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장의 용도
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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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물이 되지 않으려


자개장의 용도

함윤이, 문학과지성사, 2025-11-11.

 


  자개장무늬 책표지를 덮으며 생각했다. 아이들 책처럼 표지가 팝업으로 되어 열리면 좋겠다고. 그 문을 열고 나도.

  강가/Ganga로 가볼까. Ganga가 함께 표기되어 있지 않았다면 “강줄기와 육지가 맞닿는 부분”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아니, 작가가 친절히 강가에 대해 알려주고 있음에도 그것은 작가가 설정한 세계일 것이라 여기며 Ganga를 사전으로 찾고, 그럼에도 ‘강의 언저리’롤 떠올렸다. “강까”라는 된소리 발음으로 자꾸 ‘강가/Ganga’를 읽어내는 탓이다.

 

G a n g a.

글자들은 잘 지은 집처럼 견고해 보인다. 입속으로 또 한 번 발음한다. 강가―이 단어는 보통 강줄기와 육지가 맞닿는 부분을 의미한다. 강과 땅 모두의 가장자리지만, 어디에도 제대로 속하지 않는다. 강가―이는 지체 높은 집안의 딸이 자신보다 낮은 집안에 시집가는 행위를 뜻하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대개 왕족의 딸이 신하의 가문으로 시집을 가는 일을 의미한다. 새하얀 천을 얼굴 앞으로 늘어뜨린 여자들이 강둑 위를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한다. 강가한 여자들, 왜 그랬지? 사랑 탓인가? 다들 행복한 삶을 꾸렸을까?

동시에 강가는 신의 이름이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강가는 강의 신이다. 악어와 닮은 마카라를 타고 다니며 속죄와 정화를 담당한다. 여신은 수 해 동안 이어진 왕의 기도탓에 천상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갠지스강으로 변했다. 갠지스 강은 인도 북부를 흐른다. 바라나시는 이름의 도시를 품에 안은 강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여기 하나의 의미를 더 추가한다. 강가, 그것은 ‘나’의 이름이다. 낯선 곳에서 ‘나’가 ‘나’가 아니고 싶을 때, 아니 ‘나’를 규정하고 싶을 때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새 이름을 부여한다. 그리하여 모호한 경게 속의 ‘나’로, 속죄와 정화의 여신으로서의 ‘나’로 나를 정의한다. 아니, 그러한 이름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나’에게 이 이름은 의미를 나열하는 이 행위는 이미 함의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강가’로 불리고 싶은 마음. 하지만 막상 ‘그’가 ‘나’의 이름을 물어보자 ‘나’는 ‘강가’라 말하지 못한다.

 

그는 떠나기 직전에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죠? 아는 어떤 이름도 대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이 도시에서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자 결심했는데, 막상 누군가 이름을 묻자 무엇도 답할 수가 없구나. 상대방의 이름을 묻는 일 역시 불가능했다. 질문하는 일도, 답하는 일도, 두려울 뿐이다. 나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름 모를 남자는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유 쎄이브 마이 라이프. 당신이 내 목숨을 구했어요. 유 쎄이브 마이 라이프. 당신이 내 목숨을 구한 거예요. 나는 그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고, 번역한다. 몸의 떨림이 멈추자 눈앞의 모든 색이 선명해진다. 오래 기다린 죄책감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여러 단편이 실려 있는 이 책에서 ‘강가/Ganga’가 기억에 남았던 것은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몽유병 환자가 겪는 일처럼 대체로 환상적이며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 낯선 여정을 하는 이들이 주로 등장하지만, 가장 멀고 긴 여정의 이야기라는 것. 그러나 ‘파랑새’의 결말처럼 행복은 나의 곁에 있었다, 그렇게 떠올려지는 마침표 같은 이야기 같아서.

  ‘강가/Ganga’ 속 ‘나’의 행동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공장에서 이주노동자와 함께 일했던 ‘나’가 산업재해를 당한 여공과의 연대를 거부하는 일은 이해된다. 함께, 연대를 주장하는 ‘쿠쿠’의 말에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도. 하지만 “너는 내몰린 게 아니야. 너는 선택한 거야. 우리 대신에, 너 홀로 여기에서 살아가는 일을 택했어. 아냐. 부정하지 마. 화내지도 마. 비난하는 게 아니야. 네 선택을 이해해.”라고 말하는 ‘자자’의 말에 이른바 ‘긁혀서’, “남자를 가져야겠다는 결심이 들었다. 그래, 역시나 남자가 필요하다. 내 모든 선택을 칭찬하며, 절대로 힐난하지 않는 남자”로 이어지는 생각과 실제 그 행동을 하는 것 말이다.

  ‘나’는 ‘쿠쿠’와 ‘자자’의 고향 ‘바라나시’에서 “남자를 사러 왔다”고 말하고 다닌다. ‘나’의 기준은 너무 높아 그런 남자는 살 수 없다는 말을 듣지만 그럼에도 ‘나’는 남자를 사야 한다. ‘나’가 ‘강가’한 여자가 되는 것은, 될 수 있는 것은 ‘돈’을 쥐고 있음이다. ‘자본’으로 계급적 우위를 누릴 수 있는 ‘나’가 남자를 사려는 이 전개는 ‘강가’에 ‘降嫁’라는 의미가 있음에 그 내용이 필연적으로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럼, 이제 ‘나’는 물에 빠지려나?

  ‘나’가 물에 빠져야 할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다. ‘나’의 모든 선택을 칭찬할, 힐난하지 않을 남자를 사는 건, 결국 ‘나’의 선택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만 사실 강박적으로 책임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표현대로 “오래 기다린 죄책감”이다.

  인도 여행에 대한 지인들의 반응은 극과 극이다. 그건 갠지스강에 대한 반응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갠지스강을 인도인처럼 성스럽게 여긴다거나 깨달음에 무게를 두고서 감흥을 느낀 이도 있지만 갠지스강의 악취와 오염, 무질서로 인해 신성한 느낌은커녕 최악의 장소로 기억하기도 한다. ‘쿠쿠’에게는 “신처럼 이쁜 강”이지만 ‘나’에게 갠지스강, 강가강은 더럽고 너저분한 강인 것처럼 말이다. 이런 강에, ‘나’가 어쩔 수 없이 뛰어들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며, ‘나’는 오롯이 잠긴다. 물에 빠진 이를 구하려다가 모두 죽을 상황이 된다고 ‘쿠쿠’와 ‘자자’를 떠올리며 생각하지만 ‘나’는 내가 돈으로 ‘구한‘ ’그’를 물에서 ‘구하게’ 되고…… 강가강에 빠진 ‘나’, 하염없이 떠도는 부유물이 될지 속죄하고 정화되었을지, ‘강가’, 그 의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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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5 ㅣ 소설 보다
김지연.이서아.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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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요, 적들의 이름을 부른다


소설 보다 : 여름 2025, 김지연, 이서아, 함윤이, 문학과지성사, 2025-06-10.

 


  그래서 ‘적들’은 누구인가?

소설을 읽는 내내 궁금했던 부분이다. “난 저기서 계속 적을 기다렸어요.”라고 ‘선화’가 말할 때는 ‘고도를 기다리며’가 생각나긴 했지만, 대체로 사이비 종교집단이 먼저 연상되어읽는 내내 미간이 수평을 유지하지는 않았을 게다. 영화 <미드 소마>의 장소가 파스텔톤 속 ‘찡한’ 색감으로 각인되어 있다면 이 소설은 건조하며 폐허 속 섬같은 느낌이었다. 어쨌든 소설을 읽고 나서도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가 반복되어 머릿속을 흐르고 있었다.


”난 저기서 계속 적을 기다렸어요.“

선화는 말했다. 때로는 그것이 어떤 가르침보다 중요하게 느껴졌다고도 했다. 모든 책에서 구원은 적의 공습 뒤에 찾아왔다. 적들이 온다는 것은 긴긴 괴로움으로 뭉쳐진 기다림,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되어버린 기다림이 끝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선화는 매일 찾아오는 이들을 유심히 살폈다. 산을 타고 올라와 그들의 이 고된 기다림을 끝내줄 사람을 기다렸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만난 게 대단한 운명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적들’을 기다리는 이 무리는 도대체 뭘까. 작품의 주인공이 ‘노아’인지라 성경 속 노아의 방주를 떠올렸다. 그렇기에 ‘노아’가 이들에게 구원의 존재가 되는가 생각했는데, 노아는 이들 무리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가명을 사용한다. 어이없게도 그 가명이 무리의 리더 이름과 같다. ‘선화’라는 리더 이름을 듣자 ‘선화공주님은~’ 하며 ‘서동요’를 떠올리고 선화라는 이름이 담은 뜻은 무언가라는 생각으로 흘러 등장인물들의 이름에 꽂혀버렸다. 노아는 왜 노아이며 선화는 왜 선화인가. 왜 상사의 이름은 녹원인가. 녹원은 인도에 있는 불교 유적인데, 단순하게 생각하면 녹원이야말로 대척점에 있는 이름 아닌가. ‘적’이라 할 만한.

  구원을 위해 ‘적’을 기다리는 것. 마치 내가 잘났음을 타인을 깎아내리며 얻으려는 누군가처럼 여기 ‘천문대’를 점령한 사람들은 그렇다. 자신들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라고 타인에게 끼치는 민폐를 당연시하는지 의문인데, 그들은 오히려 마을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토록 철저한 현실반영이라니! 명확하지 않은, 막무가내로 ‘적’을 상정해 놓고서 부르는 노래, 그래서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는 참요같다. 아니, 주술이다. 명백한 세뇌 또는 가스라이팅.

  왜 종교적 믿음은 항상 기이한 형상으로 표출되는지 모르겠다. 집단의 힘이란 그런 건가. 힘이라고 해야할 지 광기라고 해야할 지 모를 그 스산함이 계속 리더 선화 주위에 맴도는 듯하다. 항상 머무르지 않고 떠날 것이라고 하는 그 무리가 드디어 떠날 때인가, 선화는 마지막으로 여는 행사에 노아를 초대한다. “즐거울 테고, 아주 아름다울 거예요”라는 말과 함께. 세상만사가 귀찮아진 때라면 그냥 넘기고 말았겠지만, 좀더 생생한 때라면 그 버리지 못할 호기심 때문에 나도 노아처럼 가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천문대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하는데도 머릿속에서 봉화대쯤으로 인식하고 있던 나는 ‘관측대의 돔이 열리고’라는 글을 보자 멈칫하고 만다. 내내 상상하던 이미지와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행태는 이질적이지는 않았다. 검은 털옷을 입고 불을 피우고 고기를 태우고 다함께 춤을 추는 건 미드소마 같이 사이비 종교에서 주로 보게 되는 행태이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지 이해하기 싫은 것인지 모를 그 무리의 행동은 언제나 낯설지 않다. 그래서 구원되었나. 노아는 그들이 즐겁고 아름답다고 느꼈던가,

  ‘적’들이 오고나서야 ‘구원’이 있었다, 그러니 ‘구원’받기 위해서는 ‘적’이 있어야 한다는 믿음. 은연 중에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는 삶이 평안할까. 그러면 ‘구원’은 무엇인지, 명확하지 않은 구원과 적이 모호한 삶을 만든다는 생각이 짙어진다. 모호한 적에 대해 생각한다. 모호한 구원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누군가는 그냥 그 모호하고 막연한 두려움 자체가 ‘적’이고 그렇기에 가시적인 ‘적’을 만들어내어야 오히려 평안한 마음이 될 것이라 할지 모르겠다.

  참요. 어쩌면 삶에서 나를 위한 참요는 필요할지 모른다. 나를 구원하기 위한 스스로에 대한 응원. 그러나 나를 위해 타인에게 부적같은 의미를 부여하는 일, 타인을 ‘적’으로 만드는 일에 대해 새삼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에게 이들 또한 또다른 형태의 ‘적’이기도 하다. 함께 살아가기 힘든, 이해할 수 없는 존재. 하지만 ‘가시적’인.

  선화는 독수리인가. 검은 옷을 두른 선화 무리들 위로 날아드는 독수리 떼가 그들과 겹쳐보이기도 한다. 어디로 가려는지 모를 그들은 또다시 다른 곳으로 찾아가 지금과 같은 행태를 계속할 것인지 궁금해진다. 다시금 도돌이표처럼 깃드는 물음. 무리들 위로 날아드는 독수리들은 정처없이 날개를 펼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가진 날개짓일 텐데. 그래서, 구원이 뭔데? 구원이 왜 필요했던 건데? 반대로 ‘적’을 만들기 위해 구원이 필요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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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5 ㅣ 소설 보다
서장원.이유리.정기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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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데오


소설 보다 : 가을 2025, 서장원, 이유리, 정기현, 문학과지성사, 2025-09-11.

 

 

  로데오. 발음의 유사성 때문인지 소설 제목이자 주인공 이름인 ‘히데오’를 보면서 로데오를 되뇌고 있었다. 로데오는 카우보이들이 가출을 몰아 모으던 것에서 생겨난 스포츠로 길들이지 않은 말이나 소를 탄 채 떨어지지 않고 오래 버티거나 길들이는 경기다. 우리나라에 로데오 거리가 제법 있는데 어릴 적부터 로데오 거리라는 이름도 그 주변도 참 이질적으로 느껴졌었다. 말을 탄 카우보이 조형물도 어색하게 느껴지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히데오를 읽으며 로데오를 떠올렸던 건 발음의 유사성 때문만은 아니었던 거다. 로데오 거리에서 느꼈던 그 이질감과 어색함이 히데오에서 로데오를 떠올린 이유 아닐까.

  로데오 거리가 미국 베버리 힐스(Beverly Hills)에 있는 패션거리인 ‘로데오 드라이브’에서 유래했다는 걸 먼저 각인했다면 달랐을까만. 어쨌든 ‘로데오 드라이브’도 스페인어 지명인 '엘 로데오 드 라 아쿠아(El Rodeo de las Aguas, 물이 모이는 장소)'에서 유래된 거니까(https://www.kado.net), 로데오는 카우보이 로데오와 무관하지는 않은 거다. 다른 나라에 제 이름을 단 지명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유사성을 찾고 특이점을 찾고…….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에는 일본에서, 부모님의 이혼 후에는 어머니를 따라 한국에서 살았다. 히데오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차별을 경험한다. 일본에서 살았던 좀더 어렸던 시절, 또래들은 한국인 어머니를 모욕하며 히데오를 괴롭혔고 고교시절 역사나 국어 시간에는 특히 일본에 대한 혐오의 말들을 항상 들어야 했다. 히데오는 원어민 일본어 교사에게 쪽발이라고 하는 것이나 일본인이 자신의 어머니를 모욕하는 것이 다르지 않아 보였다고 이야기한다.

  대학교 연극반에서 히데오를 알게 된 ‘나’는 히데오가 이와 같이 남들에게 말하지 않는 비밀을 자신에게 얘기할 때마다 친밀함 이상의 감정을 느낀다. 누군가 나에게만 자신의 비밀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필시 ‘나’에게 호감이 있음이라는 오해와 기대로 깃든 마음이다. 그러므로 “나를 좋아했지만 내가 바라는 방식으로는 아니었”고 “그의 감정이 달라질 가능성도 거의 없을 것 같”은 히데오와 ‘나’의 관계는 점점 소원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로데오 경기에 나선 승리한 카우보이가 되지 못했다. 히데오를 길들이는 법을 알지 못했다. 세상에 한번쯤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을 털어놓고 싶은 존재가 있다.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수줍고 자기 확신이 부족한 히데오에게 ‘나’는 제 비밀을 털어놓으며 위로받고 지지받고 싶었을지 모르나 당시의 ‘나’는 히데오의 이러한 마음을 충분히 보듬어주지 못한다. 훗날에야 그때 히데오에게 ‘다르게’ 말해줬어야 했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히데오에게 그런 말은 필요가 없다. 히데오는 그때 그 히데오가 아니기에.

  사람은 태어나서 주위 환경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으나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삶의 여정이 아닌가 싶다. 히데오는 주류 사회의 시선에서 자신을 약한 자로 위치짓는다. 그렇기에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힘겨울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우리가 내면화하는 어떤 시선은 내가 어떤 관점을 가지기 전까지는 일방적이고 그렇기에 나를 단단히 여미기가 힘들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 동안 히데오는 자신을 단단히 여미지 못한 상태였지만 ‘나’가 쓴 희곡 <따귀 게임>을 통해 달라진다. 마치 로데오 경기를 치르는 카우보이처럼 자신만의 정체성을 잘 벼르고 길들일 줄 알게 된 것이다. 이 희곡이 뭐기에 히데오의 변화를, 성장을 이끌어 주었는가를 말하자니 일견 히데오에게 감춰진 폭력성을 폭발시키는 역할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따귀 게임>은 ‘나’가 쓴 모범소년과 불량소년의 따귀를 맞는 거래에 대한 이야기다.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사람만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믿는 모범소년은 불량소년이 들려주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학대이야기에 값을 매겨 매일 따귀를 맞는 것이 주내용이다. 불량소년 역을 맡은 히데오는 폭력을 행하면서 ‘나’에게 비밀로 들려주었던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배우로서 활동하는 히데오는 자신에게 약점이 되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충분히 활용할 줄 알게 되었다.

 

이제 히데오는 그를 찾는 인터뷰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레퍼토리는 늘 비슷하다. 어렸을 때 일본에서 자랐으며 그곳에서 심각한 이지메를 당했다고 고백하고, 그래서 한국으로 이주하여 보낸 학창 시절이 소중하다고 강조한다. 일본에서도 한국인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전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이제 더는 히데오가 아닌 히데오를 히데오라고 부르곤 한다.

 

  비밀이 드러나 더 이상 비밀이 아닐 때 드는 당혹감, 이제 누군가의 비밀을 혼자만 공유하는 대상이 아니게 되었을 때의 씁쓸함을 느껴본 이라면 ‘히데오가 아닌 히데오’가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그의 변화된 모습이 ‘나’가 바라던 대로였고 그것이 어쨌든 ‘나’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라면 ‘나’는 히데오의 변화와 성장을 도와주는 역할을 했음에 위안과 만족감을 가지면 될까. 자신의 옛 연인 ‘영도’를 기준으로 연인에 대한 기준, 바라는 방식을 가졌던 ‘나’가 변화된 ‘히데오’와 홀로 이별한다. 새로운 비밀을 가지게 된 히데오, 이젠 비밀을 공유하는 대상조차 되지도 못한 ‘히데오가 아닌 히데오’. ‘나’의 히데오는 더 이상 ‘나’의 히데오가 아니며 앞으로도 ‘나’가 바라는 ‘나’의 히데오가 될 수 없다. 이제는 주눅들지 않고 매번 로데오 경기를 잘 겨뤄 낼 히데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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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4 ㅣ 소설 보다
권희진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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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소설 보다 : 가을 2024

   권희진, 이미상, 정기현, 문학과지성사, 2024-09-09.

   


 권희진, 「걷기의 활용」


  ‘나’는 ‘걷기’를 시작했다. 대다수에게 알려진 것처럼 ‘걷기’는 육체의 건강에도 필요하지만 정신건강을 위해서도 매우 효과적이다. 이 단순한 걷기를 통해서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구직자 신세인 ‘나’도 생각을 정리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걷기를 시작한다. 목적지가 있지 않은 걷기를 할 때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꼬리물기하는데, 자주 떠오르는 인물이 ‘태수 형’에 관한 기억이다. ‘태수 형’과의 기억은 특별한 사건이 있다거나 강렬한 이미지는 아니다. 태수형과 태수형의 여자친구 K, 그리고 ‘나’가 기억 속의 이야기에 등장하지만 친한 친구들이 그러하듯 어떤 일이 있거나 없거나 그저 술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누고, 취업 문제며 여러 가지로 고되고 복잡한 나날 속 그저 걷기만 할 뿐인데 왜 ‘태수 형’의 이야기로 귀결되는 것일까. 마치 태수형을 이야기하기 위해 걷기를 시작한 것처럼.

 

“나는 형과 같이 늙어가고 싶었다.”

  이 말이 걷기의 멈춤을 가져왔다가 다시 걸어갈 힘을 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이 걷기는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정체성을 명료하게 하는 순간이기 때문이기에, 그렇기에 ‘나’는 산책이 아니라 ‘걷기’였어야 한다. 산책은 ‘나’가 이 기억을 떠올리며 이야기하기에 조화롭지 않다. 목적지가 없을지라도 좀더 직선의 느낌을 주는 이 ‘걷기’가 감정을 모호하게 두지 않고 ‘나’라는 사람을 정리하는데 탁월하게 활용될 수 있다. 마치 미취업생, 백수인 청년 세대의 무력감을 쏟아낼 것 같았던 이 이야기는, 제 존재에 대한 이야기였다. 취업 문제도 연애 문제도 누구에게나 헤치고 나아가야 할 문제인데, ‘나’에게는 태수를 정의하는 일이 더 중요하고 소중하다. 그것이 세상살이에 더 힘겨움으로 작용하는 요인이 되겠지만 어쨌든 그 자체가 ‘나’이기에.

 

이미상, 「옮겨붙은 소망」


  여기서 옮겨붙어야 하는 건 ‘5억 원에 매수한 아파트가 10억 원이 된 것’이어야 하지 않은가. 이런 소망이 현실이 되는 것…을 ‘아, 좋다’고 소망하는 건 나의 시선이고 작가는 다르다.

2억 빌라로 이사하고 시세차익으로 수익을 얻은 n&n's 부부는 ‘남은 시간 동안 한 반도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기로 하고 매번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한달에 300만 쓰면 70대까지 살 수 있을 테고, 돈 떨어질 때까지 살명 되므로. 남편이 사고로 사망한 뒤, 아내는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 n&n's를 통해 앤틱 소품, 빈티지 주얼리를 구매하고 ‘나’가 물건 구매 도우미로 고용된다. ‘나’는 이들 부부의 삶을 궁금해하고 아내의 이 구매행위는 ‘수익창출’이 목적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구매다. 노동시간이 아니라 내가 하고픈 일을 하는 것, 또한 누군가의 시간과 기억이 남아 있는 물건을 구매함으로써 그에 대한 흔적을 기억하는 것이다. 남편에 대한 애도이고 그들이 소망하던 방식의 삶을 진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망했듯 아내 또한 무한한 시간을 살 수는 없다. 그녀 또한 ‘시간’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존재다. 남은 그녀의 주얼리들은, 남는다. n&n's 아내는 이것을 클릭도우미 ‘나’에게 남긴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포기했기 때문에 집에서 구더기가 나오는 줄 안다. 하지만 의외로 구더기는 의욕이 바닥났을 때가 아니라 다시 막 샘솟을 때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 그것은 의욕을 품은 것에 대한, 새 삶을 꿈꾼 것에 대한 처벌처럼 느껴진다.

 

  로또 당첨의 바람 속에도 이 부부처럼 ‘돈을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고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에 대한 소망이 담겨 있다. 어느 누구라도 이런 소망을 갈구할 것이라 생각한다. 시간은 유한하니까, 그 한정된 시간 속에서 보다 여유롭고 행복하게 삶을 살아가고픈 마음. 이들의 소망은 타인에게 ‘전이’되는 걸까, ‘전가’된 걸까.

 


정기현,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이 소설은 거여동의 고가교 기둥에 적힌 낙서를 읽는 것에서 시작한다. 요즘은 담벼락이 많지 않아서 문자로 쓰여진 무언가를 보는 일은 쉽지 않다. 함부로 남의 건물에 낙서를 하면 검찰에게 끌려갈 수도 있다. 엘리베이터에 붙은 인가받지 않은 게시물도 뜯어내면 재물손괴가 되는데, 남의 집 담벼락이며 공공건물에 어떻게 낙서를…… 그럼에도 그렇게 ‘어떤’ 할 말이 있기에 낙서를 하는 걸까. 이런 낙서들은 대부분 욕설이나 혐오, 비방문구다. 굳이 좋은 문구들은 쓰이지 않는다. 소설 속에 씌어진 낙서도 “김병철 들어라”로 시작해 욕설이 기본인데, ‘기은’과 ‘준영은 이런 낙서에 관심을 둔다. 조금 더 적극적인 건 ’기은‘이다. ’기은‘은 잠시 휴직하며 무력감을 겪던 중 가게 된 교회에서 ’준영‘을 만나 소소한 일상을 보내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진다. 그리고, 가벼웁게 동네를 산책하며 오래된 낙서를 발견하고, ’한국오카리나박물관‘ 같은 기이한 장소를 찾거나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기은‘의 일과가 되었다. 동에 곳곳에 새로 발견한 낙서를 볼 때면 ’기은‘은 ’준영‘을 떠올린다. 「걷기의 활용」속 ’나‘가 태수형을 떠올리는 것처럼. “기은은 오늘 모험을 나선 목적이 김병철의 낙서를 밝혀내는 데 있지 않고 준영에게 이 모든 것을 알려주고자함에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연달아 알게 되었는데, 그러자 마음에 슬픔이 깃들었다.”

  “그러자 마음에 슬픔이 깃들었다”. 마치 성경 문구같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제목인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이 찬송가 제목이라서 그런가. 노래 가사를 찾아보니 이렇게 시작한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예수 이름 믿으며/영원토록 변함없는 기쁜 마음 얻으리”

  ’기은‘에게 깃든 슬픈 마음은 좀 다르다고 느꼈는데 이것을 찬송가로 성경으로 빗대어 보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어쩐지 슬프지 않은 것 같은 슬픔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축복받은 슬픔인 것처럼 느끼는 ’기은‘이 아닌가 생각하며, 나는 이것이 슬픔인가 생각했고 역시 슬프다가 아니라 ’슬픔 마음 있는‘이란 말이 맞다는 생각을 했고, 이것은 슬픔을 오롯이 느끼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슬프지 않은 사람들은 슬픈 얼굴을 하고

슬픔 한가운데 선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다 집으로 돌아갔다”

 

「소설 보다 : 가을 2024」속 세 단편은 각각 ’기억하기‘다. 하염없는 걷기이든 동네를 탐색하는 산책이든 빈티지 물건을 구매하든 누군가를 지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기억‘하기 위한 일, 또한 생생히 되살리고 정리하는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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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겨울 2025 ㅣ 소설 보다
박민경.서장원.하가람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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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같은 친절함에 대해


소설 보다 : 겨울 2025

박민경, 서장원, 하가람, 문학과지성사, 2025-12-10.

 

 

  경기도 어느 아파트 거실에서 뱀이 발견됐다는 뉴스를 봤던 날, ‘뱀이 있는 곳’을 생각했다. 편안히 자고 있다가 손을 뻗었는데 이불 대신 뱀이 스르륵 지나간다면 나는 얼마나 기겁하며 떨고 있을까. 아파트 거실의 뱀 출몰 뉴스에 제법 놀랐는데 개미같은 것에 물려 흉터가 사그라지지 않은 상태라 더 그러했을지도 모르겠다. 애완동물로 뱀을 키우는 사람이 있다는 것쯤이야 듣고 본 바가 많지만 새삼 아파트가 ‘좁고, 연결된’ 곳임을 실감케 한다. 화장실 변기 주변에서 허물이 발견되었기에 변기나 배수관을 통해 이동했을 거라니, 변기에서 변기로 이동했을 뱀을 생각하면, 으, 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면서 ‘뱀이 있는 곳’을 생각하다니.

  ‘뱀’은 소설이든 그림이든 딱히 ‘긍정’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뱀들 종은 억울하다 하겠으나 그 이미지는 성경에서부터 가스라이팅된 것 같으니, 탓하려거든 성경으로 몰려가기를. 성경에서부터라… 업보인가.


  「뱀이 있는 곳」을 읽고 난 후 이불 속에서 발견된 ‘뱀’이 아직 더 남은 것처럼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불안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 놀랐다. 계속 찝찝한 마음을 가진 채로 무언가에 휩쓸리는 마음은 늘 불편한데 그 불편함이 무엇이었는가는 작가의 인터뷰에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작가는 이 소설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 『시장으로 간 성폭력』(김보화, 휴머니스트, 2023)이라고 얘기한다. 성폭력범들이 법정에서 ‘변호인’을 고용하여 ‘무죄’나 ‘감형’을 만들어내는 행태에 대한 사실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변호인들’, ‘대형로펌’에 의해 또 한번 철저한 피해자가 된 ‘하진’이 소설에 등장한다.

  ‘하진’은 직장 상사에게 성추행당했지만 무고죄로 맞고소 당하고 대형로펌에 의뢰한 성추행범은 변호인의 ‘탁월한 능력’으로 무죄를 받는다. ‘진실’이나 ‘정의’ 따위보다 은혜로운 ‘의뢰인’이 주신 돈이 ‘정의’인 이들의 행태로 인해 퇴사하고 이전 직장 사람들과도 소원한 채 부모님이 계신 집에 머무르게 된 ‘하진’. 무력한 나날 속 부모님이 ‘비빌 언덕’이 되어 주지 못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하진’을 보고 있자면 동질감이 느껴지면서도 울화통이 터진다.

  이런 상황, 그러니까 뭔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 흔히 벗어날 수 없는 ‘우환’과 곧잘 이어지는 것은 ‘점집으로 향하는 것’이다. 딱히 진지하게 믿어서가 아니더라도 점집에서 듣게 된 말은 은근히 찝찝하게 들러붙는다. 하진 또한 그렇지 않겠는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을 거두어 태우고 굿을 벌이면 상황이 나아진다는데, 자꾸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다. ‘집안에 그런 것이 있나, 없는데, 아니야 뭔가 있는데, 그래, 그거다, 그거’하며 반드시 무언가가 그에 맞는 것이라고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것을 할아버지가 남긴 뱀술이라고 생각한 ‘하진’이 사촌 ‘정인’과 뱀술 처리-그리니까 뱀을 꺼내 묻고 명복을 빌어주기-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하진’의 최선의 방법이 ‘죽은 뱀들의 명복빌기’이기에 드는 무력감, 나아가 그것이라도 해야할 절박함이 전해져 씁쓸하다. ‘하진’은 “한결같이 친철”하며 하진의 “친절함에는 스스로를 못나고 초라하게 느끼게 하는 어떤 것들이 있”는 사람임에도 ‘거대한 자본과 조직’, ‘악인’에게 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개인의 현실이라는 사실에 더욱 더. 아니다. 점사에 따르면 그것은 할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업보다. 나도 모르게 물려받은 ‘저주’가 함께 한 유산. 문제는 할아버지의 뱀술 컬렉션은 하나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죽은 뱀들의 명복을 빌며, 뱀들이 할아버지가 한 행동을 용서해주기를 기도하는 ‘하진’과 ‘정인’의 바람은 이루어졌을까.


정인은 망연한 얼굴로 서 있는 하진을 달랬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 아니겠느냐고, 뱀들이 좋은 곳에 가도록 기도해주면 된다고. 하지만 정인은 스스로도 그 말들을 믿지 못했다. 정말 그뿐이라면 두 사람이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뱀을 하나하나 꺼내 묻는 장면을 상상하며 내가 그들인양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자괴감도 들지만, 이왕 그렇게 하기로 한 것 모든 일이 잘 마무리되기를 바라는데 그것마저도 쉽지 않게 전개되는 상황을 보며 ‘하진’의 ‘한결같은 친절함’이 뜬금 찝찝함으로 남았다. 그건 완전무결함의 다른 말처럼 여겨졌는데 강박같이 여겨져서, ‘하진’이 좀더 세상에 대해 불친절했으면 하는 마음이 강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굳이 친절할 필요는 없지 않나. 대형로펌과 같은 기득권 하에서 좀더 불친절하게 세상을 살기를 바라게 된다. 족제비가 물고 간 뱀 한 마리처럼 저주는 불길한 기운을 두른 채 주위를 맴돌 것이다. 마냥 기도만으로는 마음의 평안조차도 얻지 못한다. 세상엔 뱀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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