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 기억을 아우르는 힘
이 책은 자서전이기에 융의 생애가 담겨 있다. 융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연대기적 순서로 나열하여 그의 생애와 순간들을 담고 있다. 다만 그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이자 비서에 의해 집필되고 정리된 것이다. 융이 한 문장 한 문장 손을 보았기 때문에 융 자신의 집필로 이루어진 저서라고 강조하고 있다.
책은 융의 유년기부터 말년까지를 회고하는, 연대기적 흐름으로 서술되고 있다. 다만 그 개별적인 내용들은 시간적인 흐름이나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기보다는 어떤 특정한 일련의 사건이나 체험에 대한 융의 내적 체험들을 중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내적체험을 중심으로 서술하다 보니 이것은 그것을 겪었던 당시의 느낌과 생각에서 변화된 생각, 그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이후의 일들이 얽혀서 기술되는 형태이다.
융은 자신의 인생에서 공간에 대한 애착을 보이는 것 같다. 마치 신성한 장소에서 사색이 더욱 경건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그에게 그의 집, 탑, 돌 등은 많은 의미를 가진다.
여기 돌이 있네. 보잘것없는 것.
값도 아주 싸고......
바보들로부터 무시당할수록
현자들로부터는 더욱 사랑을 받는다네.
-연금술사 아르날두스 드 빌라노바, (1313년 죽음) 의 라틴어 시구절- p406
이 글은 무지한 자들로부터 경멸당하고 배척되는 연금술사의 돌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융이 돌에 새겨넣은 최초의 글이다. 이처럼 돌에다가 글을 새겨넣는 것 이상으로 사물이나 사건, 모든 것, 특히 꿈에 의미심장한 기억들을 가지며 의미를 붙이는 융이다.
오늘날 인간은 지상에 있는 온갖 고등생물을 방사능으로 없애버릴 수 있다. 세계 소멸의 관념은 이미 부처에 의해 그 단초를 갖게 되었다. 피할 도리가 없이 노쇠, 질병,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인연의 사슬은 큰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존재의 환영은 소멸된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부정은 이미 심상치 않게 가까이 다가온 미래의 문제를 예언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 꿈은 인간세계에 오래 전부터 있어온 생각과 징후, 즉 피조물이 그의 창조주를 근소하지만 결정적으로 능가한다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p395).
대체로 비슷한 형태로 글이 전개가 되고 있다. 그가 어렸을 적 혹은 당 시기에 맞닥뜨렸던 내적체험에 대한 기억과 분석. 어릴 적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 그 장면에 대한 끊임없는 해석을 시도하는 그의 모습이 놀랍기도 했다. 무엇에나 의미를 붙이고 설명하려는 것은 역시 그의 표현대로 자기실현의 과정이었을 터, 그 무수한 자기실현의 과정들 하나하나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물론 나는 꿈이 그와 같이 실제임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깨어나도록 하는 것이 과연 무슨 뜻인지 자문해보았다. 보통은 그런 것을 유령 출몰에서만 경험한다. 깬다는 것은 현실을 자각한다는 뜻이다. 그 꿈은 현실과 같은 상황을 연출하여 일종의 깨어있는 상태를 만들어놓는다. 이런 종류의 꿈은 일반적인 꿈에 반해서 반복에 의해 강조된 뚜렷한 현실감각을 꿈꾸는 자에게 전하려는 무의식의 경향을 드러낸다. 그런 현실성의 원인은 한편으로는 원형적 이미지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p411~412).
자신의 체험을 융은 이렇게 설명한다. 반복적인 수백 명의 음악소리, 축제적인 그 꿈은 고독현상으로, 외적인 공허와 정적을 사람들 무리의 이미지로 보상하려는 것이라고. 그것은 똑같이 보상적인 현상인 은자의 환각에 해당할 것이다. 그가 외로움으로 너무 예민해져서 그곳을 지나가는 ‘젤릭 뤼트(축복받은 죽은 자들)’의 행렬을 감지했을 것이라고. 융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융 옆에 고독과 쓸쓸함의 이미지를 같이 새겨넣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말이 또 기억에 남는다.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p624).
인간에게 가장 큰 제약은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나는 다만 그것에 불과하다!"는 체험 가운데 나타난다. 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아주 좁게 제약되어 있다는 의식만이 무의식의 무한성에 접속될 수 있다. 이러한 의식성에서 나는 나를 유한하면서도 영원하며 이것이면서도 저것으로 경험한다. 내가 나를 개인적인 결합 속에서 궁극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로 알게 되면서 또한 무한한 것을 의식할 수 있는 가능성도 지닌다. 오직 그러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말이다(p573).
어떤 사건과 마찬가지로 그의 꿈이나 맞닥뜨린 체험의 이야기들이 재미있게 다가왔다.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그에 대한 해석들, 그러니까 나이가 들어서도 그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 집중해서 보자면.....■
1) 객관적 ‘사건’이 아닌 내적 체험의 구현
이 책은 융의 제자이자 여비서인 아니엘라 야페가 융이 82세가 된 1975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을 한 결과를 엮은 것이다. 이른바 자서전이다. 특히, 융이 한 문장 한 문장 손을 보았기 때문에 융 자신의 집필로 이루어진 저서라고 강조하고 있다.
자서전이기에 융의 생애가 담겨 있다. 융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연대기적 순서로 나열하여 그의 생애와 순간들을 담고 있다. 처음에 융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출간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후 출간 조건으로 동의했다 한다. 이미 자신의 할 이야기들은 충분히 다양한 논문과 저서를 통해서 했고 자기 생각이나 주장을 표출하는 것에 대해서도 꺼려하는 느낌을 받지 못했는데. 그의 이전의 무의식의 이야기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을까. 외적 사건들보다는 내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야기한 것은 그래도 ‘외적 사건’들을 말하지 않기 위함이었을까. 야페의 입으로 전한 융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종종 융에게 외적 사건들에 대해 물어보았으나 얻는 것이 없었다.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융은 스스로도 객관적인 ‘사건’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객관적 형태의 자서전 출간은 거부했던 것으로 보이며 자신의 의지대로 자신만의 특성을 살린 자서전을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의 제목 '기억, 꿈, 사상'처럼 기억과 꿈과 사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결국 단지 관찰 대상이 융 자신의 내밀한 것이었다는 특징만 있을 뿐 우리가 자서전이라는 데서 기대하는 일련의 이야기들을 기대하지 못한다. 어쨌든, 자서전이라는 것이 생의 모든 것을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은 그의 저서에서 다루는 것과 같은 이야기들이 나열되어 있다. 그의 생각과 경험과 그것에 심층으로 들어간 이야기들은 이미, 보아 왔는데, 알고 있는데란 생각을 하는 것은 왜인지. 좀더 가십적인 이야기거리를 찾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무의식에 대한 해석도 해석이지만 그냥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찾아낸 것은 왜 슈필라인의 이야기는 없는가였다. 한 개인의 자서전이라기보다 분석심리에 관한 또 하나의 사례가 들어간 논문이라고 해야 할까.
융 자신 외적 사건에 대해 할 말이 없고 경험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기에 그러한 별로 없는 외적 사건을 겪을 때의 내적인 체험과 의식이 궁금하게 와 닿는다.
2) 기억을 아우르는 힘
아리송. 내가 남의 꿈 이야기를 이렇게 주절주절 듣고 있어야 하는가. 그의 생은 온통 꿈의 역사다. 인생의 결정도 꿈과 함께 하고 인생의 고난도 꿈과 함께 한다. 아주 어린 시절의 꿈을 생생히 기억하는 것은 살아있는 나날 동안 반복적으로 꿈을 의식하고 분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꿈에 대한 오랜 시간이 지나서의 해석은 객관성을 상실한다. 하지만 사실, 객관성을 가질 필요가 없다. 자신이 꾼 꿈에 대하여 느낀 감정을 ‘객관적’이지 않다고 나무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융 자신이 자신에 대해 객관적일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의 꿈 이야기는 그런 꿈을 꾼 것이 사실인지 조차도 의심스럽게 만들 요지가 다분하지만, 융에게 거짓말쟁이라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융이라는 ‘객관적인 존재’의 힘으로 이루어진 성과다. 즉 기억과 꿈을 이야기하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융이라는 프로필이 그의 거짓말같은 꿈 이야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학술적인 느낌을 갖고 또한 상당부분 학술적 이야기로 나아가고 있는 이유일 것이라 본다. 결국 융은 ‘객관적 일 수 없는’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학문적인 형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결국 나름의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 융은 끝까지 자신의 꿈 이야기를 주관적 형태로 남기지 않고 ‘객관화’ 하도록 이끌었다.
3) 융이 작성하지 않은 소제목
각 장의 제목 이외 소제목은 원서에는 없다 한다. 독자들이 읽기 편하도록 임의로 구분한 것이라 한다. 없어도 무방했단 생각이 든다. 오히려 제목 구분을 저자가 한 것인 줄 알고 더 의미있게 들여다봤다. 그러면서 뭔가 주제어를 잘못 뽑았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융의 강조점이 이것이었나, 생각하며 보게 되었다. 제목은 각 단락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간과한 것이 제목을 융이 달았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비로서 두번읽기에서 이 구절을 발견하고 첫번째에서 맘에 들지 않았던 소제목의 의문이 풀렸다. 번역작에서는 흔히 가독성을 위해 이러한 장의 구분과 제목입히기를 시도한다. 나는, 이러한 방법에 대해 부정적이다. 번역하여, 번역자가 따로 주석을 붙이고 해석하는 책이 아니라면 나는 '원문'에 충실한 책을 원한다. 바란다.
섵부른 구분이 지나치게 친절한(?), 단순한 번역자와 출판사의 의도가 책을 통해 저자가 이끌어온 흐름을 방해한다. 내면체험과 의식의 흐름으로 일관하는 융의 책에 구분을 통해 흐름을 조절하는 것이 책을 읽는데 편했을까? 나는 중간중간 들어찬 제목으로 인해 흐름이 방해받았다. 제목에 깔린 의도를 생각하느라 그랬다. 사실 제목이란 글의 의미를 함축하고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아닌가. 적절하지 않는 제목을 통해 저자의 의도가 왜곡될 소지가 있다면 이것은 지양해야 할 점이다.
더불어 생각한 것이 글을 단락으로 끊어서 작성하기와 길게 나열하기에 대한 생각이다. 융처럼 큰 장만을 구분하고 그 장의 내용은 구분없이 작성하는 방법, 역자가 행한 것처럼 가독성을 위해 소제목을 통애 내용을 끊어가는 글쓰기의 방식은 어떠한 주제를 담고 있느냐에 따라 달리 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에서 쓰는 소위 교재를 보면 우리나라는 지나치게 체계적으로 흐른다. 늘 1장, 1. 1) ....이런 형태로 도식화환다. 이것은 논문 형식으로부터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논문이나 보고서는 도식화된 형태를 요구하고 그것이 일견 명확성을 보여준다. 보기에 편하다. 그러나 딱딱하다. 나 교재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그리고 개념의 명확성을 익혔다는 생각, 무언가에 대한 짜깁기와 요약이란 생각만이 강하다.
반면 서양의 교재들은 다르다. 도식화보다는 소제목을 어느 정도 단 전개로 흐른다. 수렴이 아니라 확장이다. 생각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해준다. 내가 본 교재들은 그랬다. 목적에 따라 글쓰기의 형식이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을 구현해내는 작가의 역량에 따라 글의 맛이, 책의 맛이 달라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