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채호 1925 동아일보 [낭객의 신년만필]- 도덕과 주의가 이해利害에서 났느냐 시비是非에서 났느냐

"그것은 이해에서 나왔다. 그러므로 인류는 이해의 문제뿐이다. 이해 문제를 위해 석가도 나고 공자도 나고 예수도 나고 마르크스도 나고 크로포트킨도 났다."

신채호는 이해관계의 표준이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르므로, 절대적인 보편성은 없다고 했다. "중국의 석가가 인도와 다르며, 일본의 공자가 중국과 다르며, 마르크스도 카우츠키의 마르크스와 레닌의 마르크스와 중국이나 일본의 마르크스가 다 다름이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대와 지역에 따른 사상의 변용을 당연한 현상으로 인정한 신채호는 조선은 예외라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뱀발. 책을 보다나니 신채호의 [아나키즘과 역사학]이란 문단글이 눈길을 끈다. 노신의 [왔다]병과 같은 지적처럼 제도권안밖의 경도된 주의자로 인해 현실을 유연하게 볼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한다. 그 주의 복속시키려는 시도는 특색이지만 노예의 특색이란 말이다. 시비의 문제가 아니라 이해의 문제로 보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은 아닌가 싶다. 한 평생 베개처럼 끼고자고 해서 시비도 가리지 못하고 이해에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인문학도 좋지만 경도되는 모습은 애초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할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처럼 말이다.  

최소한 이러한 레떼르는 벗어나는 것이 제도권 밖의 인문학은 아닐까? 벗겨내야하는 것이 시대의 소명은 아닐까? 설령 지적 유희를 넘어서 가슴 속에 이런 주의를 웅숭그려 품고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대단하다 대단하다 해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 대단하지 않다는 것, 주의를 가지고 별반 해볼 것이 많지 않다는 것.-외려 주의의 연대에 고심해보려는 것이 그래도 조금은 나은 선택은 아닐런지. 

-노신의 글:묘하게도 겹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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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09-09-17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

신채호 선생은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분 가운데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우리 민족이 노예였다는 신채호 선생의 처절한 자각...
저는 큰 충격과 감명을 받습니다.
그런 노예의 굴종과 비겁을 떨치고 민족의 자존을 위해 끝까지 죽음으로 항거하고 투쟁한 신채호 선생의 삶과 정신...
저는 흠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울 2009-09-17 23:59   좋아요 0 | URL
단재선생의 흐름을 되짚어보고 싶네요. 아직 문밖이라..깊이나 말씀에 배인 강직이 각별합니다. 고마워요.
 

1.

중도中道는 선과 교를 통한 근본입장입니다. 선은 중도의 실제 체험 법문이고 교는 중도의 이론입니다. 이론은 실천을 하기 위한 것이지 실천을 떠난 이론은 안됩니다. 그래서 이론에 밝은 아난도 가섭에 쫓겨난 후 깨쳐서 결집에 참여하였습니다. 이것이 선이라는 별전別傳의 시발점입니다.

2.

별전이 인도에서는 달마까지 28대로 하고 다시 중국으로 내려왔는데, 거기서 표방하는 것은 실천법문에서는 '견성성불'입니다. 이 견성성불을 견성하여 성불한다는 식으로 나누면 잘못입니다.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입니다. 견성은 '자성을 깨쳤다.' '불성을 깨쳤다' '진여본성을 깨쳤다'라는 말인데 불성이니 진여니 하는 것은 중도를 말하며 쌍차쌍조 雙遮雙照 인 진여를 말하는데, 즉 중도를 깨친 것이 견성이라는 것입니다.

3.

중도를 바로 깨치면 우리 심리 상태가 대무심지이며 무념무생한 이것이 제 8아뢰야의 무기식을 확철히 깨어난 대원경지의 무심입니다. 대무심지에 들어가는데 오매일여라는 관문이 있습니다. 몽중에도 완전 일여하면 7지 보살이고 잠이 꽉 들어서 일여하면 오매일여, 멸진정 이상의 제 8아뢰야 경지입니다.

4.

조사스님 모두가 실지 오매일여 되어서 참으로 대무심지인 여기서 깨쳐 조사노릇을 하였지 누구든 오매일여, 몽중일여도 못된 데서 깨쳤다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매일여 된 데서 죽어서 살아나지 못하면 제 8아뢰야 마계魔界입니다.

5. 


언구를 의심해서 제 8아뢰야 오매일여에서 확철히 깨쳐야 깨끗한 유리그릇 속 보배를 비추는 것과 같이 참 광명이 시방세계를 비춥니다. 무심경계가 되어도 깨친 경계가 아닙니다. 대무심지에서도, 오매일여한 경지에서 다시 깨쳐야 됩니다. 그래야만 견성이다 선이다 할 수 있습니다.

6. 


선종 정맥사상은 육조 스님때 하택荷澤이 지해로 나가니까 지해종사라 수기했습니다. 그 뒤 규봉이 공부하여 화엄 5조가 되었습니다. 규봉이 돈오점수 사상을 만들어서 번뇌망상 있는 그대로를 견성이라 하고 돈오라 하고 달마선이라 하였습니다.

7. 


그 후 규봉의 돈오점수 사상이 죽어서 햇빛을 못보았는데 보조스님을 만나서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보조스님이 초년에는 잘 몰라서 규봉의 돈오점수 사상을 달마선인 줄 알고 이에 의거해서 수심결을 짓고 결사문을 지었습니다. 그 후 사상이 크게 전환하여 간화결의에서는 대무심지가 되어도 화두를 부지런히 참구해서 크게 살아나야 하며, 이것이 선종이라고 하였습니다.

8. 


규봉이 말하는 해오는 선종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사구인 죽은 길로 들어가면 삼아승지겁이 벌어지고 막대한 노력과 시간 손해가 납니다. 우리는 경절문인 활구로 들어가서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해야 합니다. 

뱀발. 조금씩 보다 어제 완독하다. 밥을 아무리 맛있다고 떠들어도 한번 맛보지 않으면 그 맛을 모르는 것이다. 지행합일이라는 것과 이론과 실천이라는 것이 두몸이 아니란다. 안다고 하는 것의 경계는 꿈속에서도, 그리고 오매일여하여도 깨쳤다고 경계에 다다른 것이 아니란다. 화두를 부지런히 해서 몇번을 죽었다 살아나야 그제서야 깨쳤다 할 수 있다라구 말이다. 다시한번 돌이켜 가봐야겠다. 백일법문의 뒤 요약한 내용을 따로 구분하여 남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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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언(톡!)--


1) 현대의 국가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업무를 처리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이 지배하는 곳에서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목가적 관계들을 완전히 없애 버렸다. 부르주아 계급은 상전의 지위를 타고난 이들에게 사람들을 묶어놓던 잡다한 색깔의 봉건적 끈들을 무자비하게 잡아 뜯어 버렸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거벗은 이해관계와 냉혹한 "현금계산" 외에는 아무런 끈도 남겨놓지 않았다. 부르주아 계급은 경건한 광신, 기사의 열광, 속물적 감상의 신성한 전율을 2) 이해타산이라고 하는 얼음처럼 차가운 물 속에 빠뜨려 버렸다. 부르주아 계급은 인격적 존엄성을 교환가치로 해소시켜 버렸으며, 문서로 인증되고 정당하게 얻어진 자유를 단 하나의 3) 양심없는 상업적 자유로 바꾸어 놓았다. 한마디로 부르주아 계급은 종교적 정치적 환상 속에 숨어있던 착취를 공공연하고 파렴치하며 직접적이고 건조한 착취로 바꾸어 놓았다.

부르주아 계급은 지금까지 존경받았고 사람들이 경건하게 바라보던 모든 활동에서 신성한 후광을 벗겨 버렸다. 부르주아 계급은 의사, 법률가, 시인, 학자를 4)  자신들을 위해 일하는 임금 노동자로 바꾸어 놓았다.

5) 부르주아 계급은 가족관계에서 심금을 울리는 감상적 장막을 찢어 버리고 그것을 순전한 화폐관계로 환원시켰다. 11-13

[공산당선언] 이론과 실천, [꿈꿀 권리] 가스통 바슐라르,[ 걷는 것이 쉬는 것이다] 김산환
 

 

 

 

 

 


   
 

움직이는 물은 그 물 속에 꽃의 두근거림을 지니고 있다. 꽃 한송이가 더 피어나는 것만으로 냇물 전체가 술렁대는 것이다. 한그루의 갈대가 꼿꼿하게 서 있으면 그럴수록 잔물결은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이다. 그리고 뒤얽혀 우거진 수련의 초록빛을 꿰뚫고 나온 저 생생한 물의 붓꽃, 그 놀랄 만한 승리를 화가는 곧장 우리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붓꽃은 모든 칼을 빼어 잎사귀들을 날카롭게 세워서, 상처를 입힐 것 같은 아이러니 속에, 물결 위로 아주 높이 유황빛 혓바닥을 늘어뜨리고 있다.  - 붓꽃과 수련의 변증법, 수초의 변증법, 수직과 수평

 
   

 

뱀발.  지난 일요일, 이곳을 내려오는 길 [선언]이 책가방 속에 있는 것을 깜박하다. 뒤늦게 보기 시작해 좀더 시간을 늘려 읽다. 따로 메모할 길이 없어 오늘 반납할 겸 남긴다. 흔적을 남기다보니 저자의 읽기와 겹친다. 160년전의 흔적이 이렇게 명료할 수 없다. 아마 선언의 의미대로 수사가 날렵한 듯 싶은데 해석이 그다지 빨아들일 정도로 읽히지는 않는다.  수련에 대한 모네의 그림, 샤갈의 그림읽기, 고흐의 그림 읽기 등 옛날 책으로 읽어 그림도 조금 아쉬웠는데 책을 달다보니 신판이 열화당, 동문선에 모두 나와있다. 위 인용문은 수련 잎을 닦을 정도였던 모네의 수련정원의 묘사가 무척이나 깊숙하고 세밀하다. 샤갈에 대한 이야기보다 먼저 서있는 성서의 흔적의 손길을 쫓는 묘사도 그러하고... ...그리고 마지막 책은 해남 두륜산의 대흥사 가는길의 묘미. 이른 새벽길을 추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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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를 위한 변명

[이야기] 쳐다보는 것과 만든다는 것의 차이.-동심원이 퍼진다는 것. 동심원이 울려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맞는 것도 괜찮겠지만, 흘러가는 것보다 동심원을 만들어내는 것이 더욱 편하고 즐거울 수 있다. 물론 부담도 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이기적 출발이 아니라면 마음에 맞는 일들을 뭉쳐 물방울 한점 톡! 던져보는 것이 반향이나 파고, 저 맑은 물가의 되돌이킴이 보일지도 모르니 마음과 일들을 버무려 맑은 엑기스 토옥 던져보는 일도 괜찮을 것 같다. 늘 시즌처럼 선거는 다가오고, 선거가 말로만 장이되고 뭐가되고 하니 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무엇이 되지 않게하는 것인지 하나씩 지워나가는 일도 차일, 차차일을 기약한다면 꼭 해봐야 될 흔적들 일 것이다. 아프면 아플수록 상처는 커지겠지만 제대로 아물면, 그 상처를 기억한다면 되돌아가는 길을 설명하기 전에 아는 수도 생길 수 있으니 말이다. 090912


[백만원]의 연대가 할 수 있는 활동의 비교.-활동가 기금?마련. 활동가가 꽃피지 않으면 사회도 꽃필 수 없다. 활동가가 즐겁지 않으면 사회도 즐거울 수 없다. 활동가가 사유하지 않으면 사유
할 수 없다. 활동가들이 섞일 수 없다면 모임의 연대는 불가능하다. 활동가들이 품을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사회는 아무것도 품을 여력이 없다. 그래서 질문의 화두는 삶도 되고, 어려움을 겪는 것보다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삶이 겹치게 할 수 있는가? 좀더 진중한 고민과 전망의 자리로 섞여야 된다. 면접의 질의응답이 꼼꼼하게 단체를 아우르는 시간과 꿈, 여건들이 점점 논의의 중심으로 오는 버릇이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090912


[중년남자들] 불안-돈에 노출된 강박이 만드는 일상. [불안한 삶-돈이 해결할 수 있다]는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은 다른 출구를 만들지 않는다. 오로지 볼 수 있는 것은 제한된 시각안으로 침몰시킨다. 불안에 강요된 몸이 할 수 있는 것은 돈독이 올른 뱀의 혀와 기껏 이야기하는 화제의 주제가 골프밖에 없어지는 것이다. 담보잡힌 아이의 교육과 과외, 팔 수 없는 집값이 허덕거림이 쳇바퀴처럼 삶을 담보잡힌 채, 그런 비참과 배부름을 동시에 배설하고만 마는 것이다.

[루저]- 엄친아, 양주에 차별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양주맛의 감별에 차별이 다가선다. 철학에 무덤덤하지만 철학하는 이가 일상에 있다면 그 미묘한 차이때문에 흔들린다. 엄친아는 욕망의 반영일 뿐 그 이상이 아니란 현실을 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루저는 연대할 수 있는가? 경제단위가 없는 루저의 공간과 삶은 만들어질 수 없다. 철저히 살림살이에 예속되기 때문이다. 얇지만 만명의 루저가 그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얇아 표시나지 않은 공간을 부풀릴 수 있다면, 가능성마저 없는 지방대의 현실은 인식의 바깥이고 부풀릴 현실의 표피마저 없는 날현실 그대로이다. 현실을 비참하게 느끼는 것마저도 '특권'이다. 그 경계에 서있을 수 있기에 생기는 감각이다..."비참함을 지각할 수 있는 특권"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자신보다 아래의 '부속품'들의 삶도 이해하게 될 것이다. 090913

[기득권] - 가질 것에 대한 생각에 볼모잡혀 가진 것에 대해 불감하는 사회. 불안을 핑계로 지금의 사유와 현실을 나누지 못하는 몽매. 한통계를 보면 기부를 하는 비율이 가난한 하위층위가 더 많이 한다. 몸으로 느끼는 것이 많은 현실의 부대낌의 어려움은 처지를 넘긴다. 그런데 이땅의 386의 허위는 그룹핑을 하더라도 미래의 불안이 엄습하겠지만, 그 위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겠지만 백번 양보한다하더라도 [지금]으로 처지를 사고하지 않는다. 기득권의 과실이 당신의 삶을 달콤하게 녹이고 그 단맛으로 온몸을 칭칭 감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야 한다. 말은 80년대로 결빙되었다면, 그 시선으로 당신의 [지금]을 보는 눈이 생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말로만이다. 뻔뻔스러움과 가증스러움이 말과 당신의 두어깨에 훈장처럼 쌓여있음을 눈치채야 한다. 집 한채있고, 과외시키기에 허덕거려 남을 위해 품을 기부 한점할 여유조차 없다고 그러니 그냥 살게 내버려두라고 이야기하라. 세상 핑계대지 말구. 090912



뱀발. 1. 20대의 글을 보다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생각의 깊이. 그리고 생각과 현실의 결들을 세세히 겹쳐 읽을 무렵 이 친구가 이십대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무슨 대수냐고 하지만, 십대도, 이십대도 서로 보듬어나갈 친구라는데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십대에 대한 느낌도 또한 다르다. 가까이-멀리서 볼 수 있음 느낌의 나눔이 별반 새로울 것도, 세대의 경계도 없을 수 있다. 서로를 그리고 이사회를 얼마나 절감할 수 있느냐에 따라 친구와 기득권을 번갈아 선다. 제발 더 움켜쥘려 하지말고, 움킨 것을 놓고, 시선을 당신의 이십대로 십대말미로 내려놓는 연습이 절실한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나에게 하는 말이다. 

2. 주말 십년이 더된 지난 일터동료들을 만났다. 채 한시간이 넘어서자 나오는 이야기란 별반 다를 것이 없었지만 말이다.[루저]의 글이 20대의 이야기다. 

3. 아침 나서니 닭의장풀의 색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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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옥상, 1954년 8월 오카모토 타로, 그리고 학자들의 학문간의 경계를 섞기위한 4권의 모색 가운데 하나. 속도의 예술은 비엔날레와 블록버스터의 전시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 일반 예술가, 아니 일반인들의 선입견들.은 대조적이다. 임옥상님의 자전적 그림평, 근황들이 적혀있어 그가 고민하고 있는 관점에 대해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런면에서 타로의 아방가르드의 그림들의 맥락을 살펴보게 해준다는 점에서 예술이 할 역할에 대해 짚어준다. 하지만 역시 그다지 읽을 거리가 없는 예술가여..와 속도의 예술은 상식적으로 자본에 무릎꿇은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별반 없다는 점이다. 그 틀을 깨지 않는 이상. 맥락을 찾으려는 노력이 없는 이상. 반룬의 예술사는 오래된 책이란다. 사진 위주로 훑어보니 건축관련하여 볼만하겠다 싶다. 

돌아오는 길. 구름에 가린 반달이 무척이나 크게 보인다. 가을은 머리의 흰머리처럼 슬그머니 톡톡 가벼운 터치를 해놓았다. 산과 달, 가을의 무늬가 바람결에 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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