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과 신들
주원준 지음 / 한님성서연구소 / 201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마지막 리뷰 이후에 근 10개월만에 쓰는 리뷰 같다. 그만큼 그동안 게을렀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각설하고, 오늘 소개할 책은 오랜만에 종교 관련 서적으로 정했다. 사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를 잠깐 소개하자면, 저자이신 주원준 선생님이 모 학회에서 관련 주제로 발표하는 걸 듣고 나서였다. 발표 내용도 워낙 신선했지만(기존에 성경 혹은 예수에 대한 책들을 몇 권 읽어봤는데 이런 시각에서 접근한 책은 없었다), 뒷풀이때 선생님과 나눈 대화 속에서 고대근동학 및 구약학은 물론, 개신교나 천주교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 주효했다. 거기다가 예전에 읽었던마테오 리치, 기억의 궁전이라는 책의 번역자와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역시나 구약학이나 고대근동학 이외에도 종교와 관련된 역사 전반에 능통하시구나~라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했고.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프롤로그에서 간단하게 고대 근동의 지리학적 개념, 언어, 탈신화화와 재신화화(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큰 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님), 성경의 번역과 성경의 현주소? 등을 설명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쪽 지식이 거의 없는 필자와 비슷한 처지의 독자들에게는 이 부분이 상당히 고맙지 않을 수가 없다. 8장 정도밖에 안 되는 분량이지만, 이 책을 읽기 전 꼭 알아야 하는 필수 지식들이 다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살펴보면, 고대 이스라엘인의 종교심을 이해하면서 당대 역사와 문헌들에 접근해야지, 과학과 합리성에 의존해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시각부터 언급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성경에 신화의 언어가 풍부하다는 표현이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그러면서 앞으로 당대 이스라엘인들이 고대 근동의 종교와 문화를 공유하면서도 어떻게 차별화했는지를 서술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밖에 고대근동학의 정의(막연히 고대 근동을 연구하는 학문은 성서고고학, 히타이트 고고학 등으로 불리는 줄로만 알았다)라든가, 고대 근동의 시간적 폭, 고대 근동의 언어를 기준으로 한 지역 구분 등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신선했던 것은 독일의 신약성서학자인 불트만(Bultmann, R.)이 제시한 탈신화화(脫神話化, Entmythologisierung)’라는 개념이었지만 말이다. 신화의 껍데기를 벗겨내어 현대인들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해석학적 틀을 제시한다는 개념. 그런데 역시나 그 용어가 갖는 표면적 의미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잘못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었던 모양이다(김원룡 선생님이 처음 제창하신 원삼국시대라는 용어나 애덤 스미스의국부론에 드러난 자유방임경제및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개념들도 모두 잘못 이해되는 경우가 있으나 최근에 이를 새로 바라봐야 한다는 입장들이 늘어나는 것처럼). 암튼, 저자는 신화는 마냥 겉의 신화적 요소를 껍질 까듯 벗겨버리고 속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1쪽에 적절한 표현이 나온다. 성경은 바나나처럼 껍질은 버리고 과유만 얻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양파처럼 껍질과 과육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아서 그 자체를 온전히 섭취해야 한다, 고 말이다. 개인적으로 책 초반부에서 가장 와 닿는 구절이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탈신화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신화화(再神話化, Remythologisierung)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증거물이 바로 창세기의 첫째 장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당시 고대 근동의 모든 나라들이 섬기던 자연신들을 하느님이 1주일 만에 만들어버린 피조물(소위 말하는 天地創造)로 전락시켰으니 이 정도면 말 다 했다(비교가 부적절할지도 모르지만 마치 마블 코믹스의 슈퍼영웅 세계관을 보는 듯 했다. 첩첩산중처럼 쌓여있는 수많은 영웅들 중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스파이더맨이나 배트맨, 아이언맨, 엑스맨, 헐크, 토르, 고스트헬 등은 중하급 영웅들이며, 그보다 훨씬 뛰어난 초신적 영웅들이 많이 존재한다. 그 결과, 뿌리 깊은 자체 신화가 없는 미국인들의 손을 거쳐 세계 각지의 신화적 영웅은 탈신화화하고 재신화화를 거쳐 새롭게 등급이 매겨진 셈이 됐다. 그에 따라 천둥의 신 토르는 북유럽에서 최고신에 준하는 지위를 얻고 있지만, 마블 코믹스에서는 슈퍼맨 정도의 레벨에 불과하다. 물론 슈퍼맨은 최고 레벨의 영웅이 아니고 말이다. ^^; 고대 근동의 수많은 도시국가 및 제국의 수많은 신들이 많아봤자 그보다 높은 레벨의 신에게는 한줌거리도 안 된다는 식의 이스라엘인들의 시각도 이와 비슷한 것 같아 한편으로는 재밌으면서도 신기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저자는 성경 번역이 사실적 일치가 아닌 상징적 일치를 더 고려해서 이뤄져야만 한다고 역설하기도 한다(사실 이런 부분은 실제 종교인이 아닌 필자에게는 큰 의미가 없지만, 역사로서의 성경을 이해하는 데에도 좋은 시각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을 다 살펴봤을 때 우리가 얻는 것은 바로 무엇인가? 라는 것까지! 이후 책에서 이야기할 것들을 맛보기로 다 보여주고 시작하기 때문에 이미 해당 분야의 지식이 상당한 사람에게는 다소 밋밋한 책일 수도 있겠으나 필자처럼 無知한 독자에게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책이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책 내용 중 필자가 주의 깊게 읽었던 부분과 그에 대한 필자의 생각 등을 정리하는 식으로 진행하도록 하겠다.

 

본론은 크게 6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첫째는 하늘(), 둘째는 달(), 셋째는 바람(), 넷째는 강(), 다섯째는 피(), 여섯째는 가시나무(). 일단 고대 근동하면 딱 연결되는 주제라면 달이나 강 등이 떠오를 수 있겠고, 일반적인 신화와 연결되는 것이라면 하늘과 바람 피 등이 있겠다. 그러나 책을 읽기 전까지는 대략의 이미지만 떠올릴 뿐, 앞으로 저자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명확히 알아내기는 어렵다. 그만큼 이 책이 주는 기대감이 크다는 뜻도 되겠지만.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하늘신(天神)은 동서고금을 떠나 항상 최고신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신화속 신과 영웅들은 모두 하늘에서 살며, 하늘에서 내려와 땅에 있는 생명을 관장하고, 모든 천재지변을 관장한다. 비도, 구름도, 눈도, 태풍도 모두 하늘이 없으면 존재 의미가 없는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늘신은 고대 근동에서도 최고신의 지위를 누렸다. 하지만 야훼는 그런 자연신과 동일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는 하늘()은 있을지언정 하늘신(天神)은 없다. 하늘은 그저 공간적 범위, 하느님이 만든 피조물 중 하나이자 하느님이 계시는 공간일 뿐이지 절대 그 하늘 자체가 신적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늘의 하느님이라는 호칭이 야훼 하느님만의 것은 아니었다. 페르시아의 공식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의 대표적 호칭도 이러했는데, 이스라엘인들은 이러한 페르시아의 종교관을 과감히 차용했다. 이를 두고 저자는 바빌론 유수 이후 이스라엘인들이 대제국 페르시아의 문화적 영향력이 확산되자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한 결과물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 그 호칭이 담고 있는 페르시아의 신과 신앙까지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그 호칭만 가져와 자신들의 신에게 선사한 것이다(페르시아인들의 타종교에 대한 관용이야 이미 널리 알려졌지만, 이런 사실들을 당시 페르시아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자신들의 종교가 타 종교를 변화시켰다고 좋아했으려나? 실제 저자는 신바빌론 제국의 마르둑 사제들이 제국 내 왕권 신학을 정립하기 위해 신들의 족보를 새로 정리했다는 내용을 적고 있는데, 당시 이러한 종교정책의 부작용이나 반대 입장은 없었는지 궁금하다. 이는 고구려 내에서 부여 신화를 고구려 신화 안에 흡수하는 과정에서도 적용 가능한 사례일 수 있어 자못 흥미로운 주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그들이 야훼 신앙을 지키려는 굳은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관은 신약으로 넘어오면서 마태오 복음의 하늘의 너희 아버지’, ‘하늘의 내 아버지와 같은 오늘날 우리가 쉽게 중얼거리는 표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늘은 하느님과 동의어가 됨으로써 탈신화화를 넘어 재신화화가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주제부터 흥미진진하게 끝을 맺으면서 두 번째 주제로 바로 넘어가겠다. 두 번째는 이다. 고대 근동은 달신이 왕권 신학의 핵심 상징으로서 중교와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 유일한 지역이다(일반적으로 태양신이 보편적이다, 지근거리의 제우스-쥬피터를 보라. 더불어다빈치 코드에서 예수의 얼굴이 쥬피터의 그것을 따왔다~고 말하는 주인공의 대사도 떠오른다). 실제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동부와 서부에 따라 달신의 지위가 달랐으며, 시간에 따라 달신의 지위가 변하기도 한 것 같다.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 페르시아 제국의 팽창과 함께 하느님 또는 하늘의 개념이 유입된 것처럼, 달신 숭배사상은 신아시리아 제국의 팽창과 함께 찾아온 종교적 위험요소였다. 그렇게 이스라엘인들은 달 역시 피조물로 만들어 버리고, 달신의 흔적을 깨끗하게 지워버린 것이었다. 이를 두고 저자는 고대 근동 세계관의 전복이라고 하면서 창세1장을 고대 이스라엘 탈신화화의 헌장이라는 표현으로 대변하고 있다.

 

다음으로 등장하는 바람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환인이 환웅을 보필해서 내려 보낸 이들이 바로 풍백(風伯)을 비롯해 우사(雨師)와 운사(雲師)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농경문화를 대표하는 신들로 알려져 있는데, 저자는 그중 바람신은 해양 민족에게도 중요한 신이라고 이야기한다. 고대 근동에서 바람은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으며, 계절별로 각각 다른 바람이 불어왔다고 한다. 그만큼 바람은 사람들의 삶 속에 친근하게 다가왔을 것이고, 바람신 역시 다양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구약성경에서 바람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야훼와 관련된 바람만 존재할 뿐이다. 바람은 하느님의 종일뿐더러, 바람이 불면 하느님이 현현한다는 징조로 쓰였다(영화나 드라마에서 신이 바람소리를 나면서 순식간에 나타나거나 사라지는 장면을 많이 봤을 것이다. 아마 이와 비슷한 개념 아니었나 싶다). 그러면서도 재밌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이 루아흐(바람, )가 주님이 지나가신 흔적이요, 표징일 뿐이지 그 자체는 아니라고 주절주절 설명하고 이해시키려고 했다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 계속되어 온 그들의 끈질긴 노력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네 번째는 인데, 개인적으로 책을 읽기 전 관심 있던 부분이었다. 메소포타미아 하면 2개의 강(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강)이 떠오르는 만큼 강과 관련된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저자는 도입부에 이런 표현을 쓴다. ‘현대인은 나일 강과 나일 강의 신을 따로 떼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고대 근동인들에게 하늘신 없는 하늘이나 강의 신 없는 강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의미 없는 세상이나 사랑 없는 연인들과 같은 표현이다라고 말이다. 으음~쉽게 이해가 됐다. 그렇지. 그런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요즘의 잣대를 들이밀어서는 안 되겠지.

 

처음 나오는 것은 나일 강이다. 고대 근동의 신 대부분이 자연 현상에 기반을 둔 인격신임에도 불구하고 나일 강은 강 자체가 아니라 강의 범람만이 인격화되었다고 한다(상당히 흥미로운 현상인데, 그만큼 나일 강의 범람이 갖고 오는 사회적 변화가 크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실제 저자도 구약성경이 나일 강 범람의 신인 하피신에게 유독 침묵하고 있다고 했는데, 이는 그만큼 나일 강 범람이 미친 문화적·사회적 영향이 컸다는 소리를 역설적으로 나타낸 게 아닌가 싶다. 더불어 혹시 중국에도 황하가 아닌, 황하 범람에 대한 이런 신화적 요소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 강으로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나오는데, 본디 이 두 강은 고대 근동에서 신을 의미하는 표현이었다. 하지만 점차 이들의 신성은 사라지는데, 그건 바로 수메르시대부터 일곱 주신의 하나이자 최고신 아누(하늘신)의 아들이요, 풍요의 신 두무지의 아버지인 엔키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앞서 언급했던 신들의 계보 정리로 최고신의 지위를 얻은 마르둑의 아버지가 되기도 하는데, 지하수의 신이자 대표적인 선신(善神)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엔키의 흔적 또한 앞서 살펴본 하피신의 흔적만큼이나 구약성경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도 이 역시 이스라엘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다양한 고대 근동의 종교적 모티프를 차용하는 과정에서, 선별적으로 그들에게 유리하고 이로운 것을 수용하되 자신들이 함부로 삼키지 못하는 거대한 신성들은 아예 건드리지 않고 제외시킨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 역시 고대 이스라엘 신학자들의 합리성과 치밀함이 엿보이는 부분이리라.

 

암튼, 이 두 강 역시 탈신화화를 거쳐 이집트의 북쪽 경계를 의미하는 지리적 용어로 쓰이거나, ‘저 멀리 북쪽 끝을 의미하는 신화적 강의 의미로 쓰였다(마치 무협소설에서 막연한 무림의 북쪽 끝을 가리키는 용어 北海처럼 말이다). 그밖에 강은 심판의 의미도 있는데, 구약성경에서는 이것이 정의를 판결하는 강이라는 표현으로 등장한다고 한다. 이 역시 강의 신은 사라지고 탈신화화한 표현인 셈이다. 특히 이 부분에서 저자는 현재 성경 번역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는데, 확실히 기존의 단순히 안개’, ‘로는 확실하게 의미 전달이 안 되는 것 같았다. 고대 근동 언어를 당대인의 시각에서 바라봐야 보다 확실하게 성경이 담고 있는 의미가 전달된다는 저자의 생각이 잘 표현된 챕터가 아니었나 싶다.

 

다음은 . 초반에 나오는 담을 통해 본 단군과 단 지파에 대한 이야기가 다소 흥미로웠다. 단순히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 혹은 비상식적(?)인 아마추어들의 이야기에도 이렇게 각주를 할애해 비판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해야 하나? 암튼, 창세기를 보면 일종의 말놀이(pun 또는 wordplay)로 민족의 기원을 설명하는데, 에돔족의 조상 에사우가 아돔을 찾았기 때문에 에돔이 되었다~는 식이다. 이는 라시드 앗 딘의집사3부작(칭기스칸기-부족지-칸의 후예들)에서도 나오는 비슷한 내용인데, 수렵 집단에서 흔하게 확인되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문자화된 역사를 남기기 상대적으로 어려웠던 비정주문명에서 쉽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유대인들이 왜 헤롯왕의 이스라엘 통치를 탐탁지 않게 여겼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도 접한 뒤에 본격적으로 피의 신 이야기로 향했다.

 

피의 신 하면, 좀 잔인하고 희생제의를 해야 할 것만 같고 이런 것만 떠올렸는데 좀 더 자세히 살펴보니 딱히 그렇지만도 않았다. 피는 치유나 생명의 의미가 강했다고 한다. 물론 고대 근동에는 다무라는 피의 신이 있었지만, 구역성경에서 피는 단순히 사람이나 동물의 혈액을 의미한다고 했다. 하지만 피가 갖고 있는 상징성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렇기에 그리스도가 흘린 피는 죄악이 씻겨 나가는 상징이요, 생명의 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인식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면서 흘린 예수의 피가 어떻게 비춰졌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최후의 만찬 장면을 언급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라는 표현은, 예수 역시 고대 근동의 종교심을 공유했다는 근거이며, 그가 셈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했다. 그리고 피를 상징하는 음료로 포도주가 사용되는 것 역시. 그리고 그 말은 곧 최후의 만찬에 모인 사도들 역시 셈족의 종교심을 소통했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구원자의 피가 온 세상과 인류를 깨끗하게 만든다는 셈족의 종교심은 이스라엘인에게는 자연스러웠지만, 로마인(인도-유럽어족)들에게는 그렇지 못 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말을 곧 인육식사로 오해했고, 그것이 곧 그리스도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이어져 로마의 박해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물론 지금까지 그리스도교가 살아남은 것을 보면, 예로부터 이러한 문화적 인식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초대 교부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마지막은 가시나무(조성모 노래 말고. ^^;;). 나무는 뭐 우주목, 세계목 등등으로 불리며 동서 신화 곳곳에서 신적 존재로 숭배받아온지 오래다. 하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나무는 거기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바로 가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이스라엘인이 아시리아인과 달리 나무를 인격체로 표현하면서 나무에 종교적 심성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무도 종류에 따라 신성과 숭배 정도가 다른데, 그중 가시나무야말로 고대 근동 종교와 구약성경을 꿰뚫는 상징이자 신양성경의 핵심 상징이요, 유다교 라삐들과 교부들의 성찰에도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 나무라고 적고 있다(기존에 가시나무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설명한 책은 본 적이 없다. 물론 관련도서를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여기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건 2가지 같았다. 첫째는 가시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그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고, 둘째는 이와 연결되는 것으로서 현재 천주교의성경, 개신교의표준새번역에서는 이를 모두 단순한 관목인 떨기나무로 번역하는데, 그렇게 되면 본래의 상징성이 잘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번역상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이자 영웅설화라고도 할 수 있는길가메쉬 서사시를 보면 길가메쉬가 가시에 찔리는 고통을 무릅쓰면서 진리를 얻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건 곧 가시가 참진리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표상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예전에는 그 가시나무가 작은 덤불의 일종으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이를 가시가 달린 높이가 10m 이상 자라는 거대한 야자나무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도 덧붙였다. , 저자는 수종의 일치보다는 그 나무에 얽혀 있는 의미를 고스란히 전달하는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럼 숨 가쁘게 달려온 고대 근동의 종교적 모티프와 구약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해보자. 이 책은 따로 에필로그가 없다. 개인적으로는 프롤로그의 마지막 챕터인 ‘7. 그러면 과연 무엇이 남는가?’를 한 장으로 떼어 마지막 에필로그로 두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암튼, 제일 처음에 나온 이야기임에도 마지막까지 기다려 몇 자 더 적어보고자 한다.

 

여기까지 주욱 읽고 나면, 그럼 이스라엘인들은 고대 근동의 모든 종교관을 다 수용해서 그걸 탈신화화하고, 야훼라는 하나의 신적 존재를 만들어서 거기에 귀속시키는 재신화화 작업 밖에는 한 것이 없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처음에 저자의 발표를 들으면서 필자도 똑같은 의문이 들었으니깐). , 고대 이스라엘 종교의 고유성은 없는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할 수도 있는 것이다(마치 고대 삼국의 문화 중 문화를 제외하고, 우리 민족 고유의 것이 얼마나 있는가? 라는 질문과 같은 맥락일 게다. 솔직히 이렇게 물어봤을 때 뭐라고 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고).

 

저자는 사실대로 이야기한다. 사실 고대 이스라엘의 배타적 고유성이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없다고. 그리고 이는 당연하다고, 왜냐하면 고대 이스라엘도 고대 근동 세계의 일부였으며, 오히려 제국을 이루지 못한 약소국이었기 때문에(실제 책 중간에는 강대국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자신의 도시가 믿던 신을 못 믿고 上國의 신을 믿을 수밖에 없게 된 사례도 소개되고 있다). 하지만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큰 제국의 문물과 종교적 상징을 무작정 받들고 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자신들의 신앙으로 새롭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성찰의 기준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것을 고대 이스라엘의 영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배타적 고유성이란 비어 있지만(), 사실은 한 분을 향하는 태도’, 영성으로 꽉 차 있는 비움이라고 하고 있다. 이는 불교의 과는 분명 다르지만,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한편으로는 고대 이스라엘의 종교적 심성은 블랙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반적으로 블랙홀로 모든 것이 들어가고 화이트홀로 모든 것이 빠져나간다~고 알려져 왔으며, 그 중간을 이어주는 통로가 바로 웜홀이라고 한다(물론 블랙홀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론적인 존재지만). 그렇게 봤을 때 블랙홀처럼 고대 근동의 여러 종교를 빨아들인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웜홀을 통과하듯 그 종교적 모티프들을 탈신화화하여, 재신화화를 거쳐 화이트홀로 뱉어낸 것만 같았다. 블랙홀과 웜홀, 화이트홀이 하나로 연결되었지만(입구-통로-출구) 각자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고대 근동의 종교 또한 그리스도교와 동시대에 존재하고 서로의 종교적 모티프들을 공유했지만, 결론적으로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간 것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말하면, 우리가 흔히 환빠라고 말하는 집단이 숭배(?)하는환단고기류의 책들도 이런 시각에서 접근하면 어떨까 싶다. 이렇게 탈신화화하여 재신화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이야기도 변모하면, 단순히 위서다, 진서다~라는 이분법적 평가에서 벗어나 좀 더 생산적인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제 슬슬 끝을 내야겠다. 전체적으로 오랜만에 읽은 책이 생각 외로 유익하고 알차서 좋았으며, 성경에 대해서도 좀 더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더불어 과거에는 늘삼국사기삼국유사를 읽으면서 당대인들의 시각에서 이해해야지, 지금의 시각으로 보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보다 한 번 더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절실히 느꼈다.

 

좋은 책을 읽게 해주신 주원준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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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12-06-12 14: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들렀는데 역시나 좋은 책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어 너무 감사합니다.
제 마음에 쏙 드는 책들만 소개해 주셔서 늘 감사드려요^^

麗輝 2012-06-12 14:10   좋아요 0 | URL
marine님, 너무나 오랜만에 뵙습니다. ^^
그간 게을러서 책을 멀리했더니 이제서야 인사를 드리네요~
암튼, 잘 읽으셨다니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