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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한 권으로 읽는 시리즈
이언호 지음 / 큰방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안타깝게도 또 하나 혹평을 가할 책이 생겼다. 

아무래도 한국 역사소설계에서 연개소문 부문만큼은 '유현종의 망령'을 벗어날만한 책이 없는 것 같다. 참고논문 및 문헌(요즘은 역사소설 쓸때도 논문처럼 이런 걸 써야 하나 보다. 유행인가?)을 보니 신채호 선생님의「고구려의 대수 · 당 전역」과 유현종, 박혁문이 쓴『연개소문』이 이 책의 주요 골자임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나마 논문 하나 인용한 것이 박형표의「연개소문의 서정국책과 대당 전역」이라는 논문인데 대체 어디에 실린 것인지를 모르겠다. 누군지도 모르겠고. 그 밖에 인용한 책을 보니 박영규가 쓴『고구려본기』에다가(정말 주인장이 대놓고 쓰레기라고 표현하는 책은 이 책이 유일한데...소설책 곳곳에 등장하는 지도를 보고 기겁을 했다) 평생교육개발원에서 나온『대인 사상 필승병법』, 김희영이 편저한『이야기 중국사』까지. 저자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황당했다. 역사소설 쓰는데 참고문헌을 기재할 필요는 없지만 이왕 기재할 바에야 뭘 좀 밝혀서 이로울때나 밝히지, 괜히 밝혀서 욕 먹을 바에야 왜 이런걸 밝히냐...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뭐 책을 제대로 읽기도 전에 이 책은 아니다~싶은 마음이 강했다. 책 겉표지를 보면 이런 문구가 있다. '수십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온 당태종을 격퇴하고 오히려 북경까지 추격해간 고구려의 영웅 연개소문. 그는 정치를 잘못하거나 패전할 경우 왕을 추방했던 고구려의 전통에 따라 유약한 영류왕과 호족들을 제거하고 오직 고구려가 대륙의 주인이 되기만을 염원했다.' 정말? 한번 저자한테 반문해보고 싶었다. 연개소문이 북경까지 추격했다는 것도 의문이고, 고구려에 저런 전통이 있었나? 싶은 생각도 있고, 정말 연개소문이 고구려가 대륙의 주인이 되기를 염원했는지도 모르겠다. 뭐 하나 제대로 맞아들어가는게 없다. 저자 약력을 보니 원래 영문학 전공이었는데 뒤늦게 중국문학에 심취해서 중국소설을 주로 연구했단다. 책을 읽는 내내 그저 그런 역사소설과 별 차이를 못 느꼈다. 아마도 중국소설을 연구한 부작용(?) 때문인 것 같다.『삼국지연의』가 끼친 폐해(?) 때문에 한국 역사소설이 다 그저그런 작품에 그치고 말았던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은가.

책은 전체적으로 2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12장이 고-수 전쟁을 무대로 하고 있다. 그럼 나머지 10장은? 1차 고-당 전쟁을 끝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정말 연개소문을 다룬 역사소설을 거론할때마다 주인장이 누누히 언급하는 것이지만 왜 연개소문이 고-수 전쟁에서 활약을 하는건지 대체 알 수가 없다. 연개소문이 무슨 불사신도 아니고 거 참. 665년 무렵에 사망한 연개소문이 612년 수 양제의 고구려 침략때 이미 전공을 세웠다면...연개소문은 590년대에 태어나서 거의 80세 가까이 살았단 말인가? 유현종이 처음 설정한 내용 그대로 후대의 모든 작가들이 다 따라하는 작태를 보니 한심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기본적인 골자를 바꿔야지, 기본 줄거리는 다 따오고 거기다가 논문 1편에 책 몇권 더 본 다음에 세부적인 내용 조금 바꾼다고 책이 달라진단 말인가? 그럴려면 대체 왜 책을 내고, 그 책을 내주는 출판사는 또 뭔지 당최 알 수가 없다. 

진짜 할말이 없지만 그래도 굳이 몇마디 해보겠다.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이 유현종과 박혁문의『연개소문』을 요약한 것에 불과해서(주로 유현종) 한마디로 '식상하다.' 그나마 많은 내용을 줄이면서 내용이 더 이상해진 느낌까지 들었다. 마지막은 또 당 태종이 죽음으로써 끝을 맺고 있어서 이 책의 제목이 연개소문인지, 이세민인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대체 어떤 생각을 갖고 이 책을 쓰기 시작했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연개소문 개인의 심리 상태를 제대로 묘사하지도, 당시 상황을 생동감있게 묘사하지도, 당시의 처절한 전쟁 상황을 다이나믹하게 묘사하지도 않았는데...대체 어떤 것에 주안점을 뒀는지 궁금하다. 그만큼 책을 읽는 내내 별로 감흥도 없고, 뻔히 아는 내용(이미 다른 소설책에 다 나온 내용이니까)만 계속되니까 재미는 당연히 없었고 나중에는 책을 다 읽자~는 의무감마저 희미해져 버렸다.

저자는 당 태종의 죽음이 고구려인의 독화살에 의한 것이다. 황량대가 중국 내지 곳곳에 있다, 중국 내지에 고려(高麗)라는 지명이 있는데 다 연개소문이 점령했던 흔적이다...라는 얘기를 하면서 연개소문 영웅화 작업에 착실하다. 권말에 붙이는 글...이런 걸 차라리 쓰지 말지~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책일 뿐이다. 저자는 분명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항하고 싶어서, 고구려의 위대한 역사를 알리고 싶어서 이 책을 쓰고 연개소문을 재조명하려고 했는지는 몰라도 정작 그 결과물은 최악이었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픽션으로 봐달라고 호소하는 편이 더 나았다. 어설프게 이런 식으로 글을 쓰면 나중에 이 책을 읽고 잘못된 생각을 품게 될 독자들에게 미안해야만 할 것이다. 왠만하면 이런 혹평 잘 가하지 않는데, 이 책은 정말로 아니다. 한번 읽어볼만 하다~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저자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책 다시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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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
강무학 지음 / 문예춘추(네모북)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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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알고보니 저자는 이 책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광개토대제』를 썼다. 그러면서 SBS 드라마〈연개소문〉을 책으로 읽는다는 광고도 잊지 않고 있다. 이 책이나, 그 책이나 사극 방영과 맞물려 출간된 책이다...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대체 누구길래 이렇게 책을 쓸까~하는 생각에 이리저리 검색해보니 역사 관련된 책이나 소설을 꽤 썼음을 알 수 있었다. 어쨌든, 이 2권의 책만으로도 저자의 사관(史觀)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그리고 얼핏 지나가다가 확인하고 어이가 없었던 사실은 이 책과『광개토대제』의 겉표지가 같다는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무슨 시리즈물이라면 모를까 서로 다른 인물에, 서로 다른 시대를 다룬 서로 다른 책의 겉표지가 왜 같을까? 어이도 없었고, 황당했고...암튼 그런건 신경쓰지 말고 책을 펼쳤다.

저자의 머리말을 주욱 읽어봤다. 저자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많은 참고자료들을 읽어본 것 같았다. 또한 본인 스스로 전쟁 장면도 고대의 병법이나 전술에 의거해서 구성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픽션적인 요소가 없을 수는 없지만 최대한 진실을 묘사하는데 노력을 기울이고자 했음을 강조했다. 어느 정도의 안목으로 당시 상황을 봤을까~라는 생각에 겉표지에서 느꼈던 점은 무시하고 다소 기대감을 갖고 책장을 넘겼다. 일단 등장인물들을 주욱 봤는데 이내 애초의 기대감이 부질없는 것임을 느꼈다. 일단, 연개소문을 태대막리지 장군이라고 소개한 점, 막리지라는 직함의 용어 사용에 대한 지식이 미숙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연태조를 동부대인이자 동부총관으로 소개하고 있고 남수북공파의 주장으로 묘사하고 있었다. 남수북공이니, 서수남진이니 하는 표현은 당시 고구려의 대전략(大戰略)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고정의를 좌무위장군 겸 대막리지라고 소개한 점도 의아했다. 좌무위장군이 고구려 고유의 관직이 아닌데 차라리 사료에 나오는 것처럼 대대로로 등장시키는 것이 나았을 것 같았다. 그리고 고-당 전쟁시 당나라측 장군을 이정이나 이개적(가공의 인물), 이세적 등으로 한정시킨 것도 조금 의아했다. 고-당 전쟁은 몇명의 장군이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맞붙은 전쟁이 아니라 각국이 수십명의 내노라하는 장수들로 하여금 수십만의 대군을 지휘하게 했던 대전이기 떄문이었다. 암튼 등장인물 소개부터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용상 독특한 점을 꼽자면 기존의 연개소문 관련 역사소설(뭐 대부분 유현종의 아류작들이지만)과 비슷한 내용을 담으면서도 다른 스타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TV 드라마〈연개소문〉에서 연개소문이 어린 시절 김유신 집에서 하인 생활을 하는 것으로 설정해 많은 욕(?)을 먹었고, 유현종이 그의 소설에서 연개소문이 젊었을 적 당으로 건너가 이세민과 그 일당과 친분을 맺는 내용이 나온 것(드라마에도 반영된 내용이지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와 약간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물론 갓쉰동이가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연개소문이 어릴적 사부의 뜻에 따라 신라인 집에서 일부러 하인 생활을 하는 설정을 했다. 당으로 떠나는 내용은 없고 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연개소문이 어릴적 타국에서 고생을 하고 돌아온다는 설정은 변하질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마 이는 연개소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사료가 없다는 점, 그에 대해 신채호 선생님이 갓쉰동전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 연개소문이 아버지의 직위를 이어받는 과정이 순탄치 못 했다는 점 때문에 생겨난 일종의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차후 작품에서도 계속 이런 설정을 지속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은 돌궐- 당의 전쟁에서 돌궐의 원병 요청과 맞물린 삼국의 국제정세를 중요한 시대적 배경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당시 시대적 배경상 그럴 가능성은 충분히 있기에 이런 소재 선택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젊은 연개소문이 돌궐로 건너가 돌궐병을 이끌고 뛰어난 전략전술로 당군을 궤멸시킨다는 설정은 다소 의아했다. 아마 저자는 연개소문의 젊은 시절에 대한 묘사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하기 위해서 괜찮은 소재를 선택한 듯 하지만, 잘 활용을 못 한 것 같다. 오히려 연개소문의 젊은 시절에 대한 묘사가 필요했다면 젊은 시절 잦은 전투의 참여나 사냥, 고구려 귀족으로서의 정규교육을 받는 모습 등을 표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기존에 흔히 접했던 연개소문 관련 소설이나 드라마와는 다소 차별성을 둔(두고자 노력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만) 점은 긍정적으로 봐줄만 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그보다 더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일단, 연개소문이 어느정도 정치적 입지를 획득하기 전까지 고구려 내부적인 정치적 분열이라든가, 연개소문이 고난을 이겨내는 장면 묘사에 주력하고 있어 전체적인 분량에서 연개소문의 활약상이 그닥 많지가 않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고 고-당 전쟁을 수행하는 분량은 전체 내용에서 1/3 정도가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저자의 초반 장담과는 달리 다소 허술한 용어 사용이나 구성 등이 계속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육화진이니 뭐니 제갈공명이니 뭐니하는 표현도 그렇고,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베고 바로 태대막리지에 올랐다는 설정도 그렇고 저자가 과연 관련 사료들을 제대로 살펴봤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리고『광개토대제』에서는 더 문제였던 부분(아마 관련 사료가 더 적어서 그랬겠지만), 지극히 중국적인 시각이나 표현 등을 여과없이 썼던 점도 이 책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는 부분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이 책의 메인이라 할 수 있는 고-당 전쟁에 대한 묘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전략전술은 커녕 당시 전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상황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내용이 엉성했다. 태종의 오른팔과 왼팔로 이세적과 강하왕 이도종만 등장하는 것도 우스웠고 말이다. 당시 당군에는 내노라하는 명장들이 수도없이 많았는데 말이다. 당시 군대의 규모라든가, 편제 등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은 것도 물론이요, 전쟁 묘사에 있어 긴박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안시성 전투에 대해서도 진부한 내용만을 답습하고 있었고(물론 외굴과 내굴의 흐르는 물을 이용한 수공이라는 설정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한번의 전투로 대번에 쫓겨나는 당 태종에 대한 표현도 우스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주인장이 가장 황당해했던 사실은 연개소문이 당 태종을 쫓아 만리장성을 넘었다는 설정이었다. 당시 연개소문이 당 태종에게 항복 사절을 보내고 전쟁 배상금을 요구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고구려가 중국 내지까지 군대를 이끌고 갔다고 보는 것은 금물이다. 그럼에도 양자를 혼동하는 경향이 큰데 여기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1차 고-당 전쟁이 끝나고 연개소문이 당에 항복 사절을 보내고, 백제와 신라와의 관계도 원만하게 마무리짓고 소설은 끝난다. 마치 이걸로 연개소문에 대한 얘기는 끝났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연개소문의 화려했던 업적과 전공은 소개하고 고구려를 멸망으로 이끌고 갔던 내용은 빼먹은 것이 눈에 빤하게 보였다. 너무 의도적인 것 같아서 말이다. 물론 1권의 책에 다 담을 수 없다는 핑계를 댈 수는 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량에서 연개소문의 젊었을적 내용은 많이 싣고 고-당 전쟁 한차례만 치룬 뒤 서둘러 글을 마무리한 것은 누가 보더라도 의도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촉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삼국지연의』에서 촉한의 멸망과 함께 이야기를 마무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암튼 시작에 비해 말만 번지르르하고 허접하게 끝낸 글이었기에 읽으면서 점점 실망감만 커졌던 것 같다.

시대 조류에 휩쓸려 이런 책이 자꾸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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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 광개토대제
강무학 지음 / 문예춘추(네모북)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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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큰 인기를 끌었던 퓨전사극 중에〈태왕사신기〉가 있었다. 배용준이 주연을 맡은 데다가 광개토태왕에 대한 최초의 사극이라는 점에서 제작 단계부터 큰 인기를 끌었던 사극이다. 그와 더불어 광개토태왕이 재삼 주목받은 인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MBC-TV 역사드라마〈태왕사신기〉를 책으로 읽는다!'라고 소개하고 있어 처음에는 이 책이 드라마의 원적인 줄 알았다. 하지만 단지 그런 시류에 맞춰 나온 소설에 불과했다. 제목만 비슷하게 해서 꾸민. 제목에서 알 수 있지만 저자는 광개토태왕을 대륙을 지배한 영웅으로 그려내고자 하고 있다. 영토를 크게 넓인 군주이자 주변 제국들을 정복한 위대한 정복군주의 像을 소설 속에서 그려내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 점이 일단 별로였다. 아직도 광개토태왕의 겉모습에 치중한 묘사밖에는 할 수가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재밌는 점은 제목에서는 광개토대제라고 했지만 실제로 본문에서는 오직 광개토왕이라고만 칭하고 있었다). 

책장을 넘겨 등장인물과 목차를 살펴봤다. 기존 역사소설과는 다른 등장인물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개토태왕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모용수는 여전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족이지만 실제 '광개토태왕비'에 적힌 고구려의 적대국가를 보면 잔국(후에 왜로 기록되는)과 백잔의 비중이 더 크지, 후연은 그닥 중요한 적대국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삼국사기』에 후연이 비중있게 다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이런 현상이 발생한 것은 정립이 쓴『광개토대제』가 광개토태왕을 그린 효시적인 소설책으로서 잘못 길을 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든 느낌을 미리 말하자면 마치 이덕일의『오국사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뭔가 스케일이 큰 내용을 말하고 싶어서 이런저런 캐릭터를 등장시키고 이런저런 사건들을 배합해 이야기를 만들었지만 고증이나 인과관계, 상호 연관성에서 미흡한 그런 책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책장을 넘길수록 그런 안타까운 순간이 많았다. 

이 책도 역시 그 시작은 정적들에 둘러싸인 담덕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었다. 다만 조금 다른 점이라면 다른 책에서는 정적들의 힘이 워낙 커서(황후와 국상 등등) 담덕이 정말 어렵게 위험에서 벗어나지만 여기에서는 아버지 이련이 어느 정도의 군사권을 보유하고 있는데다가 담덕도 그를 따르는 무리들이 있어 마치 주몽의 어릴적 행보를 그려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 독특한 점은 봉상왕(저자는 봉산왕이라 적고 있다. 오타가 아니라 잘못 알고 있는 듯 하다)의 후손들이 미천왕의 후손들에게 복수를 하려한다는 설정을 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미처 생각치 못했던 부분인데 충분히 그럴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가 전진의 부견을 두고 불교와 황노술을 주변 국가에 퍼뜨려 그 힘을 약화시키려는 인물로 해석하고 있어 그 점도 독특했다. 알다시피 전진과 고구려는 전연을 공동의 적으로 삼고 친선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이런 설정은 조금 개연성이 부족하지만 다른 소설책에서는 시도하지 않았던 요소들을 삽입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더불어 고구려에 석전을 담당하는 석포부대(돌팔매부대)가 있었다는 설정도 신선했던 것 같다. 

하지만 무분별한 사자성어의 남발(특히 대화 도중에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은 진짜 NG였다. 저자가 6살부터 한학을 배워 그쪽에 조예가 깊어서 그런 것 같은데 이는 자못 한국사를 중국사의 시각에서 보게 되는 우를 범하게 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그런 흔적은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또 참고자료들을 많이 살펴보지 않은 부분들이 곳곳에 보이고 있다. 人名이 부정확한 것도 그렇고,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팩션으로 이야기를 꾸려나가는 부분이 거의 없다는 것도 그러했다. 특히 고구려의 경자대원정과 같은 대규모 남정에 대해 그 주적을 백제가 아닌, 백제를 도우러 온 왜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 그러했다. 백제왕과 중신들이 원군으로 온 왜군들이 안 도와주고 돌아간다는 말에 쩔쩔매는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에서는 실소를 금치 못 했다. 더불어 4세기 고구려가 요동뿐만 아니라 요서까지 경략하는 것으로 설정한 점, 광개토태왕때 이미 장안성 천도를 준비하는 것으로 그리는 점 등은 보는 내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역사 고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부분들이었다. 대체 엉터리 내용만이 난무하는 역사소설을 읽고 대체 누가 광개토태왕의 일대기를 제대로 읽었다고 하겠는가(광개토땅에 묻힌 왕이어서 광개토왕이란다. 여기에서 GG쳤다).

또 하나 읽는 내내 신경쓰인 점은 문체가 마치 불필요한 설명문들의 조합처럼 여겨졌다는 점이다. 대만이나 홍콩만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만화책에 적절한 대화와 나레이션, 그리고 그림이 있으면 충분한데 그쪽 만화책들은 일일히 매칸마다 캐릭터들의 동작과 생각 등을 설명체로 친절하게(?) 적어놓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계속 그런 느낌이 들었다. 등장인물간의 대화에서도 그렇고, 배경설명에서도 그렇고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설명조로 꾸역꾸역 채워넣은 것 같았다. 그래서 주인장으로 하여금 약간 짜증을 느끼게도 했다. 573쪽이라는 분량이 적지는 않지만 재밌는 책이라면 이 정도 분량이 큰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몇몇 부분들 때문에 읽으면서 거슬리는 부분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분명 저자는 광개토태왕에 대한 연구성과를 많이 접하지 않았으며 당연히 그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러했다면 아주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 인용과 묘사에 있어 이런 실수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기존 역사소설(광개토태왕을 다뤘던)과는 다른 시도를 하고, 그런 부분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한 면모는 보인다. 광개토태왕의 정복전쟁을 거시적인 안목에서 보려던 시도도 좋았다. 세부적인 묘사에서 새로운 내용들이 들어간 것 역시도. 하지만 서로 맛이 다른 음료수 4~5개를 섞어 이상한 맛을 내는 칵테일을 만든 것 마냥 그것을 마시는 사람에게 결코 좋은 느낌을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광개토태왕에 대한 묘사가 어디까지나 피상적인 것, 당시의 시각이 아닌 요즘의 시각, 고구려가 아닌 중국적인 시각 등에 국한되어 있는데다가 짜집기를 잘 못해놨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반쪽짜리 소설책이 되고 말았다. 저자가 이것 말고도『연개소문』이라는 소설책도 썼던데 그것도 읽어볼 생각이다. 아마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은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쨌든, 이런 소설들이 자꾸 나와 밑거름이 되어 정말 좋은 역사소설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소설책들이 앞으로 더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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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24-02-06 0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광개토태왕 책 320 몇 쪽 되는거 있는데 중고책으로 다른 두꺼운책이 있길래 구매 하려고 했는데 이글을 보고 나서 안사고 기존에 있는거 보려구요 ㅋㅋㅋ

※억지로 쪽수를 늘린 것 같은 책은 지루해질듯 싶네요;;
 
태왕신화 - 광개토의 전설
한대희 지음 / 미르출판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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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무계(稽)...
책을 읽는 내내 주인장의 머릿속에 떠오른 네글자다. 어떻게 이른 소설을 쓸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시중에 보면 광개토태왕에 대한 책이 요즘 많이 나오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대부분이 소설이지만(관련 연구서는 이제 한계점에 도달한 듯 싶다) TV 드라마의 영향도 있고 이런저런 국민적 관심때문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을 보면서 무분별한 소설책의 난무는 정말 문제가 많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먼저 제목부터가 주인장에게 어색하게 와닿았다. 광개토태왕을 두고 '신화'니 '전설'이니 하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은연 중에 필자가 광개토태왕을 이미 전설이나 신화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장을 하나씩 넘기면서 그 우려는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주인장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해모수 장군과 다물군'이라는 단어였다. 그 뒷장에 보이는 것은 '예소야'였고 말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봤던 단어들 아니야? 그렇다. 바로 TV에서 했던 '주몽'이라는 사극에 등장했던 단어들이다. 그것을 그대로 소설에 인용하다니. 황당했다. 역사소설을 쓴다는 사람이 TV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을 인용하는 것은 생전 처음보는 일이었다. 창의력에서 마이너스 아닌가. 그리고 페이지를 계속 넘기는데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유리명왕의 태자 도절을 송씨의 아들이라고 한 점, 해명을 두고 치희의 자식이라고 한 점에서 예전에 주인장이 가졌던 생각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예전에 주인장은 유리명왕의 가계에 대한 고찰을 하면서 도절을 송씨의 아들로, 해명을 화희의 자식으로, 대무신왕을 도절의 아들로 설정했던 적이 있었으며 이런 설정을 다른 연구에서는 보질 못 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식의 가계 설정을 한 것을 보고 의아하기까지 했다. 생각이 비슷한건지, 아님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정보를 활용한 것인지 말이다. 암튼 프롤르그 내용이 왜 거기에 있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탐탁치않은 마음으로 책을 계속 읽어내려갔다.

책을 읽다보니 익숙한 내용이 나왔다. 소수림왕 시절 황후의 오라비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국상 개연수가 등장하고, 태대형 가리치가 등장하고 하무지라는 절세 지략가가 나오고 이래저래 많이 보던 책에서 나온 내용과 똑같은 내용들이 나오고 있었다. 바로 정립이란 사람이 쓴『광개토대제』라는 소설에 나온 내용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그대로 그 내용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현종이 쓴『연개소문』이라는 소설의 내용을 이후에 나오는 소설들이 모두 답습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특히나 광개토태왕 시절에 대해 쓴 소설로는 정립의 것이 거의 유일한 상태에서 그것을 베껴쓴 소설이 또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나중에 알고 경악을 금치 못 했지만 이 책의 필자는 참고문헌으로 정립의 책을 거론하고 있었다. 세상에 역사소설을 쓴다는 사람이 다른 소설을 참고문헌으로 참고하는게 가당키나 한단 말인가. 역사자료도 아니고 말이다. 참고로 말하지만, 정립의 책을 읽으면서 그가『후연서』라는 사서를 인용했다는 글을 보고 할말을 잃었었다. 그런 엉터리 소설이 있다는 것도 안타까웠지만 그 소설이 광개토태왕에 대한 거의 유일한 소설이라는 것이 더욱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내용은 점차 읽는 이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정립의『광개토대제』이후로 우리나라는 황제, 천자라는 표현에 굉장히 민감해졌고, 광개토태왕보다 광개토대제라 부르길 원했다. 또한 광개토태왕이 어렸을때 굉장히 험난한 여정을 거쳐 어렵게 어렵게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을 전하면서 당시 고구려의 왕권이 상당히 약했다는 설정을 고수했다. 더불어 후연이라는 나라와 후연의 모용수라는 인물을 크게 부각시켜 그런 강력한 나라를 상대로 싸워 이긴 고구려가 정말 대단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후연은 전연에 비해 국세가 굉장히 약한 나라였었다. 그 설정 자체가 주인장에게는 상당히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었는데 이 책에서는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뻔뻔스럽게 말이다. 

게다가 실제 역사를 왜곡시킨 구성도 그렇고 황당한 내용들도 어이가 없었다. 불교 도입으로 인해 고구려의 상무정신이 약화되었다는 것도 그렇고, 고구려의 왕실이 4세기 중후반 약했다는 것도 그렇고, 후연이니 백제니 30만, 40만 대군을 우습게 모집해 전쟁을 벌이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만화나 소설보다도 못한 내용들이 버젓히 책으로 쓰여 나왔다는 것 자체가 황당했다. 그리고 이 책을 보면서 황당하다는 얘기를 주변에 했더니 누가 하는 말이...나는 책을 많이 봤으니 이런 걸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모르고 아~이게 진짜 역사구나, 라고 느낄 것이라고 말이다. 순간 움찔했다. 정말 그러면 어떡하지? 이 책 한권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잘못된 사실을 알고 믿을까...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인터넷 정보와 각종 소설들을 짜집기한 황당한 소설책. 게다가 책 뒤에는 참고문헌이라고 10권 남짓한 책들이 적혀 있었는데,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삼국사기』번역본이야 그렇다치고『상고사의 새 발견』과 같은 책은 대륙삼국설이 적힌 책인데 그런 책을 참고한 소설책이니 그 내용이야 볼짱 다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기다가『소설 일본서기』까지. 분명 신영식 선생님 책이나 김철준 선생님의 책을 참고했다고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에는 그런 내용들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비주류의 조합물이라고 할까? 아니, 비주류라기 보다는 자료같지 않은 자료들을 짜집기한 소설책이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광개토태왕의 모든 업적을 신화니, 전설 따위로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쓴 책이 바로 이 책이었다. 필자는 단순히 광개토태왕을 중원대륙을 미처 제패하지 못한 제왕, 대륙의 정벌자로서 최강자였던 인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아직도 이런 80년대 사고방식을 갖고 책을 쓰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황당할 따름이다.

별을 준다면 빈 별 반개 주기도 아까운 책이다. 주인장은 왠만하면 어떤 책이든 읽으면 단 한개의 자료라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 책에서는 정말 그런 부분이 전혀 없었다. 이 책을 출판한 출판사야 그렇다치고 이 책을 앞으로 읽게 될 독자들에게 저자는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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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미 군사적으로 조선의 허약함을 여실히 드러냈던 7년여의 조-일 전쟁. 이후 조선은 절치부심 국가를 재건하지만 목적없는 군사력 회복은 허공에 쏘아대는 화살과도 같았다. 1차 조-청 전쟁(정묘호란)때 한차례 곤혹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그로부터 9년 후, 2차 조-청 전쟁(병자호란)을 맞이하여 그 허약함을 또 한차례 여실히 드러냈다. 얼마전 온 몸에 페인트를 뒤집어쓴 삼전도비가 전쟁의 결과물이다. 치욕스런 삼전도에서의 항복 의식. 과연 전장터였던 남한산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것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읽어보라.

이미『칼의 노래』와『현의 노래』에서 세부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인물과 심리묘사를 보여줬던 김훈은 이 책에서도 그의 장기를 재인식시켜주고 있다. 주인장이『칼의 노래』에서 보여줬던 이순신의 섬세한 내면묘사와는 조금 다른 스타일의 내면묘사가 소설 속에 등장한다. 이제는 이순신 하나뿐만 아니라 남한산성이라는 철벽을 사이에 둔 여러 사람들에 대한 심리묘사가 등장하는 것이다. 멍청이 임금 인조(하지만 소설 속에서 인조는 상당히 줏대있는, 그러면서도 왕의 위엄을 잃지 않는 임금으로 나온다)와 영의정 김류, 예조판서 김상헌, 최명길과 이시백, 그리고 수많은 인물들...마치 그 당시를 재현한 영화 한편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저자는 다양한 시각에서 여러 인물들을 묘사함으로써, 독자들을 1636년 12월 14일~1637년 1월 30일까지의 조선으로 안내하고 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현실과 명분의 대립에서 찾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독자들을 안내할 뿐, 이렇다 저렇다 결론짓지 않고 있다. 실천 불가능하지만 반드시 조선이 버리지 말아야 명에 대한 의리, 오랑캐에 대한 비복종.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만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사대부들의 고집스러움에 고통받는 것은 남한산성 내의 백성들과 조선팔도의 백성들이리라. 김상헌이 성밖으로 내보내 정황을 살피게 했던 서날쇠가 대표적이리라. 조정은 해준게 아무것도 없지만 그는 무던히 일어나 임금과 사직을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럼에도 일국의 예판이라는 자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사히 다녀오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치사하고 비열한 고관대작의 오만함이 꼴배기 싫지만 그럴 수 없는 장면이었다.

마치『조선왕조실록』을 꺼내 한장 한장 넘기는 듯한 기분이다. 성안에 갇혀있는 동안 저자는 성 안팎을 넘나들며 너무나도 자세히 당시 상황을 묘사하고 있었다. 주인장은 한때 인기를 끌었던 소설『미실』을 보면서『화랑세기』를 그대로 베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평을 했었는데 주인장의 그런 평을 빗대어 그럼 이 책은 어떻느냐~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조선왕조실록』을 정리해 나열한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저자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렇게 그해 겨울,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었다고 거듭 말했는지도 모른다. 있어야 할 곳에 있지 못 하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 하고, 이뤄지지 않아서는 안 될 결과가 일어났다. 그 해 임금이 그 곳에 있던 시기에 말이다.『미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을 꼽으라면 주인장은 '여운'을 말하고 싶다. 이 책은 여운을 남긴다. 독자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러면서 어떤 답을 내리게 하지 않는다. 계속 사색하게 한다. 그래서 주인장은 김훈의 책을 즐겨 읽는다.

특히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내내 작가의 관점은 백성들에게서 떠나질 않는다. 흔히 남한산성에서 벌어진 대청항쟁에 대해 이야기할때 나오는 주화파와 주전파의 대립도 이 책에서는 여러 구성요소 중 하나일 뿐이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당시 가장 고통받고 가장 큰 희생을 치루고 가장 노력했던 민초들임을 저자는 은연 중 내비치는 것 같다. 임금이 먹을 수라상에 올릴 반찬이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성벽을 지키는 병사들은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 하고 성안에서 병사와 관리와 임금을 보필할 민초들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지기만 한다. 벤뎅이젓갈 하나에 성안이 난리나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꼴에 문명국의 임금으로서 비록 적군이지만 오랑캐 장수에게 내린다고 새해에 음식을 보냈다가 수치스럽게 퇴짜맞는 장면에서는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이 정도 상황에서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다는 말인가. 너라는 인간은! 인조~오!! 분노가 치밀고 주먹이 쥐어질 정도다. 그 상황에서 주전이나 주화니 떠들어대는 한심한 작태가 우습다. 저자는 어느새 주인장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삼배구고두. 세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의식이란다. 한국사에 이처럼 치욕스런 삶을 살았던 자, 또 있었을까. 부끄러운 역사면서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다시는 되풀이되서는 안 되는 순간이다.

주인장은 저자가 이렇게 자세하고 세밀하게 묘사하는 것에 대해 대단하다고 말하고 그칠 수가 없었다. 저자도 한국인인데...분노하고 치가 떨리지 않았을까? 어떻게 그 감정을 억누르고 냉정한 필치로 이렇게 묘사할 수 있지? 저자의 주관적인 평가나 개인적인 감정은 책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무덤덤하게, 냉정하게 당시의 상황을 마치 남 이야기하듯 그려내는 저자가 대단하게 보였다. 그래서 더욱 더 책이 전하는 메세지가 주인장에게 강하게 전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단하다...

한번쯤 꼭 읽어보길 권하는 책이고 싶다. 금년 하반기 들어 최고의 책을 꼽으라면 주인장은 아마 이 책을 꼽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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