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김용만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저자가 오랜만에 고구려 관련 연구서적을 냈다. 인물평전의 형식을 띤 책으로는 『연개소문』이후로 2번째인 것 같다. 오래전부터 광개토태왕과 관련한 책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왔던 터에 이렇게 나오게 되니 반갑기도 하고, 어떤 책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되는 바도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진작에 책을 읽긴 했지만, 다른 일로 바빠 차일피일 서평쓰는 것을 미루다가 이제서야 이렇게 쓴다.

필자는 먼저 광개토태왕에 대한 책이 나왔다는 것 자체를 중요시하게 여긴다. 사람들은 한국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역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때 대부분 고구려를 꼽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구려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코 광개토태왕이 압도적인 1위를 하지 않을까 싶다. 즉, 어느 순간부턴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고구려-광개토태왕이라는 하나의 이미지가 고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중에 나온 광개토태왕 관련 서적들을 보면, 생각보다 적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필자가 갖고 있는 책만 봐도 윤명철의『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2006), 전경일의『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2007), 다케미쓰 마코토의『고구려 광개토대왕』(2007-번역서는 2009) 등이 전부다. 그에 반해 <광개토태왕비문(이하 비문으로 총칭)>에 대한 책은 한중일 삼국을 망라하여 상당히 많긴 하지만. 이처럼 관련된 문헌이나 자료가 별로 없어서 역사가 아니라 거의 신화 속에 머물러 있는 인물이 바로 광개토태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광개토태왕을 실제 역사 속의 실체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한 최초의 시도가 아닐까 한다. 더불어 이미 연개소문에 대해 그러한 작업을 했던 저자이기에, 이 책에서 실시한 복원 작업 또한 상당히 흥미로웠다.

책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살펴보면...저자는 크게 서론(1부. 광개토태왕 시대로 들어서기), 본론(2부.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 결론(3부. 고구려와 광개토태왕) 식으로 큰 틀을 정하고 그 안에 13개의 세부 장을 두었다. 1부에서는 광개토태왕의 등장 이전에 대한 역사적 개론, 그리고 비문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며, 2부에서는 우리가 자주 접했던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물론 이 중 상당 부분은 비문의 내용에 해당한다)이, 3부에서는 광개토태왕을 중심으로 본 당대 고구려와 우리들이 인식해야 할 중요한 사실들을 중점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필자가 흥미롭게 살펴본 부분들을 찬찬히 뜯어보겠다.





1. 1년의 연대 오차 수정

저자는 비문에 나오는 연대와『삼국사기』의 연대가 1년 차이가 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이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냈다. 이는 그동안 '어? 이건 뭐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니야? 1년 차이나는 거?'라고 쉽게 생각하고 넘어갔던 부분이었고, 필자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삼국사기』의 기록을 무조건 비문의 연대에서 1년씩 밀어버리면 안 된다고 한다. 지금껏 학계에서는 광개토태왕의 즉위년을 391년으로 당기고, 고국양왕의 말년 기록을 광개토태왕의 업적으로 인정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그렇게 되면 동시기 백제, 신라에서 벌어진 사건들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비문을 기준으로 광개토태왕의 즉위년을 391년(신묘)으로 보고, 내물 36년은 390년(경인), 실성 즉위년은 401년으로 수정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고구려는 400년 경자대원정을 통해 단순히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물리친 것에서 그친게 아니라 아예 신라 정권을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실성 즉위년을 402년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딱 1년의 오차를 수정함으로써 저자는 광개토태왕이 400년에 벌인 경자대원정의 목적이 보다 분명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더불어『삼국사기』에서 비문에 적힌 고구려의 신라 구원 작전을 의도적으로 감췄다고 보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이희진은『전쟁의 발견』에서 '신속한 작전 덕분에 한반도 남부에서 왜까지 걸쳐 있던 反 고구려 세력권이 붕괴되었다.'(131쪽)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5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한 이유에 대해 '왜군이 그정도 수준의 전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적을 압도하고, 주변 국가들에게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121~124쪽)'이라고 적고 있는데(그러면서 미군이 수십만 대병으로 그레나다를 침공한 사례를 들었는데, 정작 미군이 동원한 병력은 수십만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저자의 책을 보면서 뭔가 새로운 시각으로 당시 상황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보다 분명한 전쟁명분이나 목적을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자는 광개토태왕 즉위년, 거란 공격 시점, 한성백제와의 전쟁 기사(관미성 함락기사 포함), 후연의 목저성 침입 시기, 광개토태왕 서거년 등에 대해 연대를 조정하였다. 비문과 문헌의 오차를 수정함으로써, 당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난 연대표부터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필자는 책에 한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2. 담덕의 인간적인 면

저자는 담덕이 어린 시절,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고 어떤 상황 속에서 컸는지에 대해 서술하였다. 또한, 소수림왕-고국양왕의 재위시 있었던 사건들을 보다 상세히 살펴보면서 큰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담덕이 무엇을 물려받았는지를 언급하였다. 또한, 소수림왕이 실시한 여러 정책들에 대해 다소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예를 들면 율령반포가 갖는 의미, 태학 설립이 갖는 의미, 불교 공인이 갖는 의미 등). 막연히 문헌에 적혀 있는 문구를 그대로 해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당시 시대상황과 결부시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년 담덕의 인간적인 면모 또한 차근차근 그려지는 것 같았다.

3. 신라사에 끼친 고구려의 영향

저자는 고구려의 신라 구원 전쟁(400년 경자대원정)이 신라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라고 재차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신라가 고구려의 신민으로 지냈던 100여년의 시간은 퇴보가 아닌 발전을 위한 시기였으며, 신라사를 앞세우기 위해 고구려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다.

당시 신라에서는 마립간 호칭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시기가 고구려의 신민으로 있던 시기와 겹치며 또한 김씨 족단의 왕위 독점 시기와도 맞물린다. 이 마립간이라 불리는 지도자는 기존의 귀족층과는 한층 격이 높은 존재로 자리매김하는데 그 배후에는 고구려라는 강력한 조력자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경 등과 같은 선진 농경기술을 비롯해 거문고와 탈춤, 천문지식과 척도, 가람배치 및 율령 등 다방면에 걸쳐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신라 중기 지방관의 명칭이 고구려 것과 동일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개중에는 각배와 같은 중앙아시아의 문화양상도 있는데, 저자는 고구려가 중국이나 서역에서 받아들인 문화를 신라에 전파해준 중개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저자는 광개토태왕의 남해안 원정은 고구려의 문화와 제도를 한반도 남쪽에 광범위하게 전파해 삼국 간 일체감을 심어줌으로써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은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물론 신라에 비해 가야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 했지만). 기존에는 단순히 정치-군사-외교적인 관점에서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했고, 그 결과 어떠어떠한 일이 벌어졌다...라고 접근했지만 저자는 보다 거시적인 안목, 새로운 안목으로 당시 사건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4. 보다 구체화된 후연과의 전쟁 과정

250~263쪽에 걸쳐 저자는 후연과 고구려와의 전쟁 과정을 정리하고 있다. 뭐 별거 없겠지~하고 넘어가려는데 처음 보는 내용이 등장했다. 404년 고구려가 후연의 연군을 공격해 100명을 죽인 것에 대해 지배선은 그 곳에 있던 모용황의 사당을 광개토태왕이 부수고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그러나 저자는 더 나아가 당시 고구려와 후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그 결과 후연군 5,000명이 죽으면서 후연이 패배했다고 해석했다(저자가 인용한『자치통감』의 기록은 그간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영토 확보까지 이어지지는 못 했고 말이다. 405년 1월 곧바로 후연이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한 것을 보면 말이다.

저자는 왜 연군까지 진출한 고구려가 바로 후연에게 요동성을 공격받아야 했는지? 에 대해 404년 11~12월 무렵 왜군이 고구려 대방계를 침입했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즉, 당시 고구려는 2개의 전선을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대방계에서 곧 왜군을 몰아내고 후연과의 전쟁에 전념한다. 그런데 뒤이어 등장한 기록들은 어째 이상하기만 하다. 404년 11월 사냥을 나섰다가 호랑이와 이리에게 물려죽거나 얼어죽은 병사가 5,000명이라는 기록, 405년 1월 요동성 공격에서 후퇴하다가 큰비와 눈을 만나 대다수의 병사가 죽었다는 기록, 406년 1월 3,000리나 행군해 지친데다 추위에 시달린 병사들의 시체가 길을 덮었다는 기록들 모두. 이를 두고 저자는 고구려와 후연간의 전쟁 기록이 의도적으로 은폐되었고, 오늘날 이렇게 남게 되었다고 보았다. 더불어 요서 의현지방에서 발견된 고구려 불상을 통해 이 시기 고구려가 대릉하 일대까지 진출했다고 주장했다.

기존 연구에 비해 후연과의 전쟁 과정이 보다 구체화됨에 따라 당시 고구려의 대외전략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5. 광개토태왕이 남긴 vision

광개토태왕은 고구려를 王國에서 帝國으로 만든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혼자 그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은 아니다(불가능하기도 했고). 저자는 그래서 소수림왕-고국양왕으로 이어지는 선대 왕들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했으며, 광개토태왕의 신하들과 그러한 유능한 신하들이 생겨나게 된 배경(율령 반포, 태학 설립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광개토태왕이 만능 엔터테이너에다가 슈퍼맨이었다~라고 보는 기존의 신화적 이미지가 많이 변화된 것이 사실이다. 마치 한글을 세종대왕 혼자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상식화되면서 세종대왕을 한국사상 둘도 없는 위대한 군주로 평가하는 시각이 많이 변화한 것처럼 말이다. 그게 아마 이 책에서 저자가 추구하는 첫번째 목표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두번째 목표는 바로 광개토태왕이 행한 업적을 제대로 살펴보자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 필자는 vision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는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고, 새로운 이상과 꿈을 심어주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한걸음 한걸음의 내딛음은 곧 고구려라는 국가의 vision이 되었고, 고구려가 제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물론 그가 행한 內治의 흔적은 기록에 많이 남아있지 않다. 저자도 최대한 기록을 짜내어 몇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분명 그보다 더 많은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고, 그 결과 고구려는 富國强兵을 이루었다. 그리고 오늘날 광개토태왕의 업적은 어떤 식으로 다가서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단순히 국민 정서를 자극하기 위해서, 공허한 외침에만 그칠 '만주는 우리땅!'과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광개토태왕이 거론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해서 고구려가 제국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생각의 場을 넓혀주는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상 몇가지 부분에서 필자가 흥미롭게 봤던 내용들을 언급해봤다.

광개토태왕은 진즉에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져야 했지만, 1,500년이 넘어서야 조금씩 그의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의 실체를 올바르게 다듬는 작업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러한 작업의 초석이 되기에 충분하며, 이제 앞으로 '영웅' 광개토태왕이 아닌 '인간' 광개토태왕의 면모를 밝혀내는 작업들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덧글.

죽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행복하다고 선포하지 말지어다. 한 인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다만 죽음의 순간일 뿐이다.

『외경서』, 시라시드 11:27~28

광개토태왕이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거련은 <광개토태왕비>를 세워 아버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의 어떤 면모를 기억해야 하는지 고구려와 주변 국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고구려 역대 군주 중 이런 아버지와 아들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이 넘는 기간동안 그러한 기억의 재생산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신비로운 일이기까지 하다. 그 신비로운 현상 속에서 광개토태왕이 신화적 인물이 됐는지도 모른다. 이제 진정으로 광개토태왕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 그가 살아 생전 행복했고, 여러 백성들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군주였음을 널리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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