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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만난 한국사
김용만 지음 / 홀리데이북스(Holidaybooks)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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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공기, 햇빛 등등.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하지만 반대로 그 소중함을 잘 모르는 존재들이 있다.

당연히, 그저 당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것들 말이다. 하지만 없어지면 바로 인류의 생존에 위협이 될 정도로 중요한 것들이기도 하다. 그중 하나로 나무, 그리고 숲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인류가 무리를 이루고 삶의 터전을 확장해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자연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을 깎아 길을 내고 밭을 일구었으며, 땅을 파 내가 원하는 곳까지 물을 끌어오는가 하면, 식량자원을 얻기 위해 그 지역의 생태계를 완전히 뒤바꿔 놓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특히 많이 필요한 자원은 <나무>였으며, 나무를 얻기 위해 <숲>을 파괴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한국사를 숲이라는 키워드로 관통하고 있다. 그동안 기후와 환경에 대해 다룬 책은 무수히 많이 나왔으며, 그중에서도 숲과 나무에 대해 전지구적 또는 지엽적인 입장에서 살펴본 책들 역시 적지 않게 출간되었다.


국내에서 나온 책으로는 강판권의 『나무열전』(2007, 글항아리)와 『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2010, 글항아리), 박상진의 『우리 나무의 세계 1·2』(2011, 김영사), 양종국의 『역사학자가 본 꽃과 나무』(2016, 새문사), 전영우의 『우리 소나무』(2020, 현암사) 등이 있을테고, 외국서적으로는 존 펄린(송명규 역)의 『숲의 서사시』(2002, 따님)를 시작으로 요하임 라트카우(서정일 역)의 『나무시대』(2013, 자연과생태), 한스외르크 퀴스터(이수영 역)의 『숲의 역사』(2021, 돌배나무) 등을 꼽을 수 있겠다. 특히 존 펄린의 『숲의 서사시』를 처음 봤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나무를 갖고 역사를 이렇게 살펴보고 서술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으니 말이다. 단, 존 펄린의 책에는 동아시아, 특히 한국사에 대한 내용이 없어 아쉬웠다. 이후 국내에서도 관련 서적들이 출간됐지만, 통시적인 관점에서 한국사를 다루기보다는 특정 이슈에 집중한 반면 『숲에서 만난 한국사』는 '한국 숲의 서사시'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책은 단순히 시간 순대로 이야기를 풀어가지 않는다. 목차를 봤을때 고조선부터 삼국시대, 고려, 조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1장에서 저자는 <왜 숲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한국사에서 숲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숲이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가 숲에 대해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등의 이야기를 부담없이 시작한다. 특히 '신석기혁명'이라는 용어로 대표될만큼 농경문화가 문명의 시작이고, 농경민이 수렵 · 채집민, 또는 유목민보다 우월하다는 상식 아닌 상식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저자는 『총, 균, 쇠』의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말을 빌어 '농업의 시작을 인류 역사 최악의 실수'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러면서 농경문화에 대한 환상을 지적하고 그 실체를 파고든다. 저자는 농경민의 인구 증가 속도가 빠른 반면(장점) 쉽게 터전을 옮기기 힘들다보니(단점) 무리를 이루어 발전시키는 데 유리했다고 보았다. 거기에 사람의 욕심까지 추가하여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한 문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문명을 기준으로 세계사를 돌아보게 되고 농경문화 중심의 역사에 익숙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농경문화 이외의 역사도 분명히 존재했다.


저자는 자연스럽게 한 · 예 · 맥 · 말갈 이야기를 한다. 숲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상당히 참신한 시각이었다. 고대사를 조금 안다 하는 사람들에게 예맥, 말갈 등의 이미지를 물어보면 유목민, 추장, 기마, 약탈, 수렵 등의 키워드를 꺼내곤 한다. 실제 드라마나 영화 등 미디어 매체에서도 그렇게 묘사되고 있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 터전을 살펴보면 오히려 숲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반도와 동북지역을 위성사진으로 보면 동해안에 인접한 거대한 산맥이 백두대간을 이루면서 연해주 일대까지 뻗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역은 공교롭게도 옥저, 예, 맥, 말갈, 읍루, 숙신 등등 한국 고대사에서 익숙하게 등장하는 집단들의 주 생활무대였다. 그들의 생활풍습이나 주거환경 등을 비교해보면 유사한 점도 많았지만 차이점도 많았으며, 시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 다양한 집단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숲이라는 공간도 다양한 시각에서 접근해야 하며, 그 안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도 다양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들의 다양성이 곧 한국 고대사를 이루는 근간이 되었음을 인지해야만 한다. 저자는 아마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이야 숲이 울창한 지역! 하면 강원도! 무슨무슨 산! 이런 대답이 나오지만 과거에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숲이 있었다. 숲과 평지가 구분된 것이 아니라 숲과 평지가 반복적으로 연결된 채 전국토를 아울렀던 것이다. 이는 중국과 확연히 다른 자연환경으로서 차로 몇시간, 며칠을 달려도 자그마한 동산 하나 보이지 않는 중국과 다른 역사가 이 땅에 흐를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제 만주 지역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러 가면 차 안에서 몇시간을 바라봐도 계속 같은 풍경, 드넓은 평야만 보이기 일쑤이다) 저자는 신간수와 신시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환웅이 왜 하필 신단수를 통해 이 땅에 내려왔는지 고민해보자는 거였다. 이러한 세계수, 우주목의 존재는 비단 우리만의 시각은 아니다. 전세계에서 보편적으로 태초의 역사를 언급할 때 나오는 존재가 바로 세계수 또는 우주목의 존재이다. 숲과 나무가 전지구적으로 어떤 존재인지 다시금 떠올리게 되는 대목이다.


그럼 단군과 고조선만 그러했을까? 아니다. 역대 건국시조도 마찬가지였다. 숲은 문명의 요람이었고, 숲이 잉태한 씨앗은 곧 거대한 역사의 물결 속에서 크게 싹을 틔우게 된다. 저자는 숲에 살았던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를 소개하고, 이후 그 사람들이 이룩한 거대한 제국까지 이야기의 흐름을 끌어간다. 숲에 살았던 사람들은 특유의 강인함을 품은 채 농경과 유목의 장점을 익혀 독자적인 문명을 이룩했다. 한국사에서는 고구려가 대표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역대 왕조가 500년을 채 채우지 못한채 사라져간 반면, 고구려는 무려 700여 년을 동북아시아에서 존속하면서 그 존재감을 과시하였다. 이는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자리에 터전을 잡은 발해도 마찬가지였으며, 먼훗날 그 자리에서 흥기한 여진과 만주족도 마찬가지였다. (유소맹이 쓴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를 보면 청나라의 초기 성장 과정이 잘 정리되어 있다. 이는 고구려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도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줄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5장. 달라져버린 숲'이다. 전체 9장 분량의 중간 부분이기도 하지만 이를 기점으로 책의 내용이 크게 둘로 나뉜다. 일종의 전환점이 되는 부분이랄까? 인류가 숲을 존경하고 그 가치를 중요시 여기던 풍조는 시간이 흐를수록 변화를 맞이한다. 인간은 더 이상 숲을 '자원을 구할 수 있는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 '자원을 획득할 수 있는 탐욕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무분별한 벌목, 관리하지 않는 숲, 숯의 사용과 농경지의 확대, 거대한 건축물의 축조 등등 사람의 숲에 대한 의존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숲의 파괴 속도도 그만큼 빨라진다. 그 변화상을 저자는 '사찰'과 '돼지'라는 키워드로 재밌게 풀어쓰고 있다. 저자는 거대한 종교 건축물을 보유한 불교의 영향으로 숲으로 향했던 사람들의 경외심이 인공 목조 건축물로 옮겨졌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샤머니즘의 성소였던 숲의 나무들이 베어지고, 그 자리에는 대규모 사찰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사찰은 숲을 파괴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는 길을 택했고, 오늘날 국립공원 안에 자리잡은 사찰이 숲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서술하였다. 더불어 돼지가 본래 농가에서 기르는 동물이 아닌 숲에서 방목해서 자라던 동물임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숲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돼지도 귀중한 동물에서 혐오 동물로 바뀌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후 농경민이 중심이 되는 시대가 찾아오고, 숲을 지키지 못한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책의 후반부를 구성하고 있다. 저자는 고려사 최악의 오판으로 '동북9성 경영의 실패'를 꼽았다. 복합성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한 고려 중앙 정부의 실책으로 고려는 숲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잃었던 것 같다. 고려 후기 왜구와 몽골로 인해 고려의 숲은 더욱 더 심하게 파괴되었으며, 이는 조선으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물론 조선도 산림을 보호하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하였다. 하지만 그 정책은 원칙부터 무너졌다. 농경을 나라의 첫번째 근간으로 중시했던 조선은 농지 확보와 농민 육성을 위해 숲을 파괴하였다. 권세가들은 광범위한 숲을 사유화하였으며, 당시 그린벨트였던 국유림은 금산(禁山)으로 지정됐음에도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벌목을 지속했다. 숲의 자원을 필요로 했던 사람들은 점점 깊숙한 숲으로 들어갔고, 숲의 훼손 범위 역시 계속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삶의 터전을 잃고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화전을 일구어 당장의 생계를 해결해야 했고, 근본적인 산림 정책을 자리잡지 못 했다. 조선 말기 이를 살펴본 외국인들이 하나같이 조선의 민둥산을 언급한 것도 이해가 간다. 필자 역시 2005년 금강산 답사를 위해 동해안에 다녀왔을 때 민둥산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났다. (저자 역시 북한에서 봤던 민둥산의 충격을 책에 남겨두고 있다) 경의선 방면에서 군 생활을 했을때 봤던 휴전선 근처의 경관과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북한 주민들도 조선인들처럼 나라에서 엄격하게 접근이 금지된 지역의 숲을 제외하고는 이미 당장 쓸만한 것들이 있는 숲은 모두 허허벌판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산림 황폐화는 일제강점기에 더욱 더 심해졌다. 일제는 조선 각지에 도로와 철도를 놓고, 현대적인 시스템에 입각한 법과 제도, 관청 등을 설립하였다. 조선을 발전시켜 주기 위해서? 아니다. 보다 효율적으로 조선을 수탈하기 위해서다. 소멸하기 전의 별이 가장 밝은 빛을 내듯, 일제는 조선의 그나마 남아 있던 숲을 온 힘을 다 해 수탈해갔다. 해방 직후에도 우리 숲은 단기간에 변화되지 못 했다. 게다가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국토가 신음하는 상황 속에서 숲이 멀쩡하길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한국전쟁을 통해 새롭게 등장한 '고지전'이라는 전쟁 양상은 숲을 완전히 소멸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높은 산 정상에 자리잡은 진지를 점령하기 위해 하루에도 수차례 점령군이 바뀌는가 하면, 수십 수백번에 걸쳐 산 정상부를 차지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지니 산의 지형이 바뀌는 것도 다반사요, 나무나 풀이 자라는 걸 바라는 것도 무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전쟁 이후 많은 면에서 상황이 바뀌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산림녹화 사업은 '전 세계를 통틀어 국토 전체가 헐벗었다가 성공적으로 복원한 거의 유일한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 물론 단기간의 성과를 위해 산림녹화 사업을 추진하다 보니 부작용도 생겼지만, 꾸준한 사업 시행으로 곳곳에서 숲을 찾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특히 바다와 강, 산이 한데 어우러진 자연환경을 가진 세계의 몇 안 되는 나라가 아닐까 싶다.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사람들의 인식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리라는 보장은 없다. 여전히 담뱃불 또는 부주의한 실수로 발생한 불씨로 인해 산불이 발생하고, 특히 광범위한 규모로 발생한 산불로 인해 문화재가 훼손되고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는 일도 왕왕 발생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숲에 신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신단수와 같은 세계수나 우주목의 존재를 믿지도 않는다. 터널과 다리, 도로와 철도가 산을 가로지르거나 관통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며, 호화별장이나 리조트, 경기장이나 아파트 단지를 짓기 위해 수백년된 나무들을 벌목해버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은 꾸준히 관리되고 있으며, 도시 안이나 아파트 단지 안에는 녹지화 사업이 지속되고 있다. 모순이라면 모순일까.


여전히 우리가 알게 모르게 나무와 숲은 우리 삶의 중요한 요소를 차지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숲을 관리하고, 숲을 보유하고 있는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언제 바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나무와 숲에 대해 생각해야 하며,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 당연하면서도 중요하지만, 잊고 있었던 주제에 대해 되돌아보는 기회가 됐던 것 같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말한다.


미래의 숲이 한국사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인간이 숲을 어떻게 대할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고, 미래의 길을 제시하는 나침반이라는 말이 있다.

자! 우리의 숲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그리고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지 한번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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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대사와 사이비역사학
젊은역사학자모임 지음,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 역사비평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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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쓰는 서평. 경주로 내려와서 처음 쓰는 것 같다.

박물관 도서실에 신청해서 책은 진즉에 읽었는데 이제사 되새김해본다.

 

이 책은 작년에 한창 시끌시끌했던 이덕일(류)의 사이비역사학과 그에 맞선 젊은 사학자들의 공방전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이 기획되서 완성되기까지의 주변 상황은 책 서두에 잘 소개되어 있으니 별도로 소개하지는 않겠다) 기경량, 안정준, 위가야 등 몇번 언론에 등장한 연구자들도 있고, 그외 신진 연구자들이 대거 참여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책 속의 내용 중 상당수는 언론에도 여러번 소개됐고, 학술지에도 소개된 것들이 있어서 새로운 부분이 많지는 않다. 또한, 온라인 커뮤니티(다음까페/네이버블로그 등)에서는 이미 십수년전부터 논의되었던 부분들이기에 큰 틀에서는 익숙한 내용들이었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유사역사학이라고 불리던 게 사이버역사학으로 불리게 됐다든가, '환빠'라는 용어를 양산해낸 환단고기와 관련된 뫼비우스의 띠 같은 논의들이라든가)일단 이 책에서 주목해서 봐야할 부분들을 살펴보자.

 

기경량의「사이비역사학과 역사파시즘」에서는 사이비역사학이라는 용어의 정의라든가, 사이비역사학을 둘러싼 대한민국 사회의 현실에 대해 잘 소개하고 있어서 책 첫머리를 장식하기에 적절했다. 강진원의「식민주의 역사학과 '우리' 안의 타율성론」, 장미애의「민족의 국사 교과서, 그 안에 담긴 허상」또한 현재 한국사가 처한 현실이 어떠한가를 개괄하고 있어서 이 책이 향후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첫 관문을 잘 장식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부에 있는 3개의 장은 어려운 내용보다는, 앞으로 무슨 내용들이 나올지 판을 깔아놓는 부분인지라 가볍게 운을 떼고 있었다.

 

그리고 2부에서는 세부 주제들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이정빈과 위가야, 안정준은 '한사군(낙랑군)'에 대해서, 신가영은 '임나일본부'에 대해서, 기경량과 이승호는 '단군', 권순홍은 '신채호'에 대해서 다루고 있었다. 1부에 비해서 다소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었고, 내용 자체도 더 진지한 것들인데, 2부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다시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부에서는 이 책의 저자들이 속한 모임 '젊은역사학자모임' 구성원들이 좌담에서 토론했던 내용을 정리해서 소개하면서 향후 모임이 나아가야 할 방향, 연구자들과 학계가 가져야 할 마음가짐, 역사학계와 한국 사회와의 관계, 대중성과 전문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으면서도 올바른 길을 가야만 하는 다짐 등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이 책에 대한 나름의 총평을 몇자 적어보도록 하겠다.

 

첫째,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은 사골까지는 아니라도 왠만큼 고대사, 사이비역사학(옛날에는 유사역사학), 환단고기 등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대체로 인지하고 있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아마추어들이나 떠들 법한 얘기들이 학계에서 주목받고 이렇게 학술적인 시각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게 얼마 안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논문이나 저작 형태로는 얼마 안 된 최근의 성과물 같겠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알게 모르게 전해졌던 주장, 근거, 의견들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은 전공자나 연구자들이 언급하고 있는 것들이지만, 과거에는 아마추어나 역사동호인들이 떠들던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전자는 세련되고, 후자는 거친 형태로 접했다는 차이는 분명 있다) 이렇게 될줄 그때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그런 안일함 속에서 이덕일과 같은 이가 시대 흐름을 잘 타고 헛소리를 전파하고 있으니 그 또한 재밌는 일이다. 암튼 다시 돌아와서 이 책의 내용은 진부하다. 그렇기에 재탕의 느낌이 강하고(이미 한번 학회지에도 실린 내용이기에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별다른 편집없이 그대로 실렸기에 <신선>하다는 느낌이 적다. 이 책의 저자가 <젊은>역사학자모임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닥 새로울 게 없다는 느낌이 든다.

 

둘째, 첫번째 평과 이어지는 부분인데, 이 책의 정확한 타겟, 즉 독자층으로 누굴 염두에 뒀는지가 불분명하다. 저자(들)은 책의 전반에 걸쳐 대중성과 전문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학계가 더 이상 대중에게서 멀어지면 안 된다는 것을 수차례 강조하고 있다. 물론 세부적으로는 방법 혹은 시각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말이다. (예를 들면, 사이비역사학이라고 상대편을 규정하고 선을 긋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이다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젊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적극적인 입장과 중도적인 입장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자아! 그럼 다시 돌아와서, 이 책의 주 독자층은 누구라고 봐야 할까? 아마추어 대중들? 젊거나 혹은 어느 정도 중진급 연구자들? 식민사학자라고 종종 매도받는 원로 학자들? 이덕일과 같은 부류를 추종하는 사람들? 아니면 전혀 역사를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 역사와 대중을 결부시키기 위해 저자(들)은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시각에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책을 냈다는 말인가? 저쪽(사이비역사학쪽)을 꾸짖고 그쪽이 잘못됐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아니면 이쪽(그 반대쪽)이 옳으니 저쪽으로 쏠린 사람들의 시선을 이쪽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런 목적성이나 주제가 불분명하다는 느낌이 책을 읽는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다 보니 책의 정체성이 모호해진 게 아닌가 싶었다.

 

셋째, 이 책이 전공자들 혹은 연구자들, 아니면 역사에 관심이 있는 동호인들에게 그닥 새로울게 없다는 얘기는 첫번째에서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이 책의 정체성이 모호한 것도 두번째에서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 책이 추구해야 할 목적은 '저쪽에 쏠린 사람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아주고 이쪽의 주장이 옳음을 설득'하는 것만이 남았다고 할 수 있다. (혹시 그 밖에 노리던 것이 있음에도 필자가 짚어내지 못 했다면 이는 전적으로 필자의 우둔함 탓이다!) 그런데 그러기에는 2부의 내용이 약했다. 위에서 얘기했지만 1부에서 이 책의 기획 의도, 주변 환경 등에 대해 가볍게 언급한 것은 상당히 좋았다. 그러나 그 분위기를 살려 2부에서 뭔가 임팩트있게 독자에게 어필할 수 있는 무엇이 필요했는데, 그런게 없지 않았나 싶다. 물론 기경량의「'단군조선 시기 천문관측기록'은 사실인가」처럼 작은 주제를 갖고 심도깊게 반박한 부분은 좋았다. 이는 해당 주제나 논란에 대해서 잘 몰라도 이 글을 읽음으로써 무엇이 잘못됐고, 무엇이 잘못 알려졌고, 어떻게 관련 주제를 이해하면 좋은지 알 수 있게 정리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머지 부분들은 광범위한 주제를 십몇쪽에 담아내려다 보니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실제 이 책의 리뷰를 검색해보면 윤내현 선생님, 이덕일은 자세하게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찾으려고 노력하는데 이 책의 저자들은 그런 것 없이 간단하게 반박하려 한다는 비판도 보인다)

 

이상 3가지 정도가 이 책을 읽고 난 필자의 느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전혀 읽을만한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이 책은 그동안 이덕일과 같은 부류가 판을 치고 다닐 동안 학계에서 제대로 대응하기 시작한 첫걸음의 결과물이기에 그 결과가 100% 다 옳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크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학계에서는 이를 계기로 꾸준히 대중과 소통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올바른 역사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한국은 유럽과 달리 한중일 삼국의 역사, 정치, 문화, 경제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에 불과하지 않다. 그 이상으로 현재와 직결되는 부분인만큼 끊임없이 현재의 상황을 개선하고 잘못은 바로잡고 잘한 일은 발전시켜야만 할 것이다.

 

앞으로 이런 시도가 담긴 책이 많이 나오길 바라며 이만 줄이도록 하겠다.

진부 / 모호 / 부족 하지만 필요했던 시도! 미래를 위한 중요한 첫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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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가지 않은 길
김용만 지음 / 창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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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순간은 우리 곁에 수도 없이 닥쳐온다. 다만 열려 있고 깨어있는 자각이 없으면, 뒤늦게 지나가버리고만 기회의 순간을 통탄하게 될 뿐이다. 이런 변화의 기회를 또 다시 놓치지 않으려면, 성공했던 역사만큼이나 아쉬웠던 역사를 뒤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 (본문 45)

역사(History)라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억지로 외워야 하는 암기과목이기도 하며누군가에게는 흥미롭고 역동적인 옛날 이야기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평생 달려들어 연구해도 답을 구하지 못하는 학문일 것이다하지만 무엇이 됐든 간에 역사를 있는 그대로 알고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흥미있는 과정이며한편으로는 중요하다이 책 또한 그런 시각에서 쓰인 책이라 할 수 있다조선사를 좋아하든 싫어하든전공자든 비전공자든관심이 있든 없든...조선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노력했다는 점에서 매우 진솔한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책의 저자는 조선사 전공자가 아니다저자는 고구려 전공자로 그간 고구려사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 성과를 내놓았던 김용만으로그의 폭넓은 시각으로 쓰인 조선사 관련 서적이라 읽기 전부터 내심 기대가 됐다저자는 서문에서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면 안 된다는 명제를 걸고조선이 걸었던 길을 가감 없이 따져볼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그리고 단순히 만약~조선이 그랬다면이라는 if 식의 흥미위주 접근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지금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고현재의 선택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책은 크게 4개의 주제로 구분된다. <활짝 피지 못한 조선문명의 기대주들>, <기득권을 위해 변용된 유교의 폐해>, <잘못된 선택이 불러온 생활모순>, <잃어버린 자주·자립·자강의 꿈개인적으로 조선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지금도 그렇게 많이 좋아하지는 않는다),<s> </s>조선사에서 항상 문제라고 생각했던 점들이 있었는데이 책에서 언급된 주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그리고 이러한 부분들은 묘하게 근현대 한국사에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고질병같은 부분이라 더 정감(?)이 간다고나 할까암튼 몇몇 내용들을 중심으로 책에 대한 간단한 느낌을 적어볼까 한다.

 

먼저 한가지만 얘기하자면이 책에서 말하는 조선의 가장 큰 문제점은 <유교>라는 것을 알 수 있다물론 이 유교가 제자백가 시절의 (원시유교는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송대 이후 공고히 자신만의 색깔을 찾고주희에 의해 주자학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동아시아 각국으로 퍼져나간우리에게 성리학으로 익숙한 그 유교를 말한다중국은 높고크며조선은 그보다 낮고 작다종법적 질서에 따라 중국은 천자가 있는 천하의 중심이며조선은 그 천하관에 속한 말 잘 듣는 제후국이어야(Must do it!) 했다더 나아가 유교가 말하는 교리 중에서 사대부(양반)들에게 필요한 것들만 취사선택하는 바람에 이현령 비현령’ 식의 정책이 판을 쳤고편협하고 획일적인 사회로 방향을 강요하는데 유교가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같은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지도를 만들었던 조선이지만시간이 흐르면서 세계 지리에 대한 관심은 쇠퇴했고조선의 지식인들은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갔다화약과 함포 또한 마찬가지다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화약과 함포라고 했을 때 누구나 이순신과 거북선을 떠올릴 것이다(조금 더 공부한 사람은 최무선까지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 뿐이다임진왜란 이후 조선 수군 또는 해양세력이 조선사에서 주목을 받는 일은 사라졌다김지남이 청나라에서 극비로 배워온 염초제조법도 조선에서는 더 이상 발전되지 못했고함선이나 화포의 개발에 무감각해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연은분리법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조선 초기 명나라는 금과 은을 꾸준히 조공으로 받아갔고조선에서는 금과 은의 생산량을 늘리는 길 대신 광업을 억제하고 금은 사치 풍조를 비난하는 길을 택한다연산군 시절 개발된 연은분리법은 조선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으로 건너가 그 진가를 발휘한다근검절약을 강조하는 유교주의가 지배층에게는 적용되지 않고일반 백성에게만 강조되는 바람에 잘못된 정책이 입안되고그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로 넘어갔다유교가 사회에 잘못 적용된 경우는 건축물에도 적용되었다유교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종법적 질서로 인해 조선은 스스로를 명보다 작다고 여겼고거대 건축물을 조성하지 않았다오죽하면 광개토태왕비를 발견하고 이를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금나라 황제의 것으로 여겼겠는가패배주의에 젖어들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과 잠재력을 잃어버린 결과인 셈이다.

 

이제 저자가 왜 첫 번째 주제의 말미에 온돌을 넣었는지 이해가 좀 됐다(물론 내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세계 최고의 지도를 만들고뛰어난 화약과 함선을 만들고연은분리법도 개발했던 조선이었지만 그게 뭐?? 그래서?? 온돌도 마찬가지다우리는 온돌하면 대표적인 전통건축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지만저자는 연료에 대한 대책이 마련되지 않는 한 무제한에 가까울만큼 나무를 소비하는 온돌은 오히려 해악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그리고 저자는 온돌의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소개하고 알려야만 비로소 온돌에 대해 올바른 시각이 정립된다는 생각을 갖고 활동했지만번번히 좌절을 겪었던 사례도 소개하고 있었다순간 우리 것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전제 아래 신토불이가 한창 유행했던 때가 떠올랐다.

 

시작부터 저자는 조선의 민낯을 드러내어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고 있었다팔만대장경이나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술에 대한 이야기를 굳이 하지도 않았다(마치 거기까지 얘기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조선이 잘 한 것은 잘 했다고 하지만못 한 것은 못 했다고도 분명히 말하고 있을 뿐이다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읽는 이로 하여금 많은 생각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럼 계속 살펴보도록 하자문제점은 계속 지적됐다두 번째 주제에서는 과거시험과 족보사대봉사덕치사상조선의 학구열 등이 다뤄지고 있었다학식을 갖춘 훌륭한 인재를 뽑겠다는 과거시험은 어느 샌가 신분 획득의 자격증 시험으로 변모했고당연히 인재의 수준도 떨어지게 되었다저자는 이러한 사례를 소개하면서 과거시험 말고 다른 활로를 열어주었더라면하는 진한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더 이상 과거시험은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요한 훌륭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함이 아니라 조선에서 호의호식할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편협된 길 하나만을 남기고 나머지 가능성을 싹부터 잘라버리는 도구가 되어 버렸다저자는 2016년 짐 로저스 회장의 말을 인용하면서 특정 소수에게만 유리하도록 시행되는 제도의 문제점을 재삼 지적하기도 하였다.

 

과거시험과 함께 족보는 사대부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또 다른 강력한 무기로 변모하였다모계 대신 부계가 강조되고외가 대신 친가를 중심으로 하는 혈통이 중시되었으며이는 자연스레 조선 후기 왜 갑자기 양반이 늘어났는지를 알게 해준다현대 한국인의 조상 중에는 명재상이나 청백리도 있었지만범죄자매국노기생외국인노비 등도 있었을 것이라고 과감히(?) 얘기하는 저자를 보면서 속이 시원해졌다고나 할까어느 누가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을까족보를 지나면서 저자는 좀 더 과감하게 이야기를 이어 나간다저자는 사대봉사가 忠孝에 의거한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 세습 봉작을 받아 귀족으로 신분 상승을 꾀하고자 했던 사대부들의 욕심 때문에 생겨났다고 콕 짚어서 이야기하고 있다가문 내에 관리로 임명되는 사람이 있으면가문 내에 누군가 성공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이름을 팔아 온 가문이 덕을 보는 이상한 구조가 자리 잡게 되었고사대부들은 더더욱 쓸떼없는 사대봉사즉 제사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우리는 불과 몇 백 년 전 사대부들의 과욕으로 생겨난 제사를 마치 오랜 전통인양 목숨처럼 귀하게 여기고 있는 셈이니 그저 놀랄 따름이다.

 

재밌는 점은 조상들에 대한 의미 없는 제사에 집착했던 당시 양반들이 유교의 덕치사상에 경도되어 탁상공론만 일삼았다는 점이다덕치가 이뤄지면 자연스레 나라가 보존되고천하가 평온해질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 전개가 자연스레 통용되던 시대가 바로 조선이었다중세 유럽을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었다면중세 이후 조선은 유교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한편두 번째 주제 말미에서 저자는 조선의 백성들이 갖고 있던 엄청난 학구열을 소개하고 있다과거시험이 성공의 유일한 길로 인식되면서 어찌 보면 島嶼 지역의 백성들조차 엄청난 학구열을 지녔다는 것은 긍정적인 낙수효과로도 볼 수 있다하지만 역시 그뿐이다백성들이 공부해서 기득권층으로 발돋움하는 길은 거의 없었다부와 신분의 세습이 지속되면서 개천에서 용난다.’는 것은 불가능해졌고되풀이되는 사회구조는 보다 공고해졌다오늘날 대학에 나오고 석박사를 취득해도 놀고 있는 고학력자가 많은 것을 보면아직도 우리는 조선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들 정도이다.

 

세 번째 주제에서는 축제와 사라진 제천행사모피의 사치가 불러온 우울한 결과황칠나무가 사라진 이유노비제도와 과부재가금지법 등이 언급되고 있다여기서도 문제는 유교였다유교가 조선 사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면서고려시대 때 지내오던 팔관회그 이전부터 지내던 각종 제천행사와 각종 마을축제는 사라지고 말았다축제는 사라지고 설날한식단오추석 때 성묘하는 유교적 제사의례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이러한 축제와 제천행사가 사라지면서 상하가 분리되었다오늘날 모 정치인이 국민들을 개돼지로 인식했던 것처럼 조선시대 양반들도 그러했던 것이다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받들고조선은 무조건 중국을 받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사회 전체 구성원을 두 동강냈다이런 것들이 오늘날 新 계급주의의 근원은 아닐까?

 

조선 지배층이 과시할 때 경쟁적으로 소비했던 모피 값으로 흘러갔던 대부분의 재물이 만주족의 興起에 절대적으로 작용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고조선 때만 해도 모피 생산-유통의 중심지였고그 이후 고구려나 발해 또한 모피 생산으로 유명했는데 어느 순간 생산자와 소비자가 뒤바뀌게 된 셈이다단순히 사치를 일삼았다는 것을 벗어나 망국의 지름길을 걸었던 셈이다그와 더불어 황칠나무 또한 이익을 주는 특작물이 아니라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대상이 되어버리자 백성들은 황칠나무를 찍어 넘겼고황칠나무 생산은 그 전통이 끊기고 만다하지만 홍삼은 돈이 되기에 오늘날까지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단순한 이치가 아닌가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단순한 이치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다시한번 강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국사상 최고의 聖君으로 꼽는 세종 때문에 조선의 노비 제도가 공고히 자리 잡게 되었고병자호란 이후 제대로 가정과 나라를 지키지 못한 찌질한 남자들이 오히려 피해자이자 동족인 여자들을 인격 살해했다고 말이다그러면서 저자는 위안부 박물관의 부지로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옆 독립공원이 지정되자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이 이를 반대했다는 사례를 소개하면서 한탄한다독립운동가만 고귀하고 위대하며어쩔 수 없이 끌려가 한세대를 치욕과 어려움 속에서 살았던 위안부 할머니들은 불결하며 수치스럽고 부끄럽단 말인가어느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갖고 있던 뿌리 깊은 유교주의적 시각이 사회 전체적으로 만연한 것은 아니었을까?

 

마지막 주제에서 저자는 양성지문순득을 비롯해 환구단과 사대주의선조의 사례 등을 통해 조선의 문제점을 통렬하게 꼬집고 있었다양성지는 개인적으로도 너무 존경하고 좋아하는 조선의 정치가다물론 󰡔책에 미친 바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 천재라고 불릴만한 인재는 많았다하지만 그중에서도 양성지만큼 정책의 중심부에 가까웠던 이는 없었으며그런 만큼 더 안타까운 이도 없었다문순득처럼 원치 않게 세계를 돌아볼 기회를 가졌던 이들도 마찬가지로 조선 사회에 제대로 편입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조선에 인재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인재를 받아들일 여유와 시스템이 없었을 뿐이었다그런 나라가 500년이나 지속되면서 남긴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너무나도 깊게 뿌리박혀 있다.

 

책의 마지막으로 저자는 환구단과 사대주의선조를 언급하면서 끝을 맺고 있다최근의 대한민국과 너무 절묘하게 맞아들지 않는가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아니 정치인들 중에서 과연 대한민국이 얼마나 자주·자립·자강을 잘 실현하고 있다고 느낄까아니그러지 못한다고 미리 답을 정해놓고 친미는 종북이니친중이니 떠들어대지 않을까꼭 선조처럼 分朝를 만들고 중국에 빌붙어 내 백성내 강토를 무시하지 않는다고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다스스로 국민들의 뜻을 무시하고 사리사욕에 젖어 제대로 리더십을 발휘하지 않는 것 또한 선조와 다를 바 없는 행위일 것이다.

 

저자는 회전목마를 타듯이 강약을 조절하며 조선을 비판하면서칭찬하면서 어르고 달랬다개인적으로 조선사를 싫어하는 필자가 책을 썼다면 시종일관 강하게 비판만 했을 것이다그걸 참아내고 완급을 조절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하지만 저자는 그 와중에서도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강하게 얘기할 때는 얘기하고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 그 안에서 메시지를 끌어내기 위해 분투했다물론 잘못 이해된 유교가 전체 사회를 지배했던 조선에서 칭찬받을만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관심거리 이외에 더 발전적인 그 무엇이 되지 못했다그럼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중국화하는 일본:동아시아 문명의 충돌’ 1천년사󰡕을 보면 그 책의 저자는 오히려 조선이야말로 중국화(선진화)가 일찍 된 나라라고 얘기하기도 했다물론 필자는 그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지만이는 반대로 얘기하면 조선이야말로 小中華에 가장 걸맞는 국가가 아니었을까그러면서도 선진화라고 말하는 중국화의 긍정적인 요소는 오히려 배제하고나쁜 것만 배웠던 것은 아니었을까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씁쓸했다.

 

이 책을 읽고 곰곰이 되새겨보니 현재 대한민국에는 조선의 잔상이 너무 많이 남아있었다저자도 그 부분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조선이 잘못한 것을 한시라도 빨리 인지하고 제대로 바라보자그리고 잘한 것만 기억하지 말고 잘못했던 것을 되풀이하지 말자!! 과거의 성공 요인이 현재에 반드시 성공 요인이 되리라는 법은 없다하지만 과거의 실패 원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재에도미래에도 실패 요인이 되는 법이다그러면 우리는 조선이 걸었던 길특히 망국과 식민지배한국전쟁과 분단국가의 길은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지 않을까지난 주말 색시와 함께 소수서원과 소수박물관을 방문해 여기저기 유교의 위대함(?)과 전통이 이어지게 된 자랑스러움(?)을 한껏 느끼고 나니 더 많은 생각들이 들었던 것 같다우리는 흔히들 역사를 통해서 잘잘못을 분별하고 더 발전적으로 나아가는 지침으로 삼곤 하는데이 책 또한 우리에게 그런 지침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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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오만의 역사
이희진 지음 / 동방미디어 / 2001년 8월
평점 :
품절


저자인 이희진 선생님의 책은 이번이 4권째다(공저 1권 포함). 맨 처음 전쟁사 책(『전쟁의 발견』)을 접하고, 저자가 전쟁사 전공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보다는 식민사학과 관련된 연구로 더 유명한 분이었다. 이 책은 지난번에 읽었던『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와 어떻게 보면 내용면에서 많이 유사한 책이다. 그 책보다 한참 먼저 출간되었기 때문에 내용면에서는 분명 차이가 있지만, 기본 골조는 크게 차이가 없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다루고 있는 내용은 당연히 '식민사학'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일본서기』, 그 와중에서도 임나에 대해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일단 책의 앞부분에는 과거에 방영했던 역사스페셜(필자는 이때 방송을 못 봤지만, 대강의 내용은 들어서 알고 있다)의 내용을 까는(?) 내용들이 나온다. 그래서 자칫 이 책의 주요 흐름이 역사스페셜을 까는 것인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서다보니 파급효과가 크고 사람들이 많이 알고 있는 공영방송을 까는 것이 독자들의 이해력을 높이는데 더 효과적이라는 것은 안다. 이미 저자는『전쟁의 발견』에서도 컴퓨터게임인 <스타크래프트>를 이용해 전쟁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력을 높이고자 했으니 말이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법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리 교양서라고 해도 역사서적인데 이렇게 하면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암튼, 저자 개인이 선호하는 방식에 대해서 뭐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 책 앞부분에서 역사스페셜 방송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다룬 것은 조금 NG였다는 생각이 든다. 

전체적으로 앞부분의 내용은 나중에 나온 책이지만, 필자가 이보다 먼저 읽었던『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와 큰 차이가 없다. 아니, 오히려 더 적은 얘기들을 하고 있어서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다만, 필자는『일본서기』를 단순히 2주갑 인상해서 연표를 맞추는 것도 전적으로 믿을 수만은 없다고 보는 쪽이라서...그 부분에 대해서는 별말 안 하고 넘어가겠다(학계 대다수의 중론을 깨부실만큼 아직 필자가 그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라서). 암튼, 기본적으로『일본서기』가 문제가 있는 책이고, 그 안에 헛점이 많다는 저자의 지적에는 공감한다는 정도만 밝혀두고 싶다. 

앞부분에서『일본서기』얘기가 주축이었다면 그 다음에는『삼국사기』가 언급되고 있다. 여기에서 주로 다루는 것이 바로, 한국고대사학계의『삼국사기』비판(근거없는)에 대한 저자의 비판이었다. 실제 저자가 언급한 그런 고대사학계의 논문을 필자도 본 적이 있고, 그런 내용의 수업을 들었던 적도 있다. 그리고 필자가 늘 이상하게 생각했던 부분에 대해 저자가 콕 집어주고 있는 것 같아서 시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식의 역사 해석이 문제가 있음을 여러 후학들이 알고 있고, 이를 따르지 않는 연구성과들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쓴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이지만, 불과 몇년전에 나온 또 다른 책에서도 저자가 식민사학에 대해서 동일한 생각을 갖고 있어서 조금 놀랐다. 분명 식민사학의 잔재는 남아 있지만, 10년 전과 지금은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 직후와 이 책을 썼을 10년 전의 상황도 분명 달랐을 것이고. 그런데 저자의 책을 보면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이 식민사학이 학계를 장악하고 있고,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고 강경하게 주장하고 있다. 만약에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또 다른 책을 준비 중이라면 식민사학의 현실태에 대해서도 좀 자세하게 썼으면 하는 바램이다. 분명히 변화하고 있는 학계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몇몇 사실, 변화하지 않은 몇몇 사실만 계속 언급하는 것은 옳지 못 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도 역시 저자의 '고고학'에 대한 비판은 이어지고 있다. 저자의 책에서 필자가 여러번 지적했듯이 저자가 고고학에 대해 비판하는 부분 중 상당 부분은 잘못된 비판이라는 얘기를 한 바 있다. 이 뒷 책들에 대해서 한 비판을 그보다 앞서 쓴 책에서 다시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겠지만, 몇가지만 적어보도록 하겠다. 

1. 고분에서 출토된 관모나 거울, 대도, 장신구에 대해 저자는 이는 교역에서도 흔히 다루어지는 물건들이므로, 정치적 상황과 상관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물건들은 정치적 상황과 연계해서 해석되는 물건들로서 일반 토기류와는 차원이 다른 위계품들이다. 이를 단순히 교역에서 다뤄졌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그냥 저자 개인의 생각일 뿐이다. 야마모토 타카후미 선생님의『삼국시대 율령의 고고학적 연구』을 보면 이런 부분에 대해 잘 정리되어 있다. 과거의 유물을 현재의 시각에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 고고학에서의 유물 연대 측정이 오차가 크다고 지적하면서 고고학에서 말하는 연대를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고고학에서는 단순히 자연과학분석에 의존한 탄소연대측정법만 갖고 편년을 하지 않는다. 이는 어디까지나 보조 자료일 뿐이다. 그리고 AMS 연대측정의 경우는 C14보다 더 정밀한 결과를 얻을 수 있고, 그외에도 연대 측정에 사용 가능한 방법은 굉장히 많다. 단순히 탄소연대측정법 하나만 갖고 고고학의 연대 측정이 어떻다~라는 것은 문제가 있는 시각이다. 사이토 츠토무 · 타구치 이사무 선생님의『고고자료 분석법』이라는 책만 봐도 고고학에서 연대측정에 어떤 방법들을 쓰는지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3.『가야연맹사』를 비롯한 가야사 관련 저서를 많이 저술한 김태식 선생님에 대해 저자는 비판을 가한다. 그런데 재밌는 것이 그 선생님을 비판하면서 고고학을 비판한다는 것이다. 김태식 선생님은 정작 고고학자가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그 선생님의 연구성과는 오히려 가야 고고학 전공자들에게도 비판받고 있는데(당장 필자만 봐도 김태식 선생님의 견해는 문제가 있다. 비전공자인 필자가 봐도). 그러한 사실을 거론하지 않고, 책에 이렇게만 써 놓으면 독자들은 이게 정말로 고고학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4. 저자는 이렇게 얘기한다. '고고학을 빌미로 생겨난 신화 중 또 다른 것 하나는 정치적 변혁은 반드시 고분 · 유물에 반영된다는 발상이다'라고. 어느 고고학자가 단순하게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유물 및 유구에 반영될만한 정치적 변혁이 있을 경우에 그렇다고 하는 것이지. 이는 단순히 정복자들이 피정복민을 학살하거나 쫓아내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저자는 이를 아주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렇게 따지면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왜 시기별로 토기가 변화하겠는가? 그때마다 주민이 전부 교체됐으니깐? 그리고 변화하지 않는 시기는 주민 교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아니다. 유물의 변화 양상을 단순하게 '정치적 변혁'이라는 용어 하나로 대체하려니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박순발 선생님의 경우, 백제토기의 탄생 시점을 곧 백제라는 국가의 등장 시점과 맞물려 해석한다. 그리고 그 시기를 3세기로 잡는데, 물론 필자는 이에 반대한다. 문헌에 이미 건국된지 수백년이 지난 백제가 왜 3세기에 등장했다고 해야 하는가? 그런데 분명한 것은 3세기를 기점으로 백제토기에 있어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종의 탄생과 새로운 제작기법의 등장 등등. 이런 부분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즉, 저자의 저런 생각은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린 생각이라 할 수 있다. 유물 해석의 다양한 사례를 저 한줄로 대체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틀린 것이지만, 저런 생각이 기본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맞기 때문이다. 

5. 저자는 나주 반남 고분을 두고 '고분 규모는 참고자료일 뿐'이라고 한다. 잉? 이건 또 뭔 소리인가? 저자는 가야 고분이 백제보다 크지만 가야가 백제보다 강력하지 않았고, 고구려 고분이 전방후원분보다 작다고 고구려가 왜보다 약소국이었다~라고 보지는 않는다...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 크기'뿐'만이 아니다. 예전에 옹관 문화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한 글(클릭)에서도 적었지만, 4~5세기에 등장하는 옹관 문화가 이전 시기의 것과 격을 달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왜 갑자기 4~5세기에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가 6세기에 사그라드냐는 것이다. 그리고 하필 그 시기에 거대한 대형 옹관묘가 나타났다는 것이 관건이지, 단순히 영산강 유역에 큰 무덤이 있어서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만약 고구려나 신라의 경우에도 특정 지역, 특정 시기에 거대 고분군이 존재한다면 분명 이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현상이라 할 수 있겠으나 고구려와 신라의 경우에는 이런 흔적이 없다. 그래서 영산강 유역이 백제사와 맞물려 더 특이한 존재이기도 한 것이고. 하나 더 말하자면, 한성백제 시절에 충남 연기군에서 백제 고분이 1기 확인되었는데, 이는 지금껏 확인된 백제 고분 중 최대 규모의 지하식 석실분이다. 그리고 이를 비롯해 백제 각지에는 지역색이 강한 지방 수장층의 것이라 볼만한 고분군이 많이 있다. 이는 고구려와 신라와는 분명 다른 현상이다. 그래서 필자는 백제의 지방통치제도가 고구려, 신라와 달랐다고 생각한다. 

암튼, 대강 이 정도다. 그밖에 2개의 백제라든가, 백제의 요서진출에 대한 부분은 필자 역시 저자의 지적과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일단 근거가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뭔가를 얘기하는 것은 굉장히 문제가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헌 몇줄을 두고 이리 해석하고, 저리 해석해서 기존과 다른 견해들을 내놓는 것에 필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필자가 저자의 책에 대해 갖는 생각은 딱 세 가지다. 

   
 

첫째는 아무리 일반 대중들을 위해 쓴 책이라 할지라도 너무 쉽게 다가서려고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기본적으로 역사 관련 교양서라면 어느 정도 전문성을 겸비해야 하는데, 저자는 전문적인 지식 전달의 방법으로 너무 대중적인 방식을 써서 오히려 책의 수준을 낮추는 듯한 안타까움이 늘 배어있다. 특히『전쟁의 발견』에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그 中道라는 부분에 점수를 준다면 그리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다. 

둘째는 식민사학에 대해 열심히 파헤쳐서 아무도 가지 않는 힘든 길을 가는 것은 인정한다.『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에서도 분명히 밝혔듯이, 그건 아무나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 문제는 너무 그쪽에 대한 생각이 강하다보니 생각하는 바가 極으로 치달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위에서 적었듯이 식민사학이 분명 예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고, 그 잔재가 있는 것은 누구나 인정한다. 하지만, 늘 한결같지는 않지 않은가? 분명 변화가 있고 그 안에는 부정적인 변화와 함께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에서 저자는 늘 골고루 언급하지 않는다. 식민사학이 지금도 남아있고, 어떻게 남아있는지만 언급한다. 그래서 저자의 책을 보면 분명 아닌 것도 있는데, 왜 그렇다는 것만 강조할까? 라는 생각이 든다. 일반 대중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떻겠는가? 그리고 관련 학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할까? 싶다. 

셋째는 고고학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이 눈에 띈다. 문제는 저자가 고고학 관련 논문이나 책은 거의 인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저자가 고고학을 비판한다고 하지만, 정작 그 비판의 대상은 고고학계의 중핵을 이루는 사람도 아니다(김태식 선생님처럼). 또한, 이전에 썼던『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에서도 언급했지만, 고고학계를 정식으로 비판하려면 그 학문적인 부분을 논리적으로 공파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면모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고고학 논문이나 책을 비판하려면 당연히 그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으로 갖춰져야 한다. 그런데 그런 것 없이 몇몇 해석, 고고학을 인용한 역사학자의 주장들만 갖고 고고학 자체를 비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실제 이 책의 참고문헌 목록만 봐도 제대로 된 고고학 논문이나 책은 하나도 없었다. 저자의 고고학에 대한 생각은 이 책에서 쓴 것이 그대로 이후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뭐 나중에 다른 책의 서평을 쓴다해도 빠짐없이 나오긴 할 것 같다. 그렇다고 저자가 생각을 바꾸지도 않을 것 같고.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대 1차 사료인 고고자료와 문헌이 상충된다면 고고자료가 우선시 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나주 반남동 고분군 같은 녀석들 말이다. 이를 단순히『삼국사기』에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지 않는데, 혹은 백제가 이때까지도 마한을 합병 못 했다고...흥분할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따져보는 것이 수순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고대사 연구에 있어 고고자료를 빼놓고는 고대사를 온전히 복원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했을때 저자의 고고학에 대한 인식은 저자 스스로의 연구에 있어서도 마이너스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이상이다. 전체적으로 쓴지 좀 된 책이라 그런지 최근에 읽었던 것보다 필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나 이번 책에서는 전체적인 일관된 줄기가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처럼 아예 식민사학에 대해 비판을 하는 글을 쓰려고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 책에서는 그것이 뚜렷하게 잡혀 있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책 전반적으로 그런 분위기는 풍겼지만 말이다. 그러다보니 초반부의『일본서기』비판에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식민사학 비판까지 이어지던 분위기가 중간 이후로 갑자기 고고학 비판으로 넘어가더니, 무령왕릉이 과장된 평가를 받고 있다고 하고, 백제의 요서 경략설 등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어가고 있었다. 임나 등으로 시작한 내용이 왜로 넘어가더니 이것이 백제로까지 연결된 셈인데, 이 과정에서는 식민사학에 대한 내용이 점점 엷어져 고고학에 대한 비판이 主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앞뒤 연결이 매끄럽지 못 하다는 생각을 했고, 그것이 더 먼저 읽은『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과 비교되면서 더 크게 와닿았던 것이 아니었나 싶었다. 

전체적인 역사에 대한 접근법이라든가, 저자의 시각은 이미 책을 통해서든, 온라인을 통해서든 여러번 접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언급하지 않겠다. 그리고 식민사학 타도(?)를 위한 저자의 열의 또한 인정하지만, 필자가 위에서 말한 세가지는 안타까운 부분이다~라는 말로 끝맺음을 맺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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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백제 첫 도읍지 - 풍납토성은 백제 왕성이 될 수 없다!
강찬석 지음 / 소나무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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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간만에 백제사 관련한 책을 소개하려고 한다.

최근에 풍납토성에 대하여 인터넷 공간에서 토론이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토론 상대자의 책을 읽어봐야겠다~싶었고, 그래서 구입했던 책이다. 개인적으로 풍납토성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도 없고, 전공분야도 아니기 때문에 온라인상에서 토론을 하는 편은 아니다. 더군다나 경제적인 문제와 맞물려 아주 복잡한 녀석이기 때문에 더더욱 여기에 발을 들이기가 싫다. 그런데 최근에 이 책의 저자인 강찬석 쌤과 온라인상에서 말을 섞을 기회가 있었고,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토론이 이뤄지게 되었다. 

2011년 5월 12일 - 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 아닌 이유 by 강찬석 쌤
2011년 5월 16일 - 풍납토성은 왕성이다? 아니다? by 여휘

강찬석 쌤이 쓴 글은 책의 내용과 대부분 일치하며(전부는 아니다. 그래서 그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따로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이 책에 대한 세부적인 비평은 삼가하도록 하겠다.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뭐야 이거! 자기 귀찮다고 이런 식으로 리뷰를 써!?'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풍납토성에 대해서 최근에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링크된 글을 참고하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암튼, 다음까페에서 진행된 강찬석 쌤과의 토론은 어느 정도 상대방의 생각을 알아가는 차원에서 제대로 진행되어 가고 있었는데 제3자들(풍납토성과 관련된 경제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치들)이 끼어드는 바람에 토론은 중단되고 말았다. 

대신에 이글루스 블로그에서 이 책의 공동저자인 이희진 쌤과 이 부분에 대해 재차 토론을 진행할 수 있었다. 지금 토론은 진행 중이며, 서로 개인적인 사정으로 잠시 중단된 상태이다. 일단, 풍납토성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서 문헌사학(이희진 쌤)과 고고학(필자)의 입장 차이가 있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 서로 어느 정도 이해를 한 상태이지만, 합의점을 도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다소 평행선으로 갈지도 모르지만, 계속 토론을 진행하려고 하는 상태이다. 

2011년 5월 16일 - 풍납토성은 왕성인가? 아닌가? by 여휘
2011년 6월 7일 - 시궁창싸움 아닌 진짜 토론을 한번...-풍납토성 by 이희진 쌤(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0일 - 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by 여휘(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0일 - 고고학이냐 문헌사학이냐의 차이일까? by 이희진 쌤(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0일 - 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 1 by 여휘(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3일 - 왕궁과 왕성, 도성 by 이희진 쌤(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3일 - 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 2 by 여휘(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4일 - 생산적인 논의로 가고 있는 듯... by 이희진 쌤(윗 글의 트랙백)
2011년 6월 14일 - 풍납토성의 왕성 여부 (1) - 3 by 여휘(윗 글의 트랙백)

이상이다. 한 일주일간 논의가 진행되었고, 총 21개의 주제에 대해서 이제 한개가 겨우 마무리가 된 듯 싶다. 위에 링크를 건 9개의 글을 다 읽기에는 무리가 있고, 또 필자가 그걸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기에 여기에 간략하게 요약하겠다. 필자는 기본적으로 고고학적으로 왕궁이 나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국의 도성으로 볼 수 있는 여러 조건들(거대한 건물지, 제의공간, 다양한 유물, 거대한 성벽 등)이 있기 때문에 현재 고고학계에서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다고 보았으나, 이희진 쌤은 그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필자 또한 풍납토성을 왕성으로 보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백제의 도성이 몽촌토성이라고 배웠으니깐. 하지만 몽촌토성의 대안으로 풍납토성이 제시되어 기존 견해가 수정된 것처럼, 지금의 견해가 수정되려면 풍납토성의 대안이 될만한 무언가가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면 눈에 보이는 실물자료를 연구대상으로 삼는 고고학자가 다른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봤을때 이 책의 가장 큰 단점(약점?)이랄까. 그건 바로 고고학적으로 백제 왕성이라고 주장되는 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려면 똑같이 고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쓴 공동 저자 두 분은 건축역사학자이자 문헌사학자이다. 고고학적으로 아직 배우는 입장인 필자보다도 아마추어일 수 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서로 다른 시각에서의 접근법은 상호 도움이 별로 되지 않는다~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물론 참고는 될 수 있겠지만. 만약 이 책을 쓴 공동저자 중 고고학자가 들어 있다면 책의 목차나 내용이 결코 이렇게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고고학자는 토기 몇점, 초석과 같은 석재 몇점이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확대해석하지 않는다(아니, 그래서도 안 되고). 또한 전면 발굴이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설프게 추론해서도 안 된다(이런 부분에서 풍납토성 발굴책임자들은 조금 성급했던 측면이 있었다. 그건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문헌사학자라 하더라도 고고학자의 견해를 까기 위해서는 최소한 고고학자와 같은 마인드로 접근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그런 부분은 많이 결여되어 있다. 차라리 문헌에 기초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미 태생부터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라는 현재 중론을 반박하기 위해 쓰여진 책인데 그게 무슨 소용인가~싶기도 했다. 하지만 고고학자의 논리를 공파하기 위해 철저하게 고고학적 논리로 무장하지 않은 것은 분명 공동 저자들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그럼 전체 목차를 따로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며, 다만 온라인상에서 구체적으로 토론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좀 자세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이 글 또한 이희진 쌤과 강찬석 쌤과 추후 있을 온라인 토론에 적용될 것이며, 서로간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고학적인 부분에 대해서 좀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한다. 어차피 문헌적인 부분에서는 문헌사학자인 이희진 쌤을 당해내지 못 할 것이니 말이다. 

1. 아차산장성에 대한 부분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가 예전에 쓴 글(클릭)이 있는데, 중요한 것은 제대로 발굴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문제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 문헌적인 측면에서 왈가왈부 할 수는 있지만, 고고학적으로 이렇다 저렇다 뭐라고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한 장성이라는 존재가 만리장성과 같이 거대한 방어시설이 아니라, 이미 후대 훼손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이기 때문에 주변 일대를 전부 전면 제토해서 발굴조사하지 않는 이상, 그 성격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의 입장에서 이것이 백제 도성과 관련해 해석되는 것은 무리하다고 여길 수 밖에 없다. 

다만, 필자가 이에 대해서 필자의 논문에서 언급했던 것은, 고구려와 관련이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으나 그것 역시 정확한 것은 아니다~라는 시각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책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141쪽). '아차산장성을 고구려군이 쌓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별 타당성은 없는 듯하다. 아차산장성이 쌓여 막고 있는 방향은 고구려군이 백제를 공격하는 루트를 막는 방향이다. 굳이 자신들의 공격 루트를 차단하는 성을 자기들 손으로 쌓을 필요가 있었겠느냐는 것이다.'라고. 그런데 위에 제시된 지도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아차산장성은 아차산 정상부 능선을 따라 존재하며, 이는 오히려 고구려 보루들의 교통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여기에 대해 고구려군이 백제를 공격하는 루트를 막는 방향이라는 소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2. 뚝섬 불상에 대한 부분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145~146쪽). '고구려 것인지, 백제 것인지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백제 불상이라고 본다. 만약 이 불상이 백제 불상이라면 이 역시 백제 북성의 존재에 대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이 불상이 나온 지역이 바로 아차산 지역과 바로 붙어 있는 뚝섬 지역이기 때문이다.'라고. 과연 그럴까? 

맨 처음 뚝섬 불상이 발견되었을 때 김리나 선생님은 어느 나라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했지만 문명대 선생님은 이를 고구려 불상으로 이해했다(http://blog.naver.com/kw4?Redirect=Log&logNo=10038554541). 그리고 현재에는 고구려 것인지 백제 것인지 정확하게 얘기가 나오지 않고 있는데(http://arts.search.naver.com/service.naver?where=arts_detail&query=%EB%9A%9D%EC%84%AC+%EA%B8%88%EB%8F%99%EB%B6%88%EC%A2%8C%EC%83%81&os=643298), 이 책의 저자들은 어떻게 이런 확신에 찬 발언을 할 수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책 뒤에 적혀 있는 참고문헌을 봐도 뚝섬 불상과 관련된 논고는 딱히 없는 것 같은데, 근거가 궁금했다. 하물며 '대체로' 백제 불상이라고 본다면, 이 대체로에 들어가는 학자들이 꽤 있다는 소리인데, 이상하다 싶어 논문을 검색해봤다(왜냐하면 필자가 학부생때 배울 때에도 이를 고구려 불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정영호는 고구려의 불교 전래가 372년이므로 4세기 말부터는 중국에서 불상을 가져갔다고 보고 그 한 예로 1959년 확인된 뚝섬 불상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5세기 경으로 올라가는 확실한 유물은 아니라고도 했다(2001,「고구려불상조각의 특성 연구」『고구려연구』12, 고구려연구회, p.1043). 문명대 선생님(2003,「불상의 전래와 한국 초기 불상 조각, 뚝섬 금동불좌상」『한국의 불상 조각Ⅰ-삼국시대 불교조각사 연구-』, 예경, pp.147~154)과 양은경(2008,「대륙과 해양을 품은 고구려 불교조각」『선사와 고대』, 한국고대학회, p.76)은 이것이 5세기대 고구려 불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김리나 · 강우방 선생님은 뚝섬 불상이 한성백제 권역에서 출토되었지만, 그 조형이 북조나 남조에서 바로 건너온 것인지 아니면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모른다고 하고 있다. 즉, 백제 영역 안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백제 불상의 조형으로 보고 있지만, 이에 대해 뚜렷한 입장을 밝히고 있진 않았다(1993,「백제초기 불상양식의 성립과 중국불상」『백제연구총서』3,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pp.233~236). 반면, 이를 백제의 불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연구성과는 찾지 못 했다. 즉, 현재 학계에서는 고구려 것인지, 백제 것인지 모른다는 견해와 고구려 것이라는 견해가 양립하고 있지, 대체로 백제 불상으로 이해하는 입장은 누구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즉, 이 책의 저자들은 이 불상이 백제의 것이라는 전제 아래 논지를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이 전제 자체가 재고의 여지가 있다면 저자들의 논지 역시 재고의 여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차산이 백제의 북성이고, 그 주변에서 백제 불상이 출토되었다는 논지는 일단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어려운 상태이다. 이는 아주 작은 부분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들은 고고학적으로 공인된 '풍납토성=왕성' 설을 반박하기 위해 이 책을 썼고, 그렇게 제시된 고고자료 중 하나가 이 불상이라는 점을 봤을때 이는 상당히 무리수가 있는 시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고고학계에서 출토양상이 불분명한 유물은 그 유물이 아무리 완형이라 하더라도 제대로 가치를 발휘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출토양상이 불분명한 불상을 제시했으며, 이를 또 대체로 백제 불상이라고 보고 있다는 다소 근거없는 발언을 하고 있다. 이는 필자처럼 일일히 확인하고 이 책을 읽지 않을 독자에게는 거짓을 말한 셈이 되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 웅진도성 문제

저자들은 158쪽에서 일제시대 조사된 석성을 기준으로 공산성이 총 길이 2,660m의 도성으로 소개하고 있다(그런데 이 책 19쪽에서는 웅진성의 왕성 면적이 200여만 평이라고 적고 있다. 이건 무슨 근거인가? 이는 약 6,612,000㎡에 해당하는 엄청난 면적이다. 공산성이 정사각형의 도성이라 치면 한변의 길이는 665m가 된다. 그리고 내부 면적을 곱하면 442,225㎡, 약 133,800평이 된다. 대체 무슨 근거로 웅진성의 면적이 200여만 평이라는 것인지, 당최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장『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pp.83~85)을 보면 내부에서 확인된 것은 임류각지와 추정왕궁지 등이다. 그런데 추정왕궁지에서 나온 것이라곤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2동, 굴건식건물지2동, 지당지 1기, 목곽고지 1기 등이다. 이 중 왕궁터로 볼 수 있는 것은 적심석을 갖춘 건물지 2동인데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공산성을 중심으로 하는 웅진도성이 저자들이 말하는 왕궁터에 걸맞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저자들은 이미 앞부분에서 주변의 다른 나라들은 왕궁과 왕성의 넓이가 넓은데 반해 풍납토성에는 그럴만한 왕궁이 없고, 그런 왕성도 아니라는 얘기를 했었기 때문이다(18~20쪽). 즉, 일국의 왕성이라면 일정 규모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성에서 확인되는 왕궁터는 전체 면적 6,800㎡ 정도, 즉 2,057평 정도밖에 안 된다. 또한 사비도성은 어떠한가? 내부에서 제대로 된 왕궁터라도 나왔는가? 필자가 알기로 없다. 

한국 고고학계의 최신 개설서라고 할 수 있는『한국 고고학 강의(개정 신판)』(한국고고학회, 2010, pp.268~272)을 보면 백제 도성에 대한 현 학계의 입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일단 풍납토성 내부에서 뚜렷하게 왕궁터가 확인되었다는 얘기는 없다. 다만, 성 내부에서 의례용 건물과 제의유구, 대형 수혈주거지, 성 축조 이전에 만들어진 3중 환호 등이 있었다는 얘기를 한다. 또한 웅진성은 공산성을 언급하고 있는데, '왕궁의 위치에 대해서는 공산성 내부설과 외부설이 있다. 내부설에서 왕궁터라고 주장되는 건물지는 규모나 시기에 문제가 있으나, 공산성 외부에서 왕궁 흔적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라고 분명하게 얘기를 하고 있다. 더불어 사비도성의 경우에서도 내부에서 왕궁터가 뚜렷하게 확인되었다는 언급은 없다. 하지만 도로 유구와 부소산성, 동남리유적, 관북리유적, 군수리사지, 나성 등을 통해 계획된 도시였다는 것이 밝혀졌다는 사실을 명시하고 있다. 

즉, 저자들은 풍납토성과 공산성, 사비도성에 대해서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저자들은 책 앞에서 주변 국가의 왕궁과 왕성 면적을 제시하면서 풍납토성은 왕궁도 없고, 주변 국가만한 왕궁이 나올만한 땅도 없으니깐 왕성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공산성에서 나온 왕궁터 얘기는 뒤에 하나도 없다. 면적이 분명 적다면 이는 왕성이라 보기 힘든 것 아닌가? 또한 사비도성에서는 왕궁터라고 볼만한 유적보다 대형 건물지가 나온 유적만이 나왔을 뿐인데도 역시 이에 대해서 별말이 없다. 즉, 왕궁만 갖고 왕성 여부를 따지는 것이 무리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상황이 이렇게 돼니깐 저자들이 제시한 주변 국가들의 면적도 의심스러워졌다. 무슨 자료를 근거로 했는지 말이다. 

그래서 일단 중국 도성에 대한 면적을 살펴보고자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2005년에 발간한『중국 고대도성 조사보고서』를 펼쳐봤다. 저자들은 후한 낙양성의 왕궁을 30만 평, 왕성은 300만 평으로 봤다. 보고서를 보니, 한진 시기의 낙양성은 북위 시기의 내성이라 한다. 그리고 동벽의 3,895m, 북벽 2,820m, 서벽 3,510m, 남벽 2,460m로 유실된 부분까지 합치면 총 14㎞ 정도라고 한다. 그럼 이 또한 정사각형이라 가정하면 한쪽 벽의 길이는 3.5㎞가 나온다. 그리고 왕성의 넓이는 12,250,000㎡, 약 370만 평에 달한다. 또한 도면의 축적대로 왕궁터의 면적을 곱해보니 1,375m×625m 해서 총 859,375㎡, 약 26만평이 나왔다. 즉, 후한 낙양성은 큰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왜 정확한 수치가 아니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은 없다. 논지 흐름상 큰 상관은 없으니). 또한 저자들은 수 · 당 장안성은 왕성이 2,560만평이라고 적고 있다. 보고서를 보니 수 · 당 장안성의 외곽은 거대하여 면적은 83㎢, 즉 2510만평에 달하며, 황성(왕궁)은 사방이 9.2㎞에 면적 5.2㎢, 약 157만평이라고 적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일단 중국 도성은 얼추 비슷한 수치가 나오고 있으며, 그밖에 고구려 도성이나 신라 도성의 면적 역시 비슷한 수치가 추산됐다. 

그런데 왜 유독 백제 웅진성에서만 저런 오차가 났는지 의문이 들었다. 필자는 혹시 풍납토성의 면적이 제일 작다고 강조하고 싶어서 그런건 아닐까? 하는 음모론까지 떠올렸다. -.-; 왜냐하면 저자들은 국내성의 왕궁 넓이는 알 수 있지만, 왕성 넓이는 알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왕궁의 넓이는 약 17만평으로 적었다. 국내성의 총 둘레는 2,686m이다. 역시 정사각형이라고 생각하면 한변의 길이는 671.5m, 해서 672m로 잡겠다. 그럼 성내 면적은 451,584㎡, 즉 13만 7천평 정도가 나온다(역시 수치가 틀린 것쯤 무시하겠다. 어차피 개설서고 논지 전개상 큰 문제가 없으니).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자들은 분명 구분하기를 '왕궁은 순수 궁전, 왕성은 왕궁을 포함한 민가들'의 개념으로 쓰고 있었다. 그렇게 봤을때 현재 확인된 국내성을 순수 왕궁으로 볼 수 있을까 필자는 그게 더 의문이었다. 그런데 왕성이라고 해서 그 면적을 17만평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약 25만평 가량인 풍납토성보다 작아지게 되니깐 이렇게 정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 풍납토성이 주변 국가의 왕성 중 가장 작아야만 논지가 전개될 수 있으니 말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왕궁과 왕성의 구분, 단순히 면적만 갖고 도성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었다(저자들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방법론적으로 취약점이 있다는 소리다).

물론 일국의 도성이면 규모가 커야 한다는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는 있다. 그리고 필자도 딱히 그것에 부정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단순히 면적만 갖고 다른 나라의 도성과 비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거듭 든다. 마치 보루의 규모만 갖고 산성인지, 보루인지를 구분하는 기존 학계의 입장처럼 말이다(필자는 그게 싫어서 보루와 산성 내부의 구조 및 성벽의 유무 등으로 따져서 양자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풍납토성의 조사-연구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는 백제 초기도성일 가능성이 크다는 중요한 단서만을 찾아놓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풍납토성 내외가 급속한 개발로 인하여 체계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이 좋지 않아 여러 면에서 매우 부담스런 상태라 하겠다.'라고 밝힌 심정보 선생님의 입장(2005,「풍납토성과 중국 고대도성과의 비교연구」『중국 고대도성 조사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p.215)처럼 아직 풍납토성은 정답이 아니라 최선일 뿐이며, 현재진행형이라는 얘기를 덧붙이고 싶다. 


4. 백제 기와만의 특징 모골흔의 해석

저자들은『하남 천왕사지 2차 시굴조사 보고서』를 근거로 천왕사 터에서 의미심장한 기와가 나왔다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백제는 신라와 전혀 다른 제작 기법으로 기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모골흔'이라고 해서 흔히 보는 신라 계통의 기와처럼 둥글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이 지게 되어 있는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러면서 보고서의 '백제 와당의 제작 방식이 지속적으로 이 지역에 강하게 영향을 남기고 있음을 보여준다'라는 결론 부분에 대해 '단순히 발견된 숫자가 적다고 그렇게 해석해서 되겠냐? 오히려 백제 문화의 영향이 오래도록 남았다면 그만큼 이 지역이 백제의 중심지여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라는 식의 다소 이상한 결론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198~199쪽).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고 하니~ 모골흔이라는 것은 흔히 모골와통을 쓰면 나타나는 흔적이다. 쉽게 얘기해서 기와를 만들때 곡선의 형태로 만들기 위한 원통형의 통이 필요하다(이를 와통이라 한다). 그때 나무편이나 대나무를 발처럼 세로로 길게 엮어 '모골와통'을 만들거나(중국 영화에 흔히 나오는 대나무 책을 동그랗게 말은 형태를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아예 통나무를 파내거나 넓은 판자를 이어만든 '원통와통'을 만들어 쓸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는 모두 모골와통을 사용해서 기와를 만들었지만 신라는 대부분 원통와통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를 두고 저자들은 백제 기와의 흔적인 모골흔이 나왔음에 주목한 것이다(즉, 198쪽 위에 실린 기와의 탁본 중 오른쪽에 나타나는 것이 모골흔과 포목흔이다. 왼쪽은 외형을 만들기 위한 성형타날의 흔적이고. 혹시 책을 읽을 독자 중 모르는 분이 계실까봐 자세히 기재한다). 

자아~그럼 모골흔에 대해 설명이 끝났으니 다음으로 넘어가자.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2001년, 2002년에 발간한『하남 천왕사지 시굴조사 보고서』및『하남 천왕사지 2차 시굴조사 보고서』(저자들이 봤던 그 책)를 보면, 천왕사지를 통일신라~고려시대 사지로 추정하고 있다. 왜 그럴까? 왜 이 유적을 조사한 고고학자들은 백제 기와제작의 전통이 강하게 남은 모골와통으로 만든 기와가 나왔음에도 이를 백제 유적으로 연결하지 않는 것일까? 간단하다. 단순히 발견된 숫자가 적어서가 아니다. 필자가 누누히 얘기하지만, 유적에서 유물의 출토 양상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런데 통일신라~고려시대 유물이 즐비하게 나오는 유적 안에서 별다른 토층상의 상하관계도 확인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기와가 나왔다고 해보자. 그럼 그걸 백제시대부터 주욱 사용된 것으로 봐야 하는가? 아니면 백제계 전통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봐야 하는가? 여기에서 고고학적 훈련이 된 사람과 안 된 사람의 차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단순히 기와 몇점만 갖고 그 유적을 해석하려 하니 문제인 것이다. 유적에 대한 편년 및 고찰을 작성할때 일반적으로 고고학자들은 유물 및 유적을 모두 살펴본다. 그리고 상대편년도 시도하고, 문헌도 찾아보고, 유물 출토양상을 세밀하게 분석해서 최종적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렇게 봤을때 천왕사지에서 출토된 기와 몇점은 백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의아한 내용이 나온다. 이렇게 백제 문화의 영향이 강했다면 그만큼 이 지역이 백제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단다. 이 무슨 이현령 비현령식 해석이란 말인가. 그럼 사비기 백제토기 양식에 고구려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으니, 사비는 고구려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하는가? 앞뒤 정황을 봐 가면서 해석을 내려야지, 이 무슨 억지논리란 말인가. 고고학을 공부하는 필자가 봐도 이 정도인데, 교수님들이나 필자보다 오래 고고학을 공부한 선배들이 봤다면 이 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를 내릴지 안 봐도 뻔하다. 이처럼 이 책의 저자들이 문헌사적으로는 얼마나 잘 살펴봤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고고학적으로는 취약점이 여기저기 빵빵 뚫린 것처럼 확인되고 있었다.


5.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의 해석

이 부분은 강찬석 쌤이 필자와 다음까페에서 벌인 논쟁 이외에도 끊임없이 강조하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보고서를 한번 펼쳐봤다. 책 200쪽에 실린 이성산성에서 나온 백제 토기 파편 3점의 사진은『이성산성(제8차 발굴조사 보고서)』(한양대학교 박물관 · 하남시, 2000, p.44)에 실려 있는 것과 동일했다(그런데 스캔이 잘못 됐는지 책에 실린 사진은 상당히 흐려서 백제토기 여부를 확인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 부분갖고 다른 분과 강찬석 쌤 사이에 언쟁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암튼, 필자는 보고서에 실린 원판을 봤으니 이에 대해 얘기하겠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당시 한양대 발굴팀장이었던 유태용은 2000년에 발간된 ,이성사성 8차 발굴보고서>에서 "이성산성 출토 토기 기종 가운데 태토, 문양, 기형, 색조, 제작 수법 등에서 삼국시대 전기 후반의 토기 특징을 보여주는 것들이 일부 확인되고 있다."라고 했다. 이성산성에서 백제 토기가 발굴되었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201쪽). 순간 멍~해졌다. 어떻게 보고서의 문구가 곧바로 백제 토기 발굴과 연결될 수가 있단 말인가? 보고서에는 분명 삼국시대 전기 후반의 토기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보고서를 열어보니 44쪽에 그와 같은 얘기가 있었다. 그런데 그 바로 뒷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이들 토기들은 잠정적으로 삼국시대 전기 토기군으로 분류하였다.'라고. 응? 이상했다. 왜 잠정적이라고 했지? 전기 토기면 토기지, 왜 잠정적이라고 했을까? 그래서 그 부분의 앞뒤 내용을 더 살펴보기로 했다(그나저나 문장을 전부 옮기지 않으니 보고서를 따로 보지 않으면, 의미 전달이 잘 안 되는 것은 누구 탓으로 돌려야 하나? ^^;). 

그랬더니 금방 답을 알 수 있었다. 8차 조사에서 발굴단은 초축성벽을 절개해서 단면을 조사하고, 또한 1차 저수지를 조사했다. 1차 저수지는 2차 발굴시 규모가 대강 밝혀졌고, 3차 조사시 33개의 퇴적 층위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8차 보고서에서는 29개층의 퇴적 층위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었다. 이중 삼국시대 전기 토기군으로 분류된 토기 3점이 10층에서 2점, 11층에서 1점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밖에 초축성벽 앞의 무너진 할석을 치우는 과정에서 2점의 토기편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일단 저자들이 저수지 출토 토기 3점에 대해 언급했으니 뒤의 2점은 제외하도록 하겠다. 일단, 토기편은 구연부편 1점, 동체부편 1점, 저부편 1점이다. 대개 구연부편은 기종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속성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단순히 동체부편이나 저부편만 있다면 어떤 기종의 것인지 알 수가 어렵다. 기종을 모르면 당연히 전체적인 기형(형태)도 모를테고 그 말은 곧 형식분류가 중요시되는 고고학 연구상 시기를 편년할 수 없다는 소리와 상통한다. 즉, 구연부를 제외하고는 정확한 편년이 불가능한 상태라는 소리다. 그런데 왜 발굴단은 이를 삼국시대 전기 후반의 토기 특징으로 봤을까?

뒷장을 들춰봤다. 아하! 고구려계 토기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한강유역의 고구려 토기(이때에는 고구려系라는 표현을 썼으나, 한강유역에서 고구려 보루가 연이어 발굴되면서 이제 그 지역의 토기군은 고구려 토기로 명명해도 무방하니, 필자 역시 시대성을 무시하고 정확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고구려 토기로 지칭하겠다)보다 기술적으로 발전된 형태라고 하니 시기적으로 6세기를 넘어가는 것들일테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고구려 토기들이 한결같이 저수지의 21층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무려 15점이나. 기종도 다양하다. 확실히 저수지 21층 시기에 고구려가 이 곳을 점유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재밌는 것이 바로 위에 퇴적된 22층부터 이제 통일신라시대 토기(고신라식, 즉 삼국시대 신라토기는 없었다고 한다)가 수두룩하게 출토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 이해가 갔다. 21층보다 낮은 10~11층에서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편년이 가능한 것은 호의 구연부편 1점 밖에 없다. 그런데 21층은 최소한 6세기를 넘어서는 고구려 문화층이다. 22층부터는 통일신라 문화층이고. 그럼 10~11층은 6세기 고구려 문화층보다 앞선 문화층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언제인지 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단경호 구연부 1점으로는 편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구연부편의 태토가 적갈색 연질태토에 격자타날문이 흐릿하게 확인되고 있으니, 일단 삼국시대 전기 토기로 봐도 무방하다고 판단한 듯 싶다(필자라도 저 상태에서라면 딱 뭐라고 얘기할 수가 없을 듯 싶다). 토기의 기형을 만드는 성형작업시 타날성형은 기본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물레성형은 아주아주 뒷시기의 일이고, 조선시대까지도 일부 기종은 타날성형, 즉 뭔가로 두들겨서 둥그렇게 모양을 만들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그것 말고는 뭐가 근거가 없다. 

더군다나 삼국시대 전기 후반 토기라고 볼만한 녀석들이 출토된 10~11층 위에 퇴적된 14층에서 '戌辰'명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그 제작수법이나 서체가 C지구 저수지 5층에서 출토된 고구려 목간과 동일했다고 한다(해당 보고서 78쪽). 거기다가 고구려 목간과 함께 고구려척도 출토됐었고. 자아~만약 내가 이성산성 8차 발굴단의 책임자라고 해보자. 여기에서 어떻게 했을까? 단순히 고구려보다 이른 시기에 나온 토기이고, 고신라식 토기가 없으니 백제토기다! 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이 책의 저자들처럼) 아니다. 절대로! 각 층위의 절대연대가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결정은 아주아주 위험하다. 특히나 고구려것이 분명한 목간과 척과 동일한 목간이 바로 14층에서 나왔는데, 11~14층 사이의 시간적 공백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단 말인가? 퇴적 양상과 상대적인 시기차를 알 수 있지만 그 층위 양상에서 절대연대를 뽑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시기차가 크지 않아서 그 토기들이 고구려와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과거에는 고구려 토기에 타날기법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마 2000년 보고서이므로 고구려 토기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을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라도 당연히 백제토기라는 확답을 내리기보다는 삼국시대 전기 토기로 분류했을 것이다. 불명확한 상태에서 일반에게 공개되는 보고서에 개인적인 의지나 견해를 넣을 수는 없지.

보고서를 직접 보니 이 역시 근거가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필자가 그런 의도로 이 책을 썼더라면 차라리 5차 발굴조사 보고서(1998년) 92쪽 사진 145번의 종방향의 승문타날문이 찍힌 호 구연부편이라든가(물론 대부분의 토기는 통일신라시대 토기였다)나 10차 발굴조사 보고서(2003)의 타날문이 찍힌 호를 언급했을 것이다. 그게 차라리 더 백제토기 스러우니깐. 하지만 그마저도 수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10차 발굴조사 보고서 172쪽을 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을거다.

'평탄면의 북쪽 끝에서 동쪽으로 회절하는 지점의 지표에서 수습된 완형의 호는 특기할 만하다. 이 호는 지표에 구연 부분이 노출되어 수습한 것으로, 호가 위치한 지점은 평소 시민들의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던 지점이다. 이 호는 회백색의 연질로 복합적인 기형을 띠고 있다. 평저에 동체부엔 중앙에 횡침선이 한줄 돌아가고 있고, 구연부는 직각으로 외반구연하고 있다. 유물이 발견된 위치가 안정된 층위가 아니라 거의 지표상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유물과의 직접적인 비교가 곤란하기는 하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 토기의 요소가 고루 융합되어 나타나는 예가 될 수 있어서 주목할 만 하다.'

자아~이렇다. 이게 일반적인 고고학자의 유물 해석이다. 유물의 기형도 중요하고, 완형인지 아닌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물의 출토 양상이다. 앞서 저자들이 제시한 토기 3점도 유물의 출토 양상을 살펴보면 얼마든지 보고서에 왜 그렇게 기재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데, 저자들은 보고서를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그저 삼국시대 전기 토기가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백제토기라고 쉽게 단정지었다. 이래서 고고자료는 고고학적으로 훈련이나 연습이 된 사람이 다룰때랑 안 그럴때랑 천지차이인 것이다. 이 책을 그냥 읽을 사람들이 필자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읽느냐, 안 하고 그냥 읽느냐의 차이는 이처럼 큰데 말이다. 이를 두고 저자들이 알면서도 독자들은 현혹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썼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부분은 아무리 문헌사학계나 건축학계에서 뛰어난 분이라 하더라도, 고고학적으로 훈련이 안 되어 있으면 충분히 놓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 다음 것으로 넘어가보자.


6. 그밖의 고고학적 근거들(하남시 일대의 고고자료)에 대한 해석

저자들은 207~211쪽에 걸쳐 하남시 일대에서 백제시대 유적과 유물이 나온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그 하나가 광암동에서 확인된 백제 횡혈식 석실분과 백제 단경호, 그리고 남한산성 행궁지에서 나온 백제문화층, 하남시 동사지의 한성백제식 기와와 토기들 이렇게 3가지를 거론하고 있다. 그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세종대학교박물관, 2005,『하남 덕풍-감북간 도로확포장공사 4차구간 발굴조사 약보고서』를 보면 광암동에서 백제 석실분 2기가 확인된 것이 맞다. 이밖에 기전문화재연구원, 2003,『하남 시가지우회도로 확 · 포장공사구간 문화유적 발굴조사 지도위원회의 자료집』을 보면 덕풍동 수리골 유적에서는 백제 토광묘에서 원저단경호 1점과 심발형 토기 1점, 철도자 1점이 출토되기도 했고. 자아! 그런데? 이게 다다. 고분 3기 갖고, 이 지역에 백제의 중심지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건지 저자들도 알지 않을까? 그나마 토광묘는 필자가 제시한 사례이고. 소위 고분群이라고 말하려면 상당히 많은 고분들이 밀집해 있어야 한다. 적어도 석촌동이나 방이동 고분군 정도는 되어야 비교 대상으로 명함이라도 내밀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다음은 남한산성 행궁지.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광주군, 1999,『남한산성 행궁지 시굴(발굴)조사 보고서』를 보면 통일신라시대 인화문토기 및 기와편을 비롯해 고려시대의 대형토기 호와 기와편, 17~18세기의 조선시대 유물들이 출토됐단다. 또한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광주, 2001,『남한행궁지 제3차 발굴조사보고서』를 보면 통일신라시대 인화문토기편 등과 회색 연질, 회청색 경질토기편 등을 비롯해서 12~20세기에 이르는 다양한 자기편들이 확인되고 있다고 적고 있다. 그밖에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경기도, 2002,『남한산성』이나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광주시, 2003,『남한행궁지 제4~5차 발굴조사보고서』를 봐도 고려시대보다 올라가는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그 뒤로도 경기문화재단 · 한양대학교박물관, 2005,『남한산성 행궁권역 내 건축물 이축지 시 · 발굴조사 보고서』나  기호문화재연구원 · 경기문화재단 ·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 2009,『남한산성 인화관 및 침괘정 주변지역 유적 발굴조사 보고서』등을 보면 조선시대 유물 및 유적이 확인됨을 알 수 있다. 그밖에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 · 경기문화재단, 2007,『남한산성행궁지 8차 발굴조사 제3차 지도위원회의 자료집』을 보면 통일신라시대 대형 건물지와 대형기와 등이 나와서 한때 이슈화됐으며, 중원문화재연구원 · 경기문화재단, 2007,『남한산성 암문(4) · 수구지 일대 발굴조사』를 보면 체성에 대해 고대부터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지금 필자가 확인 못한 보고서가 2002년에 발간된 남한행궁지 2차 발굴조사보고서인데 거기에는 백제 문화층에 대한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왜 이거만 없지? 흐음). 왜 필자가 이런 얘기를 하냐면, 강찬석 쌤이 직접 가서 백제토기를 봤다고 하는 그 발굴현장에 필자도 가서 직접 백제토기가 출토된 것을 확인했었기 때문이다. 당시 학부생이었던 필자가 보기에도 그것은 조선시대 도기류 혹은 토기와는 확연히 달랐었다. 필자도 그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문화층이 전체 유적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수량도 중요하고, 출토양상도 중요하며, 유구와의 상관관계도 꼼꼼히 따질 필요가 있다. 단순히 백제토기들이 다수 나왔다고 해서 능사는 아닌 것이다. 늘 강조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출토양상이니깐. 이 부분은 추후 필자가 다시 확인하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동사지에 대한 부분. 저자들은 문명대 쌤의 발언을 주 근거로 삼았다. 

'제2사지에서는 고식기와와 토기들이 출토되었는데 이것이 만약 백제 때의 것으로 확인될 수 있다면 이 사찰의 시창은 백제 때까지 올라갈 수 있다. 어쩌면 백제 최초의 사원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제3사지의 마애불까지 포함하여 앞으로 발굴에서 역점을 두어야 할 문제라 하겠다.'

그러면서 '그 당시 발굴자로서는 한성기 백제기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무엇인가 옛날 식의 기와가 출토되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 역시 하남시 지역과 한성백제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증거라 하겠다.'라고 적고 있다(211쪽). 충북대박물관, 1988,『판교-구리 · 신갈-반월간 고속도로 문화유적 발굴조사 보고서』를 보면 동사지(사적 제352호)는 분명 삼국~고려시대까지로 편년이 가능함을 알 수 있다. 각종 명문기와와 귀면기와, 쌍조문 수막새, 금동불 등이 출토되었으며 오랜 시간 존속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성백제 시절 동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곧 한성백제 도성이 이 근처에 있다~라는 것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필자는 그게 더 궁금하다. 그저 하남시에 있는 유적들을 다 그러모아 이런 것들이 있으니 여기는 당시 백제 도성지였다~라는 것이 합리적인 결론 도출인건가? 싶다.

이상으로 앞부분 중 저자들과의 토론에서 빠진 내용과 이 책의 <5장. 백제 첫 도읍지의 흔적들>에 나오는 고고자료에 대해 다 살펴봤고, 전부 다 근거가 희박하다는 필자의 생각을 정리했다(아! 혹시 천왕사지에서 나온 목탑 심초석에 대해 반론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천왕사의 유적 및 유물 조합상에서 이미 통일신라~고려시대 절터로 판명난 이상 심초석 하나가 갖는 의미는 곧바로 백제시대와 연결되기 어렵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다. 물론 가능성은 있지만, 심초석 하나만 갖고는 힘들다. 심초석과 연결된 문화층이 통일신라시대 문화층 아래에서 충분히 확인되어야만 이건 성립이 가능한 부분이다. 하지만 보고서 상에 그런 내용은 없기에 따로 언급조차 안 했다). 

그럼 이제 슬슬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다른 건 다 필요없고, 필자는 딱 3지만 더 언급하도록 하겠다(물론 고고학적인 시각에서 그와 관련된 것만! 민속학이라든가, 역사학 관련된 것까지 굳이 언급할 것도 없고).



1. 하남시의 고고자료

하남시 일대에 백제 도성이 있다고 판단한 저자들은 108쪽에 백제 왕성의 개념도를, 122쪽에 개로왕때 쌓은 제방과 당시 지형복원도를 실어놓았다. 자아~다 좋다, 이거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풍납토성 대신 하남시 일대에 백제 도성이 있다고 볼만한 고고자료가 무엇이냐 이거다. 위에서 제시한 저자들의 고고자료는 이미 필자가 보기에 근거가 취약함을 밝혔다. 그 다음에, 하남시 일대에는 풍납토성에서 안 나왔기 때문에 풍납토성은 왕성이 될 수 없다는 왕궁도 안 나왔다. 그렇다고 하남시 일대를 둘러싼 나성이나 그 일대에서 확인된 백제시대 취락지도 없고. 확인된 것은 2기의 횡혈식 석실묘와 백제때부터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동사지(절터) 1개소, 이성산성을 초축했을 것이라는 흔적들 정도이다. 이것과 풍납토성의 고고자료를 비교했을 때 어느 쪽이 판정승을 거둘지는 뻔한 일이다. 

물론 하남시 일대에도 과거부터 백제의 도성일 것이라는 얘기와 함께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여러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필자가 그 연구사를 가볍게 정리해보겠다(괄호 안은 발굴조사기관과 보고서 발간년도)

1. 동사지 - 삼국~고려시대(충북대박물관 1988)
2. 교산동 일대 지표조사 - 삼국~조선시대(세종연구원 1996)
3. 교산동 건물지 발굴조사 중간보고Ⅰ - 통일신라~조선시대(기전문화재연구원 2000)
4. 교산동 건물지 발굴조사 중간보고Ⅱ - 통일신라~조선시대(기전문화재연구원 2001)
5. 교산동 건물지 발굴조사 중간보고Ⅲ - 통일신라~조선시대(기전문화재연구원 2002)
6. 천왕사지 - 통일신라~고려시대(한국문화재보호재단2001, 2002)
7. 광주향교 - 고려~조선시대(한양대박물관 2003, 2005)
8. 교산동 건물지 종합보고 - 통일신라~조선시대(기전문화재연구원 2004)
9. 춘궁동 245-2번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세종대박물관 2004)
10. 교산동 유적1 - 고려~조선시대(한양대박물관 2004)
11. 춘궁동 401-8번지 유적 - 통일신라시대(세종대박물관 2004)
12. 춘궁동 산 39-1번지 유적 - 고려시대(세종대박물관 2005)
13. 서부농협창고부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세종대박물관 2006)
14. 교산동 주택이축부지 내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수원대박물관 2006)
15. 법화사지 - 통일신라~고려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7)
16. 약정사지 - 통일신라~조선시대(세종대박물관 및 하남역사박물관 여러차례 조사)
17. 춘궁동 243번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겨레문화유산연구원 2009)
18. 춘궁동 242-6번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서해문화재연구원 2009)
19, 춘궁동 393-5번지 유적 - 고려~조선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9)
20. 항동 121-3번지 유적 - 고려~조선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9)
21. 춘궁동 271-11번지 유적 - 고려~조선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9)
22. 하사창동 341-4번지 유적 - 통일신라~고려시대(하남역사박물관 2009)
 
자아~어떻게 생각하는가? 설마 이 많은 조사기관이 이렇게 많이 조사를 했는데, 의도적으로 백제 유적지를 은폐했다고 보는가? 그렇게 본다면 할 수 없고, 필자도 이에 대해 더 할 얘기도 없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 정도로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는데, 통일신라 이전의 유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현재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상황이 이 모양인데, 이걸로 어떻게 풍납토성의 아성을 무너뜨릴 수 있겠느냐는 얘기다. 그러니 고고학적 연구가 더 진행될 때까지 더 기다렸다가 이런 주장을 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2. 풍납토성의 C14 연대측정

저자들은 260~261쪽에 걸쳐 풍납토성 발굴보고서 Ⅴ권의 연대측정 결과를 예로 들면서, 연대치의 오차가 크게는 200년 가까이 난다는 점을 언급하고 있다. 오차가 크기 때문에 정확한 시기를 보장해 줄 수 없어 근거로 못 믿겠다는 학자들을 비판하면서 말이다. 이를 두고 저자들은 '풍납토성의 유물을 두고 연대측정을 한 당사자가 가장 억울해하는 점이 바로 이것이라 한다. 만약 자신이 연대측정을 잘못했다면 표본마다 완전히 다르게 나와야지 어떻게 비슷한 수치가 나오겠느냐는 것이다.'라고 얘기한다. 이러한 부분도 이 책에서 잘못된 점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당시 풍납토성의 연대측정을 어느 기관에서 누가 했는지 알고 있다(그렇다고 그 사람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연대측정을 하는 일반적인 기관의 입장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온라인상에 공론화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필자가 왜 이 글에서 주욱 보고서면 논문이며 나열했는지 알 것이다. 바로 일반인들이 쉽게 이해하고 신뢰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사적인 이야기를 책에 쓰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얼마나 독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이미 강찬석 쌤은 온라인 상에서 여러차례 이 부분때문에 다른 분들과 마찰이 있어왔다. 마치 내가 말은 못 하지만 학계의 수많은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있다. 모르면 가만 있어라~라는 식의 태토 때문이랄까).

암튼 다시 돌아와서. 이러한 목탄 시료는 반드시 불에 타야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다. 석탄으로 만들어진 과거의 유기질은 불에 타서 그렇게 됐는가? 아니다. 땅 속에서 오래도록 가열과 가압작용을 받아 변질될 수 있다. 땅 속에서 수백년, 수천년간 벌어지는 지질현상은 인간이 함부로 재단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불에 탔네 마네를 따질 필요는 없다. 또 하나, 목재의 경우, 오래된 나무를 사용했을 수도 있고, 자란지 얼마 안 된 나무를 사용했을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연대측정치가 나무를 베어서 사용했을 때의 시점을 가리키는 것인지, 나무가 폐기된 상태의 시점을 가리키는 것인지 구분할 필요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몇개의 연대치만 갖고 그 유적의 절대연대가 나왔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으며, 다른 유물과 유적을 종합적으로 살펴봐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연대측정 상의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아직도 원로고고학자 혹은 중견고고학자들은 이 자연과학적인 분석방법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는 않는다. 수년전 일본 학계에서 AMS 연대치로 야요이시대 개시기가 상한된다고 난리쳤다가, 그 이후로 잠잠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3. 우진육각형 주거지와 석촌동 고분군

262~263쪽에 걸쳐 저자들은 우진육각형 주거지가 금강 이남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문화상 아주 특수한 경우로 이 고분군이 가까이 있다고 근처인 풍납토성이 백제 왕성이 될 수는 없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필자가 저 위의 글에서도 썼듯이 호서지역에서 13기의 凸자형 혹은 呂자형 주거지가 확인된 것을. 앞으로도 더 확인될 가능성이 높고. 또한 석촌동 고분군은 이제 고고학계에서도 백제 고분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이 역시 고고학계의 최신 경향(이 책이 나올 시점에 이미 그런 얘기들이 있었다)을 반영하지 않고 성급하게 책을 쓴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상이다. 兵家에서 말하길,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단다. 그런데 지금 이 책을 쓴 저자들은 적을 제대로 알지도 못 했고, 나도 제대로 알지 못 한 상태에서 섣불리 싸움을 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필자처럼 이제 막 고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는 사람에게도 근거의 취약성을 지적받을만큼 위태로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고고학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그만한 고고학적 지식으로 무장하고 덤볐어야 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부분에 있어 헛점이 너무 많았다. 개인적으로 그 점이 가장 아쉬웠다. 허나, 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다~라고 공개적으로 반박한 책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책이 나왔다는 것은 분명 시사하는 점이 많다. 필자 역시도 풍납토성이 정답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으려고 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해 준 책이 아닐까 싶다. 

다소 글이 길어졌지만, 토론의 자료로도 활용할 목적에서 작성한 것이므로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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麗輝 2011-06-19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실수 하나 있습니다. 책 마지막 문단에 보면 '석촌동 고분군은 이제 고고학계에서도 백제 고분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더 강하다.'에서 '석촌동'이 아니라 '방이동'이었습니다. 허어~왜 이런 실수를 -.-;; 방이동의 횡혈식석실묘 계통을 백제가 아니라 신라 것으로 보는 입장이 최근에는 더 많이 늘어나도 있거든요.

그렇다 하더라도 전체적인 책의 논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책에서는 풍납토성과 같은 유물이 석촌동 고분군에서 나왔으니 양자는 같은 집단일테고, 석촌동 고분군은 백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죠. 허나 오히려 백제 것으로 볼 수 있는 방이동 고분군이 최근에는 의심받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재고해봐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겁니다. 만약 방이동 고분군도, 석촌동 고분군도 백제 것이 아니라면, 한강 유역에는 백제 고분군은 하나도 없는 셈이 될테니깐요. 하남시에서 나오는 횡혈식 석실묘 2기는 근거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요.

암튼, 내용 수정 참고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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