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트위터를 폭파한 이유

 거울 속의 나
 


점점 거울을 보는 횟수가 잦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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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에 근력을 잃는다
어느새 흐물흐물 유체이탈한 나는
몽롱한 너를 만나 흐물흐물
아 이 유치찬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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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의 터네이도로, 어느새 태풍의 늪에 빠져있다

 

아니오
머뭇거림
쉬어감과 방지턱이 없는 예스의 고속도로
블로거들과 트윗터들과 페부커들이
yes의 연대,  N극과 S극으로 유유상종한다

 

삶도 없고 아니오도 없고
술자리의 치고박고도 없고
그래그래만 있는 유토피아
오늘도 그 거리만 걷는다.
걸을 수록 외로워지는 시공간을 걷는다

 

기름처럼 미끈한
쭉쭉방방에서 영혼을 찾으리라 여겼지만
영혼은 나르시스에게 갇혀 어쩌지못한다

 

그 호수같은 거울 속으로
목을 부여잡아 나르시스가 결박한다
뱀처럼 스멀스멀 치밀어 올라와 숨가쁜 나에겐 너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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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13-01-1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당님 자작시에요?

여울 2013-01-11 09:09   좋아요 0 | URL
네, 짓고 있는 중이에요. ㅎㅎ

파란여우 2013-01-15 12:27   좋아요 0 | URL
<여울목 소리>-지은이: 여울마당. 출판사:여울그림 책임편집:여울사랑 출간년도:여울목에 얼음 녹을 때 ㅎㅎ

여울 2013-01-15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포항가면 시집 한권 짓는 걸 목표로 해야겠어요. 시집 제목은 여울목 소리로 ㅎㅎ
 
 전출처 : 파란여우님의 "트위터를 폭파한 이유"

 

 

파란님, 진도를 많이 나가셨네요. 혼자 블폭?을 할까하다가 몇달 자정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ㅎㅎ 그러다가 심증은 가지만 확증이 없어 쉬쉬하게 되었죠. 이렇게 파란님 글을 대면하다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가상공간이란 것이 예스만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현실의 아니오는 아예없죠. 아니오가 실재를 붙잡아주는데, 늘 녀석들은 예만 바라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런 중독자이기에 두렵습니다. 현실의 근육이 무뎌지거나 흐물흐물해져 걸을 수도 없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여우님 제안에 솔깃하네요. 고독의 근육!!

 

 

말과 행동, 그런 면에서 욕이 제일 자극적이긴 하죠. 욕설이 아니라 욕이 없는 시공간! 현실과 삶에서 빠져나가 토닥거리기만을 원하는 공간 다시 한번 불꽃 화살을 날려봐야할 것 같네요. 점점 외로워지고 더 더욱 자신과 삶에 소통이 요원해지는 이유를 말에요. 반가워요. 이것도 나와바리와 위무에 대한 이기심이기도 하겠죠. (여울에겐 맹세의 고고학과 피로사회가 가상공간에 대한 문제인식이론으로 도움이 되었어요.)

 

 

 


 

 

결코 저항적일 수 없는 가상공간,SNS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더욱 줄여놓는다. 가상공간에서는 타자성과 타자의 저항성이 부족해진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사실상 "현실원리"없이, 다시 말해 타자의 원리와 저항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가상현실 속의 상상적 공간에서 나르시스적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다. 실재가 무엇보다도 그 저항성을 통해 존재감을 가진다면, 가상화와 디지털화의 과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러한 실재를 지워나간다. 실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를 붙잡는다. 즉 일을 중단시키고 저항하여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다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서 우리를 잡아주는 것이다.95


맹세의 새로운 위치

 

인간성이 어떤 탈구 앞에 처해있다는, 적어도 살아있는 존재자를 언어와 묶어주었던 결합이 느슨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에는 갈수록 더 순전히 생물학적인 실재로, 벌거벗은 삶으로 축소되는 '살아있는 존재자'가 있다. 다른 한편에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각종 장치들을 통해 더욱 더 공허해져버리는 말의 경험 속에서 인위적으로 전자에 분리되는 '말하는 존재자'가 있다. 그러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지는 것도 불가능하고 또 그러한 말 속에서는 정치적 경험 따위는 갈수록 더 미덥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말과 사물(사태)과 인간의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는 윤리적인 연관이 깨지면 사실상 한편으로는 공허한 말이, 다른 한편으로는 입법장치들이 대대적이고 유례없이 만연해 더 이상 통제 불능으로 보이는 그러한 삶 전반을 법으로 집요하게 틀어쥐려고 한다.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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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거울 속의 나 (ing)
    from 木筆 2013-01-10 11:11 
    거울 속의 나 - 삶은 계란 팔아요 점점 거울을 보는 횟수가 잦아든다좋아요추천에 근력을 잃는다어느새 흐물흐물 유체이탈한 나는몽롱한 너를 만나 흐물흐물아 이 유치찬란은좋아요리트윗추천의 터네이도로, 어느새 태풍의 늪에 빠져있다 아니오머뭇거림쉬어감과 방지턱이 없는 예스의 고속도로블로거들과 트윗터들과 페부커들이 yes의 연대, N극과 S극으로 유유상종한다 삶도 없고 아니오도 없고술자리의 치고박고도 없고그래그래만 있는 유토피아 오늘도 그 거리만 걷는다. 걸을
 
 
 
멈추자, 살피자, 생각하자

미래가 보내는 징후

 

그러나 지켜보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대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복음 13장 33-37절)

 

역사의 해석

 

"과거는 문학 텍스트 속에 빛에 희해 감광건판 위에 새겨지는 상에 비유될 수 있는 자체의 이미지를 남겨놓는다. 미래만이 그러한 음화를 완벽하게 드러내는 효력을 가진 현상액을 갖고 있다." 월가점령시위, 아랍의 봄, 그리스와 스페인에서의 시위 같은 사건들은 그렇게 미래에서 보내온 징후로 읽어야 한다. 바꿔 말하자면, 맥락과 기원을 바탕으로 사건을 이해하는 일반적인 역사주의적 관점을 뒤집어야 한다. 급진적인 해방적 분출을 그런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들을 과거와 현재의 연속선상에서 분석하는 대신, 미래의 관점을 적용하여 현재에는 숨겨진 잠재성 있는 유토피아적 미래의 제한되고 왜곡된(때로는 심지어 도착적인) 파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229

 

코츠는 자신이 묘사하는 모든 중요한 유형의 소시오패스에게서 구원적인 특징을 찾아낸다. '책략가'유형은 친구를 골탕 먹이려는 계략을 세우며 어린애처럼 순순한 즐거움을 드러낸다. '야심가'는 특출난 창의성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가차없이 목표를 추구하려는 의지를 표출한다. '집행자'의 형사 맥널티와 [24]의 바우어는 행복을 추구하는 일상생활보다 더 중요한 목표에 헌신한다. 이 세가지 특징을 조합하면 진정한 혁명가의 완벽한 모델이 되지 않을까? 즉 대의를 위하여 인생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고, 그 일을 하는 데 창의적으로, 기꺼이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자신의 행동에서 순수한 기쁨을 느껴 희생적인 마조히즘의 모든 흔적을 털어내는 사람 말이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잭 바우어의 헌신과 스트링어 벨의 창의적인 실용정신, 그리고 호머 심슨의 심술궂지만 천진난만한 기쁨이 결합된 주체다.  226

 

오늘날 복지국가의 정수를 구하고 싶다면, 20세기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모든 향수를 버려야만 한다. 스로터다이크가 제안하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문화적 혁명이자 급진적인 심리 사회적 변화로, 오늘날 착취당하는 생산자 계층은 더 이상 노동계급이 아니라. 중(상)층계급이라는 통찰에 기반을 둔다. 중(상)층계급은 무거운 세금으로 국민 다수의 교육, 건강 등의 재원을 대는 진정한 '기부자'라는 것이다....시민은 자신의 소득 일부를 국가에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날 때부터 국가에 빚을 진 존재처럼 취급받는다......부자에게 과중한 세금을 매기는 대신, 자발적으로 자신의 부를 어는 정도나 공공복지에 기부할지 결정할 (법적) 권한을 제공해야 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세금을 급격히 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기부자가 스스로 어디에 얼마를 기부할지 결정할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작은 여지라도 열어놓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시작은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점차 사회 결속력의 근간이 되는 사회 전체의 윤리를 변화시킬 것이다. 203-205

 

지젝의 세상을 바꾸는 제안

 

절대의 관점으로의 반성적 후퇴는 비활동으로의 철수를 수반하지 않고, 급진적인 변화의 공간을 열어준다. 핵심은 운명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 자체, 그 기본 좌표를 바꾸는 것이다. 장 뤽 고다르는 "무엇인가를 바꾸어야만 모든 것이 그대로 남는다."라는 말을 뒤집어 언젠가 "아무것도 바꾸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이 달라지게 하자."는 의견을 제안했다.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는 자기 혁명화가 요구되는 후기 자본주의의 역동성 같은 일부 정치적 성좌에서는, 어떤 것도 바꾸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오히려 진정한 변화의 주체다. 변화의 원리 자체의 변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사회주의자이냐는 질문에 그는 스스로 자본주의가 유일한 게임의 규칙이라고 믿는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마르크스주의자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자본주의가 대규모로 부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비극적인 세계관이 이 개혁주의적 사회민주주의적 비전과 모순되지 않을까?.......우리는 오늘날 '전면적인 경제 불황'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전망이 진정한 집단적인 반체제주의를 야기할까? 결과가 어떻든 간에, 한 가지는 분명하다. 사이먼의 비극적인 비관주의를 완전히 수용하고 (시스템 내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에야 비로소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200-202

 

제로-영점의 통과

 

모든 것을 의미하는 존재의 핵심까지도 포기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하며, '세상의 끝', 세상이 계속 돌아가게 만드는 에너지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사태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모든 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잃는 영점으로 돌아갈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에서 급진적 변화로 전진하기 위해, 우리는 시스템을 계속 존속시킬 뿐인 저항 행위를 중단하는 영점을 통과해야만 한다. 이 이상한 종류의 해방에서, 우리는 남들의 우려에 대해 걱정할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순환적인 자기 파괴적 운동의 소극적 관찰자 역할로 물러나야 한다.......우리가 진정한 변화를 보기 바란다면 우리의 걱정과 관심은 우리의 주된 적이 된다. 우리는 상황을 좀 더 개선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시스템의 관성에 저항해 작은 싸움을 벌이기를 중단하고, 대신 다가올 더 큰 전투를 위한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 197-199

 

장치 자체의 파열

 

딜레마를 탈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장치에 대한 저항'이라는 패러다임 전체를 포기하는 것이다. 장치는 자아 행위의 그물망을 결정하지만, 동시에 주체의 '저항'을 위한 공간, 주체가 장치 자체를 (부분적이고 주변적으로) 허물고 옮겨갈 수 있는 공간을 개방한다. 해방정치의 과제는 다른 곳에 있다. 주변부의 주관적 입장에서 지배적인 장치에 '저항'하는 식의 전략을 확산하고자 애쓸 것이 아니라 지배적인 장치 자체 내에서 가능한 파열 양상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저항의 현장'에 대한 모든 이야기에서, 비록 당장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때로는 우리가 저항하는 장치 자체가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193-194

 

표현의 도약

 

마르크스도 [자본론]의 유명한 구절에서 상품의 교환과 순환의 감춰진 논리를 끄집어내기 위해 의인법에 의존한다. "만약 상품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사용가치는 인간들에게 관심사일지는 몰라도 물적 존재로서의 우리에게는 속하지 않는 것이다. 물적 존재로서 우리에게 속하는 것은 우리의 가치다. 상품으로서 우리가 교환되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우리는 단지 교환가치로만 서로 관계를 맺는다." 우리도 의인화된 오페라 같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상품을 교환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상품 자체가 노래를 부르는 오페라를?

 

코페르니쿠스적 시 - 이 세계가 과연 코페르니쿠스적 시와 코페르니쿠스적 사고 습관을 발전시킬지를 상상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고찰이 될 것이다. 우리가 '이른 해돋이' 대신 '이른 지구 이동'이라고 말하고, 데이지 꽃을 올려다본다거나 별을 내려다본다고 예사롭게 말할 날이 과연 올까?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새로운 신화가 될 만한 실로 수많은 거대하고 환상적인 사실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185

 

우리는 현대 자본주의 전체를 어떻게 예술로 재현해야 할 것인가? 다시 말해, 언제나 궁극적인 범인은 전체가 아닐까? 현대의 비극이라고 특별한 점은 무엇일까? 그 답은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실재가 추상적이고, 자본의 추상적 가상적 운동이며, 실재와 현실의 라캉식 차이를 동원하자면, 현실이 실재를 가린다는 것이다. '실재의 사막'은 자본의 추상적인 움직임이고, 마르크스가 말한 '실재적 추상'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그저 실제를 암시할 뿐이다. 실재는 너무 힘이 세다."

 

국가 관료제의 기본 기능은 그 자체의 재생산이지 사회 문제의 해결이 아니고, 심지어 존재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 문제를 만들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관료제에 대한 최대의 위협이자 관료주의적 질서에 대항하는 가장 대담한 음모는 관료집단이 처리해야 할 문제를 실제로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서 비롯된다. 그러나 자본주의 자체도 이와 똑같지 않을까? 자본주의의 궁극적인 추동력 역시 기존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확대재생산이 용이하도록 새로운 수요를 계속 창출하는 것이다.  172


어떻게 바꿀 것인가?- 생각지도 못한 질문들!

 

대중은 아직 제기되지 않은 질문의 답을 알고 있고 벽보다 오래 살아남을 능력이 있다. 질문이 아직 제기되지 않은 것은, 그러자면 진심으로 와닿는 용어와 개념이 필요한데 민주주의, 자유, 생산성 등 현재 사건들을 명명할 때 사용되는 용어와 개념은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곧 새로운 개념과 더불어 새로운 질문이 대두할 것이다. 역사는 바로 그러한 질문의 과정을 포함하는 것이니까. '곧'이라면 언제? 한 세대 내에. john berger166

 

'자유선거'와 진정한 해방적 반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소식으로 표현하자면, 수적으로는 적었지만 일반의지를 구현한 것은 타흐리르 광장의 군중이었다. 또 월가점령시위에서도 사실상 '99퍼센트'를 대변하며 제도적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정당화한 것은 주코티 공원에 모임 소수의 군중이었다. 물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떻게 민주적 다당제 체계를 넘어 집단적 의사결정을 제도화할 수 있을까? 또 누가 이 재발명의 주역이 될 것인가? 잔인하게 말하자면, 당장 오늘 무엇을 해야할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지식인이든 일반인이든 그것을 아는 주체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은 장님이 장님에게 길을 안내하는, 좀 더 정확히는 장님끼리 길을 안내하면서 서로 상대방은 볼 수 있다고 믿는 교착상태인 것일까? 아니다. 각자 모르는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중은 답을 가지고 있다. 다만 자신들이 답을 가진(혹은 스스로가 답인) 질문을 자각하지 못할 뿐이다. 165

 

민주주의적 환상

 

마르크스는 자유의 문제를 고유의 정치적 영역에서 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국가에서 자유선거가 실시되는가? 사법부가 독립적인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가? 인권이 존중되는가? 등) 실제 자유의 핵심은 오히려 시장에서 가족에 이르는 사회적 관계들의 그물망에 있고, 이 영역을  진정으로 개선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비정치적'인 사회적 생산관계의 변혁이다. 우리가 소유구조나 직장 내 관계 등을 투표로 결정하지 않는 것은 그 문제들이 정치적 영역을 벗어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급진적 변화는 법적 '권리' 등의 영역 밖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반자본주의적 성향이 아무리 급진적이라도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늘 민주주의 기제를 적용하는 틀 안에서 해법을 모색할 것이다....오늘날의 적은 제국이나 자본이 아니라 민주주의라고 불린다. 161

 

탈정치적인 전문가 통치에 대한 거부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지배적인 경제 조직체 대신 무엇을 제안할지 고민하고, 대안적인 조직 형태를 상상하고 실험하며, 현 체제 속에서 새로운 조직의 싹을 발굴하기 시작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단순히 시스템을 멈춰 세우는 대중 시위의 카니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공산주의 역시, 무엇보다도 새로운 형태의 조직, 규율, 고된 노력을 의미한다. 레닌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간에, 그는 새로운 형태의 규율과 조직의 시급한 필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153

 

자본주의라는 짐승

 

자본주의는 의미를 탈전체화한 최초의 사회경제적 질서다. 의미의 차원에서는 전혀 세계적이지 않다. 결국 세계적인 '자본주의 세계관'이나 고유한 '자본주의 문명'이란 없다. 세계화의 근본적인 교훈은 바로 자본주의가 기독교에서 힌두교나 불교에 이르는, 또 서에서 동에 이르는 모든 문명에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세계적 차원은 오로지 의미 없는 진리의 층위에서만, 글로벌 시장 메커니즘이란 실재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 110

 

사회가 잘 조직화된 합리적 상태에 가까워질수록, '비합리적' 폭력이라는 추상적 부정성이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2011년 영국 폭동에서 시위자들은 어떠한 요구도 내걸지 않았다. 우리가 목격했던 것은 영도의 저항이었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폭력이었다. 그들을 이해하고 돕겠다고 나선 사회학자, 지식인, 논평가들을 보고 있자니 아이러니가 느껴졌다. 시위를 그들에게 익숙한 용어로 번역하려는 필사적인 노력 끝에 그들이 거둔 유일한 성공은 폭동이 제시한 주요 수수께끼를 교란시킨 것뿐이었다.

 

오늘날 영화 속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아랍계 테러리스트와 각종 범죄자나 반영웅들 뿐이고, 디지털 기술로 고전 영화에서 담배를 지우는 방법까지 논의되어왔다. 이 새로운 금기 자체가 윤리학의 위상이 크게 바뀌었음을 시사한다. 헤이스규약은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춰 성적 사회적 규약을 강요했지만 새로운 윤리학은 건강에 초점을 둔다. 이제는 우리의 건강과 복리를 위협하는 존재가 악인 것이다. 103

 

오늘날 우리는 생태자본주의부터 기본소득자본주의까지 자본주의를 순치하려는 수많은 공세 속에서 살아간다....우리의 목표는 이윤을 추구하는 재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기본 틀은 유지하되, 글로벌 복지와 사회 정의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자본주의를 조정하고 규제해나가는 것이다....그러나 이 모든 시도는, 실용주의적 현실주의와 정의를 고수하는 원칙주의를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보통 그러하듯, 선의로 시작하여 조만간 두 가지 차원의 적대라는 실재에 직면하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짐승이 자애로운 사회적 규제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거듭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엔가 우리는 숙명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정말로 자본주의라는 짐승과 함께 가는 것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방법일까? 아무리 자본주의가 생산적이라고 해도, 이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커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43-44

 

특권을 누리던  '봉급 부르주아'계급이 자신들의 특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벌이는 오늘날의 수많은 파업에서도 이러한 환상이 도착적인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들의 시위는 프로레타리아적 시위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 전락할 위험에 저항하는 시위다. 달리 말하면 정규직을 얻는 것 자체가 특권인 요즘 상황에서 감시 시위를 벌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경찰, 사법관계자, 교사, 대중교통 근로자등 주로 공무원직에 근무하여 직업이 보장된 특권층 노동자일 것이다....봉급 부르주아 하위계급이 프로레타리아로 전락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는 최고경영자와 은행가들이 과도할 정도로 높은 보수를 받는다. 미국에서 실시된 조사에서 입증되었듯이, 이러한 보상은 기업의 성과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경제적으로 불합리하다. 이러한 추세에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가 더 이상 자기 통제적인 안정성의 내재적 적정수준을 찾지 못한 채 점차 통제 불능의 상태로 치닥고 있다는 신로로 읽어야 할 것이다.35-37

 

마르크스의 해답에서 벗어나기-사회구성체로서의 자본주의는 구조적 불균형이 그 특징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적대는 자본주의가 등장할 때부터 있어왔고, 더군다나 자본주의를 끊임없이 자기 혁명과 자기 확대로 이끌어온 원동력이다. 자본주의는 미래로 도피하여 구속을 벗어나기 때문에 번영한다. 또 인류는 "언제나 자신이 풀 수 있는 문제만을 제기한다."라는 '현명하게' 낙관적인 생각을 버려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틀에서 벗어나려면 현대 자본주의의 세 가지 특징에 주목해야한다. 첫째, 이윤 추구에서 지대(주로 사유화된 '공유지식'과 천연자원에 기초한 두가지 형태)추구로 전환되는 장기적 추세다. 둘째, 더 오랜 기간 '착취'당하는 일이 오히려 특권으로 인식되면서 실업의 구조적 역할이 한층 더 강화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마지막 특징은 장 클로드 밀네가 '봉급 부르주아'라고 부른 새로운 계급의 부상이다.  28-29


기  타

 

유럽은 대체로 글로벌 자본주의 발전의 규제자역할을 하고 때로는 보수적인 전통의 수호들과 영합하기도 한다. 둘 다 유럽이 주변화되고 망각 속으로 사라지는 지름길이다. 이 교착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유럽의 급진적이고 보편적인 해방의 유산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단지 타인에 대한 관용을 넘어 진정한 공존과 다양한 문화의 혼합을 영속시킬 수 있는 적극적이고 해방적인 지배문화를 추구하는 것이고, 그 지배문화를 위한 다가올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단순히 타인을 존중하지 말고, 그들에게 공동의 투쟁을 제안하자. 오늘날 우리를 가장 크게 압박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문제이니 말이다. 95

 

국가가 대표할 만한 잠재적 대상 가운데 레닌이 하나 빠트린 것은, 모든 경제 정치적 권력을 지닌 수백만 명의 막강한 기관, 바로 국가(기구) 그 자체였다. 라캉이 "내게는 세 명의 형제가 있다. 폴, 에르네스트, 그리고 나."라고 인용했던 농담처럼, 소비에트 국가는 세 계급, 즉 영세농, 노동자, 그리고 국가 자체를 대표했다. 레닌은 '경제적 토대'안에서 그 핵심요인인 국가의 역할을 간과했다. 모든 사회적 통제 기제로부터 자유로운 독재 국가의 성장을 막기는커녕 방치함으로써 국가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공간을 열어주었다. 국가가 외재적인 사회적 계급은 물론 국가 그 자체까지 대표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에만 누가 국가 권력을 보유할 것인가의 문제로 넘어갈 수 있다.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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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황홀] 성석제의 음식이야기다. 채식주의자의 사연이 끌린다.


 

[오! 당신들의 나라] 에런라이크, 툭하면 구조조정하면서 게을러서 실업자 된다고 말하는 친절한 그들/말끝마다 실적 따지더니 회사 주가 떨어져도 챙길 건 챙기는 대범한 그들/불법 체류자들 때문에 실업이 는다면서 집에서 불법체류자 부려먹는 평등한 그들/가난한 아이들 무상 진료는 막으면서 애완견에겐 항암치료 시켜 주는 다정한 그들/ 사근사근 웃으며 대출 권할 땐 언제고 이젠 집 빼앗아 가는 냉철한 그들/전용기 타고 캐비아 먹으면서 임금이 올라 경제가 이 모양이라는 똑똑한 그들.


 

[패션의 탄생] 패션사를  화악!! 느끼게 만들 책

 

 

 

 

 

뱀발.  간식을 챙겼다. 잡지같은 책들로 골라  간지처럼 읽는다. 패션 인물사는 한번 본적이 있다. 일일이 손길이 간 강민지라는 저자의 패션이 눈길을 끈다. 열정도 그렇고 아껴서 봐야겠다.  긍정의 배신의 저자의 에세이집도 기대된다. 서문에 강렬함으로 어퍼컷의 묘미가 감칠 맛이겠다 싶다.  사당동 더하기 25는 추천받고 사둔 책인데 보기를 주저하고 있다. 책사이 영상 CD부터 보려는데 영상만 뜨고 소리가 나지 않아 대기하고 있다. 시간에 강한 연구. 시간에 흔들리지 않는 일들. 묵묵히 버텨내는 삶의 단면이 두툼할 것 같다. 묵직한 책들 사이, 도서관에서 잠깐 빌린 책들이 그나마 들숨, 날 숨 한모금을 줄 듯 싶다. 기대되는 며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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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자본주의의 단계는 한편으로 생산력의 고도화에 의해 리니어한 발전을 함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적'인 단계와 '제국주의적' 단계가 서로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형태를 취한다. 388-399

 

생산지점에서 노동자는 경영자와 같은 의식을 가지기 때문에 특수한 이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예를들어, 기업이 사회적으로 유해한 것을 하더라도, 노동자가 그것을 제지하거나 고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엇다. 생산지점에서 노동자가 보편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은 어렵다. 그에 반해 예를들어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소비자 주민 쪽이 민감하고, 곧바로 세계시민의 관점에 설 수 있다. 즉 노동자계급은 제3국면에서 보편적 '계급의식'을 갖기가 용이하다고 해도 좋다.....소비자란 프로레타리아가 유통의 장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비자운동은 바로 프로레타리아운동이고, 도 그와 같은 것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시민운동이든 마이너리티나 젠더 운동이든 그것들을 노동자계급의 운동과 다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411-412

 

마르크스주의자는 마르크스가 프루동을 비판했기 때문에, 유통과정에서의 대항운동을 경시해왔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본에 대항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장은 역시 유통과정에 있다. 그것을 통해 자본이 이윤추구를 위해 범하는 많은 잘못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비판하고 시정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그것에 의해 비자본제적인 경제를 스스로 창출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비자=생산협동조합 및 지역통화, 신용시스템 등의 형성이 그것이다....자본은 자기증식을 할 수 없을 때, 자본이기를 멈춘다. 따라서 언젠가 이윤율이 일반적으로 저하되는 시점에서 자본주의는 끝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으로 전 사회적인 위기를 분명히 초래할 것이다. 그 때 비자본제경제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이 그 충격을 흡수하고 탈자본주의화를 돕는 일이 될 것이다.....생산과정에 대한 과도한 중시와 유통과정의 경시가 자본의 축적과정에 대응한 대항운동을 실패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정하는 데에는 좀 더 근본적으로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에서 보는 시점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412-413

 

1990년 이후 상황 하에서 칸트, 헤겔, 마르크스라는 고전철학이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재검토하는 것은 액추얼한 문제이다. 이 경우 우리는 칸트는 헤겔에 의해 극복되고, 헤겔은 마르크스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통념을 배척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칸트를 각지의 자본과 국가에의 대항운동이나 코뮌이 나누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시 읽어야 한다. 42

 

뱀발. 1.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를 본다. 서문에 학문에 대한 이력에 대해 상세히 서술해 지난 기억을 살펴볼 필요까지는 없다. 책날개에는 세계동시혁명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뒷표지에는 서문의 한단락이 올라와 있다.

 

'세계동시혁명'은 항상 주창되었지만, 그저 슬로건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 동시혁명으로서만 가능하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을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 세계동시혁명이라는 신화적 비전은 지금도 남아있다. 예를들어, 다중의 글로벌한 반란이라는 이미지가 그 일례이다. 그것이 어떤 결과로 끝날 것인가는 빤히 보인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세계동시혁명이라는 관념을 방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다른 형태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지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이 책은 교환양식을 통해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새롭게 봄으로써 현재의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전망을 열려는 시도이다.

 

 

 

 2. 레미제라블을 본다. 아카데미 벙개 뒤풀이의 기억만 어렴풋하다. 바리케이트의 저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을까라는 문자다. 바리케이트의 저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없다. 아니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혁명이 가능할까? 혁명이 불가능할까? 어떤 혁명? 혁명은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이어진다고 했지. 아리기를 비롯한 거시 역사학자의 이론이 아니더라도,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가 반복한다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몸으로 맞서 있다.

 

3. 그 혁명이 아니고, 그 바리케이트가 아니다. 장발장이 피고인을 살리자니 자신이 죽고, 자신이 살자니 피고인이 죽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 현실이다. 자베르가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은 안개같고, 지난 가치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지난 것으로 아무런 추측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지금여기이지 않을까?

 

4. 칠흙같이 어두운 밤, 지난 서사의 지식과 가치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다 버리고 온몸으로 발로 더듬고 확인하며, 느릿, 더디, 꼼꼼이 가는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론의 촛불이 스며나오는 것도 어쩌면 지난 것을 잇지 않고 지우려하는 노력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른다는 가정하에서 시작하는 것이 역사에서 가장 많이 배우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 잣대를 지금 여기에 가는 길만큼 비추어보는 일부터 시작이지 않을까?

 

5. 역사가 가두어놓은 낡은 그물을 거두는 일. 이론이 가는 길과 몸이 그 희미한 촛불에 여운을 기대며 가는 일들. 이론은 독이자 꿀이다. 독인지 꿀인지 알 수 없다. 궤적이 말할 수 있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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