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 인 보 우
2006년, 시인으로부터 또 한 권의 시집이 배달된다. 그것은 '나'의 실종에 관한 이야기. "나는 조금씩 너에게 전달되고"고, "나는 내 바깥에서 태어"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그런 이상한 이야기. 그러나 '나'를 둘러싼 이 '실종'은 히어로의 '납치'에 관한 드라마틱한 서사도 아니고, '소멸'이나 '허무'같은 이른바 서정적 자아의 익숙한 정서를 담고 있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이를 '소외'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도 없다. 121
"너에게 전달되"고 "내 바깥에서 태어"나며 "사라지기 시작하"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거대한 나'의 시대였던 1980년대가 막 지나간 1990년대 중반, '나'에 대한 시적 의심의 몇몇 선구적 사례를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선구적인 직관과 기미들은 2000년대에 비로소 증후가 아니라 또렷한 사건이 되어 회귀한다. "너무 오랫동안 하나의 육체로만 살아"온 '나'를 더는 '에고'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시대. 이것이 2002년 여름, 그리고 일군의 2000년대 동료들과 더불어 2006년 이장욱의 그 '실종사건'이 야기한 시적효과다. 122
드라마
행인 1이 지나가자 클라이맥스가 시작되었다. 의미심장하게
딩동, 초인종을 누르는 사람은 처음 보는 주인공. 이장욱씨 맞으시죠?여기 싸인하세요. 나는 엑스트라 2로서 핀 조명을 향해 걸어갔네.
세계의 가로수들을 이해할 것 같아. 선풍기가 돌아갈 때 선풍기의 배경이 하는 일을. 허공이 음악에게 하는 일을. 누군가 결정적으로 희박해지는 순간에 우연한 목격자가 된다는 것을.
엑스트라 3에게는 그것이 전세계. 음악이 사라진 허공 같은 것
가로수에게서 가을을 지운 것 핀 조명이 꺼질 때까지 널 사랑했는데 그것은 행인 4의 사람.
먼 후일 택배기사는 잊을 수 없는 인생을 살았다. 모든 것을 잊었기 때문에 모든 것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자 극적인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뱀발.
서울다녀오는 길, 버스타기까지 잠깐 나는 짬. 문고의 시집코너를 살펴본다. 선택의 어려움이 더해진다. 이장욱의 [생년월일]은 드라마의 행인 3이란 표현때문에 고르게 되었다. 지난 주말 시네락페스티벌의 [레인보우]가 겹치기도 했던 것 같다. 읽다나니 이것저것 난해한 감이 들어, 마지못해 뒷쪽의 해설을 살펴본다.
살펴보다나니 그의 시도가 만만치 않다. '나'라는 고민의 부스러기와 닿아있는 듯하여 위안도 되는 셈이다. 하지만 작업이 어디를 향할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행인3,4에 천착하거나 집중하는 감독과 시인의 일들이 거꾸로 진보로 스며들어 올 수는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