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님의 "트위터를 폭파한 이유"

 

 

파란님, 진도를 많이 나가셨네요. 혼자 블폭?을 할까하다가 몇달 자정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ㅎㅎ 그러다가 심증은 가지만 확증이 없어 쉬쉬하게 되었죠. 이렇게 파란님 글을 대면하다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가상공간이란 것이 예스만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현실의 아니오는 아예없죠. 아니오가 실재를 붙잡아주는데, 늘 녀석들은 예만 바라는 게 아닌가 싶어요. 저도 그런 중독자이기에 두렵습니다. 현실의 근육이 무뎌지거나 흐물흐물해져 걸을 수도 없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여우님 제안에 솔깃하네요. 고독의 근육!!

 

 

말과 행동, 그런 면에서 욕이 제일 자극적이긴 하죠. 욕설이 아니라 욕이 없는 시공간! 현실과 삶에서 빠져나가 토닥거리기만을 원하는 공간 다시 한번 불꽃 화살을 날려봐야할 것 같네요. 점점 외로워지고 더 더욱 자신과 삶에 소통이 요원해지는 이유를 말에요. 반가워요. 이것도 나와바리와 위무에 대한 이기심이기도 하겠죠. (여울에겐 맹세의 고고학과 피로사회가 가상공간에 대한 문제인식이론으로 도움이 되었어요.)

 

 

 


 

 

결코 저항적일 수 없는 가상공간,SNS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더욱 줄여놓는다. 가상공간에서는 타자성과 타자의 저항성이 부족해진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사실상 "현실원리"없이, 다시 말해 타자의 원리와 저항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가상현실 속의 상상적 공간에서 나르시스적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다. 실재가 무엇보다도 그 저항성을 통해 존재감을 가진다면, 가상화와 디지털화의 과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러한 실재를 지워나간다. 실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를 붙잡는다. 즉 일을 중단시키고 저항하여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다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서 우리를 잡아주는 것이다.95


맹세의 새로운 위치

 

인간성이 어떤 탈구 앞에 처해있다는, 적어도 살아있는 존재자를 언어와 묶어주었던 결합이 느슨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한편에는 갈수록 더 순전히 생물학적인 실재로, 벌거벗은 삶으로 축소되는 '살아있는 존재자'가 있다. 다른 한편에는 미디어 테크놀로지에 기반을 둔 각종 장치들을 통해 더욱 더 공허해져버리는 말의 경험 속에서 인위적으로 전자에 분리되는 '말하는 존재자'가 있다. 그러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지는 것도 불가능하고 또 그러한 말 속에서는 정치적 경험 따위는 갈수록 더 미덥지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말과 사물(사태)과 인간의 행위를 하나로 묶어주는 윤리적인 연관이 깨지면 사실상 한편으로는 공허한 말이, 다른 한편으로는 입법장치들이 대대적이고 유례없이 만연해 더 이상 통제 불능으로 보이는 그러한 삶 전반을 법으로 집요하게 틀어쥐려고 한다.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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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거울 속의 나 (ing)
    from 木筆 2013-01-10 11:11 
    거울 속의 나 - 삶은 계란 팔아요 점점 거울을 보는 횟수가 잦아든다좋아요추천에 근력을 잃는다어느새 흐물흐물 유체이탈한 나는몽롱한 너를 만나 흐물흐물아 이 유치찬란은좋아요리트윗추천의 터네이도로, 어느새 태풍의 늪에 빠져있다 아니오머뭇거림쉬어감과 방지턱이 없는 예스의 고속도로블로거들과 트윗터들과 페부커들이 yes의 연대, N극과 S극으로 유유상종한다 삶도 없고 아니오도 없고술자리의 치고박고도 없고그래그래만 있는 유토피아 오늘도 그 거리만 걷는다. 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