지원과 법률 부조, 범죄자 자신을 위한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가정을 위한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활동하면서 형식적인 관료주의를 삼가는 도움을 가정한다는 것은 거의 도움을 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무릇 진지한 보살핌이란 유연성의 시간 틀을 넘어서는 것을 뜻한다. 245

 

자원 봉사는 낯선 사람들을 한데 결속시키거나 사회의 복잡성에 대처하기에는 허약한 치유책이다. 자원 봉사에는 동정심의 건축학이라 부를 수 있는 무언가 즉 자기가 아는 개인과 동일시하는 것으로부터 전혀 모르는 개인과도 동일시하는 것에까지 이르는 점진적인 운동-가 빠져 있다. 자율성의 필요 조건 역시 빠져 있다. 어떤 사회적 관계에서 서로 상대방을 전혀 모르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다. 254

 

유용한 노동의 숙련 기술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러한 종류의 돌봄을 동정심으로부터 분리시킨다. 이는 곤궁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에 호소하지 않는다. 유용한 노동의 숙련 기술적 차원은 선행에는 반드시 자기 희생이 수반된다고 믿는 오류에 대한 일종의 경고로 기능한다. 반대로 유용성은 구체적인 대상에 초점을 맞춘다는 고유한 가치를 갖고 있으며, 이는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만족감을 제공한다. 257

 

친구가 병에 걸리거나 연애에 실패하거나 경제적인 파탄을 맞았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흔히 우리가 해주는 조언은 약병을 나눠주는 공작 부인과 비슷하다. 건전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는 언제나 이와 동일한 차별과 포섭이라는 연극이 벌어진다. 265

 

식당에서 계산서가 나오면 누군가가 각자 음식과 술을 얼마만큼 먹었는지를 계산해서 각자가 얼마를 부담해야 할지를 결정한다. 그 순간 저녁 식사의 즐거움은 눈 녹듯 사라진다. 오히려 그런 계산을 하지 않고 돈을 낼 때, 즉 공연한 법석을 떨지 않고 일행 가운데 가난한 사람을 감춰줄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 친구로서 행동하게 된다. 273

 

경제적 교환은 짧은 거래이다. 자본주의의 새로운 제도적 형태들은 특히 단기적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의례적 교환, 특히 이와 같이 비대칭적인 경우의 교환은 보다 지속적인 관계를 창출한다. 호혜적인 발화 행위는 옷으로 자여진 실과 같은 것이 된다. 모스가 프랑스에서 상상한 복지 국가는 부르디외가 북아프리카 고지대에서 연구한 의례들처럼 모호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진행되는, 완결될 수 없는 사회적 기획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277

 

의례적인 교환은 상호 존중을 구축한다. - 트로브리안드 제도에서건, 프랑스 농촌의 대저태게서건, 음악가들 사이에서건, 아니면 도시 빈민가의 거리에서건 말이다. 표현적인 교환이 갖는 이러한 힘은 너무나도 심대해서 완전히 반대쪽 방향으로 돌려질 수도 있다. 불평등이 좋게 느껴질 수도 있고 또 가난이 자연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표현적인 존중의 기술은 모든 표현적인 행위가 그러하듯이 정의나 진실, 선을 함축하지는 않는다...상호 존중의 기술은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 준다. 교환은 사람들을 외부지향적으로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인성의 발달에 필요한 자세이다. 284

 

사람은 가지고 있던 것을 갑자기 내려놓음으로써 다시 자극을 얻게 된다 진부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거장인 마티스의 경우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활동을 표현하는 상식적인 방식은 자기 시험이다. 이 경우데도 역시 표현은 단순한 동시에 복잡하다. 저항에 맞선다는 점에서는 단순하지만 시험을 계획한다는 점에서는 단순하지 않다. ‘소유의 포기라는 표현은 어떤 습관을 버리는 것, 그러면서도 외부 세계에 의해 패배한 인간이 아니라 적극적인 인간으로서 새롭고 어려운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탐험하는 것을 전달하고자 함이다. 300

 

나는 이해의 조건뿐만 아니라 인성의 조건까지도, 즉 종교에 담긴 것과 같은 공유된 상징에 대한 새로운 관계만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새로운 관계까지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외부로 전환하는 행위를 선택했다.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지려면 개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일어나야 한다. ‘외부로의 전환은 죄수가 교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교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수에게 단순하게 다른 보다 나은 일련의 사회적 실천을 처방할 수는 없는 것이다. 302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집단들은 예기치 않은 쾌락인 호기심이나 생각지 않은 고통의 교훈을 예시하는 개인 인성의 변화에 의존함으로써 변화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상은 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존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표현적인 실행이야말로 집단적인 이미지의 힘을, 사회와 우리 자신에 대한 지각을 마비시키는 암묵적인 지식의 힘을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다. 309

 

큰아버지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그의 시대의 조직된 좌파가 동지들 사이의 상호 존중을 가로막고 있음을 알아냈다. 큰아버지가 급진적인 동시에 인도적인 보통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본능적인 감정 덕분이었다. 316

 

어떤 특정한 측면에서 보면, 큰아버지가 겪은 혼란과 브로드스키가 당한 고통 모두 마르크스주의의 직접적인 탓으로 돌릴 수 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의식에 관한 구상과 관련이 있다. 인류학자 프랭크 핸더슨 스튜어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구에서 명예는 보통 계급 체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계급은 의식을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즉 자신보다 위나 아래에 있는 사람을 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의 공식화에서도 위나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각이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 대한 의식보다 먼저 온다. 즉 불평등이 우애보다 앞선다. 혁명의 과제는 우애를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다. 319

 

계급적 명예에 대한 주장은 억압받는 집단들이 그렇게 하기 위한, 자신들의 집단적인 자아 관념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계급 의식은 마르크주으에서 고유하게 호전적인 성격을 갖고 잇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실제로 알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계급 투쟁 없이는 계급 의식이란 있을 수 없다. 계급의 적과 친구들은 파업이나 거리에서의 폭력적인 전투 와중에 진정한 색깔을 드러내게 된다. 세계 속에서 어느 개인의 실제 위치는 전투를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규정될 것이다. 319

 

계급 의식에 관한 적대적인 모델은 보로로족이 직면했던 것과 똑같은 문제, 즉 자아와 세계 사이의 관계가 마비되는 문제에 맞닥뜨린다. 암묵적인 가정과 행동을 보다 탐험적인 타인과의 관계로 양도하는 것은 어렵게 된다. 혁명적인 의지를 꺾을 위험이 있는 것이다. 욕구의 모호함, 자아의 혼란, 자신과는 다른 타인들에게 의지하는 것 이 정치학에는 이와 같은 인성의 속성들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다. 이런 속성들 또한 저항의 의지를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320

 

공산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일종의 정신 분열증이 요구되었는바, 타인들에 대해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동시에 동지들에게는 관대하고 서로를 의식하는 행동이 그것이다. 스페인에서 큰아버지는 개인이 정치적인 정신 분열증을 계속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오웰이 카탈류냐찬가에서 말한 이야기에서 한 사람의 입장이다. ‘유대를 위해서는 어쨌든 무정부주의자들과 평범한 농민들이, 심지어 견해가 다른 사제와 적군의 보병들까지도 인간적으로 연결되어야 했던 것이다. 320

 

고정된 관료제의 해체가 사람들 간에 보다 강력한 사회적 연결을 증진시키기를 기대했다. 우리의 믿음은 즉흥 연주에, 즉 클래식 음악보다는 재즈를 닮은 사회적 관계에 놓여 있었다. 결국 드러난 것처럼, 사교 재즈가 보다 많은 사교성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326

 

현대의 세 가지 존중의 규범 ( 성공하라, 스스로를 돌보라, 타인을 도우라 )을 퇴색시키는 불평등을 고려함에 있어 사회적인 해결책은 더욱 분명해 보인다. 잠재적인 재능에 특권을 주기보다는 서로 다른 실제 업적을 존경함으로써, 성인의 의존에 대한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보살핌의 조건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이러한 퇴색을 어느 정도 제거할 수 있다. 327

 

자율은 이해의 평등이라기보다는 누군가가 타인에 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타인들의 자율성이라는 사실은 자기 자신의 자율성과 동등한 것으로 간주된다. 자율성의 부여는 약자나 외부자를 존엄한 존재로 만든다. 타인에게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이번에는 자기 자신의 인성도 강화된다. 329

 

기능에 토대를 둔 자기 존중만으로는 상호 존중을 낳을 수 없다는 점이다. 사회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불평등의 해악을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상호 존중을 낳을 수 없다. 사회에서 그리고 특히 복지국가에서 우리가 직면하는 문제의 핵심은 어떻게 강자들이 약자로 남을 수밖에 없는 이들에 대해 존중을 실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음악과 같은 공연 예술은 상호 존중의 표현적 실천에서 협력적인 요소들을 드러내준다. 분할이라는 완고한 사실은 여전히 사회의 문제로 남는다.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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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류 - 신자유주의적 노동에 의해 공격받는 인간성

 

경영 컨설팅의 권위자인 제임스 참피는 "사람들이 변화를 갈망하는 것은 역사상 유례없이 소비자가 시장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견해에 의하면 시장은 너무나 역동적이어서 매년 똑같은 방식으로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도록 용납하지 않는다. 경제학자 베넷 해리슨은  이 같은 변화욕의 원천은 급속한 이익 실현을 바라는 이른바 '조급한 자본'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예컨대 지난 15년 동안 미국과 영국 증권거래소에서 평균 주식 보유 기간이 60퍼센트나 줄었다. 시장은 급속한 이익 실현이 급속한 변화가 만들어내는 최상의 결과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27


리코는 내가 대학 교수를 일생의 천직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자 그는 약간 아니꼽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컨설턴트로서 숙련된 팀 플레이어인 그는 불확실성과 모험을 도전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유연한 근무 태도는 아버지나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역할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사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지속적 인간 관계를 맺고 싶었던 것이다. 직장에서의 인간 관계 단절, 이웃들의 의도적 건망증, 자식들의 방과 후 길거리 배회 등의 현상은 그가 강조하는 영속적인 가치의 개념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다. 그래서 리코는 덫에 걸려버린 셈이다. 35


확실히 그는 성인이 된 이후 과거를 지킨다는 의미에서의 보수주의 경험이 별로 없다. 예컨대 그가 이사를 할 때마다 새 이웃과 동료들은 마치 그가 인생을 새로 시작하는 것처럼 대해줬고, 따라서 그의 과거는 자연스럽게 망각 속에 묻혔다. 그가 말하는 문화적 보수주의는 과거를 답습하자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면서 잃어버리고 있다고 느끼는 일관성을 유지하자는 것뿐이다.  35


리코는 지금까지 냉혹한 생존 경쟁 과정에서 잘 처신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슘페터적 인간으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리코에게 변화는 표류를 의미할 뿐이다. 리코는 자식들이 윤리적로나 정서적으로 표류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러나 직장 상사들에게처럼 자식들에게도 평생 교훈이 될 편지 한 장 써줄 수 없다. 그가 자식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교훈은 자신의 사리 판단과 마찬가지로 시간 제한이 있을 없는 것이다. 이는 자신의 윤리적 교훈이 모든 경우에 적용된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39

 

일상 - 구자본주의의 문제점


아담 스미스 국부론에서 - 분업이 더욱 진전되면 노동자 채용은 거의 대부분 몇 가지 매우 단순한 작업으로 국한되게 된다. 몇 가지 단순 작업을 하는데 인생을 소모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저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우둔하고 무식해진다. 48 리코의 도덕적 중심은 단호한 의지력에 있었다. 그러나 스미스는 자발적인 동정심의 분출은 어느 날 갑자기 사회 낙오자들의 처지를 이해하고 겁쟁이와 상습적 거짓말쟁이를 측은하게 여기는 것처럼 사람을 걷잡을 수 없는 감정 상태로 몰아넣어 의지력의 둑을 넘어서게 된다고 생각했다. 동정심의 분출은 사람을 정상적인 도덕심의 경계 밖으로 몰아낸다는 것이다. 동정심과 관련해서는 예측 가능하고 일상적인 것이 없다. 스미스가 이 같은 감정 분출의 윤리적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은 당시 동시대인 중에서는 드문 탁견이었다. 49

 

유연성 - 새롭게 구조 조정되는 시간


데이비드 흄도 인간본성론에서 "내가 이른 바 '나 자신' 속으로 아주 가깝게 접근해 들어가면 언제나 열기나 냉기, 빛이나 그늘, 사랑이나 미움, 고통이나 기쁨 등 특정한 감각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감각은 자아를 때로는 이쪽으로 때로는 저쪽으로 구부러지게 하는 외부 세계의 자극에서 비롯된다. 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 이론은 이 같은 외부의 변화하는 자극을 기초로 한 것이다. 61


신자유주의라는 상표(자유주의적이라는 용어는 국가의 구속에서 벗어난다는 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종종 앵글로-아메리칸 모델에 적용되고, 반면에 '국가 자본주의'는 라인 강 모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71


앵글로-아메리칸 체제에서는 정치적 제한이 부의 불평등을 제한할 정도의 역할을 하지는 못했지만 완전 고용을 이루게 했고, 반면에 라인 강 체제를 적용한 국가들에서 일반 근로자들에게 보다 유리한 복지 제도를 마련하느라 새로운 일자리 창출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그 사회가 어떤 이득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반대로 어떤 불리함을 견뎌내야 하는지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체제'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체제는 시장과 생산 활동이 이루어지게 하는 근원적 힘을 지칭하는 말이다. 73


해리슨은 이러한 불평등하고 불안정한 관계의 네트워크를 일컬어 '중앙 집중이 없는 힘의 결집'이라 부른다. 이러한 힘의 결집으로 조직의 위아래를 네트워크 내 여러 부분과 연결하여 재조직하는 힘이 부여된다. 이 경우 기업체 조직 내의 다양한 부서들마다 수익 목표나 생산 계획을 설정해주는 것으로 그 조종이 시작되고, 조직의 각 부서들에 적합한 업종이 지정되고 나면 각 부서들은 그 목표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대해 자유롭게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자유가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제로 유연한 구조의 이상을 실현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75


조직체와 개인의 시간이 과거의 철창에서 해방되었으나, 위에서 아래로의 새로운 통제와 감독의 휘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유연한 시간은 새로운 힘을 지닌 시간이 되었다. 유연성은 무질서한 듯 보이지만, 제약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는 아니다. 80


자신의 과거와 단절하는 능력과 분열을 받아들이는 자신감, 이것이 다보스의 신자유주의에 진짜 정통한 인물들에게서 나타난 두 가지의 인간성의 특성이다. 물론 그것들은 자발성을 고무시키는 특징이긴 하지만, 그러한 자발성이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반드시 훌륭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자발성을 고무시키는 그러한 인간성은 유연한 체제 내의 하위층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자기 파괴적인 원인이 될 수도 있다. 85

 

이해 불가능성 - 현대적 형태의 노동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유럽인들은 경제적인 면을 기준으로 계급을 나누지만, 미국인들은 종족이나 민족성을 위주로 객관적인 사회적 지위를 측정한다. ..당시 인터뷰한 제빵사들은 의사나 변호사, 교수 그리고 그 외 특권층 백인 등 엘리트들이 열심히 일하는 중산층의 독립적인 미국인들을 배려하기보다는 소위 게으로고 복지 혜택에만 의존하는 흑인들을 훨씬 더 동정하는 데 격분하고 있었다. 이러한 격분은 상류층과 하류층 모두에게로 향한 적개심이었다. 인종적인 적개심 때문에 불명료하기는 했지만 하여튼 계급 의식으로 발전할 가능성마저 무산되었다. 88


계급에 관한 옛 마르크스주의적 개념으로 본다면, 근로자들이 이러한 기능의 상실로 인해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고, 너무나 놀랍도록 변화된 작업장의 환경에 분개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이러한 설명에 딱 들어맞는 사람은, 관리직을 맡아 힘겹게 애쓰고 있는 흑인 점장 로드니 에버치였다. 94
빌 게이츠가 특정한 상품에 그다지 집착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신세대는 특정한 노동에 무관심하다. 즉 자신의 직업에 대한 정체성은 미약하다. 일에 대한 애착심의 결핍은 심리적 혼돈과 짝을 이루게 마련이다. 여러 언어에 능통하고 유연한 인력일수록 사회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보다 더 분명히 인식한다. 97


보스턴 제과점에서 내가 접한 직업에 대한 애착심의 결여와 심리적 혼란은 유연한 작업장에서 컴퓨터라는 특수한 자산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었다. 저항이나 어려움이 정신적 자극의 중요한 원천이고, 또 우리가 뭔가를 애타게 알려고 투쟁할 때 더 잘 알게 된다는 점은, 보스턴 제과점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큰 흥미거리가 아니었다. 이러한 진리는 그들에게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 제과점이 생산 과정에서는 어려움과 유연함이 반대입장이다...그녀는 자신의 일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이해했고, 따라서 직업 의식도 희미했다. 102


과거에는 사람들을 몇 개의 사회적 계급으로 분류했는데, 현대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개인의 정체성이 보다 유동적이라고 본다. '유동성'은 적응성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련의 연상작용을 거치면, 유동성에는 용이함이 함축되며, 유동적인 행동에는 장애물이 없다는 전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어떤 것이든 사용하기 쉽도록 만들어지면, 내가 묘사한 노동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용자는 연약해진다. 스스로가 하는 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일에 대한 연계나 열정은 피상적인 것이 된다....지금 중요한 것은 결속력을 대신해서 등장한 유연성, 유동성과 표면성의 연계다. 그래서 글로벌 상품 광고의 번지르르한 겉모습이나 단순한 메시지들은 우리에게 이미 낯익은 것들이고, 사용자 편의 지향적이다. 그러나 표면과 심층을 똑같이 절반씩 나누면 사용하기 쉬우면서도 한눈에 파악될 수 있을 정도로 심오한 논리를 숨기지 않는 유연한 생산 과정이 눈에 띌 것이다...모든 사람이 같은 얼음판 위에 서 있을 때, 한 사람만 규약을 위반해도, 그 얼음 표면은 전부 부서질 것이다....일에 대한 불투명한 표면성은 다보스 회의장의 열성적인 참여와 대조적이다. 유연한 체제에서라도 사회와 자기 자신을 리스크의 감행이라는 특별한 행동을 통해 '이해'하려고 시도할 수 없다. 103-104

 

리스크 - 혼란과 침체를 불러오는 리스크


로즈와 같은 중년층이 어떤 새로운 일을 위해 모험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녀가 서 있는 곳에 대한 불확실성은 그녀가 살아온 경험에 대한 부정으로 연결되어, 결국 그녀의 정신력을 좀먹는다. 그녀가 트라우트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순간 '변화', '기회', '새로운' 등의 말들이 허공에 울렸다. 모험을 감행하려는 그녀의 의도가 의외엿고 그 광고 회사 역시 의외로 유동적이고 피상적이었지만, 그녀의 실패는 유연한 세계 속에서 제대로 방향을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일반적인 사례다. 111


모험을 무릅쓰고자 하는 성향은 더 이상 벤처 자본가나 특별히 모험을 즐기는 개인만의 특성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모험이란 누구나가 매일매일 짊어져야 할 필수적인 것이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의 진보적 사회 구조에서 사회적 부를 생산하는 데는 사회의 모험적 생산이 수반되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규모가 감축된 회사에서 개인의 역량을 키우는 바업의 저자는 소박하게 근로자를 정원사로 비유하고, 일이란 마치 식물을 기르듯 계속 분갈이를 하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유연한 체계의 불안정성은 근로자들로 하여금 '분갈이', 즉 일에 대해 모험을 감행할 필요를 느끼게 한다. 112


하여튼 그 회사 사람들은 기억력이 부족하거든요. 제가 전에 말했듯이 당신은 늘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고, 매일 자신을 입증해야 직성이 풀리나봐요.. 계속적으로 모험에 노출되면 우리는 자칫 스스로 인간성에 대한 감각을 파괴해버릴 수 있습니다. 중간적 가치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는 없습니다. 118


유연한 자본주의에서 불확실성이라는 구조적 구멍들 쪽으로 이동할 때 방향을 잡지 못하는 이유는 '애매 모호한 횡적 이동' '뒤늦게 후회하는 손해' '예측할 수 없는 수입의 변화' 등 때문이다. 당사자는 느슨한 네트워크 속에서 종적으로 (밑에서 위로) 이동한다고 믿고 있지만, 실은 횡적으로 이동한다는 것이다. 120


거대한 사회적 경제적 힘이 모험하지 않을 수 없도록 부추기며, 제도의 무질서화 경향, 유연한 생산 체계 등 물질적 현실이 사람들을 스스로 바다로 나아가 항해하게 만든다. 가만히 있다가는 낙오하기 십상이다. 그러므로 출발을 결정한 것이 이미 성취다. 변화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모험 감행에 관한 많은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현재 상태에서의 이탈, 즉 변화를 처음 결심할 때 사기가 고조된다고 한다. 124


그들은 모두 스스로를 시험하는 순간이 왔을 때, 자신의 과거 경험이 중요시되지 않는다는 점을 두려워한 것이다. 137

 

노동 윤리 - 변화되어온 노동 윤리


권위 없는 권한을 통한 게임은 참으로 새로운 인간성 유형을 낳는다.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유형의 사람 대신에 아이러니한 사람이 출현한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아이러니에 대해, "자기 자신을 수식하는 용어가 자주 변하고 최종적으로 선택한 용어는 우연적인 것이거나 망가지기 쉬운 것이며, 따라서 그들 자신도 우연적이고 망가지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스스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정신 상태"라고 적고 있다. 자신을 아이러니하다고 보는 관점은 권위와 책임 의식의 기준이 없이 유연하게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결과이다. 168


팀워크 내에 포함된 권력 관계들, 즉 권위의 주장 없이 집행되는 권한은 세속적 금욕주의를 강조한 과거 노동 윤리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던 자기 책임의 윤리들과도 거리가 멀다. 만족을 얻으려 하지 않고 고된 노동을 통해 자아를 증거하는 고전적 노동 윤리는 자신의 취향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팀워크는 그 자신의 허구들과 공동체의 위장술을 사용하여 더 강력한 주장을 펼 수 있다......팀워크라는 새로운 집단 정신은 그 체제의 고용인들과의 진실한 계약을 교묘히 빠져나가는 '조정자'와 '작업 관리자'를 만들어낸다.,,삶의 역사를 어떻게 구성해야 하는가 하는 딜레마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속에서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예측해봄으로써 부분적이나마 명확해지리라 본다. 169-170

 

실패 - 실패에 대처하는 법


자기 자신이 어떤 행동의 대상이 되고, 자신이 그 행동에 적용되는 영역이며,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이고 동시에 행동하는 주체라고 한다면, 과연 어떻게 '자기 자신을 다스릴 수 있을까?'...그들이 취한 행동은 서로의 실패담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그것은 실제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각자의 실패를 털어놓음으로써, 이른바 실패에 관한 터부를 깨고 표면으로 드러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이 대화로 터부를 깨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90..고통을 제거하는 일이 체념고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듯싶다. 체념한다는 것은 객관적 현실으 무게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196 서로 실패에 대해 토론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일관성있는 자아 감각과 시간 개념을 찾아내는 방법을 발견한 프로그래머들이야말로 월터 리프먼이 감탄했던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다. 보다 넓은 공동체 의식, 그리고 더 풍부한 감각의 인간성이야말로 현대 자본주의에서 점차 늘어만 가고 있는 실패할 운명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197

 

우리, 그 위험한 대명사 - 표류하는 삶을 구조하는 수단


신자유주의의 영역 밖에서 그 작용을 통제하려는 노력은 하나의 다른 합리성을 지녀야만 한다. 즉 그 기업이 지역 공동체에 어떠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자체의 손익 계산보다는 시민의 이해게 기여할 수 있는지를 반드시 짚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외적인 행동 기준을 부과하면 종종 내적 개혁이 시작된다. 글로벌 망의 세계는 형태가 일정하지 않고 지속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기업 외부 공동체의 책임 있는 행동 표준이 그 기업체에 대해 '여기,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당장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염두에 두도록 한다. 200


장소는 지리적이며 정치적 목적을 지닌 위치다. 지역 공동체는 장소의 사회적 개인적 반경을 환기시킨다. 장소는 사람들이 '우리'라는 대명사를 붙여 사용할 때, 하나의 공동체를 뜻하게 된다. 이런 식의 표현은 지역적 애착심은 아닐지라도 애착심을 요구한다. 한 국가는 그 안에서 사람들이 날마다 실천을 통하여 믿음과 가치를 함께 구현할 수 있을 때, 하나의 공동체가 된다. 루소는 정치 행위들이 이러한 일상의 생활 의식들에 얼마나 깊이 기초를 두고 잇고, 정치가 공동체의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의존하고 있는가를 이해한 최초의 근대 사상가다. 현대 자본주의는 의도하지 않았지만 장소의 가치를 강화하고 공동체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우리가 작업장에서 탐사한 모든 감정적 조건들이 그런 욕망을 자극한다. 이 모든 조건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뭔가 깊이 있고 전념할 만한 다른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200


책임감과 인간성의 자아-유지에 관한 레비나스의 생각은 다시 철학자 폴 리쾨르에 의해 보다 정교하게 다듬어진다. "누군가가 나에게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 앞에서 나의 행동에 책임을 지게 된다."....유연한 자본주의에서 확산되는 무관심은 더 개인적이다...212-213

 

철학자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는 "우리 자아는 그 자신을 소유하지 못한다. 자아란 오히려 생성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자아는 시간의 사건들과 역사의 조각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자아 의식은 역사적 삶으 폐쇄 회로에서 찾을 수 있는 하나의 깜빡거림일 뿐이다."라고 선언한다.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에서으 인간성의 문제를 보여준다. 역사는 있되, 어려움을 공유한 이야기는 없고 함께 한 운명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성은 점차 파괴되어간다. '누가 날 필요로 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정답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14

 

산악 도시 다보스이 도로에 늘어선 리무진들과 경찰의 행렬을 뚫고 회의장을 드나들면서, 나는 이러한 체제는 적어도 그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의 상상력과 감성에 대한 지배력만큼은 놓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의 가족들이 겪어온 쓰라리고 변화 무쌍한 과거를 통해서 깨달은 사실은, 변화는 땅에서, 집단적인 봉기를 통해서라기보다는 개인들 사이에서 심리적 필요에 의해 말로 터져 나오리라는 것이다...그 정치적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아는 잘 모른다. 다만 나는 우리가 왜 인간적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는지 그 소중한 이유를 제시해주지 못하는 체제라면 자신으 정통성을 오래 보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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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의 꿈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가 중요하게 느껴져야 한다.
사회가 감당할 무질서의 양을 바꾸지 않으면 완전한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1)


 

풍요를 적절하게 활용하려면, 사람이 성숙함에 따라 통제된 순수한 경험에 대한 욕망이 약해질 수 있는 사회 상황을 조성해야 한다.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폐단의 기원은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이 성장하는 동안 청소년기의 문제들에 묶이거나 사로잡힌 데서 비롯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참는 법을 배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인 성인기의 조건은 이미 분명한지도 모른다.

 

 

순수한 정체성을 넘어서 성장하기

 


성인기를 거치면서 젊은이들의 이 모든 꿈이 실현되지 않으며, 사람은 좌절하는 가운데 그나마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꿈을 지킬 수밖에 없다. 최근에 벌어진 사태로 젊은 급진주의자들이 경험한 것과는 달리, 대다수 성인들은 이런 실패를 겪으면서 꿈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느낀다. 그리고 대다수 성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틀에 박힌 삶을 기다린다. 이제 문제는 특별하지 않은 성인들이 젊은 시절의 꿈을 잃어버리는 것 자체가 '성장'이라고 믿는다는 점이다. 마치 성인기가 청소년기에 꿈꾸었던 불운한 활동과 희망의 수동적인 종결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161

 

 '포기'는 풍요로운 성인들이 자기 성인기의 방침을 묘사하는 아주 흔한 방식이다....'포기'는 편한 행동이며, 포기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틀에 박힌 삶과 평화에 도전하는 이들을 억누르기 위해 뭉칠 수 있다. 내가 묘사한 젊은 급진주의자들 같은 특별한 사람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왜 그들이 자신의 첫 번째 꿈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신념을 계속 부여잡았는가 하는 점이다. 풍요로운 공동체 생활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이런 힘을 장려할 수 있는 수단이다. 161-162

 

성인기의 힘으로 이동하는데에는 4가지 단계가 존재한다. 

 

1단계 - 경험을 감당할 수 있는 역량과 새로운 능력과 힘을 얻는 데 필요한 경험의 축적 사이에서 불균형이 극에 달한다.  2단계 -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순수한 경험이라는 방법을 통해 이런 성장의 불균형에 존재하는 긴장을 해소할 수 있다....현대도시의 사회적인 제도들은 이런 식으로 개인의 성장을 동결시키려고 한다. 그리하여 위협적이지 않는 동일성 속에서 그대로 성인의 사회 생활에 도입된다. 이런 정상적인 성인의 양상을 깨뜨려야 한다. 특별히 강한 몇몇 젊은 혁명가들의 경험은 3,4단계에서 가능성을 넌지시 보여준다. 

 

 3단계 - 젊은이는 일관된 질서의 전망을 실행하려고 노력하면서 움직이지 않는 장애물이나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사회 상황과 마주친다. 무질서한 세계는 일관성과 유대라는 꿈을 좌절시킨다. 좌절이 어떻게 일어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좋은 편이고 그들이 나쁜 편이라는 가정이다. 이런 순수한 이미지는 무너지고 동정이 생겨난다.  4단계 - 주변 세계에 관한 아동기의 호기심이 부활한다. 모든 것이 정돈된 모습을 보려는 욕망은 제쳐두고라도 세계를 보려는 욕망이 다시 생겨난다. 다시 말해, 미지의 장소들을 보고 전에 마주치지 않았던 느낌과 상황을 경험하려는 용기가 다시 솟아오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인간에 대한 관심 같은 게 생겨 세계에서 '다름'을 인식할 수 있다. ..심리학자들이 극단적인 형태의 순수 욕망을 개인 '병리학'으로 해석한 것처럼, 이런 질환을 가진 개인들의 치료를 보면 사회적인 형태의 병리학을 어떻게 치료할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162-165

 

사람이 자기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깨닫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에게는 일정한 자족적인 고독과 독자성이 생겨난다...사람이 사회 세계의 주인이자 거울이 아니라 '다수 가운데 하나'라고 자신을 보게 되면 '자신이 가진 속성보다 자신이 더 크다'는 느낌이 생겨난다....자아의 주인다운 능력에 대한 믿음을 버림으로써 일정한 힘을 확인한다는 것이다. 166

 

 사람이 전능해지고 싶다는 청소년기의 욕망을 상실하면 그가 가지는 관심의 특질에도 어떤 일이 생긴다. 이 변화는 '돌봄'이라는 단어의 두 가지 용법으로 구체화된다. 일상 언어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걱정하는 일'과 함께 누군가를 '보살피는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168

 

이런 돌봄 개념은 인간의 한계, 즉 세계 속에서 한 사람의 관심과 힘의 한계를 배운 결과물이다. 이렇게 하여 어린이의 자유로운 호기심과 주변에 있는 경험의 대상 자체에 대한 관심은 정신장애에 시달리는 성인의 치료를 통해 다시 떠오르게 되었다. 이제 청소년기와 달리 관심과 특별한 돌봄은 사전에 형성된 가치 구조의 지시를 받지 않아도 된다. 개인의 세계 속 정체성 의식에 '들어맞지 않는' 것들도 받아들일 수 있다. 치료를 거치면서 환자는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와 마주해도 좌절하지 않는 생존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한다. 170

 

성인기의 불안정한 성격과 자기 안의 퇴행적인 행동방식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성인의 의향은 둘 다 삶에서 우연을 수용하는 데 이른다. 하지만 정서적인 힘의 우연한 성격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수동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걱정'의 힘을 확장하게 된다. 173

 

정서적인 성장은 신체적인 성장과 달리 불가피하고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인기를 불안정한 것으로 파악하면, 평범한 삶의 일상적인 문제들에 그토록 많은 고통이 존재한다는 어두운 현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이 고통을 경감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175

 

성인의 성장은 변형적이기보다 부가적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실재의 다른 요소들이 언제나 끼어든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 사이의 고통과 무질서는 불가피하다. 이런 퇴행은 어떤 유토피아 사회에서도 절대 없앨 수 없는 사회적인 현실의 본질을 형성한다. 176

 

성인기는 흔히 제한된 사건들을 걱정하되 소유하거나 차지하려고 시도하지 않으면서 돌보는 시기로 여긴다. 성인의 돌봄이라 함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에 대해 소유하려는 힘을 느끼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것들을 책임질 수 있을까? 176

 

신체적인 나이 듦과 윤리적인 나이 듦의 시간적인 불일치로 이 문제를 해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것을 소유한다 함은 그것을 시간에서 빼내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것의 운명을 빼앗는 셈이 된다. 성인으로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옹호하면서도 그 사람이나 사물의 운명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대한 관심은 다름 아니라 좋은 돌봄은 시간 속에서, 삶의 역사에서 구체적이고 제한된 사건들을 다룬다는 의식이며, 또한 이 관심은 사람이 자신이 살아가는 세게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제한된 전망이라는 의식을 수반한다. 176-177

 

 열여덟 살에 보수적인 사람은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마흔 살에도 보수적인 사람은 변명에 여지가 없다. 177

 

 과거의 파노라마를 현재의 사건들과 분리하는 것이 성인기의 힘이다. 청소년기의 힘이 이 파노라마를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렇게 해서 성인은 '강박', 즉 지난 삶의 역사의 의해 엄격하게 형성된 현재의 의미와 관심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정체성의 규칙 형성 능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제와 새로운 의미가 개인의 자기 역사 인식에 스며들 수 있도록 이 능력을 길들이는 것이다. 178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에서 벌어진 사건들에 관해 정말 유연하게 '역사적'으로 인식하려면 청소년기의 힘을 실행하고 실패하는 경험을 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재와 미래의 다양한 경험을 과거의 쟁점 측면에서만 해석하려고 하며, 설상가상으로 이 젊은이가 청소년기에 나타난 힘을 좇아 행동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다면, 과거에 충분한 힘을 가졌다면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이 마주치는 모든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인식에 시달릴 수도 있다...179 

 

이런 자유의 선물은 젊은이들이 고통 없는 꿈을 행동에 옮기고 건설적인 실패를 하도록 만드는 사회적인 상황으로부터 나온다. 180

 

도시의 병폐는 교통 개선이나 재정 확충 같은 기계적인 문제가 아니다. 도시의 병폐는 사람들이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장소, 성인들이 정말로 사회적인 실존에 계속 참여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인간적인 문제이다. 181

 

순수를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자율적인 사람들과 달리 사람들의 세계 속에서 다른 이들 돌볼 힘이 없다. 이 사람들은 특히 긴장된 순간에는 자기 행동의 결과에 무관심하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발전시키지 못했고 따라서 다른 이들을 인식할 수 있는 힘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분석할 자원은 거의 없이, 일관된 상징들을 매개로 해서 현재 상태를 일반화된 추상적인 삶의 상태로 변형하려는 강렬한 힘만 존재한다. 성인의 돌봄은 베버의 표현을 빌리자면 좀 더 책임성이 있다. 세부 사항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개인은 미지의 사회적 경험에 이끌이면서 여기서 종종 끔직하게 고통스러운 발견을 하기 때문이다. 185 

 

 지난 20년의 풍요로운 사회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공동체 개념이 실은 사람들이 서로로부터 숨기 위한 한 방편이며, 이런 숨기의 결과물이 노예상태와 무관심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사람들이 경험하는 공동체의 유대 대신 이제 다른 성인 사회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  186 

 

 이런 사회가 조밀한 도시의 다양한 혼란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고 믿는다. 성인의 삶은 복잡한 환경에서만, 사람들의 삶에서 가능한 온갖 복잡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다. 사람들의 모든 윤리적인 본성은 불안정하고 허약하며 무질서한 사건들에 연류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불안정한 사회만이 그 사회에 고유한 풍부함을 가지고 청소년기를 넘어 성장하기 위한 매개를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혼란스러운 도시 생활만이 청소년기의 노예 상태에 도전하고, 그 결과로 지금은 소수만이 누리는 성장의 기회를 많은 젊은이들에게 줄 수 있다는 점이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187

 

 

볕뉘.

 

1. 피곤이 손쉽게 와 이른 잠을 청하다가 학번을 묻는 전화에 일어나 쌓인 시집 한권을 집어든다. 히스테리아였다.  위의 책 가운데 히스테리, 정신질환 등 개인의 심리학, 병리학에 대한 부분이 나온다. 나에 갇힌 어른들. 마흔이 넘어도 보수인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이 사회. 어른이 아니라 어른이들만 버글거리는 사회.  사회의 병리학을 다뤄야 한다고 말이다.  새벽까지 갈 것 같아 피곤을 경계삼아 절반을 보다 그쳤다.  가을은 살랑거린다. 이불 반틈이 부족하다.

 

2. 사회적인 유년기, 사회의 유아기란 말이 겹친다. 이반 일리히는 역사라는 것은 단계를 밟는 것이 아니라 불쑥 단속적이기는 하지만 이전의 역사에 접목될 수 있는 것이라 한다. 이념도 이론도 부질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게 경도된 반세기 이상의 경험을 유산처럼 안고 있다.  이론도 나만을 과잉화하여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가 한다. 저자가 순수한 정체성을 이야기하면서 청소년이 자신의 맥락을 만들어가며 지탱하는 모습이 어쩌면 그간 과정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3. 저자의 말처럼 파노라마를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 청소년기의 힘이라면 파노라마와 현실의 사건과 분리하는 것이 성인기의 힘이라고 한다. 순수와 환원으로 경도된 이론과 이념은 유아적이거나 어린 혁명가와 같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세상의 허망함을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그 깨달음의 과정이 없는 이상, 자책과 죄스러움을 평생에 안고가는지도 모르겠다. 이론이나 이념도 제것이 최고라는 유아기에서 벗어나서, 현실과 부딪치며 생기는 상처와 잔유물들을 다시 거름삼아 사상의 씨앗이 생기거나 자랄 수 있도록 하는 국면까지 바랄 수 없더라도, 무엇인가 선악의 이분법으로 사고하고 움직이고 더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자각만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싶다.

 

4. 멋진 실패와 포기, 자중심성에 대한 대오가 있었을 때 곁의 너가 보인다.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는다. 나와너가 기대고 궁금해도 아주 조금밖에...더 나빠질 수 있다는 현실을 인정할 때만이라야 아마 더 나빠지지 않는 지지대라도 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 다시 읽기 몇 장이 더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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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의 꿈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가 중요하게 느껴져야 한다.

 

현대 공동체 생활에서 손꼽히는 기묘한 특징은 풍요의 문제가 혁명의 구분선을 가로지른다는 점이다....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공동체 생활로 무엇을 할까? 혁명으로 부는 재분배되었지만, 혁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혁명의 결과물인 풍요를 삶에 어떻게 도입할지, 이제 먹을거리가 충분해 싸울 필요가 없어졌을 때 사람들은 무엇에 전념할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17

 

혁명의 길이 사회에서 폭군을 제거하는 것을 넘어서는 정서적인 경험이어야 한다고 프란츠 파농이나 마르쿠제 같은 사람은 믿는다. 이 길은 지배권력이 없는 상태, 즉 아나키와 일정한 삶의 무질서를 받아들이도록 사람을 길들이는 교육이어야 한다. 사회가 감당할 무질서의 양을 바꾸지 않은 채 사회 지도자만 바꾼다면 완전한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도 1844년 수고에서 경제적 풍요 자체 때문에 질서에 대한 사회의 구조적 요구가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18 

 

파농은 도시가 관료제와 익명성으로 인간의 감정이 파괴될 수밖에 없다고 믿은 것처럼 조밀한 장소에서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서 당황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안전하고 틀에 박힌 삶만을 찾는다. 사람들은 결국 개인적으로 안전한 범위 안으로 쪼그라들어 혁명가로 성장하지 못한다. 19

 

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조밀한 도시 정주지에서 함께 살아갈 때 나타나는 사회적인 다양성에 재갈을 물려야 하는 것이다. 틀에 박힌 생활을 피하려는 요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사회적인 경계를 폐소공포증으로써 충족할 수 있다. 20

 

풍요의 공동체는 인간에게 자유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폭정의 새로운 가능성도 열어준다. 결핍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공동체 생활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어두운 욕망, 즉 사람들이 사회관계에서 받아들이는 안전하고 확실한 노예 상태에 대한 욕망을 측정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 스스로 인정하기를 혐오하는 이런 종류의 감정을 조사해야만 자유에 대한 욕망의 특징과 풍요로운 현대라는 조건 아래서 자유를 달성하는 수단을 제대로 밝힐 수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청소년기에 일련의 힘과 욕망이 형성되어 자발적인 노예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현존하는 도시 공동체의 조직은 사람들에게 청소년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 노예가 되도록 부추긴다는 것, 무질서와 고통스러운 어긋남을 받아들이는 것을 자유의 본질로 삼는 성인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 틀을 깨뜨리는 게 가능하다는 것, 청소년기에서 이와 같이 새롭고 충분히 가능한 성인기로 옮겨가는 이행은 조밀하고 통제 불가능한 인간 정주지, 즉 도시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경험의 구조에 좌우된다는 것 등이다. 21

 

..도시라는 정글, 도시의 광막함과 고독에 긍정적인 인간적인 가치가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22


순수한 정체성


첫발을 내딛는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스스로를 작은 신으로 여기는 한편 재판관처럼 환자를 판결하고 환자를 약간 경멸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전능욕망"이라고 지칭한 이런 태도는 환자들이 가진 문제에 연루됨으로써 자신이 상처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때문에 생긴다고 결론지었다. 환자의 문제에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깊숙이 연루되면 자신들의 자기 인식이 약해질까봐 염려한다는 것이다. 31-32

 

젊은 의사들의 경우, 엄격한 자아상을 통한 이런 혼동에 대한 방어가 환자들의 거대한 고통에 휩쓸리는 사태를 막아준다. 이 고통이라는 병은 환자가 그것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혁명가와 의사 모두 어려운 사회적인 상호작용에 압도당할 수 있다는 위협에 대비해 미리 자아상을 고정하는 식으로 대응한다. 사회 상황에 따라 움직이기 쉬운 열린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고정된 사물이 되는 것이다 33

 

청소년 후반기에 일어나는 정체성의 위기는 개인의 자아상과 그 자아 바깥에 있는 삶에 대한 상 사이의 관계를 평가하는 문제이다. 이처럼 정체성의 위기는 단순히 '나의 성격이 어떤지'를 말하는 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위기는 자라나는 인간이 처음으로 자아상과 자아 바깥의 세계상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의 규칙이나 양상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의식적인 시도이다. 46

 

자기순수화의 동력으로부터 압도적이면서도 본질적으로 편안한 죄의식이 나올 수 있다. 이 죄의식은 세계의 구체성을 다루는 인간의 능력을 파괴한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이 행동한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과 문제에 직면해서도 수동적인 태도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병적인 상태다. 이 사람은 어떤 해악을 유발하든 편안하게 용인할 수 있다. 스스로를 끔찍한 죄인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54


순수한 공동체라는 신화


특정한 종교운동과 나중에 일어난 경제 운동이 유사한 이유야말로 베버가 찾고자 한 것이었다. 두 운동 모두 불안을 바탕으로 세워졌고, 둘 다 부덕한 행동에 대한 자기부정과 공동체의 억압으로 이어졌다. 베버가 추구한 방향은 매우 분명했다. 그는 종교를 내팽개친 시대에 어떻게 해서 순수한 자아를 향한 어떤 충동이 하나의 사회적 가치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61

 

공동체의 감정은 형제애이며, 여기에는 사람들이 서로를 물질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인정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수반된다. 공동체의 유대는 공동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 즉 '우리'와 '우리가 누구인가'를 인정하는 데 따르는 기쁨이다. 63

 

청교도 공동체 생활이나 분투하는 기업가들의 공동체 생활에서는 갈등을 배제하지 않았다. 사실 고결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종종 갈등을 부추기기도 했다.뉴욕 주 북부의 작은 마을이나 '해로운' 흑인 가족을 배제한 교외는 갈등을 두려워했다....공동체 유대의 신화는 의지를 드러낸 행동을 통해, 어떤 경우에는 거짓말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겁쟁이가 되어 서로로부터 숨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68

 

일관된 공동체 이미지를 순수화하면 사람들의 '다름'에 대한 사랑보다는 두려움이 승리를 거둔다. 이런 두려움이 경험의 위조를 낳는다. 비슷해지려는 욕망을 표현하는 '우리'라는 감정은 사람들이 서로를 깊이 들여다볼 필요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는 대신 서로에 관해 모든 걸 안다고 상상하며, 사람들의 지식은 그들이 어떻게 서로 똑같아져야 하는지에 관한 환상이 된다. 72

 

이렇게 해서 현실에서 전혀 다른 것 같은 외부인을 공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라는 감정이 자라날 수 있다. 사실, 이들은 서로가 거의 공유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이없다. 가짜 공동체 의식이다. 73

 

공동체 유대를 통한 존엄이라는 신화는 세가지 뚜렷한 사회적인 결과를 낳는다. 첫째, 공동체 생황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 줄어든다. 두번째 결과는 일탈한 사람들에 대한 억압이 그것이다. 공통적인 정체성의 표현과 일탈에 대한 억압은 둘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측면이다. 세번째 결과는 욕망과 폭력과의 관계에 존재한다...그들 자신의 삶에서 무질서를 조금도 용인하지 않고 또한 무질서를 경험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차단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긴장이 분출하는 상황이 되면 공격과 폭력적인 힘, 보복 등의 최종적인 방법이 정당화될 뿐만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데에도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76-79

 

풍요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향한 욕망을 형성하는 데서 더 미묘하고 어쩌면 더 위험한 역할을 한다. 가난한 공동체에서나 결핍의 시기에는 개인과 가족 사이의 공유가 생존에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이런 공유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야말로 풍요의 증거이다...공유하는 게 훨씬 적어야 하는 경우 각 개인이 서로의 성격을 평가하기 위해 의존할 수 있는 경험의 축적이 한결 적어진다. 공동체 유대감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서로와의 관계에서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자신들이 동일한가를 상상하려는 성향이 훨씬 강하다. 83

 

 다시말해, 풍요는 공동체 접촉에서 고립을 만들어내는 힘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인 관계성을 서로에 대한 필요보다 유사성이라는 측면에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이러한 것들이 공동체 유대라는 신화의 특징들이다. 84


도시는 어떻게 신화를 되살리는가


가족 구조와 도시 발전, 새로운 풍요의 조건 등이 한 흐름으로 합류하는 지점을 보면서, 이전엔 사람들이 도시라는 넓은 무대에서 추구하던 사회적 기능과 접촉을 지난 수십 년 사이에 가족이 전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정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던 사회적인 '공간들'이 가족에게 전유되면서 도시 지역에 남은 사람들의 공동체 관계와 가족 자체에 왜곡을 부추겼다. 이런 왜곡은 복잡성과 무질서가 야기할 수 있는 유대와 경험의 두려움을 추구한다. 89. 사람들이 도시에서 상상하는 가족과 가족형 관계가 중요해짐에 따라 청소년기의 순수화 양상이 공동체와 가족 구성원들 개인적인 삶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89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들은 도시의 사회적 관계 속에 먹고 살기 위해 자기 삶에서 "접촉점의 다양성"을 만들어야 했다. 그들이 속한 제도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은 정치적인 '호의'나 커피숍과 술집이라는 안전판, 유대교 회당과 교회의 가르침 등의 지원에 계속 의존했다. 93

 

작은 마을 생활의 두드러진 특징은 마을 공동체에 속한 모든 구성원이 마을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을 문화는 널리 퍼져 있었다. 분리되거나 고립된 사회 영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 분업과 지위 구분은 존재했지만, 모든 사람이 분리된 활동의 성격이 있었다. 94

 

개인들은 일상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사회영역에 침투할 자격과 필요가 있었다. 이 영역들이 조화롭게 조직되지 않고 심지어 적대적인 관계일지라도 말이다...도시에서 사라진 것은 바로 이런 접촉점의 다양성이다. 그 대신에 더욱 일관된 형태의 사회 활동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95

 

순수한 도시를 계획하기


현대의 비평가들은 분업이 적었던 산업화 이전의 목가적인 질서로 회귀하자는 꿈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다. 기술적인 문제와 경직성에 대한 해답으로 도시생활의 의도적인 단순성을 주장하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았다. 마치 사람들이 자신의 창조 능력을 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루이스 멈퍼드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이기 위해 도구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방식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129

 

전체가 효율을 극대화하게끔 기능하는 것이 부품들의 수명을 위해 최선의 방법이란 사실은 기계 설계에는 타당하지만, 어떻게 인간사에서도 이런 원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사람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서로를 상대하는 가장 편한 방법에서 벗어나도록 장려해야 한다. 전에 존재한 것과는 다른 양상과 방향의 관계를 만들도록 장려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 현상을 보면, 인간은 이런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 139

 

인문학자들은 종종 정복할 수 없는 기술적인 힘들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 앞에서 절망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성장하는 것들이 대개 그렇듯 기술의 양상은 자신의 성장과 관련이 있는 힘들에 대해서만 통제권을 가진다. 기계 기술은 도시의 사회 구조와 직접 관련된 사회적인 힘들에 의해 성장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성장한 기술을 도시에 다시 적용하면 기술적인 상징은 실용적이지 않고 효과가 없다. 145

 

도시계획 공동체는 조화와 예정된 질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사회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미래를 기획하지 않는 한, 자신들의 사회 생활을 구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성숙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147

 

볕뉘. 다시 읽다.  4장까지 저자의 목차에 따라 옮긴다. 나머지 책날개는 조금 미루다가 이어 달려고 한다.   이 책 속에 소개된 앙드레 말로 책을 읽고 난 뒤다.  68 혁명의 시대적 맥락에 이어 개인사에 말끔하지 않았던 부분을 반추하면서 쓴 것이다. 왜 뜻대로 되지 않는가? 그 이유에 대해 되물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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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8세에 보수적인 청년은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마흔에도 보수적인 사람은 변명에 여지가 없다.(2)
    from 木筆 2014-09-05 13:11 
    풍요를 적절하게 활용하려면, 사람이 성숙함에 따라 통제된 순수한 경험에 대한 욕망이 약해질 수 있는 사회 상황을 조성해야 한다.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폐단의 기원은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이 성장하는 동안 청소년기의 문제들에 묶이거나 사로잡힌 데서 비롯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참는 법을 배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인 성인기의 조건은 이미 분명한지도 모른다. 순수한 정체성을 넘어서 성장하기 성인기를 거치면서
 
 
 

1. 독서 모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발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발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텍스트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다른 것들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 공유한 고민이나 씨드, 씨앗을 어떻게 건사할 것인가? 책을 읽고 나누는 전후의 과정을 통해 좀더 '모임의 양'뿐만이 아니라 '모임의 질'을 높이는 방법은 없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나누는 토론회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할 수 있을까? 해야만 하지 않는가? 초빙강연을 통해 얻고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 느낌까지 바래는 것은 아닌가? 그저 소비되는 것은 아닌가?  좀더 색다른 계기나 열정을 줄 수 없었는가? 여운들을 살피지 않아 공부의 때를 놓친 이들은 없는가? 강독을 하고 낭독을 하고, 분담을 하는 과정에서 준비과정이 미흡한 것은 아닐까? 분량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학생들도 아닌데 텍스트나 줄거리에 접근하는 방법이나 저자를 집중탐구하는 방법이 천편일률이지는 않은가? 


2. 독서 모임 진행사항을 사무적으로 기계적으로 녹취하고 회의같은 분위기로 남기는 것이 합당한가? 질문을 남길 수는 없을까? 몇가지 경로와 사유, 토론을 통해 남겨보는 질문? 질문들이 저자에게 피드백이 될 수 있다면? 강도높은 고민이나 격정, 의식전환에 밑거름이 되는 일들이 일어났다면 그것을 남기고 보듬을 수 있는 틀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3. 독특한 학습습관이나 테마에 따른 색다른 접근법, 대상에 따라 좀더 색다른 과정을 발견하는 맛을 보는 것이 어떤가?


4. 윤*샘 텍스트 논문 두가지로 강독모임을 갖은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돌아간 뒤에 텍스트에 대한 여운이 남는 모임이었다. 키워드와 생각의 맥락이 여러차례 반복되어 논의되기에 강독모임 자체로 복습이 많이 되는 체험이었다.  뒤풀이 겸 얘기를 나누다가 독자마다 읽는 패턴이 다르지만 저자, 비평가, 연구자, 번역자가 되어 여러 시선으로 다시 살피는 것을 직접 체험한 셈이다. 아니면 저자의 책을 여러권을 반복해서 읽고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인으로서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갖고, 그 지평을 넓히는 작업을 한다는 점이다. 텍스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좀더 출렁거리는 읽기를 통해 그 파장이 번져나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5. 모임과 모임사이 겹침이 없다. 한 모임이 관성을 갖게 되면서 오는 정체감을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도 문제로 삼을 수 있겠다. 

 

 

볕뉘.

 

1. 독서모임은 물론 사교의 속성을 갖는다. 친교만큼 좋은 것도 없으리라.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도 한달이나 한주가 기다려지고 설레인다.  지난 모임 뒤 한**샘이 이야기를 건넨다. 공감하고 미리 나눠주는 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있는 터라 반가웠다. 토론회를 만들고 나눠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 요지다.  성인 대상은 쉽지만 않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진도만을 고려하고 고집할 수도 있다. 모임 역시 여건이 되지 않아 오래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텍스트나 책을 미쳐 살피지 않아 핵심이 아니라 변죽이 논의되기도 쉽상이다. 분야별로 책읽는 방법도 기술도 바꿔야 한다는 팁과 책을 최근에서야 접한다. 잔기술이나 과정과 방법에 대한 논의도 활발했으면 한다.

 

2. 일일 회계 결산처럼 게정과목에 따라 넣고 다른 사람, 모임, 조직과 거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지만  친구의 동의를 더 곰삭여서 올 가을이 가기 전 토론회를 한번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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