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신라를 말하다 - 무슬림의 이상향, 세계의 이정표 루스터 총서 11
정진한 지음 / 씨아이알(CIR)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랜만에 책을 읽고 짧게나마 서평을 쓴다.

(중박에서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복지? 의 하나인데, 분기별로 책 구입비를 지원해주고 있어서, 하나 신청했다)


이슬람과 신라의 상관성은 그간 몇몇 연구자들에게 의해 꾸준히 언급되었고, 이슬람권에서 쓰인 문헌들의 내용이 적지 않게 알려져 있었다. 인터넷만 검색해도 관련 내용을 나무위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책을 처음 읽을때만 해도 그런 내용보다 더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길 바란게 사실이다.


그리고 책을 다 읽은 지금은 만족~


먼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슬림의 이상향, 세계의 이정표’라는 부제가 관심을 확 끌었다. 무슬림에게 신라가 그 정도였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제1장. 무슬림이 처음 만난 한국, 풍요롭고 매력적인 섬 신라

제2장. 무슬림들이 만들어 준 신라의 역사, 모세부터 신라의 왕까지

제3장. 무슬림들이 붙여준 신라의 위도와 경도, 그 속의 지중해부터 인도까지의 세계

제4장. 세계의 양쪽 끄트머리, 카나리제도와 신라


전체적인 흐름은 이렇다. 제1장은 아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들을 소개할 것 같았고, 제2장에서 그런 기록들이 나오게 된 연유나 배경을 소개할 것 같았다. 제3장과 제4장은 잘 모르는 내용이었는데, 아마 앞서 나온 내용들이 상상과 부정확한 정보에 대한 거라면,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신라에 대한 정보가 보완되어 갔고, 다듬어졌다는 내용이 나올듯했다. (예상은 적중)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몇가지 주목되는 내용 중심으로 간단히 서평을 작성해 보고자 한다.


첫째, 이슬람권에서 인식한 신라와 와끄와끄


이슬람권 문헌에 ‘신라’만 나온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와끄와끄’라는 섬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당연히 처음에는 두 섬을 일본으로 인지했었다는데, 그건 와끄와끄가 倭國과 비슷한 발음이라는 데에 기인했다. 하지만 신라설이 등장하고, 동남아시아, 상상의 지역 등 여러 견해들이 나오게 됐다. 물론 최근에는 신라를 지칭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졌지만. 저자는 와끄와끄가 초기에는 동남아시아, 후기에는 동남아시아와 동아프리카 연안의 도서 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왜냐하면 항로상 신라보다 동쪽이 아닌, 서쪽 또는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신라만 기술하고, 그 주변의 발해나 일본 등을 서술하지 않은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은 지역은 생략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하지만 이븐 쿠르다딥바가 기술한 ‘중국의 바다 동쪽으로부터 오는 11가지 물품’을 보면 비단, 검, 우황, 사향, 알로에, 馬具, 담비 가죽, 陶器, 帆布(돛의 천), 계피, 겹작약 등이 있다. 이를 정수일 선생님은 모두 신라에서 들여온 것으로 봤지만, 저자는 여기에 비판적이었다. 그보다는 말 그대로 중국의 바다 동쪽에서 수입한 모든 물품을 서술한 것으로 그 안에는 중국ㆍ신라ㆍ일본ㆍ발해산 물품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어차피 동아시아의 모든 특산품을 서술하는데 그중 신라만 特記한 것은 역시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다. 즉, 발해나 일본을 서술하지 않는 것은, 신라가 당시 對이슬람 교역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을 의미한다. 즉, 당시 이슬람 상인들은 신라를 통해 동아시아의 여러 물품을 거래했을 가능성이 크며, 발해나 일본이 중요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들과 직접 접촉할 일이 없었을 수 있다. 이슬람 상인들이 신라 본토(경주)까지 온 게 맞는지 의심이 되는 대목이다. 오히려 ‘신라’라고 불리는 다른 지역 혹은 다른 집단의 존재를 떠올리게 된다.


둘째, 이슬람문화권이 획득한 광범위한 지리 정보의 실체


이건 그동안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부분인데, 저자는 왜 이슬람문화권에서 광범위한 국내외의 지리 정보를 수집해야 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무슬림들은 하루 다섯 번 자신이 위치한 장소에서 메카 방향을 찾아 정해진 시간에 기도를 드려야만 했고, 일생에 한번은 정해진 기간 동안 메카를 순례할 의무가 주어졌다. 즉, 시간을 측정할 천문학과 지리학은 단순히 학문적인 수준이 아니라 종교 활동을 위한 신성한 책무에 해당했다는 것이다. 뭔가 머리를 한 대 땅! 맞은듯한 느낌이었다. 학문과 종교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지리학을 이렇게 접근한 것은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바그다드의 우편국장은 당시 세계지리의 최고 전문가였다는 것도 신선했다. 정보기관의 수장이 우편국장이라니)


그렇게 생각하고, 이슬람권에서 나온 지도들을 다시 보니 지도가 색다르게 보였다. 저 지도들은 단순히 이슬람 상인들의 발길이 닿은, 그렇게 모은 정보의 집합체가 아니었다. 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이 메카 순례를 위한, 자신이 사는 곳과 메카와의 지리적 관계를 알기 위한 하나의 지침서였던 것이다. 당연히 지도를 주로 사용하는 무슬림들의 거주 구역은 자세히 묘사될 수 밖에 없었고, 지리정보 또한 정확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동아프리카 지역, 중동을 중심으로 인도양에 연한 해안가, 동남아시아, 중국 동남부의 국제무역항 등은 중요하게 묘사되고, 그 이외의 내륙은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이 단순한 것을 생각하지 못 했다니.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적 논리로 접근하니 지도가 새롭게 보였다.


셋째, 섬나라 신라에 대한 묘사와 위치


섬나라 신라, 라고 하면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보통 섬나라 일본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신라를 섬나라로 인식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슬람권 문헌에 묘사된 신라는 하나같이 그와 유사한 표현을 쓰고 있다. 신라국(Bilād al-Sili), 신라섬(Jazīrat al-Sila), 신라 제도(Jazā’ir al-Sila), 신라국과 그의 섬들(Bilād al-Sila wa-Jazā’irha) 등으로 묘사되었으며, 후대 지도 필사본을 만드는 사람들에 의해 6개의 섬으로 점점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섬의 개수에는 차이가 있지만, 신라를 기본적으로 바다 한가운데의 섬나라로 인식한 것에는 변함이 없다. 저자는 한반도 남해안의 다도해 구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700여개로 이루어진 구역이니 충분히 접근 가능하다. 하지만, 인도차이나 반도와 말레이 제도로 대표되는 동남아시아에는 17,000개가 넘는 섬들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지리 정보를 취합하고, 지도를 만들던 무슬림들에게 어느 지역이 좀더 강하게 인식됐는지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지리 정보와 지도는 중국 동해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섬나라 신라를 찾으려면 미지의 세계에 가까운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찾는게 나을지, 아니면 당시 무슬림들에게 익숙한 동남아시아와 중국 동남해안 일대에서 찾는게 나을지 고민된다. 특히 신라를 묘사할 때 나오는 내용 중 하나가 그곳에 한번 들어간 무슬림이 나오기 싫어서 거기에서 평생 살고 싶어했다는 점이다. 그 이유로는 깨끗한 공기와 물, 풍부한 황금과 각종 보물, 병이 나지 않은 깨끗한 환경 등을 거론한다. 중국 강남지역과 확연히 다른 지역이 떠오른다. 다만, 그게 한반도를 묘사한 것인가, 는 별개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특히 후대로 갈수록 신라에 대한 지리적 정보를 알 수 있는 요소로 <무슬림들이 한번 가면 떠나고 싶지 않아하는 땅>이라는 것이 있다. 저자는 이게 ‘양저우 대학살’과 ‘황소의 난’을 거론했다. 이때 무슬림들이 가장 많이 기거하던 양저우와 광저우 등의 국제 항구에서 외국인 대학살이 일어났기에 그들이 신라로 도피했다는 것이다. 그때 살해된 외국인은 12만에서 20만 사이인데, 암튼 어마어마한 숫자였을 것이다. 저자는 지리적으로 동남아시아가 가깝지만, 중국 남부 해안에 발이 묶이면 해외로 탈출하는게 불가능했으므로 중국 동부에서 출발해 직항 항로를 따라 신라로 도피하는 것이 당연했다, 고 해석했다. 얼핏 보면 일리가 있으나 이 역시 재고의 여지가 있다.


수십, 수백의 가호만 해외에서 유입되어도 기록으로 남는 법인데, 수천에서 수만의 이주민이 바다 건너 통일신라로 왔다? 심지어 고려 사회보다 통일신라 사회는 무슬림의 존재가 더 미약했었다. 그런데 저런 대사건이 기록에 남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봤을 때 대안은 장강 하구의 주산군도가 아닐까 싶다. 중국 동남해안에 인접하면서도, 바다 가운데에 있는 섬,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섬들이 위치하면서도 너무 섬이 많지도 않은 곳. 그런데 왜 이걸 그동안 주목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넷째, 신라의 특산품이라고 기록된 것들


이슬람권의 신라 관련 기록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황금’이다. 이 역시 가볍게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기록이 남은 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위 금제품이 많이 확인되는 시점은 5~6세기, 마립간시대라고도 부르는 적석목곽묘가 신라 곳곳에 폭발적으로 만들어지는 시기이다. 그런데 이슬람권의 문헌은 모두 8세기 이후의 기록이다. 물론 󰡔삼국지󰡕 동이전처럼 3세기 이전의 내용부터 소급해서 포괄적으로 서술했다, 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통일신라와 황금문화는 딱 매칭이 안 되는게 사실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전 시기의 황금문화와 함께, 그 이후의 황금을 금하는 불교적 색채가 강한 문화는 왜 언급이 안 되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있어야 할 것이다. 신라 관련 기사가 12세기 이후, 고려가 들어선 뒤에도 전해지는데, 여전히 황금문화만 특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을 비단과 금실로 치장하고, 그릇과 개목걸이, 원숭이 목테마저 금으로 만들었다는 황금의 나라. 금입택을 기술한 󰡔삼국유사󰡕의 기록, 더 이상 비단을 불교 행사에 쓰지 말고, 금은 식기의 사용을 금한다는 󰡔심국사기󰡕의 기록과 연결된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6세기 초반이 지나면서 신라는 황금의 나라라고 보기 어려운 사회 분위기가 마련된다. 철저하게 골품제에 기반해 사회 전반을 강하게 통제하기도 했다. 그런 신라를 둘러보고 무슬림들이 신라 전반의 분위기에 대해 저렇게 묘사하기는 힘들었다고 본다.


즉, 저건 신라 본토와는 다른 사회적 현상들을 묘사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게다가 고려가 들어선 뒤에도 신라에 대한 저와 같은 표현은 여전히 유지된다. 즉, 신라-고려로 이어지는 한반도 내의 왕조 교체와 상관없이 신라가 여전히 병렬적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애초에 저들이 인식한 신라가 고려 이전의 왕조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게 한다. 시기에 따라 이슬람권 문헌에 묘사된 기록이 조금씩 다른 걸 보면, 조금씩 신라에 대한 정보가 보완된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런데도 통일신라시대의 사회 변화상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이런 것들은 고민이 필요한 부분이다.


한반도와 직접 교류했던 동부 이슬람 세계는 새로 등장한 고려에 대해 그래도 정확한 정보를 생산하는데 주력했지만, 이들과 대립했던 서부 이슬람 세계는 여전히 과거부터 답습했던 정보에 의지했다는 시각도 참고할만하다. 동쪽 끝 신라와 서쪽 끝 카나리아 제도를 양극단에 위치시키고 이를 쌍둥이로 만들고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형성한 것이 그러하다. 그렇게 봤을 때 두 가지 병렬적인 정보가 계속 전해진 것도 이해가 되기 때문이다.


이상이다.


그동안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내용들을 상기시켜 줬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나에게 유익했다. 저자에 의하면,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이슬람권 문헌이 가득하다고 했다. 앞으로 또 어떤 이야기들이 새로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과 일본 외에 신라에 이렇게까지 관심을 가진 나라는 무슬림이 유일하다. 왜 그렇게 관심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알게 모르게 한반도와 이슬람 문화권과의 관계는 상당히 오래도록 밀접하게 이어져 왔다.


이 책은 그런 두 세계의 관계를 새삼 느끼게 해주는 작은 선물과도 같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시우행 2025-10-18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麗輝 2025-10-18 23:17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