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발.
세밑, 새해 일틈 사이로 모처럼 책마실을 다니다. 몸에 기차소리가 익거나 물리도록, 차창밖으로 설경이 마음 속에 내리도록 해주고 싶다. 끊임없이 펼쳐진 초록, 멀리 들리는 파도소리와 포말들 몸에 아른거리는 것들을 넣어주고 싶다.
일터송년회도 말미, 해설피 취한 술김에 아빠 떠나니 묻지 말라고 한다. 내일 떠나서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궁금해 하지 말라 한다. 흔쾌한? 허락에 책들과 가벼운 짐을 챙겨 나선다. 눈발은 짙어지고 밤은 어두워지고 달리는 기차소리가 곱고, 들뜬 여행객들의 상기된 얼굴과 목소리가 좋다.
출발전 정여울의 책소개가 마음 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사놓고 뒷부분에 날개가 접힌 책이다. 일리히 책들도 주섬주섬 읽고 [젠더]는 여러번 재독했건만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것이 없어 아쉬웠다. 이렇게 책의 문고리를 잡고 기차소리를 들으면 읽다. 사랑은 단념이다. 우정은 낯선사람에 대한 환대다. 믿음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디 있는거다. 예수의 결을 이리 치밀히 쫓고 분석하는 이가 있을까? 역사 속의 결을 이리 현실화 시키려는 이가 있었을까? 여운을 깊이 들어마신다. 뫔 속에서 달아나지 않게 숨을 꾹 참는다.
책의 화자들의 목소리는 한결같다. 세상은 안개보다 더 짙다. 보이는 것이 없다. 보인다고 착각하지 말아라. 네 몸은 지칠대로 지쳐있다. 너무 열심히 살아 지쳐있다. 멈춰라. 살펴라. 판단하지 말고 살펴라. 한올한올 살펴라. 서사도 없고, 진보도 없고, 보수도 없다. 있는 것들을 다시 보고 이어라. 저기 역사의 뒤편에서 말했던 이의 말에 감금되지 말고, 보는 것만으로 주섬주섬 섬겨라. 우리의 판단이 들어서고, 우리의 피로같은 어둠을 서로 더듬다가 저편에 나만이 아니라 너가 있다는 것이 설핏느낄 때 희망은 생겨나는 거다. 우회하고, 나눠지는 갈래를 살펴라. 판단하지 말고 살펴라. 학문은 애초나눠진 것이 없다. 그 바닥까지 느껴라.
12월 12일. 십이월 십이 일.
" 나는 죽지 못하는 실망과 살지 못하는 복수, 이 속에서 호흡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지금 희망한다. 그것은 살겠다는 희망도 죽겠다는 희망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 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 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무서운 기록이다.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스무살 청년 이상에게 소설은 이런 것이었다. 책은 얼어붙은 바다를 가르는 도끼라고 한 카프카처럼... ... [십이월 십이 일]은 다가오는 화살이다. 점점 뜨겁게 조준되어 오는 불화살이다. 여울 생일날은 이렇게 새까맣게 타서 새해의 불쏘시개로 쓴다.
책마실 중이다. 책들이 이렇게 불꽃처럼 한꺼번에 다가서는 것인지, 자칫 정신을 잃을 듯 싶다.
이반 일리히의 유산 ▼
정여울의 내 마음속의 도서관
내가 책을 고르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고를 때가 있다. 오스트리아 신학자 이반 일리히(1926~2002)의 <이반 일리히의 유언>이 그랬다.
이 책은 서구문명을 구조화한 핵심 열쇳말들-복음·신비·우연성·범죄·두려움·학교·병원 등을 출발점 삼아 일리히의 평생에 걸친 사유의 여정을 장대한 파노라마로 펼쳐보인다. 그리고 이 모든 열쇳말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불꽃은 ‘사랑’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내가 사랑이라 믿었던 모든 열망의 비겁함을 깨달았다. 나는 내 결핍을 채워주고, 내 불안을 잠재우는 감정이 사랑이라 믿었다. 한 번도 나를 파괴하는 사랑에 몸담아 본 적이 없다. 그런 감정이 다가올 때마다 용케도 잘 피하며 이런 위험한 감정은 사랑이 아니라 부정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본디 나였던 나, 나라고 믿었던 나를 파괴하는 사랑이야말로 내가 한 번도 끝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아름다운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유언>을 통해 내게 소중한 세가지 단어의 정의를 완전히 바꾸었다. 바로 믿음·우정·이웃이다. 첫째, 믿음. 나는 믿음이 불합리성을 기반으로 한 나약한 감상의 일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일리히에 따르면, 믿음이야말로 ‘가장 바보같은 인식’임과 동시에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인식’이다. 인간은 바로 그 조건 없는 믿음의 목소리를 잃어왔기에, ‘최선의 것이 타락하여 최악이 되어버린 세상’ 속에서 고통받는다. 이 ‘최선의 것’이란 곧 기독교 문명이다. 둘째, 우정. 우정이란 나의 결점을 말없이 받아주고, 나의 장점을 질투 없이 예찬하는 상대방의 선의라 믿었다. 그런데 일리히의 우정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단 한 번 마주친 이에게 내 모든 마음을 내줄 수 있는 용기. 낯선 타인과의 사소한 우연을 뜻밖의 연대로, 눈부신 기적으로 만드는 삶의 기예다. 너와 나 사이에 제3자를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환대의 능력이다. 셋째, 이웃. 그에 따르면, ‘이웃’을 생각할 때 특정한 얼굴이 떠올라선 안 된다. 오늘 처음 본 사람일지라도, 그 아픔을 반드시 알아봐야 하는 타인. 내 아픈 시선을 기다리는 완전한 타인. 그것이 이웃이다. 나는 얼마 전, 길바닥에서 폐지를 주우며 말라비틀어진 식빵과 물을 드시는 할머니를 보았다. 그때 마침 나는 맛 좋은 돼지갈비를 먹고 만족스런 얼굴로 음식점을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의 핏기 없는 얼굴과 마주친 뒤, 하복부에 격심한 고통을 느꼈다. 일리히에 따르면, 바로 이 ‘하복부의 고통’이 구원의 열쇠다. 온몸을 통해 느끼는 타인의 존재, 곧 내가 돌봐야 할 이웃의 얼굴을 인지하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일리히는 가톨릭대학교 부총장을 지낼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고, 10여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손대지 않은 학문 분야가 거의 없었지만, 모든 특권을 포기했다. 온 세상을 떠돌며 오직 평범한 사람들을 통해서만 교회·믿음·세상이 구원될 수 있다는 믿음을 실천했다. 나는 그를 통해 나를 언제나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힘을 느낀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이 온몸을 휘감을 때, 나는 문득 내 아픈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 보이지 않는 손길을 느낀다. 내가 상상도 못하는 아픔으로, 내 고통을 대신 짊어지고 걸어가는 누군가의 슬픈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제 내게 사랑은 단념이다. 가장 사랑하는 것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용기다. 이제 내게 사랑은 절제다. 나를 가장 기쁘게 해주는 바로 그것이 없어도 내가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이 아픈 사랑은 오직 완전한 단념과 절제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그가 없는 모든 곳에서 그의 사랑을 실천하는 용기. 누군가를 어떤 희망도 없이 완전히 사랑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까지.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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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난 새해!! 만나요!! 이렇게는 말구 오프라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