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과 오만의 역사
이희진 지음 / 동방미디어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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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이희진 선생님의 책은 이번이 4권째다(공저 1권 포함). 맨 처음 전쟁사 책(『전쟁의 발견』)을 접하고, 저자가 전쟁사 전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보다는 식민사학과 관련된 연구로 더 유명한 분이었다. 이 책은 지난번에 읽었던『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와 어떻게 보면 내용면에서 많이 유사한 책이다. 그 책보다 한참 먼저 출간되었기 때문에 내용면에서는 분명 차이가 있지만, 기본 골조는 크게 차이가 없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당연히 '식민사학'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일본서기』, 그 와중에서도 임나에 대해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일단 책의 앞부분에는 과거에 방영했던 역사스페셜(필자는 이때 방송을 못 봤지만, 대강의 내용은 들어서 알고 있다)의 내용을 까는(?) 내용들이 나온다. 그래서 자칫 이 책의 주요 흐름이 역사스페셜을 까는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서다보니 파급효과가 크고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공영방송을 까는 것이 독자들의 이해력을 높이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것은 안다. 이미 저자는『전쟁의 발견』에서도 컴퓨터게임인 <스타크래프트>를 이용해 전쟁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력을 높이고자 했으니 말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법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교양서라고 해도 역사서적인데 이렇게 하면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암튼, 저자 개인이 선호하는 방식에 대해서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 책 앞부분에서 역사스페셜 방송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다룬 것은 조금 NG였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적으로 앞부분의 내용은 나중에 나온 책이지만, 필자가 이보다 먼저 읽었던『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와 큰 차이가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적은 얘기들을 하고 있어서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필자는『일본서기』를 단순히 2주갑 인상해서 연표를 맞추는 것도 전적으로 믿을 수만은 없다고 보는 쪽이라서...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말 안 하고 넘어가겠다(학계 대다수의 중론을 깨부실만큼 아직 필자가 그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라서). 암튼, 기본적으로『일본서기』가 문제가 있는 책이고, 그 안에 헛점이 많다는 저자의 지적에는 공감한다는 정도만 밝혀두고 싶다. 

앞부분에서『일본서기』얘기가 주축이었다면 그 다음에는『삼국사기』가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주로 다루는 것이 바로, 한국고대사학계의『삼국사기』비판(근거없는)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었다. 실제 저자가 언급한 그런 고대사학계의 논문을 필자도 본 적이 있고, 그런 내용의 수업을 들었던 적도 있다. 그리고 필자가 늘 이상하게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저자가 콕 집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시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식의 역사 해석이 문제가 있음을 여러 후학들이 알고 있고, 이를 따르지 않는 연구성과들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쓴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지만, 불과 몇년전에 나온 또 다른 책에서도 저자가 식민사학에 대해서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어서 조금 놀랐다. 분명 식민사학의 잔재는 남아 있지만, 10년 전과 지금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 직후와 이 책을 썼을 10년 전의 상황도 분명 달랐을 것이고. 그런데 저자의 책을 보면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이 식민사학이 학계를 장악하고 있고,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고 강경하게 주장하고 있다. 만약에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또 다른 책을 준비 중이라면 식민사학의 현실태에 대해서도 좀 자세하게 썼으면 하는 바램이다. 분명히 변화하고 있는 학계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몇몇 사실, 변화하지 않은 몇몇 사실만 계속 언급하는 것은 옳지 못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역시 저자의 '고고학'에 대한 비판은 이어지고 있다. 저자의 책에서 필자가 여러번 지적했듯이 저자가 고고학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 중 상당 부분은 잘못된 비판이라는 얘기를 한 바 있다. 이 뒷 책들에 대해서 한 비판을 그보다 앞서 쓴 책에서 다시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지만, 몇가지만 적어보도록 하겠다. 

1. 고분에서 출토된 관모나 거울, 대도, 장신구에 대해 저자는 이는 교역에서도 흔히 다루어지는 물건들이므로, 정치적 상황과 상관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물건들은 정치적 상황과 연계해서 해석되는 물건들로서 일반 토기류와는 차원이 다른 위계품들이다. 이를 단순히 교역에서 다뤄졌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그냥 저자 개인의 생각일 뿐이다. 야마모토 타카후미 선생님의『삼국시대 율령의 고고학적 연구』을 보면 이런 부분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다. 과거의 유물을 현재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 고고학에서의 유물 연대 측정이 오차가 크다고 지적하면서 고고학에서 말하는 연대를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고고학에서는 단순히 자연과학분석에 의존한 탄소연대측정법만 갖고 편년을 하지 않는다. 이는 어디까지나 보조 자료일 뿐이다. 그리고 AMS 연대측정의 경우는 C14보다 더 정밀한 결과를 얻을 수 있고, 그외에도 연대 측정에 사용 가능한 방법은 굉장히 많다. 단순히 탄소연대측정법 하나만 갖고 고고학의 연대 측정이 어떻다~라는 것은 문제가 있는 시각이다. 사이토 츠토무 · 타구치 이사무 선생님의『고고자료 분석법』이라는 책만 봐도 고고학에서 연대측정에 어떤 방법들을 쓰는지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3.『가야연맹사』를 비롯한 가야사 관련 저서를 많이 저술한 김태식 선생님에 대해 저자는 비판을 가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이 그 선생님을 비판하면서 고고학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김태식 선생님은 정작 고고학자가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그 선생님의 연구성과는 오히려 가야 고고학 전공자들에게도 비판받고 있는데(당장 필자만 봐도 김태식 선생님의 견해는 문제가 있다. 비전공자인 필자가 봐도). 그러한 사실을 거론하지 않고, 책에 이렇게만 써 놓으면 독자들은 이게 정말로 고고학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4.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고고학을 빌미로 생겨난 신화 중 또 다른 것 하나는 정치적 변혁은 반드시 고분 · 유물에 반영된다는 발상이다'라고. 어느 고고학자가 단순하게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유물 및 유구에 반영될만한 정치적 변혁이 있을 경우에 그렇다고 하는 것이지. 이는 단순히 정복자들이 피정복민을 학살하거나 쫓아내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저자는 이를 아주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따지면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왜 시기별로 토기가 변화하겠는가? 그때마다 주민이 전부 교체됐으니깐? 그리고 변화하지 않는 시기는 주민 교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아니다. 유물의 변화 양상을 단순하게 '정치적 변혁'이라는 용어 하나로 대체하려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박순발 선생님의 경우, 백제토기의 탄생 시점을 곧 백제라는 국가의 등장 시점과 맞물려 해석한다. 그리고 그 시기를 3세기로 잡는데, 물론 필자는 이에 반대한다. 문헌에 이미 건국된지 수백년이 지난 백제가 왜 3세기에 등장했다고 해야 하는가? 그런데 분명한 것은 3세기를 기점으로 백제토기에 있어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종의 탄생과 새로운 제작기법의 등장 등등. 이런 부분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즉, 저자의 저런 생각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유물 해석의 다양한 사례를 저 한줄로 대체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틀린 것이지만, 저런 생각이 기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맞기 때문이다. 

5. 저자는 나주 반남 고분을 두고 '고분 규모는 참고자료일 뿐'이라고 한다. 잉?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저자는 가야 고분이 백제보다 크지만 가야가 백제보다 강력하지 않았고, 고구려 고분이 전방후원분보다 작다고 고구려가 왜보다 약소국이었다~라고 보지는 않는다...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 크기'뿐'만이 아니다. 예전에 옹관 문화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한 글(클릭)에서도 적었지만, 4~5세기에 등장하는 옹관 문화가 이전 시기의 것과 격을 달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 갑자기 4~5세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가 6세기에 사그라드냐는 것이다. 그리고 하필 그 시기에 거대한 대형 옹관묘가 나타났다는 것이 관건이지, 단순히 영산강 유역에 큰 무덤이 있어서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만약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에도 특정 지역, 특정 시기에 거대 고분군이 존재한다면 분명 이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현상이라 할 수 있겠으나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에는 이런 흔적이 없다. 그래서 영산강 유역이 백제사와 맞물려 더 특이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고. 하나 더 말하자면, 한성백제 시절에 충남 연기군에서 백제 고분이 1기 확인되었는데, 이는 지금껏 확인된 백제 고분 중 최대 규모의 지하식 석실분이다. 그리고 이를 비롯해 백제 각지에는 지역색이 강한 지방 수장층의 것이라 볼만한 고분군이 많이 있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와는 분명 다른 현상이다. 그래서 필자는 백제의 지방통치제도가 고구려, 신라와 달랐다고 생각한다. 

암튼, 대강 이 정도다. 그밖에 2개의 백제라든가,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한 부분은 필자 역시 저자의 지적과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일단 근거가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뭔가를 얘기하는 것은 굉장히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헌 몇줄을 두고 이리 해석하고, 저리 해석해서 기존과 다른 견해들을 내놓는 것에 필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필자가 저자의 책에 대해 갖는 생각은 딱 세 가지다. 

   
 

첫째는 아무리 일반 대중들을 위해 쓴 책이라 할지라도 너무 쉽게 다가서려고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기본적으로 역사 관련 교양서라면 어느 정도 전문성을 겸비해야 하는데, 저자는 전문적인 지식 전달의 방법으로 너무 대중적인 방식을 써서 오히려 책의 수준을 낮추는 듯한 안타까움이 늘 배어있다. 특히『전쟁의 발견』에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그 中道라는 부분에 점수를 준다면 그리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둘째는 식민사학에 대해 열심히 파헤쳐서 아무도 가지 않는 힘든 길을 가는 것은 인정한다.『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에서도 분명히 밝혔듯이, 그건 아무나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 문제는 너무 그쪽에 대한 생각이 강하다보니 생각하는 바가 極으로 치달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위에서 적었듯이 식민사학이 분명 예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고, 그 잔재가 있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늘 한결같지는 않지 않은가? 분명 변화가 있고 그 안에는 부정적인 변화와 함께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에서 저자는 늘 골고루 언급하지 않는다. 식민사학이 지금도 남아있고, 어떻게 남아있는지만 언급한다. 그래서 저자의 책을 보면 분명 아닌 것도 있는데, 왜 그렇다는 것만 강조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일반 대중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관련 학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 싶다. 

셋째는 고고학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이 눈에 띈다. 문제는 저자가 고고학 관련 논문이나 책은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저자가 고고학을 비판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비판의 대상은 고고학계의 중핵을 이루는 사람도 아니다(김태식 선생님처럼). 또한, 이전에 썼던『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에서도 언급했지만, 고고학계를 정식으로 비판하려면 그 학문적인 부분을 논리적으로 공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면모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고고학 논문이나 책을 비판하려면 당연히 그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으로 갖춰져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 없이 몇몇 해석, 고고학을 인용한 역사학자의 주장들만 갖고 고고학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실제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만 봐도 제대로 된 고고학 논문이나 책은 하나도 없었다. 저자의 고고학에 대한 생각은 이 책에서 쓴 것이 그대로 이후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뭐 나중에 다른 책의 서평을 쓴다해도 빠짐없이 나오긴 할 것 같다. 그렇다고 저자가 생각을 바꾸지도 않을 것 같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대 1차 사료인 고고자료와 문헌이 상충된다면 고고자료가 우선시 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나주 반남동 고분군 같은 녀석들 말이다. 이를 단순히『삼국사기』에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지 않는데, 혹은 백제가 이때까지도 마한을 합병 못 했다고...흥분할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수순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고대사 연구에 있어 고고자료를 빼놓고는 고대사를 온전히 복원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했을때 저자의 고고학에 대한 인식은 저자 스스로의 연구에 있어서도 마이너스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이상이다. 전체적으로 쓴지 좀 된 책이라 그런지 최근에 읽었던 것보다 필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나 이번 책에서는 전체적인 일관된 줄기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처럼 아예 식민사학에 대해 비판을 하는 글을 쓰려고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 책에서는 그것이 뚜렷하게 잡혀 있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책 전반적으로 그런 분위기는 풍겼지만 말이다. 그러다보니 초반부의『일본서기』비판에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식민사학 비판까지 이어지던 분위기가 중간 이후로 갑자기 고고학 비판으로 넘어가더니, 무령왕릉이 과장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고, 백제의 요서 경략설 등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임나 등으로 시작한 내용이 왜로 넘어가더니 이것이 백제로까지 연결된 셈인데, 이 과정에서는 식민사학에 대한 내용이 점점 엷어져 고고학에 대한 비판이 主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앞뒤 연결이 매끄럽지 못 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이 더 먼저 읽은『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과 비교되면서 더 크게 와닿았던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전체적인 역사에 대한 접근법이라든가, 저자의 시각은 이미 책을 통해서든, 온라인을 통해서든 여러번 접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그리고 식민사학 타도(?)를 위한 저자의 열의 또한 인정하지만, 필자가 위에서 말한 세가지는 안타까운 부분이다~라는 말로 끝맺음을 맺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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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 : 사라져버린 세계의 흔적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10
이베트 게라르 발리 지음 / 시공사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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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공 디스커버리를 꺼내 들었다. (필자의 게으름이 갈수록 커가는 듯. T.T) 이 책은 지난번에 읽었던 9권『공룡, 그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와 내용상 겹치는 부분이 꽤 있었다. 그럼에도 별 5개를 준 이유(지난번에는 별 4개)는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이 그만큼 더 풍부하기 때문이다. 미리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지난번 책에서는 공룡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만 다루고, 그 수준 또한 개략적인 내용들이 많았던 것에 비해 이번 책에서는 '고생물학'이라는 큰 틀 안에서 관련 내용들을 하나하나 다루고 있었으며, 내용 또한 상세했기 때문에 지난번보다 나았다는 생각이 들었다(실제로 책의 분량도 지난번 책에 비해 30여쪽이 더 많기도 했다).

책 표지를 펼치면 아주 흥미로운 내용부터 시작한다. 우리는 동토에서 통째로 얼어붙은 매머드에 대한 이야기를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마치 살아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그런 매머드를 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 매머드가 발견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었다(사실 이 내용은 필자도 처음 본 것이었다). 당시 매머드가 발견된 곳은 시베리아, 베레조프카 강변이었으며 그것을 발견한 라무트족 사냥꾼은 이르쿠츠크 총독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때는 1900년 8월. 이듬해 5월 과학 아카데미가 파견한 과학자들은 1만 6,000루블의 조사비를 들고 해당 조사지역까지 장장 6,000㎞를 이동했고, 9월 2일 비로소 매머드와 조우할 수 있었다(우와...정말 넓은 땅!). 9월 14일, 낙엽송 사이로 매머드 사체가 보였으며, 꽁꽁 얼어붙은 땅에서 매머드를 떠(?) 가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과학자들은 주변의 얼음을 녹이기로 결정했고, 매머드 위로 통나무집을 지었다(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참 대단했다). 얼음은 잘 녹았겠지만, 문제는 꽁꽁 얼어있던 매머드마저도 녹아버려 부패하기 시작했다는 문제가 생겼다(당연한 결과겠지만...당시 어쩔 수 없었으니). 이후 6주에 걸쳐 과학자들은 매머드 사체를 해체했고, 10월 10일 드디어 그 각각의 덩어리들을 가죽 포대에 집어넣고 이동할 준비를 끝마쳤다. 단 하루만에 가죽 포대는 꽁꽁 얼었고, 10월 15일 빙원 위에는 1톤이 넘는 매머드의 조각난 사체를 운반하는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순간 외찌가 떠올랐다. 외찌 역시 발견 직후 매우 거칠게 다뤄져 애초의 양호한 상태에 손상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클릭). 그런데 지금 매머드에 대한 일화를 보니 이건 뭐 더 심한 훼손이 이뤄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튼, 책장을 열어 한 4~5페이지를 읽었을 뿐인데, 상당히 흡입력이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필자가 잘 몰랐던 내용이기도 했고, 필자가 전공하는 고고학과 맞물려 당시 학문 수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책의 본문을 살펴봤다.

제1장은 <신화와 전설>이다. 암모나이트부터 시작해서 정체를 알 수 없어 거인의 것이라 추정되온 거대한 뼈(대부분 공룡과 매머드와 같은 이미 멸종된 대형동물들의 뼈), 용과 악령, 유니콘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왔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이런 말을 남긴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종류의 화석을 놓고 다양한 해석을 내려왔다. 이러한 해석들이 현대인의 눈에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비칠지도 모르며, 어처구니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을 설명하려 노력한 것이라는 사실만은 인정해야 한다. 지식이 부족해서 화석의 비밀을 밝히지는 못했지만, 마침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그 역사 속에서 화석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선학의 연구성과를 중요시 여기는 것이다. 한때 필자가 이미 출간된지 오래된 학회지(20년 된 것도 있고, 더러 10년 이상 된 것도 있었다)를 모으고, 읽는 것에 대해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연구성과는 의미가 없다. 새로운 학문적 성과가 계속 나오는데 요즘 것도 아닌 그것들을 왜 보냐?' 아니,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그럼 연구史는 왜 필요하며, 우리가 지금 연구하는 분야의 토대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모든 후학들이 無에서 有를 창출하고 있는 것인가? 저자는 예로부터 인류가 끊임없이 자신들을 둘러싼 알 수 없는 현상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 고생물학의 탄생과 발전을 가져왔다고 보고 있었다. 필자 역시 그에 동의했음은 물론이고.

르네상스 시절, 사람들은 그 알 수 없는 자연현상에 대해 이런저런 얼토당토않는 말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든가, 베르나르 팔리시와 같은 몇몇 선구자적인 인물들은 합리적인 접근법을 통해 화석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밖에 파비오 콜로나라든가, 닐스 스텐센과 같은 학자가 조개껍질 및 물고기 화석을 현재 생물과 비교해 그 정체를 밝혀내기 시작했다. 특히 스텐센은 '지층은 아래쪽에 있는 것일수록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라는 지질학의 기본원리를 기술하여, 화석을 발견장소에 따라 연대순으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화석의 역사를 아는 데에 있어 지질학이 빠질 수 없는 필수학문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그의 활동은 학자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과학적 발견과 신학적 신조를 양립시킬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몇몇 학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화석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자 사람들은 점점 새로운 궁금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현재 유럽에서 자취를 감춘 동물들은 그럼 과연 어디로 갔을까? 사람들은 바다 밑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홍수로 인해 모든 동물이 싹 다 멸종해버렸다는 이야기들도 나왔다. 19세기의 천변지이설(天變地異說)이라든가, 지구의 기후변화설, 인위적인 종의 절멸설 등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당시 사람들은『성경』에 기반한 역사를 연구했기 때문에 천지창조는 B.C 4004년에 일어났다는 얘기가 나오거나, 천치창조가 발생하고 대홍수가 나기까지 1600년이 경과했다거나 하는 이야기들을 믿었었다. 이는 지금이야 우스운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혁신적인 생각이었다(현대인 중에서도 1600년을 몸으로 체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런 와중에 지구의 나이가 7만 5천살이며, 아담과 이브가 태어난 것은 6,000~8,000년 전이라는 정말 대담한(?) 이야기를 하는 뷔퐁 같은 사람도 있긴 있었다. 그리고 카를 폰 린네가 屬과 種의 개념을 확립해서 수만 개에 달하는 동식물의 이름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제 점차 지질학, 생물학이라는 학문이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화석에 대한 연구 역시 점점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제3장 <과학자의 시대>가 되면 주인공으로 퀴비에가 등장한다. 그는 '대이변설'과 '종의 불변설'로 지구와 생물의 역사를 설명했다. 그는 '미지의 동물 사체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어째서 현존하는 동물 사체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지구에 어떠한 혁명(Revolution)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며, 그로 인하여 과거의 동물이 멸종되어 현존하는 동물에게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라고 보았다. 이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했는데,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 구체제를 완전히 뒤엎었던 것처럼 대이변이 일어나 오랫동안 존속되어 온 동물세계를 파괴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물론 그러한 대이변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퀴비에도 답변을 못 했다. 그리고 당시에 생물이 진화한다는 식의 생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고). 퀴비에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원정때 약탈해온 따오기 미라를 보고 5,000년 전의 유해와 현존하는 동종의 동물 사이에 다른 점이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5,000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지만 종은 변하지 않는다고 봐야 옳았다. 하지만 그런 퀴비에에 반대하는 생각이 나타났다. 바로 라마르크가 '생물변천설'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라마르크의 생각은 이후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에게 이어졌다. 물론 도르비니처럼 퀴비에의 '종의 불변설'에 경도된 학자도 있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학계는 크게 두가지 주장이 대립되고 있었다. 하지만 다윈이 등장하면서 학계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진화론이 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것이다.

그렇게 책은 제4장 <선사시대의 제왕>으로 넘어가는데, 이 부분의 내용이 앞의 9권과 비슷한 면이 많았다. 이구아나돈에 대한 잘못된 사람들의 생각, 공룡 화석을 발굴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활동하는 발굴단 등등. 그렇게 책은 마무리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모든 시공 디스커버리 책은 맨 뒷부분에 '기록과 증언'이라고 하여 앞의 올칼라 본문과 달리 부록식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장을 따로 마련해 두는데, 이 책에서는 그 부분이 白眉라고 불러도 좋을만큼 내용이 괜찮고 유익하다.

먼저 성군 루이와 레바논 화석이라는 것은 이 책에서 처음 봤는데, 십자군원정때 이미 유럽에 알려진 물고기 화석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미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런 화석들이 유럽에서 유통(?)되고, 음성적으로나마 소문이 들렸다는 생각을 하니 흥미로웠다. 그밖에 당대 천재라고 불렸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지층 및 화석에 대한 생각을 소개한 것도 재밌었다. 그 중 한 대목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 내용은「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수고(手稿)」의 일부분이다.

   
  조개껍질이 토양의 성질이나 하늘의 섭리로 만들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이여! 당신들의 머릿속에 조금이라도 이성이 존재한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조개껍질에는 성장의 흔적을 나타내는 선이 새겨져 있지 않은가. 또한 크든 작든 간에 조개들은 먹이를 먹어야만 성장이 가능하다. 그리고 먹이를 찾기 위해서는 이동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땅 속에서 이동을 한단 말인가.

조개껍질이 옛날부터 그곳에 있었다고, 그리고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토양과 계절의 장난 때문에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여! 나는 당신들한테 이렇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그런 힘이 작용한 것이라면 발견된 생물의 종류와 나이가 같아야 할 것이다. 종류와 나이가 각기 다른 다양한 생물들이 같은 장소에서 발견될 수 있는가. … 그리고 그것이 토양의 힘 때문이라면 '화살' 또는 '뱀의 혀'라고 불리는 물고기들의 이빨과 뼈가 그 곳에 섞여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바다생물이 해변으로 밀려온 게 아니라면, 그만큼 다양한 동물의 유해가 한곳에 집중되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산에서 발견된 조개껍질이 별의 작용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별의 어떠한 작용이 이토록 다양한 종류의 조개껍질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재밌다. ^^ 뭔가 요즘에도 다 빈치의 이러한 일갈(!)은 시사하는 바가 많은 것 같다(아마 필자랑 같은 느낌을 받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듯 싶다).

그리고 이 책에서 재밌는 점은 이 책의 저자인 이베트 게라르 발리가 자신이 썼던 다른 책이나 논문들(지질학 혹은 고생물학, 고고학 관련 서적들)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 실었다는 점이다. 대개 이 부분에는 옛날 학자들의 고전이라든가, 옛날 이야기, 소설 등이 주로 실리는데(본문의 객관적인 사실을 방증해 줄 수 있는 보충자료의 성격이랄까?), 저자 본인의 저술을 그대로 원용하는 것이 독특했다(물론 앞의 그러한 내용들도 같이 포함되어 있긴 하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이 책의 학문적 수준을 높여주는 효과를 나타냈고, 지식 습득이라는 측면에서 상당히 유용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특히 책 후반부에 수록된 <화석화의 과정>, <고생물학의 역할>, <돌에 남겨진 발자국>, <석탄숲>, <오모 계곡, 300만 년의 전시장>, <현대적인 화석발굴단>, <산업발전에 공헌하고 있는 화석들>, <미고생물학의 놀라운 세계>, <고생물학자의 임무와 기술> 등의 소챕터들은 상당히 유용했다(35쪽 가량의 분량인데 이는 전체 책의 무려 17%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고고학과 어떻게 보면 밀접한 연관이 있겠지만, 분명 자연과학적인 방법론이 더 많이 동원되는 학문이 바로 고생물학일 것이다. 특히 현장에서야 비슷한 면이 많겠지만, 연구실에서의 작업은 많이 다른 것이 사실이고. 고생물학에 대한 어려운 개설서보다는 이 책 한권으로 간단한 흥미를 유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공 디스커버리 편집부에서 일부러 9권과 10권을 이렇게 나란히 출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잘 짜여진 조합이라는 생각도 든다. 암튼, '작은 고추가 맵다'라는 말이 있듯이 작은 책자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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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김용만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저자가 오랜만에 고구려 관련 연구서적을 냈다. 인물평전의 형식을 띤 책으로는 『연개소문』이후로 2번째인 것 같다. 오래전부터 광개토태왕과 관련한 책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왔던 터에 이렇게 나오게 되니 반갑기도 하고, 어떤 책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되는 바도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진작에 책을 읽긴 했지만, 다른 일로 바빠 차일피일 서평쓰는 것을 미루다가 이제서야 이렇게 쓴다.

필자는 먼저 광개토태왕에 대한 책이 나왔다는 것 자체를 중요시하게 여긴다. 사람들은 한국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역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때 대부분 고구려를 꼽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구려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코 광개토태왕이 압도적인 1위를 하지 않을까 싶다. 즉, 어느 순간부턴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고구려-광개토태왕이라는 하나의 이미지가 고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중에 나온 광개토태왕 관련 서적들을 보면, 생각보다 적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필자가 갖고 있는 책만 봐도 윤명철의『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2006), 전경일의『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2007), 다케미쓰 마코토의『고구려 광개토대왕』(2007-번역서는 2009) 등이 전부다. 그에 반해 <광개토태왕비문(이하 비문으로 총칭)>에 대한 책은 한중일 삼국을 망라하여 상당히 많긴 하지만. 이처럼 관련된 문헌이나 자료가 별로 없어서 역사가 아니라 거의 신화 속에 머물러 있는 인물이 바로 광개토태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광개토태왕을 실제 역사 속의 실체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한 최초의 시도가 아닐까 한다. 더불어 이미 연개소문에 대해 그러한 작업을 했던 저자이기에, 이 책에서 실시한 복원 작업 또한 상당히 흥미로웠다.

책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살펴보면...저자는 크게 서론(1부. 광개토태왕 시대로 들어서기), 본론(2부.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 결론(3부. 고구려와 광개토태왕) 식으로 큰 틀을 정하고 그 안에 13개의 세부 장을 두었다. 1부에서는 광개토태왕의 등장 이전에 대한 역사적 개론, 그리고 비문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며, 2부에서는 우리가 자주 접했던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물론 이 중 상당 부분은 비문의 내용에 해당한다)이, 3부에서는 광개토태왕을 중심으로 본 당대 고구려와 우리들이 인식해야 할 중요한 사실들을 중점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필자가 흥미롭게 살펴본 부분들을 찬찬히 뜯어보겠다.





1. 1년의 연대 오차 수정

저자는 비문에 나오는 연대와『삼국사기』의 연대가 1년 차이가 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이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냈다. 이는 그동안 '어? 이건 뭐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니야? 1년 차이나는 거?'라고 쉽게 생각하고 넘어갔던 부분이었고, 필자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삼국사기』의 기록을 무조건 비문의 연대에서 1년씩 밀어버리면 안 된다고 한다. 지금껏 학계에서는 광개토태왕의 즉위년을 391년으로 당기고, 고국양왕의 말년 기록을 광개토태왕의 업적으로 인정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그렇게 되면 동시기 백제, 신라에서 벌어진 사건들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비문을 기준으로 광개토태왕의 즉위년을 391년(신묘)으로 보고, 내물 36년은 390년(경인), 실성 즉위년은 401년으로 수정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고구려는 400년 경자대원정을 통해 단순히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물리친 것에서 그친게 아니라 아예 신라 정권을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실성 즉위년을 402년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딱 1년의 오차를 수정함으로써 저자는 광개토태왕이 400년에 벌인 경자대원정의 목적이 보다 분명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더불어『삼국사기』에서 비문에 적힌 고구려의 신라 구원 작전을 의도적으로 감췄다고 보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이희진은『전쟁의 발견』에서 '신속한 작전 덕분에 한반도 남부에서 왜까지 걸쳐 있던 反 고구려 세력권이 붕괴되었다.'(131쪽)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5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한 이유에 대해 '왜군이 그정도 수준의 전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적을 압도하고, 주변 국가들에게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121~124쪽)'이라고 적고 있는데(그러면서 미군이 수십만 대병으로 그레나다를 침공한 사례를 들었는데, 정작 미군이 동원한 병력은 수십만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저자의 책을 보면서 뭔가 새로운 시각으로 당시 상황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보다 분명한 전쟁명분이나 목적을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자는 광개토태왕 즉위년, 거란 공격 시점, 한성백제와의 전쟁 기사(관미성 함락기사 포함), 후연의 목저성 침입 시기, 광개토태왕 서거년 등에 대해 연대를 조정하였다. 비문과 문헌의 오차를 수정함으로써, 당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난 연대표부터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필자는 책에 한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2. 담덕의 인간적인 면

저자는 담덕이 어린 시절,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고 어떤 상황 속에서 컸는지에 대해 서술하였다. 또한, 소수림왕-고국양왕의 재위시 있었던 사건들을 보다 상세히 살펴보면서 큰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담덕이 무엇을 물려받았는지를 언급하였다. 또한, 소수림왕이 실시한 여러 정책들에 대해 다소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예를 들면 율령반포가 갖는 의미, 태학 설립이 갖는 의미, 불교 공인이 갖는 의미 등). 막연히 문헌에 적혀 있는 문구를 그대로 해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당시 시대상황과 결부시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년 담덕의 인간적인 면모 또한 차근차근 그려지는 것 같았다.

3. 신라사에 끼친 고구려의 영향

저자는 고구려의 신라 구원 전쟁(400년 경자대원정)이 신라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라고 재차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신라가 고구려의 신민으로 지냈던 100여년의 시간은 퇴보가 아닌 발전을 위한 시기였으며, 신라사를 앞세우기 위해 고구려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다.

당시 신라에서는 마립간 호칭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시기가 고구려의 신민으로 있던 시기와 겹치며 또한 김씨 족단의 왕위 독점 시기와도 맞물린다. 이 마립간이라 불리는 지도자는 기존의 귀족층과는 한층 격이 높은 존재로 자리매김하는데 그 배후에는 고구려라는 강력한 조력자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경 등과 같은 선진 농경기술을 비롯해 거문고와 탈춤, 천문지식과 척도, 가람배치 및 율령 등 다방면에 걸쳐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신라 중기 지방관의 명칭이 고구려 것과 동일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개중에는 각배와 같은 중앙아시아의 문화양상도 있는데, 저자는 고구려가 중국이나 서역에서 받아들인 문화를 신라에 전파해준 중개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저자는 광개토태왕의 남해안 원정은 고구려의 문화와 제도를 한반도 남쪽에 광범위하게 전파해 삼국 간 일체감을 심어줌으로써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은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물론 신라에 비해 가야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 했지만). 기존에는 단순히 정치-군사-외교적인 관점에서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했고, 그 결과 어떠어떠한 일이 벌어졌다...라고 접근했지만 저자는 보다 거시적인 안목, 새로운 안목으로 당시 사건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4. 보다 구체화된 후연과의 전쟁 과정

250~263쪽에 걸쳐 저자는 후연과 고구려와의 전쟁 과정을 정리하고 있다. 뭐 별거 없겠지~하고 넘어가려는데 처음 보는 내용이 등장했다. 404년 고구려가 후연의 연군을 공격해 100명을 죽인 것에 대해 지배선은 그 곳에 있던 모용황의 사당을 광개토태왕이 부수고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그러나 저자는 더 나아가 당시 고구려와 후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그 결과 후연군 5,000명이 죽으면서 후연이 패배했다고 해석했다(저자가 인용한『자치통감』의 기록은 그간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영토 확보까지 이어지지는 못 했고 말이다. 405년 1월 곧바로 후연이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한 것을 보면 말이다.

저자는 왜 연군까지 진출한 고구려가 바로 후연에게 요동성을 공격받아야 했는지? 에 대해 404년 11~12월 무렵 왜군이 고구려 대방계를 침입했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즉, 당시 고구려는 2개의 전선을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대방계에서 곧 왜군을 몰아내고 후연과의 전쟁에 전념한다. 그런데 뒤이어 등장한 기록들은 어째 이상하기만 하다. 404년 11월 사냥을 나섰다가 호랑이와 이리에게 물려죽거나 얼어죽은 병사가 5,000명이라는 기록, 405년 1월 요동성 공격에서 후퇴하다가 큰비와 눈을 만나 대다수의 병사가 죽었다는 기록, 406년 1월 3,000리나 행군해 지친데다 추위에 시달린 병사들의 시체가 길을 덮었다는 기록들 모두. 이를 두고 저자는 고구려와 후연간의 전쟁 기록이 의도적으로 은폐되었고, 오늘날 이렇게 남게 되었다고 보았다. 더불어 요서 의현지방에서 발견된 고구려 불상을 통해 이 시기 고구려가 대릉하 일대까지 진출했다고 주장했다.

기존 연구에 비해 후연과의 전쟁 과정이 보다 구체화됨에 따라 당시 고구려의 대외전략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5. 광개토태왕이 남긴 vision

광개토태왕은 고구려를 王國에서 帝國으로 만든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혼자 그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은 아니다(불가능하기도 했고). 저자는 그래서 소수림왕-고국양왕으로 이어지는 선대 왕들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했으며, 광개토태왕의 신하들과 그러한 유능한 신하들이 생겨나게 된 배경(율령 반포, 태학 설립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광개토태왕이 만능 엔터테이너에다가 슈퍼맨이었다~라고 보는 기존의 신화적 이미지가 많이 변화된 것이 사실이다. 마치 한글을 세종대왕 혼자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상식화되면서 세종대왕을 한국사상 둘도 없는 위대한 군주로 평가하는 시각이 많이 변화한 것처럼 말이다. 그게 아마 이 책에서 저자가 추구하는 첫번째 목표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두번째 목표는 바로 광개토태왕이 행한 업적을 제대로 살펴보자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 필자는 vision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는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고, 새로운 이상과 꿈을 심어주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한걸음 한걸음의 내딛음은 곧 고구려라는 국가의 vision이 되었고, 고구려가 제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물론 그가 행한 內治의 흔적은 기록에 많이 남아있지 않다. 저자도 최대한 기록을 짜내어 몇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분명 그보다 더 많은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고, 그 결과 고구려는 富國强兵을 이루었다. 그리고 오늘날 광개토태왕의 업적은 어떤 식으로 다가서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단순히 국민 정서를 자극하기 위해서, 공허한 외침에만 그칠 '만주는 우리땅!'과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광개토태왕이 거론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해서 고구려가 제국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생각의 場을 넓혀주는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상 몇가지 부분에서 필자가 흥미롭게 봤던 내용들을 언급해봤다.

광개토태왕은 진즉에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져야 했지만, 1,500년이 넘어서야 조금씩 그의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의 실체를 올바르게 다듬는 작업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러한 작업의 초석이 되기에 충분하며, 이제 앞으로 '영웅' 광개토태왕이 아닌 '인간' 광개토태왕의 면모를 밝혀내는 작업들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덧글.

죽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행복하다고 선포하지 말지어다. 한 인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다만 죽음의 순간일 뿐이다.

『외경서』, 시라시드 11:27~28

광개토태왕이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거련은 <광개토태왕비>를 세워 아버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의 어떤 면모를 기억해야 하는지 고구려와 주변 국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고구려 역대 군주 중 이런 아버지와 아들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이 넘는 기간동안 그러한 기억의 재생산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신비로운 일이기까지 하다. 그 신비로운 현상 속에서 광개토태왕이 신화적 인물이 됐는지도 모른다. 이제 진정으로 광개토태왕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 그가 살아 생전 행복했고, 여러 백성들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군주였음을 널리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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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년의 폭발 - 문명은 어떻게 인류 진화를 가속화시켰는가
그레고리 코크란.헨리 하펜딩 지음, 김명주 옮김 / 글항아리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요 근래 읽은 또 하나의 책이다. 또한, 개인적으로 이 책 역시 바로 앞에 소개했던『무문자사회의 역사』만큼이나 괜찮은 책이라 생각한다. 

이 책을 쓴 2명의 저자는 그레고리 코크란과 헨리 파펜딩이다. 전자는 미국 유타대학 인류학과 부교수로서 '항공우주산업의 현장에서 레이저 및 화상정보 분석처리 연구를 해왔다'고 한다. 양자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까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자연과학적인 방법론을 다루는데 상당히 능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후자는 특훈교수(distinguished professor) 자격으로 유타대학 인류학과에 재직 중이며 현장 인류학자이자 저명한 유전학자라고 한다. 얼마전 소개했던 앨리스 로버트의『인류의 위대한 여행』에서 보여준 시각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탁월한 공로를 세웠다고 한다(아마 자연과학적인 분석 혹은 세계 고고학 · 인류학계의 입장을 살펴본다면 인류의 아프리카 기원론은 정설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더불어 이 책을 번역한 김명주 역시『다윈평전』,『노래하는 네안데르탈인』,『생명 최초의 30억년』,『한 치의 의심도 없는 진화 이야기』등 관련 저서를 어렷 번역한 바 있어 이 책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주기도 했다. 

책은 목차만 봐도 독자의 구미를 확 끌어당기는 맛(?)이 있다! 

제 1장의 제목은 '무지와 통념이 불러일으킨 오류'이며, 제 2장은 '내 안의 네안데르탈인'이다. 제 5장의 제목은 '유전자들의 대이동-결혼에서 해적까지'이며, 제 7장의 제목은 '중세의 진화 :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어떻게 똑똑해졌는가'이다. 일단 각 장의 제목만 봐도 기존에 봤던 책들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들을 담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책은 보는 내내 필자가 가진 생각의 상당부분이 고정관념이며 쓸떼없는 아집이라고 꼬집어주고 있었다. 

음~일단 전체적인 책의 구성이 짤막한 챕터가 수십개 나열된 형식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내용을 일일히 거론했다가는 책에 있는 내용을 요약 정리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체적인 책의 내용 중 필자가 흥미롭게 봤던 부분을 거론하고, 그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간략하게 제시한 뒤, 그에 대한 필자의 생각 혹은 느낌을 정리하는 식으로 서술해보도록 하겠다. 아마 그렇다고 해도 적지 않은 분량이 나올 것 같지만, 일단 필자가 특히 주목해서 읽었던 부분들 위주로 서술해보도록 하겠다. 

먼저 저자들은 인간은 옛날보다 100배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한다. 즉, 인류의 진화가 지난 1만년간 느려지거나 멈추기는 커녕 가속화되었으며, 지금껏 인류가 존재해온 600만 년 동안의 평균보다 약 100배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하겠다는 것이다(정말 당찬 포부를 책 첫문단, 첫줄부터 밝히고 있다!). 마치 산업혁명 이후로 사회가 기계화, 전자화, 첨단화가 되면서 그 발전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인류가 제대로 된 PC를 만들기까지 엄청나게 긴 시간이 지났지만, 이제 매일매일 신제품 PC가 쏟아지고 있는 상황을 한번 생각해보라. 이것만 보더라도 분명 인류는 어느 한계점을 뛰어넘은 뒤부터는 다음 한계점까지 보다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것이 맞다고 볼 수 있다. 

거기다가 저자들은 이런 이야기도 한다. 진화적 변화는 본래 매우 느리게 일어나기 때문에 중대한 변화는 수백만 년이 걸린다고 보는 것이 통념이지만, 화석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연선택이 생각보다 꽤 빠르게 일어날 수 있으며, 과거는 정체나 마찬가지(환경에 잘 적응된 집단들의 경우)인 긴 시간들과 이따금씩 일어나는 매우 급격한 변화들로 채워져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의 급격한 변화는 시간이 너무 짧아 화석화되는 경우가 드물다고도. 

그러면서 몇가지 사례를 제시한다(솔직히 이 내용만 보고도 아! 내가 그동안 잘못 생각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첫번째는 바로 늑대와 개다. 개는 약 15,000년 전에 늑대에서 가축화되었다. 그리고 최근 우리가 알고 있는 품종들이 변화한 것은 채 200년도 안 되었다고 한다(늑대와 그레이트 데인과 치와와를 한번 비교해보자. 이들이 변화되기 시작한 것은 4~5만년 전이 아니다. 그런데 외계인이 봤을때 이 2종의 동물을 서로 같은 종으로 볼 수 있을까??). 더 극단적인 예로 러시아의 과학자 드미트리 벨랴예프가 겨우 40년만에 가축화한 여우를 만들어낸 것도 제시하고 있다. 옥수수 또한 테오신트라는 야생초에서 유래했지만, 7천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를 겪어 현재 이 둘이 근연초라고 보기에는 너무 큰 거리감이 있다. 11,500년 전에 빙하기가 끝나면서(혹은 잠시 멈추면서) 코끼리의 키는 3.6m에서 2.6m로 줄어든 것도(더 작은 음식을 먹고 더 빨리 번식하는 것이 종에게 유리했으므로) 하나의 사례였다. 

이러한 변화들에 대해 저자들은 아주 작은 변화가 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즉, 우연에 의한 변화까지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식이다. 비슷한 예로 한때 영화로 널리 알려진 <나비효과>를 꼽을 수 있겠다. 물론 이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가설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과학적으로 검증만 된다고 하면 충분히 설득력도 갖출 수가 있다. 이런 부분들은 확실히 고고학적으로는 검증이 불가능하다. 저자들이 언급한 것처럼 짧은 기간의 변화상은 골격과 같은 실물자료에 잘 반영되지 않을 뿐더러, 설사 우연히 그런 것들이 반영된 자료가 확인되었다 한들 그것을 일반화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잇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러한 자연과학적인 분석방법론이나 접근법은 분명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 학계에서 이 부분에 대한 치밀한 연구나 접근은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인 것 같고, 해당 전문가가 많이 배출되지도 않는 것 같다. 아마 학계 풍토의 차이일 수도 있고, 학문 수준의 차이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암튼, 놀라움은 잠시 접어두고 몇개 부분에 대해서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자. 



1. 농경과 유전자 폭발  

저자들은 농경에 유리한 유전자가 있다고 말한다. 단, 그것이 단순하게 '역사상 농경이 빨리 시작된 사람들에게 그러한 유전자가 있으므로 농경이 빨리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라고 끝맺고 끝나는 문제가 아님을 여기에서 지적하고 있다. 농경은 분명 기존의 수렵채집인들에게 새로운 생활방식을 떠안겼고(새로운 식이, 새로운 질병, 새로운 사회, 장기적인 계획의 새로운 이점들), 오랫동안 수렵채집 활동에 적응해온 사람들은 농경에 잘 적응하지 못 했다고 한다. 그러나 농경은 그러한 새로운 생계를 받아들이는 개체군 크기를 엄청나게 늘림으로써 적응적인 돌연변이의 생산을 크게 늘려나갔다. 즉, 이전에 비해 새로운 문제들도 많이 생겼지만, 새로운 해법들(이 책에서 말하는 돌연변이는 다소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도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총, 균, 쇠』에도 나오는 얘기로 저자들 역시 그 책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큰 지역이나 개체군은 곧 더 많은 잠재적 발명가들, 더 많은 경쟁하는 사회들, 더 많은 혁신들이 있다는 뜻이다. 잘 돌아가지 않는 사회들은 경쟁 사회들에 의해 곧바로 제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큰 개체군에는 단순히 이러한 사회적 변혁들뿐만 아니라 '유전적 혁신' 또한 많다는 것을(그리고 이것이 최근의 인간의 진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도구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부분이 필자에게는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이론을 보면서 대단하다고 느꼈었는데,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모자란 무언가를 이 책을 보면서 채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젖흡혈귀(우유를 마셔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표현한다. 아주 재밌는 표현이며 또한 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 얘기도 나오고, 저자들은 락타아제를 만드는 돌연변이가 결국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 더 유리한 사회를 만들 수 있게끔 만들었다는 얘기를 한다.  

정착생활, 그리고 농경에 필요한 가축들과의 생활은 분명 인류에게 전염병이라는 무시무시한 문제점을 안겨주었다. 또한 새로운 농작물과 새로운 식사 준비 방법들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이전보다 덜 풍부한 영양분들을 제공해주었다. 그럼에도 왜 인류는 농경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켰고, 농경에 적응해 왔을까? 인류는 술을 마심으로써 기본적인 전염병의 내성이 생기게끔 했으며(당연히 알콜중독에 대한 내성 또한 생겨났다), 쌀을 도정하거나 새로운 농작물을 개발함으로써 균형잡힌 식사가 가능하게끔 노력했다. 뭔가 끊임없이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청동기시대 후기 송국리문화를 설명하는데 있어 흔히 얘기하는 것들이 수전체계다. 논농사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고, 그러한 송국리문화는 일본 열도로 전파되어 야요이시대를 열었다. 그럼 여기에서 살펴볼 것. 이러한 논농사 문화를 받아들이고 발전시키는 데에 있어 분명 장단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장점이 있었기에 사회는 그에 따라 변화했을 것이고, 그럼 그러한 부분들이 고고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할까? 한번 살펴볼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단순히 고고자료상 이러이러한 변화가 있었으니, 당시 사회는 논농사가 발전되었다~라는 결론이 아니라 어떠한 원인과 이유로 그러한 변화들이 생겨났는지 보다 근원적인 부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서 저자들은 멜서스의『인구론』(이 책 한번 읽어봐야겠다. 젠장, 아직까지 이런 책도 한번 안 읽어보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니...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다)을 거론하고 있다. 인구와 경제구조 등에 대한 이야기인데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또한, 엘리트의 등장이라든가 농경을 채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인구는 계속 정비례의 곡선을 그리며 확장되거나 발전되지 않았는가? 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자들은 이야기한다. 선사시대는 그 이후에 비해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던 사회였으며,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항상 적정 수준의 인구를 유지시켜왔다는 것이다(하지만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선사시대가 아주 평화로웠다고 보는 경향이 크다). 그리고 농경이 시작되면서 문명이 발생하고, 국가가 생겨남으로써 폭력과 전쟁에 의한 인구 상실(?)은 줄어들게 된다. 단! 이제는 기근과 영양실조, 자연재해에 의한 인구 상실이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엘리트가 아닌 하층민은 현상 유지 수준의 자식들을 길러낼 수 없었고, 인구는 생각한 것만큼 증가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아주 간단하면서도 적절한 상관관계를 보여주고 있어 필자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암튼...농경에 대해서 신선한 얘기들을 한 부분들이 있어 좋았다.  

2. 유전자들의 대이동  

저자들은 칭기즈칸이라는 한 사람의 정복으로 인해 오늘날 그 유전자는 세계 각지에 상당히 널리 퍼져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그 한 사람의 행동은 세계사적으로 보면 미미한 것일지라도 그 결과는 오늘날 무시할 수 없다는 의미인 셈이다. 이러한 군사적 움직임은 분명 유리한 대립유전자들이 먼 거리와 지리적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해주었고, 그러한 또 다른 사례는 바로 알렉산더 대왕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단순히 일반적인 지역적 결혼의 결과로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렇게 빨리 유전자를 넓은 범위까지 퍼뜨리는 것이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그러한 경우는 고대에도 종종 보였다. 아시리아와 사르곤 2세 등이 추진한 강제이주가 바로 그것이다. 최근에 유고슬라비아나 체첸 공화국에서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그와 더불어 반달족과 베르베르족에 대한 이야기도 제시하고 있다. 반달족은 기원전 120년 경 슐레지엔으로 이주했으며, 3세기 무렵에는 루마니아 서부와 헝가리까지, 그 다음에는 로마 영토 내에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5세기 무렵 프랑스를 유린했고 곧 피레네 산맥을 넘어 포루투갈과 갈리시아까지 이동했다. 그리고 곧 스페인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휘하의 벨리사리우스는 반달족을 격파했고, 반달족은 여기저기로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유전자는 오늘날 북아프리카 각지로 퍼져나가 베르베르족에게 푸른 눈의 유전자를 남겨줬다는 것이다. 1만년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푸른 눈 유전자, 그리고 오늘날 전세계적으로도 흔하지 않은 푸른 눈 유전자가 북유럽의 발트해를 중심으로 모로코, 사하라 사막, 자그로스 산맥의 쿠드르족, 아프가니스탄에서 나타나는 이유를 저자들은 반달족을 통해 설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해적이다. 예전에 시오노 나나미의『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를 소개했던 적이 있다. 1500~1800년 무렵 회교도 해적들에 의해 노예로 사로잡힌 유럽인은 100만명이 넘었다고 하는데, 이때 남자 노예들은 대부분 죽도록 일했기 때문에 유전자를 남기지 못 했지만, 여자 노예들은 대개 하렘에 들어옴으로써 유전자 풀에 기여했다는 것이 저자들의 주장이다. 아랍인들이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서 잡은 노예들의 경우에도 비슷한 패턴이 나타난다. mtDNA를 보면 중동에 사는 아랍인들의 모계 혈통의 약 5%가 아프리카계지만, 아프리카 기원의 Y 염색체는 극히 드물다(Y 염색체는 남자가 갖고 있는 X, Y 염색체 중 하나로 아들을 통해 유전된다. 그에 반해 미토콘드리아 DNA는 여성에게만 확인되는 유전자다. 양자의 차이점 혹은 상태를 통해 분명한 유전자의 이동에 대해 밝힐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저자들은 유전자의 이동을 따라 역사적인 사실들을 추론하고 검증해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는 신대륙과 구대륙의 만남으로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저자들은 생물학에 승자의 율법이 있다고 보고 있다. 현대 인류는 고인류를 대체했고, 반투족은 부시먼과 그밖의 아프리카 원주민을 몰아내면서 팽창했고, 투르크-몽고인은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을 차지했던 이란어를 쓰는 사람들을 몰아내면서 확장했다. 이때 혈통의 혼한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대다수의 주된 경우는 '대체'였다. 흔히 말하는 '주민 교체'인 셈이다. 그럼 왜 어떤 집단은 성공했고, 어떤 집단은 실패했는가? 일반적으로 승리하는 자의 이점은 문화적인 것(무기, 전술, 정치조직, 농경방식 등)으로 많이 이해한다. 하지만 이것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학습이 가능한 것들이다(예를 들어 이집트를 침략한 힉소스를 곧 이집트인들이 몰아낸 것과 같이). 그렇지만 저자들은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 생물학적 능력들은 모방하거나 획득할 수 없다고 말이다(네안데르탈인과 같은 고인류가 현대 인류의 문화적 속성들 중 일부를 모방했고, 그것이 샤텔페롱 문화에 남겨졌지만 결국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한 것처럼 말이다). 이 점이 이 책의 주된 내용이며, 필자가 아주 아주 신선하게 받아들인 부분이 아닐까 싶다.  

3. 아슈케나지 유대인과 특화된 유전자  

저자들의 주장이다. 누가 보면 뭐야 이거? 생물학적, 유전학적으로 특정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잘났다~고 하는 것은 인종차별주의 아니야? 라고 할 수도 있다(실제 인터넷 서점의 어떤 리뷰에서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다. 그 분은 굉장히 불쾌했다고 한다). 필자 또한 처음에는 뭐야 이거? 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돈을 잘 벌고, 똑똑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유전학적으로도 그게 맞다...는 뜻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들은 분명히 얘기한다.  

어째서 로마 제국 시절의 유대인들이 이례적으로 다른 민족에 비해 높은 지능을 가졌거나, 잘났다는 얘기는 없는데 특정 시기 이후로는 그런 증거들이 나타날까? 하고 말이다. 그에 대한 답은 이렇다. 특정 시기 이후에 유대인에게 어떤 사회적인 억압 혹은 제약이 따랐고, 그로 인해 유대인이 똑똑해질 수 밖에 없어졌고, 그 똑똑한 유전자가 지금까지도 계속 유전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말이다. 그럼 이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대체 어떤 민족들일까? 알프스 산맥과 피레네 산맥 북쪽에 살고 있는 이들은 8~9세기 무렵 역사기록에 나타난다. 그럼 그 이전은?? 그러면서 저자들은 3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첫째는 아슈케나지 유대인 혹은 그 중의 일부가 로마 시대부터 프랑스 및 라인란트에 살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629년 프랑크 왕국의 다고베르트 왕은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면하려면 개종하거나 떠나라는 이야기를 했고, 이후 150여년동안 프랑스에서 그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성이 없다. 둘째는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같은 먼 이슬람 땅에서 기원한 유대인 상인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카롤링거 왕조가 보호해줬고, 그들은 동방의 값비싼 물품들을 유럽으로 갖고 왔다. 셋째는 가장 신빙성이 있는데 이들이 남유럽, 즉 이탈리아에서 진출했다는 것이다(그중 하나가 917년 이탈리아 루카에서 마인츠로 이주한 칼로니모스 가문이다).  

암튼, 일반적으로 유대인은 다양한 수공예와 농경에 종사했었다. 그런데 아슈케나지 유대인만은 그렇지 않았다. 그럼 그들은 뭘 했나? 그들은 원거리 교역 및 고리대금업(무역과 금융)을 담당했었다. 아주 독특하게도. 당시 기독교 사회에서 금지했던 분야에 이들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뛰어들었고 블루오션 부분에서 성공을 거뒀다는 것이다. 또한 유럽에서 박해를 받아 쫓겨나던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지방에 들어가 그 나라의 근대화와 재건에 도움을 주면서 다시금 번영을 누리게 된다. 그 과정에서 부유해진 이들은 더 많은 자식을 남겼고(다른 유대인에 비해), 더 많은 유전자를 번성시켰다. 단, 그들은 다른 집단과의 결혼을 금지했고, 유대교의 배타적인 부분도 이를 가속화했기 때문에 그들의 유전자가 더 넓은 범위까지 확산되거나 다른 유전자와 섞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물론 유대인은 아슈케나지 유대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남쪽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지역사회들을 포함하는 범위에도 유대인들은 존재한다. 다만 차이라면 그들은 이슬람 사회에 속한 유대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슈케나지 유대인처럼 화이트칼라에만 집중적으로 종사할 수 없었다. 즉, 같은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사회적-문화적으로 차이가 있었고, 곧 그것이 유전적 차이로까지 연결된다는 것을 저자들은 주장하고 있었다.  

그럼 왜 같은 시기 서유럽의 다른 인종(아슈케나지 유대인 이외의 유럽인)들은 그렇지 못 했을까? 그들은 더 많은 유럽인과 개방적인 유전자 교환 및 혼합을 이뤄냈고(종교적으로나, 결혼에 있어서 더 개방적이었으므로) 그 유전자는 대부분이 농민이었을 다른 유럽인과 섞였다. 당연히 특수한 상황에서 유전이 계속 이뤄진 아슈케나지 유대인과는 차이가 났을 것이다. 거기다가 같은 유대인 중 이슬람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고. 그래서 오늘날 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은 아주 특수한 유전자 보존 및 전파에 의해 의학계와 법조계, 학계 등에서 강한 힘을 보이고 있는 것이었다(마치 영화 <타임머신>에 나오는 엘로이족이 떠올랐다. 그들은 고도로 지능화된 족속으로 신체적으로 우수한 머록족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는 미래 세계의 모습이기도 했고. 인간은 그들에게 지배당하는 사냥감 정도?). 오늘날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수학과 문학 등에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만, 재현 회화, 조각, 건축에서는 보통이다. 이 또한 그들의 유전자가 특화되었음을 알려주는 근거라 할 수 있겠다.  

이 부분도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줬다. 어느 특정 분야에 특화된 집단이 있고, 그들의 유전자가 지속적으로 후세에까지 전해졌다면 기존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양궁 선수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탑 클래스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고대 東夷라는 단어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는 뭐 이런 이야기들처럼 말이다. ^^


전체적으로 상당히 재밌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짤막짤막한 소주제의 챕터들이 여럿 모여 큰 장을 이루고 있기에 상당히 지루하지 않게 많은 내용들을 머릿 속에 담을 수 있는 책이다. 더군다나 어렵게 느껴질 법도 한 내용을 그런 식으로 접할 수 있으니 더욱 더 효율적(?)으로 책 속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가볍게 읽을만한 책은 아니지만, 한번쯤 시간내서 읽을만한 책인 것 같다.  

덧글. 원서의 표지보다 번역서의 표지가 더 마음에 드는 책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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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자 사회의 역사 - 서아프리카 모시족의 사례를 중심으로 논형학술총서 7
가와다 준조 지음, 임경택 옮김 / 논형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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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읽고서 서평을 못 쓴 책 하나를 더 소개하고자 한다. 읽은지는 한참 됐는데, 책 내용이 어렵기도 하고 혼자 생각해야 할 부분도 있어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느라 여지껏 서평을 못 쓴 것 같다. 그런데 더 시간을 뒀다가는 책을 한번 더 읽어야 할 판이라서 지금에라도 필자의 생각을 정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실제로 이 책을 2번 읽었는데, 이런저런 생각할 꺼리를 많이 주긴 했다).

이 책은 일단, 국내 학계에서 쉽게 나오기 힘든 내용의 책이다. 저자인 가와다 준조는 동경대 문화인류학과 출신으로 서아프리카에 직접 가서 모시족을 중심으로 한 인류학 자료를 수집해 이 책을 썼다. 아직까지 필자는 국내 인류학자 중에서 이렇게 해외에 직접 가서 정리한 인류학 자료를 본 적이 없다(물론 필자가 접한 자료가 많지 않은 탓이 크겠지만. ^^;;). 그것도 아프리카의 자료를 접해서 그것을 '무문자사회'와 연결시켜 해석했다니. 무문자사회라는 구분 자체가 신선하기도 했고, 그런 사회에 대해 연구하기 위해 서아프리카의 인류학 자료를 정리한 것도 참신했다. 단순히 국내 학계에서 진행되지 않은 연구가 진행되었던 것도 있지만, 일단 제목부터 필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아프리카에서 19세기 제국주의 문화의 확산과 함께 문자사회의 영향력이 확대된 것은 분명 한국 고대사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 한국사에 있어 문자사회가 시작된 것은 언제쯤부터일까? 라는 생각과 직결될 수 있다. 경남 창원의 <다호리 유적>을 보면 기원전 1세기 혹은 기원전후한 시기에 이미 붓(그리고 붓과 함께 한자가 같이 전해졌을 가능성은 아주아주 높다)은 한반도 남부 끝단까지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발견된 유물이 그 정도인 걸 보면, 사라져 없어진 붓은 더 많았을 것이고 창원 다호리에 살던 당대인들의 문자 생활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 가능할 것이다. 물론 그 이전 고조선 혹은 위만조선 시절에도 모피교역 따위와 맞물려 한-중간 교류가 꾸준히 진행되었던 것은 사실이다(해당 글 강인욱 선생님 발표 부분 클릭). 하지만 문자가 없어도 교역이라든가, 원거리 상거래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조선 혹은 위만조선의 상거래가 반드시 한자를 동반한다고 볼 수는 없다. 일단, 직접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에(물론 당시 고조선-위만조선 시절의 한-중 사이에 한자를 매개로 한 상거래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지만). 그렇게 봤을때 일단 한국 고대사에서 한자가 폭넓게, 일상적으로 활용된 것은 삼국시대로 봐도 무방하겠다. 그렇다면 그 이전 사회의 한국 고대사는 '문자사회'였을까? 아니면 '무문자사회'였을까? 혹은 삼국시대 초기에 한자가 폭넓게 쓰였다 하더라도 그것을 곧 '문자사회'로 볼 수 있을까? '무문자사회'로 볼 수 있을까? 그러한 궁금증과 의문을 갖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일단 목차만 봐도 이 책의 내용이 상당히 흥미로운 것들을 많이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첫 머리에
2. 비문자 사료의 일반적 성격
3. 문자 기록과 구연 전승
4. 모시족의 경우
5. 계보의 병합
6. 절대연대의 문제
7. 역사의 출발점
8. 반복되는 주제
9. 구연 전승의 정형화
10. 수장의 지위 계승
11. 역사 전승과 사회 정치조직
12. 이데올로기 - 표현으로서의 역사 전승
13. 역사 전승의 '객관성'
14. 역사 전승의 비교
15. 제도의 비교
16. 발전단계의 문제
17. '전통적' 사회라는 허상
18. 신화로서의 역사 연표로서의 역사19. 문자사회
20. 맺음말

1장과 2장부터 이미 책의 내용은 필자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첫머리에서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세계사라는 용어가 본래적 의미를 가지려면 무문자사회의 역사는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문자로 기록된 과거를 가진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의 역사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인지, 구연 전승의 유무와 사회 구성원의 역사 의식 사이에 관련이 있는 것인지, (만일 있다면) 그러한 역사 의식의 차이가 사회구조 및 변화와 어떠한 상호작용을 가지는지 등이 세계사의 일부분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맞는 말이다. 인류는 언어라는 것을 보편적으로 사용하지만, 문자라는 것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이는 저자도 얘기하고 있고 필자 또한 동의한다. 얼마전 동티모르에서 자신들의 언어를 한글로 표현한다는 기사가 있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40765). 이처럼 언어는 있지만, 이를 표현할 문자가 없는 집단은 상당히 많다. 오히려 문자가 없는 집단이 보편적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런데 왜 인류는 문자로 기록된 역사, 문자사회를 보편적으로 보고 세계사 속에서 문자사회만을 주목하는 것일까? 저자는 2장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고고학 연구에서는 연구자가 단편적인 과거의 유물에 의미를 부여하여 자료 간의 상호관계를 해석하려고 하지만, 구연 전승의 경우에 연구자는 우선 철저히 해석되어진 것들과 갑자기 맞닥뜨리게 된다. 그리하여 연구자는 파편을 맞붙여서 항아리를 복원하는 대신 이미 완성되어 있는 '해석'의 항아리를 파괴하고 그것을 다시 변경하여 과거의 파편을 하나씩 골라내고 가려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다만 이 '해석'이라는 것이 전승을 갖고 있는 사회의 성원들에 의한 사물과 현상을 안으로부터 해석한 것이기에, 연구자는 일단 자료의 단편적인 부분들을 골라내어 정리한 후에 연구자 자신의 해석을 설정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고고학과 인류학(그것도 신화와 관련한)의 방법론 차이에 대해 적절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저자는 고고학으로 밝혀내기 힘든 무문자사회에 대해 인류학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하나하나 예시를 들어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첫머리에 아주 흥미로운 사례를 하나 소개하고 있다.




모시족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왕조를 수립했다고 보이는 남부 모시족의 텐코도고 왕의 궁정에서 필자가 역사 전승의 채록을 막 시작했던 때의 일이다. 왕의 계보는 주민들의 주요 작물인 수수의 수확 후 지내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비롯하여 중요한 제사 의식 때 정중하게 낭송된다. … 이윽고 안면이 있는 벤다(이야기꾼 혹은 악사)들이 나타나 우산 밑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큰 표주박에 소가죽을 붙인 큰 북을 양손으로 장단을 맞춰 두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곧 녹음을 시작했지만, 전주로 생각되는 부분이 너무 길어져서 낭송에 대비하여 테이프를 절약하기 위해 도중에 녹음을 중단하고 … 그렇게 40여 분 정도 되었을까? 내내 진지한 표정으로 큰 북의 연주를 끝낸 벤다는, 편안하게 큰 숨을 쉬고 땀을 닦으며 나에게 "녹음은 잘 했겠죠?"라고 말하고 "그럼~" 하며 일어나 큰북을 메고 문을 나가 버렸다. … 나이 많은 하인에게 "벤다가 언제 다시 돌아와서 계보의 낭송을 하나요?" 라고 부자연스럽게 더듬거리는 말씨로 묻자, 그는 "낭송이라면 이제 막 끝나지 않았느나?" 라고 하였다. … 큰 북의 소리만으로 역대 왕에 대한 이야기와 각각의 왕들에 대한 찬미를 표현한다는 것을 그후의 여러 기회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일이란 말인가. 책을 겨우 30여쪽 읽었을때 나오는 이 사례를 보고 필자는 멍~하니 생각했다. 소리만 갖고 역대 왕의 계보를 읊고, 그것이 제사에서 중요한 의식이라고? 물론 저자는 뒤이어 얘기한다. 왕이라든가 노인(그 부족의 원로 혹은 장로를 의미)들이 그 소리의 의미를 전부 100% 이해하지는 못 하지만 필요한 부분은 알고 있다고(그래서 옆에서 듣고 있던 왕이 "지금 왕의 것을 연주하고 있다."라고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한다). 이처럼 아프리카에서는 북의 소리(음악)만 갖고 많은 이야기들을 한다고 한다. 요루바족의 케투 왕은 즉위식에서 그 부족의 시조인 알라케투 대왕이 이페부터 케투에 도착할 때까지의 노정을 의례를 통해 반복적으로 알려주기도 한단다. 이러한 음악의 형태를 띤 조상과 그 부족의 계보는 의례를 통해 그 구성원들에게 반복적으로 인지되었고, 그들의 의식 수준을 지배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는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이런 부분은 일단 고고학적으로 전혀 검증 혹은 확인이 불가능하다. 설령 악기가 확인된다 한들 그것으로 할 수 있는 수많은 행위에 대해서는 짐작조차 못 할 것이다. 그런 부분들의 상당수를 인류학이 보완할 수 있겠으나, 그 부분 역시 이처럼 현재의 자료를 갖고 고대 혹은 선사시대의 것들을 추정할 뿐이다. 암튼, 생각의 폭을 넓힌다거나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과거사를 접근한다는 측면에서 이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저자는 하나하나 모시족과 주변 부족을 조사한 인류학적 자료를 갖고 무문자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하는 것들도 있다. 전승설화 혹은 신화를 통해 그것이 생겨난 배경이나 기원지를 추정하는 것, 그 신화 속에 나오는 왕이나 영웅의 일대기(신화로 포장된)를 통해 그 민족의 기원지 혹은 이동 경로 등을 추정하는 것 등이다. 우리도 이런 방법을 통해 단군신화 혹은 삼국시대 각 국가 시조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따지고보면 별다를 것이 없다. 다만, 고대 한국사에서는 어느 시점 이후로 문자화된 역사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이전의 것들이 역사 이전(先史) 이야기, 즉 설화나 신화, 전설 등으로 다소 다르게 구분된다는 것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책에서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하나의 주제에 대해 기존에 연구된 연구성과를 소개하고 다시 그것에 대한 의문을 품는 등 마치 正-反-合의 과정을 거쳐 어떤 결론에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듯 했다. 하지만 해답은 쉽게 나오지 않고,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어려웠던 것이 아닐까 싶다(순간, 이 책을 쓴 사람도 대단하지만 한글로 번역한 사람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 이래서 번역은 제2의 집필이라고 하는 걸까? 휴우~).

하나의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필자가 이를 제대로 요약 정리한 건지나 모르겠다. -.-;).





1. 모시족 여러 왕조의 대선조에 '준그라나'라는 왕이 있다.
2. 현재 오토볼타 공화국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에도 준그라나 대왕은 공통의 대선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3. 그러나 남부 모시족의 여러 전승을 채록하면서 나(저자)는 의아함이 들었다.
4. 내가 텐코도고 남부의 라루가이나 와루가이 수장이 있는 곳을 찾았을 때, 그 곳의 신하가 수장의 앞에 엎드려 '준그라나, 준그라나~'라고 하는 것을 듣고 감짝 놀랐다. 즉, 준그라나는 특정왕의 이름도 아니고, 그렇다고 라루가이 와루가이 수장의 고유한 이름도 아니고, 단순히 '대수장'이라는 의미로 수장들에게 경의를 표할 때 찬미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5. 그 지역 사람들도 준그라나가 어원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
6. 그런데 지리적으로 라루가이 및 와루가이 사이에 끼어 있지만 계보상 거리가 먼 둘텐가나 혹은 라루가이 북쪽에 인접해 있으며 수장끼리의 계통상 연계가 깊은 텐코도고에서는 이 말이 보통명사로 쓰이지 않고, 대수장이라는 의미도 없다.
7. 또한 중부 모시의 와가두구의 역사전승에서는 준그라나가 중요하지만, 정작 모시족의 초창기 선조들이 정착했던 지역과 가까운 라루가이 및 와루가이의 계보 전승에서는 준그라나가 이야기되지 않는다(준그라나라는 말이 쓰임에도 불구하고).
8. 오히려 텐코도고에는 계보상 준그라나의 이름이 있으나 그는 텐코도고의 왕이 아니라 텐코도고 서북쪽의 모시족 거주지와 떨어진 비사족의 촌락에 둘러싸인 황야에 매장되어 있는 대수장으로 언급되고 있다. 더불어 텐코도고 계보에 있는 준그나라 왕의 업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9. 와가두구의 전승지도 모시 왕조의 창시자들이 나오는데 그는 준그라나의 아버지로 보이는 웨도라오고, 준그라나의 아들인 우브리이며 정작 준그라나는 대단히 하찮은 존재로 나온다.
10. 준그라나를 가장 자세히 소개한 구비에서도 준그라나는 극히 수동적으로 비인격적인 종족의 시조 정도로만 묘사되어 있다.
11. 맘프루시족의 오래된 도읍지로서 모시족의 발원지인 감바가를 방문했을 때 나는 이 지방의 수장에 대한 칭호에 '존고라나'라는 것이 있음을 그 지방 사람들에게 들었다. 물론 그게 특별한 지위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12. 나는 이것이 하우사어 기원의 '존고'라는 말에 맘프루시어에서 소유를 나타내는 접미어 '-라나'가 붙어져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존고'는 원래 '隊商을 위한 야간 숙영지'를 의미하며, 현재에도 하우사 상인이 정착했던 한 구역을 지칭한다. 그러나 '존고'는 맘프루시어로 '이주자가 새로 만든 취락'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존고라나'라고 하면 맘프루시어로 '새로운 취락을 지배하는 것' 또는 '접견이나 의례를 위한 큰 건물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여 수장과 동일한 의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용어는 현대 맘프루시어로 사용되는 단어는 아니다.

뭐 대략 이런 식이다. 저자는 하나의 사실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한 기존 연구성과들을 제시하거나, 그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나열한다. 그러면서 그 과정에서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를 언급한다. 이후 저자는 맘프루시어의 존고라나의 의미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련 자료를 찾고, 지방을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다시 피드백이 될 수 있는 조언을 구하는 식으로 자신의 논지를 강화시킨다. 이를 보면 무슨 생각이 나는가? 필자는 '단군왕검'이라는 호칭에 대해 기존 학계에서 어떤 식으로 연구되고 있는지가 퍼뜩 떠올랐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처럼 접근하여 해석한 것이 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이 역시 필자가 접하지 못한 자료가 있음을 인정한다). 이처럼 책을 읽는 내내 아주 세세한 부분에서부터, 큰 그림을 그려야 하는 부분까지 필자가 기존에 생각치 못 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가 후반부로 갈수록 필자는 또 하나 재밌는 사실에 직면했다. 바로 '전통'이라는 용어때문이었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유럽 세력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영향이 침투하기 이전 흑인 아프리카 사회를 가리키는데 '전통적'이라는 형용사를 사용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피하였다고 밝혔다(실제로도 그러했고). 그것은 어느 한 사회, 특히 비서양 사회를 근대화된 사회와 대치시켜 전통적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무의식 중에 '전통적=비서양적=고정적', '근대적=서양적=발전적'이라고 보는 피상적인 이원론에 빠져들 가능성을 기본적인 용어에서부터 배제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순간, 머리를 한대 딱!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 내용이 책의 195쪽에 나와있는데 필자는 지금껏 이런 생각을 갖고 무문자사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고, 기존의 선사시대 혹은 고대사를 바라볼때 이러한 전제조건을 정해놨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 책을 읽으면서 적어도 194쪽까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읽었다. -.-; 그러면서 저자는 전통적(traditionnel, elle)이라는 형용사를 가리키는 용어인 '흑인 아프리카의 전통적 사회구조', '족의 전통적 토지제도', '상아해안의 전통적 미술' 등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하나의 사례를 제시하였다(이 역시 상당히 흥미롭다).




남부 모시족 독립 수장의 한 사람인 와루가이 나바는 이 지방에서 유일하게 큰 저택을 지어, 각각의 관직명을 지닌 궁정 신하가 있는 궁정 기구를 지니고, 궁정 악사의 수도 많으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 수확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의례를 행하고 있다. 한편 와루가이 나바와 선조의 계보가 같은 이웃의 독립 수장 라루가이 나바는 특별히 가까운 신하도 없으며, 주거도 다른 많은 모시족의 수장들의 저택과 같은 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그저 흔한 형태의 건물만 가지고 있으며, 수장으로서의 의례도 지극히 간략한 것들만 행하고 있다. … 이 두 수장에 대해 각각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현재만을 관찰한다면, 와루가이 나바 쪽이 훨씬 모시족의 전통에 충실하여 '전통적' 수장의 체제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양자가 분립하기까지의 계보를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는 라루가이의 전승과, 분립된 이후에 매우 혼란스러워진 와루가이의 전승을 비교 검토해보면 …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토고에 침략한 프랑스군 지휘관의 병력 제공 명령을 당시 라루가이 나바인 시그리는 따르지 않고, 당시 와루가이 나바인 쿠도가레는 이를 따랐다. 그 결과, 프랑스는 지금까지 'chef de province(지방 수정)'의 지위를 부여했던 라루가이 나바를 1917년 와루가이 나바로 대체했다. 그 결과, 프랑스 식민지 행정당국에게 '급여'를 받게 된 와루가이의 수장은 증가된 수입으로 궁정 신하를 임명하고 모시족의 대수장에 어울리는 의례를 성대하게 행하였으며, 격식 있는 '전통적' 수장으로서 체제를 마련하고 강화하는데 고심한 듯하다. 각 궁정 신하의 직분이 명확하지 않고 그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해도 1~2대에서 단절되어 버리고, 숫자로는 모양새를 갖춘 수장의 악사들이 이야기하는 선조의 계보가 혼란스러운 것 등은 와루가이 나바의 이러한 과거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 결국 이 두 명의 모시족 수장은 식민지화 이후에 외부로부터 들어온 힘의 영향을 받아, 한 쪽은 '전통적'이 되었고, 다른 한 쪽은 '전통적'이 아니게 되었다.



오호라...그렇겠구나~그동안 전통사회 혹은 전통문화에 대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외부로부터 아주 강한 문화적 혹은 정치적 충격이 가해지면, 그건 기존 사회에 아주 큰 변혁을 몰고 올 수가 있다. 순간, 낙랑군과 같은 한군현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접근해보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일제강점기때 조선에 대해서도 이런 식의 접근은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사이에 있던 몽골(원) 간섭기때의 고려도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흔히 '예전부터 있는' 문화형태를 두고 '근대적'인 것과 대치시켜 '전통적 고정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이는 다시 말해 고고자료에 대한 시각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으리라 본다. 고고학적으로 토기 및 철기와 같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실물자료에서 변화상이 감지되면 이를 형식분류하여 상대편년하곤 한다(일반적으로). 그런데, 그러한 실물자료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갑작스런, 혹은 강제적인 사회적 변혁의 결과로 본다면 과연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사회를 다른 것으로 봐야 할 것인가? (마치 3세기를 기점으로 그 이전은 원삼국시대, 그 이후는 삼국시대로 나눠 백제의 건국시점을 3세기대로 보는 것과 같은 시각 말이다)

저자는 레비스트로스(유명한 인류학자)의 발언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문자라는 것은 신석기 문화가 문자 없이도 달성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의 지식의 축적에 공헌한 것이 아니라 권력에 의한 인간의 지배의 강화에 도움이 되었다는 논의를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다수의 사람을 하나의 정치조직으로 통합하고 그들에게 카스트나 계급 등의 지위를 매기는 것은, 문자의 출현에 부수적인 것으로 생겨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19세기에 유럽 여러 나라에서 의무교육이 보급되었지만 그것은 병역의 확장이나 프롤레타리아의 형성과 하나의 짝이 되어 진행되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문맹을 없애려는 운동은 권력에 의한 시민 통제의 강화와 불가분 관계에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전에도 간략한 포스팅으로 정리한 바가 있지만, 문자가 반드시 필요하고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클릭). 또한, 이는 '책을 밝히는(bookish)' 서적 편중의 지(知)의 세계에 빠져들기 쉬운 현대 인문 사회과학에 대한 경고가 될 수도 있겠다(지식이 많은 것과 지혜가 많은 것을 예로 들면 이해가 좀 쉬울까?).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분명히 이야기한다. 단순히 문자의 유무를 기준으로 '문자사회'와 '무문자사회'를 상호 단절된 두 가지의 이질적인 사회로 간주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문자성과 무문자성은 서로 여러 가지 형태로 상호 침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복사, 인장, 달력, 목록, 비명 등은 분명 일반적으로 문자라고 불리지 않는 기호임에도 충분히 문자의 기능을 대행해왔다. 물론 이러한 원문자(原文字 - 문자이기는 하지만 다소 불확실한, 원삼국시대와 같은 용례로 보면 이해가 빠를 듯)가 단순 기호보다는 더 문자에 가깝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기호나 원문자는 분명 문자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사용되었으며 이를 단순히 시간의 축에 따라 '무문자사회 → 문자사회'라고 보지 말고 공존한 것으로 이해해야 적절할 것이다. 실제 현대 이후에도 문자사회의 어느 한 분야에서는 분명히 '무문자성'이 계속 남아있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교통표지판이라든가, 이모티콘을 생각하면 좋을 듯).

그렇게 저자는 이 책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중간에 어려운 내용이 있어 그런 부분들은 몇장씩 앞으로 돌려가며 다시 읽기도 했고, 전체적으로 2번을 읽기도 했으며, 솔직히 지금 서평을 쓰는 중간중간에도 인용할 부분을 찾아서(미리 체크해놨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기억조차 못 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보고 있지만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선하고 재미있다(어려운데 뭐가 재밌어!? 라고 하셔도 할말은 없다. T.T). 그리고 또 하나 좋았던 것은 책의 말미에 저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바, 자신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또 자신이 앞으로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지...등을 적어놓은 부분이었다. 인류학(그 중에서도 문화인류학)은 아니지만 관련학문으로서 고고학을 전공하는 필자에게는 주옥같은 이야기이기도 했고, 생각을 고쳐먹을 수 있게 한 내용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가와다 준조의 몇마디 조언(필자는 감히 조언이라고 해도 좋다고 생각한다)을 끝으로 이만 이 책에 대한 서평을 마무리하겠다.




소위 말하는 필드워크가, 문헌연구에 의해 미리 만들어진 틀에 따른, 현지에서의 단순한 자료수집 작업이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 또한 역사연구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러한 시점의 상호성으로부터 역사의 본질에 닿을 수 있는 과제를 제기하는 것도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서 때때로 언급하였듯이, 역사를 보는 시점의 원근감각을 바로 고치거나 문자기록의 연구만을 중심으로 삼는 대상을 넘어선 넓은 장에, 역사를 다시 한번 자리잡게 하여 살펴볼 수 있는 가능성 등이다. 모두에서 밝힌 것처럼 무문자사회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문자사회의 '변경'에 있었기에 기성 학문이 돌아보지 못한 것들을, 정통적인 역사의 보조 자료로 수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문화인류학이 문화 안의 무문자성에 집착하는 것은 문자성의 변방에 대한 관심에서가 아니다. 기성의 문명 안에서 확립된 너무나 '책을 밝히는' 서재적인 인문적 知의 체계를 더 넓직한 세계에 해방시키고, 기성의 사고방식과 감수성에 약간의 바람을 불어넣어 보고 싶어서이다.


나의 관심의 하나는 지배자의 혈연집단의 분절화의 과정과 정치조직의 분절적 성격이 사회계층의 분화와 분절간 상호 서열화와 어떠한 관계를 갖고, 특히 후자가 어떠한 생태학적, 역사적 조건 하에서 실현될 수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 점은 흑인 아프리카 사회에 관한 한, 국가형성론, 넓게는 정치구조의 동태론 일반에 있어서 하나의 열쇠가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제2차 대전 후의 학문상의 풍조 가운데 아프리카 연구 분야에서 소홀히 다루어 온 기술론, 물질문화론의 시점에서의 검토도 아울러 진행함으로써, 신진화주의의 탈역사적인 유형론이나, 조금도 진전을 보이지 않는 프로세스 · 모델론을, 별도의 측면에서 그것들을 넘어서는 전망을 여는 것도 가능하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자~어떤가. 학문을 정말 사랑하고, 그를 위해 고뇌하고 노력하는 학자의 심정이 절로 느껴지지 않는가.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게 하는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 금년도 상반기에 읽는 책 베스트 3 안에 들어갈만한 秀作으로 꼽고 싶다!

덧글. 책은 어렵지만 선사~고대사에 관심이 많고, 정치구조 및 사회변혁 등에 관심이 많은 분들에게 필독 권장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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