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이후로  좀더~ 미루어도 될 것 같았는데... 

 

이 점에 있어 정치인들이 정치적이지 못하군요. ㅎㅎ  내심 민심의 향배를 정확히 볼 수 있으려나 했는데 말에요.  

 

 

 

그래도 괜찮아요. 뚜벅뚜벅. 새로운 걸음걸이로.  

청춘과 사회적 약자들을 온몸에 새겨  

뚜벅뚜벅 걸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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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모임이 시작하는 길, 그 어두움은 관계로 밝아오는데, 그 관계짓기는 참으로 묘하다. 0과 -1의 사이, 애착은 집착으로 붙들어매고, 감정은 혼동스러워 관계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 경계의 삶공간을 살피지 않아 그 +1 사이를 어쩔 줄 몰라한다. 그렇게 갈피를 짓지 못하는 혼돈이라면, 모호함을 계약이나 질투의 혼란이 거두어 둘 수 있는 시공간으로 밝힐 수는 없을까? 모임이 관계의 혼돈으로 사그라들까? 맘과 몸이 또 다른 새로움에 익숙하지 못해, 토론의 심화를 겪지 못해 자꾸 그 덫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뱀발.

1. 상담? 속내를 들어보다나니 또 다시 그 길로 접어든 그 감성의 덤불을 말한다. 그렇게 다음을 넘지 못하고 주춤, 또 다시 외곽으로 밀려버린 그 사람.  모 임 사이사이 성실함이 채워지고 예민한 통각이 아마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간 듯하다. 그렇게 모임의 후면에 배인 뿌리를 살펴본 것 같다. 그러다가 덜컥 그 관계의 그물에 걸려 파닥파닥. 다시 모 임 사이사이 덤불을 헤치다가 끊어 다시 보지 않을 듯하다. 그 묘함에 대한 눈은 나에겐 없어, 그 소진이 안타깝기도 하다.

2. 어떡하다 지난 과거의 흔적은 모임과 너-나, 그리고 나의 자유의 어설픔을 다시 물끄러미 바라본다. 모임의 수면에서 번지지 못하고, 그렇게 나와 너가 따로 자맥질이다. 팔을 벌려 손을 잡아 헤엄치는 법을 모른다. 또 다른 혼자만이 또 갈길을 간다. 연민과 연애와 정과 성들 사이로 이어진 길들.

3. 관계의 뼈가 부딪칠 즈음, 말랑한 벡터들과 아우라는 소진되고 세속화된 의도만 보이는 건 아닐까? 경박함으로 너에 대한 관계짓기의 양분은 말라버리고, 조금 더 또 다른 새로움의 -1로 향한다.

4. 그렇게 모임과 관계의 골격이 드러날 즈음, 은근한 시기와 질투. 충원은 어떤가? 용도 폐기나 감정의 소진의 기미가 보이기 이전. 너만의 이면이 드러나기 조금 전 마음을 펼치고 마음을 던진다. 

5. 모임이 반짝이는 지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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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  

1. 모임이 겹치고 익는데, 몸은 파~ 김치처럼 가누기가 쉽지 않다. 몸을 핑계삼아 보니, 지난 흔적들의 강도가 진한 듯 머리를 끄덕인다. 하루를 헤드락하듯 며칠을 껴앉아도 몸이 닳지 않는 청춘은 넘어섰다. 중년임에도 청년을 핑계삼아 몸을 슬쩍 꾀를 부려볼 생각도 한다. 헌데 이미 몸이 갸우뚱하니 중년이다. 몸의 동선에 슬기로워져야 할 나이가 부쩍 지난 듯하다. 

2. 주간기획모임, 상가, 운영모임 2과 뒤풀이다. 모임 숨을 죽이고 몸의 기운을 돋궈야겠다. 작정은 작정대로 해야 될 일이다. 

3. 일이라는 것이 냉정을 추리다보면 별반되는 것이 없기도 하다. 숙고를 한다고 잘 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기대보고 물어보고 몸을 겹쳐바라보는 것이 그래도 나은 방법은 아닌가 한다. 붙어살고, 겹쳐살고 말이다.  

4. "이성은 정념의 노예다"라는 말이 기억나고, 엊그제 본 대목이 그 옆에 선다. 합리적이라는 것은 비합리를 더 넓고 깊에 파악하기 위한 것이란다. 비합리에서 합리 자신을 발라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 움직임이나 활동의 근원에는, 오히려 더 움직인 것은 시기와 질투, 비합리적인 충동이 여기까지 끌고 온 몫이 있을 것이다. 헌데 합리적이자라고 날을 곧게 세우는 것은 비합리가 움직인 동선까지 포함해서 좀더 멀고 길게 볼 수 있는 힘을 갖자고 하는 일인지 모르겠다.  

5. 합리라는 명목으로 비합리의 숨을 다 죽이고 나면, 그 합리는 아무런 힘을 갖지 않는 박제다. 삶의 근거를 기댈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비합리를 충분히 용인해야 한다. 그 비합리가 사람을 움직이는 경계를 봐야한다.  

 5.1 모임의 경계에 나-너를 가르는 일이 정말 합리적인 설정인 듯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말 합리적이지 않은 수준에 머물때도 많다. 그러니 불타는 적개심은 많은 행동의 근원이기도 하지만 정말 그 비합리적인 행동까지 가정하는 합리가 필요하다. 나-너 사이의 대척점이 아니라 판단의 근거를 더 넓게 가져가는 습관이 필요하다. 이분법에 얽매인 습속의 한가지이기도 하다. 

 5.2 '일을 하다나니 사람을 바꾸기가 힘든 것을 알았어요. 이렇게 작은 조직도 움직이기 힘든데'라고... 

 5.3 지난 번에 본 레인보우의 자막이 겹친다. " 하나는 외롭고, 둘은 도모?하지만, 셋이 모이면 정치다. "  그래 정치다. 기우뚱.  나는 내가 아니다. 나의 곁엔 나-너로 팔벌리고 있지만, 우리는 늘 나-너-나- 이다. 그래서 정치가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나로만, 너에 기대어 있는 나로만 사고하고 생활하는 습관을 줄여야 한다. 나만 힘드니까? 나-너만 힘드니까? 나-너-나 까지 생활하는 습관을 늘여야 별일없이 산다. 생각도 몸도 여기저기 닿으니까? 마음도 여기저기 닿으니까? 

6. 어설픈 푸념을 보탠다. 지난 번 나뭇잎이 매달려 있는 것을 물끄러미 물끄러미 보다나니 나비가 매달려있는 듯 싶었다. 그 사이를 바람이 휘익 지나가면 나무들은 팔랑팔랑 여린 색 살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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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에 나는 [결혼과 도덕]을 출간했다. 백일해를 앓고 회복되는 시기에 구술로 받아쓰게 하여 완성한 책이었다. 훗날 1940년에 뉴욕에서 나를 공격하는 주요 물적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이 책이었다. 나는 그 책에서, 결혼 생활에서 완벽한 정절을 지킨다는 것은 대체로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는 피차 염문이 있더라도 서로 좋은 친구 사이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견해를 펼쳤다. 그러나 아내가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자식을 가지면 결혼 생활을 연장하는 데 유리하다고 주장한 바는 결코 없었다. 오히려 그럴 때는 이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결혼이라는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결혼에 대한 일반론들은 한결같이 감당하기 힘든 반대론에 부딪히는 것 같다. 다른 제도들이 초래하는 불행과 비교할 때, 어쩌면 이혼이 쉬울수록 불행도 줄어들지 모른다.

1930년, 나는 [행복의 정복]이란 책을 발간했다. 이것은 사회 및 경제 제도를 변혁시켜 어떤 것을 이룬다는 시각에서 벗어나, 한 개인이 기질 때문에 야기되는 불행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상식 선에서 충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1944년 영국으로 돌아오다. 영국에는 토론의 자유가 가득했고, 나는 미국에서 누리지 못한 그 자유를 다시 한 번 만끽할 수 있었다....나는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를 더 한층 중시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강의 주제도 '권위와 개인'으로 잡았다. 그것은 1949년에 같은 제목으로 출간되었는데, 산업주의의 확대를 동반하는 경향이 있는 개인적 자유가 약화되는 현상을 주로 다루었다. 221

어떤 이상들은 파괴적인 성격이 있어서, 전쟁이나 혁명 같은 방법이 아니면 제대로 실현될 수 없다. 그런 것들 중에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경제적 정의다. 정치적 정의는 산업화된 세계에서 이미 전성기를 누렸으며 후진 산업국들에서는 지금도 추구되고 있으나, 경제적 정의는 여전히 고통스럽게 추구되고 있는 목표다. 경제적 정의를 실현하려면 세계적 차원의 경제 혁명이 요구된다. 과연 피를 흘리지 않고도 그 이상이 달성될 수 있을지, 혹은 세계가 그것 없이도 끈기 있게 존속할 것인지, 나도 알지 못한다. 225

1949년 '런던 왕립 의학회'에서 맡았던 로이드 로버츠 Lloyd Roberts강좌를 묶어 [과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The Impact of Science on Society]이란 책으로 선보였다.

1950년 말, 노벨상 - [결혼과 도덕]덕분에 문학상 부문에 선정되었다는 것이 나로서는 다소 놀라웠다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본 인간 사회 Human Society in Ethics and Politics]

[교육-특히 유년기 초기의 교육에 관하여 On Education, especially in early childhood]
라는 책을 1926년 출간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책의 심리학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내가 너무 어린아이들에게 가혹한 교육 방법을 제시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 가치들에 대해선 수정한 필요를 전혀 못 느낀다.  14
 

윤리 와 정치

가치의 이유들로 해서 나는, 윤리적 '지식'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산타야나의 주장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윤리적 개념들이 역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윤리학을 빼놓고 인간사를 바라보는 것은 부적합하고 편파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윤리학은 정념에서 나오며, 정념에서 당위적 행위에까지 이를 수 있는 타당한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원칙을 내 생각의 지침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성은 정념의 노예이며,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고 한 데이비드 흄의 좌우명을 받아들였다. 240

내가 윤리적 고려 사항들을 냉담하게 무시한다고 생각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인간도 하등 동물들처럼 자연을 통해 정념을 공급받기때문에 그러한 정념들을 함께 끼워 맞추자면 힘이 들기 마련인데, 긴밀하게 짜여진 공동체에 몸담고 있을 경우 특히 더 그렇다. 이럴 때 필요한 기술이 바로 정치의 기술이다. 이 기술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야만인이 될 것이며, 문명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책을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본 인간 사회]라고 이름 붙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242 

소설을 쓴 이유

나의 첫 소설책은 [도시 근교의 사탄 Satan in the Suburbs]이었다....내가 소설 쓰기를 변호하는 까닭은 우화야말로 요점을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란 것을 종종 발견하기 때문이다. 1944년에 미국에서 돌아온 나는 영국의 철학계가 아주 이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하찮은 것들에만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철학계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 어법'을 가지고 재잘대고 있었다. 나는 그 철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리하여 나는 이 같은 '공통어법'을 숭배 풍조를 조롱하는 다양한 우화들이 담긴 짧은 작품을 하나 써서, 철학자들이 실제로 무슨 의도로 '공통 어법'이란 용어를 쓰는지를 지적했다.....이것이 발표되자 수장쯤되는 사람한테서 편지가 왔다...그러나 그후로 논의가 잠잠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46-7


악몽, 꿈, 기타 등등 나의 나머지 이야기들은 나중에 [사실과 허구 Fact and Fiction]라는 책의 허구 부분에 편집되었다.  248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본 인간 사회]에 대한 반응은 호의적이었으나 책을 출간한 후에도 나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세계가 맹목적으로 위험을 향해 정면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시킬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BBC의 '인류의 위기 Man's Peril' 방송이 되었다. 306

[상식과 핵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부분적으로 확대하여 핵 문제와 군축에 관한 책을 하나 더 쓰기로 한 것이다. 새 책의 제목은 [인류에게 미래는 있는가? Has Man a Future?]로 정해졌고 나는 바로 집필에 들어갔다.  378 


 

 

 

 

뱀발. 권력에 대한 도서의 맥락을 옮겨놓아야 하는데 놓쳤다. 방송된 것들은 찾아보고 싶고, 소개되지 않은 책들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핵에 대한 성명 자료나 책들도 지금의 핵위기와 관련해서 좋은 자료가 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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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 인 보 우

2006년, 시인으로부터 또 한 권의 시집이 배달된다. 그것은 '나'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 "나는 조금씩 너에게 전달되고"고, "나는 내 바깥에서 태어"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그런 이상한 이야기. 그러나 '나'를 둘러싼 이 '실종'은 히어로의 '납치'에 관한 드라마틱한 서사도 아니고, '소멸'이나 '허무'같은 이른바 서정적 자아의 익숙한 정서를 담고 있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이를 '소외'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없다.  121  
 "너에게 전달되"고 "내 바깥에서 태어"나며 "사라지기 시작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거대한 나'의 시대였던 1980년대가 막 지나간 1990년대 중반, '나'에 대한 시적 의심의 몇몇 선구적 사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선구적인 직관과 기미들은 2000년대에 비로소 증후가 아니라 또렷한 사건이 되어 회귀한다.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온 '나'를 더는 '에고'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시대. 이것이 2002년 여름, 그리고 일군의 2000년대 동료들과 더불어 2006년 이장욱의 그 '실종사건'이 야기한 시적효과다. 122 
 
드라마

행인 1이 지나가자 클라이맥스가 시작되었다. 의미심장하게

딩동,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은 처음 보는 주인공. 이장욱씨 맞으시죠?여기 싸인하세요. 나는 엑스트라 2로서 핀 조명을 향해 걸어갔네.

세계의 가로수들을 이해할 것 같아. 선풍기가 돌아갈 때 선풍기의 배경이 하는 일을. 허공이 음악에게 하는 일을. 누군가 결정적으로 희박해지는 순간에 우연한 목격자가 된다는 것을.

엑스트라 3에게는 그것이 전세계. 음악이 사라진 허공 같은 것

가로수에게서 가을을 지운 것 핀 조명이 꺼질 때까지 널 사랑했는데 그것은 행인 4의 사람.

먼 후일 택배기사는 잊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았다. 모든 것을 잊었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자 극적인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뱀발.  서울다녀오는 길, 버스타기까지 잠깐 나는 짬. 문고의 시집코너를 살펴본다. 선택의 어려움이 더해진다. 이장욱의 [생년월일]은 드라마의 행인 3이란 표현때문에 고르게 되었다. 지난 주말 시네락페스티벌의 [레인보우]가 겹치기도 했던 것 같다. 읽다나니 이것저것 난해한 감이 들어, 마지못해 뒷쪽의 해설을 살펴본다. 

살펴보다나니 그의 시도가 만만치 않다. '나'라는 고민의 부스러기와 닿아있는 듯하여 위안도 되는 셈이다. 하지만 작업이 어디를 향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행인3,4에 천착하거나 집중하는 감독과 시인의 일들이 거꾸로 진보로 스며들어 올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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