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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김용만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저자가 오랜만에 고구려 관련 연구서적을 냈다. 인물평전의 형식을 띤 책으로는 『연개소문』이후로 2번째인 것 같다. 오래전부터 광개토태왕과 관련한 책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왔던 터에 이렇게 나오게 되니 반갑기도 하고, 어떤 책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기대되는 바도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진작에 책을 읽긴 했지만, 다른 일로 바빠 차일피일 서평쓰는 것을 미루다가 이제서야 이렇게 쓴다.

필자는 먼저 광개토태왕에 대한 책이 나왔다는 것 자체를 중요시하게 여긴다. 사람들은 한국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역사가 무엇이냐고 물었을때 대부분 고구려를 꼽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구려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코 광개토태왕이 압도적인 1위를 하지 않을까 싶다. 즉, 어느 순간부턴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고구려-광개토태왕이라는 하나의 이미지가 고정적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중에 나온 광개토태왕 관련 서적들을 보면, 생각보다 적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필자가 갖고 있는 책만 봐도 윤명철의『광개토태왕과 한고려의 꿈』(2006), 전경일의『광개토태왕, 대륙을 경영하다』(2007), 다케미쓰 마코토의『고구려 광개토대왕』(2007-번역서는 2009) 등이 전부다. 그에 반해 <광개토태왕비문(이하 비문으로 총칭)>에 대한 책은 한중일 삼국을 망라하여 상당히 많긴 하지만. 이처럼 관련된 문헌이나 자료가 별로 없어서 역사가 아니라 거의 신화 속에 머물러 있는 인물이 바로 광개토태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광개토태왕을 실제 역사 속의 실체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한 최초의 시도가 아닐까 한다. 더불어 이미 연개소문에 대해 그러한 작업을 했던 저자이기에, 이 책에서 실시한 복원 작업 또한 상당히 흥미로웠다.

책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살펴보면...저자는 크게 서론(1부. 광개토태왕 시대로 들어서기), 본론(2부.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 결론(3부. 고구려와 광개토태왕) 식으로 큰 틀을 정하고 그 안에 13개의 세부 장을 두었다. 1부에서는 광개토태왕의 등장 이전에 대한 역사적 개론, 그리고 비문에 대한 내용이 등장하며, 2부에서는 우리가 자주 접했던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물론 이 중 상당 부분은 비문의 내용에 해당한다)이, 3부에서는 광개토태왕을 중심으로 본 당대 고구려와 우리들이 인식해야 할 중요한 사실들을 중점적으로 정리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필자가 흥미롭게 살펴본 부분들을 찬찬히 뜯어보겠다.





1. 1년의 연대 오차 수정

저자는 비문에 나오는 연대와『삼국사기』의 연대가 1년 차이가 나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이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냈다. 이는 그동안 '어? 이건 뭐 다 알고 있는 사실 아니야? 1년 차이나는 거?'라고 쉽게 생각하고 넘어갔던 부분이었고, 필자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삼국사기』의 기록을 무조건 비문의 연대에서 1년씩 밀어버리면 안 된다고 한다. 지금껏 학계에서는 광개토태왕의 즉위년을 391년으로 당기고, 고국양왕의 말년 기록을 광개토태왕의 업적으로 인정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그렇게 되면 동시기 백제, 신라에서 벌어진 사건들도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비문을 기준으로 광개토태왕의 즉위년을 391년(신묘)으로 보고, 내물 36년은 390년(경인), 실성 즉위년은 401년으로 수정하였다.

그렇게 된다면, 고구려는 400년 경자대원정을 통해 단순히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물리친 것에서 그친게 아니라 아예 신라 정권을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실성 즉위년을 402년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이러한 해석이 이뤄지지 않았지만, 딱 1년의 오차를 수정함으로써 저자는 광개토태왕이 400년에 벌인 경자대원정의 목적이 보다 분명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더불어『삼국사기』에서 비문에 적힌 고구려의 신라 구원 작전을 의도적으로 감췄다고 보기까지 했다). 이에 대해 이희진은『전쟁의 발견』에서 '신속한 작전 덕분에 한반도 남부에서 왜까지 걸쳐 있던 反 고구려 세력권이 붕괴되었다.'(131쪽)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서 5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한 이유에 대해 '왜군이 그정도 수준의 전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적을 압도하고, 주변 국가들에게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121~124쪽)'이라고 적고 있는데(그러면서 미군이 수십만 대병으로 그레나다를 침공한 사례를 들었는데, 정작 미군이 동원한 병력은 수십만이 아니다), 그것만으로는 뭔가 설명이 부족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저자의 책을 보면서 뭔가 새로운 시각으로 당시 상황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보다 분명한 전쟁명분이나 목적을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자는 광개토태왕 즉위년, 거란 공격 시점, 한성백제와의 전쟁 기사(관미성 함락기사 포함), 후연의 목저성 침입 시기, 광개토태왕 서거년 등에 대해 연대를 조정하였다. 비문과 문헌의 오차를 수정함으로써, 당시 여러 사건들이 일어난 연대표부터 새롭게 제시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필자는 책에 한없이 집중하고 있었다.

2. 담덕의 인간적인 면

저자는 담덕이 어린 시절,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고 어떤 상황 속에서 컸는지에 대해 서술하였다. 또한, 소수림왕-고국양왕의 재위시 있었던 사건들을 보다 상세히 살펴보면서 큰아버지와 아버지에게서 담덕이 무엇을 물려받았는지를 언급하였다. 또한, 소수림왕이 실시한 여러 정책들에 대해 다소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예를 들면 율령반포가 갖는 의미, 태학 설립이 갖는 의미, 불교 공인이 갖는 의미 등). 막연히 문헌에 적혀 있는 문구를 그대로 해석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당시 시대상황과 결부시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소년 담덕의 인간적인 면모 또한 차근차근 그려지는 것 같았다.

3. 신라사에 끼친 고구려의 영향

저자는 고구려의 신라 구원 전쟁(400년 경자대원정)이 신라사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라고 재차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신라가 고구려의 신민으로 지냈던 100여년의 시간은 퇴보가 아닌 발전을 위한 시기였으며, 신라사를 앞세우기 위해 고구려사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다.

당시 신라에서는 마립간 호칭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 시기가 고구려의 신민으로 있던 시기와 겹치며 또한 김씨 족단의 왕위 독점 시기와도 맞물린다. 이 마립간이라 불리는 지도자는 기존의 귀족층과는 한층 격이 높은 존재로 자리매김하는데 그 배후에는 고구려라는 강력한 조력자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우경 등과 같은 선진 농경기술을 비롯해 거문고와 탈춤, 천문지식과 척도, 가람배치 및 율령 등 다방면에 걸쳐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이는 신라 중기 지방관의 명칭이 고구려 것과 동일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개중에는 각배와 같은 중앙아시아의 문화양상도 있는데, 저자는 고구려가 중국이나 서역에서 받아들인 문화를 신라에 전파해준 중개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이처럼 저자는 광개토태왕의 남해안 원정은 고구려의 문화와 제도를 한반도 남쪽에 광범위하게 전파해 삼국 간 일체감을 심어줌으로써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은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물론 신라에 비해 가야에 대해서는 이 정도의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 했지만). 기존에는 단순히 정치-군사-외교적인 관점에서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했고, 그 결과 어떠어떠한 일이 벌어졌다...라고 접근했지만 저자는 보다 거시적인 안목, 새로운 안목으로 당시 사건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4. 보다 구체화된 후연과의 전쟁 과정

250~263쪽에 걸쳐 저자는 후연과 고구려와의 전쟁 과정을 정리하고 있다. 뭐 별거 없겠지~하고 넘어가려는데 처음 보는 내용이 등장했다. 404년 고구려가 후연의 연군을 공격해 100명을 죽인 것에 대해 지배선은 그 곳에 있던 모용황의 사당을 광개토태왕이 부수고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 바 있다. 그러나 저자는 더 나아가 당시 고구려와 후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고, 그 결과 후연군 5,000명이 죽으면서 후연이 패배했다고 해석했다(저자가 인용한『자치통감』의 기록은 그간 학계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영토 확보까지 이어지지는 못 했고 말이다. 405년 1월 곧바로 후연이 고구려 요동성을 공격한 것을 보면 말이다.

저자는 왜 연군까지 진출한 고구려가 바로 후연에게 요동성을 공격받아야 했는지? 에 대해 404년 11~12월 무렵 왜군이 고구려 대방계를 침입했기 때문으로 해석했다. 즉, 당시 고구려는 2개의 전선을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대방계에서 곧 왜군을 몰아내고 후연과의 전쟁에 전념한다. 그런데 뒤이어 등장한 기록들은 어째 이상하기만 하다. 404년 11월 사냥을 나섰다가 호랑이와 이리에게 물려죽거나 얼어죽은 병사가 5,000명이라는 기록, 405년 1월 요동성 공격에서 후퇴하다가 큰비와 눈을 만나 대다수의 병사가 죽었다는 기록, 406년 1월 3,000리나 행군해 지친데다 추위에 시달린 병사들의 시체가 길을 덮었다는 기록들 모두. 이를 두고 저자는 고구려와 후연간의 전쟁 기록이 의도적으로 은폐되었고, 오늘날 이렇게 남게 되었다고 보았다. 더불어 요서 의현지방에서 발견된 고구려 불상을 통해 이 시기 고구려가 대릉하 일대까지 진출했다고 주장했다.

기존 연구에 비해 후연과의 전쟁 과정이 보다 구체화됨에 따라 당시 고구려의 대외전략에 대한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5. 광개토태왕이 남긴 vision

광개토태왕은 고구려를 王國에서 帝國으로 만든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혼자 그 대단한 업적을 이룬 것은 아니다(불가능하기도 했고). 저자는 그래서 소수림왕-고국양왕으로 이어지는 선대 왕들에 대해서 언급하기도 했으며, 광개토태왕의 신하들과 그러한 유능한 신하들이 생겨나게 된 배경(율령 반포, 태학 설립 등)에 대해서도 언급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광개토태왕이 만능 엔터테이너에다가 슈퍼맨이었다~라고 보는 기존의 신화적 이미지가 많이 변화된 것이 사실이다. 마치 한글을 세종대왕 혼자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상식화되면서 세종대왕을 한국사상 둘도 없는 위대한 군주로 평가하는 시각이 많이 변화한 것처럼 말이다. 그게 아마 이 책에서 저자가 추구하는 첫번째 목표가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두번째 목표는 바로 광개토태왕이 행한 업적을 제대로 살펴보자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이를 필자는 vision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는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고, 새로운 이상과 꿈을 심어주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러한 한걸음 한걸음의 내딛음은 곧 고구려라는 국가의 vision이 되었고, 고구려가 제국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본다. 물론 그가 행한 內治의 흔적은 기록에 많이 남아있지 않다. 저자도 최대한 기록을 짜내어 몇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분명 그보다 더 많은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고, 그 결과 고구려는 富國强兵을 이루었다. 그리고 오늘날 광개토태왕의 업적은 어떤 식으로 다가서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단순히 국민 정서를 자극하기 위해서, 공허한 외침에만 그칠 '만주는 우리땅!'과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광개토태왕이 거론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행동을 해서 고구려가 제국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러한 생각의 場을 넓혀주는 좋은 지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상 몇가지 부분에서 필자가 흥미롭게 봤던 내용들을 언급해봤다.

광개토태왕은 진즉에 제대로 된 평가가 이뤄져야 했지만, 1,500년이 넘어서야 조금씩 그의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 다시 그의 실체를 올바르게 다듬는 작업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러한 작업의 초석이 되기에 충분하며, 이제 앞으로 '영웅' 광개토태왕이 아닌 '인간' 광개토태왕의 면모를 밝혀내는 작업들이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덧글.

죽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행복하다고 선포하지 말지어다. 한 인간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다만 죽음의 순간일 뿐이다.

『외경서』, 시라시드 11:27~28

광개토태왕이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거련은 <광개토태왕비>를 세워 아버지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의 어떤 면모를 기억해야 하는지 고구려와 주변 국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고구려 역대 군주 중 이런 아버지와 아들이 또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이 넘는 기간동안 그러한 기억의 재생산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신비로운 일이기까지 하다. 그 신비로운 현상 속에서 광개토태왕이 신화적 인물이 됐는지도 모른다. 이제 진정으로 광개토태왕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 그가 살아 생전 행복했고, 여러 백성들이 인정하고 사랑하는 군주였음을 널리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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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의 꿈 - 고구려 중흥의 군주 미천왕 평전
이성재 지음 / 혜안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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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 한권 소개하고자 한다. 읽은지는 좀 됐는데, 어쩐 일인지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야 서평을 쓴다. 

이 책은 미천왕, 즉 고구려 초중기에 왕좌에 있었던 한 군주에 대한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미천왕이라고 하면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혔으며, 전연의 모용씨와 끊임없이 대립했던 인물로 알고 있다(잘 기억은 안 나는데 어떤 이는 광개토태왕때보다 미천왕때 고구려의 영토가 더 넓었다고도 했다. 출처는 불분명!). 그러다가 아들인 고국원왕대에 고구려가 전연에게 크게 패하고 그 무덤이 파헤쳐져 죽어서 적국의 볼모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여담이지만, 이때 모용씨는 무덤을 파헤쳐 관을 가져갔을텐데, 그 시신을 전연에 가져가서 어떻게 관리했는지가 의문이다. 다시 땅 속에 묻어놨는지 혹은 그냥 썩은채로 방치했는지...솔직히 고구려 입장에서는 당시 시신이 뒤바껴도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을테니 말이다. 암튼 이건 여기서 그만). 

이 책에 대한 간략한 얘기를 하자면, 이 책은 일단 연구서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개설서라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저자가 연구한 내용이 책 안에 담겨있기는 하지만, 논문이나 전공서적처럼 딱딱하고 재미없지는 않기 때문이다. 상당히 순화된(?) 느낌이 난다랄까? 암튼, 그렇다. 그래서 미천왕이라고 하는 인물에 대해서 부담없이 알아갈 수 있게끔 해 준다. 

책의 첫부분에는 고구려 역대왕계와 모용선비(전연)의 역대왕계가 있고, 미천왕 시절의 고구려 관직 및 관등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미천왕 시절의 고구려 영토 및 요동~요서를 둘러싼 고구려 역대 주요 원정을 표시한 지도가 1장씩 실려 있다. 이 당시 고구려가 요하를 기점으로 요동반도를 완벽하게 차지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학계 대부분의 의견도 그러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식으로 지도를 표시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비해 고구려 역대 주요 원정을 표시한 지도는 괜찮았다. 요서~요동을 두고 고구려가 끊임없이 진출하려고 했다는 것이 잘 표현되었다고나 할까? 지도라는 녀석이 어떤 내용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상당히 다르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지도가 그러했다. 시기별로 고구려의 원정 진출경로를 표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었다. 실제로 고-수, 고-당 전쟁의 경우에는 시기별로 그러한 원정로라든가 주요 전장이 잘 표시되어 있지만,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그러한 지도를 많이 못 본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그리고 프롤르그 격으로 광개토태왕이 연군을 침략한 내용을 책의 첫머리에 싣고 있는 것도 괜찮았다. 딱딱한 연구서적이 아니라고 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구성 때문이었다. 광개토태왕이 갑작스럽게 연군 일대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두고 기존에 여러 견해들이 있었다. 원정군의 규모에 착오가 있다, 잘못된 기록이다, 어떤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등등. 그런데 이에 대해 지배선 선생님은 광개토태왕이 모용황의 사당을 파괴하려고 했다는 의견을 제시하셨고, 필자 역시 상당히 설득력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모용황의 사당이 훗날 복구되었는지, 다른 곳으로 옮겨졌는지 여부는 모르지만, 아마도 고구려인이 보기에 그 사건은 이전에 당했던 치욕을 앙갚음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책은 증손자의 복수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왜 증손자가 복수를 했는지 말이다. 

여기까지는 다 좋다. 그런데 책의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뭔가 좀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평전(評傳)이라 하면 기본적으로 '개인의 일생에 대하여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한국 고대사 속의 인물들은 남아있는 문헌자료 혹은 금석문이 소략하기 때문에 이러한 평전을 작성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유독 평전의 형식을 띤 책들은 별로 출간되지 않았다. 그나마 꼽자면 이도학 선생님이 쓰신『백제장군 흑치상지 평전』과 김용만 선생님이 쓰신『인물로 보는 고구려사』과『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정도가 있을 것이다. 먼저 이도학 선생님의 저서는 소략한 사료를 갖고 쓴 평전의 한계점을 잘 보여준 책이었다. 분명 그 적은 사료를 갖고 뭔가 새로운 내용들을 언급해보려고 노력은 한 것 같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힌 책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 책을 보면서 딱 그러한 느낌을 받았다. 뭐 책을 쓸 주제가 적절치 않았다고도 볼 수 있겠고(어느 정도 분량이 나와야 하는데 그러기 힘든 주제이니), 뭔가 새로운 접근법으로 그 인물을 해석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암튼, 그리고 김용만 선생님의 2권의 저서 중 전자는 엄밀히 말해 인물에 대해서 서술하고는 있지만 평전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후자가 그나마 현재까지 나온 가장 제대로 된 평전이 아닐까 싶다. 특히 기존 학계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 놓쳤던 부분까지 디테일하게 정리한 부분들이 기억에 남는다. 

즉, 이 책에서는 사료들을 정리하고, 당시의 상황들을 재구성했다는 면에서 흠잡을 것은 없다. 다만, 인물 평전이기 때문에 인물 자체에 대한 고민이 책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부분에 있어서 좀 미흡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그 인물 자체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그런 것을 어떻게 아느냐? 라고 반문한다면야 필자도 할말은 없지만, 평전이라는 제목을 내걸고 책을 쓴 저자가 그 정도 노력의 흔적을 책에 묻어나오게 하지 않았다면, 그 또한 다시 생각해볼 부분이 아닐까 싶다. 

또한, 저자는 189~196쪽에 걸쳐 고구려 태왕호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수서』에 고국원왕을 두고 '소열제'라고 기록한 것을 그대로 신뢰할 수 있다고 보고 있었다. 이 부분은 사료가 전해지는 과정에서 오기가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인데, 저자는 그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고구려가 실제 칭제를 했다고 보는 것은 아니고, 미천왕 시기부터 고구려가 태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그 태왕이라는 칭호가 황제와 동급으로 쓰였기 때문에 중국측에서 그러한 사실을 기재한 것이 아닌가~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국측에서 고구려의 군주가 황제와 동급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고구려 군주의 지위를 인정해서 황제로 기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군주가 미천왕 이후 꾸준히 태왕호를 사용했고, 그 권위는 광개토태왕-장수태왕 시절을 거치면서 더욱 높아지고 공고해졌는데 그 뒤로 고구려 군주에 대해 칭제한 중국측 문헌이 없는 것 또한 의심해볼 필요가 있겠다. 일반적인 상황 속에서 특수한 경우 하나가 확인될때 그 특수한 경우에 대해 재고해보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나 싶다. 

뭐 이런 몇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책 내용 자체에 큰 문제는 없다. 또한, 전체적인 논지 전개과정 또한 무리가 없다. 

하지만 뭔가 미천왕에 대해 새롭게 내놓은 내용이 없다는 점, 미천왕에 대한 최초의 평전이라는 기대치에 못 미치는 점, 인물 자체에 대한 고뇌 혹은 고심까지 가지 못 하고 주변 정황만 정리하고 그친 점 등은 필자에게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별 3.5개를 주고 싶은데 관련 이모티콘이 없으니 반올림해서 별 4개를 책정했다. 4세기 당시 고구려와 주변 국가의 정세를 파악하는데 있어 부담스럽지 않게 읽힐 수는 있는 책이지만, 그러한 격동의 4세기에 미천왕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떻게 행동한 인물이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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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찾아서 - 환인.집안.심양.단동.고구려 천리장성.수도 방어성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 동북아역사재단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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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한 주간 논문 막바지 작업을 끝내고 오랜만에 리뷰를 쓰는 것 같다.

이 책은 최근에 구입한 고구려 관련 서적인데(요즘에는 고구려 관련해서 어린이용 책들은 봇물 터지듯이 나오는데, 전공서적이나 교양서적은 딱히 눈에 띄지 않는 것 같다. 논문이야 계속 나온다한들 일반인들이 쉽게 접하기는 어렵고 말이다), 딱히 책을 읽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참고할만한 것이 없나~하는 마음에 구입한 것이다. 이렇게 화려한 칼라사진과 간략한 글 몇 줄이 들어가 있는 답사기(?) 같은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많이 갖고 있지도 않고(전선영의 『천리장성에 올라 고구려를 꿈꾼다』도 있지만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잘 구입하지도 않는데 고구려 답사를 갈 때 참고할만한 책이라는 누군가의 추천을 받아 구입하게 된 것이다. 뭐 내용면에서는 역시나 딱히 새롭게 볼만한 부분이 없었다.

아! 그나저나 왜 이 책이 필요하게 됐는지를 얘기 안 한 것 같다. 이번에 필자가 몸담고 있는 연구소에서 5년 프로젝트로 중국 답사를 가게 됐는데, 그에 따른 답사코스를 체크하고, 답사자료집(이후 책으로 발간할 예정임)을 작성하기 위한 가벼운 정보를 얻을 수 없나 해서 이 책을 추천받아 사게 되었다. 매년 2차례씩(아마 봄과 가을쯤) 답사를 나가야 해서 거의 1년 내내 자료집을 만들고, 답사 후 자료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텐데 벌써부터 걱정이긴 하다. 암튼 필자도 다른 책들을 보고 대강 답사코스를 작성한 뒤에 이 책을 받아봤기 때문에 일단 겹치는 부분도 많이 있었고, 참고가 된 부분도 많이 있었다.

이 책은 기존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나온 『고구려 문명기행』과 『高句麗城 사진자료집-遼寧省 · 吉林省 東部』을 저본으로 삼아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해서 가볍게 만든 책이다. 목차는 역사적 중요도에 따라 먼저 1부에서는 환인과 집안에 대해 소개하고, 뒤이어 심양과 단동을 소개하고 있으며, 2부에서는 천리장성 루트와 고구려 수도 방위성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뭐 환인-집안이야 고구려 초기 중심지인데다가 중국에서도 꽤 공을 들여 개발해놨기 때문에 한번쯤 꼭 가봐야 하는 거고, 심양과 단동은 한국에서 비행기타면 내리는 공항 둘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집어넣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즉, 1부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중국 경내의 고구려 유적 답사를 갈 때 갈 수 있는 코스와 지역들을 소개한 내용들이 많았다. 이 책에서는 환인 지역에서 볼만한 것으로 오녀산성, 오녀산 박물관, 상고성자 무덤떼(하고성자 성터) 등을 소개하고 있고 더불어 미창구 장군묘까지 소개하고 있었다. 미창구 장군묘는 그다지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고분은 아닌데, 필자도 예전에 보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내부에 연화문이 빼곡히 그려진 벽화고분으로서 장천 2호분에서 확인되는 ‘王’자형 도안으로 멋을 부려놔서 독특했었다. 아마 왕족의 고분으로 판단되는데, 책에서는 신대왕의 장남 발기가 반역을 꾀하고 실패한 뒤 그 후손들이 이 곳에 살면서 남긴 것이라는 설을 소개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발기의 반란 이후 그 후손들이 이 정도 규모와 이러한 벽화를 남길만한 勢를 유지했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남도와 북도를 가볍게 소개하고 있는데, 태자성만 달랑 소개하고 있어서 뭐 큰 의미는 없었다.

집안은 2일 코스로 소개하고 있었는데, 성곽보다는 고분에 많이 치중한 것 같았다. 기본적인 코스는 집안 박물관, 국내성, 환도산성, 산성하 무덤떼, 오회분 5호묘, 태왕릉, 광개토태왕릉비, 장군총, 우산하 무덤떼, 국동대혈, 모두루총, 칠성산 무덤떼, 마선 무덤떼 등이다. 개인적으로 이걸 제대로 살펴보려면 2일 갖고는 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일단 위에서 소개한 산성하 무덤떼, 우산하 무덤떼, 칠성산 무덤떼, 마선 무덤떼 등은 거리상으로도 상당히 넓게 분포해 있는데다가 그 안에서 봐야하는 적석총이 한 두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도 2008년 여름에 6박 7일 코스로 중국에서 ‘고구려 왕릉’으로 비정한 고분 전부를 보고 온 적이 있는데, 2일만으로 이것들을 다 소화하려니 정말 빡쎘던 기억이 난다. 당시를 회상해보면 일부는 답사 도중 GG치고 버스에서 쉬기도 했고, 단순히 내려서 사진 몇 장만 찍고, 휙~ 다음 장소로 이동한 적도 꽤 많았다(경주에 가서 짧은 기간 내에 시내에 있는 고분들을 보게 되면 아마 이렇게 이동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지역을 소개해놓은 것 치고는 내용이 부실한 부분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108쪽에 백암산성 사진과 함께 소개한 사진은 왜 여기에 들어가 있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심양 고궁 같기는 한데...뒷부분에 들어가야 맞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심양이나 단둥은 앞서 말했지만, 비행기를 타고 환인-집안 지역을 보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직항이 없으므로. 그래서 환인-집안 지역을 답사할 때면 왕복 이틀은 꼭 여기에서 잡아먹는데, 다행이 고구려 유적도 좀 있어서 적적하게 보내지만은 않는다. 먼저 심양에는 요령성 박물관이 있는데, 규모도 클 뿐더러 중국 동북방의 고고자료들을 많이 전시하고 있어서 정말 한번쯤 꼭 가볼만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예전에 갔을 때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 동안 홍산유적과 고구려-삼연 문화만 보고 나올 수 밖에 없었던 가슴 아픈 기억이 떠올랐다. 또 하나 안 좋은 점(?)이라면 요령성 박물관에는 통합적으로 소개한 박물관 전시도록이 없고, 각 전시실마다, 각 기획전시마다 도록이 따로 있어서 주머니 사정을 고민해야 하는 연구자들에게는 별로 친절하지 못 했던 기억도 났다. 그리고 책에서는 심양 고궁과 신락 유적 박물관, 서탑 거리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 책의 주제와는 좀 맞지 않아서(이 책이 단순히 심양 지역 관광지를 소개하는 책이 아니지 않는가) NG였다. 공간 메우려는 蛇足같다고나 할까? 백암산성이야 워낙 많이 알려진 것이므로 Pass하고.

단동은 박작성(호산산성)과 애하첨고성, 오골성(봉황산성) 등이 위치하고 있는데, 요동반도의 대흑산성(비사성), 위패산성(오고산성), 성산산성, 낭랑산성, 득리사산성(용담산성) 등으로 구축된 해안 방어선(2부에서 언급됨)과 연장선상에서 압록강 하구를 방어하는 성들이라 할 수 있다. 필자도 한 번도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여기에 소개된 대부분의 성들이 현재 출입 불가 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 답사를 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긴 한다. 암튼 각 성들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잘 담고 있어서 괜찮았던 것 같다.

2부에서는 먼저 고구려 천리장성 루트를 따라 여러 성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역사상 안시성, 건안성, 요동성, 신성 등으로 기록되어 있는 성들을 비롯해 길림 합달령산맥과 천산산맥 능선 상에 위치한 북동-남서 방향의 성들을 주로 소개하고 있었다. 예전에도 느낀 거지만, 이 일대의 성들은 높은 산지에 위치하는 것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요동성은 뭐 이제 시가지와 완전히 겹쳐져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국내성처럼 성벽 쪼가리도 찾아볼 수 없다), 상당수가 보존이 이뤄지지 않은데다가 경작지로 훼손된 지역도 많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지역에는 볼만한 성들이 수십 곳이기 때문에 한번에 다 보겠다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책에서도 이들 지역을 소개하면서 모두를 답사할 수는 없으니, 주요 성 몇 곳 위주로 답사하기를 권하고 있었다.

뒤이어 소개하는 나통산성, 흑구산성, 구노성, 오룡산성, 고검지산성 등은 환인-집안 지역을 環形으로 방어하는 성곽들인데, 고구려 초기부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오녀산성, 국내성, 환도산성처럼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일반인들이 답사를 자주 가지도 않는다. 역시 천리장성 루트에 있는 성들처럼 훼손된 부분이 상당히 많았으며, 이번에 답사를 가게 되면 어느 정도나 남아 있을지 걱정이기도 하다.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일반인들의 고구려 유적 답사를 위해 내놓은 책이라고는 하지만 뚜렷하게 노력한 흔적(?)이 보이지는 않는다. 즉, 중국에 답사를 가게 되면 흔히 그 곳에서 답사 가이드 팀이 짜주는 일반적인 일정에 충실히 따른 면모가 보였다. 물론 전문가도 아닌 일반인들이 산간 벽지의 산성이나 고분들을 찾아가지는 않겠지만, 너무 간단하게 소개한 면이 없지 않나 싶다. 아까도 말했지만 명색이 고구려 유적 답사가이드를 표방한 책이면서, 오히려 관광 소개서 정도밖에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필자 개인적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혹여나 아직 중국 답사를 가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기본적인 자료를 제공하는 책으로 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서 이 책에 수록된 사진의 상당수를 제공받았는데, 성균관대학교 박물관에서 무슨 연유가 있어 이런 사진들을 많이 갖고 있는지가 좀 의문이었다. 고구려 관련 전공자가 많은 것도 아니고, 고구려 연구기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암튼...소소한 생각을 하면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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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 광개토 태왕 세트 - 전2권
이현세 그림, 예영 글, 김용만 감수 / 녹색지팡이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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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장은 원래 만화책을 잘 안 산다. 다운받아서 보거나 만화방에서 빌려보고 말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학습만화'라는 이름표를 달고 상당히 많은 분야를 만화로 배울 수 있어 예전과 많이 다른 것 같다. 특히 역사만화책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어 구입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한때 만화가를 꿈꾸기고 했던 주인장이기에 이현세는 주인장에게 있어 무한한 존경의 대상이었고 지금도 주인장이 단연코 최고로 손꼽는 작가이기도 하다. (주인장이 어렸을때 사생대회를 나갔다가 이현세 선생님을 만나 싸인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 싸인은 이사가면서 잃어버렸지만 -.-;) 암튼 이현세가 최근 한국사 만화를 그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광개토태왕을 대상으로 또 만화를 그렸다기에 주저없이 사게 됐다.

광개토태왕을 주제로 한 만화는 알다시피 거의 없었다(최근에는 관련 만화가 꽤 나오고 있지만). 물론 관련 기록이 생각 외로 편파적(?)이고 양이 적기 때문에 관련 연구성과도 많지 않으니까 만화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하겠다. 예전에 주인장이 재밌게 봤던 '태왕북벌기'라는 만화(소설 광개토대제의 내용을 많이 차용해서 옥의 티였던), 그리고 최근 네이버웹툰(http://comicmall.naver.com/webtoon.nhn)에 연재되고 있는 '태왕 광개토'가 거의 유일한 작품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그 중에서 이현세의 만화는 단연코 수작(秀作)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태왕북벌기'를 보면 어려운 정치적 상황을 이겨내고 담덕이 왕이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서 담덕 개인의 고뇌라든가, 그의 국가 경영 전략 등은 찾아보기 힘들고 아무래도 화려한 무공과 뛰어난 군사적 업적이 강조되어 있었다. '태왕 광개토' 또한 비슷한 내용이지만 다소 픽션이 가미되어 재미를 추구했다는 점,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만한 여러 요소들을 도입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옛날 만화보다 더 볼만한 것이 사실이다. 그에 반해 '광개토태왕'은 보다 사실적이고 담덕의 내면적인 부분에 주목했다. 호위무사를 따돌리고 놀러간 자신 때문에 매를 맞게 된 그들을 보고 울음을 그치지 못 하는 어릴적 모습, 태학에서 여러 귀족 자제들과 공부하며 전략을 논하는 모습, 왕이 되기 전 어떠어떠한 왕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그의 포부 등 보다 직접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광개토태왕을 그리고자 노력한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담덕이 왕이 되기 전 그의 정치적 입지가 불안했다고 묘사하는 여타 작품들과 달리 역사적 사실에 입각해서 그렸다는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알다시피 고구려는 4세기로 넘어오면서 왕이 수만의 대군을 동원할 정도로 상당한 수준의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했기에 소수림왕-고국양왕에서 광개토태왕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정치적 불안정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더불어 정복군주의 이미지가 강한 광개토태왕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곳곳에 숨어 있었다. 백성들을 사랑하는 왕비의 모습이라든가, 백제와 신라를 아우르고 외세를 막아내는 당당한 군주의 의지 등을 엿볼 수가 있었다. 확실히 문헌이나 기록에 남아있는 광개토태왕의 면모는 정복군주로서의 이미지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그 외의 이미지도 분명 상상해볼 수는 있지만 그것을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바로 그런 부분을 만화나 소설 등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분야가 계속 발전되길 또 바라는 바이다.

암튼 이번에도 역시 이현세는 주인장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광개토태왕의 면모를 안팎으로 고루 묘사하기 위해 애쓴 작가의 노력이 엿보이는 이번 작품은 어른 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에게 분명 좋은 선물로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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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학자가 쓴 고구려사
강인구 외 옮김 / 학연문화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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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 孫 두 선생님의 내용 전개에서, 고구려 왕들에 대한 평가는 혹독하고 인색하며, 고구려의 국가정책은 대부분 부도덕한 행위로 일관되게 貶下하고, 고구려와 중국 정권의 갈등과 충돌 부분에서는 사료의 취사선택과 평가에서 불균형이 자주 발견되며, 국제관계에서 冊封과 朝貢이라는 당시의 일반적인 국제관계를 지나치게 사실관계로 확대하였다는 일반의 평이 있었다. 예를 들어 對隋 · 對唐 전쟁을 기술함에 있어서 중국측만을 일방적 主로 기술하고 고구려를 상대위치에 놓고 짧게 기술함으로서 이 책이 高句麗史인지 中國史인지 의문이 든다는 말도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화사상 중심사고에서 나온 주장, 고구려를 속방시한다든가, 변방정권시 한다든가 하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제외하면, 특히 고구려의 문화에 관하여는 탁월한 안목과 오랜 현장경험을 토대로 쓰여졌기 때문에 어느 저서보다 정확하고 자세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독자들에게 큰 써비스가 될 것으로 믿는다.

역사는 李 · 孫 두 선생님의 깊은 학문적 업적과 높은 학자적 양심을 굳게 믿는 입장에서 이 現狀을 두 가지로 해석하고 싶다. 하나는 中華思想이 아직도 중국사회에 뿌리 깊이 남아있고, 다른 하나는 중국이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필요하였던 사상 통합이 상존한 상황에서 정치경제적으로는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는 시대적 환경도 영향하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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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 서문(p.22)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 이 책의 장단점을 잘 표현한 글이라 생각해서 옮겨왔다. 맞다. 이 책은 동북공정과 함께 추진된 고구려 중국사 만들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그 안에는 우리가 보는 내내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억지 주장을 펴는 부분도 있고 황당한 부분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가 쉽게 접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잘 정리해놓은 부분들도 있기 때문에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고 생각한다. 즉, 이 책을 읽고 중국 학계의 견해에 쉽게 동조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이 책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소리이다. 

먼저 이 책은 고구려사에 대해 아주 가볍게 읽을 수 있게 만들어졌다. 본래 제목도『高句麗簡史』였으니까 말이다. 편차의 목차는 고구려의 흥기, 확장, 통치, 고구려와 중원의 관계, 강역, 도성, 경제, 외교, 멸망, 문화 이렇게 10개로 이뤄져 있으며 2명의 공저자가 반반씩 나눠서 정리했다. 그러다보니 양자간에 겹치는 내용도 다소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몇몇 요점만 잘 집어서 정리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책을 주욱 보면 알 수 있는 점은 비록 이 책의 주인공은 고구려지만, 역사서술의 주체는 중원 왕조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중국 군현이나 주변 세력에 대한 고구려의 정복 결과를 이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대무신왕이 남쪽으로 낙랑군을 공격하자 후한의 광무제가 병력을 보내 낙랑군을 수복하게 된다. 그 사실을 두고 저자는 고구려의 세력확장이 제한을 받았지만 한반도 북부지구의 점령은 동한의 인가를 얻게 되었다(p.53)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실력으로 점령한 영토를 두고 마치 후한과 협상을 벌여 영토를 양분해 다스리기로 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던 것이다. 더불어 모본왕에 대해 논할때는 주인장이 개인적으로 '하북정벌전'이라 부르는, 고구려의 하북지방에 대한 약탈전과 관련된 내용은 아예 기재하지도 않았다(p.54). 단지 그가 포악하고 정치를 잘 못해 부하에게 죽었고 그로 인해 대무신왕이 닦아놓은 기반이 흔들렸다는 해석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국조태왕에 대해서는『후한서』의 기록을 참고하여 그가 즉위 69년, 76세의 고령으로 죽었다는 해석을 내놓아 눈길을 끌었다. 이 부분은『삼국사기』에 적힌 국조태왕의 기록과 다른데 이 부분에 대해서 주인장 역시 의문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중국측 해석이 적절하다고 생각도 든다. 어쨌든, 이 기록을 책에서는 국조태왕이 한의 현도군을 공격했다가 5만명이 패하고 전사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거론했는지 몰라도 한국 학계와 다른 내용들은 눈여겨볼만 했다. 또한 연개소문에 대해 굉장히 악감정을 갖고 책을 썼는지 연개소문 당시 고구려인들 스스로 그 폭정에 못 이겼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고구려가 멸망한 당위성을 그 부분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이 보였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고구려에 대해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니 그리 되면 고구려 문화가 중국과 많이 다르고 또 우수하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졌음을 살펴볼 수가 있다. 특히 중국은 진한 시대 이래 일찍이 노예제 통치를 벗어나 봉건사회 대발전기로 진입했지만 고구려는 770여년간 노예제 통치를 유지했다고 적고 있다. 역대 통치자들이 군사력에만 힘을 쏟아 생업에는 힘쓰지 않았으며 그나마 노예제도 발달된 노예제가 아니었다고 적고 있는 것이다(p.103). 하지만 뒤에 가면 고구려의 노예제 통치는 발달된 노예제에 속한다고 한 부분(p.107)이나 5세기를 전후로 해서 노예제 생산관계가 완강하게 존재하고는 있지만 이미 쇠퇴하여 해체되고 있었다(p.209)는 내용이 나와 논지에 일관성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사실을 아니라고 전제하고 억지로 끼워맞추다 보니 생기는 당연한 현상이라 하겠다.

이렇게 억지스러운 주장을 펼치는 부분은 고구려의 군사 업적과 관련해서 간간히 눈에 띈다. 209년 산상왕때의 환도성 천도를 공손강의 고구려 침략과 맞물려 해석하는 부분(p.129)이나 안시성에서 고구려군 45만의 지원군 중 15만이 대패하였다는 대목(p.160), 고-당 전쟁 이후 고구려는 10개의 성과 4만의 병력을 잃었지만 당군은 강대한 고구려군의 저항 아래 2천여명이 전사하고 물자를 낭비했다는 해석(p.161) 등이 그러하다. 고구려사에 대해 조금만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 보면 웃어넘길만한 부분들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 책의 장점이라면 장점이라고 할 수도 있는 부분은 뒷부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흘승골성, 국내성, 환도성, 평양성, 장안성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를 토대로 구성한 고구려의 도성 부분과 중국에서 출토된 각종 고고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한 고구려의 경제 부분과 문화 부분이 그러했다. 한국 학계와 다른 입장 차이를 떠나서 한국학자들이 쉽게 제시하지 못하는 중국 본토의 자료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어 이 주제를 갖고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러한 자료들을 다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보다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 있겠지만 일단 그러한 자료들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큰 의의가 있는 것이라 본다. 

역자도 이미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중국 학자가 쓴 책이므로 사관이나 자료 해석에서 있어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우리와 다른 해석을 하는 부분들이 있어 이를 토대로 우리의 견해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와 왜 다른 해석을 하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서 어떤 자료들을 갖고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가치있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고구려사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꼭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만 글을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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