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자본주의의 단계는 한편으로 생산력의 고도화에 의해 리니어한 발전을 함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적'인 단계와 '제국주의적' 단계가 서로 번갈아가며 이어지는 형태를 취한다. 388-399

 

생산지점에서 노동자는 경영자와 같은 의식을 가지기 때문에 특수한 이해의식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렵다. 예를들어, 기업이 사회적으로 유해한 것을 하더라도, 노동자가 그것을 제지하거나 고발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엇다. 생산지점에서 노동자가 보편적인 관점을 가지는 것은 어렵다. 그에 반해 예를들어 환경문제에 관해서는 소비자 주민 쪽이 민감하고, 곧바로 세계시민의 관점에 설 수 있다. 즉 노동자계급은 제3국면에서 보편적 '계급의식'을 갖기가 용이하다고 해도 좋다.....소비자란 프로레타리아가 유통의 장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비자운동은 바로 프로레타리아운동이고, 도 그와 같은 것으로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시민운동이든 마이너리티나 젠더 운동이든 그것들을 노동자계급의 운동과 다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411-412

 

마르크스주의자는 마르크스가 프루동을 비판했기 때문에, 유통과정에서의 대항운동을 경시해왔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이 자유로운 주체로서 자본에 대항하고 활동할 수 있는 장은 역시 유통과정에 있다. 그것을 통해 자본이 이윤추구를 위해 범하는 많은 잘못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비판하고 시정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그것에 의해 비자본제적인 경제를 스스로 창출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소비자=생산협동조합 및 지역통화, 신용시스템 등의 형성이 그것이다....자본은 자기증식을 할 수 없을 때, 자본이기를 멈춘다. 따라서 언젠가 이윤율이 일반적으로 저하되는 시점에서 자본주의는 끝난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으로 전 사회적인 위기를 분명히 초래할 것이다. 그 때 비자본제경제가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것이 그 충격을 흡수하고 탈자본주의화를 돕는 일이 될 것이다.....생산과정에 대한 과도한 중시와 유통과정의 경시가 자본의 축적과정에 대응한 대항운동을 실패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시정하는 데에는 좀 더 근본적으로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생산양식'이 아닌 '교환양식'에서 보는 시점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412-413

 

1990년 이후 상황 하에서 칸트, 헤겔, 마르크스라는 고전철학이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재검토하는 것은 액추얼한 문제이다. 이 경우 우리는 칸트는 헤겔에 의해 극복되고, 헤겔은 마르크스에 의해 극복되었다는 통념을 배척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칸트를 각지의 자본과 국가에의 대항운동이나 코뮌이 나누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시 읽어야 한다. 42

 

뱀발. 1.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를 본다. 서문에 학문에 대한 이력에 대해 상세히 서술해 지난 기억을 살펴볼 필요까지는 없다. 책날개에는 세계동시혁명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뒷표지에는 서문의 한단락이 올라와 있다.

 

'세계동시혁명'은 항상 주창되었지만, 그저 슬로건에 지나지 않았다. 사회주의 혁명은 세계 동시혁명으로서만 가능하다는 마르크스의 생각을 아무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 세계동시혁명이라는 신화적 비전은 지금도 남아있다. 예를들어, 다중의 글로벌한 반란이라는 이미지가 그 일례이다. 그것이 어떤 결과로 끝날 것인가는 빤히 보인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세계동시혁명이라는 관념을 방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다른 형태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자본=네이션=스테이트를 지양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이 책은 교환양식을 통해 사회구성체의 역사를 새롭게 봄으로써 현재의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는 전망을 열려는 시도이다.

 

 

 

 2. 레미제라블을 본다. 아카데미 벙개 뒤풀이의 기억만 어렴풋하다. 바리케이트의 저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이 있을까라는 문자다. 바리케이트의 저편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없다. 아니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혁명이 가능할까? 혁명이 불가능할까? 어떤 혁명? 혁명은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다. 역사는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은 희극으로 이어진다고 했지. 아리기를 비롯한 거시 역사학자의 이론이 아니더라도, 고진의 세계사의 구조가 반복한다는 사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몸으로 맞서 있다.

 

3. 그 혁명이 아니고, 그 바리케이트가 아니다. 장발장이 피고인을 살리자니 자신이 죽고, 자신이 살자니 피고인이 죽을 수밖에 없는 비극이 현실이다. 자베르가 자살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은 안개같고, 지난 가치로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지난 것으로 아무런 추측조차 할 수 없는 것이 지금여기이지 않을까?

 

4. 칠흙같이 어두운 밤, 지난 서사의 지식과 가치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다 버리고 온몸으로 발로 더듬고 확인하며, 느릿, 더디, 꼼꼼이 가는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론의 촛불이 스며나오는 것도 어쩌면 지난 것을 잇지 않고 지우려하는 노력때문인지도 모른다. 모른다는 가정하에서 시작하는 것이 역사에서 가장 많이 배우는 길인지도 모른다. 그 잣대를 지금 여기에 가는 길만큼 비추어보는 일부터 시작이지 않을까?

 

5. 역사가 가두어놓은 낡은 그물을 거두는 일. 이론이 가는 길과 몸이 그 희미한 촛불에 여운을 기대며 가는 일들. 이론은 독이자 꿀이다. 독인지 꿀인지 알 수 없다. 궤적이 말할 수 있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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