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기억을 아우르는 힘

 

    이 책은 자서전이기에 융의 생애가 담겨 있다. 융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연대기적 순서로 나열하여 그의 생애와 순간들을 담고 있다. 다만 그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이자 비서에 의해 집필되고 정리된 것이다. 융이 한 문장 한 문장 손을 보았기 때문에 융 자신의 집필로 이루어진 저서라고 강조하고 있다.

책은 융의 유년기부터 말년까지를 회고하는, 연대기적 흐름으로 서술되고 있다. 다만 그 개별적인 내용들은 시간적인 흐름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일련의 사건이나 체험에 대한 융의 내적 체험들을 중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내적체험을 중심으로 서술하다 보니 이것은 그것을 겪었던 당시의 느낌과 생각에서 변화된 생각,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이후의 일들이 얽혀서 기술되는 형태이다.

융은 자신의 인생에서 공간에 대한 애착을 보이는 것 같다. 마치 신성한 장소에서 사색이 더욱 경건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그에게 그의 집, 탑, 돌 등은 많은 의미를 가진다.

 

여기 돌이 있네. 보잘것없는 것.

값도 아주 싸고......

바보들로부터 무시당할수록

현자들로부터는 더욱 사랑을 받는다네.

-연금술사 아르날두스 드 빌라노바, (1313년 죽음) 의 라틴어 시구절- p406

 

   이 글은 무지한 자들로부터 경멸당하고 배척되는 연금술사의 돌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융이 돌에 새겨넣은 최초의 글이다. 이처럼 돌에다가 글을 새겨넣는 것 이상으로 사물이나 사건, 모든 것, 특히 꿈에 의미심장한 기억들을 가지며 의미를 붙이는 융이다.

 

오늘날 인간은 지상에 있는 온갖 고등생물을 방사능으로 없애버릴 수 있다. 세계 소멸의 관념은 이미 부처에 의해 그 단초를 갖게 되었다. 피할 도리가 없이 노쇠,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사슬은 큰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존재의 환영은 소멸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부정은 이미 심상치 않게 가까이 다가온 미래의 문제를 예언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꿈은 인간세계에 오래 전부터 있어온 생각과 징후, 즉 피조물이 그의 창조주를 근소하지만 결정적으로 능가한다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p395).

 

   대체로 비슷한 형태로 글이 전개가 되고 있다. 그가 어렸을 적 혹은 당 시기에 맞닥뜨렸던 내적체험에 대한 기억과 분석. 어릴 적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 그 장면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을 시도하는 그의 모습이 놀랍기도 했다. 무엇에나 의미를 붙이고 설명하려는 것은 역시 그의 표현대로 자기실현의 과정이었을 터, 그 무수한 자기실현의 과정들 하나하나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나는 꿈이 그와 같이 실제임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깨어나도록 하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인지 자문해보았다. 보통은 그런 것을 유령 출몰에서만 경험한다. 깬다는 것은 현실을 자각한다는 뜻이다. 그 꿈은 현실과 같은 상황을 연출하여 일종의 깨어있는 상태를 만들어놓는다. 이런 종류의 꿈은 일반적인 꿈에 반해서 반복에 의해 강조된 뚜렷한 현실감각을 꿈꾸는 자에게 전하려는 무의식의 경향을 드러낸다. 그런 현실성의 원인은 한편으로는 원형적 이미지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p411~412).

 

   자신의 체험을 융은 이렇게 설명한다. 반복적인 수백 명의 음악소리, 축제적인 그 꿈은 고독현상으로, 외적인 공허와 정적을 사람들 무리의 이미지로 보상하려는 것이라고. 그것은 똑같이 보상적인 현상인 은자의 환각에 해당할 것이다. 그가 외로움으로 너무 예민해져서 그곳을 지나가는 ‘젤릭 뤼트(축복받은 죽은 자들)’의 행렬을 감지했을 것이라고. 융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융 옆에 고독과 쓸쓸함의 이미지를 같이 새겨넣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말이 또 기억에 남는다.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p624).

 

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합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p573).

 

   어떤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의 꿈이나 맞닥뜨린 체험의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그에 대한 해석들,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서도 그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집중해서 보자면.....

    

1) 객관적 ‘사건’이 아닌 내적 체험의 구현

 

   이 책은 융의 제자이자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이 82세가 된 1975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을 한 결과를 엮은 것이다. 이른바 자서전이다. 특히, 융이 한 문장 한 문장 손을 보았기 때문에 융 자신의 집필로 이루어진 저서라고 강조하고 있다.

자서전이기에 융의 생애가 담겨 있다. 융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연대기적 순서로 나열하여 그의 생애와 순간들을 담고 있다. 처음에 융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출간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후 출간 조건으로 동의했다 한다. 이미 자신의 할 이야기들은 충분히 다양한 논문과 저서를 통해서 했고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표출하는 것에 대해서도 꺼려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그의 이전의 무의식의 이야기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을까. 외적 사건들보다는 내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한 것은 그래도 ‘외적 사건’들을 말하지 않기 위함이었을까. 야페의 입으로 전한 융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융은 스스로도 객관적인 ‘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객관적 형태의 자서전 출간은 거부했던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만의 특성을 살린 자서전을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 '기억, 꿈, 사상'처럼 기억과 꿈과 사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국 단지 관찰 대상이 융 자신의 내밀한 것이었다는 특징만 있을 뿐 우리가 자서전이라는 데서 기대하는 일련의 이야기들을 기대하지 못한다. 어쨌든, 자서전이라는 것이 생의 모든 것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은 그의 저서에서 다루는 것과 같은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의 생각과 경험과 그것에 심층으로 들어간 이야기들은 이미, 보아 왔는데, 알고 있는데란 생각을 하는 것은 왜인지. 좀더 가십적인 이야기거리를 찾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무의식에 대한 해석도 해석이지만 그냥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찾아낸 것은 왜 슈필라인의 이야기는 없는가였다. 한 개인의 자서전이라기보다 분석심리에 관한 또 하나의 사례가 들어간 논문이라고 해야 할까.

   융 자신 외적 사건에 대해 할 말이 없고 경험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기에 그러한 별로 없는 외적 사건을 겪을 때의 내적인 체험과 의식이 궁금하게 와 닿는다.

 

 2) 기억을 아우르는 힘

 

   아리송. 내가 남의 꿈 이야기를 이렇게 주절주절 듣고 있어야 하는가. 그의 생은 온통 꿈의 역사다. 인생의 결정도 꿈과 함께 하고 인생의 고난도 꿈과 함께 한다. 아주 어린 시절의 꿈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살아있는 나날 동안 반복적으로 꿈을 의식하고 분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꿈에 대한 오랜 시간이 지나서의 해석은 객관성을 상실한다. 하지만 사실, 객관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 자신이 꾼 꿈에 대하여 느낀 감정을 ‘객관적’이지 않다고 나무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융 자신이 자신에 대해 객관적일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의 꿈 이야기는 그런 꿈을 꾼 것이 사실인지 조차도 의심스럽게 만들 요지가 다분하지만, 융에게 거짓말쟁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융이라는 ‘객관적인 존재’의 힘으로 이루어진 성과다. 즉 기억과 꿈을 이야기하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융이라는 프로필이 그의 거짓말같은 꿈 이야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학술적인 느낌을 갖고 또한 상당부분 학술적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는 이유일 것이라 본다. 결국 융은 ‘객관적 일 수 없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학문적인 형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결국 나름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융은 끝까지 자신의 꿈 이야기를 주관적 형태로 남기지 않고 ‘객관화’ 하도록 이끌었다.

 

3) 융이 작성하지 않은 소제목

 

   각 장의 제목 이외 소제목은 원서에는 없다 한다. 독자들이 읽기 편하도록 임의로 구분한 것이라 한다. 없어도 무방했단 생각이 든다. 오히려 제목 구분을 저자가 한 것인 줄 알고 더 의미있게 들여다봤다. 그러면서 뭔가 주제어를 잘못 뽑았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융의 강조점이 이것이었나, 생각하며 보게 되었다. 제목은 각 단락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간과한 것이 제목을 융이 달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비로서 두번읽기에서 이 구절을 발견하고 첫번째에서 맘에 들지 않았던 소제목의 의문이 풀렸다. 번역작에서는 흔히 가독성을 위해 이러한 장의 구분과 제목입히기를 시도한다. 나는, 이러한 방법에 대해 부정적이다. 번역하여, 번역자가 따로 주석을 붙이고 해석하는 책이 아니라면 나는 '원문'에 충실한 책을 원한다. 바란다.

   섵부른 구분이 지나치게 친절한(?), 단순한 번역자와 출판사의 의도가 책을 통해 저자가 이끌어온 흐름을 방해한다. 내면체험과 의식의 흐름으로 일관하는 융의 책에 구분을 통해 흐름을 조절하는 것이 책을 읽는데 편했을까? 나는 중간중간 들어찬 제목으로 인해 흐름이 방해받았다. 제목에 깔린 의도를 생각하느라 그랬다. 사실 제목이란 글의 의미를 함축하고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아닌가. 적절하지 않는 제목을 통해 저자의 의도가 왜곡될 소지가 있다면 이것은 지양해야 할 점이다.

더불어 생각한 것이 글을 단락으로 끊어서 작성하기와 길게 나열하기에 대한 생각이다. 융처럼 큰 장만을 구분하고 그 장의 내용은 구분없이 작성하는 방법, 역자가 행한 것처럼 가독성을 위해 소제목을 통애 내용을 끊어가는 글쓰기의 방식은 어떠한 주제를 담고 있느냐에 따라 달리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에서 쓰는 소위 교재를 보면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체계적으로 흐른다. 늘 1장, 1. 1) ....이런 형태로 도식화환다. 이것은 논문 형식으로부터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논문이나 보고서는 도식화된 형태를 요구하고 그것이 일견 명확성을 보여준다. 보기에 편하다. 그러나 딱딱하다. 나 교재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개념의 명확성을 익혔다는 생각, 무언가에 대한 짜깁기와 요약이란 생각만이 강하다.

   반면 서양의 교재들은 다르다. 도식화보다는 소제목을 어느 정도 단 전개로 흐른다. 수렴이 아니라 확장이다. 생각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내가 본 교재들은 그랬다. 목적에 따라 글쓰기의 형식이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을 구현해내는 작가의 역량에 따라 글의 맛이, 책의 맛이 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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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 삼국유사



 아, 사진과 함께 만나는 삼국유사는 아주 옛날 삼국의, 신라의 모습을 현재 속에서 찾아보는 감흥을 배가시켜주었다. 잠시 잠시 글의 여운을 느끼게 해주는 사진이 너무나 아름답게 자리잡아 이 책이 더욱 빛났다고 책장을 덮으며 생각한다.

  유사(遺事)는 이전의 역사서와 기록에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사실을 말한다. 이 이름에서 보듯이 삼국유사는 삼국사기, 해동고승전 등 기존 사사의 기록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연은 삼국사기를 국사(國史)라고 하여 정사로 인식하고 인용하고 있으며 해동고승전의 기사도 10여 군데 인용하여 받아들이고 있다. 삼국유사는 이러한 사서들에 빠져 있는 분의 사료들을 다방면에 걸쳐 수집하여 일연의 의도에 맞게 새롭게 구성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서문이 없고 동기를 보여 주는 글이 따로 전하지 않는다. 1278년 이후 일연이 73~76세 무렵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본격적으로 편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의 문도들도 다수 참여하였는데 민간에 전해지는 고기(古記)들을 비롯 사지, 금석문(金石文), 고문서, 문집과 승전류의 책 등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직접 답사하여 보고 들은 전승이나 설화들을 채록하여 서술하였다. 또한 시기적으로 삼국유사는 원의 간섭을 받고 있던 시기에 서술된 책이다. 몽골의 30여 년에 걸친 침략에 맞서 싸우다가 결국 굴복하게 된 상황에서 민족의 위기에 대응하여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정신 사관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기이편의 서문이다. 여기서 일연은 우리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긍심을 내세우고 있다. 이는 고조선조에 천신의 자손이 최초의 국가를 세웠다는 단군왕검 신화에서 파악해 볼 수 있는데, 일연은 이를 기록하면서 중국의 요 임금과 같은 시기에 시작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사 중심의 삼국사기에서 누락되거나 고쳐서 기술된 사료들이 삼국유사에서 그대로 전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삼국유사 내용을 번역하고 있지 않다. 삼국유사를 해설하고 있다. 저자의 차례 역시 삼국유사가 쓰여진 순서를 밟고 있다. 삼국유사의 내용을 발췌하며 그와 관련된 배경을 설명하고, 일연에 대한 설명이나 의도, 작가의 의견 등을 피력하고 있다. 그가 설명을 하고 있는 부분은 우리가 궁금해 하는 부분을 잘 찾아내어 잘 정리해 주고 있으며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생각하게끔 만들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책에는 글만큼이나 아름다운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역사서를 뒷받침하기 위한 객관적 자료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그 하나하나라 아름다운 시로 보이는 사진이다. 더구나 그 사진은 저자가 직접 찍은 것이 아니라(저자가 찍은 사진도 드물게 있더라만), 사진가가 따로 있다. 그러니 이 책은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과 그 삼국유라를 현대적으로 풀어간 고운기, 그리고 삼국시대의 흔적과 현 시대의 접점을 찾안 양진, 이 세사람의 각각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에 비해 좀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하지만, 마냥 옛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사실 현대에 사는 사람으로서 가지는 여러 의문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한 의문점들을 저자가 잘 이야기해주고 있어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그러한 의문에 대해 풀어가는 방식이 논문에서 나타나는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가 아니어서 좀더 편안하게 읽을 수있었다. 또한 곳곳에 보이는 저자의 시인의 향내가 감성적인 느낌에 젖어 들게 하면서 같이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부분을 잊지 않되 지난 역사의 흔적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굳이 내가 보완할 점을 어찌 찾으리오. 오히려, 책이 이렇게 끝나버리는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국유사가 이야기가 많은데 왜 여기서 끝나버리는지, 왜 이 이야기만 뽑아서 쓰고 있는지 등등, 그러한 점이 아쉽다고나 할까. 저자는 삼국유사를 시리즈로 엮어 내고 있으며 또한 다양한 버전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있다. 그 수많은 이야기를 이 한권에서 나타내기는 어려웠으리라 생각하면서도. 그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든 다른 저작물들을 읽어야 하는 걸까 하는 생각. 그러다 보면 삼국유사를 매개로 쓴 또다른 책들과 이 책의 차별성 또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자신이 다양한 버전으로 정리하여 이미 삼국유사를 읽어 가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으니 보완할 부분으로 얘기하겠다고 하는 것이 이미 그가 새롭게 편찬한 책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삼국유사에 나타나고 있는 시와 관련된 부분만을 뽑는다거나, 설화만을 뽑는 것, 인물별로 정리하여 이야기 해보는 것, 논쟁적인 부분을 추려서 이야기 해보는 것 등. 하나의 원전이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있을 때 거기에서 파장되는 이야기가 무수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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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유원언 하옥사有怨言 下獄死


■ 가업을 이은 아들의 사부곡......아, 아버지! 


  저를 구차하다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목숨 부지하는 사내는 없다 하시겠습니까.

  제게 이 기록은 당신께 바치는 것이자 저의 울분입니다. 당신에 대한그리움이자 당신에 대한 원망입니다.

 제게 당신이 아버지였지만 세계 또한 아버지였습니다. 당신을 통해 천문과 역법을 배우고 고스란히 태사령을 이어받아야 할 운명, 그것이 관습이었고 또한 그렇게 길들여졌기에 아무런 의문도 가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연 태사령이 되어 이 기록들을 이어가야지요.

  당신의 사명을 알고 당신의 책임을 알고 당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당신이 국가의 주요 의식을 담당했으니 봉선대전(封禪大典)에는 참여치 못한 것이 분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단지 주남(낙양)에 거주하였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없었음이기에 그렇게 화를 이기지 못해 돌아가심은 제겐 모지게 사무쳤습니다. 당신을 걱정하며 부랴 부랴 달려간 제게 또 당신은 마지막까지 사적을 걱정하며 그것을 제게 이루어달라 하셨지요.

  그러니 자, 보십시오. 제 것이기도 하나 당신의 것이기도 한 이 기록을 보십시오. 이것은 저 혼자의 기록이 아니니 다시 한번 보십시오. 당신이 태사로 있으면서 현명한 군주와 의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행적을 기록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듯이 저 또한 그러한 마음을 담았습니다. 당신이 시도하셨고 체제만이 아니라 내용도 집필하신 것이 적지 않고 자료도 모으셨으니, 당신의 책이지 않습니까.

  당신이 돌아가시고 태사령이 된 그때부터 시작하여 실로 15년이 넘는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이것을 당신에게 보내는 마음 후련함과 회한이 밀려옵니다. 죽음으로 싸우지 못하고 적군에게 항복한 이릉을 비호한 것은 이릉이 패한 소식에 침울해하고 있는 황제의 뜻을 넓혀주고 이릉을 노리는 참언들을 막아보고자 하는 충성스러운 마음이었소이다. 그때 그러지 말았어야 할까요.

  그때 격노한 한무제로부터 받았던 죽음이라는 형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러 애타게 당부하시던 아버지의 뜻을 잇지 못하겠구나, 당신과 나의 세계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사그러드는구나. 좀더 소신있게 죽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나서 이은 가업이라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당연 제게 은전 50만전이 있었다면야 벌금을 내고 풀려났겠지요. 기껏해야 관리인 제게 그만한 돈이 없었으니 제 선택을 치욕스럽다 하지 않으시겠지요. 제가 선택한 궁형이란 벌이 얼마나 치욕적이며 천시를 받았는가를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렇게 천시받은 자가, 벌 받은 자가 쓴 글이라 이 기록도 천시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궁형에 처한 채 감옥에 갇혀 서럽지 않았다  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는 세상에 나가지 못하는 것에 어찌 두렵다 하지 않을 수 있었겠소이까. 감옥을 나오면서 제가 더 이상 제가 아니게 되었음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겐 울분으로 세상을 보낼 수만은 없었지요. 세상이 다르게 보였음을 세상의 인물이 다르게 보였음을 당신은 아시겠지요. 무제는 당신만큼이나 욱합니다. 제가 다시 환관 최고의 직위인 중서령까지 오른 것을 보십시오. 이 몸으로 이만한 위치에 올랐으니  한편으로는 이룬 것이 없다고는 못하겠지요. 그렇게 오래 써간 기록입니다. 문득 문득 제 속에 들어 있는 울분들을 이 역사서에 쏟아 붓습니다. 나는 그렇게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그 비참하고 처절한 심정이 보이시는지요. 이 심정들을 임안에게 편지로 보낸 적이 있지요. 그도 나처럼 옥에 갇혔으니 동류의식이었겠지요.

  유원언 하옥사(有怨言 下獄死:원한을 말하고 옥에 갇혀 죽는다)라 했습니다. 이것을 빌미로 저는 다시 옥에 갇힙니다만, 이제 더 이상 삶을 이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구차한 목숨 부지한 이유, 이제 다 끝맺었으니 당신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세상에 다 내놓았으니 이제 이 한 세상 편히 뜨려 하오.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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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을 이겨내며 써내려간 기록, 사기열전史記列傳


  사마천의 사기는 역사서. 기전체 역사서의 효시.

  내 기억 속에 이렇게 자리한 사기다. 역사서인데, 더구나 남의 나라다. 게다가 현재, 근대도 아닌 까마득한 날의 역사서를 내가 부러 선택하여 읽을 일은 없었기에 책을 읽으며 느낀 반응은, “이거 역사서 맞아?”였다. 내게 역사의 기록이란 의미가 사건, 사고 중심의 연대기적인 서술이다라는 것이 바탕에 깔려 있었나보다. 아무튼, 내가 읽는 부분은 사마천의 사기 중 일부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그냥 소설책을 읽듯이 책을 읽었다. 그러면서 아, 이런 사람들이 실존 인물이란 말이지?를 되뇌며.


  그렇게 읽어 내려갔기에 각 인물의 사연에 감동한 부분과 사마천의 해석 부분에 감동한 부분 등이 나뉘어진다. 우선, 전반적으로 시대와 사건 속에서 행한 인물들의 행적에 대해 사마천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의 제후국 가운데 최후까지 살아남은 전국 칠웅 진한위제초연조의 흥망성쇠를 주축으로 하며 수많은 인물들의 이야기인 사기열전은  열전의 70편과 세가에 포함된 공자와 진섭을 포함하면 72편이 된다. 세가는 28편으로 별자리 28수와 일치하여 이는 천지와 음양의 수, 진법을 기초한 구성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열전의 마지막에 <태사공자서>가 삽입되어 있는데 여기서 사기를 집필한 목적과 의도를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이 사기 전체의 서문이라 할 수 있으며 구성과 각 편의 서술 이유, 자신의 가계 및 학문적 배경과 경력을 기술하고 있다. 각 열전마다 ‘태사공은 말한다’라는 부분이 사마천의 의견인 것이다.

  그 속에서 인물에 대해 느끼는 그의 평이 역사서로서는 객관성을 상실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했지만, 괜찮았다. 그리고 간간히 인물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대입한 것이 그가 겪은 고통과 울분을 느끼게 해주어 아린 마음도 들었다. 어쩌면 글쓰기는 자신을 정립하는 과정과 함께 자신을 변호하는 과정이란 생각도 들었다.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관찰, 평면적이지 않은 묘사를 통한 그들의 행적에 대한 해석. 아, 이 사람이 이러한 기록을 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까를 생각하니 나는 왜 글보다도 그가, 사마천이 감동으로 다가올까. 사마천의 초상화가 보이기에 나는 그가 정말로 아주 오래 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늙어 보였으니까. 정확한 그의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하지만 대략 50대 후반 즈음이 그의 생애의 마지막이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젊지 않은가. 늘 작가에 대한 자료가 없을 때마다 아쉬움이 느껴지지만 실로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마천은 결혼을 했는가. 자식이 있는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후, 그리고 딸을 출가시킨 후 자살을 했다는 설도 있다 한다. 사형당한 것이 아니라면, 그가 생을 이어간 것은 정말로 사기 저술을 위해서였던 것인가.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욱하는 성질이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역사서 편찬자에 대해 가지는 선입견은 뭔지 모르게 조용한 인내력을 생각게 하는데, 제사 의식에 참여하지 못한 울화통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니 말이다. 반면 사마천에게선 차분한 이미지가 더 느껴진다. 그는 글로서 그의 억울함을 피력하였다.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았다면 그는 사기를 저술하기도 전에 아버지와 같은 운명을 겪었으리라.


  번역자인 김원중의 번역의 원칙은 이러하다.


“번역은 원전 뜻을 자구 하나하나 따져 가며 번역하고 난 다음 그에 수반되는 전고나 논의의 근거를 찾아 다시 그것을 원전의 문맥에서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주는 독자가 원전을 읽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은 물론 원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는 데 장애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각주가 사족이 되지 않으려면 그 활용이 적절해야 하므로 원전의 단어 하나 지구 하나를 우리말로 표현하는 데 온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번역에 이념이 개입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감히 생각한다.”


  번역에 대한 원칙으로 수긍이 가기도 한다. 그러나, 열전을 기록하면서 사마천은 태사공으로 분해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듯이 열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도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열전의 편마다 소제목을 붙여 내용을 분류하여 놓은 것처럼 말이다.

  일단 2천년 전의 사마천에게 말한다.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 이야기는 개인의 삶을 얘기한 것이긴 하지만 가만 보면 나라를 세우는데 대한 이야기가 좀더 주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전쟁이라는 혼란의 장에서 여러 나라를 전전하는 유세가들의 이야기를 보며 각 인물들의 활동에 따라 어떤 나라가 남느냐, 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 열전에서 주인공으로 나온 인물이 다른 열전의 조연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나라도 많고 인물도 많다 보니 그 동일인물인지 헷갈리는 면도 있었다. 그런 까닭에 특정한 나라에서 활약한 인물들 별로, 서로 대립하던 인물들 별로 이야기가 정리되면 하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다. 일목요연하게 이러한 내용이 정리된 ‘연표’가 덧붙였으면 하는 생각이다.

 작가는 열전의 순서를 도덕적 기여도가 높은 인물들을 먼저 하였다고 하는데 작가가 말하는 도덕적 기여도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끔 하였다. 그런 방면으로 따지면 열전의 순서에서 의아한 부분도 있었다. 그리고, 인물들을 본인이 직접 만나고 경험한 부분도 있지만 전해 듣거나 그들의 삶을 문헌 등의 자료로만 파악한 사람이 적지 않다. 그의 자료가 얼마나 정확할까 하는 생각도 덧붙여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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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아나기를 소명하며!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니체의 ‘철학’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는 니체가 가진 사상을 헤르메스가 되어 해석해주고 있다.  

  니체를 해석한다는 것은 니체가 천 개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이 다양할 것이다. 니체를 해석한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의도’이고 그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니체가 말한 그대로를 토스하여 주는 역할이 아니라 니체가 말한 것을 두고 니체를 재창조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니체의 글을 해석하고 있지만 그 많은 니체의 글들 중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 내어 그것에 대한 설명과 해석을 하고 있으니 결국 니체의 이야기가 아니라 니체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저자의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 책은 니체에 관한 해석을 담고 있는 1부와 논문 형태의 글을 추린 베버의 정치학과 차이의 정치학을 담고 있는 2부로 나뉜다. 일단 이 책의 핵심인 1부는 저자 자신이 니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애정을 드러내듯 니체의 생각들을 잘 뽑아내어 전달하고 있다. 총8장으로 구성하여 1장 니체와 철학의 관계, 2장 니체의 계보학으로 도덕과 윤리의 문제, 3장 니체의 해석학과 니체에 대한 해석학, 4장 니체의 근대 정치 비판을 다루고 있다. 5장과 6장은 권력의지와 영원회귀, 7장은 초인 등의 니체 철학의 주요 개념을 다루고 있다. 마지막 8장은 니체 자신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니체의 저작을 토대로 말하고 있다.

  니체에 관한 총8장의 내용 중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것은 2장이다. 니체의 계보학으로 도덕과 윤리에 관한 내용이다. 이 장에서는 특히 도덕과 관련하여 강자와 약자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다. ‘도덕’에 대해 평소 갖고 있는 생각과 맞물려 성큼성큼 다가온 부분이다.

 

니체의 철학에 대한 비판은 분명히 사유로부터 삶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염세적 사유의 굴레로부터 삶을 구원하는 것이야말로 니체의 비판이 지향하고 있는 바다. 그러나 이는 ‘철학을 비판하는 철학’으로서 니체 철학의 절반일 뿐이다. 왜냐하면 삶을 속박하는 사유가 비판받아 마땅한 것처럼 사유를 속박하고 있는 삶 역시 비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삶이 구원되어야 한다면 같은 이유에서 사유 역시 구원되어야 한다. 더구나 순수한 사유의 체계가 거짓 연극에 불과한 것처럼 순수한 생이라는 것도 공상에 불과한 것이다(p49)

 

도덕학자나 도덕철학자에 대한 니체의 불만은 그들이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데에 있다(p61)

 

도덕은 자신의 행동 기준이 되지만, 동시에 타인에 대한 요구이기도 하다.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도덕은 타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리보다도 훨씬 위험하다. 전쟁에 대한 공포나 공포 속에서 치러진 전쟁을 통해서 도덕은 일반성의 극대화를 요구한다. 도덕은 항상 ‘만인’을 대상으로 한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도덕 교사들의 허영심–도덕 교사들은 너무나 기꺼이 만인에 대한 처방전을 주려고 한다.”(p63 )

 

   이 시대의 가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마냥 필요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던, 그 자체로서 중요한 도덕에 대한 비판적 시각, 그것이 어떻게 억압이 되는지를 볼 수 있는 장이다. 그리고 또한 그동안 강자는 위험하고 약자에 대해서는 이른바 선한 것이라 대비되던 이러한 관념들이 어떻게 ‘고정’관념이 되는지를 파악한다. 도덕이 노예가 되는 개념을 살펴보는 장, 그로 인해 약자들의 논리로 강한 자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은 깊은 생각을 던져주기도 했다.

   절판된 이 책을 찾기 위해 중고서점을 비롯하여 온-오프라인을 뒤져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당장 내 주위에선 1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그리고 지난 10년 동안 변경연 사람들은 이 책들을 찾았을 텐데 소명출판사는 재판 작업의 욕구가 없을까 생각했다. 기사를 보니 소명출판사가 창립된 이후부터 가장 많이 팔린 책이 이 책이라 한다. 우와, 놀랍지 않은가. 음, 역시 책이 잘 읽히더라니 생각했는데, 가장 많이 팔린 이 책의 부수는 6,000권이라고 한다.

   어떤 책으로의 인도는 철저한 전도자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렇게 절판되고 세상에 많이 퍼지지 않은 이 책으로 인도받은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확실히 니체가 이 세상에 미친 영향은 크다. 많은 이들이 니체를 ‘해석’하고 있고 다양한 니체 관련 저서들이 끊임없이 출간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정확히 ‘그것’이었다고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있을까? 심지어 니체의 초인은 히틀러의 철학 도구로 활용되기도 하였으니 어떠한 생각이 누군가에게 어떻게 읽혀지는지는 니체가 스스로 자신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로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시선을 따라 가다가 불편한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건 ‘니 생각일 뿐이야’라거나 ‘어떻게 이것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하는 거리감을 느끼지 못할 만큼 충분히 자연스럽게 저자의 해석에 녹아들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천 개의 시선과 주름들이 있듯이 이 책도 니체에 관한 다양한 ‘관점’과 ‘해석’ 중의 하나이겠지만 니체의 입을 빌려 전하고 있는 저자의 생각들을 불편하지 않게 동조하게끔 하고 있다는 점이 일단 좋았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또다른 철학자들을 중구난방으로 끌어들이고 있지 않다는 점, 핵심적인 부분들만을 추려서 개념과 철학의 전달이 간명해서 좋았다.

원저자의 책을 해석하고 있다고 하기에 니체의 글의 ‘원문’들이 많이 인용되어 있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이것은 니체에 관한 해석이란 느낌보다는 저자의 생각들을 주장하는 것이란 느낌을 더 가진 듯도 하다.

   다만, 읽고 나서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원체 니체가 써내려간 글들이 많기에 말 그대로 ‘모자라다’는 느낌의, 다른 부분도 필요하다는 점이 우선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책의 구성이 뭔가 다르게 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그에 대한 구체적인 것은 아직 어렴풋하다. 사실, 읽는 글에 대해서는 명료하게 받아들였는데 책의 구성적인 면에 대해서는 니체의 방대함 때문인지, 명료함은 덜 느꼈다. 니체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에서 구체적이고 핵심적인 내용으로 파고들어가는 형태이든 개념을 잡고 전체적인 조망을 보는 형태이든 니체의 윤리학, 정치학, 니체의 해석학, 니체의 종교학, 니체의 자연학 등으로 그의 철학을 정리 요약하여 이해하고픈 욕구로 마치 리포트를 쓰듯이 니체의 사상과 철학의 핵심 개념들을 이런 형태로 정리하고픈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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