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발. 지난 월요일 뒤풀이, 마음과 생각을 좀더 나누다. 나누다보니 생각과 생각이 섞이게 하거나 생각고리들이 연결되어야겠다 싶다. 생각을 서로 걸 수 있다면 그냥 스쳐버리지 않는다면, 생각이 차곡차곡 쌓이게 할 수는 없을까? 좀 더 깊이있게 생각뿌리가 내렸으면 좋겠다. 하고싶은 것을 확인해내고, 그것이 현실성을 갖도록, 그리고 현실에 미칠 영향들을 좀더 촘촘히 해놓으면 좋을 듯 싶다. 그러다보니 지난 번에 놓친 생각들도 들어온다. 한사람이 할 수 있는 것, 두사람이 할  수 있는 것...함께 할 수 있는 일..몸으로 밀고 나갈 일들...여러 생각들이 겹친다. 함께 나눌 시간이 많지 않겠지만, 시간은 시작점을 매개로 자랄 수 있는 것이란 확신을 공유한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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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간사는 사고쳐서 다음달 결혼날짜를 잡았다하고, 서샘은 그만두겠다고 한다. 

회원들은 모임을 핑계로 책보다는 연애에 관심이 있는가 보다. 

올 것이 온 것인가?  

어제 문자를 보냈다.  

모임 꾸려가기가 너무 힘들다고. 왜 이리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느냐구... 

그래서 혼자 꽃 한잔했다. 꽃술을 펑펑 마셨다. 취해서 유부녀와 유부남들에게 

사랑한다고 문자를 팡팡 날렸다....슬프다. 

>> 접힌 부분 펼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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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샘 2010-04-02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한다는 문자를 받고 울렁였다, 하지만 그 사랑 지체없이 받아먹고 싶어

답문했다. "자기야 보고싶당"

만우절이 고마웠다. 파장이 인다면 '뻥이었어' 둘러대면 그만이고, 어쨌든 만우절에 기대어

진심을 은근슬쩍 고백할 수 있었으니...

유부녀 2010-04-02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만우절을 핑계삼아 좀 더 쎄게 나갈걸...ㅋㅋ
문자소감...서샘과 이하동문.

근데, 사무간사와 서샘얘기가 시선을 확 땡기네요. 무슨 일이??

여울 2010-04-02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뻥이라우. 아님말구. ㅎㅎ 속고 속이는 사이, 속이고 속아넘머가는 사이 ㅎㅎ 그런데 뻥매거진이 생각나는 것은 어인 일...ㅎㅎ

고니 2010-04-02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 제대로 놀아 보아요^^

결혼할간사 2010-04-02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시가너무길어서테러가될까봐보내다말았죠.내년만우절에도사랑한다고말해드릴게요 만우절인줄 알았으면사랑한다는말을아끼지말걸그랬어요 ㅎㅎㅎ

여울 2010-04-0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ㅅ대표님이 문자받고 가슴이 철렁했다는... ㅎㅎ. 올해 으뜸은 당연 결혼할간사님. ㅎㅎ

루체오페르 2010-04-0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공...하면서 읽다가 댓글보면서 엇? 했습니다. 어디까지가 만우절인거죠? 사고? 헷갈려요ㅋ^^;

여울 2010-04-04 10:46   좋아요 0 | URL
접힌 것 말고 전부 거짓말이예요. ㅎㅎ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린다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들
저것 좀 봐, 꼭 시간이 떨어지는 것 같아
기다린다 저 빗방울이 흐르고 흘러
강물이 되고 바다가 되고
저 우주의 끝까지 흘러가
다시 은행나무 아래의 빗방울로 돌아올 때까지
그 풍경에 나도 한 방울의 물방울이 될 때까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그대를 기다리다 보면
내 삶은 내가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은행나무 잎이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내가 어쩔 수 없는 그대
그대 안의 더 작은 그대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져 내 어깨에 기대는 따뜻한
습기
내 가슴을 적시는 그대


은행나무 아래서 우산을 쓰고
자꾸자꾸 작아지는 은행나무 잎을 따라
나도 작아져 저 나뭇가지의 끝 매달린 한 장의 남은
잎이 된다
거기에서 우산도 없이 비를 맞고
넌 누굴 기다리니 넌 누굴 기다리니
나뭇잎이 속삭이는 소리를 들으며
이건 빗방울들의 소리인 줄도 몰라하면서
빗방울보다 아니 그 속의 더 작은 물방울보다 작아
지는
내가, 내 삶의 그대가 오는 이렇게 아름다운 한 순간을
기다려온 것인줄 몰라한다 (원재훈) 

 

 

 

 

 

 

 

뱀발. 출근길 동료를 기다리며 시 한편을 봅니다. 그리고 한꼭지의 여운을 따라가봅니다. 그리고 한겨레 21의 마지막 꼭지 지붕뚫고 하이킥의 목없는 자 세경[노 탱규-신세경은 귀신이다]의 코멘트를 더듬습니다. 자본주의란 나르시스는 욕망하고 보는 시선이 다른 이를 볼 수 없습니다. 자타불이라는 불교의 깨달음이 아니라 서양철학의 그늘은 오직 일자밖에 없습니다. 나만 있는 철학은, 환원의 논리에 중독된 철학은 타자를 볼 수 없습니다. 전체-무한; 전체를 구성하려는 앎의 논리는 이미 있는 타자를 백안시 합니다. 무한에 있는 타자는 전체를 보려는 시선으로 구성할 수도 볼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타자와 관계가 있는 것이 먼저랍니다. 윤리가 먼저이지 철학이 먼저가 아니랍니다. 나르시스의 철학은 시간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합니다. 내가 소유한 시간일  뿐, 타자와 대면하거나 자라는 시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타자를 나를 앎이나 인식의 연장에 두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시간은 끊임없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나르시스-시간이 흐른다거나 소유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은 그만큼 진보와 관련이 없습니다. 그들을 타자를 인식할줄도, 시간을 만들 수도 자라게 할 수 없습니다. 늘 너가 없기때문입니다. 윤리가 삶 속에 없기때문입니다.  

저도 그러합니다. 엊그제 모임에 시간을 가지고, 델타t 함수로 보는 시간의 성장만 갖는 이들은 한통속이다라는 친구의 말이 되새겨집니다. 시간의 지속성, 시간의 자람, 관계를 자람을 볼 줄 모르는 이는 진보와 거리가 멀다라는 말이 자꾸 생각납니다.  저도 그러합니다. 나르시스트이니까요. 

레비나스의 죽음에 대한 소식, 곁다리로 안개처럼 흘러가는 앎들이 오늘 안개비가 내리는 날. 문득 새롭게 다가옵니다. 챙겨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출근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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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329  모임에 빠듯하게 시간을 댄다. 밤이 시작하고, 퇴근길 보름달은 남쪽 지평선 위처럼 훤하다. 한켠에 청매화가 달빛에 은은하다. 모임은 익어가고, 이야기도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밤하늘도 점점 깊어지고, 보름달은 매화향에 취해 하얗다. 하얗다. 돌아오는 길 산수유에 삐죽 삐죽 목련도 달빛을 머금다.

100328  [뜰이 있는 집]에서 쟈스민차를 시킨다. 얕은 촛불을 담은 워머는 나직이 속삭인다. 속삭인 차를 음향하다. 모임의 공백을 마신다.  텅빈 공간이 경계에 보이고 나서야 조금 조금 마음들이 기울지도 모른다. 찻잔의 맑은 바닥은 우물같다. 비추이는, 스스로 비추이는, 어쩌면 마음은 낮거나 빈 곳을 찾아다니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뻣뻣하거나 스스로 높인 죄는 아닌가 싶다.

100327  모임의 막내였던 친구가 결혼을 한다. 햇수로 열여덟해.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을 돌려 피하고 되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와르르 연예인의 아우라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이들과 아주머니는 한통속이다. 막걸리 잔을 채우듯, 지난 날들이 겹쳐 들이킨다. 생각보다 삶은 속도가 빠르다. 이제 함께 삶을 섞어내야 하는 것인지도. 세상을 살아내는 마음들이라도, 생각들이라도 겹치는 타산을 한다면 욕먹겠지.  순간을, 아니면 다른 시간을 자라게 하는 일이라도 늦지 않는 것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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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03-30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선화가 달보다 오히려 밝습니다 ^^

여울 2010-03-31 08:41   좋아요 0 | URL
비가 오네요. 촉촉...꽃망울을 재촉하는 소리들....화사한 4월을 기대해봅니다. ...그리고 여유있는 차 한잔의 시간들...도.

김형숙 2010-03-31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랫만에 인사드리네요..비오는 갑천을 보고 와 한결 마음이 싱그러워짐을 느끼다 인사드립니다.지난 월요일에 뵐 걸 기대하다 못오셔서.ㅎㅎㅎ운영위원장님 소리없는 웃음이 그리웠던 월요일이었어요..

여울 2010-04-01 08:38   좋아요 0 | URL
안개가 담긴 아침입니다. 담긴 아침에 봄색들이 어른거리네요.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았군요. ㅎㅎ. 건강 잘 챙기시구요. 조만간 뵙지요.
 


[삼학년]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엌 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 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박성우 [가뜬한 잠]에서....

펼침. 지난 몇 년의 아카데미 흔적들을 새긴다. 책과 토론, 뒤풀이의 기억들이 겹치면서 두터워지고, 연말연시의 아련함과 화려한 설레임까지 되새기는 일이 남다르다. 반의식사이로 지나치는 지금의 질주 사이를 뚫고 과거의 날것을 잡아낼 수 있을까? 그 날것의 싱싱함은 여전히 지금도 유효한가? 하는 의문도 보탠다. 모두 헤아릴 수 없지만 꿈같은-부드럽지만-일상을 다르게 만드는 형용사의 시선과 숙면에-몰라도되지만-날카로운 실용의 시선을 보탠다. 슬쩍 다른 시선에 곁들여 혼자 오독을 들이민다. 몰라도 되는 시선을 빌미삼아서 말이다. 잡아내는 그물의 크기와 엉성함은 모두 본인의 책임을 지지만, 역으로 읽는 여러분도 고스란히 살려내야 할 의무에 자유롭지 않겠다는 다짐을 번갈아주며 시작한다.

 

1. 숙면에 도움을 주는 꿈같은 언어들
 

시간에 대해 생각할 때 과거는 뒤에, 미래는 앞에 놓여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반듯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평균적 도시삶을 사는 이들로 정하자. 그런데 안데스 산맥에 거주하는 인디언 아이마라족들은 반대로 생각한다 한다. 아이마라족들은 과거를 물으면 시야의 앞쪽을 가리킨다고 한다. 과거의 사건들은 이미 한번 경험했으므로 볼 수 있는 앞쪽에 있고, 미래의 사건들은 알 수 없으므로 등 뒤에 있다는 것이다.

아카데미와 함께한 많은 책들과 발제, 토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본다. 늘 미래를 앞에 두고 정신없이 달리기만 하는 우리들의 생각 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앞의 인디언 부족의 생각처럼 이미 흘러지나간 것들이 아니라 눈앞에 펼쳐있는 것처럼 생경스럽게 다시 기억의 조각을 이어본다. 봄결 아지랑이처럼 화사하거나 꿈처럼 몽롱하기도 한 언어의 결과 숲을 따라 걸어가본다.

이런 봄날이면 답답한 국민의 짐을 벗어버리고 남쪽으로 튀고 싶다. 보리밭이 넘실거리는 저 남쪽의 섬에 들병이의 손목에 이끌려... ... 그러다가 정말 남쪽으로 튄 날, 어김없이 푸르도록 싱싱한 통영인근의 섬들은 점점 점 아름다움을 얼려놓은 듯 싶었다. 유난히 백석이 간절해지는 나날. 놓치고 싶지 않은 짙푸름. 그 색과 간절함은 지로에게 아버지 우에하라가 하던 말들이 생각난다. “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변하는 것들이 있어....누군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이상 세상은 변하지 않아..” 아름다움의 경계를 넘어서는 것들은 눈물을 머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다른 눈물, 배꼽잡느라 눈물이 질끔 나올 정도의 책 한권. 노란 표지의 황만근이 생각난다. 웃고 웃고 또 웃다보면 어느 새 마른 웃음은 피식피식 건조해진다. 그리고 만근이가 내 몸을 감싸고 있음을, 웃고 있을 수 없는 일이 마음 저 뜨거운 곳으로부터 전염된다. 그리고 내동댕이 처진 평범이하가 만들어내는 중심에 대한 재고가 번져있다. 어느새 웃음과 눈물, 처량함, 황당함이 버무려져 있다.

[느리게 사는 사람들]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우리 모두가 '개뿔'이 없기 때문에 표시를 내든 안 내든 모두 안쓰럽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중생이라는 것도 진즉 배웠다. 한 사람의 살아온 내력이 그가 적어낸 학력, 경력이나 적금통장에 의해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닐 것이고(사실은 그런 것들이 많을수록 인간 되기 힘들다는 게 정설이지만), 그 사람이 만들어온 이야기가 사실은 그 사람의 인간됨을 판가름한다는 게 철딱서니없는 나의 소견이다.”

개뿔도 없는 사람들. 쥐뿔도 없는 사람들. 그의 뒷이야기를 뒤풀이 자리에서 들으며 그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가 확인할 수 있었다. 닮으면서도 닮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먼 곳으로 떠났지만, 그 울림은 낯술처럼 뜨겁고 아련하다. 벌써 몸뚱이는 달아오르도록 그는 우리 몸으로 옮겨와있다. 그 속도로 느릿느릿 가면 될 뿐.

또 한권의 시집.[가재미] 이렇게 멈춰야 한다는 것이 아쉽지만 그의 시 찰라 속으로 들어간다 “벌 하나가 웽 날아가자 앙다물었던 밤송이의 몸이/툭 터지고//물살 하나가 스치자 물속 물고기의 몸이 /확 휘고//바늘만 한 햇살이 말을 걸자 꽃망울이/파안대소하고//산까치의 뾰족한 입이 닿자 붉은 감이 /툭 떨어진다//나는 이 모든 찰라에게 비석을 세워준다/“ 찰라에 말거는 이 많지 않겠지만, 그의 시 속으로 들어가다 거닐다보면, 그의 시를 웅얼거리다보면 울림이 전해지고, 울림이 저기까지 물들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경계선, 경계밖의 웅성거림이 그렇게 따듯하고 고울 있다는 것. 슬픔이 이렇게 정갈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도 말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정원에 있는 웃음, 열정, 기막히도록 어이없음, 꽃, 화사함들을 이어본다. 그 고운 언어의 숨결이 세상에서 짜내는 연금술이 무엇으로 인한 것인지? 씁쓸한 현실을 되뇌여본다. 벌컥 벌컥 우물물이 모두 미숫가루를 탄 냉수였으면 어떨까하는 배고픔과 유년의 추억들이 뛰어 다니고 저기, 꿈같은 책들을 모아 본다. 그래도 따듯하고 아름다운 꿈으로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남쪽으로 튀어,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느리게사는 사람들, 가재미, 타샤의 정원,(가뜬한 잠, 나의 아름다운 정원,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토지) 



2. 몰라도 되지만 일상을 다르게 만드는 시선 (하지만 지루하기도 한 시선들.)

 

변덕스러움, 불안정성, 진입의 용이성은 우리 시대에 가장 널리 퍼진 삶의 조건들의 특색이다. 프랑스 이론가들은 불안정성을 말하고, 독일 이론가들은 불확정성과 위험사회를, 이탈리아 이론가들은 불안을, 영국 이론가들은 불안정을 말한다.

바우만이 여러 이론의 만찬을 정리한다. 조금씩 언어의 색깔이 다른 듯하지만 짚어내는 세상과 사회에 대한 논점은 유사한 듯 싶다. 경제의 세계화만큼이나 이미 불안과 위험이란 코드의 먹구름으로 뒤덮여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우리가 삶을 돌아보고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앞에 세워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면, 그 지난 20-30년의 열정과 절망은 어떠하였을까 반문해본다. 하지만 빠르게 지금을 통과하면서 앞으로 미래는 과연 지금을 반추하는 능력이 있는가? 어쩌면 여전히 똑같은 물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미래에 뭍힌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여전히 시간을 누릴 줄 모르고 삼켜먹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을 허황된 미래에 의탁하는 것은 아닐까? 
 

이념만 발라 먹거나 과거의 살점을 편리대로 뜯어먹는 식인의 모습이 우리를 낳은 것은 아닐까? 어김없이 자본이 우리를 잡아먹듯이 같은 박자로 또 다른 약자를 잡아먹고 사는 풍습이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도 자본주의 신자들은 늘어만 가고 말이다. 한번 징검다리를 딛어보자. [지금] - [나] - [너] - [나와너] - [너-나]- [자유] - [삶] - [길] - [사회]라는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너보자. 하나씩. 너무 넓다면 당신의 마음들을 하나씩 발을 딛기 좋도록 놓아보자. 옆에, 하나 하나.
 

지금  

2.1 통제가능하지 않는 과학기술에 대한 앎의 경고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에 잘 나타나 있다. 과학기술의 단맛만 우려낼 경우, 그 과학기술이 끌고가는 위험은 어떻게 되돌아올 것인지, 자본의 세계화와 같은 흐름으로 위험은 지구화되고 있다. 경제만의 세계화와 위험은 어찌 그리 짧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자웅동체처럼 자신을 증식시켰는지 모른다. 

2.2 니클라스 루만 은 우리가 어떻게 다른 세상을 볼 수 없는지 조목조목 따지고 들었다. 정치,경제,교육,사회,문화,법 등등이 이 사회에서, 돈과 개인이란 블랙홀로 빠져들면서 그 이분법의 도식에서 자신순환고리로 악순환하는지 말했다. 단 도덕이 아니라 윤리가 코드화되지 않는 제3의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2.3. 마셜 맥루한 은 이야기한다. 시각중심의 사회가, 그러고보니 원근법이란 관점이 서구에 나타나고, 그 관심의 끝이 자본으로 예리하게 되면서 이 시각중심의 사회는 청각,후각,미각,촉각의 오감을 경도시켰다. 그래서 이 사회는 온몸으로 느끼지 못하는 불감의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시대를 폄하시켰다. 중세도 그 이전도... ... 시대의 복원은 머리중심으로 회복될 수 없다. 이 시대는 머리만 목말라하는데, 시각이 바뀐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가슴과 마음과 손,발의 감각이 회복되지 않는 이상 껍질만 유령처럼 돌 뿐이다라고 한다.2.4 머레이 북친은 말한다. 환경을 가장 해치는 것은 사람이라고. 그런데 정녕 환경을 생각한다면 인간은 죽어야 한다는 거꾸로 된 결론에 다다른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를 다시 사람이 해온 족적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환경을 위해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환경이 공존하는 삶이었다고, 그래서 그 관점에서 다시 근본적인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와 너 

2.5 마르틴 부버 는 이야기한다. 나와 너. 사람들은 마치 [나]만 이야기한다. 너로 시작한 모든 것을 잘리우고, 뻔히 생각이란 것도 일상도 온통 너로 비롯된 것임에도 마치 모든 것이 [나]로 거느려진 것 같은 아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그것], [그]만 있지, 영롱하게, 문득 아름다움에 현기증이 느껴지는 [너]을 만나지 못한다고 말이다. 어쩌면 서구가 개인을 역사에서 달콤하게 빼먹고 사유하기 시작한 이후로 그 세뇌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사는 것이 지금인지도 모른다. [너]가 없는 세상에서 너로부터 인한 [나], [너]를 만나고 마음에 품어 내가 되지 못하는 지금에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자유 

2.6 바슐라르는 말한다. 상상력이란 것이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에서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시에서 언어가 다시 호명되듯이 내 속에서 울림은 스스로 다시 자랄 수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것의 연장성이 아니라 다시 지금 이 순간부터 새로운 [나]로 풍부해질 수 있는 것이라는 늘 자유의 출발점을 지금의 나로 잡는 것은 아닐까? 너로부터 작은 일상의 하나에서부터 공명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너-나]의 상상력이라는 것이 무진장이라는 것이다.2.7 오감의 회복 은 아니더라도 학문이란 것이, 마음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즐거움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자유의 영토를 확장하는 방편으로 앎의 중력에 그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사람이 있다. 시도, 음악도, 미술도, 그 학문의 경계가 다른 것이 아니라, 그 넘치는 즐거움을 거부할 바보가 어디있는가 하고, [내가 어떻게 알아] [내 분야가 아니야] [전문가가 알겠지] 하는 숱한 무지의 중력의 자장에 떨어지는 어리석음을 경계한다. 끝까지 밀고나가는 [까이것]의 정신을 이야기한다. 앎의 울타리를 치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 즐거움과 그 것이 온전히 네것, 네 소유이므로, 즐거움을 거부하는 바보가 어디있단 말인가? 진리라는 것은 더 표현하고 싶은 것이지 수도꼭지처럼 잠그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알고싶은 것은 그쳐질 수 없다. 그 행위로 인해 즐거움은 거듭하는 것이라고 쟈코토의 말을 빌어 자크 랑시에르는 말한다. 

너에게 가는 길 

2.8 김상봉 은 말한다. 서양철학이 자기애에 함몰된 나르시스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녕 너를 볼 수 없다. 거기에서 가지치기한 학문이란 것이 자기애에 함몰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대부분이 너와 함께있는 것이 현실이어서 [나]만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생각의 편리를 위해 따로 떼어내어 그로부터 사유를 발달시킨 오류를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지적한다. 그 전제의 위험함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 더 더군다나 떨어진 나와, 원자같은 떨어진 실재에서 비롯된 사유는 나머지 아흔아홉을 떼어버리지 않거나, 그 움직임의 동선으로만 시작했어도 이론이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으리라 말한다. 
 

2.9 너를 만나는 법에 대해 김영민은 이야기한다. [나]를 싱싱하고 파릇파릇하게 신선도를 유지하게 숙성시키는 법을 이야기한다. 동무라는 것이 어렵다면 한발 떨어져 친구라는 것이 사랑이란 것이, 잡아채어 내 주머니속에 넣는 것이 아니라, 식욕을 채우기 위해 허겁지겁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갖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부나비같은 것이 아니라 물 한모금을 마시기 위해 두 손을 모으고 떠받들 듯이 그렇게 보듬는 것이라 한다. [너]를 섬기는 일이 [나]의 풍요이자 [너-나]로 이어지는 길이라 한다. 늘 머물러 제자리에 있는 것이 [나]가 아니다. 끊임없이 [너-나-너..]로 새로와지는 것이 동무의 관계인 것이다. 동무는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흐르는 것이란다.  



삶 
 

2.10 가타 리와 라이히, 윤수종은 이야기한다. 이 삶 바깥은 없다. 이 삶도 이야기하지 않고, 삶의 바깥만 이야기한 어리석음에 대해 말한다. 갑옷을 입고 칭칭동여진 일상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리가 아니라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반진리임을 이야기한다. 예수만이 예수를 알 듯, 그 무서운 살아지는 관음증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쳐다보기만 하는 삶이란, 나날이 무거워지는 삶의 두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를 넘어서는 그 [00되기]로 이어진다.2.11 피터싱어 는 기부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정작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도덕심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삶이, 나의 영역내에만 머무르는 앎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이야기한다. 윤리라는 것이, 삶에 있어 얼마나 많은 아픔과 자유를 가져오는지 동시에 말하고 있다. 세계대전보다 많은 이가 굶어 죽어나가는 현실에 대한 윤리는 당연한 이타심이 아니다. 사회에 대한 편협한 앎과 삶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단순히 메우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서 쓰나미처럼 새롭게 각인 될 것을 요구한다. 나만이 아니라 아마 그것에서 너로 바뀌는 상태를 가정하면서 말이다.  

사회 

2.12 폴라니는 말한다. 사회라는 몸속에 있던 에어리언같은 괴물이 빠져나와 마치 사회는 없는 것 처럼 길길이 날뛰고 있다고, 온통 쑥대밭을 만드는 것을 넘어서, 사회를 지탱하는 사람도 숨을 쉴 수 있는 공간도 모조리 싹쓸이하고 있다고 말이다. 살림살이를 위한 경제가 이젠 자본의 증식공간만이 될 뿐이라고 말이다. 중세를 넘어서 보이지 않은 손이라는 핑계로 방임된 뒤, 벽지처럼 납작해져 도통 보이지 않는 사회라는 것은, 국가라는 자본의 파수대에 밀려 사회란 것은 철저히 단절되었다고 한다. 절망과 아픔, 생살의 상처를 딛고 그 괴물에게 상처 투성이 사회를 한장 두장 접붙여, 사회의 생살이 오르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야 그제서야 저기 아크로폴리스에서, 아테네에서 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행복이나 삶을 논할 바탕이 겨우 만들어지는 것이란다. 

2.13 서경식 과 노신은 안온한 이데올로기를 경계한다. 죽음에서 절망에서, 현실의 추악함에서 한걸음 딛기가 쉽지 않음을 경고 한다. 온몸에 상처를 내고 피를 한움큼 흘려내야 한걸음을 겨우 디딜 수 있음을 표현한다. 쇳덩어리 정육면체 속에 갇힌 우리에게 그 강철로 된 방임을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 맞는지에 대해 말한다. 점점 조여들고 희박해지는 공기. 그것이 현실이라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알게하는 고통. 모르면 오히려 편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 고함을 질러야 그 강철문 바깥이 어떤지 모르지만 고통스럽지만 지르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한다."가령 말일세, 강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자. 창문은 하나도 없고, 여간해서 부술 수도 없는 거야. 안에는 많은 사람이 깊이 잠들어 있어. 오래잖아 괴로워하며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에 놓여 있으면서도 죽음의 비애를 조금도 느끼지 못한다. 이 때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서, 그들 중에서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워 일으킨다고 하자. 그러면 불행한 이 몇 사람에게 살아날 가망도 없는 임종의 고통만을 주게 될 것인데,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래도 몇 사람이 정신을 차린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2.2.1. 다시 니클라스 루만으로 가보자. 노신의 쇠로 된 방이 나름대로 코드로 둘러싸여 프로그래밍된 궤도를 돌고 있는, 종언에 휘말려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문학,예술, 자본, 법, 교육, 과학이라고 해보자.  스스로 나르시즘의 퇴행에 갇혀 끊임없이 복제품만 낳는 강철로 된 방이라고 하자. 사람은 온데 간데 없고 자본의 충실한 시녀가 되어 있다고 하자. 그 단단하기만한 쇠방은 서서히 삶을 조여오고, 더 이상 숨쉴, 더 이상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고함을 칠 수 있는가? 고진은 맑스를 다시 읽는다. 그 자본의 고리를 끊으려면 소비의 고리를 끊으면 된다고, 소비의 고리를 물고 있는 자본의 머리 턱의 이빨은 그렇게 끊길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경고한다. 문학은 퇴행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이다.14-2. 지젝은 헤겔과 레닌을 불러들인다. 혁명이란 무엇인가라고 한다. 다시 총체성을 이야기한다. 무페와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것으로의 귀환을 명한다. 정치의 영역 그 가장자리를 다시 자리매김할 것을 권면한다. 

2.14.1 누구는 말한다. 자본의 순환고리에서 소비의 고리를 끊으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소비자가 할 수 있는 일이, 누구는 말한다 혁명이 가능하다고 헤겔과 칸트가 다시 필요하다고, 누구는 말한다. 프로이트는 근본이 잘못되었다고, 그리고 거기에서 출발한 과학은 거기에서 토대를 쌓았으므로 무효하고. 누구는 말한다. 겨우존재하는자는 말할 수 없다고, 그 전유로 인해, 여전히 겨우존재하는 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별반없다고. 그리고 삼중고-사중고로 응축되는 지점을 응시해야된다고. 누구는 말한다 나는 안다와 나는 할 수 없다라는 정식에서 출발한 어떤 것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누구는 말한다 자본의 생산고리를 끊으면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2.14.2 다시 맥루언으로 들어가본다. 고대인,중세인,근대인의 차이점으로 몸에 배인 현대인들이 전지구적인 앎의 토대를 허물었으므로 중세인의 열정과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머리가 통일되었으므로 가슴과 손, 발, 마음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어떤이는 소비로, 어떤이는 생산으로, 어떤이는 ...일리는 있으면서도 없다. 

2.14.3. 역사를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한 문제다. 문명교류사라든가 접목된 사실들을 보는 다른 관점은 지금을 되돌아보는 다른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경제사로 환원되는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경제인류학자인 폴라니의 관점은 맑스의 경제사를 보는 관점과 다르다. 다른 시선 아래에서 펼쳐지는 사유는 또 다른 경로를 만들 수밖에 없다. 교차하기도 하지만, 보지 못했던 다른 공백을 볼 수 있기때문이다. 북친의 관점에서 보는 것, 그리고 마이크 데이비스의 기후-기근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도 또 다른 시야를 확보하게 한다. 시대의 한계로 본질적으로 갖는 제한된 시야를 열어주는 또 다른 사실들을 접목시키는 것이 현실의 바다를 조금도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 

다시 너에게 가는 길 

2.14.4 김우창은 시적 삶의 회복을 이야기한다. 강팍한 현실을 이겨내는 방편으로 이데올로기의 삶이 아니라 예술이 이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일상의 예술화. 시적언어도 시적동선도 부족한 건조증에 걸린 일상들은 정작 사회운동의 장에 열려야 하나, 현실은 더욱 더 메마르다. 여유가 집나간 무한궤도 상의 나날이다. 더 열심히 돌면 돌수록 소진된다.14-6. 하트는 헤겔의 변증법적 사고의 맹점을 이야기한다. 현실이라는 것이 조각조각 모여 총체성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핵폭탄에 의해 깡그리 소멸되며 다시 장을 여는 국면이 오히려 우세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헤겔이 말하고 있는 그 전제에 대한 일갈은 맑스의 머리를 거꾸로 쳐박고 있다는 표현과 맥이 닿은 것일까?  

다시 사회 

2.14.5 부르디외는 상징자본, 문화자본을 이야기한다. 계급이 다른다는 것.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문화의 이전이 존재한다. 환원의 사유는 차치하더라도 열외의 세상은 여전하다. 그래서 스피박 호비바바는 이야기한다. 열외자가 과연 말할 수 있느냐고 말이다. 암묵지보다 더 견고해서 지금 사회의 틀로는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열외자는 생성된다고 말이다. 지금의 상식으론, 지금의 주류문화로 건질 수 없는 무엇이라고 한다.

학자들의 이론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생각들을 달리게 한다. 끊임없는 오독일지라도 다른 시선 하나 건진다면, 행여 운이 닿아 그 어슷함과 접붙일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숙면에 도움이 되는 시선들도 멀리 바람결에 날라온 씨앗처럼 만난다면 좋겠다 싶다. 끊임없는 발아의 시선들은 어디에... ...어디로... ...

민주화 20년 열망과 절망, 위험사회,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거대한 전환, 페미니즘의 도전,(소금꽃나무, 니체 천개의 눈 천개의 고원)

 

3.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날이 번뜩이는 책들

언제가 김수영을 졸업해야겠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 일상의 뜨거움, 멈추지 못하는 시계침처럼 그는 끊임없이 일상을 깨운다. 하지만 데일 듯이 불타는 열정을 식지 않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다른 시선을 잡아내는 시인의 시선은 어떤 것일까? 끊임없이 시선의 이면을 탐색하는 작업이란 어떤 것일까? 조금 열정을 식힐 수 있을까? 삶이 그렇고, 일상이 그렇게 나와 너가 그렇게 부대끼거나 뜨거운 열정만으로 자극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란을 치는 일이 원하는 것만 탐하는 것이 아니라, 벌써 꽃을 피울 몇 획의 뒤의 일을 배려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일상의 더깨가 쌓여 시간의 켜도, 관계의 켜도 날카로운 직선만으로 지시하고 받는 삶이 아니라면 말이다. 일상의 숱한 관계와 일들, 삶들의 동선이 시적이고, 예술의 획으로 긋는 일이라면 좋겠다.

하루하루 뜨거움으로만 채울 수가 없다. 가엾은 너로, 풍요의 숲으로 향하는 마음들은 일과 지시의 곡선을 넘어서는 것이다. 열정이 손마디에 굳은 살로 배이고, 너로부터 쌓아온 고민을 응시하며 어깨동무하는 것이고, 가슴이 뭉클해져 삶을 다른 시와 예술의 방법으로 채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김수영이 마음에 멀어지더라도 삶을 바치거나 열정의 혼을 살아내거나 시인의 충만함으로 서로서로 기대는 사람들 사이 다른 삶의 공기를 만들어내거나 하는 일처럼, 건조하고 바짝마른 일상의 공기를 바꾸어내는 일이다. 건조하지 않게, 다른 일상과 삶의 과정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때로 그렇게 가볍게 시인의 숨결을 적시는 일이, 조각가의 마음을 담는 일이, 보잘 것 없어 보이지도 않는 것을 가슴떨리게 그려내는 일이 우리의 공간으로 들어온다면 그것은 어쩌면 혁명보다 큰 일이 될수도 있지 않을까? 당신의 마음을 나에게 심는 일이기도 하고, 나의 삶을 너의 삶으로 풍요로워지는 나날을 보장하는 일이니까? 가볍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삶과 삶들이다. 하는 말들이 머리에만 채워지지 않고 가슴으로 마음으로 손과 발로 내려와 온몸으로 배이게 된다면 말이다. 이것 역시 내 앞에 펼쳐진 안타깝지만 부드러운 충고의 실낱을 끄집어낼 수 있는 셈세함을 필요로 하는 일일까?

젊은 청춘의 맑스는 사람은 유적존재라고 했다. 저 멀리 아리스토텔레스도 사회적인 동물이라고 했다. 동물도 최소한 자기 먹을 것은 먹고 산다고 말이다. 생각처럼 굶주리지 않는다고. 사람만이 홀로 야생의 존재가 아니라 동물이상의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존재라고 한다. 살아있는 한, 단순이 목숨을 연명할 권리이상을 갖게 되는 것이고 차별은 있을 수 없는 존재임을 나타낸다. 혼자 있는 로빈슨클루스가 아니라 인연으로 맺어진 너가 나이고 내가 너일 수밖에 없다.

오히려 주체라는 것, 홀로 있는 독자적인 존재로 그려진 일은 신화에 가깝다. 그런데 그런 환상과 차별을 세상을 길고도 오래 드리우고 벗어날 줄 모른다. 더 더욱 강한 주체를 주장하며 자신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로인한나-나로인한너, 생각이란 것도 삶이란 것도 서로 주체이자 무리지어 사는 유적인 존재라는 사실, 끈으로 이어진 행복한 삶과 좋은 삶을 찾을 권리를 가진 사람이란 말이다.

학문이라고 쌓은 초라한 탑들과 바벨탑처럼 높아지기만 한 자본의 탑은 정녕 삶을, 사람을 구원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수천년의 역사가 어김없이 증명해낸 것은 아닐까? 초라한 학문을 빌미삼는 철학과 과학, 예술, 음악, 인문학의 구별짓기는 그 훌륭한 주체와 개인이란 사고의 구성, 그 최후의 만찬을 마친 것이 아닌가 ? 우리는 어느 길로 가도 이들이 파헤친 초라한 몰골을 만날 수 있다. 환원과 전체적인 환상과 그들이 등진 삶과 살아내는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는지 말이다.

 

자유와 인간적인 삶,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서로 주체성의 이념, 백일법문,) 묵자, 레미제라블 

 

맺음. 미래에 담보잡혀 사는 일은 허망하기 그지 없다. 오히려 지난 일들 가운데 눈치채지 못했던 연대의 시선에, 지극히 작고 보잘 것 없었던 지난 저기의 시선 속에, 아니면 지금 눈치채지 못하는 것에 마음의 눈을 주면 어떨까? 새것에만 광분하는 현실 속에서 그렇게 지난 것을 잊을 수 밖에 없는 흐름 속에서 미래를 전면에 놓치말자. 그렇게 꿈같은-부드럽지만-일상을 다르게 만드는 형용사의 씨줄과 숙면에-몰라도되지만-날카로운 실용의 날줄로 지난 흐름의 그물을 만들어 어이없는 현실을 잡아보면 어떨까? 그렇게 날것을 잡아 곰삭이거나 회쳐 발라드시면서 지나온 저기에서 해답을 한번 찾아보심은 어떨까? 그리고 그것이 닿아 번진 지금을 만들어간다면, 책들의 인연과 토론, 준 마음들의 인연이, 좀더 나은 과정으로 살찌우는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닌가? 그것들이 한데 모여 지금을 춤추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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